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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The Lord)-49화 (49/250)

049. 마녀(魔女) ― 2

* * *

아무도 그녀의 정확한 게임 이름을 몰랐기에 그녀는 그저 검은 마녀라는 별칭으로만 불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녀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그녀를 만난 적도 있었다.

전 생애에서 내가 큰 위험에 빠졌을 때 아주 우연히 도움을 받았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절대 나를 도운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돕게 되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은혜는 은혜.

난 분명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 여유로움이 익숙한 것도 그때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브와 후드를 날려버린 그녀는 자신의 검을 뽑아 곧장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그녀의 검에서는 거대한 검은색 검강(劍罡)이 쏟아져 나왔다.

검강, 또는 오러블레이드라 불리는 이것은 그녀가 익힌 초월급 스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강력했다.

“커억!”

불꽃칼날은 깜짝 놀라며 바닥을 굴렀다.

그나마 그가 수없이 많은 PvP 경험을 했기에 그걸 바닥을 굴러 피한 것이었지 만약 경험이 부족했다면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꽈광!

“크악!”

물론 덕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길드수뇌부 중 두 명이 검강을 고스란히 맞고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건 그들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익!

검게 타오르는 그녀의 검.

그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21명과 1명의 대결이었지만 기세만큼은 그녀가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훗날 천무칠성 중 한 명이 될 그녀라고 해도 아직 천무칠성이라 불릴 만큼 성장을 하지 못한 만큼 지금 이 상황에서는 불꽃칼날과 그 일행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포위한 이들 중 반수 이상을 저승길 동무로 삼을 작정인 것 같았다.

‘과연 검은 마녀답군.’

난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 악명(?)을 떨쳤던 그녀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대륙에서 좀 유명하다고 소문났던 길드 중 반수 이상과 시비가 붙은 경험이 있고 천무칠성 중 두 명과는 직접 싸우기까지 했었던 그녀. 그뿐인가? 얘기하자면 끝도 없이 많은 사연이 존재하는 그녀.

사실 이런 것만 봐도 엄밀히 그녀와 엮이는 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워낙 여기저기 오해를 많이 만들었기에 혹시라도 그녀와 엮이게 되면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을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 상황에서는 가만히 싸움 구경이나 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그녀가 좀 위험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와 엮이지 않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것을 모두 알면서도 이미 조용히 타이틀을 교체하고 있었다.

‘타이틀 교체 [최초의 영웅]’

나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는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은혜와 원한은 확실히 구분하는 내 성격상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그 은혜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한 그런 은혜였지만 그래도 은혜는 은혜였다.

‘젠장…… 이놈의 성격은 도저히 고칠 수가 없군.’

고칠 수가 없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 기회에 깔끔하게 은혜를 갚고 끝내자. 엮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은혜만 갚는 것이니…… 뭐 특별히 엮일 일도 없겠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은혜만 갚으면 끝이었다.

그 뒤는 조용히 헤어지면 됐다.

“장비 1번.”

스릉!

난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불꽃칼날…… 정말 지독히도 악연으로 엮이는군.’

굳이 내가 불꽃칼날을 싫어한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이렇게 안 좋게만 계속 엮이게 된 것이었다.

뭐, 특별히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혹시 조금 귀찮게 될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PvP에서 이런 귀찮은 관계는 활력소가 될 수도 있었다.

스킬조합, 크로스블레이드+검기난무(劍氣亂舞).

블레이드익스플로젼(Blade Explosion)!

펑!

시작은 화려하게…… 난 확실히 불꽃칼날 일행의 뒤를 쳤다.

PvP에서 뒤를 치는 것만큼 좋은 건 없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의 기습은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입는 타격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입는 타격까지…… 그 데미지는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헉!”

“크악!”

“뭐, 뭐야?!”

당황하는 불꽃칼날의 일행들.

하지만 이건 가벼운 인사였을 뿐이었다.

스킬조합 라이징블레이드(Rising Blade)+속검(速劒)

광속검(光速劒)!!

연계발동, 더블샷(Double Shot!)

불꽃칼날에겐 아주 익숙할 것 같은 스킬을 사용했다. 굳이 도발을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추억을 기억해 보라는 뜻에서 사용한 것이었다.

피핏!

퍼퍽, 퍼퍼퍽!

두 번의 칼질이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며 한 유저의 체력을 대폭 깎아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불꽃칼날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서, 설마!”

