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리셋
8.
-네, 방금 폴더 접근했어요. 보안 엄청 잘 뚫리네. 이거 꽤 인기 있는 국산 백신 프로그램인데, 실망이에요. 지금 십 분도 안 걸렸거든요.
“네 해킹 툴이 좋은 것 아니고?”
핸드폰을 귀에 댄 차유신이 물었다. 반대편의 성윤일이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그런 것도 있고요.
“빨리 날려.”
-방금 했어요.
“클라우드 쪽은. 안 올라간 것 확실해?”
-네, 기록이 없네요. 나이 든 사람은 간혹 이렇더라고요. 클라우드에 올리는 게 더 위험하다 생각하는 건지.
“나이 먹었다 하지 마라. 그 새끼 나하고 차이도 별로 안 난다.”
-네에, 그러시겠죠.
성윤일이 건성으로 응수했다. 차유신이 혀를 찼다. 새끼가. 막 커피 두 잔을 트레이에 올린 의원 회관 카페테리아 아르바이트생이 흠칫했다. 손을 내저은 차유신이 오해를 풀었다. 통화, 통화. 아르바이트생이 멋쩍어했다. 네, 의원님.
“커피 나왔어요?”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렸다. 돌아본 차유신이 트레이를 가리켰다. 알아들은 우태원이 트레이를 뺐다. 한 걸음 물러난 그가 카운터 쪽에 정중히 인사했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맛있게 드세요, 의원님. 휘 몸을 튼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네.”
-제가요? 갑자기요? 왜요?
성윤일이 황당해했다. 우태원의 등을 보며 걷던 차유신이 읊조렸다.
“글쎄다. 나이 먹었나 보지.”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형 그렇게 나이 많지도 않잖아요. 입 다물고 있으면 대학생 같고.
“그럼 입 다물고 있을까? 끊어. 이따가 예고한 시간에 PC 다운시켜 버리고, 마치면 문자해.”
핸드폰을 얼굴에서 거둔 차유신이 통화 종료 아이콘을 눌렀다. 액정에서 성윤일의 이름이 사라졌다. 나아간 구둣발이 테이블을 찾아 앉은 우태원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착석한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되게 친절하네.”
“아르바이트생한테요? 선배보단 아니지 않을까요.”
우태원이 커피 잔을 들며 물었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되지만 네가 안 돼.”
“왜죠.”
“내가 더 너에게 간절하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난 여기서 너에게 입 맞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
차유신이 커피 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우태원의 윗눈썹이 굼틀거렸다. 흘러간 그의 눈길이 주변을 살폈다. 오가는 수십 사람을 하나하나 훑다, 곧 차유신을 주시하며 입을 뗐다.
“전 힘들겠습니다.”
“거봐.”
“정확히 말하자면 안 하는 거죠.”
“왜.”
우태원이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진지한 응답이 들렸다.
“제가 선배에게 하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선배에게 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커피를 머금고 난 차유신의 어깨가 나른하게 처졌다. 꾸준하게 미친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문득 차유신의 손이 재킷 주머니로 들어갔다. 빠져나온 트럼프 카드 케이스가 맞은편에 건네졌다. 받아 든 우태원이 안을 열어 봤다. 빼곡하게 들어찬 트럼프 카드 사이사이에 체크 카드 여섯 장이 꽂혀 있었다. 대충 본 우태원이 케이스를 덮었다.
“이걸 여기서 줍니까.”
“남의 재산 쓸데없이 오래 갖고 있는 것 아니야. 다 썼으면 바로바로 돌려줘야지.”
“저는 계속 갖고 있는 쪽을 기대했는데요.”
“네 명의 카드 계속 가져서 뭐 하게.”
“좀 서운하네요.”
“얼마 빠졌는지는 확인했어?”
“안 했어요.”
“어디에 썼는지는. 안 물어봐?”
“생각 없어요.”
케이스를 주머니에 넣은 우태원이 뇌까렸다.
“배우자가 내 돈 빼 간 걸 두고 뭐 하러 일일이 따집니까. 쓰면 쓴 거죠.”
차유신이 실눈을 떴다.
“우리가 결혼했었나.”
“그럼 안 했나요?”
“신고 안 했잖아. 할 수도 없고.”
“법 개정 추진할까요?”
“하지 마. 규정당하는 거 안 좋아해.”
차유신이 커피 잔을 기울여 입을 축였다. 단호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내 소유물을 소유물이라 하는 데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아.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잖아.”
“이름이 없다는 건, 모든 게 이름이 된다는 얘기죠. 언제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된다는 얘기고.”
“당연하지.”
“그러죠, 형.”
기습처럼 들려온 호칭에 무릎이 들썩였다. 들고 있던 잔 안에서 검은 수면이 출렁였다. 차유신은 동요하는 시선을 느릿느릿 맞은편에 걸었다. 마주 본 우태원이 입을 열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 해 불렀습니다. 아직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듣는 입장에서 나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슴거린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커피 잔이 머뭇머뭇 내려갔다. 가까스로 테이블 위에 두고, 낮은 심호흡을 했다.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 차유신의 손이 제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목을 꿀꺽거리다, 슬쩍 아래를 봤다. 기어코 확인한 현실에 오금이 저렸다. 차유신은 소리 없는 욕설을 씹었다.
