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25화 (25/250)

025. 조우(遭遇) ― 2

* * *

“핑계를 만들어야겠군.”

일단 저들보다 먼저 사냥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수를 써서 던전 보스를 잡는 걸 방해해야 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던전 보스에게 덤벼들 엄두가 안 나게 겁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기라도 하게 해야 했다. 가뜩이나 수입도 안 좋았던 던전에서 던전 보스까지 누군가에게 뺏긴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일단 모두 비공개 모드로 바꾸고…….”

‘ONE’은 원래 기본적으로 서로 간의 정보를 절대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이 파티를 맺게 되는 경우에는 파티 옵션을 통해 상대방의 정보를 어느 정도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만약을 위해 그 정보공개 설정을 모두 비공개로 바꾸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유저들이 정보를 잘 공개하지 않는다. 몇몇 자랑하기 좋아하는 유저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바보 같은 유저들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해놓은 이상 저들이 알 수 있는 건 그저 내 겉모습을 통한 정보뿐이었다.

겉모습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난 이미 플레이트아머 세트와 위장용 로브로 몸을 다 가리고 있었고 머리에도 플레이트헬멧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저들이 볼 수 있는 건 튼튼한 검사 장비를 풀셋으로 착용하고 있는 한 명의 유저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름이 문제가 될까?

아니다. 이름은 오히려 더 문제가 되지 않았다.

‘ONE’은 NPC들이건 유저들이건 보통의 게임처럼 친절하게 머리 위에 이름이나 아이디가 떠 있는 그런 평범한 게임이 아니었다.

원래 이름(아이디)은 자신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저가 마음대로 지어낸 가명으로도 충분히 게임이 가능했다.

괜히 무한의 자유도를 가진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좀 악의적인 활용이 가능한 시스템이었건만 이 시스템은 끝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나쁜 의도로 가명 플레이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많은 유저들이 그건 그것대로 롤플레잉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속이는 자가 나쁜 게 아니라 속은 자가 나쁘다나?

별 이상한 말이었지만 어차피 DH 소프트는 이런 걸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곳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알아서 각자 가명 플레이를 즐기며 또한 그것을 경계했다.

어쨌든 나는 대충이나마 정보를 비공개 설정으로 해놓은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었다. 그들도 비공개로 플레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 어차피 물어보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둬야 했다.

“일단 살짝 전투 흔적을 남겨주고…….”

내 특기가 무엇인가?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못 하는 게 없는 나 아닌가? 여러 가지 스킬을 골고루 사용해서 대략 7명 정도의 파티가 큰 전투를 벌인 것처럼 꾸몄다.

전투 흔적은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나야 자동으로 소멸되기 때문에 그들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유지 되리라.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대충 준비를 끝낸 나는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는 손님들 쪽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벽에 기대고 앉았다.

왠지 지친 모습을 연출하기에는 이게 최고의 모습이었다.

“흐음~ 이게 뭐 하자는 짓이냐. 그냥 던전 보스를 포기할까?”

갑자기 살짝 귀찮아졌다.

여기서 이걸 포기해도 나에겐 큰 타격은 아니었다. 단지 좀 아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까지 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카데미 주연상급은 안 되어도 조연상 급은 되는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할 시간이었다.

* * *

그들은 6명이었다.

그들을 딱 보는 순간 견적이 나왔다.

레벨은 대략 45~50 사이. 대충 중간에 동료를 한 명 정도 잃은 것 같았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꽤 무리한 느낌이었다.

이런 유저들이라면 굳이 겁을 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밑으로 들어가면 바로 던전 보스가 있다는 겁니까?”

“예, 그레이트레드웜이라고 무시무시한 놈입니다. 휴~ 저희도 그놈한테 다 당했습니다. 저만 재수가 좋아서 살아남았는데…… 일행들이 다시 올 것을 대비해서 여기다 안전지역을 펼쳐놓고 로그아웃을 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최대한 순진한 척 말해주는 게 포인트였다.

“흐음, 상당히…… 고생하셨나 보군요.”

