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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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장. 포인트제로

1.

맞춰 입었나 싶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차림의 남성 무리에서 그는 단연 빛이 났다. 단상 위 두 번째 줄에 걸쳐 있었고, 중심에 선 당 대표 기준으로 오른편에 치우쳐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대표가 발언을 시작했을 때 카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를 클로즈업했다. 자리의 주인공을 과감히 무시한 포커싱. 그건 관성이었다.

뜬금없는 초점을 나는 쉬이 납득했다. 발언하는 사람도 아니고, 눈에 띄는 제스처를 취한 것도 아니지만 렌즈뿐 아니라 나도 그에게 시선을 꽂은 지 오래다. 서 있는 무대가 지루하다는 양 종종 허공을 보는 그의 면상이 시야에 짙은 음각을 남겼다. 그는 독언하는 연극배우처럼 렌즈를 일별했다. 연기하는 대상은 경멸이나 고뇌일 수 있었고, 아름다움 혹은 위엄일 수도 있었다. 그를 에워싼 모든 기류가 의의였다.

온 감정이 그의 얼굴 안에 있었다. 일개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그는 잘도. 마치 신처럼 세상을 내려다봤다.

“대학은 왜 자퇴했어?”

맞은편의 남자가 종이를 팔랑였다. 나는 급하게 TV 화면에서 눈을 거뒀다. 서둘러 자세를 고치고,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힐금했다. 신진화당 차유신 의원실 수석보좌관 진무원. 가다듬은 답변이 나왔다.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설마 운동했나.”

“아니요. 그쪽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면 됐어.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만 아니면 돼.”

진무원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상단에 ‘이력서’라고 적힌 페이퍼. 왼편 구석에 내 반명함판 사진이 붙어 있고, 옆으로 이름 석 글자가 비친다. 선우열. 곰곰이 살피던 그가 고갯짓을 했다.

“차유신 알지.”

“네. 그야 당연히.”

일순 떨떠름해졌다. 좀 황당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유신 의원실 인턴으로 지원한 사람에게 차유신을 아냐고 묻는 건 다소 웃기는 상황이 아닌가. 우물쭈물하는 나를 주시하며 진무원이 턱을 괴었다. 한탄 비슷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 새끼 성질머리를 네가 뭘 알아.”

“네?”

벙한 되물음이 나왔다. 이번 질문은 황당하지도 않았다. 본의 아니게 멍청해진 내 앞에서 진무원이 혀를 내둘렀다.

“간단히 설명할게. 국회에 있는 300명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에, 가장 고집 세고, 가장 오만방자한 놈이야. 모시기 엄청나게 힘들어. 뭐, 스스로가 그래도 되는 입장에 있으니 그따위로 사는 거지만. 어차피 인턴인 네가 차유신하고 독대할 기회가 딱히 있지는 않겠지만, 혹여나 그런 상황이 오면 다른 보좌진에 맡기고 적당히 내빼. 그 정도 편의는 우리가 봐줄 테니. 알았어?”

“네.”

뒷짐 진 손이 움츠러졌다. 열 개의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차유신과 독대할 상황이 오면 내빼라고. 그다지 끌리지 않는 얘기다. 이 의원실에 들어온 이유가 그것인데. 차유신과 마주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여기서 면접을 보는 일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잘 내뺄 것 같아서 뽑은 거야, 너. 그게 다야. 네가 대학교 1학년 때 자퇴한 고졸 출신인 것도 우리 의원실에서는 중요치 않아.”

진무원이 내 이력서 한구석을 짚었다. 찍어 누른 손가락 밑으로 단출한 문장이 비쳤다. 특기: 유도. 고교 대표 선수 경력 있음.

“우리 의원실은 다른 것 필요 없어. 무조건 맷집, 맷집이 중요해. 여자도 예외 아니고. 나중에 우리 정책비서관 보면 무슨 얘기인지 알 거야. 애가 좀 정신이 나가서 물불 안 가리는 타입인데….”

