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세이프가드 5. (41/48)

2장. 세이프가드

5.

“아무리 봐도 유신이 네 취향이 아닌데.”

맞은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다리 꼰 자세로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정진원 의원이 보였다. 정해신의 프로필이었다. 종종 표면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탐탁지 않아 보였다.

“제 취향이 뭔데요.”

차유신이 앞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반쯤 벌컥거리다 눈을 찌푸리며 내려놓았다. 비린내 비슷한 것이 났다.

“딱 잡아 규정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이런 놈이 아니란 건 내가 알지.”

정진원이 심드렁하게 서류를 덮었다. 물컵을 치우려던 차유신이 무춤했다. 테이블 한가운데 이름 모를 화초가 있었다. 컵이 다시 올라갔다. 노래지기 시작한 잎을 스치며 입구가 기울었다. 막 물을 흘리려는 순간, 정진원이 경고했다.

“물 주지 마.”

“죽어 가는데요.”

“죽는 거 기다리는 중이야.”

“선물받은 것 아닙니까. 리본에 대국민당 오철우라고 적혀 있는데.”

“오철우가 줬으니 죽이는 거지. 시건방진 새끼. 뭘 잘했다고 화초를 사다 바치고 있어? 사람 좋은 척하면서 내 딸 회사 비리나 캐 대고 말이야. 협잡꾼 같은 놈.”

정진원이 끌끌거렸다. 차유신은 물 한 방울 줄지 않은 컵을 구석에 뒀다. 끼익, 하는 마찰음이 썩 소름 끼쳤다.

“어떻게 안 놈이야?”

정진원이 페이퍼를 펄럭거렸다. 팔짱을 낀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모교 대학 강연 나갔다 만났는데….”

“팔 풀고.”

팔을 푼 차유신이 허전해진 손에 깍지를 꼈다. 정진원이 또 말했다.

“손 풀고.”

차유신은 짤막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저 꼰대 새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진원이 중얼거렸다.

“내년 재보궐 선거까지 시간이 있긴 하지만, 후보군은 미리미리 세팅해 두는 게 좋지. 정해신 이 친구 아직 30대던데. 회사원 출신이 젊은 나이에 중견 기업 임원을 했어? 머리가 아주 좋은 모양이지. 혹은 구린 게 많거나.”

“괜찮은 친구입니다. 한번 만나 보시죠.”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께름칙해. 내가 알기로 일장토건은 그다지 소문 좋은 회사가 아니거든. 오너인 도희범 대표가 회삿돈 빼돌리다 집행유예 받은 적이 있지. 회사 자체가 매천회 배후라는 소문도 있고.”

“도희범의 횡령 혐의는 제가 추천한 정해신과 무관한 것이고, 매천회 배후라는 소문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루머에 얽혀 있는 중견 기업이 다섯 곳을 넘어섭니다. 무엇보다 사사로운 결점을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그 어떤 인재도 추려 낼 수 없습니다. 완전히 깨끗한 인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대국민당 오철우가 선배 따님의 회사를 뒤에서 캐고 다닌 게 불쾌하셨다고요. 저는 그게 그렇게까지 대로할 사안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회사가 떳떳하다면, 뒷조사하는 인물이 설령 검찰총장이라 해도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게 맞습니다.”

꼿꼿한 시선이 정진원에 쏠렸다. 차유신의 어조가 느른해졌다.

“안 그렇습니까, 정 선배님.”

정진원의 어깨가 꿀렁거렸다. 마뜩지 않게 호흡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간을 좁힌 그가 뇌까렸다.

“하여간 말은 잘하는구나.”

차유신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과찬이십니다.”

“이게 칭찬으로 들려?”

“이게 감사로 들리시나 봅니다.”

차유신이 빙글거렸다. 정진원이 이를 드러냈다. 대놓고 낸 쯧, 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정진원이 말했다. 열린 문틈으로 보좌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권헌 의원 도착했습니다.”

“벌써 열 시야?”

“네.”

“들어오라 해.”

문틈이 넓어졌다. 서류 봉투를 쥔 권헌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차유신의 곁에 선 그가 구십 도 각도로 몸을 굽혔다. 정진원이 손사래를 쳤다.

“일일이 예의 차릴 필요 없다.”

“송구합니다.”

“그놈의 예의는 네 옆에 있는 선배 놈에게나 가르쳐. 도대체가 말 한마디 예쁘게 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지.”