일행 중 리더로 보이는 마법사는 주변의 흔적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이 위까지 후퇴한 후 입구를 막아서 살았습니다. 조금만 후퇴가 늦었어도 무조건 전멸이었죠. 사실 뭐 전멸이나 마찬가지지만…….”

너무 안타깝다는 말투,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답답해하는 것 같은 말투. 이 부분에서는 요게 중요했다.

귀찮았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던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난이도가 높은 던전인가 봅니다. 며칠 전에 근처를 지나다 이상한 흔적을 발견해 그것을 추적하다가 아주 우연히 이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저희 파티가 처음 발견한 던전이라 호기롭게 전진을 계속했었는데 너무 무리해서 전진했는지 여기까지 오면서 한 명의 동료를 잃었습니다.”

이상한 흔적? 내가 흔적을 남겼었나?

나름대로 흔적을 지우고 입구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이 파티의 헌터계열 유저가 주의력이 아주 깊은 이일 수도 있었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내 예상보다 빨리 다크우드를 발견했고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서 있었다.

‘그저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군.’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그들을 둘러보며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역시 원래 7명으로 이루어진 풀 파티였었다.

풀 파티를 유지했어도 던전 보스를 잡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 파티였다. 지금의 이들이라면 분명 던전 보스를 포기할 것 같았다.

“그럼 일단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전 이렇게 된 바에 로그아웃을 하고 오프라인에서 연락을 해볼 생각인데…….”

당연히 거짓말이다.

난 이들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 로그아웃을 할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 이들의 구성이나 상태로 봤을 때 지금 그냥 로그아웃해도 이들은 절대 던전 보스를 못 잡을 것 같았다.

하지만 뭐든지 확실한 게 좋았다.

“저희도 일단…….”

마법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을 하다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음!?’

난 그 순간 마법사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살짝 드러난 눈빛이었지만 난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흠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런 일은 파티원들과 상의를 하는 게…….”

분명 마법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일은 혼자 결정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난 이미 마법사의 시커먼 속마음을 한눈에 다 꿰뚫어 보았다.

어리석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내가 이 게임을 한 시간이…… 전 생애까지 합치면 벌써 현실로 9년이 다 되어 간다.

게임 속에서 보낸 시간만 해도 20년이 훌쩍 넘는다.

아주 찰나의 순간 보인 눈빛이었지만 난 분명 그 눈빛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었다.

‘아주 이것 봐라…… 이것들 설마 알 빼먹기 팀인가?’

알 빼먹기.

다른 말로 ‘등 떠밀기’라고도 불리는 수법.

느낌상 중간에 죽었을 그 한 명의 동료도 알 빼먹기에 당한 것 같았다. 설사 처음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분명히 마지막에는 알 빼먹기를 했을 놈들이었다.

알 빼먹기의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제물이 될 한 명의 유저를 선택한 후 그를 제외한 다른 모든 파티원들이 한통속이 된다. 그리고 제물이 될 유저와 함께 던전 같은 특수한 지역으로 간다.

PvP존을 제외해도 유저가 죽었을 때 아이템을 떨어뜨릴 수 있는 특수 지역은 많았다. 당장 던전들만 해도 거의 다 특수 지역이었다.

얻는 것이 많은 만큼 위험이 커야 한다. 이건 ‘ONE’에서 늘 강조되는 법칙이었다.

그렇기에 던전 같은 곳에서는 늘 조심해야 했다. 괜히 많은 유저들이 던전에서는 무조건 파티사냥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제물을 던전까지 데리고 오면 거의 일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다음은?

그냥 제물이 죽는 걸 구경만 하면 된다.

힐을 주지 않는다는 않던지, 아니면 노골적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그쪽으로 집중되게 만들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죽게만 만들면 되었다.

그럼 알아서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물론 뭘 떨어뜨릴 줄은 모른다. 하지만 뭐라도 떨어뜨리면 남은 파티원들이 그걸 줍는다.

혹시라도 좋은 아이템을 떨어뜨리면 대박이고 쓰레기 잡템을 떨어뜨리면 그냥 대충 아쉬워하면 끝이었다.

알 빼먹기를 주로 하는 놈들은 별별 핑계를 다 만들어서 가명으로 파티를 구성한다.