“뒷담 하지 마세요, 수보님. 천벌 받아요.”

불쑥 들어온 누군가의 손에 진무원의 팔뚝이 뒤로 꺾였다. 잔뜩 찡그린 진무원이 뒤를 노려봤다. 코웃음 친 여자가 쏘아붙였다.

“내가 정신이 나가?”

“지금 네 눈깔 봐. 완전히 맛이 갔지.”

“이 오빠 지랄하는 것 봐. 귀여워.”

깔깔거린 여자가 갑자기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제대로 등을 가격당한 진무원이 억, 소리를 냈다. 신경도 쓰지 않은 여자가 나를 보며 생글거렸다.

“새로 온 인턴? 반가워요.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오래 버텨요. 파이팅.”

과장되게 손을 흔든 여자가 발을 뺐다. 멀어져 가는 그녀를 멀뚱히 보다, 다시 진무원을 응시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등을 주무르는 그가 보였다.

“아무튼 인턴인 것 감안해 일은 크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시킬 거야. 별개로 주어진 건은 최대한 신속하고 똑 부러지게 처리토록 하고. 사수로 윤재희 비서 붙여 줄 테니 대부분의 도움을 그쪽 통해 받아. 나 포함 다른 보좌진은 바빠서 너 챙길 시간이 없어.”

“알겠습니다.”

“대충 설명은 끝냈고, 일단은…. 그러니까.”

뜸을 들인 진무원이 고개를 돌렸다. 드문드문 사람이 오가는 의원 회관 1층 카페테리아를 둘러보다, 저편의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국회 분위기도 익힐 겸 30분 후 시작하는 토론회 하나 참석해 봐. 가서 잘 듣고, 나눠 주는 자료 챙겨서 토론회 내용 요약본과 함께 제출해.”

“어떤 토론회입니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 나오는 디지털 치안 관련 토론회.”

“차 의원님은 국토위 아닙니까. 왜 행안위 토론회를….”

“행안위에 우태원 의원이라고 있어. 핵심은 거기야. 우 의원이 뭔 짓거리 했는지만 빠짐없이 체크해 보고하면 돼.”

진무원이 딱 잘라 말했다. 내 눈이 동그래졌다. 도통 영문을 몰라 하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진무원이 말을 이었다.

“우리 영감이 우태원 의원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거든. 이유는 묻지 말고, 시키는 것에만 따라. 그게 차유신식 방침이야.”

*

“경찰청에서 추진하는 새 AI 치안 시스템 개발의 핵심은 빅데이터 확보에 있습니다. 충분한 데이터를 얻지 못하면 완성도 높은 시스템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본청에서는 꾸준하게 국내 통신사 및 포털 기업의 협조를 요청해 왔으나, 개인 정보 보호 이슈를 핑계로 민간 기업이 차일피일 논의를 미뤄 와….”

단상 위의 남자를 보고 있자니 명작 고전 영화의 기품 있는 남자 배우가 떠올랐다. 명확하게 어느 영화의 누구다, 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딱 들어맞는 영화와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유의 기시감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인식한 뇌가 가마득한 실체를 구체화하라며 연신 독촉해 왔다. 알량한 예술 작품으로나마 승화시키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광활하며 찬란한 흑해. 그는 실로 감동적인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차유신과 같은 당인 신진화당 소속 우태원 의원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TV로는 그저 다부지게 잘생겼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실물을 접하니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위압감에 압도돼 기존의 싸구려 감상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목소리 역시 외양을 닮아 묵직하며 울림이 있었다. 덕분에 회의실의 모든 이가 마땅히 그래야 하듯 그를 주목했다.

“빅데이터, 통신사, 민간 기업 협조….”