현재 나는 클로즈베타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갑옷 위에 허름한 회색빛깔의 로브를 걸치는 것부터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것까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불꽃칼날은 나를 너무나 쉽게 알아보았다.

특별히 입을 열어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단지…… 계속 연속해서 공격할 뿐이었다.

“장비 4번!”

촤아아악! 스르르릉!

스킬조합 배쉬(Bash) + 강격(强擊)

블레이드임팩트(Blade Impact)!!

꽈과광!

“크악!”

엘레멘탈블레이드를 크게 휘두르며 불꽃칼날과 그 일행들의 진형을 반으로 갈랐다.

“이, 이 새끼!!”

불꽃칼날은 확실히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회색로브를 입은 저놈부터 잡아!!”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본 불꽃칼날은 마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심한 반응이잖아?’

나를 기억할 것이고,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이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격렬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하며 단지 도와주려고 했던 내가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다.

‘젠장…….’

원래 원한이란 것이 이런 것이었나?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원한이 불꽃칼날에겐 굉장히 큰 원한이었던 것 같았다.

덕분에 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찮게 되어버렸다.

스킬발동 검면방어(劒面防禦)!

따다당!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공격을 엘레멘탈블레이드의 검면으로 막아내며 빠르게 뒤로 빠져나갔다.

평소에 불꽃칼날이 교육을 잘 시켰던 것인가?

단 한 마디의 명령에 모든 이들이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공격들.

하지만 난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이 매우 사납긴 했지만 내가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제대로 연계공격을 연습한 게 아닌지 군데군데 빈틈이 많이 보였다.

스킬융합 환영보(幻影步) + 쉐도우스텝(Shadow Step) + 일월건곤보(日月乾坤步)

고속회피(高速回避)!!

휘잉! 꽝!

꽈광!

그들의 공격은 허공을 가르거나 애꿎은 땅바닥을 때렸다.

“죽여!!!!”

불꽃칼날은 거의 이성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의 영향일까? 근처에 있던 그의 일행들도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난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엘레멘탈블레이드를 좌우로 휘둘렀다.

따당!

따다당!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막지 못한 공격들은 가볍게 피해냈다.

물론 워낙 거센 공격들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구석으로 몰리는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이들은 지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누구랑 싸우고 있었는지를…… 어찌 보면 이들은 불쌍한 이들이었다.

절대 등을 보여서는 안 될 상대에게 등을 보였으니…… 그 결과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치이이익!

꽈과광!

“으아아악!”

그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들이 최초에 시비를 걸었던 이는 훗날 검은 마녀라고 불리게 될 유저였다.

검은 마녀는 여성 유저라는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고 검 한 자루로 수많은 강자를 꺾은 이였다.

특히 그녀는 전투 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고 적당히 용서해주지도 않았다.

전진, 그리고 승리.

그것만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등을 보인다?

그건 바로 나 좀 죽여 달라고 애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쯧쯧, 명복을 빌어주마.”

난 불꽃칼날을 바라보며 그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 이 자식!!”

덕분에 불꽃칼날은 더욱 흥분했다.

일부러 도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불꽃칼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기에 좀 놀려주려고 한 말이었다.

화르륵!

불꽃칼날은 자신이 들고 있던 양손무기로 강력한 화염을 뿜어내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쓸데없는 흥분이 잔뜩 가미된 엉성한 공격이었다.

스킬발동 블링크(Blink).

파팟!

나는 가볍게 마법을 이용해 불꽃칼날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물론 불꽃칼날은 내가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피했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빠르게 회피했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설마 내가 마법까지 사용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꽈광!

자꾸 죄 없는 땅바닥만 계속 때리고 있는 불꽃칼날…… 흥분을 하지 않고 냉철한 사고로 나에게 덤벼도 상대가 안 될 그였다.

그런 그가 잔뜩 흥분해서 이성을 잃고 덤비고 있으니 제대로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스킬조합 패스트워크(Fast Walk) + 일월건곤보(一月乾坤步)

고속전진(高速前進)!

파파팟!

살짝 옆으로 공격을 피했던 나는 아주 빠르게 불꽃칼날과의 거리를 좁혔다.

스킬조합 회전베기 + 풍차검결(風車劍訣).

폭풍난무검(暴風亂舞劒)!!

퍼퍼퍼펑!

거리를 좁히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나를 막던 유저들을 모두 밀쳐 내버린 나는 아주 손쉽게 불꽃칼날 옆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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