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조우(遭遇) ― 1
* * *
다크우드 3층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은 50~55였다.
이들 역시 나에겐 좋은 사냥감일 뿐이었다.
이번 층에서도 역시 사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레벨이 오르고 스킬 숙련도도 오르고 모든 게 문제없었다.
하지만 사냥은 잘 될지 몰라도 요즘 들어 스킬조합이나 연계기술 같은 것을 전혀 연구하지 못했다. 사실 난 최근 들어 갑자기 떠오른 한 가지 생각 때문에 뭔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처음 이 직업을 얻었을 때 난 제한된 생명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일단 죽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지만 혹시 죽음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했었다.
당시 가장 쓸 만한 몇 가지 방법이 생각났었다.
가이아 신전 최고사제들이 내릴 수 있다는 부활의 축복이나 불사신공(不死神功)이라는 무공을 극성(숙련도 200)으로 익힌 유저에게 주어지는 타이틀인 불사인(不死人).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이 두 가지였다.
하지만 부활의 축복은 가이아 신전의 종으로 일하겠다고 맹세한 신전 소속 직업을 얻은 이들 중 신전 충성도가 매우 높은 이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 효과도 12시간(게임시간) 유지에 36시간 쿨타임이었다. 그뿐인가? 한 번 받을 때마다 들어가는 돈도 무척 많았다.
죽는 즉시 삼 분의 일의 체력과 마력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은 축복이었지만 그것을 받고 돌아다니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불사신공.
이건 부활의 축복보다 더 불가능했다.
일단 불사신공은 초월급 무공이다. 천무칠성 중 불사마군(不死魔君)이라 불렸던 한림(韓林)의 독문무공.
그가 어떻게 불사신공을 익혔는지 알려진 건 하나도 없었다. 불사인 타이틀의 효과는 플레이어가 사망했을 경우 약 1분 후 다시 부활시켜주는 능력이었다.
체력과 마력은 50%까지 회복한 상태로 부활했다.
대략 몸을 1분간 다시 재생시킨다는 설정인데…… 어쨌든 부활은 부활이었다.
이 효과의 쿨타임은 한 달이었다. 즉, 한 달에 한 번 부활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내가 이 타이틀을 구할 가능성은 제로(0)였다.
불사신공을 얻는 방법도 모르고, 한림이 지금 어디서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이게 과연 내 직업창에 표시되어 있는 죽음 횟수를 올리지 않는 부활인지 그걸 확실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즉시부활이라면 확실히 횟수가 올라가지 않을 테지만 이건 즉시부활이 아니라 좀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 다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밖에도 몇 가지 비슷한 건 생각났지만 대부분 그 효과를 거의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얻을 가능성도 지극히 낮았다.
결국 고민 끝에 생명을 늘리는 건 포기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갑자기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대미궁…….”
대미궁(大迷宮).
그것은 말 그대로 커다란 미궁이었다.
그 입구만 해도 무려 4,000곳이 넘는다고 알려진 미궁. 지하로 뻗어 있는 거대한 이 미궁의 크기는 감히 예측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커다란 미궁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그 크기만큼이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던전이라 할 수 있었다.
대략 시간을 계산하자면…… 지금 이 순간부터 약 11개월(게임시간) 후에 서대륙에서 발견된 공포의 미궁.
그 미궁이 최초 발견되었을 당시 ‘대미궁의 수수께끼’라는 이벤트가 발생했었는데 무려 사 백 만에 가까운 유저들이 그 이벤트에 참가해 미궁 안으로 들어갔었다.
단일 이벤트로는 거의 최대 규모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대미궁이 얼마나 크고 복잡했으면 그 사 백만의 인원을 다 받아들였건만 그 안 통로에서 서로 조우하는 팀은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인가?
무려 사백 만의 인원을 전부 받아들이고 마지막에는 겨우 천 명만 살아나가는 것을 허락한 대미궁.
천 명, 팀 숫자로 하면 대략 100여 개 팀.
더 놀라운 건 이 100여 개 팀 중 대부분이 99층으로 이루어진 대미궁의 절반도 내려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저 이벤트 기간인 세 달(게임시간) 동안 생존한 게 전부였다.
가장 잘나갔던 팀의 성적이 80층이었다.
그렇게 이벤트가 종료되었었다.
나중에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결국 대미궁은 여러 팀에게 정복당했지만 그건 98층까지 만이었다.
