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고스트 (38/48)

1장. 고스트

2.

“아침에 아주 재미난 기사를 봤는데 말이야.”

런치 코스 마무리로 나온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신 서울시장 윤학경이 운을 뗐다. 맞은편의 차유신과 우태원, 진무원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차유신을 가리킨 윤학경이 입매에 호를 걸었다.

“차 의원 스캔들 났던데? 상당한 미모의 여자 연예인하고.”

“제가요?”

차유신이 기가 찬 고성을 냈다. 황망한 눈이 진무원 쪽에 쏠렸다. 낯을 굳힌 우태원이 같은 곳을 봤다. 진무원이 바로 손사래를 쳤다.

“뭐, 인터넷 매체에서 말도 안 되는 것 하나 썼어. 보고할 가치도 없어 너한테 안 올렸고. 바빠 죽겠는데 뭔 스캔들이야.”

“누구랑.”

“권일규.”

“권일규가 누군데.”

차유신이 면상을 찡그렸다. 윤학경의 옆에 있던 여자 사무관이 포털 사이트처럼 설명했다.

“미야 있잖아요, 유명한 걸 그룹 출신. 차 의원님하고 같이 국토부 홍보 모델 한. 그러고 나서 몇 번 따로 밥도 먹으며 가까워졌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났더라고요. 그나저나 진 보좌관님도 참, 예명으로 얘기해 주셨어야지.”

“내가 걔하고 무슨 밥을 먹어? 걔가 내 지지율 1퍼센트라도 올려 주는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이름이 권일규였어?”

차유신이 허탈해했다. 관자놀이를 짚은 진무원이 답했다.

“어어. 나도 걔 매니저가 하도 권일규, 권일규 하기에 그렇게 얘기했네.”

“대체 왜 예명을 쓰는 거야? 헷갈리게. 본래 이름도 나쁘지 않구만.”

“걸 그룹 인기 멤버 이름이 권일규인 게 뭐가 나쁘지 않아? 밥 먹듯이 국감 불려 나가는 국세청장 이름 같잖아, 꼭.”

“국세청장 얘기하지 마. 나하고 사이 안 좋으니까.”

“통계청장은.”

“그래서.”

서로 따져 대기 바쁜 차유신과 진무원 틈으로 나지막한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차유신이 석연치 않은 시선을 넘겼다. 수정과 잔을 내려놓은 우태원이 넌지시 눈길을 건넸다.

“그 스캔들 신빙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선배.”

묵묵하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차유신이 엄하게 비아냥거렸다.

“우태원, 너 많이 컸다. 별 같지도 않은 걸 따지고 앉아 있고.”

눈을 깐 우태원이 뇌까렸다.

“따져야죠. 그래야 하는 사이입니다, 우리가.”

룸 안이 고적해졌다. 별 희한한 대화를 듣는다는 투로 과일용 포크만 만지작거리는 윤학경을 보며 진무원이 정중히 미소 지었다.

“둘이 친해서 이럽니다. 아주 많이.”

“그래? 청년들끼리 그럴 수 있지.”

큼, 소리 낸 윤학경이 포크를 멀찍이 치웠다. 곧 우태원을 보며 질문했다.

“역현 S시티 프로젝트 가안은 좀 나왔나? 우 의원.”

역현구 을 벤처 단지 ‘T시티’에 이은 역현구 갑 스마트 단지 ‘S시티’ 조성 프로젝트 얘기였다. 자세를 고친 우태원이 답했다.

“네. 금일 오후 4시까지 시장님께 보고 들어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기업들 반응은 좀 어때. 시총 10대 기업 중 최소 3곳은 들어와야 우리 면이 살 텐데.”

“총 8곳 들어옵니다.”

딱 부러지는 대답에 윤학경이 이마가 움찔거렸다. 표정에서 당혹감이 비쳤다.

“8곳이나? 어디 어디.”

“시총 10대 기업 중 에스씰과 LW전자 두 곳 제외하고 전부 들어옵니다. 8개 기업 회장 전원 미팅했습니다. 각 기업 계열사 중 최소 1곳 이상 입주시킨다는 입장입니다. 어차피 면적이 달려 규모 큰 곳은 들이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스마트시티 단지라는 성격에 맞게 기술 기업 성격을 띤 계열사 혹은 메인 연구소가 들어오게 될 겁니다.”

“허…. 그걸 어떻게 했대.”

윤학경이 얼빠진 혼잣말을 했다. 우태원이 단조로이 말했다.

“얼마 전 도산한 선박 기업 ‘GXR’ 사태로 해당 기업 CEO인 박종태의 자금 세탁 커넥션이 물 위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박종태 도움으로 해외에 비자금을 축적한 재벌 2세, 3세가 속한 곳이 해당 8곳입니다. 조만간 검경 합동으로 피의자 압색 들어갈 텐데, 그에 앞서 S시티 조성에 잘 협조해 주면 수사 수위를 충분히 감경해 주겠다 얘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8곳 전부 입주 확정했고요.”

“수사 책임자가 누구야.”

“중앙지검장과 경찰청장입니다. 둘 다 퇴임 후 신진화당 공천받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약조한 사항인데.”

“VIP 직결입니다.”

말을 마친 우태원이 찻잔을 들었다. 윤학경의 입이 말아 물렸다. 차유신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양 디저트용 복숭아를 포크로 뒤적였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주긴 했지만, 우태원이 이리도 순탄히 해낼 줄은 몰랐다. 그저 신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고생했고.”

윤학경이 머리를 긁적였다. 슬금슬금 우태원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자못 부드러운 언어가 덧붙었다.

“이따가 가안 잘 보내 줘. BH 쪽 보고는 내가 직접 할 테니. 보도 자료도 우리 주도로 작성하지.”

“시장님.”

대뜸 차유신이 불렀다. 무춤한 윤학경이 차유신을 확인했다. 포크를 휘저은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잡다한 업무는 우 의원 시키셔야죠.”

어조가 한층 상냥해졌다.

“시장님께 그런 잡무가 가당키나 합니까. 격 떨어뜨릴 일 삼가셔야죠.”

윤학경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차유신은 여유로이 고개를 가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물렸다. 차유신은 내내 미소를 유지했다. 충분한 속내를 담아.

역현 S시티는 역현구 갑 국회의원인 우태원 소관 프로젝트다. 서울시 합작이지만, 주포는 우태원이다. 그런 가운데 청와대 보고와 언론 보도의 주체를 빼앗기면 우태원은 완전히 공을 세워 윤학경에게 떠넘겨 주는 셈이 된다.

얄팍한 수에 당할 수야 없다. 같은 방식에 수십 회는 이를 간 차유신으로서, 우태원에게 같은 걸 겪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입술을 질근거린 윤학경이 목을 젖혔다. 졌다는 양 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뭐 차 의원 의견대로 하자고. 내가 빤히 눈에 보이는 수작을 부렸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차유신이 예의 바른 묵례를 했다. 룸 안의 긴장이 사그라지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뺀 남자가 윤학경을 독촉했다. 시장님, 슬슬 이동하셔야 합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윤학경이 주억거렸다.

“그래. 대기해. 정 팀장, 먼저 차에 가 있게.”

“네, 시장님.”

사무관이 일어섰다. 차유신과 우태원, 진무원도 일어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둘러본 윤학경이 문득 차유신 쪽에 손짓했다.

“차 의원은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하지. 오 분만.”

“네.”

