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46/48)

10.

서재길이 부른 주소지는 듣고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이었다. 서울시 역현구 미도동 274-6. 그건 도희범의 미도동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차유신의 어머니가 소유한 땅이 있던 자리였다.

일단 미도동으로 갔다. 몇 번 간 일이 있던 주소지인지라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빌딩 입구로 갔다. 동행하는 보좌진은 두지 않았다. 종종 그럴 때가 있었다. 통상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굳이 수행할 사람이 필요치 않을 때, 혹은. 타인과 동행하면 안 되는 상황일 때.

1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연기가 얼굴을 덮쳤다. 2년이 넘은 금연자로서 무성한 매연은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쿨럭인 차유신이 낯을 찡그렸다. 열어 둔 창문 주변에 모여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이 일제히 눈길을 건넸다. 차유신을 확인한 그들이 허겁지겁 불을 껐다. 차유신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권문직 실장.”

틈바구니에 껴 있는 익숙한 인물을 불렀다. 눈이 마주친 그가 기가 차다는 투로 얼굴을 짚었다. 허튼짓을 하다 학생 주임에 들킨 학생 같은 반응이었다. 저벅저벅 걸어가며 복도를 둘러봤다. 드문드문 서 있는 덩치 좋은 남자가 스무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간간이 아는 얼굴이 비쳤다. 과거 역운회에서 본 일이 있지만, 서재길 입국 당시에는 없던 면상이었다.

“언제 들어왔어.”

날카로운 물음이 터졌다. 괜히 창밖을 본 권문직이 손을 털었다.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이틀 됐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차유신이 섟을 냈다. 혀를 찬 권문직이 답을 바꿨다.

“일주일 됐습니다.”

“총 몇 명과 귀국했어.”

“정확한 수는 저도 모르는데요”

“누가 수치 읊으래? 추정치를 얘기해.”

부르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한 조직원이 성큼 다가왔다. 차유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팔을 뺀 권문직이 그를 막아섰다. 중국어로 뭐라 말하자 남자가 물러났다. 다시 차유신을 본 권문직이 입을 열었다.

“백 명 정도 됩니다.”

“너희 미쳤어? 경찰에 단체로 잡혀가고 싶어?”

“위조 여권 썼는데 들어온 걸 알까요.”

“우태원은 어디에 있어?”

“가장 위층 가 보시죠.”

권문직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새 담배를 빼 물고는 불퉁하게 덧붙였다.

“깨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근덕거린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보이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버튼을 눌렀다. 1층에 멈춰 있던 승강기가 입을 벌렸다. 안으로 들어가 꼭대기 층인 10층을 눌렀다. ‘닫힘’ 버튼을 누르자마자 내부가 덜컹거렸다. 문을 억지로 벌려 가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차유신은 실눈으로 봤다. 아는 얼굴이었다.

“서 실장은 뭐야? 갑자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는 서재길을 째려보며 재차 ‘닫힘’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올라갔다. 재킷을 두어 번 턴 서재길이 답했다.

“혼자 왔다가 놀라실까 봐요.”

“이미 충분히 놀랐어.”

“입구에 있는 권문직 실장 만나셨습니까.”

“어. 여전히 싸가지 없더라.”

차유신의 등이 벽에 붙었다. 바뀌어 가는 숫자를 보며 날숨을 뱉는 틈틈이 서재길의 시선이 느껴졌다. 망설이던 서재길이 입을 뗐다.

“못 본 새 야위셨는데요.”

“말 걸지 마.”

차유신의 이가 악물렸다. 올라간 손이 얼굴을 덮었다. 미지근한 손가락에 짓눌린 이마가 두근거렸다. 차유신의 목으로 앓는 소리가 삼켜졌다. 어제까지는 수액이라도 맞아 가며 버텼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투여한 게 없어 기력이 사실상 전소된 상태였다. 활활거리는 현기증 때문에 어지러워 죽을 맛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서 나선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가장 위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짐작한 곳이 있었다. 성큼성큼 나아가 가장 안쪽 복도에 위치한 입구 앞에 섰다. 도희범으로부터 서류를 받은 사무실 앞이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빠르게 돌아갔다. 찰칵, 문이 열렸다.

