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마녀(魔女) ― 1
* * *
가볍게 세 명의 유저들을 쓰러트리고 킬 포인트를 챙긴 나는 다음 상대들을 찾아 다시 조용히 노을분지 중심으로 이동했다.
노을분지는 예상보다 썰렁했다.
PvP 필드가 이렇게 썰렁한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그곳이 별로 인기가 없는 PvP 필드거나 아니면 한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필드이거나…….
지금 상황을 대충 종합해 보면 후자가 맞는 것 같았다.
우타와에서 엿들었던 대화내용과 지금 방금 쓰러트린 세 유저가 같은 길드였던 것을 보면 분명 이 노을분지는 한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중 같았다.
‘그런데…… 독점하고 있는 것 치고는 무척 조용한데?’
보통 PvP 필드를 독점하면 그 필드 안에서는 그 길드가 곧 법이 되었다.
아무리 좋은 사냥터라도 그 길드의 인가가 없다면 보통 유저들은 절대 이용을 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허락 없이 필드에 들어왔다가는 곧장 척살 당하곤 했다.
어떻게 보면 횡포였다.
하지만 ‘ONE’에서는 이런 횡포도 게임의 일부분으로 인정받았다.
힘이 곧 법이 되는 PvP 필드.
그렇기에 사람들은 적어도 PvP 필드에서만큼은 그 힘의 법칙을 인정했다.
‘이거…… 조금 더 조심해야겠군.’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런 대형 길드와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물론 당연히 이런 대형 길드를 혼자 상대하는 요령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 조심은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다수의 유저들에게 포위라도 당하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을 해서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전투를 이끌어야 했다.
‘어쨌든 재미있겠군.’
난 이런 상황을 좋아했다.
혼자 일인 레이드를 준비했을 때처럼 매우 위험하면서 힘들어 보이는 뭔가를 해낼 때…… 난 그럴 때 가장 큰 쾌감을 느꼈다.
스으으.
나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노을분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비틀어진 차원의 틈을 향해 움직였다.
이동하는 중 중간중간 앞서 처리한 유저들과 같은 길드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몇 명 보였지만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미 사망한 세 명의 유저가 뭔가 경고를 했는지 그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럴 땐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일단 숨을 죽이고 기회를 엿볼 때였다.
‘근데…… 이 녀석들이 왜 이렇게 심하게 경계를 하는 거지? 원래라면 단체로 몰이 사냥이라도 하면서 이 필드를 차지한 길드다운 여유를 보여줘야 할 텐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로 이들이 이 노을분지를 장악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그런 의구심은 비틀어진 차원의 틈을 향해 가면 갈수록 심해졌다.
정확한 원인은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위화감이 들었다.
난 그 위화감을 알기 위해서라도 비틀어진 차원의 틈까지 잠입을 할 생각이었다.
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면 알수록 좋은 법이었다.
정확히 그들이 무슨 곤란한 상황에 빠졌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정말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틀어진 차원의 틈을 향해 가까이 갈수록 경계는 심해졌다. 이 길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형 길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작심하고 잠입을 시도하고 있는 나를 막을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 어떤 도적계열 유저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던 나였기에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이동했을까?
나는 드디어 비틀어진 차원의 틈 입구 앞에 있는 큰 나무 위에 적당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곳은 모든 곳이 훤히 보이는 아주 좋은 명당자리였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다소 황당한 광경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지?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결국 넌 우리를 막을 수 없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 이 남자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이였다.
클로즈베타에서 나와 아주 큰 인연을 가지고 있던 이.
바로 불꽃칼날이라 불리던 그 유저였다.
“…….”
불꽃칼날은 한 유저를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좁은 비틀어진 차원의 틈 입구를 막고 있던 유저.
검은 로브에 다소 답답해 보이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유저.
오로지 보이는 것은 눌러쓴 후드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턱선뿐이었다. 난 그 턱선을 유심히 살펴보고 이 유저가 여성 유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건가? 어리석군, 개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단체를 이길 수는 없다. 내가 오늘 그 불변의 법칙을 여기서 보여주마.”
