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무덤에서 요람으로 (33/48)

10장. 무덤에서 요람으로

32.

[대국민당 집권 5년 차, 9월.]

「”박신회 뽑겠다” 62%…신진화당, 대선 여론조사 ‘압도’」

테이블에 올라온 신문의 1면 톱기사를 보다가, 묵묵히 치웠다. 가을에 접어든 국회 전경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느슨하게 풀어도 가끔 목이 조인다. 언젠가부터 자주 그렇다. 평화롭고 잔잔한 호수 안에 잠겨있다가, 갑자기 해일에 부딪힌 사람처럼 헐떡이는 때가 있다.

오랜 세월 해수에 머물다 민물로 흘러왔다. 차유신은 종종 해수가 그립다. 그 짭짜름하며 투박한 물결을 요람처럼 갈망한다.

그리고 그 밑에서 차유신을 그림자처럼 옥죄어오던, 피비린내 나는 심해를 욕망한다.

“차! 잡지 나왔어.”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부리나케 다가온 한수현이 데스크 위에 책자 하나를 올렸다. 남성들이 주로 읽는 패션잡지였다. 표지 전면을 채운 수트 차림의 자신을 보자마자 차유신이 눈가를 짚었다. 민망함에 목덜미가 조금 붉어졌다.

“야. 사진 진짜 잘 나왔어. 아무리 본판이 중요하다지만 이 정도면 사기 아니야?”

“혼자 봐. 난 도무지 못 보겠다.”

“왜 안 봐? 큰맘 먹고 촬영한 네 상의 탈의 사진도 안쪽에 들어가 있는데. 이게 진짜 대박이야. 내 사촌 동생 이거 보고 소리 질렀대.”

완전히 신이 난 한수현이 열심히 잡지를 팔랑거렸다. 중간쯤에 차유신만 나오는 페이지가 네 장 정도 있었다. 그중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차지한 것이 잡지사에서 극구 애원해 찍은 상의 탈의 컷이었다.

한수현이 신신당부해 며칠간 운동에 힘을 쏟은 덕에 탄탄한 복근이며 매끈한 가슴선은 마음에 들게 잡혔다. 다만 사진기자가 요청해 지은 표정이 스스로 봐도 야릇했다. 힐긋한 차유신이 완전히 차창에 눈길을 꽂았다. 제 모습임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진짜 다들 변태 아니야? 서른둘 먹은 아저씨가 벗은 걸 대체 왜 보고 싶어 하는 거냐고.”

“어머, 왜요? 전 보고 싶은데.”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신입 여자 인턴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잡지를 뭉쳐 쥔 한수현이 차유신의 어깨를 쳤다.

“부모님께 감사해라. 서른둘 먹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것도 능력이다.”

“언제는 나보고 아저씨라며.”

“재수 없을 때는 아저씨 맞아.”

한수현이 얄밉게 빙글거렸다. 무시한 차유신이 인턴 쪽에 눈을 뒀다.

“윤아 넌 무슨 일이야.”

“아. 박신회 후보님께 연락 왔어요. 지금 1층 소회의실에 계시는데, 잠깐 보자 하시네요.”

“소회의실이 지금 비었나?”

“그런 걸로 알아요.”

“알았어.”

바로 재킷을 챙겼다. 내실 문으로 향하는 차유신의 등에 대고 한수현이 약을 올렸다.

“야. 잡지 몇 부 챙겨둬? 이왕 사두는 거 한 서른 부 쌓아두자.”

“서른 부 사갖고 폐지 줍는 분들한테 드려. 간만에 우리도 기부라는 걸 해보자.”

“어. 서른 부 사갖고 여자 보좌진들한테 돌릴게.”

한수현이 깔깔거렸다. 언짢게 혀를 찬 차유신이 마저 발을 내디뎠다. 잘 다녀오세요. 뒤편의 인턴이 배웅 인사를 했다.

*

소회의실에는 박신회가 없었다. 대신 지난 5월부터 그의 대선캠프에서 청년정책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권헌이 보였다. 안에 들어선 차유신을 발견하자마자 권헌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내 정중히 허리를 굽었다.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앉아. 누가 보면 아직도 네가 내 비서인 줄 알겠다.”