내부는 일전에 방문했을 때와 딱히 다르지 않았다. 데스크, 책장, 테이블, 소파.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도희범도, 매천회 조직원도 없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고요한 가운에 소파에 드러누워 곤히 자는 우태원이 보였다. 이 공간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어?”

차유신이 뒤를 봤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서재길이 주억거렸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대개 여기서 상주하셨습니다.”

“여기 도희범 사무실이야.”

“그랬었죠.”

서재길이 잠시 눈을 굴렸다.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요.”

차유신의 면상이 움찔했다. 멎어 있던 발이 성마르게 내뻗어졌다. 서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파를 향해 갔다. 아주 요란한 소음이 나지는 않은 탓인지 우태원은 깨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윗눈썹이 심히 피곤해 보였다.

우태원의 앞에 다다른 차유신이 몸을 숙였다. 그의 얼굴에 응달을 드리우고 한동안 관찰하다, 다짜고짜 손을 내질렀다. 그의 멱살을 향해 돌진하던 손목에서 탁,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낯이 싸늘해졌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날아와 자신을 옥죄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누구야.”

우태원의 눈이 드러났다. 차유신은 무심하게 응수했다.

“일어나, 씨발 새끼야.”

그늘진 이마가 굼틀거렸다. 손목을 감은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차유신은 이를 갈았다.

“손목은 안 풀어도 돼. 일어나기나 해.”

우태원은 앉은 채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믿을 수 없다는 양 차유신을 보다가, 입구 쪽을 확인했다. 우뚝 선 서재길이 꾸벅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안전하게 모셔왔어?”

난데없는 질문이 건네졌다. 차유신의 표정이 찌뿌듯해졌다. 서재길은 고분고분 답했다.

“스스로 오셨습니다.”

“모셔왔어야지.”

“죄송합니다.”

서재길이 깍듯한 사죄를 했다. 엄하게 쳐다보던 우태원이 차유신에 눈을 걸며 인상을 풀었다. 가만히 내려다본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좀 많은데.”

“알아요.”

“듣고 싶은 말도 많고.”

“알아요.”

“그런데 뭐 좀 하고 시작하자.”

차유신의 구둣발이 들렸다. 냉한 지시가 흘러나왔다.

“허리 펴.”

우태원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등줄기를 바로 했다. 노려본 차유신이 다리를 올렸다. 세차게 허공을 가른 발이 우태원의 복부를 걷어찼다. 바위가 갈라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딱딱한 상체가 소파와 함께 밀려났다. 신음 하나 내지 않은 우태원이 눈을 반쯤 감으며 이마를 쓸었다. 차유신은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우태원이 얼굴을 보였다.

“이제 설명해.”

차유신의 눈이 이글거렸다. 침묵을 지키던 우태원이 목을 꿀꺽였다. 고심 어린 대꾸가 찾아들었다.

“아직 다 해결하지 않아 얘기하기 난감합니다.”

“그럼 일단 해결한 걸 얘기해.”

윽박지르는 소리에 우태원의 눈길이 넘어갔다. 저편에 있는 서재길을 일별하고, 다시 차유신을 바라본 끝에 부쩍 단조로운 음성을 꺼냈다.

“매천회는 다 제거했습니다.”

차유신이 휘둥그레졌다. 바닥을 디딘 구둣발이 달막였다. 우태원을 잡은 손안이 조여들었다. 미동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게 대체 무슨 얘기야.”

“서울 내 153명, 부산 내 117명. 전원 일망타진했습니다. 일부는 병원에 입원했고 대부분이 유치장에 구금된 상태입니다.”

“언론에서 아무런 얘기 없었어.”

“경찰청과 역운회 합동으로 진행한 기밀 작전입니다. 내일 정식으로 발표 뜰 겁니다. 역운회가 일조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겠지만요. 이번 작전 대가로 경찰 쪽에서 역운회 일부 조직원에 걸린 수배 혐의 기록을 지워 준다는 얘기 역시.”

“그 작전이 도무지 말이 되는…!”