불꽃칼날은 기세 좋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기세 좋은 말 속에서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주 크게 보면 불꽃칼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저 검은 로브의 유저를 상대하려면 지금 불꽃칼날과 같이 있는 많은 유저들 중 반수 이상은 쓰러질 게 뻔했다.
PvP의 사망은 개인적으로 큰 불이익이었다.
물론 길드전으로 개인적인 손익을 따지는 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손익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분명 조금이라도 서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피해는 더 커질 게 뻔했다.
불꽃칼날이 걱정하는 것도 그런 부분이었다.
만약 여기서 피해가 좀 커져 버리면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리고 있던 다른 길드들이 언제 반격을 할지 몰랐다.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PvP는 매우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바로 먹이가 되는…… 그런 세계였기에 불꽃칼날은 최대한 자신의 길드가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며 항복을 권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이미 저 검은 로브의 유저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인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대충 현 상황을 예측해보면 불꽃칼날의 길드가 초기 대응을 엉성하게 하면서 검은 로브의 유저에게 꽤 큰 피해를 입었고 그제야 불꽃칼날이 길드의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 같았다.
“…….”
검은 로브의 유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말은 별로 필요 없었다. 이미 그 유저는 언제라도 전투를 시작할 준비를 끝낸 느낌이었다. ‘덤빌 테면 덤벼 봐라’는 식의 당당한 태도.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다수를 상대로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도발…… 하지만 왠지 검은 로브의 유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뭐야…… 이 여유…… 어디서 많이 느껴 본 것인데.’
난 왠지 모르게 익숙한 그 여유를 보며 검은 로브의 유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유저인가?
아니면 혹시 많이 들어 봤던 탑 랭커?
어쨌든 왠지 나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유저였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끝까지 벌주를 마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불꽃칼날도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린 듯했다.
그 입장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검은 로브의 유저를 정리하지 않으면 길드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전원 착검!”
챙!
스릉!
철컥!
불꽃칼날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략 20명의 길드 수뇌부들은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한눈에 봐도 모두 200레벨 정도는 되어 보이는 상급의 유저들이었다.
“플레임블레이드의 영광을 위하여! 전원 공격!!”
불꽃칼날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20명의 길드수뇌부들은 일사분란하게 검은 로브의 유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다수 대 소수의 전투에서 볼 수 있는 흐름이었다.
불꽃칼날은 길드수뇌부들이 검은 로브의 유저를 포위하자 아주 여유롭게 자신의 검을 가볍게 돌리며 천천히 그 유저를 향해 걸어갔다.
“후훗, 좋게 말할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검은 로브의 유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매우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건 정말 큰 착각이었다.
‘시작된다!’
난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로브의 유저 주변에서 강하게 요동치는 마력의 진동.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 냄새나는 입은 그만 닫지?”
꽝!
그 유저의 허리에서 한 자루의 검이 뽑히며 드디어 그 유저의 입이 열렸다. 다소 가는 목소리, 생각대로 여성 유저가 확실했다.
그 여성 유저에게서 뻗어 나오는 굉장한 기운…… 그녀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자 깊숙이 눌러쓴 후드 사이로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튀어나왔다.
검은색 갑옷,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검.
그리고…… 사방을 찍어 누르는 강력한 투기(鬪氣). 난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였다.
특히나 한 가지 사연 덕분에 나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무칠성 또는 세븐스타라 불리는 절대강자 중 한 명.
검후(劍后), 마검(魔劍), 철혈검후(鐵血劍后), 소드퀸(Sword Queen)등등 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그녀.
그 어떤 남성 유저보다 강한 검술을 지니고 있었고 절대 물러서지 않았던 그녀…… 그 어떤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던…… 천무칠성 중 가장 신비로운 행적을 보여주었던 그녀.
다소 괴팍한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은 그녀.
수많은 별칭으로 불렸지만 그녀를 가장 대표하는 별칭은 단 하나였다.
통칭 검은 마녀(魔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