그 누구도 99층에는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첫 이벤트에서 굳게 닫힌 99층으로 가는 지하 입구는 완전히 봉인되어 있었다.
결국 대미궁은 그렇게 영원히 정복하지 못한 던전 중 하나가 되었고 사람들은 99층에 존재에 대해 잊어갔었다.
나도 똑같았다.
대미궁은 분명 몇 번이고 가본 곳이었지만 99층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바로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잊었던 기억을 며칠 전 너무 우연히 기억해냈다. 정확히 말해 내가 기억해낸 것은 바로 ‘그것’…….
‘그것’은 유저들 사이에서 그 효과가 뭔지 궁금하다고 얘기가 오고 가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은 몇 가지 물건 중 하나였다.
“그 대미궁 이벤트…… 그때 보상 중에 분명 ‘그것’이 있었어.”
‘그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아무도 얻지 못한 것이었기에 확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래, 어차피 그 이벤트는 참가하는 게 큰 이익인 이벤트니까…….”
대미궁 이벤트라면 사람들 입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큰 이벤트였다.
당연히 참가해야 했다.
“99층이라…… 이거 괜히 미래를 바꾸는 거 아냐?”
살짝 불안했다.
물론 내가 99층을 클리어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클리어했다고 가정하면 왠지 미래가 바뀔까봐 불안했다.
“아니지,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 수는 없지.”
아주 오래된 속담처럼 바뀌는 미래를 두려워해서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지 않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대미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지금의 레벨과 장비로는 너무 부족했다.
물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난 대미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적어도 익스퍼트까지는 레벨을 끌어올리고 장비들도 레어급을 많이 구해놓을 생각이었다.
“마스터는 무리일지 몰라도 익스퍼트는 넘어야지.”
이제 다시 사냥에 집중할 때다.
내가 잡아야 할 두더지 같은 모습을 한 몬스터들. 앞쪽에 또 한 무리가 보인다.
“이번엔 얼음땡 놀이로 가볼까?”
한동안 불과 뇌전, 신성 속성을 사용했으니 이제는 좀 색다르게 얼음과 암흑 속성을 이용해 몰이사냥을 해볼 생각이었다.
스킬 빙계마법 아이스에로우(Ice Arrow) 다연발(多連發)!!
스킬 암흑마법 소울포이즌(Soul Poison)!
수십 발의 아이스에로우를 난사하며 그 화살들에 광범위한 하급저주마법을 곁들였다.
둘 다 하급마법이었지만 동시에 두 가지가 한꺼번에 발동하며 그 위력은 상당해졌다.
파파파팟!
허공을 수놓은 하얀 얼음조각들.
다크우드에 때아닌 한파가 몰아쳤다.
* * *
이 던전에서 폐관수련을 한 지 벌써 27일(게임시간),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다크우드에는 특별한 비밀 같은 건 없었다.
기껏해야 저렙 던전이었기에 그런 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비밀은 없지만 아직 한 가지 남아 있는 건 있었다.
모든 던전에 무조건 존재하는 던전 보스(Boss).
대부분 네임드 몬스터가 던전 보스인 경우가 많았지만 가끔은 특별한 던전 보스들도 존재했다.
다크우드는 평범한 네임드 몬스터 쪽에 속했다.
내 기억으로는 이곳의 보스몬스터는 그레이트레드웜(Great Red Worm)이었다.
레드웜 중에서 특별나게 큰 그레이트레드웜.
레벨이 아마 한 65 정도 되는 네임드 몬스터일 것이다.
그 정도 네임드 몬스터라면 50~60레벨의 유저들 7명 정도가 파티를 해서 잡는 게 맞았다.
현재 내 레벨은 58.
보통의 경우라면 무조건 잡는 걸 포기해야 했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라면 가능했다. 조금 힘들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높았다. 결정적으로 이동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고 자신이 지키는 일정 지역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위험은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후딱 잡고 다음에 생각해 둔 장소로 이동을 해야겠군.”
어차피 이제 3층에서의 사냥도 거의 다 정리되었다.
솔직히 27일 동안 던전에서 거두어들인 수입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보너스 획득률까지 있었는데 겨우 유니크(보라색) 신발 하나 건진 것이 다다.
레어는 몇 개 구했지만 옵션이 다 별로다.