어이가 없어 역정 낸 차유신이 무춤했다. 갑자기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올려다보는 우태원의 표정이 한없이 결백했다. 차유신은 그만 허망한 숨을 터뜨렸다.

잠시 잊었다. 우태원이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이라는 걸. 현 경찰청장과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라는 걸.

“그간 관련한 보고를 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모든 걸 종결한 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선배와는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상태에서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해결하지 않은 건 뭐야.”

간신히 호흡을 삭인 차유신이 따졌다. 우태원은 대답 대신 얼굴을 돌렸다. 시선이 안쪽 벽에 붙은 문에 걸려 있었다. 차유신도 같은 곳을 봤다. 묵묵하게 솟은 문이 견고한 장막 같았다. 일전에 이 사무실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실제 쓰는지를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문이었다.

“얘기하기 싫다 하면 어떻게 되나요?”

묵중한 물음이 들렸다. 차유신은 예사로이 응수했다.

“이번에는 기절할 때까지 팰 거야.”

“달갑지 않은 얘기네요.”

“기절하는 건 무서워?”

“그 정도로 하면 선배가 아파요.”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차유신의 손목이 나슨하게 잡혔다. 자신 쪽으로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춘 우태원이 뇌까렸다.

“못 본 사이에 말랐어요, 선배.”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서재길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끄덕인 그가 발을 옮겼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이 번졌다. 묘한 긴장감에 차유신의 손가락이 옴지락거렸다.

내실 문 앞에 선 그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돌리자 숨겨 둔 공간이 드러나는 것처럼 벽이 갈라졌다. 서재길은 안이 훤히 보이게끔 문을 젖혔다. 끼익, 소리와 함께 생각보다 넓은 내부가 나타났다. 멀거니 보던 차유신이 일순 뒷걸음질 쳤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흐읍! 허으으… 허억, 헉.”

눈이 시뻘게진 도희범이 속옷 차림으로 의자에 결박당해 있었다. 얼굴과 가슴, 배는 물론이고 발등, 손등까지 피멍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입에 물린 재갈을 타고 침과 피가 줄줄 떨어졌다. 가쁜 숨을 내쉰 차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곁눈을 맞춘 우태원이 차유신의 어깨를 쓸었다.

“이건 좀 숨기고 싶은 부분이지만, 어쩔 수 없네요. 속일 사람을 속여야죠.”

“며칠 된 거야? 이거.”

차유신이 격하게 심문했다. 속으로 가늠한 우태원이 답했다.

“사흘 정도요.”

“사흘 내내 여기에 있었다?”

“네.”

차유신이 이마를 쥐어짰다. 또 두통이 일었다. 티 나지 않게끔 관자놀이를 마사지하고, 눈꺼풀을 끌어 올렸다. 차유신을 발견한 도희범이 눈에 띄게 목을 울컥거렸다. 구조를 요청하는 것인지 분개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차유신은 자못 침착하게 우태원을 응시했다. 어느 쪽이 됐건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원하는 건 얻었어?”

“그다지요.”

“사흘 내내 묶어 놓고 팬 걸로는 성에 안 찬 모양이지.”

“아무리 피를 봐도 부족해요.”

우태원의 눈초리가 나른해졌다. 살기 어린 한마디가 귀를 옭맸다.

“선배를 가지고 놀려고 했죠. 제 약점을 앞세워 선배를 협박하고, 목줄을 걸고, 희롱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배가 전부 해결한 것 알아요. 하지만 제 분노는 별개예요.”

“협박하고 목줄 건 건 그렇다 치고, 희롱은 또 무슨 얘기야. 그딴 건 당한 적 없어.”

“안 했다고요.”

우태원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차유신을 머금은 눈망울이 흑암처럼 굳었다.

“선배에게는 여자 속옷 받은 게 희롱이 아닌가요?”

차유신의 눈 밑이 옴씰거렸다. 질근거리던 치아가 깨물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의원실 서랍장에 처박아 둔 여자 속옷 케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취중에 버렸나 보다 하고 잊었지만, 내심 께름칙했다. 그걸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적이 없었다. 의심하고도 넘어간 일이었다.

