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42화 (42/250)

042. 성화(聖火) ― 1

* * *

“……없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수 없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막을 수 없어.”

반복해서 들려올 뿐이다.

“……이젠 막을 수 없어.”

누구지? 누가 자꾸 말하는 거야?

여긴 어디야?

젠장! 누가 대답 좀 해봐!!

“……지마. 넌 …… 받았어.”

희미한 목소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자꾸 나에게 뭔가를 속삭이지만 난 그걸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

“내가 …… 고작 ……. 이미 …… 변…… 있…….”

답답하다.

왠지 중요한 말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젠장!!

도대체 뭐야!!!!!!!

꽝!

“큭!”

난 오른팔에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또 그 꿈인가?”

난 벽을 강하게 친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근래 밤마다 계속 반복되는 이상한 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오로지 이상한 목소리만 들려오는…… 그 목소리마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상황의 꿈이었다.

“너무 게임에 집중해서 몸이 약해져서 그런 건가?”

최근 들어 체력이 많이 떨어진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특히 일인 레이드를 끝내고 나서는 피로도가 정점을 찍었다. 덕분에 신지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음에도 일단 신지 입구에서 로그아웃을 하고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잠만 잤다.

난 단기간 내에 뭔가 승부를 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충분한 휴식은 내게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은 일인 레이드에 집중하느냐고 제대로 쉬지 못 했다.

그 영향 때문에 계속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그것과는 상관없는 그냥 반복되는 꿈일 뿐일까?

뭐가 맞을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어쨌든 그리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뭐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좀 더 자려고 했지만 막상 이렇게 깨버리자 또다시 잠을 청하기는 좀 어정쩡했다.

“일단 접속부터 해야겠군.”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달려야 했다.

특히 메인 퀘스트의 한 조각으로 예상되는 신지에 대한 기대감은 나를 살짝 들뜨게 했다.

스으으~

빛무리로 이루어진 내 몸이 서서히 가상현실의 세계 속에 재구성되며 나는 현실을 떠나 가상현실의 세계로 들어왔다.

이 과정을 유저들은 ‘환상으로의 귀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단 몇 초 만에 일어나는 단순한 접속과정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한 번이라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그 광경을 잊지 못했다.

마치 현실에 있던 우리들이 이쪽으로 전송되어 옮겨지듯 …… 그렇게 몽환적인 모습으로 모든 유저들이 ‘ONE’의 세계로 접속했다.

잠시 몸이 살짝 뜨는 기분을 느꼈던 나는 가볍게 중심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어차피 데빌사우루스가 다시 나타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보스몬스터들은 보통 짧으면 일주일(현실시간)에서 좀 길면 한 달(현실시간)을 기다려야 다시 나타났다. 특수한 보스몬스터들 중에는 석 달(현실시간)의 재등장 기간을 가지는 것들도 있을 정도였다.

즉, 최소 일주일 동안 이곳은 매우 안전한 지역이라는 소리였다.

입구를 막고 있던 데빌사우루스가 사라지자 신지 중심에 있던 신전으로 가는 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신전.

온통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이 신전은 분명 신지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메인퀘스트라……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이라 더욱 기대되는군.”

천무칠성들 중 몇 명, 그리고 천무칠성만큼이나 유명했던 이들 몇 명. 내가 알고 있기론 정말 선택받은 몇 명의 유저들이 이끄는 그룹들만 이 메인퀘스트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곳에서도 메인퀘스트에 관한 건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기밀을 유지하고 철저히 자신들만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메인퀘스트가 무엇이기에?

소문에 의하면 사라진 종족과 관련된 퀘스트이고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 종족들이 하나씩 추가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인퀘스트를 종족 퀘스트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정작 그 메인퀘스트를 해결한 이들에게 어떤 특혜가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작 그 퀘스트를 해결한 이들이 입을 꽉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이들은 오로지 메인퀘스트를 직접 경험한 이들뿐이었다.

무엇이 기다리는 걸까?

