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위 공직자나 기업인이 자주 찾는 것으로 유명한 역삼동의 요정이었다. 차유신 역시 업무에 떠밀려 종종 찾은 적이 있었다. 근무하는 여직원은 마담의 철저한 면접 아래 채용되는데, 키는 165센티를 기준으로 너무 크거나 작아선 안 됐고 화장이 진하거나 눈꼬리가 올라가 있으면 탈락이었다.
획일화된 기준 탓에 근무하는 여직원은 비슷비슷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히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기이하며 그로테스크한 업장이지만, 매일 저녁 모든 룸이 만석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한가하신가 봐요? 저딴 새끼들이랑 술을 먹고. 손버릇 안 좋기로 유명한데. 사실상 블랙이에요.”
여직원이 밑으로 뺀 차유신의 위스키 잔을 그릇에 따라 버리며 중얼거렸다.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대꾸했다.
“넌 왜 아직도 있어. 지난달까지 하고 그만둔다더니.”
“등록금 다 못 벌었어요. 이번 학기까지 일해야 해요.”
“대학도 안 다니면서 무슨 등록금.”
여직원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차유신은 여전히 보지 않았다.
“마담 언니도 알아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혹시라도 말하지 마요. 내가 본인 대학 후배인 줄 아니까.”
“내가 그거 얘기해 뭐 하겠어?”
차유신이 황당해했다. 입 모양으로 그렇겠죠, 한 여직원이 뜬금없이 차유신의 식기를 정리해 줬다. 젓가락 한 쌍이 막 가지런해졌을 무렵 입구 쪽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미닫이문을 연 마담이 생긋거리며 운을 뗐다.
“네, 도 대표님. 뭐 필요하신 거….”
“발렌타인 30년 하나 줘 봐.”
도희범이 손을 흔들었다. 곧 룸 안의 여직원들을 둘러보며 지시했다.
“자기들은 이만 가 보고. 우리 얘기 좀 하게.”
“네.”
여직원들이 빠릿빠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마담이 차유신 곁을 뜨는 여직원을 보며 유독 빙글거렸다. 은근한 한마디가 다가왔다.
“차 의원님은 참 우리 예영이 좋아하세요. 올 때마다 빠짐없이 찾으시고.”
차유신은 잠자코 턱을 괴었다. 이름이 예영이였던가. 차유신은 여직원의 이름을 몰랐다. 늘 눈 밑에 점 두 개 있는 친구, 하면서 찾았다. 이름도 모르면서 지명하는 이유는 술 버리는 솜씨가 좋아서였다. 당연히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친 적 없는 사이지만, 거기까지 얘기하면 여직원 쪽이 곤란해진다. 속도 모르는 마담이 또 재잘거렸다.
“예영이 예쁘게 봐줘요. 내 대학 후배인데, 어찌나 똑똑하고 착한지….”
“언니!”
깜짝한 여직원이 마담의 어깨를 잡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마담이 왜, 하며 여직원을 봤다. 여직원이 열심히 아물거렸다.
“차 의원님 애인이 저 되게 싫어해요. 그냥 아무 얘기도 하지 마세요.”
“당연히 싫어하겠지. 그나저나 차 의원님 애인 있었어요?”
마담이 깔깔거렸다. 여직원이 억지로 마담을 끌어냈다. 웃음소리가 사라지며 문이 닫혔다. 다물린 입구를 응시하던 차유신이 실눈을 떴다. 아까 핸드폰 문자로 우태원과 대화를 나눴고, 이곳에 있다 하니 우태원이 대단히 싫어했으며, 우태원의 저장명이 ‘애인’이긴 했다. 그런데 그 짧은 새 그걸 다 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눈이 아주 빠른 모양이었다.
“이곳에 온 지 한 시간째인데, 솔직히 차 의원님께 섭섭합니다.”
맞은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도희범 옆자리의 남자가 반듯하게 고개를 가눴다. 차유신의 윗눈썹이 삐딱해졌다. 정해신. 도희범이 공천을 요청한 일장토건 전 상무. 올해로 39세. 현재 다섯 개의 사회단체장을 지내고 있으며, 이끄는 집단이 하나같이 허울만 좋은 깡통인 인물.