돌아도 단단히 돌아 버린 모양이다. 왜 우태원이 하는 ‘형’ 소리에 좆을 세웠을까. 때도 장소도 가릴 줄 모르는 발정기 동물처럼.
“아, 이거 봐 줘요.”
문득 우태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억지로 치부를 가라앉힌 차유신이 눈망울을 끌어 올렸다. 눈앞에 놓인 액정에서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지켜봤다.
개 동영상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쯤 됐을 법한 검은색 개가 시골집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영상을 찍는 사람이 공을 멀리 던지자, 학학거리며 뛰어가 물어 왔다.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쳐드는 개를 주인이 쓰다듬어 줬다. 짧은 영상이 끝났다.
“귀엽네.”
무미건조한 반응이 나왔다. 자못 진정을 찾은 허벅지에서 손이 떨어졌다. 도로 커피 잔을 드는 차유신에게 우태원이 말했다.
“우리 비서관 부모님 집에서 키우는 개예요. 본가가 시골인데, 개만 다섯 마리를 기른대요. 그중 하나고요. 가장 막내예요.”
“뭐 하는 개야?”
“딱히 하는 일은 없어요.”
차유신은 질문을 정정하기로 했다.
“어떤 개냐고.”
“진돗개예요.”
“좋겠네. 혈통도 있고.”
“마음에 드시는 거죠?”
“들고 말고가 어디에 있어. 그냥 개인가 보다 하는 거지.”
차유신이 심상하게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관찰하던 우태원이 고갯짓을 했다.
“그 정도면 됐죠. 까다로운 분께서.”
차유신의 눈매가 찌뿌듯해졌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우태원을 살피다 부루퉁하게 따졌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야? 전에 없이 귀여운 짓을 하고.”
“귀여운 걸 보여 줬지, 귀여운 짓을 하진 않았는데요.”
“나에겐 그게 그거야.”
입 안에서 굴러간 커피 한 모금이 삼켜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까 ‘형’이라 부른 것을 지칭한 것이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기 민망했다.
“그렇군요.”
눈을 맞춘 우태원이 픽, 웃었다. 잠잠하던 그의 눈초리가 휘었다. 무채색을 닮은 혼잣말이 들렸다.
“워낙 불안해 교기를 부렸나 봅니다. 제가.”
*
[공항 도착했어요. 게이트예요 ♡]
메시지 하단에는 탑승장 입구를 찍은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잇달아 뜬 하트며, ‘Thank U’ 글자를 단 이모티콘들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차유신은 잠자코 갓 받은 메시지를 눌렀다. ‘삭제’ 아이콘을 클릭해 차례로 지웠다. 석연치 않은 독언이 나왔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현관 앞에 섰다. 키패드를 활성화하고 익숙한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지막 숫자를 누르자마자 삐리릭, 잠금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젖히고, 어두컴컴한 집안에 들인 발이 무춤했다. 등줄기를 타고 냉한 기류가 흘러내렸다.
누군가 와 있다. 한 명이 아니다.
“누구야.”
닫히기 직전의 문을 탁, 짚은 차유신이 소리쳤다. 입에서 밭은 호흡이 터졌다. 깜깜한 사위를 헤아리던 눈이 부릅떠졌다.
어둠 속에서 서벅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침착하게 기척이 비치는 쪽을 노려봤다. 암흑에 사로잡힌 인영에 서서히 빛이 스몄다. 확인한 차유신의 눈초리가 느슨해졌다. 문을 받친 손이 풀렸다. 탕, 입구가 닫혔다.
“남의 집에서 불은 왜 끄고 있어. 귀신놀이라도 할 셈이야?”
짜증을 낸 차유신이 벽을 더듬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빠르게 안이 환해졌다. 거실을 둘러본 차유신이 가는눈을 떴다. 안을 채운 매천회 조직원이 열 명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귀신놀이는 의원님께서 하셨죠.”
도희범이 건들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불쾌감이 형형한 면상을 일별한 차유신이 발걸음을 돌렸다. 저벅저벅 냉장고로 가 문을 열었다. 안에서 탄산수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입구를 물고 벌컥거리다, 도희범에 곁눈질을 했다. 차디찬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언제 그런 걸 했어.”
“갑자기 뒤통수치는 게 귀신놀이가 아니면 뭡니까.”
도희범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두어 번 접힌 종이였다. 그대로 펼쳐 차유신을 향해 전면을 드러내고는, 분연히 팔랑였다. 차유신은 묵묵하게 상단에 적힌 글자를 봤다. 증인출석요구서.
“정치질 하다 보면 국감 때 출석 요구 좀 할 수 있지. 난 국토위 위원이고, 모든 건설사는 내 피감 기관 관계사야. 너 국토부 차관한테 돈 먹이고 일정3구역 일부 수주받은 것 맞잖아. 비리를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 당연한 걸 두고 뭐 성을 내고 있어? 아마추어처럼.”
“의원님, 진짜로 이러실 겁니까.”
도희범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차유신은 태연하게 허리를 짚었다. 손가락으로 셔츠를 툭, 툭, 건드리며 생각했다. 슬슬 비행기에 오를 때가 됐는데.
“저에게 이래도 되는 입장이 아닌 걸로 압니다만.”
부쩍 간격을 좁힌 도희범이 교근을 불룩거렸다. 갸웃한 차유신이 물었다.