수첩에다 더듬더듬 글자를 적어 나가던 손이 기우뚱거렸다. 방금 전 우태원에게서 나온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뚝 끊겼다. 어조는 선연한데, 내용이 안개 속이다. 먹구름 같은 목소리가 의미를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애초에 그 시스템을 전국 대상으로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한창 깡패가 판을 치던 역현구에서는 통했지만, 다른 곳에까지 같은 걸 시행하는 건 예상 낭비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문득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태원이 가만히 눈을 굴렸다. 덩달아 내 눈길도 넘어갔다. 청중석의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행안위 소속 의원이 얼굴을 드러냈다. 제1야당인 대국민당에서 떠오르는 스타 취급을 받는 남재후 의원. 눈빛에서 거드름이 비쳤다.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역현구만 해도 문제의 치안 시스템이 유명무실해진 지 2년이 넘었죠. 왜? 필요가 없으니까. 잡을 사람이 있어야 시스템을 돌리는데, 이제는 그 대상이 없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 가동을 원치 않는 일부 인물이 있어 돌아가지 않았죠.”

우태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남재후의 이마가 구겨졌다. 우태원이 콕 찍어 지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새 버전 AI 치안 시스템 도입을 왜 꺼리는 겁니까, 남 선배님.”

“내가 언제, 뭘 꺼렸다는 겁니까. 말 똑바로 해, 자식아. 나는 지극히 합리적인 걸 따진 거야. 네가 말한 치안 시스템은 돌리는 것 자체가 국세 낭비….”

“반말하지 마시고, 기립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발끈해 일어서려는 남재후을 우태원이 목소리로 앉혔다. 반쯤 몸을 일으킨 남재후가 멈칫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목이 씨근덕거렸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우태원이 덧붙였다.

“제 입에서 본인 얼굴 제대로 붉혀 드릴 얘기 나오기 전에, 알아서 자중하시라는 얘기입니다.”

남재후의 이가 질근 갈렸다. 눈알이 터질 기세로 우태원을 쏘아보던 그가 끝내 착석했다. 분위기 왜 이래? 근처의 기자단이 숙덕거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 옆에 놓인 페이퍼가 팔락 넘어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매끄러운 한마디가 좌중에 내려앉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미국의 유사 치안 시스템 운영 현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니까 우태원 얘기는… 민간 기업 대상으로 암호화한 개인 정보 제공을 의무화하자는 것. 이 과정에서 이 분야 대표 기업의 기술력을 빌려…. 어디더라, 거기 이름이.”

삐뚤거리는 수첩 위 글자들을 짚어 대던 펜이 멎었다.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전혀 모르는 분야를 무작정 학습하려니 머리에 빈 공간이 남아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곤란한 듯 수첩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주머니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꺼낸 뒤 아까 저장해 둔 의원실 사수, 윤재희 비서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아이콘을 눌렀다.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정리해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내용이 쉽지도 않다. 차유신 의원이 매우 빡빡하게 따지는 스타일이라면, 다시 소회의실로 돌아가 남아 있는 보좌진 아무나 붙잡고 물어물어 보고를 구체화할 생각이었다.

-차유신 의원실 윤재희 핸드폰입니다.

대여섯 번 신호음이 간 끝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즉각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어물대던 입이 급하게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늘 인턴으로 입사한 선우열이라고 합니다.”

-선우… 뭐?

상대방이 탐탁지 않은 반문을 했다. 나는 차근차근 풀어 줬다.

“선우, 열입니다.”

-이름이 우열이야?

“아닙니다. 성이 선우….”

“아무튼, 그래서.”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을 돌렸다. 띵.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발을 집어넣으며 입을 뗐다.

-진무원 보좌관님 지시에 따라 방금 열린 행안위 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만, 어떤 식으로 정리본을 작성해야 할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비서님께 자문을 구하고자….

“우태원이 허튼짓했든?”

뜬금없는 질문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우물쭈물하던 어깨가 불현듯 곤두섰다. 황당무계한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막 승강기 안으로 들어온 한 남자 때문이었다. 울렁이는 혀를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노력과 별개로 떨리는 대답이 나왔다.

“안… 했습니다.”

-어어, 그러면 됐어.