한마디로 유령.
“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으시더군요.”
정해신이 씨익 웃었다. 차유신이 불친절하게 받아쳤다.
“제가 꼭 상무님을 봐야 합니까.”
“불공평하잖습니까. 이 룸 안에 있는 사람 전부 의원님을 보고 있는데, 의원님은 아무도 보지 않으시니.”
정해신이 과장되게 껄껄거렸다. 이내 흥분해 덧붙였다.
“못 느끼셨습니까. 저며 도 대표며, 우리 쪽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며. 전부 다 차 의원님 보며 숙덕대기 바빴는데. 대화의 구 할이 차 의원님이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저는 이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불필요한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인데, 안 맞는 자리에 왔으니 더 그랬겠지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세간의 관심을 과감하게 무시하는 그 여유.”
정해신이 감탄했다. 차유신은 언짢게 눈을 찌푸렸다. 아주 한심한 칭찬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제가 차 의원님의 오랜 팬입니다.”
정해신의 앉은 자세가 공손해졌다. 도희범이 그를 힐끔거렸다.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신경 쓰지 않은 정해신이 말을 이었다.
“꽤 됐습니다. 14년 전이었던가요. 아주 어린 대학생이었을 때 국회 앞에서 마이크 잡고 청년 기업에 대한 부당 규제 철폐를 다룬 연설을 하셨죠. 뉴스에서 그걸 보는데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나보다 어린 친구가 어쩌면 저리도 능숙하게 좌중을 압도할까 싶어 경외심마저 들었습니다. 나중에 뭐가 되든 아주 크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 3대째 국회를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기억하십니까. 기억력도 좋으십니다.”
물컵을 잡은 차유신이 영혼 없이 뇌까렸다. 정해신의 아부는 영양가도 없는 데다 귀찮기만 했다. 애초에 지금의 만남이 탐탁지 않았다. 못마땅한 자리에 참석한 건 도희범의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나름의 사정 때문이다. 도희범이 정해신의 공천을 원하고, 차유신은 그걸 받아 주기로 했다. 이건 그 정해신과의 첫 대면 자리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다. 소모적이며 불쾌한 일에 시간을 쏟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차 의원님과 아주 긴밀한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불쑥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반사적으로 인상 쓴 얼굴이 들렸다. 똑바로 마주 본 정해신이 말했다.
“까놓고 말해 대한민국의 혈기 왕성한 남성치고 차유신을 동경하지 않는 남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모님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어 스무 살 때의 창업 실패. 아주 드라마틱한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는 중장년 일색인 국회에서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청년 의원이 됐죠. 웬만한 연예인을 가볍게 압도하는 외양에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과 기품마저 갖췄습니다. 같은 남자로서 선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저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어쩌다 보니 다소 꼬인 길로 찾아뵈었지만, 이 인연이 저로서는 너무도 영광일 따름입니다.”
차유신을 잡은 손이 뜨거워졌다. 끈적한 손아귀가 손등을 주물러 왔다. 금세 젖은 손바닥이 곳곳에 땀을 묻혔다. 차유신의 눈 밑이 옴씰거렸다. 입 안에서 어금니가 씹혔다. 이 씨발 새끼가, 소리가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차 의원님께서 저를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 잘 압니다. 별개로 차 의원님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니 종종 힘든 일, 좋은 일 두루 나누며 친근하게….”
“손 풀어. 이 씨발 새끼야.”
날 선 으름장이 나왔다. 흠칫한 정해신의 손이 풀렸다. 분연히 손을 뺀 차유신이 더러운 것을 털어 내듯 손목을 휘적거렸다. 이어 매서운 시선을 끌어 올렸다.
“어딜 징그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어? 좆같게.”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들린 발이 탕, 소리 나게 테이블을 갈겼다. 튀어 오른 음식물이며 접시가 요란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벙해진 정해신과 도희범이 차유신을 올려다봤다. 화를 삭이듯 고개를 젖혔다 바로 한 차유신이 손가락질을 했다.