“뭐. 그 동영상?”
“굳이 말로 해야 압니까.”
“참 그 영상이 좆같긴 하지. 내가 금배지 단 이래 같잖은 남의 부탁 들어준 일이 참으로 드문데, 그걸 가능케 했으니. 덕분에 마음고생 적잖게 했어.”
말을 마치자마자 주머니에서 지잉,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간 차유신의 손이 핸드폰을 뺐다. 환한 액정에서 유치찬란한 이모티콘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밑에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비행기 창을 배경에 두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20대 초반 여성의 모습이었다.
[비행기 탔어요. 곧 출발해요. 유학 생활 잘할게요. 잘생긴 의원님 ♡♡♡♡♡ 최고 최고!]
“그래서 아예 날려 버렸어.”
액정을 끈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맞은편의 도희범이 멈칫했다. 눈길을 끌어 올린 차유신이 못을 박았다.
“네 핸드폰, 사무실 컴퓨터. 해킹해서 동영상이고 뭐고 전부 날렸다고.”
“그게 무슨…!”
도희범의 턱이 파들거렸다. 엉거주춤 선 채 숨을 고르다, 급하게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빠져나온 핸드폰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전원이 나가 시커멓기만 한 액정을 바라보며 전원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기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있는 김석준 연락해 봐!”
뒤돌아본 그가 외쳤다. 이미 조직원 중 하나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막 핸드폰을 얼굴에서 거둔 그가 불안정하게 입을 열었다. 낯빛이 완연한 사색이었다.
“컴퓨터가 갑자기 혼자서 켜지더니, 어느 순간 불통이 됐다 합니다.”
“이런 씨발!”
악을 쓴 도희범이 다시 차유신을 봤다. 치뜬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씩씩거린 그가 고함을 터뜨렸다.
“대체 뭐야. 뭔 짓을 한 거야!”
“그러게 사람 보는 눈 좀 키웠어야지. 안목이 나쁘면 몸이 고생해.”
심드렁한 응수가 나왔다. 내내 어깨만 뜰썩이던 도희범이 불현듯 경직됐다. 차유신이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듯, 소스라치게 목을 울렁였다.
“정수영.”
차유신은 딱히 반응하지 않고 또 탄산수병을 입에 댔다. 알싸한 냉수를 꿀꺽거리다 보니 시원한 파도를 흡수한 것처럼 머리가 개운해져 왔다. 어차피 그 정수영은 지금쯤 공항을 떴을 테니 이제는 알아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정수영은 역삼동 프라이빗 요정에서 근무하는 ‘예영’의 본명이었다.
[일장토건 도희범 대표로부터 연락 옴. 차유신에게 접근해 정보 빼내면 돈 주겠다 함. 거절했지만 참고하세요.]
그날 브런치 가게에서 정수영이 던진 영수증에는 그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차유신은 대충 읽고 주머니에 넣은 뒤 잊었다. 자신과 정수영이 아주 친한 사이인 걸로 도희범이 오해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 그렇지 않았으므로 정수영은 거절한 것이고. 어쨌거나 도희범이 자신을 쥐락펴락하고 싶어 한다는 것 하나는 잘 알았다.
정수영에게 연락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장어집에서 만난 도희범이 우태원의 신경을 긁다 간 날의 밤이었다. 차유신은 도희범이 자신뿐 아니라 우태원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걸 알았을 때 더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 주지 않기로 했다. 자신에게 손대는 건 몰라도 제 소유물에 손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마담에게 전화해 정수영의 번호를 알아낸 다음, 개인적으로 연락해 만났다. 차유신의 요구는 도희범의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었고 정수영은 받아들였다. 그녀는 대가로 미국 유학비를 요구했고, 차유신은 그리하겠다 했다. 그 정도 여윳돈은 있었다.
요구는 기존 도희범이 정수영에게 제안한 것을 역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다음 날 정수영은 도희범의 제안을 받아들인 척 접근했다. 도희범의 지시대로 도청기 몇 개를 차유신의 의원 사무실이며 집에다 설치했다. 도청기의 위치를 아는 차유신은 제한적인 음성만을 흘렸다. 간혹 정보가 될 만한 얘기를 일부러 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영양가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정수영은 우태원의 김후준 시신 인멸 영상이 일장토건 대표실 PC와 도희범의 핸드폰, 두 곳에만 저장돼 있음을 확인했다. 도희범에게 술을 많이 먹인 뒤 만취한 그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걸 전부 녹취해 차유신에게 들려줬다. 확인한 차유신은 본격적으로 영상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이제는 기업 가치 5,000억 원 수준으로 성장한 IT 스타트업 컨리드의 성윤일에게 연락해 도희범의 PC와 스마트폰 해킹을 주문했다. 그는 해킹 자체는 가능하나 PC와 스마트폰에 악성 코드를 심을 수단이 필요하다 했다. 여기에는 정수영이 일조했다. 그녀는 차유신에 대한 정보 수집 보고를 정리해 도희범의 이메일에다 몇 차례 보냈다.