상대방은 허무할 정도로 태연자약한 반응을 했다. 땀에 전 손아귀를 꼼지락거리며 곁눈질을 했다. 우태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을 깔고 있었다. 보필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의원 회관이라 편하게 다니는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다 차유신 의원실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우태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층이 목적지인가. 마른침만 삼키던 입이 승강기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통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했다.

“그래도 뭐라도 정리해 제출해야 할 텐데…. 차유신 의원님께 직접 들어가는 보고 아닙니까.”

-차유신 그 새끼가 그런 것 하나하나 살펴볼 정도로 성실해 보여? 대충 해. 좆같은 영감 성질머리에 뭐 일일이 맞춰 주고 있어. 피곤하게 살아 봐야 너만 손해야.

심드렁한 응수에 절로 눈매가 찡그려졌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말씀이 뭐 그렇…. 아무리 그래도 차 의원님이신데.”

“풉.”

돌연 뒤편에서 실소가 들렸다. 기겁한 얼굴이 돌아갔다. 제 입을 가려 가며 신소하는 우태원이 보였다. 마른 목이 꿀꺽거렸다. 통화 내용을 다 들었구나 싶었다.

-누구야? 지금.

상대방의 목소리가 자못 냉했다. 서슴거린 입이 조심스러운 대꾸를 꺼냈다.

“그…. 같이 엘리베이터 탄 의원님….”

-엘리베이터야?

“네.”

-올라오고 있어?

“네.”

대답을 마치자마자 띵, 소리가 났다. 다물려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까만 문틈으로 실오라기 같은 이채가 흘러들었다. 눈빛. 보자마자 아, 소리를 냈다. 점점 밝아 오는 바깥세상에서 눈빛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이 밝아져 그가 보인 건지, 그가 보여 세상이 밝아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아름답게 오만무도한 눈은 처음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기를 한참, 뭔가가 훅 들이닥쳤다. 남자 손이었다. 내 어깨를 가뿐히 지나친 손이 우태원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정장 차림의 남자 실루엣이 형형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우악스러운 손이 우태원을 당겼다. 자석처럼 이끌린 우태원이 고분고분 남자 앞에 섰다. 남자에 비해 훨씬 좋은 체격을 지녔음에도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아예 할 생각이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잘 길들여진 들개처럼, 우태원이 남자와 눈을 맞췄다. 마주 본 남자가 볼멘소리를 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새끼야.”

우태원은 대답 대신 허리를 굽혔다. 멱살 쥔 남자의 손을 풀고, 부드럽게 감아쥔 뒤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사죄했다.

“죽을죄를 지었어요, 선배.”

멀거니 퍼져 있던 내 동공이 흠칫거렸다. 널찍한 우태원의 어깨 너머로 삐딱하게 가눈 남자의 낯이 두드러졌다. 그가 혀를 찼다.

“잘못한 건 아나 보네.”

국회에 있는 300명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에, 가장 고집이 세며, 가장 오만방자한 인물. 그래도 되는 입장에 있기에 그렇게 사는 인물.

“이제 저를 어떻게 벌할 거예요?”

우태원이 은근히 물었다. 차유신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 죽여 버릴까, 아주.”

우태원이 흡족히 눈매를 접었다.

“그것 참 황홀한 얘기네요.”

두 남자의 시선이 느긋하게 엉겼다. 경직돼 있던 내 무릎이 덜커덕거렸다. 뒷덜미에 식은땀이 고였다.

기묘할 정도로 오금이 저리는 광경이었다.

*

차유신 의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차유신의 손에서 핸드폰을 챈 그가 칭얼거렸다.

“대체 왜 남의 전화를 멋대로 받는 거예요. 네?”

“세 번 이상 울렸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그거 의원실 입장에서 명백한 소음 공해야.”

“그렇다고 제 전화를 형님이 말도 없이 받으면 어떻게 해요. 저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다고요.”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가 아이돌이야?”

