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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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래, 일은 잘되고 있고?”

맞은편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디저트로 나온 복숭아를 포크로 찍으며 정면을 봤다. 찻잔을 입에서 뗀 박신회가 눈을 마주쳐 오고 있었다. 잠시 포크를 놓은 차유신이 제 넥타이를 어루만졌다. 한껏 사무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네. 우선 내일 예정대로 일정3구역 게이트 터뜨립니다. 연루된 건설사가 총 6곳입니다. 다른 곳 규모가 워낙 커 최초에 거론된 일장토건은 상대적으로 이슈가 덜 될 듯싶습니다. 국내 1위 건설사인 BY건설 혐의가 검찰 쪽에서 최종 파악되었고, 이외에….”

“그것 말고, 자식아.”

박신회가 탁, 소리 나게 테이블을 쳤다. 차유신이 머뭇거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박신회가 팔짱을 꼈다. 은근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연애는 잘되고 있냐는 얘기야. 응?”

차유신의 눈살이 찡그려졌다. 뜬금없이 웬 연애 얘기일까 싶었다. 그러다가도 한숨을 쉬며 받아들였다. 박신회는 원래 그런 인물이었다. 냉혈하다가도 엉뚱했고, 엉뚱하다가도 냉혈했다.

“특별히 없습니다.”

“항상 없다고 하네. 물을 때마다.”

“없으니까 없다고 하죠.”

“그래? 그럼 내가 소개를 해 줘?”

박신회가 갑자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눌러 대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깜짝한 차유신이 저지했다.

“전 괜찮…!”

“어어, 민아야. 아빠다. 병원은 잘 다녀왔고?”

핸드폰을 귀에 댄 박신회가 껄껄거렸다. 진 빠진 차유신이 목을 젖혔다. 박신회의 딸 박민아는 올해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아빠는 지금 식사 중이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유명인과 있어. 아니, 그 배우 말고. 네가 만날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사람 말이야. 바꿔 줘?”

핸드폰을 내린 박신회가 액정 하단을 두드렸다. 차유신은 영상 통화로 전환되는 화면을 심드렁하게 봤다. 네모난 액정에 어린 여학생 얼굴이 떴다. 박신회는 차유신 쪽으로 핸드폰을 돌렸다.

“자, 봐라. 어때. 아빠 대단하지?”

-의원님, 안녕하세요!

화면 속 여학생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학생과는 한 번 식사한 일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차유신을 워낙 좋아해 온라인 팬클럽에도 가입했다 들었다.

“병원은 어쩐 일로 갔어요.”

-다리가 부러졌어요. 축구 하다가.

“요즘도 축구 해요?”

-네, 할 게 축구밖에 없어요. 몽골 애들은 한국 애처럼 게임도 많이 안 하고, 노는 곳도 항상 거기서 거기예요. 울란바토르 한번 와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거예요.

“그러게 왜 몽골에 있어요. 그냥 한국에 오지.”

-여기가 너무 편하단 말이에요. 한국 가면 숨만 막힐 거예요.

여학생이 깔깔거렸다. 차유신은 여학생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하늘을 봤다. 한국보다 공기가 나빠 보였다. 그런데도 절대 거기서 돌아오려 하지를 않는다 들었다. 하긴, 박신회도 대선 출마 전 오랫동안 몽골에 머물렀었다. 워낙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딸은 절반의 피가 그쪽이니 더 그렇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의원님, 건강 챙기세요. 요즘 안 좋아 보여요.

여학생이 걱정을 했다. 차유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나쁜 곳 없는데. 그렇게 보여요?”

-의원님 팬은 다 알죠. 식사 거르시면 절대 안 돼요.

여학생이 당부했다. 차유신은 잠시 눈을 굴렸다. 그냥 팬이 아니라, 의원실에 정보원이라도 뒀나 싶었다. 최근 식사 거르는 건 보좌진이나 알 법한 얘기였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몸도 안 좋지, 연애도 안 하지.”