이메일에는 성윤일이 개발한 악성 코드가 심겨 있었고, 도희범이 스마트폰과 대표실 PC에서 열어 본 순간 빠르게 기기에 설치됐다. 이 중 PC에 설치된 건 원격 조종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악성 코드가 활성화되는 시기는 설치 직후가 아니었다. 정수영의 안전을 고려해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뜨는 시간 무렵으로 설정했다. 프로그램은 예정된 시간에 가동했다. 도희범의 스마트폰은 먹통이 됐고, 앞서 원격 조종 프로그램을 통해 대표실 PC에 접근한 성윤일은 저장된 파일들을 뒤져 본 뒤 동영상 이외의 특이점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운시켜 버렸다.
차유신을 위협하는 가장 큰 카드가 그렇게 제거됐다.
“이게 다가 아닌 건 아시죠.”
한참이나 씨근덕거린 도희범이 운을 뗐다. 겨누는 눈빛은 초조함 속에서도 약간의 기세가 남아 있었다. 차유신은 시큰둥한 고갯짓을 했다. 비아냥거리는 대꾸가 나왔다.
“뭐 말하는 거야. 혹 석일태가 우태원 계좌에 돈 부친 거?”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해졌다. 차유신의 어조가 느른해졌다.
“정확하게 412억 4,903만 3,182원. 그대로 우태원 통장에 있던데.”
차유신의 눈매가 고이 접혔다.
“우태원 카드들 받아 계좌 하나하나 까 봤어. 총 여섯 개인데, 그중 세 개가 실질적으로 쓰는 계좌고 세 개는 손도 안 댄 계좌더라고. 그 손 안 댄 계좌가 석일태 자금이 묻힌 곳이고. 석일태가 어떤 의도로 돈을 넣어 뒀든, 우태원이 쓰지 않았고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잡아떼면 그만이야. 좀 애매한 돈이긴 하지만 국가 기관에서 환수할 법적 근거가 없는 건 확실하지.”
차유신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을 짚었다. 사진첩에 있는 파일 하나를 클릭해 도희범 쪽에 내보였다. 우태원이 만 2세인 시절 석일태가 신청한 미성년 후견인 선임 판결 결과였다.
“석일태는 우태원의 법정 후견인이었고, 재판 당시 ‘우태원을 아들처럼 기르겠다’고 진술했어. 이걸 토대로 본다면 우태원의 계좌로 이동한 석일태 자금은 단순 증여야. 우태원의 의지와 별개로, 석일태 쪽에서 아들처럼 생각한 사람에게 꾸준하게 재산을 물려준 거지. 합당한 증여세만 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세간의 논란? 아버지가 양아들에게 재산 좀 준 건 얘깃거리도 안 돼. 심지어 우태원은 이를 악용한 정황이 없지.”
차유신이 핸드폰 화면을 껐다. 옆의 테이블에 툭, 내려놓고 태연하게 도희범을 봤다. 예사로운 질문이 건네졌다.
“또 뭐 할 말 있어?”
도희범의 이가 악물렸다. 그저 안면만 붉히는 그를 응시하다, 차유신이 발을 내밀었다. 부들거리는 그를 지나쳐 침실로 걸어가며 손을 휘저었다.
“조용한 것 보니 없나 본데, 가 봐. 내 방에 설치된 도청기는 잘 돌아가고 있어. 머릿수 믿고 달려들었다가 괜한 증거 남기지 마. 도청 기록은 그쪽 사무실뿐 아니라 내 사무실로도 실시간 전송되고 있거든.”
“차 의원님.”
돌연 도희범이 불렀다. 막 재킷을 벗은 차유신이 뒤를 돌아봤다. 귀찮음이 역력한 눈빛이 도희범에 걸렸다. 마주 본 도희범이 들숨을 삼켰다. 가까스로 추스르는 낯이 보였다. 그의 눈망울이 오롯해졌다.
“인정하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아. 진 수준이 아니라 대가리가 깨질 정도로 까였지. 그러게 감히 누굴 건드려? 다리 뻗을 곳 정도는 알아보고 까불어야지.”
“패배의 대가로 미도동 땅 드리겠습니다. 관련 문서를 전달해야 하니, 그쪽 빌딩으로 가시죠.”
“귀찮게 뭘 굳이. 내 사무실로 부쳐. 피곤하니까.”
“직접 가지러 오시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재킷을 팔랑이는 차유신의 귓가에 탁한 음성이 스쳤다. 차유신은 재차 도희범을 바라봤다.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귀찮다는데 뭘 자꾸 직접 하래? 시답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내 집에서 나가. 나 잠 좀 자자.”
“그 땅, 차 의원님 어머니 땅입니다.”
차유신의 귓바퀴가 꿈틀거렸다. 도희범의 고개가 반듯해졌다. 쐐기를 박는 언어가 따라붙었다.
“직접 확인하고 가져가시죠, 어머니 땅.”
*
미도동에 있는 문제의 건물에서는 빵 냄새가 났다. 달고 부드러운, 카스텔라 냄새. 차유신은 복도를 걷는 내내 코를 훔쳤다. 밋밋한 제 손등을 보며 생각했다. 하여간 역현구에 속한 것들이란 눌어붙은 껌처럼 너저분하며 지긋지긋하다. 한번 각인되면 도무지 지워지지를 않는다.
“오셨습니까, 형님.”