정진원이 차유신을 가리켰다. 권헌이 차유신의 눈치를 봤다. 차유신이 확 인상을 썼다.

“저 아니면 누가 선배님께 바른말 합니까.”

“무슨 바른말. 나 혈압 올리려 하는 말인 건 잘 알겠다. 고혈압인 건 용케도 알아 가지고.”

눈총을 준 정진원이 아까의 서류를 챙겼다. 새하얀 종이를 팔랑인 그가 말했다.

“이 친구는 조만간 날 잡아서 나하고 식사 한번 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유신 추천이니 이유가 있겠지. 다른 놈 추천이었으면 진작 종이 찢어발겼어. 너니까 얼굴 보는 거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오라 해. 신진화당 정진원이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확실히 얘기해 두고.”

“그건 전 국민적으로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농담 그만하고 나가. 바빠.”

정진원이 호령했다. 차유신의 허리가 올곧게 섰다. 그대로 일어서려던 찰나,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은 또 왜 그래? 개한테 물어뜯긴 것처럼.”

반사적으로 목을 짚은 차유신이 벽에 붙은 거울을 확인했다. 눈치채지 못한 새 테이프가 떨어졌는지, 흘러내린 거즈 너머로 상흔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차유신이 신속히 둘러댔다.

“수현이가 개 키우거든요.”

“한수현? 너희 방에 있는 똘똘한 여자애?”

“네.”

“걔도 참 정신없다. 아무리 제 개가 예쁘기로서니, 지 영감이 물어뜯기는 걸 내버려 둬?”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가리고 다녀. 안 그래도 사람 시선 몰고 다니는 놈이. 매무새가 그 모양이면 없던 말도 나온다.”

정진원이 설교했다. 차유신이 전에 없이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유념하겠습니다.”

“가 봐.”

“예.”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입구를 향해 나아가다 권헌의 옆얼굴을 힐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빨개진 목덜미가 보였다.

*

“이거 쓰십시오.”

정진원 의원실을 나와 같은 당 선배 의원실에 들렀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중 권헌을 만났다.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뭔가를 내밀었다. 거즈와 테이프였다.

“어디서 났어?”

받아 든 차유신이 제 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대체할 거즈와 테이프를 구할 시간은 없고, 그 와중에 계속 사람은 만나야 해 내내 상처 난 부위를 쥐고 다니던 차였다.

“우리 보좌진에게 구해다 달라 했습니다.”

“별걸 다 시키네. 소문나면 악덕 영감 소리 듣는다.”

차유신이 테이프를 찍, 뜯으며 말했다. 권헌은 요지부동으로 서 있기만 했다. 고개를 기운 차유신이 새 거즈를 잔흔에 덮고, 테이프를 붙였다. 이따금 눈으로 맞은편을 기웃거렸다. 혹여나 권헌이 뭐라도 물을까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그의 입매는 일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청 문제는 해결하셨습니까.”

권헌이 입을 뗐다. 테이프를 다 붙인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마음에 둔 화두가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어. 별것 아니었어.”

“다행입니다.”

“본의 아니게 네 의원실 신세를 졌어. 고맙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을 했습니다.”

권헌이 뒷짐 진 손을 곰작거렸다. 버릇처럼 비켜난 눈동자가 보였다. 바라보던 차유신이 들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습관이란 지독하다 싶었다. 금배지 단 인물도 누군가의 앞에서는 영락없는 막내 비서가 되니 말이다.

“이 이상 습관 되면 고치기 어렵다.”

적당하게 주의를 줬다. 권헌이 그제야 차유신을 봤다.

“어떤 습관 말씀이십니까.”

“긴장 풀어. 내 앞에서.”

“풀고 있습니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권헌의 목을 타고 꿀꺽, 침 넘어가는 게 보였다. 어물거린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송구합니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짓지도 않은 죄를 사죄하는 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 싫어서, 혹은 답답해서.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권헌은 자신의 의원실 출신이었다. 최소한의 긍지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거즈 잘 붙었어?”

문득 질문을 꺼냈다. 권헌의 눈길이 급하게 차유신을 쫓았다. 차유신은 떳떳하게 제 목을 내보였다.

“이번엔 안 떨어질 것 같냐고.”

권헌이 여짓여짓했다. 적잖게 뜸을 들이다, 팔을 내밀었다. 다가온 손이 목에 붙은 테이프 하나를 뗐다. 권헌이 읊조렸다.

“조금만 위에 붙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테이프가 올라간 자리에 붙었다. 가붓하게 문지르고 난 권헌의 손이 떨어졌다. 차유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긴장 안 하네.”