“그래, 내가 실언했어. 희롱 맞아.”

한숨 쉰 차유신이 손을 올렸다. 우태원의 뒤통수를 움켜잡고, 손끝으로 지분거렸다. 우태원이 얌전해졌다. 놓치지 않은 차유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옆얼굴에 볼을 붙이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제 귀가해서 네가 나를 희롱해.”

“그만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는군요.”

우태원이 정곡을 찔렀다. 차유신은 그만 언성을 높였다.

“여기서 도희범을 더 혹사시켜 뭘 얻겠어? 사흘이면 할 만큼 했어. 매천회도 해체했다며. 이 정도 했으면 도희범은 알아서 기어. 예전 같은 일이 재발할 일은 이제 없어. 그러니 여기서 끝내.”

“그래요. 그만하죠.”

희한할 정도로 흔쾌한 반응이 돌아왔다. 흠칫한 차유신이 우태원에게서 손을 떨어뜨렸다. 미적거리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상체를 낮췄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닿을 법한 거리에서 얼음장 같은 숨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냥은 못 보내요.”

우태원이 확고하게 읊조렸다.

“식물인간으로 합의하죠.”

그의 허리가 곧추섰다.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있던 차유신의 몸이 뒤늦게 돌아섰다. 우태원은 서재길에게 손 지시를 하고 있었다.

“봉투 씌워.”

“예, 형님.”

서재길이 바로 움직였다. 구석에 둔 투명한 봉투와 노끈을 들고 도희범에게 갔다. 의미를 안 도희범이 벌건 눈을 부라리며 버둥거렸다. 개의치 않은 서재길이 그의 머리통에 봉투를 씌웠다. 이내 능숙하게 목 부분에 노끈을 둘렀다. 빠르게 감긴 끈이 매듭을 지어 갔다.

도희범의 목이 빈틈없이 조였다. 하얗게 질린 도희범이 몸을 이리저리 틀며 헉헉거렸다. 뿌연 김이 맺힌 봉투가 쉼 없이 쪼그라들었다 팽창했다. 부스럭거리는 잡음이 죽음을 카운트하는 초침 소리처럼 차유신의 귀를 파고들었다. 차유신은 부리나케 우태원의 팔뚝을 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말씀드렸잖아요. 죽이진 않아요. 질식시켜 딱 식물인간까지만 만드는 겁니다. 몇 번 해 본 일이 있어 실패는 없습니다. 이 정도면 도희범 입장에서 고마운 형벌이라 생각해요.”

“우태원, 너….”

흔들리던 차유신의 눈망울이 비껴 났다. 김조차 흐려지는 봉투가 보였다. 도희범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흰자위를 까뒤집었다. 머리통의 꺼덕거림이 잦아들었다. 차유신은 밭은 숨을 뱉으며 멈춰 가는 도희범을 지켜봤다. 이건 사실상의 사형 집행이었다.

왜.

짧은 순간, 차유신은 생각했다. 왜 우태원이 이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해. 차유신이 이런 짓거리를 싫어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굳이 하고 있다. 차유신에게 미움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있다는 거다.

답은 아마도.

“도희범이 여기에 와 뭐라고 했어.”

착 깔린 언어가 나왔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우태원이 답했다.

“없습니다.”

“없어?”

“납치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재갈을 물렸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식물인간이 되면, 앞으로도 말은 못 하겠네.”

“그럴 가능성이 높죠.”

우태원의 눈이 굴러갔다. 차유신을 담은 망막이 무미건조한 사막 같았다. 마주 본 차유신이 느릿느릿 고갯짓을 했다. 저 눈망울 너머에 담긴 진심이 최후의 오아시스처럼 형형했다. 우태원이 이렇게까지 해 가며 얻으려는 것. 차유신에게 미움받는 일보다 두려워하는 것.

우태원이 ‘그 일’을 했다는 진실.

믿을 만한 사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아는 인물은 도희범뿐이다. 그래서 우태원은 도희범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능 제거에 나섰다. 소통.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게 만드는 것. 성공하면 우태원은 안전해진다. 차유신이 영영 진실을 알 수 없게 될 테니.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우태원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서 실장, 비켜.”