차유신이 순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둘을 번갈아 본 우태원과 진무원이 먼저 자리를 떴다. 잇달아 사람들이 나간 끝에 룸 문이 닫혔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윤학경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넥타이 매듭을 고친 차유신이 물었다.

“뭡니까.”

“차 의원, 일장토건이라고 알아? 혹시.”

“압니다. 오피스텔 잘 짓기로 소문 난 중견 건설사 아닙니까.”

“거기 도희범 대표 만나 본 적 있나.”

“이름만 들었습니다.”

“도 대표가 차 의원 미팅을 요청했네.”

윤학경이 인상을 썼다. 차유신이 갸우뚱했다.

“도 대표가 시장님께 직접이요?”

“어. 지난주에 식사했거든.”

“거기하고는 왜요.”

“그, S시티 들어서려는 역현구 미도동 있잖아.”

“네.”

“애초에 황무지 같던 동네라 웬만한 부지는 다 확보가 됐는데, 딱 중심부에 위치한 100평짜리 땅이 문제가 되고 있어. 그게 일장토건 거야.”

“알박기입니까.”

“알박기도 보통 알박기가 아니야. 대체 얼마를 받아먹으려 그러는 건지, 영 빠질 기미가 없어. 우리 직원이 거기에 서른 번은 찾아갔을 거야.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 눈 하나 깜짝 않더라고.”

윤학경이 끙, 소리를 냈다. 차유신이 팔짱을 꼈다.

“얼마 달랍니까? 거기서.”

“그거 물어보려고 내가 지난주에 도 대표 만난 거야. 대체 얼마 주면 땅 넘길 거냐고. 그랬더니 아주 희한한 소리를 하데.”

“무슨 소리요.”

“그와 관련한 건을 차유신 의원과 직접 협의하고 싶대. S시티 프로젝트 맡은 우태원에게든 누구에게든 절대 말하지 말고, 은밀하게 차유신 만나는 자리 하나 주선해 달라 하더라고.”

“또라이 새끼. 팬 미팅 하고 싶으면 공청회나 놀러 오지.”

차유신이 끌끌거렸다. 윤학경이 진중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여간 조심해 가면서 한번 만나 봐.”

“조심할 건 또 뭐 있습니까.”

“일장토건, 거기 말 많은 곳이야. 새롭게 운도동 장악한 매천회 배후가 거기라는 얘기가 있어.”

차유신의 윗눈썹이 굼틀거렸다. 매천회. 얼마 전 프락치임이 발각돼 하루 만에 내보낸 선우열의 출처. 이후 해당 사안을 따지러 역현구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 간 일이 있었다. 상주 인력이 얼마 되지 않아 쉽게 깽판을 칠 수 있었다. 전성기 때의 역운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한 줌이었다.

매천회 우두머리를 맡은 건 50대 남성이었는데 워낙 간이 작아 차유신이 그 앞에서 구둣발만 들썩거려도 벌벌 떨었다. 예전에 차유신으로부터 당한 게 응어리로 남아 장난을 쳤는데, 큰 과실을 저질렀다며 몇 번이고 조아렸다. 다신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면서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그때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이 소심한 인물이 어떻게 그리도 과감한 일을 계획했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도명진이라고 있어. 예전에 석일태하고 같이 역운회 세운 인물. 지금은 인수된 ‘SDB그룹’의 ‘D’.”

익숙한 이름에 차유신의 눈이 부릅떠졌다. 윤학경이 말을 이었다.

“그 도명진 아들이 바로 도희범이야.”

테이블을 짚은 손가락이 곤두섰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매가 조금조금 비틀렸다. 우련한 저소가 샜다. 하, 참. 차유신은 비꼬듯 탄식했다. 느른한 읊조림이 혀를 타고 미끄러졌다.

대충 감이 잡힌다.

“그 새끼 연락처 갖고 계시죠.”

차유신이 따지듯 물었다. 윤학경이 바로 답했다.

“어어. 있지.”

“정확히 두 시간 후에 그쪽 대표실로 가겠다 통보하세요.”

말을 마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윤학경이 허둥지둥 잡았다.

“도희범이 그때 안 된다 할 수도 있잖아.”

차유신의 눈이 돌아갔다. 벙해 있는 그를 힐끔하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뇨. 도희범은 분명히 될 겁니다.”

*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캄캄한 그림자가 얼굴을 덮쳤다. 굳이 신경 쓸 상황이 아닌지라 그대로 지나쳤다. 저벅저벅 걸어 막 음영을 벗어났을 때, 덜컥 팔이 붙들렸다. 멈칫한 얼굴이 들렸다.

“왜 여기에 서 있고 그래?”

얼떨떨한 다그침이 나왔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팔 잡은 손을 풀었다. 일순 흔들린 몸이 바로 섰다. 놓치지 않고 주시한 우태원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일. 없어.”

올라간 손이 황급히 내저어졌다. 휘 돌아간 눈길이 허공을 배회했다. 일단은 우태원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가 도명진의 아들과 어떤 식으로 엮여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발생한 일과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해 당분간은 말을 삼갈 셈이었다.

우태원에게 역운회의 그늘이 조금이라도 미치는 걸, 자신이 원치 않았다.

“선배.”

외면해 있는 차유신의 어깨가 잡혔다. 찌뿌둥한 눈망울이 끌어 올려졌다. 가만히 눈을 맞춘 우태원이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보지 않았어요? 방금 전 나오면서.”

잡힌 어깨가 공연히 뻐근했다. 불안을 반추하듯, 반복적으로 불끈거리는 우태원의 턱이 시야를 메웠다. 차유신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늘어져 있던 손이 우태원의 볼을 덮었다. 간지럼을 태우듯 쓸어 주자 굵다란 목이 울렁였다. 속눈썹을 가지런히 세운 차유신이 대뜸 상체를 밀어붙였다.

“지금 봤어.”

훅 내민 입술이 우태원의 것과 겹쳤다. 접합한 표피에서 춥, 소리가 났다. 어깨를 들썩인 우태원이 쾅, 벽에다 주먹을 꽂았다. 덜덜거리는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살살 아랫입술을 핥아 준 차유신이 우태원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살짝 풀린 금배지의 접합부를 여미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배지 바꿔 달아. 떨어진다.”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난 차유신이 얼굴을 떨어뜨렸다. 달아오른 면상을 쓸어 올린 우태원이 미세하게 헐떡였다. 곁눈질로 본 차유신이 희롱했다.

“근무 시간에 보채지 마. 발정기는 오늘 새벽에 끝났잖아.”

고개를 바로 한 차유신이 저편의 길목을 봤다. 벽 너머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건 헉헉거리는 윤재희였다.

“형님, 무원 형님 일 있어 먼저 갔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금부터 뭐 있어?”

“저요? 형님 모시는 일 말고 없죠.”

“잘됐네.”

차유신이 눈매를 접었다. 윤재희에게 턱짓을 하고, 심상하게 지시했다.

“나하고 잠깐 사우나나 가자.”

윤재희의 안면이 확 굳었다. 난감하다는 양 입을 다신 그가 곧 꾸벅했다.

“그러시죠, 형님.”

*

역현구 운도동을 찾은 건 반년 만이었다. 지난 총선 때 신진화당 역현구 갑 후보로 나선 우태원을 서포트하기 위해 몇 번 들른 이래 처음이었다. 애초에 갈 일이 없었다. 여전한 깡패 소굴이고, 빈번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지만 역운회가 점령했을 때에 비하면 그저 범상한 지역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역운회를 대체한 매천회가 종종 거슬리는 일을 저질렀으나 크게 신경 쓸 만한 사안이 못 됐다. 차유신에 있어 운도동은 한때 여행하다 떠나온 섬에 불과했다.