차유신이 허, 하며 몸을 틀었다. 남자가 성난 몰티즈처럼 식식거렸다. 지나쳐 가던 내가 눈인사를 했다. 억지로 분을 삭인 그가 나를 관찰했다. 탐탁지 않게 살펴 오다, 팔을 내밀었다. 내 손이 덥석 잡혔다.

“반가워요. 새로 온 인턴이라며?”

“네. 선우열입니다.”

“난 윤재희. 저 인간… 이 아니라.”

무작정 차유신을 가리키고 난 그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대학생처럼 앳된 얼굴이 버겁게 싱긋거렸다.

“차유신 의원님 비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행안위 토론회 다녀왔다며. 별일 없었어?”

“네. 일단은요.”

“우열이 정장 하나 해 줘라.”

문득 내실 문을 연 차유신이 광범위한 지시를 했다. 의원실의 모든 보좌진이 그를 주시했다. 끙, 소리를 낸 진무원이 따졌다.

“지금 네 말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뭐.”

차유신이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다. 진무원이 정정했다.

“일단 쟤 이름은 열이야. 우열이가 아니라.”

“그래서.”

“그것도 그렇고, 인턴한테 무슨 정장을 해 줘. 네가 재벌이야?”

진무원이 으름장을 놓았다. 차유신은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옮겼다. 구석의 캐비닛을 가리킨 그가 말했다.

“저기 안에 열어 보면 생로랑 풀세트 하나 있어. 그거 쟤한테 내줘.”

“그건 또 어디서 났어?”

“받았어. 지지자한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나를 힐긋한 차유신이 뇌까렸다.

“105 입지? 이따 한번 입어 봐. 대충 보니 딱 맞겠네.”

그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윤재희가 짜증을 냈다. 아 진짜, 형님. 나한테는 넥타이만 주구장창 해 줬으면서! 영문 모르고 멈춰 있던 내 어깨가 돌연 소스라쳤다. 허리 밑에서 지잉,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내려간 손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열심히 울려 대는 핸드폰이 나왔다. 액정에 찍힌 고딕체에 눈이 커졌다. 아버지. 어물거리던 상체가 보좌진들을 향해 기울었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황급히 나서는 뒤통수가 조금 간지러웠다. 망설이다 돌아본 곳에는 팔짱을 낀 우태원이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다 등을 보였다. 신경 쓰지 말자. 우태원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차유신만 챙기면 된다.

우태원은 ‘그쪽’에서 알아서 한다 했다.

“네, 대표님.”

복도 구석에 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조심스러운 눈길이 창밖을 살폈다. 저 밑 화단 나무의 파리한 잎들이 보였다. 파란색도 노란색도 아닌 애매한 빛깔. 길 잃은 여명 같았다.

-차유신은 만났고?

“네.”

한참 후에야 들려온 질문에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상대방은 또 조용했다. 창틀을 짚은 손이 옴씰거렸다. 불현듯 겁이 났다. 불안했다.

차유신과 상대방, 양쪽으로부터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도청기는.

두 번째 물음에는 등허리가 빳빳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설치했습니다.”

-어디에.

“국회에 있는 차유신 의원실의 내실에.”

-오늘 갓 입사했잖아. 그럴 시간이 있었어?

“아까 진무원 수석보좌관과 처음 미팅한 곳이 거기였습니다. 그때 수보 몰래 설치했습니다. 설치 직후 1층 카페테리아로 와 마저 면접을 봤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눈치챌 길이 전혀 없었다 보면 됩니다.”

-문제없겠어? 내실에 CCTV는.

“없었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자동적으로 답하고 난 내 면상이 문득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희한한 일이다. 차유신 의원실에는 CCTV가 하나도 없다. 이래저래 경계할 것이 많은 입장인데, 왜 그런 물건을 일절 두지 않았을까.

-일단은 고생했어. 앞으로 지시 사항이 엄청나게 많아질 텐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이제 시작이야.

상대방이 경고했다. 내 목이 곧아졌다.

“네, 대표님.”

-뭐가 대표님이야. 편하게 불러.