세트 레어라도 구했으면 모를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레벨이 잘 올랐기에 만족하는 거지 아니었으면 아마 중간에 이 던전에서 나갔을지도 몰랐다.
이름 모를 용사의 판금 장화(유니크[Unique])<판금>
: 어느 이름 모를 용사가 남긴 신발. 안쪽에 XXX기사단 단장 로XXX라고 적혀있다. 판금신발이지만 굉장히 가볍고 뭔가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능력: 내구도[500/500] 방어력[70] 힘[10] 민첩[10] 매력[10] 마법방어[5]
특이사항: 경량화 마법과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 실용성이 아주 뛰어나다.
지금 내 레벨에서는 무척 좋은 신발이었다.
특히 판금이라 나에게 딱 어울렸다. 내 직업은 특별히 방어구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근력 또한 최고 수준이었기에 판금종류의 갑옷을 입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신발은 대체로 내 마음에 들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도대체 신발에 보존마법을 왜 건 거야?
보존마법 같은 것을 걸 시간에 근력추가 마법 같은 것을 걸어놨으면 실용성 면에서 얼마나 더 좋은가?
경량화 마법이야 뭐 가벼우면 아무래도 민첩 보정(자신이 지니는 장비의 무게에 따라 민첩이 마이너스 된다.)에 영향을 미치니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었지만 보존마법은 실용성 면에서는 완전 꽝이었다.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이놈의 보존마법 때문에 너무 튀는 신발이 되었잖아.”
내가 더 마음에 안 드는 건 이점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니크 판금장화.
이건 대충 봐도 나 좀 비싼 장화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괜히 사람들 주목을 받는 건 별로 좋지 않다.
늘 말하지만 앞에 나서면 꼭 먼저 공격당하게 되어 있었다.
“쳇, 사람들 많은 지역으로 갈 때는 갈아 신어야겠네.”
아무리 옵션이 좋아도 원칙은 원칙이었다.
어쨌든 건진 게 이 판금장화 하나다 보니 보스몬스터에서는 꼭 뭔가 하나를 건져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함~ 일단 오늘은 여기다 안전지역을 설정하고 로그아웃해야 하나?”
살짝 피곤함을 느낀 나는 보스몬스터 공략은 내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접속제한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한시간 때문이 아니라 피곤함을 좀 풀기 위한 로그아웃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조금도 쉬지 않고 접속제한시간을 풀로 채우면서 게임을 했더니 살짝 피곤한 게 사실이었다. 난 철인(鐵人)이 아닌 이상 일정한 휴식은 분명 동반되어야 했다.
철컥!
결계석 4개를 꺼내 든 나는 천천히 안전지역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안전지역을 설정하던 나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이상한 감각이 내 몸으로 전해졌다.
흠칫.
그것은 내가 익힌 헌터스킬 중 정밀촉각(패시브스킬)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다.
“어라?”
난 잠깐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킬조합 헌터스킬 감각개방(感覺開放) + 마법기본스킬 정신집중
오감증폭(五感增幅)!!
난 유명한 헌터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던 대표적인 스킬조합 오감증폭을 사용했다.
……콰……앙!
던전 내부의 떨림이 느껴지며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던전에 있다!”
이건 분명 유저들이 몬스터와 싸우는 소리였다.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미래가 바뀌었다. 원래 이 시기에 이곳이 발견되는 일은 없었다. 혹시 전 생애에서 내가 모르게 먼저 발견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등록을 안 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지금 이 시기의 유저들의 대부분은 던전을 발견하고 등록을 한 후 명성을 얻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요건을 감안했을 때 이곳은 적어도 몇 개월은 더 지나야 발견되는 곳이었다.
“젠장!”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약간 당황스러웠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건 딱히 별로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바뀐 미래는 나도 모르는 미래인 것을…….
“로그아웃은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여기서 로그아웃을 했다간 내가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먹이 하나.
던전 보스를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던전 보스의 리셋 시간은 각각의 던전마다 달랐지만 최하가 게임 시간으로 6일이었다.
일단 다른 유저들과 나의 거리는 대략 직선거리로 200m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굴곡이 좀 있는 나무동굴 안이었고 그들은 내가 있는 곳까지 오려면 리스폰(Re Spawn)된 몬스터들을 잡고 와야 하니 시간적으로 대략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10분이라면 보스를 먼저 혼자 잡아버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