그래서 노련한 유저들은 초보유저들에게 가명으로 된 낯선 유저들과의 파티플레이는 삼가라고 경고를 해 주곤 했었다.

이들은 분명 나를 잘 차려진 밥상쯤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특히 순간적으로 내 발 쪽을 보았던 마법사의 눈빛을 난 확실히 기억한다.

한눈에 봐도 레어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부츠.

저들의 눈에는 아마 내가 보물 상자처럼 보일 것이다.

어쩌면 벌써 기도라도 하고 있을지 몰랐다.

제발 부츠를 떨어뜨리게 해달라고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아이템이라도…… 눈에 훤히 보였다.

‘아마 나에게 한 번 같이 던전 보스를 잡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겠지?’

다 예상이 됐지만 조용히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상의를 끝낸 마법사는 나를 향해 다가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흠, 라이데커 님 잠시 상의를 해봤는데…… 저희 파티원들이 한 번만이라도 던전 보스를 공략해보고 싶어 하네요. 혹시 폐가 안 된다면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마침 저희 파티에 탱커가 부족한데…….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만약 잡지 못한다고 해도 저희끼리 돈을 거둬서 라이데커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라이데커는 내가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이들은 지금 나를 낚기 위해 근사한 미끼까지 던지고 있었다.

여기에 낚이면 바로 알 빼먹기에 당하는 것이었다.

“흐음,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나는 낚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낚여 주었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저흰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허리를 거의 90도 각도로 꺾으며 인사까지 하는 놈들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애쓴다. 애써.’

알 빼먹기는 게임이 서비스되고 초반에 성행했던 비매너 플레이였다. 시기상 딱 지금 즈음이 알 빼먹기가 최고로 극성을 부릴 때가 맞았다.

전 생애에서도 알 빼먹기로 유명한 팀들이 몇 있었다.

물론 이 시기는 당시 내가 ‘ONE’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 팀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혹시 이 녀석들도 그 유명했던 팀 중 하나 아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자, 그럼 들어가 보죠. 이거 정말 기대되네요. 전 필드 보스는 몇 번 봤어도 던전 보스는 오늘 처음 보는 겁니다.”

괜히 바람 잡는 몇 명의 유저들…….

하아, 이거 속아주는 것도 힘든 일이다.

“자 모두 파이팅!”

어처구니없는 파이팅 구호까지 등장했다.

‘하아, 어쩌다가 게임에서 제일 먼저 파티를 맺게 된 유저들이 겨우 이런 쓰레기들이 된 거지? 내 인생도 참…… 기구하구나.’

물론 정상적인 인생을 동경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놈들과 인연을 맺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뭐…… 다시 한번 사는 인생인데 평범하면 재미가 별로 없겠지. 후훗’

그렇다, 즐기면 되는 것이다. 막간의 여흥? 그쯤으로 생각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난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슬쩍 웃었다.

사악한 미소.

아마 이들이 이 미소를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볼 수 없었다.

이미 나를 속였다는 것에 들떠 내가 무슨 아이템을 떨어뜨릴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이들에게 나를 살펴볼 꼼꼼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한 번 알 빼먹기를 해볼까?’

난 소심하게 여섯이 한 명을 등쳐먹는 짓 같은 건 못 한다.

대신 혼자서 여섯을 등쳐먹는 건 할 수 있다.

‘던전 보스랑 저 녀석들이랑 어떤 녀석이 더 좋은 아이템을 떨어뜨릴까?’

이것도 고민이라면 고민일까?

그그그긍!

던전 4층으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난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늘에 하는 감사 인사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간식들에 대한 감사 인사…… 사람은 자고로 공짜로 무엇을 얻었을 땐 이렇게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했다.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

나는 놈 위에는 더 높이 나는 놈이 있는 법.

이들은 오늘 임자를 만났다.

‘쓰읍, 다 죽었다고 복창해!’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던전 보스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 이들은 알까? 자신들이 맛있는 먹이로만 생각한 내가 사실은 자신들을 한입에 삼켜줄 포식자라는 것을…….

뒤바뀐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 아마 이들은 그것을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