“네…. 형님. 그… 런데.”

머뭇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상대방은 관용을 베푸는 채권자처럼 기다렸다. 나는 무력한 채무자처럼 아물거렸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출소 잘하셨습니까.”

-어어. 우리가 잘 챙겼어. 무탈하게 나왔어.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언제쯤 찾아뵈면 될지….”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지.

상대방이 이기죽거렸다. 내 등줄기가 바싹 말라붙었다. 그가 빙글거렸다.

-네 아버지 아주 훌륭한 기술자야. 역운회에서 네 아버지만 한 금고털이가 없었어.

“압니다.”

-지금 부산항으로 보내는 중이야. 내일모레 홍콩으로 이동시킬 거고. 그쪽에 작업할 금고가 있어. 아주 큰 건이야.

“출소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지금 따지는 거니? 열아, 신세 좋구나. 너나 네 아버지나 그런 걸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걸로 아는데.

부드러운 협박이 찾아들었다. 핸드폰 쥔 손이 얼어붙었다. 상대방이 킬킬거리며 조롱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잘 보필할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해.

“알겠… 습니다.”

대답을 마치자마자 통화가 끊겼다. 깜빡이는 액정을 타고 시선이 미끄러졌다. 다리가 풀려 갔다.

오도 가도 못 하는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다.

“선우열.”

뒤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돌아갔다. 손을 팔랑이는 윤재희가 보였다.

“와 봐. 우리 영감이 부른다.”

*

“애인은 있고?”

들어간 내실에는 차유신과 우태원 둘뿐이었다. 차유신은 안쪽 데스크에 앉아 있고, 우태원은 응접용 소파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내가 답했다.

“없습니다.”

“형제는.”

“혼자입니다.”

“부모님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우물거리던 입이 말아 물렸다.

“네. 혼자 계십니다.”

“게임은 좀 해?”

데스크에서 일어난 차유신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뒀다가 뭐 해? 그런 것도 안 하고.”

“의원님은 하십니까.”

“나도 안 해.”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나는 속으로 갸우뚱했다. 본인도 안 하면서 그런 타박은 왜 할까 싶었다.

“그런데 우리 비서 윤재희는 꽤 하거든. 유행하는 건 일단 다 해. 나는 들어도 모르는 걸. 힐이니, 딜이니 하면서.”

나아간 그가 우태원의 앞에 섰다. 나는 얼떨떨하게 응수했다.

“그렇습니까.”

“게임 좋아하는 애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촉이 있는 모양이야. 뭐만 보면 희한하고, 심상치 않다 해. 그 말도 안 되는 종말론적 세계관에 현실 감각마저 잠식당한 탓인지. 하여간 바보상자가 따로 없다니까. 윤재희가 특히 심해. 오늘도 나에게 이러더라고. 형님, 여기 도청 있는 것 같은데요, 누가 뭔가 한 것 같은데요. 보통은 개소리하지 말라 하는데, 그래도 가끔은.”

차유신이 긴 숨을 뿜었다. 신문을 접어 치운 우태원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게 또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실제로 윤재희가 작정하고 그런 말을 한 날에는 아주 높은 확률로 예측이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차유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난 의원실에 CCTV 설치 안 해. 육감이 몇십 배는 더 뛰어나다는 걸 아니까.”

뒷짐 진 내 손이 옴짝달싹했다. 긴장감에 찬 물음이 나왔다.

“지금 감은 어느 쪽입니까.”

“그냥… 뭐.”

차유신이 구둣발을 꺼떡거렸다. 곧 무릎 하나를 들어 올렸다. 우태원의 허벅지 옆을 사뿐하게 디디고는, 남은 하나를 반대편 허벅지 곁에 앉혔다. 자연스레 우태원의 위에 올라탄 그가 상체를 낮췄다. 우태원의 옆얼굴에 볼이 스쳤다.

“우태원.”

“네.”

우태원은 거의 조련된 수준으로 부름에 응했다. 차유신이 속삭였다.

