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43화 (43/250)

043. 성화(聖火) ― 2

* * *

신전은 밖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거대했다.

온통 붉은색으로만 칠해져 있는 것 같은 신전의 내부, 그 내부 한가운데에는 아주 특이한 것이 하나 존재했다.

불꽃?

불꽃은 불꽃인데 보통 불꽃들과는 다른 하얀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저게 이 신지의 신물(神物)인가?”

나는 천천히 그 하얀 불꽃을 향해 다가갔다.

더 이상 열기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느낌으로는 분명 내가 경험했던 그 어떤 열기보다 강력한 열기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열기가 전혀 괴롭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하얀 불꽃에 다가간 나는 조심스럽게 그 불꽃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스으윽, 화륵!

불꽃을 통과하는 내 손, 하얀 불꽃은 손을 감싸며 타올랐지만 손이 타는 것은 아니었다.

띠링, 성화(聖火)를 발견했습니다.

띠링. 성화의 자아(自我)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화르르륵! 번쩍!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하얀 불꽃이 급속도로 커지며 나를 집어삼켰다.

[……기나긴 세월의 잠을 깨운 건 너인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것은 분명 성화의 자아였다.

“잠을 깨운 것이었나요?”

나는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잠을 깨운 것이다.]

“그럼 제가 큰 실례를 한 것이군요.”

[실례라…… 그렇지는 않겠지. 난 나를 깨워줄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깨워줄 존재라…… 당신은 당신의 의지대로 잠든 게 아니군요?”

[눈치가 빠르군. 그렇다, 난 내 의지로 잠이 든 게 아니었다. 불멸의 인(印)을 지는 크로노스 대륙의 생존자여…… 나는 너와 같은 크로노스 대륙의 남겨진 조각이다. 아주 먼 옛날 한때 난 어떤 존재들에겐 신(神)이라고도 불렸지만 지금은 그 신성(神性)의 대부분을 잃었다. 애초에 나를 창조하신 우라노스 님이 힘을 잃은 순간 나는 소멸되어야 했지만…… 최상급 신력을 최대한 쥐어짜 펼쳐진 ‘전이(轉移)’라는 창조신의 권능은 내 영혼의 한 조각을 이 레아대륙으로 옮겨버렸다.]

“…….”

[그렇게 강제로 전이된 나는 아주 길고 긴 세월 동안 이곳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방금 네가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렇데 왜 아주 길고 긴 세월인 것이죠? 제가 알기론 ‘전이’는 한순간에 일어났고 저와 같은 불멸의 인을 지닌 크로노스 대륙의 생존자들이 이 레아대륙에 나타난 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요.”

[……너는 최상급 신력으로 펼쳐진 창조신의 권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내가 말한 아주 길고 긴 세월은 사실 너희들의 기준을 생각해 말해준 것뿐이었다. 사실성 불멸의 존재인 창조신들에게 세월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그들에게 세월은 단순한 숫자일 뿐이다. ‘전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끊임없이…… 그 영역을 확장하며 미지의 공간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 너는 우라노스 님이 왜 봉인되었다고 생각하느냐? 혹시 ‘전이’는 우라노스 님이 봉인된 후 일어났다고 알고 있었느냐?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정말 잘못 알고 있던 것이다. 우라노스 님은 레아 대륙의 창조신이었던 가이아가 펼친 ‘전이’라는 정신 나간 창조신의 권능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스스로 그 전이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어 봉인을 당하셨다. 실제로 ‘전이’의 대부분의 권능은 지금도 우라노스 님의 신력을 흩어 놓는데 쓰이고 있다. 창조신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금단의 권능을 발동시킨 가이아 역시 자신이 만든 그 ‘전이’에 휘말려 우라노스 님과 마찬가지로 봉인 당한 상태처럼 되어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 ‘전이’라는 권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이것은 전 생애에서도 몰랐던 사실들이었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단순한 게임의 설정이라고만 생각했던 신화가 사실은 수많은 비밀을 가진 이야기였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가이아 본인도 ‘전이’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이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레아 대륙과 크로노스대륙 뿐만이 아닌 세상 전체를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다. 한 창조신의 어리석은 행동은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려 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라노스 님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다는 것이다. 우라노스 님은 ‘전이’의 영향에 완전히 휩쓸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권능을 발휘해 레아 대륙 곳곳에 많은 안배를 해놓으셨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 세상을 바로잡을 영웅들을 위한 안배. 나도 그 안배 중 하나다.]