가장 꼭대기 층에 다다른 도희범이 어느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대기하던 대여섯 명의 남자가 넙죽거렸다. 힐긋한 차유신의 머리가 돌아갔다. 일부가 일전에 자신과 우태원에게 얻어맞은 남자들이었다. 차유신은 괜히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알아봐도 저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가능하면 몰라봤으면 싶었다. 저런 놈과 잠시마나 동일 선상에 존재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그거 가져와.”
도희범이 손짓했다. 알아들은 조직원이 후다닥 금고로 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 후,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받아 든 도희범이 차유신의 앞으로 왔다. 세월이 적잖게 묻어 군데군데 헌 갈색 종이가 건네졌다.
“확인해 보십시오.”
내려다본 차유신의 눈이 옴씰거렸다. 겉면에 휘갈겨 쓴 문장이 익숙했다.
전달자: 스위치 올리러 온 애. 3살. 검은 머리.
잘 부탁해.
언젠가 우태원의 집 앞에서 발견한 봉투에 적힌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게 원본입니다. 일전에 보신 건 일종의 모조품이고요.”
도희범이 데스크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차유신은 의아한 눈으로 도희범과 봉투를 번갈아 봤다. 모조품이라고. 일전에 우태원에게 배달된 건 이를 흉내 낸 것이고, 지금 차유신의 손에 들어온 이것이 진짜라는 얘기인가.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이게 대체 뭐라고 따로 모조품을 만든 것인지. 그걸 왜 굳이 우태원에게 전달했고.
그걸 본 우태원은 왜 눈에 띄게 당황한 것인지.
일단 봉투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 몇 장이 빠졌다. 봉투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낡은 티가 났다. 눈앞까지 가져와 찬찬히 내용을 훑었다. 상단의 글귀가 우태원의 집에서 본 것과 같다. 등기사항전부증명서.
이하는 당시 보지 못한 내용. 무려 28년 전의 날짜가 적혀 있고, 역현구 미도동의 330㎡ 규모 대지에 대한 내역이 붙어 있다. 특별한 용도 설명 없이 소재 지번만 찍혀 있다. 차유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이 건물 지번이 여기에 적힌 것과 같다.
종이를 넘겼다. ‘소유권에 관한 사항’ 페이지가 나왔다. 등기목적과 접수일, 등기원인 등을 훑던 차유신의 눈이 문득 멎었다. 너무나 잘 아는 이름이 차례로 나타났다, 석일태, 그리고 서인. 초기 소유자는 석일태였으나 이후 서인으로 바뀌었다. 등기원인에는 ‘증여’라고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석일태가 서인에게 이 땅을 선물한 거다.
“석일태 회장이 황무지 같던 미도동 땅을 이 잡듯 헐값에 사들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중 일부를 본인이 아끼는 방석집 여사장에 줬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 그 여사장이 실종됐죠. 여사장의 호적에는 부모나 배우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소유권이 공중에 붕 뜬 상태로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결국 국가로 귀속돼 경매로 나온 걸 제가 샀고요. 이후 여기에 건물이 올라가며 대지 용도가 변경됐기 때문에, 현존 등기부등본에는 해당 소유권 내역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도희범이 설명했다. 차유신은 말없이 봉투 든 손을 내렸다. 오랜만에 어머니 이름을 보니 어지러웠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머지는 가서 확인할 셈이었다.
봉투를 꽉 쥔 채 말도 없이 몸을 틀었다. 그대로 입구를 향해 가려던 찰나, 뒤에서 팔뚝이 잡혔다. 찌푸린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어느새 다가온 도희범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냥 드릴 순 없죠.”
“어쩌라는 거야. 어차피 이 문서는 이제 아무런 효력이 없잖아. 대지 매각과 관련한 협상을 하고 싶다면 서울시장 윤학경을 만나. 이걸 평당 1억 원에 팔든, 시에 기부를 하든 나는 알 바 아니야. 모로 가든 이게 서울시에 넘어가기만 하면 돼.”
“가격은 서울시 제안에 맞출 겁니다. 이걸로 욕심내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그럼 됐네.”
“다만 제 포기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는 해 주셔야죠.”
도희범의 어조가 딱딱해졌다. 차유신이 눈 밑이 옴짝거렸다. 도희범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석면을 삼킨 것처럼 텁텁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저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 출석 요구 철회해 주십시오.”
“좆이나 까. 생각 없어.”
단박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유유히 걸어가고 있자니, 뒤편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은 문손잡이를 잡으며 곁눈질을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입매를 꼰 도희범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참으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요.”
“뇌물죄로 법원 좀 들락거리는 게 대수야? 운 나빠도 일 년 이상은 안 살아. 그 정도면 대한민국 CEO 여름 성경 학교지. 공부하는 셈 치고 다녀 와. 교도소 밥 좀 먹는다고 안 죽어.”
“그래요. 참고하죠.”
도희범이 비식거렸다. 남은 것조차 내려놓은 탓인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낯이 두드러졌다. 공허한 호흡을 가눈 그가 부쩍 경건한 목소리를 냈다.
“주신 선물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저는 판도라의 상자를 드리죠.”
갓 돌아간 문손잡이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걸 잊고 도희범을 봤다. 미지근한 곡풍에 휩싸인 것처럼 안락해 보이는 얼굴이 조금 신경 쓰였다. 자신의 상식이 맞는다면, 도희범은 이 상황에서 저런 표정을 지어선 안 됐다.