“그 손 갖고 집에 가서 딸이라도 치다 걸리는 날에는 뒤지는 줄 알아. 마주칠 일 없도록 알아서 바닥에 붙어 기어 다니란 얘기야. 난 벌레 새끼랑 상종 안 하니까. 알아 처들었어?”
버럭 한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성큼성큼 나아간 발이 입구 앞에 섰다. 부술 기세로 문을 밀어젖히며 몸을 뺐다. 쾅. 세찬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두 사람에게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귀가한 곳은 같은 아파트 한 층 아래에 있는 우태원의 집이었다. 키패드에 지문 인식을 하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쏴,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구두를 벗고 거실을 디딘 차유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뺐다. 액정에 윤재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재희야.”
통화 아이콘을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댔다. 바로 윤재희의 음성이 들렸다.
-예, 형님. 오전에 말씀하신 침실 벽 전선, 알아봤는데 별것 아니랍니다. 단순한 자투리 전선이래요.
“확실해?”
-네. 전문가 세 명 연달아 불러 확인했어요. 공사하다 시멘트에 말려 들어갔는데, 귀찮아서 그냥 둔 모양이랍니다.
“그래. 고생했어.”
한숨 쉰 차유신이 핸드폰을 얼굴에서 거뒀다. 그대로 ‘통화 종료’를 누르려다, 급히 귓가에 가져가며 당부했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 우리 의원실 내부에도 공유하지 마. 도희범 건처럼 그냥 너 혼자만….”
-어, 그… 네?
주춤한 윤재희가 얼빠져 되물었다. 차유신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고장이 났어?”
-얘기해 버렸는데요… 우리 방은 아니지만.
“누구.”
-동료 보좌진한테요. 그 친구가 이쪽 업자 많이 안다고 해서….
“어디 의원실.”
차유신이 닦달했다. 윤재희는 말이 없었다. 안 좋은 예감에 손안이 조여들었다. 긴장 어린 공기가 번졌다. 굳어 있는 손바닥에서 지잉,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곁눈으로 액정을 확인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통화 중이시기에 문자로 드립니다. 전화 부탁드립니다.]
-권헌
“야, 너….”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뭉그적거린 윤재희가 우는 소리를 냈다.
-오전에는 말하지 말라는 얘기 안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뭐… 권헌 의원실은 같은 당이고, 우리 라인이고. 무엇보다 전 거기 보좌진한테 얘기한 거지 권헌 의원한테 얘기한 게 아니고….
“거기 방 애한테 말을 했는데 걔가 권헌한테 보고를 안 했겠어?”
차유신이 윽박질렀다. 기죽은 윤재희는 토도 못 달았다. 눈을 질끈 감고 난 차유신이 시름했다. 가까스로 다잡은 언어가 흘러나왔다.
“일단 끊어. 권헌한테는 내가 얘기할 테니….”
“권헌한테 무슨 얘기를 해요.”
등 뒤에서 싸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무춤한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트레이닝 바지 차림의 우태원이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차유신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지켜보던 우태원이 팔을 내밀었다. 축축한 손이 핸드폰 쥔 손을 챘다. 차유신은 끌려가지 않았다.
“핸드폰 줘 봐요.”
씨발. 소리 없이 욕을 씹은 차유신이 기계적으로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손안의 액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빈손을 올렸다. 벗은 어깨를 타이르듯 잡은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지분거렸다. 우태원은 가만히 있었다. 차유신은 내심 안도했다. 됐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한참이나 손으로 어르고 난 차유신이 다가섰다. 우태원이 뿜은 누기가 앞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석처럼 우태원의 코앞까지 다다른 낯이 돌연 멎었다. 그새 말라붙은 손이 차유신의 볼을 저지하듯 감싸 쥐고 있었다. 내립떠보는 우태원의 눈에서 초점이 죽어 갔다. 딱딱한 한마디가 들렸다.
“키스하지 마요. 넘어갈 생각 없어요.”