“꼴려?”

“조금요.”

웃지도 않은 우태원이 답했다. 차유신의 손이 내려갔다. 굵직한 우태원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살살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일하는데 세우면 안 되지.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그런 건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닐 텐데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우태원이 날연히 목을 젖혔다.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댄 그가 태식했다.

“그냥 선배 범하게 해 주면 안 돼요? 도청이고 뭐고.”

내 동공이 확 커졌다. 차유신의 어조가 부쩍 야릇해졌다.

“하아…. 그런 얘기를 여기서 하면 어떻게 해.”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야시시해서, 절로 솜털이 곤두섰다. 벌벌거리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차유신이 발 하나를 내렸다. 바닥을 쓸고 난 구둣발이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안을 헤집은 발끝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그것이 내가 붙여 둔 도청기임을 인지하자마자 꼿꼿해 있던 오감이 무뎌졌다. 차유신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떡 치고 싶어지잖아, 개새끼야.”

콰직, 차유신의 발밑에서 도청기가 박살 났다. 아작 난 기기를 슥 밀고 난 그가 우태원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경련에 휩싸인 내 몸이 뭉그적뭉그적 뒷걸음질 쳤다. 이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만 하체가 풀려 주저앉는 나를 차유신이 일별했다. 서늘한 목소리가 귀를 휘감았다.

“좆같은 것 잘 봤으면 다음엔 이딴 것 볼 일 없게끔 착실하게 살아. 출근부터 지금까지 총 4시간 38분 24초 걸렸지. 영영 퇴근해, 이만.”

*

국회의사당 건너편을 걷고 있었다. 쉼 없이 오가는 차들이 매연 섞인 소음을 흩뿌리고 사라졌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물만 보며 나아갔다.

지시받은 차유신 인턴 작전이 실패했다. 계약에 따라 출소한 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일단은 필요가 있어 홍콩으로 보내지겠지만, 그다음은.

쓸모를 다하면 버려지는 것이 역현구 지하 조직 부속품의 운명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하게 봐 왔기에 잘 안다. 아버지가 그랬고, 지금의 내가 그렇다. 이 말로는 몇 번을 살아도 바뀌지 않는다. 역현구의 족적을 지우지 않는 한.

진저리 날 정도로 시궁창 같은 운명이다.

부웅. 코너를 돌자마자 오토바이 하나가 쏜살같이 들이닥쳤다. 피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얼어 있던 몸이 돌연 넘어갔다. 누군가가 내 허리를 채 뒤로 뺐고, 동시에 들어온 세단이 오토바이를 가로막았다. 쾅! 굉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차체에 처박혔다.

“씨발 새끼들이… 하여간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지.”

바닥을 구르다 늘어진 몸 위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났다. 휘청거리던 머리가 들렸다. 짜증스럽게 제 정장 바지를 터는 차유신이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강제로 세운 세단 안에서 우르르 남자들이 나왔다. 차유신 의원실의 보좌진들이었다. 곁눈으로 본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저 새끼 잡아.”

보좌진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오토바이에서 내려온 남자가 기겁해 도망쳤다. 죽기 살기로 뛰었으나 목적지가 입력된 기계처럼 돌진하는 보좌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도보 끄트머리에서 붙잡혔다.

“괜찮으십니까.”

걱정하는 음성이 들렸다. 내 눈길이 넘어갔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바지를 마저 털어 주고 있었다. 차유신이 혀를 찼다.

“좆같아.”

숨을 고른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멍청하게 올려다보고만 있는 나를 마주 본 그가 또박또박 운을 뗐다.

“아버지 성함 선우태, 역운회의 대표 금고 기술자. 역운회 조직이 상해로 뜬 후 매천회에서 일하다 일선유통 회장 금고에 손대는 현장을 경찰에 적발당해 그간 매천회가 일선유통 대상으로 벌인 협박이며 폭행죄까지 뒤집어쓰고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음. 재판 과정에서 집안 돈 대부분이 증발했고, 아들 선우열은 자금난에 시달리다 대학 자퇴. 이후 최근 매천회로부터 차유신 의원실 프락치가 되면 아버지를 사면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음.”