박신회가 들으라는 양 혀를 내둘렀다. 여학생이 갑자기 매서운 눈을 했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화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차 의원님 연애 안 하는 것 아니거든?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저기.”

-우리 팬클럽은 다 알아! 함부로 얘기하지 마.

“아버지께 너무 그러면 안 돼요.”

펄펄 뛰어 대는 여학생을 달래며 차유신은 제 얼굴을 매만졌다. 대체 뭘 보고 애인이 있다는 걸 확신한 것이고, ‘우리 팬클럽’은 어디를 얘기하는 건지 영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면서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튼 병원 잘 다녀왔다니 다행이다. 몸조리 잘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아빠. 또 연락해요.

“그래, 끊자꾸나.”

차유신에게서 핸드폰을 받은 박신회가 통화를 종료했다. 차유신은 다시 포크를 잡았다. 그대로 들어 복숭아를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과육을 우물거리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흐뭇한 음성이 들렸다.

“몰래 애인이 있었구만.”

“아닙니다. 따님께서 장난치는 겁니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무슨 비밀 연애를 해? 그냥 터놓고 다니지.”

“그런 게 아니…!”

어이가 없어 꺼낸 고성 틈으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박신회가 들어와, 하며 찻잔을 들었다. 차유신은 복숭아와 함께 끙, 소리를 삼켰다. 박신회가 자신을 놀려 댈 때 아주 즐거워한다는 걸 잠시 잊었다.

“예, 선배님. 부르셨기에….”

이윽고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절로 등이 떨렸다. 뒤편에서 잇따라 주춤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박신회가 손짓했다.

“와서 앉아. 오랜만에 강남 왔는데, 마침 근처에 있다기에 얼굴이나 볼까 해 부른 거야.”

남자가 머뭇머뭇 구둣발을 옮겼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옆자리 의자가 끼익, 빠졌다. 착석한 남자가 테이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일은 잘되고?”

박신회는 아까와 같은 질문을 했다. 우태원이 빠릿빠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일단 다음 달에 경찰법 개정안 통과시킬 예정이고….”

“그거 말고.”

박신회가 손사래를 쳤다. 우태원이 멈칫했다. 박신회가 또박또박 강조했다.

“연애 말이야. 연애.”

“그….”

“네 옆에 있는 선배는 영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부처님도 알아선 안 된다는 모양인가 보지. 하여간 여우 같아서는. 태원이 너라도 누구 있으면 얘기해 봐라.”

“저는.”

우태원이 어물거렸다. 차유신은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텅 빈 접시가 음영 진 낯을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었다. 말라붙은 귓가에 신중한 저음이 스쳤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뜸을 들인 우태원이 덧붙였다.

“상대방도 그랬으면 좋겠고요.”

*

“사무실로 가?”

빠져나가는 박신회의 차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편 차유신이 옆을 봤다. 입을 다신 우태원이 답했다.

“경찰청으로 갑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국감입니다. 중간에 잠깐 나온 겁니다.”

“아, 그랬지.”

차유신이 점두했다. 다시 눈을 돌리니, 못 박은 양 땅에다 눈길을 꽂은 우태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룸에 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차유신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왜 나 안 봐?”

차유신이 갸우뚱했다. 우태원의 목이 쿨렁였다. 까만 아스팔트를 거울처럼 응시하던 그의 입이 달싹였다. 나지막한 대꾸가 들렸다.

“선배를 보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요.”

“뭐 강간이라도 할 것 같아?”

차유신이 피식거렸다. 우태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차유신의 입매가 식었다. 우태원의 어조가 강고해졌다.

“거기가 식당 안이든, 혹은 지금의 주차장이든, 어디가 됐든. 선배를 보는 순간 제가 주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의 어깨가 불끈거렸다.

“선배를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 인간 이하의 무슨 짓거리든 할 겁니다.”

우태원의 입이 다물렸다. 차유신은 다소 의연하게 그를 바라봤다. 맹목적으로 떨구어진 눈길이 낭떠러지를 향해 기운 석암 같았다. 차유신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씁쓸한 추풍이 심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도 너에게 그러고 싶어.”

