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54화 (54/250)

054. 난 내가 한 약속은 꼭 지킨다. ― 2

* * *

츠리리리릿!

요동치는 정령의 기운.

영웅의 포효 때문일까? 내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정령들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엘렌과 라트마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라트마는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엘렌은 원래 방어 계열 마법은 거의 익히지 않는 유저였다.

“난 내가 한 약속은 꼭 지킨다!”

특수 스킬 조합, 엘레멘탈 버스터(Elemental Buster)!!

쩌저저적!

땅바닥이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기운의 폭풍이 라트마와 엘렌을 덮쳤다.

라트마는 가지고 있던 다른 방패를 꺼내 들고 재빨리 방어 행동을 하고 엘렌은 미약한 쉴드 마법을 활성화시켰지만 그런 짓은 다 무의미했다.

이미 라트마의 방어가 너무나 간단히 뚫렸던 그 순간, 그들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꽝!

콰과과과과광!

무시무시한 폭발.

내가 만들어낸 폭발이지만 나도 좀 놀랐다.

‘이거…… 앞으론 사용할 때 조심해야겠군.’

자칫 잘못했다간 힘이 역류해 내가 위험할 뻔했다. 영웅의 포효로 능력치가 상승된 건 좋은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위험이 있었다.

어쨌든 폭발은 엘렌과 라트마를 집어삼켰고, 그 결과 그 두 사람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게임아웃되어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

졸지에 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지휘할 머리를 잃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정말 큰 충격이 확실했다.

그들의 표정만 보아도 그 충격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큰 기술들의 사용으로 마력이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지만 남아 있는 유저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특히 그들이 당황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확실히 몇 명의 유저를 빠르게 정리해 버린 검은 마녀가 나와 함께 싸우는 이상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휴우∼ 이걸로 약간은 귀찮은 일이 자주 생기겠군.”

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엠페러와 이렇게 악연을 맺게 된 이상 아무리 그들이 내 얼굴과 게임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귀찮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쯤은 모두 예상하고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결국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장비 1번.”

스르릉.

난 트윈 문 소드를 꺼내 들며 조용히 남아 있는 유저들을 훑어보았다.

대략 35명 정도의 유저들. 가장 중요한 머리를 잃은 야수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이제부터 난 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한 명씩 차근차근 사냥할 생각이었다.

* * *

“커억!”

스으으으으∼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생명력이 치명타 공격으로 인해 제로(0)가 되는 순간 커다란 워 메이스를 들고 있던 유저는 그 자리에 쓰러지며 빛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마지막 유저를 정리한 건 검은 마녀였다.

난 라트마와 엘렌이 죽은 이후에는 주로 검은 마녀를 보조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검은 마녀의 능력이라면 내가 보조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기에 굳이 내 능력을 더 보여주지 않은 것이었다.

50명에 가까웠던 유저들이 모두 게임아웃 당했다.

그것도 단 두 명에게. 어찌 보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검은 마녀와 나의 능력은 충분히 이 충격적인 사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특히 아무리 나중에 천무칠성이라 불리며 최강의 일인 중 하나가 될 검은 마녀라지만 게임 초반이라 할 수 있는 지금도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었다.

“……고마워요.”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검은 마녀가 나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마녀가 고맙다는 말을 한다?

이건 나도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검은 마녀가 적을 많이 만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차가운 말투. 절대 남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 절대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와 절대 사이가 좋아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혼자였고, 그 결과 친구는 없고 적은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건 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저 녀석이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나섰을 뿐입니다.”

난 일단 이제는 정말 더 이상 검은 마녀와 얽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흐음, 어쨌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도록 하지요.”

난 재빨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검은 마녀가 또 비무 얘기를 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했다.

“…….”

검은 마녀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더 이상 얽히기가 싫어 황급히 돌아섰건만 뭔가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그럼 이만…….”

난 묘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검은 마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그녀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은혜도 갚은 이상 그녀에게 신경 쓸 일은 이제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검은색 로브와 후드 망토를 깊숙이 눌러쓴 그녀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마치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지?’

난 살짝 고개를 흔들며 그런 묘한 느낌을 억지로 털어버렸다. 그것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기에 계속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검은 마녀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예기치 않은 전투. 이 모든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일어난 것이었지만 그것들이 남긴 감정의 여운은 아주 길게 꼬리를 남기며 계속되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기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묘한 기분은 무엇인가? 난 내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 * *

생소한 느낌…….

과거 나는 남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관심을 받았었다.

하지만 난 그걸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얼음공주.

그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난 그 별명이 정말 싫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어리석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늘 웃고, 날 위해 희생하는 척했지만 그 속내에 숨은 검은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 나에게 쏟아지는 기대.

정작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웃지 않았고, 그들에게 얼음공주라고 불렸다.

결국 난 내 의지로 그 세계를 떠났다.

완전히 그 세계를 떠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자유를 찾았다.

그런 내 자유가 가장 완벽해지는 곳은 바로 이곳 ‘ONE’의 세상 속이었다.

이곳은 편안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내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이곳에서 나는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충분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이곳을 지키게 된 것도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동물들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런 게 좋았다.

이곳엔 그런 동물들도 많았고, 그밖에 재미있는 것들도 많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방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그렇게 나는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하지만 난 그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왔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궁금증을 푸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근데 왠지 화가 났다.

그냥 계속 화가 났다.

이게 아닌데, 분명 이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화가 났다.

뭘까?

난 무엇을 원하는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에 난 그냥 어찌할 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다.

‘혜정아,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뭐니?’

난 내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난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검은색 후드 망토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

비록 현실이 아닌 환상이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었다.

“……맑구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내 기분을 더욱 이상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 남자.

이상하게 나를 피하려 했던 그 남자.

갑자기 그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냥 떠올랐다.

그냥, 정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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