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로드(The Lord)-3화 (3/250)

003. 클로즈베타 서비스 ― 2

* * *

“키엑!”

털썩.

떨어지는 오크의 머리.

붉은 피 대신 하얀빛 가루가 흩날리며 오크가 쓰러졌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게임 시스템은 별로 친절해 보이지도 않는 음성으로 레벨이 올랐음을 알려주었다.

클로즈베타 서비스를 이용하면 할수록 왜 사람들이 초기 ‘ONE’의 클로즈베타 서비스 때 극악의 평가를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그 ‘ONE’의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게임이 어떻게 그런 게임으로 변할 수 있지?”

난 이젠 정말 예전에 읽었던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었다.

에이션트웜에 의한 개발자도 알 수 없는 변형.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급격한 변화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후우, 어쨌든 오크는 한 백 마리 정도만 남은 건가?”

과거, 아니 미래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더 로드’라는 타이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개발자의 말에 의하면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단 클로즈베타 서비스 때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와 동물들을 사냥해야 했다.

그것도 그냥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각 종(種)마다 학살자(Slayer) 타이틀을 따야 했다.

기본적으로 슬레이어 타이틀을 따려면 각 종마다 천 마리 이상을 잡아야 했다.

클로즈베타 서비스는 여러모로 불안정한 서버 상황 때문에 그다지 크지 않은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약 일천 종에 가까운 몬스터와 동물들이 존재했다.

일천 X 일천.

무려 백만이었다.

아무리 현실 시간으로 다섯 달.

게임시간으로 열다섯 달을 플레이할 수 있고 클로즈베타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 레벨이 어느 정도 낮게 제한된 특수한 지역이라지만 백만이라는 숫자는 너무나 많았다.

그나마 일천 종 중 대략 이백 종 정도가 대충 잡아도 순식간에 잡을 수 있는 토끼나, 사슴, 개구리, 쥐 같은 일반 동물들이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백만 마리의 몬스터와 동물들을 잡고 나서 또 몇 단계의 어려운 관문을 거쳐야 내가 그토록 원하는 그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지옥의 길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클로즈베타 서비스가 시작된 지 한 달.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만 마리 정도밖에 사냥하지 못했다.

심각히 떨어지는 속도.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경쟁자들이 줄고 있으니까.”

그랬다.

‘ONE’의 게임성에 실망한 수많은 베타테스터가 하나둘 게임을 떠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비슷한 시기에 같이 서비스를 시작한 다른 가상현실게임 몇 가지가 지금의 ‘ONE’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라도 떠났을 거다. 하긴 나는 아예 시작도 안 했었지.”

떠나는 건 당연했다.

이 정도로 엉망인 모습에 떠나지 않는다면 그건 무척 멍청하고 둔하거나 게임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초 라이트 유저일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그렇게 떠나주자 나의 사냥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군. 잠을 한 시간 더 줄여야겠어.”

현재 나는 하루에 단 세 시간만 잠자고 있었다.

거기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특별히 준비한 압축 식량을 이용해 단 오 분 만에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거기서 다시 잠자는 시간 한 시간을 빼는 건 아무리 폐인모드에 익숙해진 나라고 해도 쉽지는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런 절정 폐인모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적어도 언제나 네 시간 이상의 잠자는 시간과 한 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꼭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다섯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안에만 획득할 수 있는 타이틀.

어쩔 수 없었다.

다섯 달이란 한정된 시간 동안 좀 많이 무리해서라도 획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클로즈베타 서비스가 끝나고 이 주일 정도 쉴 수 있는 시간이 나올 테니 휴식은 그때 몰아서 쉬면 된다.”

지금 당장은 좀 무리겠지만 그 무리를 충분히 풀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이상 문제는 없었다.

“자 그럼 계속해 볼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양손에 들려 있는 두 자루의 검.

어차피 클로즈베타가 끝나면 모든 것이 초기화되기에 지금 내가 무슨 직업을 염두에 두고 쌍검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클로즈베타 서비스 때 가장 효율적으로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기술을 생각하다 보니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각종 몬스터의 피가 덕지덕지 묻은 쌍검.

미친 듯이 휘두른 이 쌍검 덕분에 ‘미친 학살자’라는 약간은 특수한 직업을 얻었지만 이딴 직업이 내 눈에 들어 올리는 없었다.

클로즈베타 서비스가 끝나도 남는 건 오로지 타이틀뿐!

이미 내 머릿속에는 내가 따야 할 그 타이틀 하나뿐이었다.

“후훗, 난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난 이따위 학살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고!

* * *

싸늘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나쳐 갔다.