우태원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차유신은 담담하게 뇌까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취하는 건 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버석한 음성이 그들의 틈을 메웠다.

“그건 진짜가 아니잖아.”

차유신은 등을 보였다. 주차된 전용 세단을 향해 발을 내밀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멀어지는 동안 뒤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유신은 그저 나아갔다. 우태원에게서 무한하게 자신을 떨어뜨렸다. 어쩌면 도망이었다. 다시 그를 보면, 내내 묻어 뒀던 검은 마음이 고개를 들 것만 같았다.

가짜로라도 그를 취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욕망.

“저 지금 선배 말 잘 듣고 있어요.”

불현듯 광염 같은 음성이 들렸다. 차유신의 발이 멎었다. 까슬까슬한 바닥에 구둣발을 붙인 채, 우태원으로부터 배면을 보이고 섰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멀리서도 현현했다. 차유신은 우두커니 먼 치의 도로변을 봤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가로수가 시든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직 말 들을 때 어서 저 거둬요.”

끓어오르는 한마디에 차유신은 조금 웃고 말았다. 이어 입꼬리를 비뚤며 물었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도 해야죠.”

“협박 다음은 뭐야.”

우태원은 일순 침묵했다. 차유신은 느긋하게 가로수를 감상했다. 돌풍이 불었다. 가로수 일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출렁였다. 몇몇 가지에서 우수수 잎이 떨어졌다. 계절을 잊고 찾아온 눈보라 같았다.

“애원이요.”

급풍은 곧 멎었다. 본래의 자리를 찾은 가지가 야윈 몸통을 하느작거렸다.

“가오 떨어지니 거기까진 하지 마.”

차유신의 발이 재차 나아갔다. 지그시 바닥을 밟았다 뒤꿈치를 떨어뜨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곧 돌아가.”

재촉하듯 걸음 수를 늘렸다. 뒤에서는 더 이상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바람이 가로수를 뒤흔들었다. 한 번 잎을 떨군 나무는 제법 잘 버텼다.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

운전을 하던 윤재희가 뜬금없는 도로에 들어섰다. 뒷좌석에 앉아 조리치던 차유신이 눈을 떴다. 예민한 신경은 종종 쓸데없는 상황에서 날을 세웠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차유신이 운전석 등받이를 잡았다. 소스라친 윤재희가 개탄했다.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어디 가냐니까?”

“그… 잠깐 개인적인 일 좀 보려고요.”

“얘기를 하지 그랬어. 무슨 일인데.”

“이 근방인데요.”

윤재희가 핸들을 꺾었다. 세단이 어느 골목에 진입했다. 차유신은 실눈으로 주변을 봤다. 비즈니스호텔이 밀집한 명동의 낯선 구역이었다. 한 호텔 입구에 선 윤재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조수석 문을 여는 그를 힐긋한 윤재희가 차유신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이번이 아마 마지막이에요.”

무슨 소리냐는 양 찌푸린 차유신이 이내 흠칫했다. 조수석에 앉은 건 서재길이었다. 차유신을 돌아본 그가 꾸벅했다.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뭐가 오랜만이야? 고작 일주일 됐는데.”

차유신이 성질을 냈다. 몸을 굽은 윤재희가 바닥에 둔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서재길에 건네자, 안을 살펴본 그가 고갯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요청을 했는데 들어주셔서.”

“됐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만한 알바도 없는데요, 뭐.”

‘알바’라는 말에 차유신이 자동적으로 인상을 썼다. 엄한 호통이 튀어나왔다.

“윤재희! 너 아직도 서 실장한테 번역 알바 받아?”

“하… 내가 이럴 줄 알고.”

윤재희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억울하다는 양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그러면서도 자신 없이 아물거렸다.

“아마도.”

차유신의 어금니가 물렸다. 어디다 분노해야 할지 몰라 눈만 지릅뜨다, 무작정 서재길을 잡으며 시비를 걸었다.