차유신은 이제 육지에서 산다. 자신이 태어난 곳인 동시에 자신이 키운 곳. 처음이자 끝. 역현구 사도동. 오늘날 차유신에게 역현구란 사도동뿐이었다.

섬으로 돌아간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 의원님.”

사무실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빌딩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복도를 걷고 있자니 새 건물 특유의 페인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가장 안쪽 복도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싸 보이는 그림과 석물, 카펫으로 무장한 널따란 공간이 드러났다. 마치 호텔 로비 같았다.

“운도동에 일장토건 별관이 있었나 보네요.”

다가오는 도희범을 무시한 채 내부를 휘둘러보며 말했다. 멈춰선 도희범이 싱글거렸다.

“별관은 무슨. 장사가 잘돼야 별관을 내지요.”

“그럼 여긴 일장토건 직원용 리조트라도 됩니까.”

“지금 알면서 물으시는 겁니까, 의원님.”

도희범이 정색했다. 차유신은 무심히 시선을 넘겼다. 도희범의 등 너머에 서 있는 남자들을 탐색하듯 살폈다. 총 여섯 명. 위협적인 정장 차림. 180센티 이상, 0.1톤을 거뜬히 달성할 법한 거구들.

누가 봐도 일개 건설사 직원이 아니다.

“그놈의 깡패 새끼는 허대윤 경찰청장이 다 때려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뇌까린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도희범을 지나쳐, 중앙에 놓인 소파에 몸을 앉혔다. 뒤따라온 윤재희가 차유신의 뒤를 지켰다.

“깡패 새끼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껄껄거린 도희범이 차유신의 곁으로 왔다. 맞은편에 착석하고는 넌지시 눈길을 건넸다. 그의 어조가 은근해졌다.

“엄연히 세금 내는 시민들입니다. 과한 말씀은 삼가셔야죠.”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누가 보면 도 대표님께 깡패 새끼라고 한 줄 알겠습니다.”

약을 올리듯 눈초리가 휘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요. 코스닥 상장사 대표가 깡패 새끼 변호를 다 해 주고.”

도희범의 면상이 가까스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뒤편의 남자 중 하나가 제법 크게 큼, 소리를 냈다. 심기 거슬린 기색이 완연해 보였다. 눈치챈 도희범이 팔을 뒤로 넘겨 손짓했다. 미적거린 남자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도희범이 과장되게 윽박질렀다.

“뭐 하는 짓거리야, 웃지는 못할망정. 어? 차유신 의원이잖아. 예의 안 갖출래?”

입을 다신 남자가 억지로 인상을 풀었다. 도희범이 보란 듯 그의 뺨을 두어 번 찰싸닥거렸다. 관찰하던 윤재희가 귓속말을 했다. 형님, 의원실에 얘기해 보좌진 더 요청할까요. 차유신은 손을 저었다. 둬, 오늘은 아니야. 번복할 여지 없는 확언이었다. 매우 뚜렷한 직감이 있었다.

오늘은 ‘일단’ 아니다.

“매천회하고는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겁니까.”

차유신이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남자를 자리로 돌려보낸 도희범이 움찔했다.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빙빙 돌려 얘기하는 건 취향이 아니신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여쭙는 겁니다.”

도희범이 불현듯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투였다. 차유신은 잠자코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남자들의 어깨 너머로 낡은 건물 일색인 운도동 전경이 보였다. 저 허름한 동네 어딘가에서 지금도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안다. 그런 싸움 하나하나가 모래알처럼 쌓이며 주기적으로 새 모래성을 완성하는 곳. 바로 운도동이다.

많은 조직이 모래성의 꼭대기에 존재하길 원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나의 건물에 두 개의 탑은 존재할 수 없다. 과거에는 역운회가 독점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으나 그들의 성은 이제 무너졌다. 이후 새 모래성이 쌓였고, 매천회가 그곳의 주인으로 등극했다. 당시보다 성은 작아졌으나 여전히 탑을 장악하는 일은 달콤하다.

도희범이 매천회와 손잡은 걸 굳이 숨기지 않는 것도, 그 달콤함을 알기 때문일 터다.

“한 반년 됐습니다. 역운회 그렇게 되고, 한동안 춘추 전국 시대였는데. 어찌어찌 다잡으니 정리가 되더라고요. 원래 매천회가 대한민국에서 역운회 다음가는 조직이지 않았습니까. 기반이 얼마나 훌륭한지 여부야 설명하기 입 아플 따름이죠. 우두머리가 두 번이나 갈리는 사고가 있었지만.”

도희범이 조롱 조로 덧붙였다.

“어떤 국회의원에 이용당하다 말이죠.”

“그게 서운해 그 난리를 쳤습니까.”

차유신이 발끝으로 테이블을 툭, 건드렸다. 도희범이 떨떠름하게 입매를 꼬았다. 차유신의 입에서 권태로운 한마디가 샜다.

“뭣도 모르는 어린애를 제 의원실 프락치로 붙이고, 그거에 열이 받아 매천회 사무실에 항의하러 간 제 앞에서 그곳 대표라는 인간이 빌빌거리게 만들고. 그게 다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설마요. 고작 그 정도에 칼 뽑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침착하게 받아친 도희범이 또 뒤편을 손으로 불렀다. 이번엔 다른 남자가 왔다. 손에 두 개의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받아 든 도희범이 그중 하나를 차유신에게 건넸다.

“의원님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일단 내용물 좀 보시죠.”

탐탁지 않은 손이 봉투를 잡았다. 입구를 연 차유신이 안을 헤적거렸다. 두 장짜리 페이퍼가 나왔다. 어떤 남자의 이력서였다.

이름 정해신. 만 38세. 미국 모 주립대 졸업. 전 일장토건 경영 전략 상무. 현재 다섯 개의 사회단체를 운영 중.

“누굽니까, 이게.”

언짢은 질문이 나왔다. 도희범이 답했다.

“차 의원님께 비례 대표 공천을 부탁드리고 싶은 인물입니다.”

“이 인간을요.”

“훌륭한 친구입니다. 보시다시피 맡고 있는 사회단체장만 다섯 개에….”

“사회단체, 그거 아무 이름이나 지어 법인 등록하면 그만인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에서 개나 소나 하는 게 사회단체장입니다. 심지어 다섯 개라… 이것 참. 국내 포털 사이트 아이디도 세 개가 한도인 건 아시죠. 이거 알 만한 사람 사이에선 경력 세탁한다며 손가락질당하고도 남을 이력입니다.”

차유신이 대놓고 빈정거렸다. 도희범이 정중하게 질문했다.

“힘들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이게 되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좀….”

차유신이 도로 가져가라는 양 페이퍼를 흔들었다. 받지 않은 도희범이 저편에 눈짓을 보냈다. 세 번째 남자가 뛰어왔다. 도희범이 벽에 붙은 TV를 가리켰다.

“틀어.”

“네, 형님.”

꾸벅한 남자가 TV 앞으로 갔다. 전원을 켜고, 몇 개의 버튼을 누른 끝에 한 영상을 띄웠다. 설명도 없이 나타난 화면을 차유신은 일단 봤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찍은 것으로 보였다. 화질은 좋지 않았다. 밤이었고, 빛이 그다지 들지 않는 환경이었다. 다만 공간 자체는 익숙한 감이 있었다. 지켜보던 눈이 깜빡거렸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저긴 역현호 인근이었다.