“돌아가면 배달부에게도 그 봉투 보여 줘요. 본래 주인은 그쪽이니.”
“무슨 배달부.”
차유신의 눈살이 찡그려졌다. 들은 체도 하지 않은 도희범이 돌아섰다. 뚜벅뚜벅 데스크를 향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지극히 상냥한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봉투에 적혀 있잖아요. 스위치 올리러 온 애. 3살. 검은 머리. 잘 부탁해.”
데스크에 다다른 도희범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목을 젖힌 그가 이기죽거렸다.
“그거 차 의원님 어머니가 세 살짜리 우태원에 서류 들려 보내며 적은 거예요. 죽기 직전에.”
*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유신은 외출한 차림 그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톡, 톡, 톡. 차유신은 시들어 가는 나무처럼 앉은 자리에 못 박혔다. 초침 소리가 누적될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언뜻 본 TV장 위 디지털 달력에는 오늘의 날짜가 찍혀 있다. 9월 30일. 차유신은 침침한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아직도 9월이구나. 올해 9월은 워낙 빠르게 흘러가 진작 10월이 된 줄 알았다. 예년보다 빠르게 국정감사가 시작돼 더 그랬다. 그런데 아직도 9월이었다. 그 빌어먹을 시절이었다.
작년 9월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정훈석이 죽은 이래 처음으로 얻은 평안한 가을이었다. 그런 9월이 존재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없던 걸 얻자 오만한 확신이 생겼다. 내년 9월도, 내후년의 9월도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실제로 그런 줄 알았다. 올해 9월이 전부 간 줄 알고 한 착각이었다.
차유신은 종종 멍청했다. 세상을 눈앞에 뒀을 때에 차오른 총명함은 스스로의 내면에 직면한 순간순간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아끼는 것에 신경을 사로잡히면 누구보다 우매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신의 9월이 괜찮은 줄 알았다.
딩동. 입구 쪽에서 벨 소리가 났다. 배치작배치작 일어난 몸이 현관을 향했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남자 실루엣이 나타났다. 차유신은 대충 훑고 몸을 돌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태원 형님 모르게 오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등 뒤에서 신발 벗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말없이 소파로 돌아갔다. 아까의 자리에 앉고는 고개 숙여 이마를 짚었다. 서벅서벅 다가온 서재길이 눈앞에 그림자를 띄웠다. 차유신은 까만 응달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돌아가?”
“모레 비행기 잡았습니다.”
“우태원이 지시한 건. 잘 해결했어?”
“해결 중입니다.”
“뭔지는 물어봐도 답 안 하겠지.”
“죄송하게 됐습니다.”
서재길은 정중하게 수긍했다.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우뚝 선 채 뒷짐을 진 장대한 남자가 보였다. 차유신의 목덜미가 느슨해졌다. 곤로한 눈길이 그에게 걸렸다.
“우태원 지시와 관련한 게 아니라면 답해 줄 수 있어?”
“어떤 것인지에 따라 다르지요.”
“우리 어머니에 대한 건데.”
서재길의 어깨가 진동했다. 차유신은 메마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망 과정이 궁금해. 마지막에 역현호에 빠진 건 알아. 하지만 그건 시신이 된 이후의 일이겠지. 통상 역현호에 빠지는 것만으로 사람이 죽진 않으니까.”
“그건… 그렇지요.”
서재길이 난감한 듯 입을 다셨다. 차유신은 늘어진 손으로 시트를 잡았다. 본의 아니게 몸이 처져 가고 있었다.
“얘기해 봐. 워낙 궁금해 그래.”
“들어서 의원님께 득이 될 게 없다 생각합니다만.”
“안 들어서 멍청해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차유신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자못 단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지금 좀 멍청해지고 있는 것 같거든.”
서재길의 목이 쿨렁였다. 난처함에 젖은 눈이 굴러갔다. 방황하듯 허공을 살피다, 가까스로 차유신을 응시했다. 돌 같은 검은자위에 흐트러진 차유신의 인영이 비쳤다.
“전기 충격이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생소하면서도 아찔했다. 바닥을 디딘 차유신의 발가락이 옹송그려졌다. 차유신은 간신히 대꾸를 냈다.
“무슨 전기 충격.”
“말 그대로입니다. 과거 역운회에서 자주 쓰던 방식입니다. 자백을 이끌어 내야 하는 상황에서 고문을 지속하다 최종적으로 목숨을 끊는 겁니다.”
“그런 기기가 있었나 보네.”
“예전에 있었지요. 어느 순간 폐기 처분했지만.”
“전기 흘리는 건 누가 했어. 석일태가 직접?”
“고문할 때는 그랬고, 죽기 직전에는 다른 이를 시킨 걸로 압니다.”
“부하 직원?”
“그게….”
서재길이 뜸을 들였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을 거들떴다. 또 난색에 물든 그의 낯이 자꾸만 미간을 좁혔다. 차유신은 차분하게 인내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한 시간, 하루, 그 이상도 가능했다.
자신이 생각한 ‘그것’만 아니라면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 부하 직원을 시켰는데, 밑의 직원들이 서로에게 전가하느라 바빴다 합니다.”
“사람 죽이는 게 처음도 아니었을 텐데, 뭘 그랬대.”