차유신이 제 허리를 짚었다. 꾸물거리던 몸이 일으켜졌다. 무릎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너 근데 이 새끼 모르냐.”

차유신이 우태원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심상한 우태원의 시선이 나를 머금었다. 어깻죽지가 미적미적 수그러들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대답이 나왔다.

“압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해.”

“우 의원님께서 저를 아실 리 없으니까…. 일개 조직원의 아들일 뿐이고.”

“기억력 좋은 놈하고 안면 있었던 걸 감사히 여겨. 이 새끼 아니었으면 나도 여기까지 파악 못 했어.”

차유신의 인영이 성큼 가까워졌다. 나는 두려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5분 전에 네 아버지가 탄 부산행 차는 피랍됐어. 우리 보좌진들이 네 아버지를 빼 역운회가 있는 상해로 옮기려 준비 중이야. 매천회에 목숨 위협당하며 오늘내일하느니 상해에서 금고나 뜯으며 유유자적하는 쪽이 몇 배는 낫겠지. 너도 같이 가. 티켓은 내가 만들어 줄게.”

“왜 저에게 그런 걸….”

잔뜩 위축된 언어가 새어 나왔다.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네가 먼저 나에게 왔잖아. 나하고 인연 있는 새끼 찝찝하게 보내는 취미 없어.”

차유신이 우태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태원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 발 앞에 던졌다. 툭, 떨어진 종이 가방에서 아까 차유신이 말한 명품 브랜드 로고가 비쳤다. 몸을 튼 차유신이 말했다.

“아버지 만날 때 입고 가.”

맥 빠진 팔이 축 늘어졌다. 차마 쇼핑백을 잡지도 못한 손이 덜덜거렸다. 무너져 가는 사과가 도파처럼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네 덕에 나도 죽일 새끼 하나 파악했는데.”

차유신이 갸웃했다. 우태원을 등지고 선 그의 면상에 은은한 바람이 스쳤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듯, 위엄과 오만이 현현한 서풍이었다. 그 바람에 덩달아 얽매인 내 몸이 고장 난 양 삐걱거렸다. 거칫한 손바닥이 움츠러들었다. 왜인지, 저 얼굴에서 일순 빛이 사그라진 기분이다.

“표정이 왜 그래? 우태원.”

도로 우태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차유신이 그의 볼을 건드렸다. 우태원이 미간을 좁혔다.

“위험한 일 하지 마십시오.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차유신이 우태원의 귀를 꼬집었다.

“뭐 어때. 네가 알아서 해 줄 텐데.”

손을 거둔 차유신이 다리를 내밀었다. 우태원이 그를 따라갔다. 나는 자리에 못 박힌 석상처럼 그들을 지켜봤다. 절로 호흡이 잦아들었다. 살면서 처음 본 광경, 처음 접한 경험에 온 감각이 얼음장처럼 송연해졌다.

참으로 신기한 걸 봤다. 완벽한 줄 알았던 존재의 이면에 도사리는 검은 우물 같은 그림자. 그 그림자가 마치 집처럼 그를 잠식하는 환영. 만물이 조화하듯 우태원의 그늘 안에서 차유신은 빛이 됐다. 오로지 그의 안에서만 ‘그 차유신’이 됐다.

차유신은 우태원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도 우태원을 좇은 모양이다. 그를 위한 덫을 사면에 깔아 두고, 자진해서 걸려들게끔 일상을 주사한다. 참으로 위험하며 이기적인 아량이었다.

그리고 우태원은 유일한 먹잇감을 좇듯 그 덫을 탐했다. 입에서 피가 날 때까지 물고, 뜯고, 핥았다. 더 많은 아량을 달라며 피비린내 나는 혀로 차유신을 갈구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역현구를 닮은 욕망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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