우태원의 맨가슴이 높다랗게 부푼 끝에 가라앉았다. 차유신의 손가락이 옴씰거렸다. 군살 없이 판판한 가슴팍을 보며 생각했다. 또 참는 중이구나. 늘 그래 왔듯, 그는 주입된 참을성을 반추하고 있었다. 길들여진다는 건 암묵적인 복종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우태원이 신진화당 소속 의원으로 국회에 복귀했을 때 상당수 의원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 뭐가 다르다 할 수 없지만, 확실히 예전과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는 말을 했다. 차유신은 그것이 짜릿하면서도 불안했다. 짜릿한 건 그를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고, 불안한 건.
오르가슴과 같은 이 희열이 내일 당장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핸드폰 줄 테니 앉아.”
침착한 지시가 나왔다. 우태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음영 진 눈망울이 이글거렸다. 차유신이 엄포를 놓았다.
“못 들었어? 소파로 가. 앉아서 얘기하자.”
“핸드폰 준다는 말, 임시방편인 것 알아요.”
“그래서. 안 따를 거야?”
차유신이 눈을 지릅떴다. 우태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널따란 어깨 위에서 차유신의 손가락이 꼿꼿해졌다.
“대화할 거잖아. 나하고.”
“네.”
“서서 할 거야?”
“이동하는 사이에 선배가 도망칠까 봐서요.”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어디로 가겠어?”
차유신이 눈가를 구겼다. 칼로 벤 듯한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널 두고.”
우태원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묵묵해진 그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곧 차유신에게 눈짓을 보냈다.
“먼저 앉아요.”
“나 도망칠까 봐 감시하는 거야?”
발을 뗀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단호한 응답이 돌아왔다.
“네.”
미치겠네. 혀를 찬 차유신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다가온 우태원이 옆자리에 착석했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그를 봤다. 채 닦지 않은 상체의 물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차유신은 손을 옮겼다. 우태원의 허벅지 옆에 늘어진 타월을 잡고는, 들어서 올리며 말했다.
“가까이 와.”
우태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유신의 눈길이 빤히 그를 머금었다. 노곤한 종용이 흘러나왔다.
“말 들어야지, 태원아.”
그제야 우태원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간격이 손 한 뼘 정도로 가까워졌다. 올라간 타월이 우태원의 정수리를 덮었다. 빳빳한 머리카락을 훔치며 눈을 굴렸다. 정지해 있는 명화 같은 얼굴에 싸라기눈을 닮은 물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차유신은 새삼 면밀하게 감상했다.
보기 좋은 곡선을 지닌 이마며 적당히 건방진 콧대, 비밀을 품은 듯 묵직한 입매, 남성성과 예술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턱선. 매번 느끼는 사실이지만,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대칭과 미적 쾌감을 지닌 얼굴이다.
가끔은 자신의 것이라는 게 실감되지 않았다.
“엄청나게 잘생겼어.”
마사지를 하듯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힐끔한 우태원이 물었다.
“선배 취향의 얼굴인가요.”
“엄밀히 따지자면 본래 취향은 아니야.”
“본래는 어땠는데요.”
“작고 아기자기해.”
“여자 기준이죠?”
“어.”
퍽 젖은 타월이 미끄러졌다. 햇볕에 시달린 양 척척한 뒷덜미를 주물러 가며 덧붙였다.
“이제는 아니지만.”
자못 무지근한 언어가 이어졌다.
“이제는 ‘이게’ 내 취향이지.”
타월이 우태원의 턱을 움켜쥐었다. 우태원이 무릎이 뜰썩였다. 타월 밑에서 굵다란 목이 쿨렁였다. 눈을 까물거린 우태원이 물었다.
“언제 서요?”
차유신의 속눈썹이 달막였다. 관찰해 오는 시선에 면상이 간질거렸다. 우태원이 재차 질문했다.
“저 생각하면서 수음한 적 있어요?”
“얘기해야 해?”
“지금은 얘기해야 할 걸요. 선배가 날 달래야 하는 입장이니까.”
“너 정치인 다 됐구나. 타협을 아주 거지같이 하네.”
“선배가 할 말은 아니죠.”
예사로운 응수에 차유신의 시선이 비껴 났다. 구석에 널브러진 신문 쪼가리를 공연히 흘겨봤다. 허탈한 혼잣말이 입 안에서 흐무러졌다, 진짜 할 말이 없네.
“너 생각하면서 내 거 쥔 적 없어.”