차유신이 명령했다. 눈을 키운 서재길이 얼떨결에 물러섰다. 차유신은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달려가듯 나아가, 숨이 끊겨 가는 도희범의 명치를 있는 힘껏 찼다. 일주일간 누적한 고뇌를 담아 으스러뜨릴 기세로 박찼다.

쿵! 의자가 쓰러졌다. 결박된 도희범이 바닥을 굴렀다. 차유신은 봉투를 쥐어 잡았다. 팽팽한 비닐에 손톱자국을 내고, 쫙 찢어 버렸다. 훤히 면상을 드러낸 도희범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차유신을 보며 입만 뻐끔거리던 그가 픽 고개를 떨궜다. 기진맥진한 머리통이 늘어졌다.

“선배, 지금 뭐 하는…!”

“스위치 올리러 온 애. 3살. 검은 머리. 잘 부탁해.”

우태원의 말을 자르며 차유신은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조차 뇌리에 선명한 문구를 읊었다. 우태원의 어깨가 뜰썩였다. 뚝뚝해진 윗눈썹이 파들거렸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저 없는 한마디가 덧붙었다.

“나 알고 있어. 도희범한테 원본 서류 받았어.”

목을 에워싼 공기가 돌연 찼다. 예고 없는 변온에 머릿속에서 빙무가 튀었다. 바닥을 디딘 발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차유신은 간신히 몸을 가누며 목울대에 힘을 실었다.

“알지만 모른 척했어. 너나 나나 힘들 것 아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해. 모른 척하는 게 뭐가 어려워.”

혀가 부쩍 무거웠다. 성대가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차유신은 눈을 구기며 정면을 봤다. 앞이 새카맸다. 무연한 암막 커튼이 드리운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아 물고 난 입에서 흐무러진 언어가 샜다.

“그러니까 이 이상 쓸데없는 짓….”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혀가 풀렸다. 남은 에너지를 장작처럼 태워 가던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감이 슬로 모션처럼 머리를 울렸다. 차유신은 증기를 소진한 기관차처럼 온몸의 신호등을 껐다. 어스름을 가르며 경적 같은 외침이 들렸다.

“차 대기시켜. 빨리!”

*

눈을 뜨자마자 본 건 낡은 뻐꾸기시계였다. 뻐꾸기가 나왔다 들어가는 곳이 고장이 난 듯, 중간에 새 모양 장식이 걸려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응시하던 차유신의 목이 느슨해졌다. 저것 덕분에 지금의 장소를 바로 유추했다. 당시 저걸 보며 왜 뻐꾸기를 고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걸 기억한다.

“정신 들었어요?”

머리맡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차유신의 눈길이 넘어갔다. 미간을 좁힌 채 내려다보는 우태원이 비쳤다. 차유신은 곤로한 대답을 흘렸다.

“아마도.”

“대체 얼마나 안 먹은 거예요.”

“잘 먹었는데.”

“뭘 먹었는데요.”

“이거.”

차유신이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끄트머리가 폴대에 걸린 수액 주머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화도 못 내고 눈만 감았다 뜬 우태원이 말했다.

“시간이 없어 급한 대로 예전에 역운회가 쓰던 전용 병원에 왔습니다.”

“알아, 여기. 석일태에게 발가락 잘린 날 치료받으러 온 데잖아.”

“그걸 기억해요? 아무튼 의사 얘기론 영양실조래요. 안 먹은 지가 꽤 된 것 같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선배, 자꾸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최근 며칠간 실제로 식사 못 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해?”

“무원이 형이요.”

“입 싼 새끼. 프락치.”

차유신이 툴툴거렸다. 우태원은 잠자코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불안정하게 하늘거리는 속눈썹이 보였다. 그를 똑바로 올려다본 차유신이 물었다.

“도희범은 어떻게 됐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해. 혼나고 싶지 않으면.”

“병원 보냈어요. 다음은 몰라요.”

“멀쩡해?”

“최소한 식물인간은 안 됐어요. 그건 의사가 안 봐도 제가 알아요.”