권헌이 식은 숨을 흘렸다. 차유신을 살피던 그가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였다.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감사합니다.”

끄덕인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막 뻗어 나간 발이 멈칫했다. 먼 치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주시하는 남자가 보였다. 차유신의 뒤꿈치가 서서히 밟혔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남자가 발길을 돌렸다. 곧 반대편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차유신의 한쪽 눈이 구겨 들었다. 입술 틈에서 미지근한 숨이 샜다.

분명히 우태원이 봤는데, 왜 그냥 가지.

*

“형님, 이거 선물이래요.”

의원실에 들어서자마자 윤재희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상표도, 그림도 없이 하얗기만 한 것이었다. 받아 든 차유신이 물었다.

“누가 줬어?”

“정문에서 만난 남자 중학생이요. 의원님 되게 좋아한다면서 꼭 전해 달라 하던데요.”

“안에 뭐 들었는데.”

“글쎄요. 확인을 안 해서.”

“해야지, 자식아.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차유신이 주먹으로 윤재희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악, 소리 낸 윤재희가 반 발짝 물러섰다.

“상대가 중학생이라 거기까진 생각도 못 했죠. 지금이라도 봐 드려요?”

“상대가 초등학생이면 걔한테 내 전화번호도 바쳤겠다. 됐어, 새끼야.”

성질 낸 차유신이 내실을 향해 걸었다. 뒤에서 윤재희가 아파 죽겠다며 다른 보좌진에 하소연하는 게 들렸다.

내실 문을 열고 데스크로 직진했다. 익숙한 의자에 몸을 앉힌 뒤 위에 쌓인 서류들을 둘러봤다. 보도 자료, 보도 자료, 참고 자료, 보도 자료, 발표 자료, 참고 자료…. 하루 사이 스무 개 넘게 쌓인 보고서를 제목만 일별하고 고개를 젖혔다. 지겹다는 양 한숨을 쉬다가, 데스크톱 옆에 둔 쇼핑백을 봤다.

피곤한 손으로 가져와 안을 열어 보았다. 작지 않은 박스 위에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것부터 빼서 안을 헤집었다. 차곡차곡 접힌 종이가 나왔다. 꼬깃꼬깃한 부위를 펼치자, 간결한 문장이 나타났다.

[의원님께서 입은 걸 보고 싶습니다.]

눈 밑이 옴씰거렸다. 누가 봐도 중학생 필체가 아니다. 어엿한 성인 글씨였다. 여성보단 남성에 가까운 느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 두고, 상자를 꺼냈다. 쇼핑백처럼 아무런 표식 없이 새하얀 박스였다. 표면을 더듬어 뚜껑을 열었다. 드러난 내부를 확인한 차유신의 낯이 경직됐다. 싸늘한 욕설이 나왔다.

“어떤 씨발 새끼야.”

여성용 란제리 속옷이었다. 새빨갛고 레이스가 화려한.

“윤재희! 이걸 누가 줬다고?”

차유신이 버럭 했다. 밖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새끼가 귀가 먹었나. 분연히 읊조리며 뚜껑을 덮었다. 일단 이 빌어먹을 란제리를 어디에 처박아 둘 셈이었다. 일 초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쓰지 않는 가장 밑 칸 서랍을 열고, 박스를 처넣었다. 그대로 닫으려다 불현듯 멈췄다. 데스크 위에 올라간 시선에 날이 섰다. 새까만 종이 위 글씨가 먹구름처럼 시야를 엄습했다. 의원님께서 입은 걸 보고 싶습니다. 희롱의 의도가 명백한 문구.

“정해신.”

머릿속에 떠오른 용의자를 읊었다. 차유신의 손을 끈덕지게 쥐어 대며 관심을 갈구한 인물. 그러다 차유신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인물. 진저리 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으나 당분간 엮이는 게 불가피한 인물. 편지를 쏘아보던 차유신의 어금니가 물렸다.

이딴 방식으로 자신의 대가리라도 밟아 보겠다는 건지. 어림도 없다.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상자를 서랍에 마저 욱여넣었다. 꾸역꾸역 들어가는 종잇조각을 보며 볼멘소리를 냈다.

“부르면 바로 좀 와. 왜 이렇게 늦어? 이런 개 같은 물건을 지지자 선물이랍시고 줘 놓고….”

“무슨 물건이요.”