-형님! 도로 떴습니다.

화면 속에서 남자 외침이 들렸다. 우뚝 서 있는 키 큰 남자 주변으로 대여섯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리가 된 남자들 틈으로 커다란 포대가 보였다. 갓 물에서 건져진 듯, 잔뜩 젖어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중심에 선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차유신의 이마가 움칠했다. 화질이 좋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낯익은 안면이었다. 서재길 실장.

-어떻게 하긴. 도로 처넣어.

이내 들려온 묵직한 대답에 솜털이 쭈뼛 섰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양 익숙한 음성이다.

화면 속으로 새로운 남자가 들어왔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남자의 발밑에는 야수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차유신의 발꿈치가 서서히 억눌렸다. 비록 화면을 통해서이지만, 그의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체향과 기류, 숨소리까지도.

오늘 아침 자신과 한 침대에서 일어난 남자이므로 모를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소리친 서재길이 남자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남자들이 포대를 둘러쌌다. 곧 한층 무거운 돌을 밑에 매달고, 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짐짝처럼 실어 날라진 포대가 호수에 처넣어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사방팔방 물이 튀었다. ‘형님’이라 불린 남자가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댔다. 텁지근한 혼잣말이 들렸다.

-지겹다, 진짜.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의원님은 알고 계셨죠? 이거.”

도희범이 물었다. 차유신이 냉하게 대꾸했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저 영상, 김후준 대국민당 대표가 실종된 날 밤에 찍힌 겁니다. 저 일 있고 며칠 있다 역현호에 그분 시신이 떴죠. 영상에서처럼 포대에 싸인 채로 말입니다.”

도희범이 눈웃음을 쳤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입니다. 안 그래요?”

차유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기세등등해진 도희범이 두 번째 서류 봉투를 건넸다. 받아드는 차유신의 손에 핏줄이 섰다. 애써 평정심을 찾아 가며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아까보다 두툼한 서류였다. 얼굴 가까이 가져와 읽었다. 훑어 내리는 눈길이 점점 옴씰거렸다. 발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구둣발이 짓밟혔다.

석일태 SDB그룹 전 회장의 개인 자금 흐름 내역. 다수의 계좌로 돈이 분산됐다. 본인의 차명 계좌로 1,210억 원, 아들인 석재경에 703억 원.

우태원에 412억원.

“원하는 게 뭐야, 너.”

탁. 들고 있던 서류가 거칠게 내리쳐졌다. 패대기쳐진 종이들을 내려 본 도희범이 실소했다. 만족감에 젖은 감탄이 다가왔다.

“실로 놀랍네요.”

그가 실실거렸다.

“우태원 의원과 상상 이상으로 가까우신 모양입니다.”

차유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닥치고 원하는 걸 얘기해.”

“저는 차유신 의원님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요.”

도희범이 잔뜩 도취돼 지껄였다.

“제가 원하는 인물을 공천도 시켜 주고, 때때로 정치권 통해 도움도 주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지극히 친절한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그러면 영상이며 이 서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윤학경 서울시장이 그렇게 팔아 달라며 애원하는 미도동의 100평짜리 땅, 그건 선물로 드리죠.”

차유신의 어깨가 딱딱해졌다. 소파 시트를 짚은 손이 불끈거렸다. 머릿속은 한파가 들이닥친 양 얼얼한데, 심장은 녹아내릴 정도의 열기 속이다.

이 간극을 깨부숴 어긋난 감각을 고쳐 놓지 않으면, 스스로를 용인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윤재희.”

낮은 부름이 나왔다. 뒤편의 윤재희가 고개를 내렸다.

“네, 형님.”

“여기 CCTV 있나.”

“없습니다. 오자마자 확인했습니다.”

윤재희가 재킷 안에 숨긴 CCTV 탐색기를 만지작거렸다. 고갯짓한 차유신이 목을 늘어뜨렸다.

“그래.”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몸이 일으켜졌다. 뻗어 나간 구둣발이 테이블 위를 디뎠다. 훌쩍 뛰어넘어, 도희범의 면전에 다가섰다. 일순 경직된 도희범의 어깨를 잡아채고는 다짜고짜 가슴을 걷어찼다. 억, 소리 낸 도희범이 뒤로 넘어갔다. 쿵! 자빠진 소파에서 요란한 소음이 났다.

“허억!”

신음하는 도희범의 목에 발꿈치가 내리찍혔다. 도희범이 가쁘게 바닥에 주먹을 찍었다. 주변의 남자들이 달려왔다. 차유신은 침착하게 발을 옮겼다. 딱딱한 굽이 놈의 목울대를 눌렀다. 후읍! 도희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대로 밟으면 죽는다.”

차유신이 경고했다. 둘러싼 남자들이 멈칫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이동했다. 벌건 눈을 까뒤집은 도희범을 노려보다, 조금조금 이를 갈며 따졌다.

“너 몇 살이냐.”

도희범은 답을 하지 못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헐떡이기 바쁜 그를 쏘아보며 차유신이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장단에 맞춰 주긴 할 텐데, 몇 가지 알아 둘 게 있어. 하나. 네가 몇 살을 처먹었든 내가 어른이야. 설령 네가 일흔을 처먹었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아. 감히 어른하고 친구 먹을 생각하지 마. 이거, 대가리에 확실히 박아 둬.”

차유신이 발힘을 풀었다. 허업, 소리 낸 도희범이 바쁘게 끄덕였다. 차유신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둘.”

다시금 강고해진 뒤꿈치가 그의 울대뼈를 짓눌렀다. 억! 도희범이 허우적거리며 악을 썼다. 아랑곳하지 않고 지분거린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내 앞에서 감히 우태원 가지고 수작 부리지 마.”

날 선 경고가 실내를 울렸다.

“너 따위 새끼 입에 올려도 되는 놈이 아니야.”

실팍한 구둣발이 딱 급소만 보전할 정도로 그의 목울대를 찍어 눌렀다. 허억, 어으억! 도희범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씨발 새끼야.”

퉤, 침을 뱉고 난 차유신이 발을 거뒀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집은 도희범이 컥컥거리며 피 섞인 타액을 토했다. 형님! 앞다퉈 도희범을 부축한 남자들이 차유신을 힐끔거리며 씩씩거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대충 흘겨본 차유신이 다리를 뻗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윤재희의 어깨를 밀어 걷게 하고는, 입구로 가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입구가 열렸다. 그대로 윤재희를 끌고 나오며 문을 닫았다. 쾅. 커다란 소리가 복도에 번졌다. 윤재희가 제 머리를 쥐어짰다.

“형님, 우리 일 분 후에 죽을지도 몰라요.”

차유신이 짜증을 냈다.

“오늘은 아니라니까 그러네.”

시큰둥하게 이동한 눈길이 복도 창 너머에 걸렸다. 칙칙한 운도동 하늘을 응시하다, 심호흡하며 억지로 가슴을 가라앉혔다. 흥분감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윤재희의 우려대로 일 분 후에 매천회에 죽을지도 몰라서가 아니었다. 도희범의 불쾌한 제안에 장단을 맞춰 줬다는 상실감 때문도 아니었다.

“하…. 우태원 이 새끼.”