“됐어, 그럼.”

차유신이 정말로 됐다는 양 발목을 꺼떡거렸다. 이불 밑에서 새끼발가락 빈 오른발이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차유신은 새삼 신기한 눈매를 해 보였다. 당시에는 새끼발가락이 없어지면 생활하는 데 상당한 불편함이 따를 줄 알았다. 실제 겪어 보니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엔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모르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똑똑. 병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지도 않은 우태원이 말했다. 들어와. 열린 문틈으로 서재길이 나타났다. 한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다가온 그가 시트 위에 봉투를 뒀다. 차유신은 힐끔거리며 안을 봤다. 노랗고 팍신해 보이는 육면체 빵이 있었다.

“이겁니다.”

“확실해?”

“사장에게 직접 확인했습니다. 28년 전 미도동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한 적이 있다 합니다. 나중에 상월동으로 옮겨 지금까지 하는 중이고요.”

“두고 가.”

“네, 형님.”

서재길이 물러섰다. 밖으로 나선 그가 천천히 입구를 닫았다. 다물린 문이 옅은 잔음을 남겼다.

“알아보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우태원이 봉투 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빵이 빠져나왔다. 작지 않은 크기임에도 우태원에게 들려 있으니 어린애 간식 같았다. 차유신은 포장지를 뜯는 그를 물끄러미 봤다.

“선배가 일전에 얘기한 미도동 카스텔라예요. 어머니가 자주 사 줬다 한 거.”

“다시 먹고 싶다 한 적 없는데.”

“그래도 먹어 봐요.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라면서요. 일부러 구했어요.”

우태원이 시트 위에 포장지를 깔고 카스텔라를 올렸다. 차유신은 누워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켰다. 골반을 시트에 붙인 채 모로 눕고, 팔꿈치를 내려 턱을 괴었다. 눈앞에서 카스텔라 귀퉁이가 떨어졌다. 포실한 빵 덩어리를 잡은 손이 차유신의 앞으로 왔다.

“내가 빵 좋아할 것처럼 생겼나 봐.”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안에 빵을 넣어 준 우태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유신은 말없이 우물거렸다. 빵 조각이 누기에 젖어 흐물거렸다. 좋아하지 않는 맛과 촉감이 느껴졌다. 달고 녹녹했다.

“아까도 누가 당근케이크 사 줬어.”

“누가요?”

“기억 안 나.”

“권헌 의원이요?”

카스텔라를 보다 크게 뜯은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의 눈이 깜빡였다. 허탈한 반문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알아? 그걸. 대체 내 주변에 사람을 얼마나 붙인 거….”

“그냥 찍었어요. 아, 해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아랫입술에 빵 덩어리를 붙였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입 안을 내줬다. 스펀지 같은 밀가루 덩어리가 혀를 타고 굴러들어 왔다. 입가의 부스러기를 떼어 준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권헌이 선배를 아직도 많이 따르네요.”

“본인을 국회에 입적시켜 준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음부터 빵은 받아먹지 마요.”

“왜.”

“야해요.”

높낮이 없는 언어는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음식물을 꿀꺽한 차유신이 허, 했다. 빵 받아먹는 게 야하다는 얘기는 이상 성욕자로부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만 먹을래요?”

공허한 입을 다시는 차유신을 관찰하다 우태원이 카스텔라를 덮었다. 차유신이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왜 그런 걸 물어?”

“맛없어하는 것 같아서요.”

“맛없는 건 맞아. 어릴 때도 그리 맛있던 건 아니야.”

“그럼 그만 먹어요. 이따 집에 가서 맛있는 것 사 줄게요.”

“그래도 더 먹여 줘.”

턱에 걸린 머리통이 비스듬해졌다. 입술 틈에서 날연한 음성이 샜다.

“지금이 아니면 먹을 기회 없잖아.”

차유신을 담은 눈동자가 고심하듯 이동했다. 텅 빈 벽을 한참이나 훑다, 다시 카스텔라를 잡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덩어리가 뚝 떨어졌다. 차유신은 모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입 안을 보였다.

“선배.”