“역운회 남자들이 암암리에 서인 사장을 무서워했습니다. 특유의 분위기가 웬만큼 흉포한 남자를 압도할 정도였다 합니다. 저는 직접 뵌 적이 없어 모르지만요. 아무튼 잘못 건드렸다 잠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는지 마지막에 전기 흘리는 걸 전부 기피했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래서 사람을 사 시켰죠. 역운회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거실이 고적해졌다. 차유신의 숨결이 차가워졌다. 뭉그적뭉그적 비껴 난 시선이 베란다 창에 걸렸다. 시커먼 밖에서는 우련하게 빛나는 몇몇 건물 조명이 비칠 뿐이었다. 규정된 해역을 벗어나 갓 접어든 망망대해 같았다.
“제3자는 상황을 모르니까요. 그냥 고문실로 가서 ‘불 켜는 스위치를 누르고 오라’고만 시킨 거죠. 사실 그건 전기 충격기 버튼이었지만요. 매수된 사람은 지시받은 대로 했고….”
“알았어. 그만.”
차유신이 불현듯 도리질을 쳤다. 움찔한 서재길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눈가를 손으로 덮은 차유신이 태식했다.
“이만 가 봐. 나 좀 쉬게.”
“편히 주무십시오.”
서재길은 보고를 마친 사람처럼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바닥에 발 쓸리는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차유신은 멀거니 바닥을 내려다봤다. 구두를 신는 소리, 문을 열고 나서는 소리, 마지막으로 문 닫히는 소리가 그칠 때까지. 대양을 표류하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는 표면만을 뚫어져라 봤다. 그러다 돌연, 무인도를 발견한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매수한 것 좋아하네.”
서재길은 거짓말을 했다. 역운회에서 사람을 매수했을 턱이 없다.
그들이 목숨만큼 아끼는 게 보안이었다.
지잉.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끝에 진동음이 들렸다. 깔려 있던 차유신의 눈이 돌아갔다. 벗어 둔 재킷 밑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는 핸드폰 액정이 비쳤다. 대부분이 가려진 가운데 익숙한 글자가 도드라졌다. 차유신은 홀린 것처럼 팔을 뻗었다. 핸드폰을 빼는 손에 치여 뭔가가 툭, 떨어졌다. 차유신은 일부러 외면하며 액정을 봤다.
[저 이제 퇴근했어요. 지금 주차장이에요. 아직 안 주무시면 잠깐 올라가도 될까요?]
-애인
글자를 머금은 눈이 미동했다. 흐릿했다가, 선명했다가, 또 흐려지고, 끝내 흐무러졌다. 영 보이지 않는 눈을 홈착거리며 다른 곳을 봤다. 아까 떨어진 물건이 바닥에서 덩그러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듯 마주 본 차유신의 눈시울이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겉면에 적힌 어떤 문구가 망막을 빼곡하게 메웠다.
3살. 검은 머리.
“그래. 넌 3살이고 검은 머리였지.”
건조한 입이 독언을 흘렸다. 곧 집어삼키듯 말아 물렸다. 차유신은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색색거리며 소파 등받이에 배면을 붙였다. 가죽 커버에 달라붙은 뒷덜미가 후끈거렸다. 열 오른 머리가 터질 것처럼 들끓었다. 차유신은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하필 우태원일까 싶었다.
어둑한 시야를 감내하다 보니 오감이 점점 까무룩 해 왔다. 차유신은 암흑 속에서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시간을 맞닥뜨렸다. 엄밀히 따지면 현실로도 꿈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무의식의 한 페이지처럼 익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영화처럼 낯선 감이 있었다.
자신은 걷고 있었다. 사위에 울울한 나무가 한가득했다. 늦은 오후였고, 수풀 곳곳이 젖어 있었다. 비가 갓 그친 탓에 물비린내가 물씬 났다.
눈길이 내려갔다. 눈에 담긴 제 손이 너무나도 작았다. 예닐곱 살 무렵의 아이 같았다. 겉면에 다소 크고 손가락이 가는 어른 손이 감겨 있었다. 어색한 기분에 슬쩍 제 손을 뺐다. 바로 어른 손이 잡아챘다.
길 잃는다.
익숙한 음성이 귀를 옭맸다. 차유신은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입을 꾹 다물고 걷는 어머니가 보였다. 초조하게 바라보다 시선을 넘겼다. 먼 치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수면이 보였다. 아주 익숙한 물이었다. 역현호. 자신은 마지막 소원에 따라 어머니와 이곳을 걷고 있었다.
소원 바꿀게요.
급박한 목소리가 나왔다. 어머니가 멈춰 섰다. 차유신은 보다 제대로 고개를 세웠다. 따발총 같은 말이 터졌다.
다른 거 할래요.
이제 와서? 또 뭐가 하고 싶은데.
우종진 이사 말이에요.
차유신이 칭얼거렸다. 어머니가 석연치 않은 눈매를 해 보였다.
우 이사가 왜?
우 이사하고 가까이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그런 얘길 하니?
그러다 어머니가 죽으니까요.
그건 나도 알아, 울아.
안여하기 그지없는 대꾸였다. 차유신이 놀라 미적거렸다. 어머니의 입술 틈에서 휘파람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다 알면서 했어. 항상.