탄식한 차유신이 얼굴을 짚었다. 손가락 틈으로 어스레한 빛이 파고들었다. 마치 우태원의 그림자 같았다. 언제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운 기류로 무장한 제 연인 같았다.

한참이나 얼굴을 가린 채 걸었다. 손가락 틈의 우태원을 보며 나아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을 때, 손이 주먹으로 뭉쳐졌다. 부유하던 빛이 오롯이 손아귀 안에 담기는 게 느껴졌다. 차유신은 가만히 빛을 가둔 손에 입을 맞췄다. 뜀박질하던 심장이 비로소 안정을 찾아갔다.

“괜찮아. 그 개새끼는 내 손안이야.”

우태원은 차유신의 소유다. 죽을 때까지 이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존재다.

절대 운도동의 모래성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

쏴,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물을 튼 직후 미동도 않고 거울만 보던 차유신의 머리가 기울었다. 올라온 손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살을 비벼 댄 손가락에서 바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희범.”

혼잣말을 하며 목을 젖혔다. 김 하나 없이 말끔한 욕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소용이 없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가렸다. 도희범의 건물에서 나올 때 바라본 운도동의 뿌연 하늘 같았다.

운도동의 먹구름은 걷힐 듯하면서도 걷히지 않는다. 하나의 탑이 함락되면 또 하나의 탑이 솟아오르기 위해 기를 쓴다. 그곳만큼 피 냄새 나는 왕관을 쓰기에 좋은 곳이 없다는 걸, 들개들은 안다. 그리고 그 들개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 게 현재 도희범이었다,

놈이 운도동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100%는 아니지만 많은 걸 갖추고 있다. 일장토건의 대표로서 돈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고, 사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머리도 있다. 무엇보다 태생이 역운회 초대 공동 대표의 아들이다. 혈통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것이다. 고만고만한 깡패 새끼 사이에서 도희범 정도면 거물이다.

도희범의 여러 요인 중 차유신으로서 거슬리는 건 딱 하나다. 사람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 재력을 갖춘 점이나 일장토건 CEO라는 점, 무력 넘치는 조직원을 배후에 둔 점 따위는 아무래도 사사로운 부분이다.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무서운 건, 결국 모든 일이 사람과 사람의 문제로 시작해 끝나기 때문이다. 도희범은 거래를 하기 위해 굳이 차유신을 찾았다. 차유신보다 영향력이 센 선배 정치인도 있고, 윤학경 서울시장을 포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차유신에 승부를 걸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차유신만큼은 제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 카드를 갖고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희범이 차유신과 우태원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이런 걸 제안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선 우태원 당사자에게 딜을 거는 건 그 자체로 모험이다. 역운회 출신인 그가 곱게 넘어갈 턱이 없다. 분명히 ‘운도동 방식’으로 해결하려 할 거다. 타고나길 대화가 대화로 끝나지 않는 인물이고, 도희범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반면 차유신은 대화가 된다. 영향력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당 내부에서 여러 의원을 아우르는 ‘소통책’ 역할을 맡고 있고, VIP의 확고한 신임도 갖췄다. 신문 정치면 몇 장만 읽으면 누구나 파악 가능한 사실이다. 도희범 입장에선 최선에 가까운 선택지다.

그리고 차유신을 통해 도희범이 얻고자 하는 건.

“제2의 역운회.”

중얼거린 차유신이 팔을 뻗었다. 받침대에 둔 비누를 움켜쥐고 주물럭거리며 하얀 거품을 만들었다. 쏴아, 쏟아지는 물살에 이리저리 튀기면서도 덩어리는 갈수록 불었다. 차유신은 터질 것처럼 부푸는 거품을 노려봤다.

역운회가 없어진 운도동에 새로운 역운회를 짓는 것. 역운회 창립자의 아들 입장에서는 염원에 가까운 일이라 봐도 좋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다. 충분한 자금과 조직원을 갖추는 건 하수들도 아는 기본이다. 도희범은 그 이상을 봤다. 바로 권력.

석일태가 역운회를 절대 군림 조직으로 키워 낸 비결. 수많은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들.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 역운회는 안전했다. 일상처럼 벌어지는 마약 밀반입이며 폭행, 살인 사건을 자전거 사고 수준으로 포장해 무마했다. 도희범은 이 방식을 두고 판박이처럼 베낀 답습에 나섰다. 석일태 때문에 제 아버지가 죽은 건 죽은 거고, 이용할 건 이용하기로 한 거다.

물론 차유신만으로는 어렵다.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한들 젊은 국회의원 하나로 과거의 역운회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몰랐을 리 없는 도희범은 진작 조력자를 추가 배치했다. 매천회와 관련한 사안을 수시로 커버해 주는 대국민당 남재후 의원이 아마 그가 최초로 영입한 ‘매천회 울타리’일 거다.

거기에 차유신에 청탁한 정해신이 여의도에 입성하고, 그가 본격적으로 국회 사람을 포섭하기 시작하면 도희범의 그림이 얼추 완성된다. 원하는 대로 여의도에 깃발을 꽂을 수 있다.

당연히 차유신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평소였다면 당장 거절한 뒤 자리를 박차고 주먹부터 날렸을 거다. 아까 전에도 비슷한 걸 하긴 했다. 거절만 안 했을 뿐.

끼익. 척척한 손이 샤워기를 잠갔다. 팔을 타고 미끄러진 물방울이 남은 거품을 지우며 떨어졌다. 치유신은 밭은 숨을 고르며 거울을 봤다. 비친 자신이 한창 흐릿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거울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깨끗이 해 봐야 또 흐려질 것이다. 지긋지긋하며 혹독한 한파가 9개월 주기로 찾아오고, 깨끗이 다린 셔츠를 다음 날 또 다려야 하는 것처럼. 허무할 정도로 제자리걸음인 일들을 하루에도 수십 가지씩 접한다. 개중에는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장소나 사람을 지나치는 것처럼 외면에 대한 선택이 가능한 영역도 존재하지만, 차유신은 어느 순간 특별히 불편하지 않다면 받아들이는 걸 택했다. 삶에 질렸다는 증거였다.

다수의 하잘것없는 일상을 타성에 맡기는 대신 차유신은 남은 소수에 적립해 둔 모든 기회를 바쳤다. 그건 아주 효율적이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그 소수는 차유신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의지 하나도 허투루 내비칠 수 없었다.

“우태원은 못 돌려보내.”

신음 같은 뇌까림이 나왔다. 뒤로 빠진 손이 벽에 걸린 타월을 챘다. 분연히 머리에 덮고, 탈탈 털어 가며 거울을 쏘아봤다. 김이 가셔 가는 표면이 보였다. 결연한 낯이 점점 선명해졌다. 차유신은 결심을 곱씹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희범의 제안에 따른다. 도희범이 지닌, 우태원이 역운회 소속이었다는 증거물이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 따위가 두려워서는 아니다. 실제 까발려져도 자신 선에서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 마당에 나올 우태원의 반응은 두렵다. 도희범을 물어뜯을 것이고, 그건 절대 여의도 방식이 아닐 것이다. 두려운 게 그다지 없는 차유신은 오로지 그런 것들이 두려웠다.

우태원이 다시 운도동의 들개가 되는 것. 우태원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보는 것. 우태원이 자신의 명을 거스르는 것.

우태원이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

차유신의 두려움은 모두 우태원에 있었다.

*

“벌써 샤워했어요?”