꽤나 깊숙이 들어온 손가락이 혀 위에 빵 조각을 올렸다. 차유신은 빠져나가는 손가락을 보며 혀를 간닥거렸다. 덩어리가 사르르 녹아 갔다. 녹진해지는 빵의 질감을 느끼며 차유신은 가마득한 어느 세월을 반추했다. 어머니가 카스텔라를 사 줄 때마다 발등이 간질거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여섯 살의 자신. 그건 설렘이었다.

차유신은 정말로 그때도 카스텔라가 맛있지 않았다. 다만 먹는 순간을 좋아했다. 그걸 먹고 있으면 보통의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의 부모에게서 자란, 보통의 이름이 있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몹시도 달콤했다. 이후에 먹은 그 어떤 비싼 간식도 따라잡지 못한 감미였다.

카스텔라를 먹는 차유신이 보통의 아이가 된 만큼, 카스텔라를 사 주는 어머니도 보통의 어머니가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 미도동은 옆 동네긴 하지만 어머니 입장에서 굳이 방문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오로지 카스텔라를 사기 위해 그 동네에 갔다. 차유신은 자신만을 위한 어머니의 종적을 먹었다.

그 시절이 존재하는 한 두 사람은 보통의 모자(母子)였다.

“미안해요.”

이어진 목소리가 비에 젖은 토양 같았다. 차유신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찌부러지고 잘잘해진 조각이 입 안 구석구석 흩어졌다. 본래 형태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우그러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이지만… 한 건 한 거니까요.”

차유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문드러진 카스텔라가 혀 위에 봉분처럼 모였다. 목소리가 들지도 나지도 않게 막아선 방파제 같았다.

박 변호사님께. 이 땅이 제 아들 ‘여울’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 관련 법적 조치를 부탁드립니다.

도희범으로부터 받은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어머니의 편지가 있었다. 아는 변호사에게 쓴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은 상당한 위기 상황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며, 이 편지를 부칠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편지 말미에 덧붙였다.

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 아이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합니다. 제 아이는 어느 순간 제 이름 두 자를 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이라도 남기게 해 주십시오.

“사실 그날 일은 잘 기억이 안 나요. 워낙 어릴 때여서요. 역운회 건물에 있었는데, 평소 저를 돌봐 주던 역운회 사람이 지하실 불을 켜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갔더니 안은 아주 깜깜했고, 한 여자가 있었어요. 스위치를 켜러 왔다 했더니 묶인 손을 억지로 움직여 봉투에다 뭔가를 적어 줬어요. 너희 아버지가 자주 간 이 근방 ‘여울’에다 이걸 갖다 주라 했어요. 위에 적은 건 제가 이걸 잊지 않도록 일부러 제 인상착의를 명시한 것이었겠죠. 나중에라도 기억해 전해 줄 수 있도록.”

차유신은 말없이 입 안을 곱씹었다. 젖은 밀가루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울에는 못 갔어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역운회 사람이 저를 데리고 석일태 회장 자택으로 이동시켰거든요. 서류는 제 짐 가방에 넣어 두고 오랫동안 잊었어요. 그러다 중학생 무렵 석 회장 집이 이사를 하며 저도 함께 짐을 쌌는데, 정리를 하다 보니 그게 나오더라고요. 보자마자 두려워져 버려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문제는 이사를 하고 나서였어요. 어느 순간 사라져 있더라고요. 누가 가져갔나 싶어 초조하면서도 그걸 더 이상 안 봐도 된다는 안도감이 더 커 흐지부지 넘어갔죠.”

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언제까지 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삼켜야 했다. 먹기 위해 입에 넣었으니,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나중에 도희범으로부터 서류 카피본을 받고 흘러간 경위를 추적해 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훈석이 형밖에 나오지 않더라고요. 훈석이 형이 그날 이사를 도와주러 왔고, 내내 저와 함께 있었거든요. 게다가 훈석이 형은 오랫동안 도희범과 연락하며 지냈으니, 훈석이 형이 빼돌린 걸 도희범이 훔쳐서 혹은 모종의 이유로 전달받아서 보유하게 된 것이라 보면 퍼즐이 맞아떨어지죠.”

