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33화 (33/250)

033. 뜻밖의 만남들 ―2

* * *

그렇게 며칠 동안 여러 얘기를 하며 같이 우타와까지 길을 뚫고 오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내가 이나의 관심 분야 쪽으로 많은 지식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나의 성격이 좋은 것일까? 어쨌든 나와 이나는 꽤 궁합이 잘 맞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난 이나를 내 친구목록에 첫 번째로 등록했다.

이나의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정확한 나이를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외모나 말투로 봤을 때 나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소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었다. 이런 인연……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겐 신선한 즐거움을 알게 해주었다.

“흐음…… 신 님이 하려는 그 퀘스트 어려운 거 아니에요? 제가 좀 도와주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이나는 생각보다 배려가 깊었다. 거대 길드들을 상대로 홀로 싸웠다고 해서 고집이 무척 강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또한 그가 대학시절 동양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외국인이란 느낌이 거의 없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혼자 해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리고 이나 님도 할 일을 해야죠!”

확실히 이나의 도움을 받으면 더 편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내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이나와 무척 친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각종 비밀들을 마구 밝히고 다니는 나에게 파티플레이는 좀 위험한 감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나가 나를 도와줄 경우 미래가 또 상당히 바뀔 수 있었다.

미래가 바뀌는 걸 최소화해야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진다. 자칫 미래가 바뀌면 내 예상은 다 틀릴 수 있었기에 그걸 조심해야 했다.

잠깐의 이득을 위해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말 아쉽네요. 어쨌든 신 님을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친구목록에 여러 유저들이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신 님만큼 마음이 맞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이나 역시 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의 말을 100%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나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내 말은 진실이었다.

실제로 내 친구목록에는 이나만 등록되어 있었다.

“하하, 영광이에요!”

이나는 밝게 웃으며 좋아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걸까? 이나는 정말 잘 웃었다.

“아! 참~ 이걸 잊을 뻔했네. 혹시 이게 퀘스트 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이나는 나에게 거래신청을 한 후 낡은 가죽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너무 낡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지도였다.

“이게 뭐죠?”

“흐음, 저도 우연히 구한 건데…… 그 지도의 이름이 ‘아주 오래된 크랄산맥의 지도’에요. 솔직히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지역에서 퀘스트를 하시는 거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좀 많이 낡아 보여도 그거 진짜 오래 고생한 끝에 구한 것이에요.”

이나는 퍼스트헌터라는 호칭을 얻을 유저답게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물건들을 구하는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구한 걸 왜 저를 주세요?”

“헤헤, 사실 뭐 힘들게 구한 건 맞지만…… 마지막에 다른 파티원들과 주사위를 굴렸는데 꼴찌를 하는 바람에 억지로 떠안은 거라 상관없어요. 뭐 어차피 저한테는 필요도 없는 거예요.”

이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얘기했다.

“풉, 알았어요. 어쨌든 그 마음만이라도 고마워요.”

나는 지도를 챙기며 가볍게 웃었다.

“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귓속말이 가능한 지역에 계시면 꼭 연락해주세요.”

‘One’에서 귓속말은 서로 친구등록이 되어 있는 유저들 반경 100km 내에 존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편의기능이었다.

“네, 당연히 그렇게 할게요. 근데 나중에 모른 척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하, 설마요! 걱정마세요. 신 님은 제가 인정한 제 첫 번째 친구입니다.”

친구라고 했지만 아직 편하게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여러 게임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모두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관계, 너무 가벼워 보이는 관계, 거짓이 동반된 관계…… 나는 수많은 게임을 하며 그런 좋지 않은 관계를 많이 맺었었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못 믿고 나 자신만을 믿게 된 까닭도 그런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많은 일을 당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사람들의 진심을 잘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을 얻었다.

이나와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실된, 가볍지 않은, 믿을 수 있는 그런 느낌들이었다.

‘이 감각…… 오랜만이군.’

아주 오래전 다른 게임을 할 때 만났던 몇몇 소중한 동료들에게서나 느껴졌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짧지만 매우 소중했던 만남을 끝냈다.

이나와 쌓은 친분은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전 생애에서 진짜 친하다고 말할 수 있던 유저가 한 명도 없었던 나였기 때문에 이나와의 이런 관계는 색다르면서 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잠시 잊어야 했다.

이제부터는 다시 본격적으로 계획했던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일단 우타와가 바로 앞이니 소비성 아이템을 보충하고 그 동안 모았던 각종 아이템들을 모두 처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식지 않는 불꽃의 언덕’에 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자, 다시 가보자고.”

