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전직 완료 ― 1
* * *
또다시 시간이 흘러 이곳에서 혼자만의 수련을 시작한 지 10개월이 흘렀다.
현실 시간으로 따져도 3개월이 넘는 긴 시간. 앞서 동대륙에서 했던 준비와 서대륙으로 넘어오는 과정까지 모두 합치면 게임시간으로 24개월이 흘렀다.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정확히 8개월이 흐른 상태.
이제는 진짜 상위랭커들이 앞으로 치고 나가며 수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 가까워졌다.
여유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 나도 슬슬 레벨을 올려야 했다. 하지만 아직 난 직업이 없었다.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레벨을 올리는 건 무의미했다.
직업을 얻어야 했다.
그동안 스킬 수련을 하며 간간이 이런저런 경험치를 얻어 현재 레벨은 20이었다.
턱없이 낮은 레벨.
어차피 1차 전직은 레벨 15~50 사이에 아무 때나 하면 되는 것이니까 전직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레벨을 더 올리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어설프게 레벨을 올리기 위해 움직인다면 자칫 그동안 치밀하게 계획하여 균형을 유지해 오던 스킬들 간의 밸런스가 깨어질 수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직업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내가 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린 스킬은 총 29개.
그리고 나머지 45개는 모두 익스퍼트의 경지를 넘겨놓았다.
난 왠지 모르게 30개의 스킬을 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리면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이건 진짜 그냥 예감일 뿐이었다.
내가 알기로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10개 정도의 스킬을 집중적으로 수련한다.
최상위 랭커 중 전능자 프로이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랭커들이 10~15개의 스킬만 죽어라 갈고 닦는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었다.
사실 숙련도를 올리는 스킬이 20개를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정말 난감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게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키우지는 않지만 가끔 사용하면서 유지시키는 보조스킬 같은 것들까지 합치면 가지고 있는 스킬의 숫자가 약 30개까지 늘어나지만 보조스킬은 말 그대로 보조스킬일 뿐이었다.
보조스킬까지 마스터의 경지까지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건 익스퍼트까지만 올려도 대단하다고 인정받았다.
그만큼 스킬 숙련도라는 건 쉽게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난 현재 29개의 스킬을 마스터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45개도 익스퍼트의 경지다. 만약 이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아마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물론 각종 편법으로 만들어낸 불안정한 결과였다.
사실 여기서 조금만 삐끗해도 그동안 올렸던 숙련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난 그렇게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현재 99.998에 머무는 스킬 하나를 어떻게 해서라도 마스터의 경지에 올려놓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조심해야 할 건 이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서 다른 마스터 경지에 간신히 올라 있는 스킬을 다시 아래로 잡아 내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앞서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한 스킬이 한 경지에서 한 경지로 넘어가는 단계에서는 다른 스킬들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이것도 상성 시스템에 하나인 것 같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난 오른손에 아이스스피어(Ice Spear)를 생성시켰다.
치이익!
오른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제 이 수증기들을 길고 뾰족한 창 모양으로만 만들면 아이스스피어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레벨이 낮아 숙련도가 높아도 기껏해야 3써클 마법까지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스터 경지의 숙련도까지 올리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스킬의 난이도가 아니었다.
비록 난이도가 낮은 스킬일지라도 얼마나 집중해서 완벽하게 스킬을 완성시키는 지가 중요했다. 그렇기에 난 최대한 완벽한 아이스스피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쩌저적!
길고 날카로운.
보통의 것보다 더 크고 단단해 보이는 아이스스피어가 내 손에서 만들어졌다.
띠링, 완벽한 아이스스피어 마법을 완성했습니다.
띠링, 빙계마법 숙련도가 0.006 상승했습니다.
띠링, 빙계마법 숙련도가 100.004가 되면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보다 강력한 빙계마법을 구사하실 수 있습니다.
올랐다.
드디어 빙계마법 숙련도도 마스터했다.
이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스킬 숫자는 30개.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
[끝없는 탐구. 끝없는 도전. 너는 무엇을 알고 싶은 건가?]
변화가 있었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좀 많이 다른 이상한 메시지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불가해(不可解)의 길. 너는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그 길을 가려는 건가? 하지만 그 길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험난하다. 자칫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넌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도 그 길을 가려는 건가?]
전능자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기회가 왔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내 주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얀색의 메시지만 허공에 새겨질 뿐이었다.
‘뭔가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건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너에겐 선택할 기회가 있다. 지금이라도 한 발자국 물러난다면 넌 ‘전능자’가 되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겠다면…… 그땐 상상하기 힘든 새로운 힘과 마찬가지로 상상하기 힘든 새로운 시련을 맞이할 것이다. 자, 이제 선택하라. 나아가겠는가? 아니면 물러나겠는가?]
뭔가 굉장한 협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난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전능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난 황소를 찾아 여기까지 온 나였다.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난 나아간다!!”
큰소리로 외쳤다.
내 눈빛 속에는 무조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넌 선택했다. 넌 나아가길 원했다. 이제부터 네가 가야 할 길은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길. 너는 큰 힘과 큰 시련을 동시에 소유한 존재가 되었다.]
띠링, 당신은 ??????를 직업으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직업의 이름은 당신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 (Y/N)
직업 이름조차 내가 정하는 것이다.
‘ONE’에 이런 직업이 존재했었나? 상상을 초월하는 형식의 직업이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이건 딱 날 위한 것이었다.