타월이 우태원의 가슴을 덮었다. 반질거리는 흉부를 마른 부분으로 찍어 가며 그를 힐긋거렸다. 찬찬히 다물리는 입매가 보였다. 낮은 뇌까림이 들렸다.
“그래요.”
“내 안에 넣은 적은 있지만.”
울렁인 가슴팍이 일순 빠졌다. 차유신이 언성을 높였다.
“가까이 오라고 했지.”
우태원의 목덜미가 점점 불그스름해졌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상하지 마.”
“이미 했어요.”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나요?”
“당연한 걸 물어?”
우태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길을 떨어뜨린 그가 중얼거렸다.
“기구 쓰는 것까지요.”
차유신이 섟을 냈다.
“그딴 것까진 안 했어, 미친놈아.”
화난 손이 우태원의 어깨를 챘다. 억지로 그를 끌어온 차유신이 딴딴한 흉근을 마저 닦았다. 남은 물기가 타월을 찔끔찔끔 적셨다. 머리께에서 광망 같은 눈빛이 느껴졌다. 차유신은 못 본 척 손만 움직였다. 이동하는 천을 보며 머릿속을 정돈했다. 어디까지 얘기하는 게 좋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선배.”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은 외면한 채 답했다.
“어.”
“권헌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마지막으로 언제 봤어요.”
“지난달 식사 자리에서. 너도 있었던 그 자리.”
“연락은요.”
“12일 전. 권헌이 상임위 자문 구하고 싶다고 전화했었어. 총 통화 시간은 7분 20초.”
“그리고요.”
“그리고 없어.”
물기를 전부 훔쳐 낸 타월이 떨구어졌다. 무거운 천이 소파 위에서 늘어졌다. 우태원이 주억거렸다.
“그래요.”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는 것 알아. 다 말하긴 어렵지만, 조금이나마 얘기하자면….”
“됐어요.”
대뜸 말이 잘렸다. 차유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머리맡의 눈발이 차분해졌다. 단조로운 한마디가 실내를 울렸다.
“선배가 지나칠 정도로 원치 않았어요. 이유가 있겠죠. 선배는 항상 정답이니까. 보채지 않을게요. 선배 쪽에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때 전부 알려 줘요. 기다릴게요.”
차유신의 손이 삐걱거렸다. 우태원이 확고하게 읊조렸다.
“투정 부려서 미안해요, 선배.”
잠잠하던 심장이 요탕을 해 왔다. 차유신은 애써 가슴을 가다듬었다. 지금 상황에서 버거운 일을 억지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약 같은 흥분감에 도취돼 멍청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내일 사라질 신기루일지라도, 독점의 희열이 달콤한 건 어쩔 수 없다.
딩동.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났다. 내가 갈게. 차유신이 벌떡 일어섰다. 몸을 환기시키는 게 필요하던 차였다.
현관 앞에 다다라 문을 열었다.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자마자 1층을 향해 가는 엘리베이터 전광판이 보였다. 퀵 서비스인가. 속으로 생각하며 바닥을 확인했다. 덩그러니 놓인 서류 봉투가 보였다.
손을 내려 봉투를 집었다. 얼굴 쪽으로 가져와 겉면을 확인했다. 새까만 펜으로 적은 글씨가 보였다. 급한 상황에서 쓴 듯, 몇몇 자음과 모음이 삐뚤빼뚤했다.
전달자: 스위치 올리러 온 애. 3살. 검은 머리.
잘 부탁해.
암호 같은 글귀에 머리가 기우뚱거렸다. 일단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누구예요? 소파에서 일어난 우태원이 다가왔다.
“몰라. 누가 그냥 두고 가던데.”
대충 답하며 봉투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종이 뭉치가 잡혔다. 쑥 빼서 확인했다. 가장 상단에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부동산 등기부등본이었다.
“우태원, 너 건물 샀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날아들었다. 성급하게 봉투를 뺏은 우태원이 서류를 봤다. 그의 윗눈썹이 굼틀거렸다. 심상치 않은 걸 예감한 듯한 기색이었다.