난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천천히 신전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온통 붉은색으로 빛나는 신전의 기둥들에서는 지금까지 신지에서 느꼈던 어떤 열기보다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길은 밖에서 본 것보다 길어 보였다.

대략 1km? 신전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그 길은 왠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후우~ 덥군.”

몸 전체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무지막지한 레이드용 보스몬스터까지 때려잡은 내가 이깟 열기에 걸음을 멈춘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치이이이익!

난 어느새 아이스볼을 만들어 열기를 식히며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약간 뜨겁다.’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몸이 녹아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날 정도였다.

“뭐야…… 데빌사우루스가 마지막 시련이 아니었던 거야?”

츠릿.

거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아이스볼.

그 어떤 수단으로도 이 열기를 사라지거나 줄일 수 없었다.

이 열기는 단순한 뜨거운 기운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내 몸속 깊은 곳에 뜨거운 불이 자리 잡은 것처럼…… 온몸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정말 진지하게 뒤로 물러날 것을 고민할 정도였다.

신기한 건 나는 정말 미칠 듯이 괴로웠지만 정작 체력이나 다른 여러 가지 수치들은 모두 정상이었다.

신전의 중심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600m 정도 같았다.

하지만 600m가 아니라 단 6m도 전진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허억…… 그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신전을 바라보았다.

대충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데빌사우루스가 육체적인 자격을 실험했다면…… 이곳은 정신적인 자격을 실험하는 관문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퀘스트이기에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련들을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내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 번 보고야 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설사 내가 진짜 완전히 녹아 한 줌의 핏물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살아오면서 끈기 하나는 누구에게 뒤진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깟 더위?

비록 그냥 더위라고 말하긴 정말 어려운…… 무지막지한 더위였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다!

빠득.

이가 갈리는 열기.

하지만 난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단 한 발자국만 걸어도 열기는 마치 두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참고 또 참았다.

눈가에 핏발이 섰고 악문 입 사이로는 약간의 빛 가루가 흘러나왔지만 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난 오로지 앞만 보고 계속해서 걸었다.

하얗게 타버리는 것 같은 느낌.

마치 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포기해야 하나?’

머릿속 아주 깊숙한 곳에 존재하던 무의식의 세계에서 아주 요란스럽게 경고 메시지가 울려 퍼졌지만 난 애써 그 모든 것들을 무시했다.

그냥 다 잊었다.

지금 내가 하고있는 건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것도 잊었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고통을 참는지도 잊었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다 보니 몸이 하얗게 타버리는 것도 모자라 내 정신마저 하얗게 타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얼마를 걸었는지,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곳에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난 그 시간 동안 세상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난 누구지?’

문득 떠오른 의문.

그 의문과 함께 난 그대로 쓰러졌다.

쿵!

띠링, 신지의 마지막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띠링, 확인되지 않는 알 수 없는 힘을 얻었습니다.

띠링, 당신은 선택받은 크로노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띠링, 불꽃의 신전에서 당신의 의무와 권리를 들으십시오.

“……빌어먹을!!”

내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아주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난 그렇게 다시 나의 존재를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의문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내가 꾸었던 꿈과 비슷한 느낌의 답답한 존재들 같았다.

“후우, 이거 꿈자리가 뒤숭숭하니까 게임 속에서도 이상한 경험을 하는 것 같네.”

난 애써 그런 것들을 무시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복잡하고 답답했기에 그냥 무시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몸이 어느새 멀쩡하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건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역시 이게 마지막 시련이었군.”

어떻게 보면 1인 레이드보다 더 힘겨웠던 느낌이었다. 1인 레이드는 적어도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조절해 성공 가능성 같은 것을 높일 수 있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시련이었지만 방금 경험한 마지막 시련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진짜 예측이 불가능한 시련이었던 것 같았다.

“선택받은 크로노스의 영웅이라…….”

이건 나도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확인되지 않는 힘은 뭐고…… 의무와 권리는 또 뭐지? 보상이 좀 독특하네.”

말만 들어봐도 단순한 퀘스트 보상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메인 퀘스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천천히 신전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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