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마녀(魔女) ― 3
* * *
“헉!”
불꽃칼날은 갑자기 내가 접근하자 크게 당황하며 나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쉽게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장비 1번”
철컥, 챙챙!
난 재빨리 장비를 바꾸며 두 자루의 검을 이용해 불꽃칼날의 오른팔과 왼쪽 어깨를 제압했다.
퍼퍽!
“으악!”
검을 채 반도 뽑지 못한 불꽃칼날.
이미 그는 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모르겠어? 넌 내 상대가 아니야.”
난 그의 귀 가까이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 개자…… 식.”
곧 죽어도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는 이 성격.
확실히 불꽃칼날이 이런 성격 하나는 제대로인 것 같았다.
“난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 없어. 오늘 보니까…… 나한테 꽤 쌓인 게 많은 거 같은데.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경고를 해주지. 또 나에게 덤비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다. 하지만 잊지는 말아야 할 게…… 난 나에게 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에겐 철저히 악마가 되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걸 알고 계속 덤볐으면 좋겠어.”
난 아주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경고했다.
이건 정말 단순한 협박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난 나와 적대관계에 있는 이들에겐 악마 같은 사람이 되어 주는 성격이었다.
특히 불꽃칼날처럼 포기를 모르고 끝까지 덤비는 녀석들에겐…… 그 어떤 이보다 확실하게 지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난 미리 경고를 해주었다.
이건 일종의 기선제압이자 앞으로 불꽃칼날을 좀 주눅 들게 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아마도 불꽃칼날은 앞으로 나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클로즈베타 서비스에서 그렇게 당하고 이번에 본 서비스에도 이렇게 확실히 당했으니 아무리 끈기 있는 그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크크.”
마지막이 되어 포기라도 한 것인가?
갑자기 불꽃칼날이 웃었다. 마치 최후의 한 수라도 숨겨 놓은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스킬조합, 크로스블레이드+검기난무(劍氣亂舞).
블레이드익스플로젼(Blade Explosion)!
“으아아악!”
꽈과광!
난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는 불꽃칼날을 아주 확실하게 끝내버렸다.
굳이 왜 웃느냐고 묻지 않았다.
뭔가 최후의 한 수를 숨겼다면…… 이미 그 한 수를 피하긴 늦었다는 뜻. 결국 방법은 그 한 수를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얀 가루가 흩날리며 불꽃칼날이 쓰러졌다.
내가 그렇게 불꽃칼날을 쓰러뜨린 그 순간 검은 마녀도 불꽃칼날의 일행 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한 명의 유저를 쓰러뜨렸다.
쿵!
모두 쓰러졌다.
원래라면 검은 마녀가 쓰러지고 불꽃칼날과 그 일행들 일부가 남아 있었어야 했지만…… 내가 끼어들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 입장에서는 은혜를 갚는 것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검은 마녀 입장에서는 다소 황당한 출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흠흠, 그저 지나가다……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며 재빨리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가 않았다.
“……잠깐만요.”
검은 마녀가 나를 불렀다.
내가 전 생애에서 검은 마녀를 만나본 건 사실이었지만 직접 대화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네?”
“무척 강하네요?”
“네??”
뜬금없는 말.
난 ‘왜 도와준 것이죠?’ 아니면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정도의 말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튀어나온 말이 ‘무척 강하네요?’였다.
도대체 검은 마녀는 어떤 인물인가? 저 눌러쓴 후드 아래엔 어떤 무시무시한 여성 유저가 숨어있는 것인가?
왠지 더욱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을 봤지만……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어요.”
“아니…… 그건…….”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이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걸 도와준 건 고마운데…… 실례가 안 된다면 비무(比武)라도 좀 해보고 싶네요.”
‘ONE’에는 당연히 비무 기능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검은 마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좀 강한 거 같은데 한 번 싸워보죠.’였다.
한 마디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놨더니 다시 한번 같이 물에 빠져서 누가 먼저 빠져나오는지 견줘보자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게…… 지금…….”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하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스르릉.