돌아온 대답은 윤재희라기엔 너무나도 저음이었다. 차유신이 얼굴이 흠칫 들렸다. 눈을 맞춘 우태원이 허리를 짚었다. 차유신의 목구멍을 타고 탁한 숨이 미끄러졌다. 가물거린 눈매가 억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 순간, 머릿속에는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우태원이 이걸 안다면, 준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거다.

“기척도 없이 오고 그래?”

다물린 서랍 표면에서 손가락이 두드려졌다.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한 다음, 천연스러운 눈짓을 건넸다. 우태원은 무표정으로 마주 보고만 있었다. 허리를 덮은 손가락이 꺼떡거리는 게 보였다.

“기척도 없이 선배 방에 오면 안 돼요?”

그가 응접용 테이블을 향했다. 소파 앞에 다다른 걸 본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예사로운 대꾸가 나왔다.

“당연히 되지.”

“근데 왜 그렇게 까칠해요.”

“내가 까칠했어?”

발이 서벅서벅 나아갔다. 우태원의 맞은편에 착석한 뒤 조금 거슬리는 바지 주름을 펴며 고개를 바로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우태원의 안면에서 느릿느릿 굴러가는 눈동자가 비쳤다. 차유신은 가는눈을 떴다.

그냥 온 게 아니다. 보일 듯 말 듯 한 연막을 사이에 둔 가운데, 우태원은 고민을 하고 있다.

“저 부르셨어요?”

내실 문이 열렸다. 상체를 들이민 윤재희가 꾸벅해 보였다. 차유신이 섟을 냈다.

“뭐 하다 이제 와?”

“죄송합니다. 정진원 의원실에서 전화가 왔기에.”

“거기는 왜.”

“일전에 전달한 행안위 시절 자료 두고 문의할 게 있다 해서요. 아무튼 해결했어요.”

“부르면 바로바로 좀 와. 여건이 안 되면 다른 사람 시켜서 지금 안 된다 얘길 하든가.”

“죄송합니다.”

윤재희가 눈을 끔뻑거렸다. 혼나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불쌍함을 어필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그 속을 모를 리 없는 차유신은 그저 혀를 내둘렀다. 곧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가 봐.”

“용무는요.”

“그건 나중에. 일단 나가.”

“네, 형.”

허리를 크게 굽힌 윤재희가 몸을 뺐다. 탁, 소리를 남기며 문이 닫혔다. 하여간 정신머리 하고는. 관자놀이를 눌러 댄 차유신이 정면을 봤다. 그새 표정이 달라진 우태원이 망막에 걸렸다. 이마가 조금 찌푸려 있었다.

“형이라고 불러요?”

뜬금없는 질문이 다가왔다. 차유신의 눈이 둥그레졌다. 얼떨떨한 대꾸가 나왔다.

“무슨 형.”

“방금 윤재희 비서가 형이라고 했잖아요.”

“그랬나.”

“그랬어요.”

차유신은 공연히 머리를 털었다. 윤재희가 그랬던가. 실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윤재희는 평소에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스스로가 불리한 상황에 처했거나 죽는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종종 ‘형’으로 불렀다. 차유신에게는 그게 그거였으므로 명확한 호칭 방식을 일일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만약 ‘야’라고 불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랬나 보지. 그게 뭐.”

차유신이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우태원의 이마가 좀 더 패었다. 정적 속에서 그의 시선이 기울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양 아슬아슬한 눈빛이었다. 지켜보던 차유신의 무릎이 딸막였다. 입에서 작게 아, 소리가 났다.

이제야 알았다.

“너 불안한 것 있구나.”

차유신이 개한했다. 우태원은 답하지 않았다. 차유신이 몰아붙였다.

“말해. 어서.”

“그런….”

“말 돌리지 말고. 시간 없어.”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우태원의 얼굴이 힘겹게 돌아갔다. 차유신은 집요한 눈으로 그를 쫓았다. 허전한 두 사람의 틈에 눈꽃 같은 먼지가 내려앉았다. 또 겨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기하면 선배가 질색할 거예요.”

“얘기 안 하면 더 질색해.”

한참 후에야 찾아든 답을 차유신은 단박에 받아쳤다. 날카로운 언어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네 머릿속이야 내가 마음먹으면 못 알아낼 것 없고.”

우태원이 웃지도 않고 농을 쳤다.

“무섭네요.”

“너에게는 내가 무서워야지.”

차유신이 못을 박았다.