난 침착하게 손바닥으로 ‘Y’를 눌렀다.
띠링, ??????을 직업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띠링, 직업의 이름을 직접 선택하여주십시오. 단, 비속어나 형식에 어긋나는 이름은 등록하실 수 없습니다.
“더 로드(The Lord)!”
난 망설임 없이 내 타이틀과 같은 이름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띠링, 직업 이름 ‘더 로드’를 등록합니다. 맞습니까?(Y/N)
난 이번에도 역시 강하게 ‘Y’를 후려쳤다.
띠링, 등록되었습니다.
끝났다.
난 드디어 직업을 얻었다.
띠링, 직업과 타이틀이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당신의 매력이 5% 증가됩니다.
엥, 이건 뭔가?
그냥 ‘더 로드’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어서 이름을 정한 건데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든 이건 보너스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 끝났다.
내 직업의 이름 ‘더 로드’는 게임을 플레이하면 처음 나오는 문구 그대로 세상의 정점에 설 한 명, 그 한 명은 내가 될 것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흐음, 그럼 이제 내가 가진 직업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살펴볼까?”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워낙 겁을 많이 줘서 살짝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은 했다.
후회는 미련한 이들이나 하는 것, 일단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직업창 오픈!”
난 호기롭게 외쳤다.
내 직업 ‘더 로드’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더 로드(The Lord)’
: 정점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길. 하지만 작은 실수 몇 번으로도 끝없이 추락할 수 있는 길. 당신이 가려는 길은 그런 길이다. 명심하라! 당신은 지금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노력하라! 최고에서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라. 부디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기본능력: 모든 스킬(무공)에 상성이 사라집니다. 당신은 모든 스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자질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스킬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이사항: 레벨을 올리기 위한 필요 경험치가 남들에 비해 30% 증가합니다. 죽음에 대한 페널티가 강화됩니다. 사망 시 보통 유저들 보다 경험치 와 스킬 숙련도가 두 배 더 하락합니다. 접속제한 시간이 3일에서 6일로 늘어납니다.
총 사망횟수가 네 번이 되면 캐릭터의 모든 것이 초기화됩니다. (사망횟수 : 0)
특수능력: ‘스킬융합(融合)[모든 유저가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스킬조합’의 발전형 능력. 최대 세 가지의 기술을 한 가지 기술로 합칠 수 있다. 단, 마력(내공)소모는 그 세 가지 기술들의 마력소모량을 모두 합한 수치의 1.5배가 된다.]’
특수기술: 오른팔을 용마수(龍魔手)로 변형시킬 수 있다.[게임시간으로 하루에 두 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다.(용마수로 변형된 팔로 스킬(무공)을 활성화시키거나 일반 공격할 경우 근력, 민첩 +100%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손을 방어에 사용할 경우에는 방어력 +200%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용마섬(龍魔閃) [CT(쿨타임):4분]이란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현 상태: 1차 전직 완료.
“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능력치는 정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일단 특수능력과 특수기술은 전직을 거듭할 때마다 발전되는 기술들이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실상 이 두 가지 때문에 직업이 필요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가 얻은 이 직업은 달랐다. 특수기술이나 특수능력도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이 바로 기본능력이었다.
모든 스킬의 상성이 제거된다!
이 말의 뜻은 곧 난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처럼 살얼음판 걷듯이 숙련도 수련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난 왜 이 직업이 가장 정점에 가까운 길을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표현되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였다.
이 능력들만 잘 활용하면 난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물론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직업은 무지막지하게 좋은 장점만큼이나 무지막지하게 두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치 30% 증가.
이건 레벨 업에 큰 지장을 가져올 게 분명했다. 뒤로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레벨 업인데…… 이런 식의 페널티는 과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더 좋지 않은 건 따로 있었다.
경험치야 좀 더 열심히 노력하면 끝이었다. 그러나 내 목숨은 그게 아니었다.
내게 허락된 죽음은 세 번, 나에게 이제 남은 생명을 네 개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네 번째 죽음은 영원한 안식을 의미했다.
이건 정말 두려운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페널티야 그렇다 치고 네 목숨이 네 번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가슴이 떨렸다.
솔직히 앞으로 죽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음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이건 살 떨리는 줄타기였다.
정점에 서느냐? 아니면 나락에 떨어지느냐?
하지만 난 절대 나락에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나락은 이미 한 번 경험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만이라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전생은 아주 깊고 깊은 나락이었다.
“재미있겠어.”
난 웃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즐길 필요가 있었다.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좀 더 철저히 준비하고, 좀 더 철저히 수련하는 거다.
그리고 확실히 남들보다 더 강해지는 거다.
그럼 된다.
두려워할 것 없었다. 이 정도 시련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내가 얻은 이점들은 다 부질없는 것인지 몰랐다.
얻는 것이 많았던 것만큼 큰 위험을 짊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렇기에 난 웃을 수 있었다.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잖아?”
길고 긴 준비과정이 모두 끝났다.
지루하고 힘들 수밖에 없었던 길고 긴 여정.
하지만 난 이겨냈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부터 남은 건 진짜 게임을 즐기는 것이었다. 지금 단계에서 난 분명 남들보다 뒤처진 게 꽤 많았다.
뚝, 뚜둑.
난 가볍게 경직된 몸을 풀었다.
지긋지긋한 스킬 숙련도 수련도 끝났으니 이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그건 당연히 몬스터를 때려잡고 레벨을 올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