한참이나 응시하던 우태원이 도로 서류를 넣었다. 이어 봉투 겉면을 확인했다. 굴러가던 그의 눈이 한 곳에서 멎었다. 차유신이 처음엔 본, 펜으로 갈겨쓴 문장이었다.
지켜보던 차유신의 눈이 깜빡였다. 굳어 가는 그의 낯에서 냉기가 비쳤다. 봉투를 쥔 손가락에서 우득, 소리가 났다. 차유신이 초조하게 물었다.
“우태원, 너 무슨 일….”
“잠시만요, 선배.”
우태원이 빠르게 등을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 침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쾅. 요란한 소음과 함께 차유신 홀로 거실에 남았다. 휑해진 공간에서 차유신은 길 잃은 사람처럼 여짓거렸다. 침묵에 사로잡힌 문이 익숙한 것인데도 생소했다. 자신을 등진 채 우태원이 저 문을 닫은 건 처음이었다.
먼지 쌓인 서재에서 불온한 서적이 드러나듯,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태원.”
똑똑. 긴 정적을 감내한 끝에 문을 두드렸다. 답하는 기척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오르내렸다. 불안감의 채도가 짙어졌다. 우태원은 차유신과 하나가 된 후 벽을 둔 일이 없다. 차유신이 그걸 견디지 못한다는 걸 우태원이 잘 안다. 알면서도 택했다. 대놓고 그은 선이었다.
“우태원, 문 열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으므로 강제로 선을 넘는 걸 택했다. 급하게 손잡이를 쥔 손이 돌아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뇌호한 벽이 밀려나는 것처럼 문이 젖혀져 갔다.
막 안을 디딘 차유신이 입을 가렸다. 침실을 자욱하게 메운 연기에 눈이며 코가 아렸다. 쿨럭, 기침이 터졌다. 매운 눈을 훔친 차유신이 안을 살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식어 가는 휴지통을 주시하는 우태원이 보였다.
“왜 여기다… 쿨럭, 불을 내고 그래?”
가까스로 기침을 삭여 가며 따졌다. 우태원은 답을 하지 않았다. 매캐한 연기에 젖은 혀가 하느작거렸다. 내내 굳어 있던 우태원이 얼굴을 들었다. 텅 빈 눈동자가 차유신을 담았다. 차유신의 목이 꿀꺽였다.
견고하던 자신의 목줄에 금이 간 기분이다.
“연기 마시면 몸에 안 좋아요. 나가요.”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다가와 차유신의 팔을 잡으며 강제로 떠밀었다. 두어 걸음 밀려난 차유신이 문득 멈췄다. 우태원의 이마에 금이 갔다. 반듯한 차유신의 눈길과 유령 같은 우태원의 눈길이 스멀스멀 엉켰다.
“무슨 일인지 얘기 안 할 거야?”
차유신이 으르댔다. 망설이지도 않은 우태원이 답했다.
“네.”
차유신의 턱에서 진이 빠졌다. 팔을 고쳐 잡은 우태원이 말했다.
“곧 거실까지 연기가 차요. 위로 올라가요. 연기 빠질 때까지 여긴 오지 말고….”
“같이 나가자.”
우태원의 손을 내친 차유신이 반대로 그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침침한 시야 속에서 우태원의 어둑한 낯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우태원의 어금니가 물렸다. 차유신이 독촉했다.
“나가자고 했잖아. 연기 마시면 너도 안 좋아.”
“선배.”
“이렇게 나 보내고, 내일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볼 수 있을 것 같아?”
차유신의 어조가 매서워졌다. 한껏 날 선 눈빛을 마주한 우태원이 씨근덕거렸다. 차유신의 손끝이 그의 팔뚝을 짓눌렀다.
“나 불안하게 만들지 마. 부탁이야.”
꿰뚫을 기세로, 맹목적인 눈길이 겨눠졌다. 탄내를 품은 우태원의 입이 말라 갔다. 그를 옥죈 손아귀가 강고해졌다. 억누른 손가락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차유신은 생각했다.
한번 놓친 들개는 잡지 못한다. 그러니 잡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쥐고 있어야 한다.
주인은 자신이다. 이 남자는 오로지 자신만이 다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