“나라도 안 무서우면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우태원이 비로소 실소했다. 낯이 미세하게 풀어져 있었다. 차유신은 안도했다. 이성은 남아 있구나 싶었다.

“권헌 의원 말이에요.”

이윽고 들려온 이름은 아주 예상치 못한 게 아니었다. 차유신은 담담하게 응수했다.

“어.”

“남은 한쪽 눈알도 파 버릴까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

차유신의 입에서 짙은 숨이 내뿜어졌다. 탁하지만 곧은 눈길이 우태원을 머금었다. 고저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용케도 안 했네.”

“네.”

“잘했어.”

“네.”

“다음에도 그렇게 하고.”

“그건 확신할 수 없어요.”

우태원이 손에 깍지를 꼈다. 텁텁한 목소리가 내실을 메웠다.

“그게 바로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고요.”

우태원의 팔 하나가 뒤로 빠졌다.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툭, 시트를 건드렸다. 까만 가죽에 작은 홈이 생겼다. 차유신은 멀거니 우물 같은 자국을 봤다. 안에 보이지 않는 물이 고인 것만 같았다.

우태원을 처음 만난 날, 이 소파에 앉아 보좌진 면접을 봤다. 이후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의원직을 내려놓는 바람에 한동안 다른 의원이 쓰던 사무실을 돌고 돌아 올해부터 차유신이 다시 쓰고 있다. 무려 5년이 걸렸다.

5년 전의 1월, 이 자리에서 면접 본 우태원을 채용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분노의 형태였고, 이후에는 안도의 형태였다. 안도의 시간이 분노의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차유신은 이따금 잘못된 선택을 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날 우태원을 자신의 의원실에 들이지 않았다면. 염몽보다 염몽 같은 경우의 수를 택했더라면.

그건 본능이었다. 끝내 이른 현실이 너무도 달콤해,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가상의 불안을 곱씹었다. 그런 짓거리까지 했으니 이 행복을 마저 누려도 좋다 위안했다. 태어나 이리도 집착하게 만드는 것을 가져 본 게 처음이라 그랬다.

두려울 게 없는 자신이 이 정도인데, 두려운 게 천지인 우태원은 하물며.

“권헌의 뭐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

착 가라앉은 언어가 나왔다. 맞은편에서 흑단 같은 눈망울이 차유신을 품었다. 차유신은 차분한 턱짓을 했다. 우태원이 눈꺼풀이 점점 흘러내렸다. 참회를 닮은 언어가 다가왔다.

“선배 거즈를 만졌으니까요.”

“고작 만진 거잖아.”

“만지면서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봤을 거고, 보면서 상상을 했겠죠.”

“어제 우태원하고 기절할 정도로 떡이라도 쳤나 보다, 뭐 그런 거?”

“정확히 말하자면 저한테 어떤 식으로 안겨 신음했고, 어쩌다 목을 깨물렸고, 그때 선배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그런 일련의 것들을 상상했겠죠.”

“상상력은 네 쪽이 풍부한 것 같은데. 작가 해도 되겠다.”

“선배만 가지고 썼다면 노벨 문학상도 탔을 겁니다.”

우태원이 등을 젖혔다. 차유신의 입에 저소가 맺혔다. 여전히 심각한 우태원을 관찰하다, 부쩍 은은하게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상상한 전부를 실제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는 거겠지.”

우태원의 손깍지가 덜컥거렸다. 차유신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앞으로도 불안한 게 있으면 그렇게 내 앞에서 말로 해. 혼자 삭이지 말고.”

종용하는 언어가 건네졌다.

“알았어?”

우태원의 턱이 미동했다. 나지막이 숨을 고른 그가 답했다.

“네.”

“그리고 아까 윤재희 호칭에 왜 그리 신경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형이라 하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그건 좀 곤란해요.”

“왜.”

“제게 각인된 선배의 호칭은 오로지 ‘선배’뿐이니까요. 그것 이외의 호칭이 상상이 잘 안 돼요.”

우태원이 자세를 고쳤다. 차유신을 향해 상체를 낮춘 그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노력해 볼게요.”

“굳이?”

“하고 싶어졌어요. 윤재희 비서가 부르는 거 보고.”

미간의 주름이 지극히 심중했다. 차유신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터졌다. 별것도 아닌 걸 두고 국감 앞둔 정부 기관장처럼 고민하는 모양새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갈 데까지 갔나 보다. 저게 다 귀엽고.

“좋을 대로 해. 난 네가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

“네.”

“‘야’는 안 되지만.”