검은 마녀가 천천히 자신의 검은색 검을 뽑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뜻인가? 잔말 말고 그냥 싸우자는 건가?
왠지 불꽃칼날과 싸울 때도 전혀 나지 않던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건 좀 아니…….”
“비켜욧!”
촤아아악!
꽈과과광!
그녀의 뾰족한 외침과 함께 난 빠르게 바닥을 굴렀고 동시에 그녀의 검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 검강은 몇 다발은 되어 보이는 화살들을 소멸시켰다.
짝짝짝.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
굉장히 기분이 나쁜…… 별로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박수 소리였다.
“역시 검은 마녀답군요.”
한 남자가 다수의 유저들과 함께 나타났다.
내가 정말 당황하긴 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유저들이 가까이에 왔는데 그걸 눈치 이렇게 늦게 눈치채다니…… 아무리 저들이 인기척을 고의로 숨겼다고 해도 이건 좀 큰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
검은 마녀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저 검을 조용히 아래로 비스듬히 세워 들고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대략 40명?
아니 50명 정도가 맞는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유저들이 나와 검은 마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유저.
아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별로 좋지 않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는 박수 보내며 나타난 그 유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유저였기에 전 생애에서 무려 7년 동안 게임을 했던 내가 그를 모를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간 이 대륙에서 가장 큰 길드의 대표가 될 인물.
천무칠성 중 한 명은 아니지만 천무칠성의 그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SS급 타이틀을 지닌…… 훗날 40만 명의 유저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받은 전설적인 유저.
철혈의 군주 라트마.
바로 그였다.
난 그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불꽃칼날이 이래서 웃은 것인가?’
난 이제야 왜 불꽃칼날이 그렇게 웃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라트마가 어떻게 불꽃칼날과 연관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 그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검은 마녀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살짝 반신반의했었는데…… 그 제보는 정말 정확한 것이었군요.”
상당히 기쁜 것 같은 표정.
분명히 라트마는 검은 마녀와 뭔가 안 좋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젠장…… 이 아가씨 엠페러와도 충돌했었나?’
검은 마녀가 여러 대형 길드들과 껄끄러웠던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엠페러와도 이런 관계였는지는 몰랐다.
“……쪼잔하고 끈질기군.”
검은 마녀는 매우 짜증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라트마가 못들을 정도로 작지는 않았다.
“쪼잔하고 끈질기다…… 과연 검은 마녀는 통이 크군요. 그걸 포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통 큰 당신이라면 모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라트마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이거…… 정말 자리를 떠야겠군.’
난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아주 복잡한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았기에 빨리 자리를 뜨려고 마음먹었다.
적어도 그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 그만 그간의 사연을 정리하도록 하죠. 이제 오늘 이후로 검은 마녀는 더 이상 ‘ONE’의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오늘 게임을 그만둬야 하게 때문이죠. 덤으로 거기 친구로 보이는 그 쥐새끼까지 같이 한꺼번에 게임을 접도록 도와드리죠.”
어떻게 하면 빨리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는 순간 그 고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쥐…… 쥐새끼?’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그 쥐새끼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난 혹시라도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해보았다.
“여기 쥐새끼가 당신 말고 더 있던가요? 쥐새끼는 당신이 맞습니다.”
라트마의 존댓말은 왠지 막말보다 더 기분 나쁘게 들렸다.
이건 분명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나서서 시비를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특히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인 ‘쥐새끼’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나에게 사용한…… 저 재수 없는 놈을 그냥 무시하긴 좀 힘들 것 같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웃었다.
대 엠페러의 길드마스터이자 대군주가 되실 몸.
하지만 그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나에게 시비를 건 이상 그는 나에게 적일 뿐이었다.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
결국 난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어떤 귀찮은 일에 휘말린다고 해도 분명히 해결할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에겐 철저히 악마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트마, 난 그에게 악마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오늘 그는 분명 평소엔 절대 보지 못한 한 장소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지옥(地獄), 그는 오늘 틀림없이 지옥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