욕실에서 나왔을 때, 눈앞에는 막 퇴근한 듯한 우태원이 있었다. 같은 아파트의 아래위층에 집을 두고 있다 보니 서로의 거처를 오가는 게 일상이었다. 차유신이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어. 늦게 퇴근했네.”

“저녁에 행안위 회의가 있었습니다.”

우태원이 손을 뻗어 왔다. 들고 있던 타월이 넘어갔다. 다가온 우태원이 손수 차유신의 머리를 털어 줬다. 차유신은 말없이 후드득, 흩어지는 물방울을 봤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얼추 물기를 말리고 난 우태원이 물었다. 조금 추워진 차유신이 샤워 가운을 여미며 되물었다.

“웬 아이스크림.”

“아까 퇴근할 때 지지자한테 받았어요. 아이스 팩에 담겨 있어 아직 시원해요.”

우태원이 바닥에 둔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유명한 아이스크림 브랜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차유신이 찌푸렸다.

“네가 뭐가 예쁘다고.”

“그러게요. 잘생겨서 좋다는 말은 했습니다만.”

우태원이 심상하게 응수했다. 차유신이 따졌다.

“너 아이스크림 안 먹잖아.”

“네, 안 먹어요. 그래도 받았잖아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등을 떠밀었다. 석연치 않은 발걸음이 떨어졌다. 우태원이 이끄는 대로 침실로 들어가, 침대 시트에 몸을 앉혔다. 차유신이 마저 머리를 말리는 동안 우태원은 아이스크림 박스를 꺼내 협탁 위에 올렸다. 제법 컸다.

“왜 이렇게 커?”

“아이스크림케이크라던데요.”

“아이스크림도 있고 빵도 있는 거야?”

“아이스크림만 있을 거예요.”

“근데 왜 케이크야?”

“식품표시광고법 위반 혐의 적용해 회장 구속시킬까요?”

우태원이 물었다. 말끄러미 보던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미친놈 아니고서 누가 그런 걸 해?”

우태원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차유신이 지시했다.

“케이크나 꺼내.”

하기 전에 먹어서 없애기로 했다.

“따르죠.”

주억거린 우태원이 박스에서 내용물을 뺐다. 분홍색 아이스크림케이크가 협탁에 올라왔다. 차유신이 이죽거렸다.

“너하고 진짜 안 어울리는 것 알지?”

“알아요.”

개의치 않은 우태원이 종이봉투 안의 스푼을 챙겼다. 제 손가락보다도 작은 스푼을 케이크에 꽂고는, 조금 떠서 맛본 뒤 설명했다.

“체리 맛이네요.”

“그래 보여. 위에 체리 올라가 있잖아.”

“독은 안 든 것 같고요.”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것도 그래 보여.”

우태원이 재차 스푼을 케이크에 꽂았다. 아까보다 큰 덩어리를 얹은 스푼이 차유신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우태원이 말했다.

“먹는 것 보여 줘요.”

시큰둥한 입이 벌어졌다. 아이스크림을 문 뒤, 스푼째로 우태원의 손에서 빼며 비아냥거렸다.

“왜 이렇게 변태 같아? 오늘.”

“아이스크림 먹이는 게 변태 같아요?”

“조금.”

“정액은요.”

달콤한 스푼이 입 안에서 굴러갔다. 스푼을 까딱거린 차유신이 읊조렸다.

“그건 정상이지.”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전부 녹여 먹고 난 차유신이 스푼을 내려놓았다. 우태원은 빤히 보고만 있었다. 차유신이 물었다.

“넌 왜 안 먹어.”

“말했잖아요. 아이스크림 안 먹는다고.”

“이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먹여 줘요, 그럼.”

우태원이 제 재킷 단추를 풀며 말했다. 차유신은 케이크를 스푼으로 긁으며 새까만 재킷 칼라를 살폈다. 아까보다 반짝이는 금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 새로 달았네.”

“의원실에 새것이 있었어요.”

“잘했어.”

상을 주듯 스푼을 내밀었다. 분홍색 아이스크림이 우태원의 아랫입술을 건드렸다. 내려다본 우태원이 입을 열었다. 검은 입 안으로 스푼이 들어갔다. 혀를 움직인 우태원이 아이스크림을 툭, 건드렸다. 분홍색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아까 윤재희 비서하고 사우나 갔어요?”

스푼을 뺀 우태원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반사적으로 다른 곳을 본 차유신이 답했다.

“어.”

“어디 사우나요.”

“얘기해야 해?”

“궁금하잖아요.”

“캔지스 호텔 뒤편에. 의원들 많이 가는 데.”

“거기 오늘 휴일입니다. 아까 우리 수보가 얘기해 줬어요.”

재킷을 바닥에 둔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차유신의 목이 꿀꺽거렸다. 입 안의 단내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목구멍으로 소리 없는 욕설이 삼켜졌다.

씨발. 거긴 왜 하필 오늘 문을 닫고 지랄이야.

불만을 머금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탄하는 소리가 나왔다.

“중요한 것 아니잖아. 좀 넘어가지 그래?”

“선배.”

돌연 어깨가 부여잡혔다. 확 당겨진 상체가 우태원을 향해 기울었다. 단내가 지워진 자리에 그의 체향이 스몄다.

“제 얼굴 보고 얘기해요.”

눈망울이 미적미적 올라갔다. 미력한 원망을 머금은 낯이 일광처럼 날아와 망막에 박혔다. 어쩐지 오금이 저렸다. 차유신은 괜히 성을 냈다.

“대체 아까부터 왜 이래? 일하다 보면 말 못 할 대외비 정도는 생기는 거잖아.”

“그건 저도 이해해요.”

우태원은 침착하게 끄덕였다. 한층 무지근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할 때라도, 최소한 선배 눈은 저를 담고 있어야죠.”

어깨를 옥죈 손아귀에 점점 힘이 실렸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가죽이 뻐근해 왔다. 가쁜 숨을 뿜은 차유신이 고개를 쳐올렸다. 엄한 지시가 터졌다.

“손에서 힘 빼.”

“싫어요.”

어금니가 분연히 물렸다. 자력으로 몸을 빼려 팔뚝에 힘을 줬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항우장사 같은 악력에 상반신의 힘을 모조리 빨린 기분이었다. 애초에 우태원을 힘으로 이기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날카로운 눈길이 다시금 우태원에 쏠렸다. 그 와중에 감상하듯 응시해 오는 면상에 분통이 터졌다. 차유신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으름장을 닮은 언어가 튀어나왔다.

“너 이러다 나 치겠다. 어?”

“제가 어떻게 선배를 쳐요.”

사뭇 상냥하게 답한 우태원이 얼굴을 내렸다. 은연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선배가 저를 칠 짓을 하면 몰라도.”

바람 소리를 내며 응달이 다가왔다. 온수에 젖어 들듯 입술이 덮쳐졌다. 차유신의 턱이 일순 덜커덕거렸다. 우태원의 손 하나가 뒤통수를 덮어 왔다. 동시에 어깨를 잡은 손이 강고해졌다. 스르르 넘어간 등이 시트에 묻혔다. 졸지에 드러누운 차유신의 위에서 우태원이 굴신했다.

쑥 들어온 혀가 말랑한 점막을 마구잡이로 핥아 댔다. 단내의 잔향이 모조리 집어삼켜졌다. 혀가 쓸고 간 자리에서 오싹한 간지러움이 열꽃처럼 피어올랐다. 차유신의 가슴이 점점 융기했다.

“하으으….”