“서 실장은 대체 언제 출국하는 거야?”

“내일 아침 나갑니다.”

서재길이 걱정 말라는 양 씩 웃었다.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이왕 가는 거 오늘 가지 그래.”

“오늘은 곤란해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운도동에서 마무리 지을 일이 있어요.”

“무슨 일.”

“역운회 구건물이 며칠 전 팔려, 혹 두고 가는 것 없나 점검하러 갑니다.”

서재길이 시원하게 설명했다. 차유신의 눈이 깜빡였다. ‘역운회 구건물’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했다. 기존 역운회 건물은 알고 있었다. 역운회와 대립하던 시절 몇 번이나 직접 간 일이 있다. 역운회가 상해로 뜬 후 다른 건물이 들어선 걸로 안다. 그것 이외에도 건물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혹시 그게 역운회 첫 사무소야?”

고민하던 차유신이 물었다. 서재길이 주억거렸다.

“예. 역운회가 석일태, 도명진, 배민기 공동 대표 체제로 운영될 때부터 쓰던 곳입니다. 상당히 작은 규모인 데다가 외딴 데 있어, 사무소 옮긴 후에는 창고로나 썼죠.”

“팔렸으면 곧 철거되겠네.”

“당장 다음 달 사라집니다.”

“지금 갈 거야?”

“네.”

“혹시 같이 가도 돼?”

“거기를요?”

서재길이 경혹한 낯을 해 보였다. 차유신이 권태롭게 뇌까렸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

건물은 상상 이상으로 외진 데 있었다.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역현구에 그런 장소가 더러 있지만, 이곳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혔다.

“드디어 저를 묻으려 하시는군요.”

차를 세운 윤재희가 허허벌판을 보며 웅얼거렸다. 뒷문을 열고 나선 차유신이 경고했다.

“가서 둘러보며 생각해 볼 테니 어디 도망가지 말고 붙어 있어.”

바닥을 딛자마자 화한 바람이 목을 에워쌌다. 몇 걸음 앞에 폐허에 가까운 건물이 있었다. 앞서 나선 서재길이 말했다.

“보시다시피 사실상 버려진 건물입니다. 굳이 보시려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서 실장 나한테 거짓말했지.”

문득 나온 혼잣말에 서재길이 멈춰 섰다. 긴 숨을 뿜은 그가 돌아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것 알면 지하실로 안내해.”

차유신이 지시했다. 의도를 알아챈 서재길이 난색을 표했다.

“굳이 찾아가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그래도 안내해.”

“그렇게까지 어머니의 흔적을….”

“어머니 흔적 찾으려는 것 아니야.”

부정한 차유신이 눈을 구겼다. 뇌호한 언어가 따라붙었다.

“우태원 흔적 찾으려는 거야.”

서재길의 목을 타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뭉그적거린 그가 몸을 틀었다.

“알겠습니다.”

도로 나아가는 서재길을 따라 걸었다. 헐벗은 시멘트 바닥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꼭 종소리 같아 귓바퀴가 곤두섰다.

안은 정말로 넓지 않았다. 웬만한 가정용 단독 주택 크기였다. 빛 한 줄기 없이 침침한 공간에서 퀴퀴한 하수구 냄새가 났다. 둘러본 서재길이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이리저리 비추다 허름한 계단을 찾아냈다. 차유신이 잘 볼 수 있게끔 아래를 비춘 그가 먼저 내려갔다. 차유신은 둥둥 떠다니는 층계를 밟으며 따라서 갔다.

지하는 더 좁았다. 숨 막힐 정도로 가느다란 통로가 감옥의 미로 같았다. 뚜벅뚜벅 걷던 서재길이 한 입구 앞에서 멈췄다. 안에 세 평 남짓한 공간이 있었다. 유독 을씨년스러운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의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옆에는 정체불명의 기기가 놓여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고 허접한 것이었다.

“여기입니다.”