북적북적.

우타와는 역시 크랄산맥에서 가장 큰 마을답게 많은 유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워프게이트에 마킹을 한 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모아 놓은 아이템들을 처분하고 그 밖에 여러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특히 우타와라면 유명한 장인(匠人) NPC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일명 대장장이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우타와.

덕분에 이곳에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 유저들도 많았다. 모든 장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장장이가 많아지자 덩달아 다른 생산 기술을 익힌 유저들도 늘어났고 그 결과 우타와는 서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진정 제대로 아이템을 강화하려면 우타와로 가라!’라는 격언은 ‘One’에서 아주 유명한 말이었다.

물론 지금은 초반이라 그런 환경이 점점 생성되고 있는 단계였지만 어쨌든 슬슬 아이템 강화에도 신경 써야 했던 나에게 우타와는 딱 좋은 곳이었다.

“각종 검 날 강화해드립니다~!”

“방어구 보충장갑 만들어 드립니다.”

“검 손잡이 개조해드려요!”

“화염속성 인첸트 해드려요~ 한 시간 유지되는 겁니다.”

“각종 총 개조해드려요. 아이템 등급이 너무 높은 건 못해요~!”

역시 기술자들의 도시답게 여러 종류의 생산기술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손님을 찾고 있었다.

‘One’에서 강화란 매우 현실적이다.

특별히 어떤 등급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단지 검의 날을 세워서 공격력을 올린다거나 손잡이의 구조를 바꿔서 명중률을 올리는 것처럼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현실적인 만큼 기술자들의 능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창조성이 없는 기술자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기술자 중 가장 유명한 유저 중 한 명인 암흑의 업그레이더 버그스톤(BugStone)은 이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 예술관련 스킬도 익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기술자는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전투기술을 익혀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보다 생산기술이나 전문기술을 익혀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

진정한 기술자는 어떤 유저들보다 인정을 받았다.

지금 이곳에서 외치기를 하며 자신들의 기술을 갈고 닦는 이 유저들 중 몇몇은 아마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 유저들의 외치기를 들으며 내 아이템을 강화해줄 만한 유저를 찾아보았다.

성급하게 아이템을 강화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 경매장에서 또 한 번 장비를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괜찮은 유저를 찾아만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쉽게 그런 유저가 눈에 띄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기술자들에 대한 정보는 좀 부족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다른 쪽에 편중된 지식을 쌓았던 나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기술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은 가지고 있었다.

수년간 ‘One’을 플레이했던 나의 안목은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흐음…… 다음에 다시 와야 하나?’

오늘은 왠지 좋은 기술자들이 이곳 광장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아직 다들 초보 기술자들이라 좋은 기술자 찾기가 힘든 것일지도…….’

후자의 가능성도 컸다.

만약 후자가 맞는다면 난 안목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좀 더 찾아보고…… 그래도 없으면 그때 수정해도 늦지 않았다.

‘일단 다른 볼일부터 봐야겠군.’

더 이상 살펴보아도 건질 건 없어 보였기에 망설임 없이 경매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여기저기에 외치기를 하며 관심을 끌고 있는 수많은 유저 사이에서 묵묵히 행상(行商)을 꾸려놓고 앉아 있는 한 유저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익숙한 모습.

자리에 앉아 뭔가를 수리하고 있던 그 유저는 분명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누구였지?’

난 잠깐 제자리에 서서 내 머릿속의 정보를 검색했다.

조금씩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

난 생각이 날 듯 날 듯 안 나는 그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을 집중했다.

‘브리트니아, 그래 분명 브리트니아였어. 그곳에서 본 사람인데…… 아! 설마!!’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

그리고 떠오르는 한 유저.

내가 알고 있던 유저가 분명했다.

그는 절대 평범한 유저가 아니었다. 물론 나도 전 생애에서 단 한 번 우연히 브리트니아에서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워낙 유명했던 유저라 희미하게나마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암흑의 업그레이더 버그스톤!’

그는 놀랍게도 앞으로 최고의 강화 기술자로 손꼽히게 될 암흑의 업그레이더 버그스톤이었다.

‘호오! 이거 정말 훌륭한 만남인데?’

강화 기술자를 찾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뛰어난 기술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암흑의 업그레이더가 누구인가?

지금은 저렇게 볼품없는 기술자들 중 한 명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그에게 한 번 강화를 받는 건 유니크 아이템하나를 얻는 것보다 힘들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유명해질 유저였다.

당연히 이건 일종의 ‘득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