쇄골을 전율한 차유신이 가까스로 시트 위 주먹을 뭉쳤다. 힐긋한 우태원이 마무리를 짓듯 차유신의 안에서 개처럼 할짝거렸다. 곧 얼굴을 들자, 거미줄 같은 침이 길게 늘어지다 끊겼다.

“이제 혼내 봐요.”

우태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치뜬 눈으로 쏘아본 차유신이 주먹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야.”

공격적으로 내뻗은 주먹이 우태원의 턱밑에서 펼쳐졌다. 갈고리를 걸듯 어깨를 낚아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내려온 우태원이 다시 차유신과 입을 겹쳤다. 훅, 숨을 불어넣은 차유신이 그의 아랫입술을 씹으며 명령했다.

“더 빨아.”

우태원의 턱이 경련했다. 황홀감에 젖은 열풍이 입 안을 휩쓸어 왔다. 뒤통수를 덮은 손아귀가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꿀렁거렸다. 문득 확인한 밑에서는 정장 차림 하반신이 뜰썩이고 있었다. 천 바스러지는 잡음을 내며 탄탄한 허벅지가 차유신의 다리 틈을 파고들었다.

“쉽네요.”

의중을 알 수 없는 감탄이 들렸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그를 봤다. 잠잠해 보이는 얼굴 밑으로 열기에 차오른 목덜미가 비쳤다. 차유신이 뱐죽거렸다.

“네 앞에서 쉬우면 안 돼?”

“그건 고마운 일이지만, 걱정이 돼서요.”

우태원이 고저 없이 덧붙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까 봐.”

다부진 손이 차유신의 가슴을 덮은 샤워 가운을 잡았다. 보드라운 천을 만지작거리다, 불쑥 밑으로 들어왔다. 괴한처럼 엄습한 훈기가 오른 가슴을 부여잡았다. 짓눌린 유두가 조금은 거칠게 비벼졌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깨물렸다.

“흐읍….”

“어디 가서 이러는 거 아니죠?”

“하아… 내가 돌았어?”

“미안해요. 제 머릿속에선 백 번쯤 일어난 일이라.”

우태원의 머리가 비스듬해졌다. 완전히 가운을 헤집어 차유신의 가슴을 드러내고, 다짜고짜 얼굴을 파묻었다. 홧홧하게 달아 가던 젖꼭지가 얼음 동굴처럼 차디찬 입 안에 갇혔다. 탕. 시트에 발을 구른 차유신이 목을 젖혔다. 쥐어짜는 신음이 터졌다.

“아… 더, 흐읏…!”

“너무 조르지 마요. 불안해요.”

단단한 치아가 유두를 잘근거렸다. 순식간에 피가 쏠린 중심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두컴컴한 입 안에서 미끄러진 혀가 곤두선 젖꼭지를 널름거렸다. 마찰감에 사로잡힌 유륜 곳곳에서 톡, 톡, 소름이 돋았다. 차유신의 발가락이 종잇조각처럼 오므라들었다. 푸들거리는 목을 타고 흐무러지는 소리가 샜다.

“후으… 뭐가… 불안해….”

“전부 다.”

말을 맺은 우태원이 입을 모았다. 추웁, 소리를 내며 유두와 유륜이 한꺼번에 빨렸다. 허둥거리다 올라간 차유신의 손이 벽을 찍었다. 미동하는 눈동자가 굴러갔다. 힘줄을 세우며 부푸는 우태원의 목이 보였다. 사정없이 흡입된 살이 피 한 방울 통할 구석 없이 팽팽해졌다. 차유신의 입 안에서 희열에 찬 혀가 덜덜거렸다.

“하으… 으음…!”

“행복해서 불안해요.”

우태원의 입이 나릿나릿 풀렸다. 자유로워진 차유신의 몸이 비틀렸다. 애꿎은 벽을 긁어 대며 할딱이는 걸 바라보다, 우태원이 제 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귓등 너머로 버클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백 번은 들은 소리에 또 귓바퀴가 쫑긋거렸다. 차유신의 목을 타고 녹진한 침이 넘어갔다.

불안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드러낸 적은 없지만.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남자를 밝힐 줄 몰랐다.

찍. 불현듯 머리맡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긁히고 긁힌 끝에 사리살짝 찢겨 나간 벽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멍하던 차유신의 눈이 커졌다. 황급히 빠진 손이 우태원을 저지했다.

“잠깐만.”

우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유신은 벽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드러난 시멘트를 점한 기다란 금. 그 틈으로 삐죽 빠져나온 전선이 보였다. 지켜보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의 도청. 평소 같으면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사안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특수하다. 호시탐탐 자신과 우태원을 노리는 도희범으로부터 한 번 당할 뻔한 적이 있다. 프락치를 시켜 차유신의 국회 의원실에 도청기를 설치했었다.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묵과할 수 없었다.

“그만하자.”

우태원에게 보이지 않도록 슬그머니 움직인 손이 벽지를 억지로 붙였다. 실제 도청인지 여부에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그에게 알릴 생각은 없다. 말하는 순간 용의자를 추궁할 것이고, 묻는 말에 대답하다 보면 도희범의 존재가 노출될 여지가 있다.

“무슨 일 있어요?”

샤워 가운을 추스르는 차유신에게 우태원이 질문했다.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대꾸했다.

“몸이 안 좋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시네요.”

“거짓말 좀 하자. 통하지 않을 것 좀 속아 주고.”

가운을 원상 복구 한 차유신이 우태원을 질책했다. 우태원이 다리 하나를 시트에 올리며 등을 젖혔다. 벌어진 앞섶 틈으로 우람해진 속옷이 보였다. 노곤한 눈길이 차유신을 쓸었다.

“얘기할 생각 없죠?”

“얘기할 게 있어야 하지.”

“속아 줘야 하나요?”

“속아. 어려운 것 아니잖아.”

단칼에 결론 낸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시트에서 벗어난 발이 바닥을 디뎠다. 막 일으켜진 몸이 일순 비틀거렸다. 실팍한 우태원의 손아귀가 손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팔을 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묵묵하게 눈을 맞춘 우태원이 입을 뗐다.

“앉아요. 제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팔뚝이 당겨졌다. 확 이끌린 몸이 시트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새끼가 진짜. 이를 간 차유신이 우태원을 째려봤다. 우태원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마주 봤다. 시근덕거린 차유신이 팔을 내밀었다. 활짝 펼쳐진 손이 우태원의 가슴팍을 짚었다.

“우태원.”

나무둥치 같은 흉근 위에서 손가락이 곤두섰다. 차유신의 잇새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좋은 말로 할 때….”

“속을게요. 대신 아까처럼 있어 줘요.”

무게감 있는 한마디가 귀를 스쳤다. 차유신의 손등이 움칠했다. 우태원의 눈이 적막하게 깔렸다.

“어려운 것 아니잖아요.”

밑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스멀스멀 들어온 팔이 차유신의 허리를 둘렀다. 이윽고 시트 위의 몸을 가뿐히 들어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차유신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얌전히 이동한 몸이 우태원의 무릎에 앉혀졌다.

“하루 종일 선배를 이렇게 안고 싶었어요.”

허리를 감은 하박이 견고해졌다. 차유신은 꿀렁거리는 팔 근육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는데, 선배가 기회를 주지 않았죠.”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깜박이던 차유신의 눈망울이 흘러갔다. 하늘거리는 찢긴 벽지가 보였다. 이 정도 목소리는 저기까지 들리지 않겠지. 아닌가. 요즘은 기술이 좋아 가능하려나. 차유신은 그 와중에 그런 고민을 했다.