서재길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작정 따라간 차유신이 얼마 못 가 걸음을 멈췄다. 돌연 발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시야를 압도해 오는 의자에 결박당한 것처럼 사지가 비척거렸다. 미동하는 눈이 재차 의자를 담았다. 식은땀을 머금은 속눈썹이 달막였다.

어머니가 저기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직감만으로 뼈저리게 와 닿는다.

“확인했으니 이만 가시죠.”

서재길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시선이 쉼 없이 들썩이는 손등에 걸려 있었다. 눈치를 본 그가 덧붙였다.

“힘들어 보이십니다.”

차유신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씹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잘잘한 먼지에 눈이 따끔거렸다. 불똥에 맞은 것처럼 망막이 아렸다. 차유신은 급히 눈을 훔쳤다. 태어나 울어 본 적이 없었다. 태생적으로 눈물샘이 건조한 데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버릇을 들인 게 컸다. 울어서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걸 아주 어려서부터 알았다.

덕분에 이번에도 울지 않았다.

“이만 가지.”

눈에서 손을 거둔 차유신이 말했다. 서재길은 순순히 걸음을 뗐다. 곁을 스쳐 간 그가 먼저 입구를 향해 갔다. 차유신은 잇따라 몸을 틀었다. 그대로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 문득 거동이 멎었다. 무심코 본 것에 온 신경이 쏠렸다. 서재길의 라이트가 스친 짧은 순간 봤음에도 뇌리가 그것으로 그득히 찼다.

“잠깐만.”

차유신이 외쳤다. 막 바깥을 밟은 서재길이 질문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의원님.”

차유신은 대답 대신 발길을 돌렸다. 물건이 비쳤던 지점으로 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라이트를 켜 비춰 가며 상체를 낮췄다. 약간을 헤맨 끝에 물건이 나타났다. 남은 손이 성급하게 뻗어 나갔다. 한 손에 들어오는 것을 거머쥐고, 온기를 헤아리듯 손끝으로 더듬었다.

어린아이 운동화였다. 두 살이나 세 살짜리가 신을 법한 아주 작은 것이었다. 검은색 스웨이드가 입혀져 있고, 윗부분에 붙였다 뗄 수 있는 부직포 버클이 달려 있다.

한참을 내려다본 끝에 손목을 꺾었다. 운동화가 뒤집어지고 새하얀 고무바닥이 드러났다. 물끄러미 살피던 눈동자가 옴씰거렸다. 위아래 입술이 꽉 맞물리고, 눈초리가 물결처럼 요동쳤다. 그렇게나 참아 온 신열이 눈시울을 덮쳐 오고 있었다.

우태원

02-5487-3862

“씨발, 진짜.”

신발 쥔 손이 툭 내려갔다. 젖어 가는 눈꺼풀을 딸싹이다, 고개를 쳐올렸다. 깜깜한 허공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흑야 속에서 신기루 같은 것이 너울거렸다. 보이지 않기에 선명한 환영. 진실. 당사자조차 기억 못 할 그날의 잔상.

아이는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놀라 뛰쳐나갔다. 신발 하나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왜 그랬어.”

어둠 속에서 녹아 가는 독언이 번졌다. 차유신은 까만 천장이 그날의 우태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시했다. 거기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해 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면서 왜 그런 걸 했는지. 왜 스위치를 올렸는지.

그 어두운 곳에서 그런 걸 하며, 얼마나 무서웠을지.

“이 씨발 새끼야.”

차유신의 교근이 뿔뚝 튀어나왔다. 얼어 있던 볼 하나가 홧홧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사선을 그리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차유신은 닦지도 않고 멍멍히 서 있었다. 닦아 봐야 또 흐른다는 걸 알았다. 울어 본 적 없음에도 그 정도는 잘 알았다.

“내 기분을 이렇게 좆같이 만드는 것도 너밖에 없어.”

울분 섞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울렁이는 눈물샘을 억누르며 눈망울을 끌어 내렸다. 들려 있는 신발을 쏘아봤다. 정말이지 좆같아서 그거라도 해야 성에 찰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욕을 했다.