“……그래서 제가 선택받은 크로노스의 영웅이 된 것인가요?”

[그렇다, 이미 너는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이 될 자격을 얻었기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에게 혹시 의무와 권리 같은 것도 있는 건가요?”

[당연히 있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시련은 단지 앞으로 있을 시련을 이겨낼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을지 모른다. 너는 영웅이 되었지만 사실상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너의 의무다.]

‘역시 메인 퀘스트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군.’

이건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었다. 명색이 메인 퀘스트가 벌써 끝날 리는 없었다. 분명 더 힘든 퀘스트로 연결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권리는 무엇인가요?”

[권리는 내가 우라노스 님에게 받은 안배이다. 나는 너에게 몇 가지 힘과 몇 가지 물건을 줄 것이다. 넌 그것을 이용해 더 큰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호오! 보상 얘기군.’

[의무를 지키지 못한다면 권리 또한 행사할 수 없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불변의 법칙이다. 너는 정말로 진정한 영웅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띠링, ‘신지의 비밀’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띠링, 레벨이 10 올랐습니다.

띠링, ‘영웅의 길’ 퀘스트를 받으시겠습니까?(Y/N)

띠링, 경고합니다. 본 퀘스트는 특별연속퀘스트입니다. 본 퀘스트를 중도에 포기할 경우 퀘스트에 관련되어 얻었던 모든 보상이 소멸됩니다. 또한, 굉장히 큰 불이익도 같이 얻게 됩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많은 시련들을 뚫고 여기까지 와서 계속 연결되는 메인 퀘스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난 크게 대답하며 ‘Y’를 두들겼다.

[불멸의 인을 지닌 크로노스의 생존자여, 그대는 이제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선택은 분명 옳은 것이다. 부디…… 무너져 가는 이 세상의 균형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기를 빈다. 나, 드워프의 신 빌헤이먼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우라노스의 작은 권능을 전하노니 이제부터 그대는 꺼지지 않는 불꽃의 영웅이 될 것이다.]

번쩍!!

화르르르륵!

다시 한번 세상이 밝게 빛나며 내 주변이 하얗게 타올랐다.

띠링, 영웅의 길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띠링, 꺼지지 않는 불꽃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띠링, ‘꺼지지 않는 불꽃의 영웅(S급)’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띠링, 대륙 최초로 봉인되었던 고대 종족의 영혼을 되찾았습니다.

띠링, ‘최초의 영웅(SS급)’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띠링, 이 시간 이후부터 서대륙에 드워프 종족이 나타납니다.

띠링, 영웅의 권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띠링, 영웅들의 물건을 얻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헛!”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얻었다.

S급 타이틀 하나에 SS급 타이틀 거기에 아직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닐 것 같은 몇 가지 보상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드워프 종족의 봉인을 풀었다.

“내 손으로 숨겨져 있던 종족 중 하나의 봉인을 풀 줄이야…….”

메인 퀘스트가 종족의 봉인을 푸는 종족 퀘스트라 불리고 이 메인 퀘스트들을 통해 숨겨져 있던 종족들의 봉인이 풀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그것도 최초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불꽃들이 사라지고 나는 신전 한 가운데 그대로 서 있었다.

달라진 건 내 앞에 4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무지막지하게 큰 방패 하나.

무지막지하게 큰 양손 검 하나.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 권.

평범한 보통 소환수의 알들보다 약 10배는 커 보이는 소환수의 알 하나.

이렇게 네 가지의 물건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게 바로 영웅들의 물건인가?”

한눈에 봐도 보통 아이템들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대단한 비밀을 간직한 것 같은 물건들…… 퀘스트를 혼자서 클리어했기에 이 모든 것들은 나만의 것이었다.

나 혼자 클리어했는데 보상 아이템은 4가지…… 아마도 퀘스트 자체가 그룹을 형성하지 못하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알맞은 보상 아이템 숫자를 4개로 설정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한 가지도 얻기 힘들 것 같은 아이템을 네 개나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초반에는 아이템 운이 없다고 참 많이 투덜거렸는데…… 그게 모두 이런 대박을 위한 준비였던 것 같았다.

“좋아!”

아이템들을 모두 가방에 넣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길 때만 해도 약간의 불안감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여러 가지 행운을 잡으며 이곳까지 온 지금은 분명 확신할 수 있었다.

‘전과는 전혀 다르다!’

비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시작이 달랐기에…… 그 과정도 그리고 그 결과도 달라질 것이다.

다시 살아가는 나의 인생.

그 인생은 확실히 살맛 나는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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