“그건 제가 안 해요.”

“그리고 내일 저녁에 뭐 해.”

“경찰청장 식사 약속이 있긴 하지만… 미룰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장어나 먹으러 가자. 역현호로.”

차유신이 신소했다.

“오랜만에.”

우태원이 구둣발을 추슬렀다. 곧 고분고분 주억거렸다.

“네.”

“얘기 끝났으면 가 봐.”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데스크를 향해 가는 등 너머에서 낮은 부름이 들렸다.

“선배.”

데스크를 짚은 차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일어선 우태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딱, 하는 구둣발 소리에 귓불이 새큰했다. 서너 걸음 만에 코앞까지 온 우태원이 몸을 숙였다. 차유신의 면상에 음영이 드리웠다. 차유신은 홀린 것처럼 의자에 착석했다.

“아까 한 얘기 말이에요.”

“무슨 얘기.”

“지지자 선물 어쩌고 한 거요.”

“아.”

차유신의 입이 벌어졌다. 난색 어린 눈망울이 흘러갔다. 뒤늦게 떠올랐다. 방금 전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있었다는 것. 사실대로 얘기하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문제는 우태원이 지순히 지나칠 리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차유신과 관련한 건 꼬박꼬박 짚고 넘어가야 성에 차는 놈이다.

“별것 아니야.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걸 하나 선물 받았어. 익명으로 전해져 처치가 곤란한 상황이고.”

빠르게 정리한 변명을 읊으며 가장 밑 서랍에 손을 가져갔다. 슥 서랍장을 빼고, 안을 뒤적이며 뇌까렸다.

“여자 속옷을 보냈어. 애인에게 주라면서. 나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뚜껑을 젖힌 뒤 브래지어를 꺼냈다. 풍성한 레이스를 흔들다 한쪽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다. 후크가 달린 곳을 찾아 툭, 풀었다. 사이즈 적힌 라벨이 드러났다.

“사이즈도 아주 황당한 걸 샀네. 하여간 너도 익명 선물 조심해. 별 희한한 게 다 오니까.”

“잘 푸시네요.”

“뭐.”

차유신이 황망한 표정을 해 보였다.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차유신의 입과 손에서 속옷을 거둬 가 레이스 위주의 약한 부분을 잡았다. 이어 반대쪽을 쥐어 죽 당겼다. 천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조각난 속옷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빠졌어요.”

“뭐. 내가 속옷 선물 받아서?”

“그것도 그거고. 선배가 너무 잘 풀어서요.”

우태원이 데스크에 손을 덮었다. 딱딱한 손톱이 표면에 박혔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남이 입은 걸 푼 적은 있지만, 내가 입은 걸 풀린 적은 없어.”

우태원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헤아리듯 테이블을 타닥거리다, 차유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한 의미가 맞나요.”

“아마도.”

“그런 게 가능한 취향인 줄 몰랐어요.”

“당연히 취향 아니야. 단지 네가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배려가 넘치시네요.”

“황송하지? 그 기분으로 충분하면 넘어가. 솔직히 너도 이런 걸 밝히는 취향은 아니잖아.”

“굳이 배려해 줬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우태원이 고개를 내렸다. 차유신의 맨뺨에 옆얼굴을 비빈 그가 속삭였다.

“생각해 볼게요. 어떤 게 어울릴지.”

곁눈질한 그가 말을 이었다.

“취향이 아닌 것도 선배가 하면 취향이 돼요. 선배가 배려한 순간, 엄청나게 하고 싶어졌어요.”

차유신이 실눈을 떴다. 확고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레이스는 안 돼.”

우태원이 안여하게 받아졌다.

“방금 후보 하나 빠졌네요.”

허, 한 차유신이 우태원의 목을 낚아챘다. 건방진 새끼가. 꽉 쥐어짜는 걸 미동도 않고 버틴 우태원이 갑자기 고개를 틀었다. 그의 얼굴이 면전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콧대가 겹쳤다. 금방이라도 입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소곤거렸다.

“더 세게요.”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이 악물어.”

목덜미를 죈 손안에 힘이 실렸다. 하아. 등을 떤 우태원이 신음했다. 딴딴해져 가는 차유신의 손목이 전율했다. 커다랗게 박동하는 우태원의 맥이 그대로 느껴져 혈관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성교하는 생식기처럼 핏대가 부풀었다. 차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우태원의 동맥이 흐르는 자리에 손톱을 꽂았다. 왈칵, 피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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