“개 같은 새끼.”

차유신은 이제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분개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가능했다. 이 순간,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을 향해서도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꼭 끌어안으며 울어 주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조차.

*

바깥에 나왔을 때에는 차가 늘어나 있었다. 타고 온 세단 옆에 처음 보는 차 두 대가 서 있었다. 발견한 서재길이 한탄했다.

“올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나의 차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셔츠 차림의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서재길의 앞에 선 그가 헉헉거렸다.

“뭔가 도울 게 없나 해 왔습니다, 형님.”

“뭘 굳이 오고 그래? 잡동사니만 있는 구석에.”

“혹시 모르니까요.”

개의치 않은 그가 눈길을 넘겼다. 꼿꼿하게 차유신을 응시하다, 갑자기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차유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리를 세운 그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빙글거리는 낯을 살피던 차유신이 뒤늦게 움칠했다. 그제야 아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열 씨였나.”

“기억하시는군요.”

선우열이 달가워했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옆을 봤다. 알아챈 서재길이 설명에 나섰다.

“선우열 씨도 이번에 잠깐 귀국했습니다. 서울에서 처리할 일도 있다 해, 겸사겸사.”

“지금 아예 역운회 소속이야?”

“네, 일단은 잡무 위주지만요.”

서재길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사무직 같은 겁니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근용 깡패라는 걸 그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일은 좀 맞아?”

차유신이 선우열 쪽에 따졌다. 그가 크게 끄덕거렸다.

“네, 덕분에 잘 지냅니다.”

“덕분은 무슨… 그나저나 걱정이네. 깡패 새끼 틈바구니에서 지내는 거 쉽지 않을 텐데.”

“충분히 만족스러운 환경입니다. 우 의원님께서 지시한 바도 있어, 다들 잘 대해 주는 분위기예요.”

“그래?”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우태원이 그런 걸 했구나 싶었다. 여태 역운회에서 우두머리 취급 받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건 그래도 쓸모 있는 일이었다 싶은 생각을 했다.

“한데 안색이 그때보다 안 좋아 보이십니다.”

문득 선우열이 걱정했다. 차유신은 대수롭지 않게 외면했다. 비슷한 얘기를 몇 번이고 들어 슬슬 질려 있었다.

“별것 아니야.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야.”

“제 말은 그것보다… 좀.”

선우열이 우물쭈물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탐탁지 않게 접혔다. 부쩍 망설이는 꼴이 거슬렸다. 비록 4시간 남짓이었지만 자신의 의원실 인턴으로 있던 놈이다. 패기라곤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는 태도가 불만족스러웠다. 차유신에게는 단 10분을 함께 일해도 제 사람이었다.

“뭔데? 꾸물거리지 말고 말해.”

“아니요, 그냥. 우태원 의원님이 곁에 없어 그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차유신의 눈이 찡긋거렸다. 이건 대체 무슨 얘기일까 싶었다. 선우열이 실없이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상한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 우 의원님과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 강렬해 그랬나 봅니다.”

“나하고 우태원이 무슨 사이라도 된다는 듯한 얘기네.”

“그런 게…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죄송할 것 없어. 무슨 사이 맞으니까.”

딱 부러지는 응수에 선우열이 경직됐다. 서재길이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차유신은 걸음을 내디뎠다. 한층 가까워진 거리에 선우열이 숨을 죽였다. 등 뒤에 넘어가 있던 차유신의 손이 빠졌다. 손안에 담긴 어린애 운동화가 꺼떡거렸다.

“얘기 나온 김에 시간 될 때 근방에서 이거 좀 태워. 흔적 하나 남기지 말고.”

얼떨결에 받아 든 선우열이 입을 뻐끔거렸다. 마주 본 차유신이 강조했다.

“내 애인 눈에 평생 안 띄었음 싶은 물건이거든. 책임지고 처리해 줘. 깔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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