그나마 아직 어설픈 가상현실 시스템 덕분에(?) 내가 입은 이 큰 상처에 대해 이렇다 할 감상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만약 지금이 클로즈베타 서비스가 아니라 정식서비스 상황이었다면 아마 너무나 실감 나는 상처의 감각에(물론 고통은 시스템 차원에서 거의 없애 주었지만 내가 어느 정도 다쳤다는 느낌은 섬뜩할 정도로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반쯤은 나갔을지도 모른다.

오른팔은 이미 거의 뜯겨 나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고 왼다리 또한 거의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뿐인가?

가슴을 가로지른 커다란 네 줄기의 깊은 발톱 자국에서는 계속해서 피로 설정된 빛 가루 같은 것이 흘러나오면 초당 몇십의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는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딴 상황 따위는 예전에도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

거기에 그땐 정식 서비스였다.

정식 서비스에서의 그 살벌한 감각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였다.

괜히 내가 예전에 데스워리어라고 불렸던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큰 상처에도 굴복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탑 랭커 중 한 명이자 나와 비슷한 성향을 지녔던 데스나이트 제논도 극복하지 못했던 심장에 칼이 꽂힌 상황에서도 나는 체력이 0이 되어 쓰러질 때까지 계속 전투를 했었다.

그랬던 나에게 이런 상황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클로즈베타 서비스였다.

그 써늘하면서 실감 나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가 넘치는 상황이란 말은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킹 샤벨타이거의 발톱과 이빨은 아직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단 한 방에 난 곧장 시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한 방이었다.

저놈도 나도…… 서로 단 한 번의 공수 교환으로 승부가 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승부다!’

난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더욱 강하게 고쳐 잡으며 온 정신을 킹 샤벨타이거에게 집중시켰다.

놈이 내뿜는 살기는 잔뜩 날이 선 검처럼 상처 입은 내 몸을 난자했지만 난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단 한 번의 공격,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먼저 움직이면 승부에서 지는 것처럼 나와 놈은 아주 상당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서로의 인내심을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은 광경.

비록 가상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결이었지만 지금만큼은 현실의 어떤 대결보다 실감이 났다.

크아앙!

결국 먼저 움직인 건 놈이었다.

나는 놈이 움직이는 그 순간 찰나의 틈을 포착했다.

그리고 검을 빠르게 앞으로 찔러 넣으며 몸을 날렸다.

퍼억!

눈 깜짝할 사이 이루어진 공수 교환.

나는 놈의 공격을 피했고 놈은 나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결과는 나의 승.

쿠쿵!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상 기록된 놈의 체력은 0을 가리켰고 그 결과 놈은 쓰러졌다.

띠링, 필드 네임드 몬스터 킹 샤벨타이거를 쓰러트렸습니다.

띠링, 당신은 킹 샤벨타이거 슬레이어 타이틀을 획득 하셨습니다.

띠링, 샤벨타이거 1000마리를 사냥하셨습니다.

띠링, 당신은 샤벨타이거 슬레이어 타이틀을 획득하셨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띠링, 최후의 일격(AA급)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띠링, 쌍검술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

.

정신없이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

별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아니라 꺼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기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계속 들어야 했다.

딱 조절한 것은 아니었는데 우연히도 킹 샤벨타이거가 딱 1,000마리째 샤벨타이거였다.

재수라면 재수였다.

물론 덕분에 쓸데없이 시스템 메세지가 더 길어졌지만 어쨌든 이제 지긋지긋한 샤벨타이거 사냥은 끝내도 된다는 소리였다.

“휴우~ 체력 26이라…… 이거 진짜 외줄 타는 기분이네.”

외줄 타기도 이보다 스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몇 번째 두 자릿수 체력을 보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 체력이 네 자릿수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지독한 전투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에혀~ 힘들지만 쉴 시간도 없네. 이제 다음은 리자드맨인가?”

샤벨타이거가 단독 생활을 해서 찾아서 잡는 게 힘들었다면 리자드맨은 너무 단체 생활을 하기에 잡는 게 힘든 몬스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이 월드맵에 존재하는 몬스터인 이상 학살을 해줘야지……. 그게 ‘더 로드’라는 호칭을 달 내가 해야 하는 의무였기에 난 계속해서 이 피 묻은 검을 휘둘러야 했다.

“끄응!”

나는 힘겹게 자리에 앉으며 지도를 꺼냈다.

몸이 회복하는 동안에 지도를 살피며 최적의 이동 라인을 잡아 볼 생각이었다.

지존을 향한 나의 행보.

그것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미친 듯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