아. 조용하던 입에서 문득 탄성이 터졌다. 허리를 꼬집듯 주무르는 손길 때문이었다. 미동한 눈길이 넘어갔다. 해를 경배하듯 탐색해 오는 먹색 눈동자가 보였다. 어물거린 차유신의 입이 자리를 잡았다. 고집스럽게 뇌리를 잠식하던 상념이 흩어지고, 새로운 것이 광랑해졌다.

“실컷 해.”

작지만 단호한 음성이 나왔다. 차유신의 허리만 만지작거리던 우태원이 피식거렸다. 차유신의 눈이 찌뿌둥해졌다. 불퉁한 언어가 또 나왔다.

“뭘 웃어.”

“선배 긴장했어요.”

“그래서 웃겨?”

“귀여워요.”

미소 띤 우태원이 다른 손을 올렸다.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진 그가 덧붙였다.

“흥분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하겠네요.”

“당연히 못 하지. 내가 하지 말랬잖아.”

“억지로 하려면 할 수도 있죠.”

촉촉한 머리카락을 쓸며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읊조리는 한마디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참아야죠. 선배에게 칭찬받아야 하니까.”

차유신의 발가락이 곰지락거렸다. 차유신도, 우태원도 말을 하지 않는 공간에서 농몽한 공기만이 맴을 돌았다. 괜히 어색한 기분에 차유신은 앉은 자세를 고쳤다. 뒤척거리던 허벅지가 문득 멎었다. 목울대가 작게 꿀꺽거렸다. 안쪽 허벅지에 닿는 묘한 촉감에 치골이 얼어붙었다.

이 새끼 그새 더 섰구나.

“칭찬받고 싶다면서.”

차유신이 우태원의 목을 꼬집었다. 우태원이 안여하게 답했다.

“이건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너 진짜 시도 때도 없이 세우는구나.”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땐 안 돼.”

쏘아붙인 차유신이 벽을 힐끔거렸다. 백 번을 본다 해 벽지 너머의 전선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날을 숨긴 자객처럼 빳빳하게 응시해 오는 벽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목덜미가 저렸다. 이글거리는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갔다.

그래, 저것이 도청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 치자. 그러면 다른 곳은. 거실은, 부엌은. 혹은 사도동의 의원 사무실은. 그 어느 곳은 안전하다 할 수 있을까. 도희범의 존재와 목적을 안 이상 차유신에게 안전지대는 없다. 문제는 결국 도희범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대한 빨리 놈과 얽힌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차유신은 우태원을 안전하게 해야 했다.

“너무 움직이지 마요.”

저도 모르는 새 숨이 차오른 차유신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난기를 느낀 차유신이 황급히 우태원을 봤다. 우태원이 느른하게 말했다.

“못 가라앉혀요.”

“세울 상황 안 세울 상황 못 따지고 세우는 네 좆에 책임을 물을 생각은 안 해?”

“의미 없어요. 이미 일상이거든요.”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답변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차유신이 눈을 비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제 허벅지 틈으로 대차게 솟은 남근 실루엣이 보였다. 심각하게 보던 차유신의 낯이 문득 느슨해졌다. 자못 담담해진 눈길이 우태원에 걸렸다.

“또 언제 세웠어? 안 세워야 할 상황에서.”

“들어 봤자 학을 뗄 거면서 뭘 굳이 물어요.”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잖아.”

살며시 들린 엉덩이가 우태원의 하체에서 떨어졌다. 그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친 자세로 근처 시트에 앉고는, 맨발을 들어 속옷을 밟았다. 발바닥에 밀착한 천 너머의 성기가 불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대답해 봐.”

“선배.”

우태원의 호흡이 미세하게 달았다. 개의치 않은 차유신이 속옷을 비비기 시작했다. 꽁꽁 감싸인 살덩이가 금방이라도 천을 뚫고 나올 기세로 버둥질 쳤다. 한껏 딱딱해진 핏줄이 발바닥을 울렸다. 그의 생식기만큼이나 핏대가 굵었다.

“속옷 안에 넣어서 해 줘?”

애태우듯 남근을 지르밟으며 물었다. 우태원이 신음처럼 대꾸했다.

“하아… 네.”

“이런 게 취향이야?”

“취향 없어요. 선배 말고는.”

“아까 질문에 대답해.”

차유신이 도발하듯 귀두를 지분거렸다. 등을 떤 우태원이 제 얼굴을 짚었다. 엄지에 쓸린 귀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차유신이 재촉했다.

“어서.”

“국회 본회의 때 세 번 정도요.”

“미친 새끼.”

차유신이 키득거렸다. 우태원은 웃지도 않고 손을 내려 차유신의 발목을 잡았다. 뜨거운 손가락이 복숭아뼈를 간질거렸다.

“넣어서 해 줘요. 얘기했으니.”

“넣어서 하면 바로 쌀 거야?”

“글쎄요.”

우태원의 어깨가 늘어졌다. 곤로한 한마디가 찾아들었다.

“저 풀어 주려고 이러는 거 알아요. 하지만 싸는 건 제 마음이죠.”

“바로 안 한다?”

차유신이 조소했다. 싸늘해진 눈빛이 우태원을 쓸었다. 그의 이마가 순간 굳었다. 똑바로 주시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우태원의 속옷에서 발이 떨어졌다.

“고개 들어.”

대뜸 기운 몸이 우태원과 가까워졌다. 굵은 침을 삼킨 우태원이 낯을 보였다. 차유신은 그의 긴장을 감상하며 두꺼운 허벅지를 사이에 둔 채 몸을 앉혔다. 자연스럽게 앞섶과 가까워진 손이 꿈지럭거리며 뻣뻣한 속옷 밴드 안을 파고들었다. 음경을 거머쥐자마자 열기를 뿜어 대는 살덩이가 손아귀 틈을 벌려 가며 팽창했다. 차유신의 눈이 반쯤 감겼다.

“말도 안 듣고.”

야릇한 숨을 흘린 입이 우태원의 것을 덮쳤다. 헐떡이는 숨결이 고스란히 입 안을 엄습했다. 차유신은 체벌하듯 그의 입술을 물었다. 이어 달뜬 틈을 비집어 가며 혀를 넣고, 우악스럽게 안을 헤쳤다. 척척하게 젖어 가던 우태원의 혀가 돌연 게걸스럽게 엉켜 왔다.

“하… 선배….”

꿀처럼 질척한 신음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익숙한 체향에 취한 차유신의 눈이 가물거렸다. 몽설 같은 자극에 혈류가 녹았다. 차유신은 몇 번의 꿈에서 한 걸 떠올리며 우태원의 남근을 쥐어짰다.

옴지락거리던 손이 멎은 건 안에서 눅눅하게 차오르는 물기를 느꼈을 때였다. 기척도 없이 사출한 체액이 손금을 적시며 뚝, 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면전에서 풍겨 오는 땀 냄새에 오감이 나른해졌다.

“오늘은 몇 번째로 세운 거야?”

우태원의 목구멍 입구까지 핥은 끝에 혀를 뺀 차유신이 얼굴을 들었다. 입꼬리를 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떨어졌다. 마주 본 우태원이 눈초리를 접었다. 유순한 대꾸가 들려왔다.

“세 번째요.”

차유신은 다정하게 웃어 줬다.

“미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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