차유신의 면상이 얼어붙었다. 옴짝달싹하는 꼴을 감상하던 어머니가 상체를 낮췄다. 차유신은 두려움 속에서 어머니를 확인했다. 이내 소스라쳤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번져 가는 물결 같은 질문이 사위를 울렸다.
넌 아니었니?
지잉. 커다란 진동음이 귀를 때렸다. 깜짝한 차유신이 조리쳤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헉헉대다가 눈길을 떨궜다. 시트 위에서 요란하게 떨어 대는 핸드폰이 보였다. 호흡을 삭이며 내려다보다 핸드폰을 챘다. 통화 아이콘을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어.”
-혹시 제가 깨웠나요?
“아니. 안 자고 있었어.”
-그럼 올라가도 될까요?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으셔서.
“그러면.”
숨을 고른 차유신이 눈을 굴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1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속으로 가늠한 차유신이 덧붙였다.
“2시 맞춰 올라와.”
-알겠습니다.
우태원은 왜 2시인지 묻지 않고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통화가 종료된 액정이 깜빡였다. 차유신은 내던지듯 핸드폰을 시트 위에 올렸다. 이내 벌떡 일어나 바닥을 살폈다. 널브러진 서류 봉투는 글씨 하나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스위치 올리러 온 애. 3살. 검은 머리. 잘 부탁해.
“그래. 그게 맞지.”
내려간 손이 덥석 봉투를 쥐었다. 곧 분연히 욕실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세면대 위에 봉투를 던진 뒤 서랍장을 더듬었다. 흡연자 시절 쓰던 라이터가 나왔다. 다른 손이 봉투 겉면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표면이 사선으로 북 찢겼다. ‘온 애’와 ‘3살’ 글자 사이가 분리됐다.
“이제 와서 안다고 뭐가 달라져.”
뇌까리며 라이터를 켰다. 붉게 일렁이는 끄트머리를 갓 찢은 종이에 갖다 댔다. 바로 활활 타들어 갔다. 차유신은 쓰레기를 처리하듯 서류 위에 불붙은 종이를 떨궜다. 불길이 커졌다.
쥐불놀이를 하는 것처럼 타닥, 타닥, 소리가 났다. 화마처럼 솟구는 불꽃을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주시했다. 온 욕실을 뒤덮을 양 부푼 불길의 기세는 일 분도 되지 않아 꺾였다. 점점 수그러드는 화염이 마지막 발악처럼 타닥거렸다.
끝내 전소된 종이가 폐허처럼 초라했다. 그날 장어집에서 본, 식어 가는 숯불이 떠올랐다. 재가 되어 가는 불을 앞에 두고 도희범은 ‘불행’을 얘기하며 웃었다. 주제넘은 우태원의 행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소했다.
나아간 맨손이 불씨만 남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파삭, 소리를 내며 재가 흩어졌다. 기롱하는 도희범의 잔영이 사라졌다. 차유신은 치를 떨며 읊조렸다.
“얼어 죽을 불행은 너 혼자나 차지해, 도희범.”
불길에 사로잡히는 건 도희범만의 몫이다. 우태원은 안전하다. 차유신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진작 끄집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돌아갈 일이 없다.
현관 쪽에서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차유신은 잿더미를 한 움큼 쥐어 변기에 처넣었다. 두어 번 반복하자 세면대에는 자잘한 조각만 남고, 대부분이 변기에 들어갔다. 차유신은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남은 재는 세면대 물을 틀어 흘려 버렸다.
“불 피웠어요? 선배.”
불현듯 욕실 문이 열렸다.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손에 비누 거품을 묻혔다. 지문 사이사이까지 밴 탄내를 제거한 뒤 흐르는 물에다 씻었다. 젖은 손을 털어 낸 후에야 몸을 돌렸다. 의아한 양 서 있는 우태원과 눈을 맞추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투서가 왔기에 태워 버렸어.”
“무슨 투서요.”
“묻지 마. 굳이 말로 하기도 싫어.”
손을 내저으며 성큼 다리를 뻗었다. 우태원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바깥으로 나왔다. 욕실을 힐긋거리던 우태원이 마지못해 차유신을 따라 거실로 왔다.
“좀 늦긴 했는데, 선배 얼굴은 봐야 잠이 올 것 같아서요. 아직 안 주무셔서 다행….”
“나 재워 줘, 우태원.”
뻔뻔한 어리광이 나왔다. 흠칫한 우태원이 목을 꿀꺽였다. 차유신은 웃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조금 열 있어. 너하고 같이 있어야 괜찮아질 것 같아.”
“그….”
“싫어?”
“설마요.”
“그럼 좋아? 어느 쪽이야.”
차유신이 갸웃거렸다. 입을 축인 우태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먹빛 눈에 담긴 차유신이 고정된 것처럼 뚜렷했다. 지극히 진중한 대답이 들렸다.
“행복합니다.”
차유신이 피식거렸다. 내내 무지근하던 뒷덜미가 비로소 가벼웠다. 용광로가 식어 가는 것처럼 열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차유신은 흡족하게 턱짓했다.
“빨리 씻어. 자게.”
스스로를 파악하는 일에는 둔한 편이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이가 있다면 조금은 현명해진다. 불행도 행복도 공유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한 차유신은 스스로에게도 현자가 된다. 덕분에 올해 9월도 잘 넘어갔다.
넘어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