욱여넣어진 빵 덩어리가 식도 입구에 걸렸다. 그대로 삼키면 되지만, 도무지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식도를 억누른 섭식 장애가 또 널을 뛰고 있었다. 차유신은 그만 기침을 했다. 쿨럭이는 소리와 함께 빵 조각이 튀어나왔다. 우태원이 서둘러 차유신의 어깨를 잡았다.

“선배, 괜찮아요?”

“하… 괜찮아.”

“물 갖다줄게요.”

“괜찮아. 정말로.”

일어나려는 우태원의 팔뚝을 무작정 잡았다. 관이 꽂힌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폴대가 덜컹거렸다. 바늘이 쑥 빠지고, 가죽에서 피가 났다. 차유신은 대수롭지 않게 바늘을 치우며 다시 우태원을 거머쥐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말했잖아. 둘 다 모른 척하면 된다고.”

잔뜩 쉰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눈시울에서 사뭇 맥이 빠졌다. 흘러내린 눈길이 시트 위 카스텔라에 걸렸다. 군데군데 뜯긴 빵이 무너지기 직전의 젠가 같았다. 차유신의 입술 틈에서 기진한 호흡이 샜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열은 없지만 독감에 잠식된 것처럼 기골이 무기력했다. 참으로 희한했다. 이런 증상은 9월에만 겪었는데, 왜 10월에까지 이러고 있을까.

몸이 시간을 잊은 모양이다. 몰라서, 혹은 지쳐서.

“괜찮다면서 왜 이 모양인데요.”

포효를 억눌러 가며 꺼내는 듯한 한마디가 들렸다. 차유신은 잠연히 눈만 깔았다. 부서진 카스텔라에서 벗어나, 그 옆의 봉투를 봤다. 시야가 문득 까물거렸다. 기시감이 있는 로고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HAPPY HAPPY. 28년 전 봉투에도 저런 글자가 있었다. 애초에 빵집 이름이 ‘해피 베이커리’였다. 흔하며 촌스러운 이름이다.

해피할 일 없는 어머니와 해피할 일 없는 아들은 싸구려 카스텔라를 주고받으며 값싼 위로를 얻었다. 그건 삶에 있어 너무나 작은 부분이지만, 돌이켜 보건대 그 시절만큼 서로가 모자다웠던 시간이 없었다.

서로의 존재를 규정하는 계기가 이리도 하찮다.

“왜 저를 보지 않아요?”

부식된 듯 눅눅한 질문이 귓가에서 맴을 돌았다. 메아리처럼 번지는 잔음이 해묵은 로고에 껌처럼 들러붙었다. HAPPY. 차유신은 발작하듯 우태원을 옥죈 손안을 움츠렸다. 꽉 잡힌 우태원의 팔뚝이 불룩거렸다. 폭발할 양 다는 그의 혈관이 느껴졌다. 차유신은 미적미적 목구멍을 틔웠다. 내내 깊숙이 처박혀 있던 언어를 건져 내, 혀 위에 올렸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 좀 갖자.”

우태원의 팔에서 끝내 맥관이 솟았다. 불뚝거리는 피 주머니가 손바닥을 달궈 왔다. 차유신은 덩달아 홧홧해지는 제 손금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냥 나 혼자 머리 좀 추스르고 싶어서 그래.”

“왜 그래야 하는데요? 괜찮다면서요. 선배 입으로 한 얘기잖아요.”

“맞아. 괜찮은데, 다 괜찮은데 말이지.”

얼핏 본 우태원의 눈동자가 풍랑에 사무친 달 같았다. 차유신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행성처럼 그를 일별했다. 우태원을 담다 만 눈망울이 미끄러졌다. 그가 비치지 않는 구석으로, 더 구석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다다른 곳에는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칠야였다.

“괜찮은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우태원을 죈 손이 풀렸다. 차유신은 그만 눈을 감았다. 밤보다 짙은 어둠이 시계를 잠식했다. 차유신은 밑바닥에 내몰린 사람처럼 탄식했다.

“나도 사람이잖아, 태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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