“그, 아니….”

권헌이 머뭇거렸다. 곧 살짝 고개를 떨궜다.

“네.”

착석하는 권헌을 보며 차유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박신회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그의 낡은 핸드폰만 남아있었다. 차유신이 권헌을 향해 턱짓을 했다.

“박 선배는.”

“잠깐 복도에서 누구 좀 만난다고 자리 비우셨습니다.”

“그래?”

심상히 대꾸한 뒤 턱을 괴었다. 제법 넓은 소회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권헌은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정자세를 유지했다. 연신 곁눈질을 하던 차유신이 들숨을 삼켰다.

진짜 더럽게 어색하네.

“박 선배 캠프는 잘 맞아?”

“아…. 네.”

“청년정책연구소장은 할 만하고?”

“네.”

“어려운 건.”

“어려운 거….”

권헌이 말꼬리를 흐렸다. 차유신의 눈치를 본 그가 입을 다셨다. 적잖게 뜸을 들인 뒤, 나지막한 한 마디를 꺼냈다.

“그냥 좀, 공허합니다. 가끔.”

차유신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티 날 정도로 차유신을 외면한 권헌이 테이블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낮은 숨을 고르고 난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사뭇 다정한 음성이 건네졌다.

“와 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권헌이 기립했다. 저벅저벅 이어지는 발걸음에 절도가 있었다. 예닐곱 걸음 만에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살짝 몸을 낮췄다. 올라간 차유신의 손이 권헌의 턱을 잡았다. 이어 요모조모 돌려보며 낯을 살폈다.

사 개월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목구비 한 곳에서 흑돌 같은 눈이 빛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진짜 돌멩이라 봐도 무방할 법한 가짜 눈이 존재한다. 턱에서 떨어진 손이 만들어진 눈을 향했다. 가볍게 건드리자, 권헌이 어깨를 떨었다.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손을 거둔 차유신이 보다 똑바로 권헌을 봤다. 진지한 칭찬이 덧붙었다.

“훨씬 더 강인해 보여.”

권헌의 입이 다물렸다. 한참이나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느릿느릿 주억거렸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소회의실 문이 열렸다. 권헌이 화들짝 차유신에게서 떨어졌다. 들어온 박신회가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미안하다, 유신아. 방금 전 복도에서 도현이를 만났거든.”

“최도현 선배요?”

“어. 계속 신진화당으로 오고 싶다 하기에, 그러지 말고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오는 길이야.”

권헌이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옆에 앉은 박신회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서 쑥 나온 뭔가가 차유신의 앞에 놓였다. 분홍색 개껌이었다. 양쪽에 리본 모양 매듭이 달려있었다. 차유신이 눈매를 구겼다.

“유신이 너 가져라.”

“뭡니까, 이건.”

“아까 캔지스 호텔에서 식사하고 헌이와 이동하는데, 그 앞에서 잡상인이 물건을 늘어놓고 팔더라고. 그런데 딱 보니 이 개껌이 너무나 재미있게 생긴 거지. 그래서 하나 샀어. 흥미롭지 않아? 개를 위해 이렇게 예쁘게 생긴 먹이를 만들었다는 것 말이야. 정작 그 개는 이 모양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텐데.”

“개 키우십니까.”

“지금은 안 키워.”

“저도 안 키웁니다. 대체 저보고 이걸 갖고 뭐 어쩌라는….”

“그냥, 가지라고. 개를 안 키우는 사람은 이런 재미있는 물건을 가져 볼 기회가 없잖아.”

박신회가 실실거렸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손을 뻗었다. 개껌을 챙겨 주머니에 넣는데 괜히 한숨이 나왔다. 박신회가 다소 엉뚱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체감할 때마다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여의도의 용으로 불리는 사람이 쓸모도 없는 개껌을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로 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몽골에서는 동물을 많이 길렀어.”

“이전에 얘기하신 적 있습니다.”

“염소, 양, 말…. 그런 걸 삼백 마리 넘게 직접 길렀지.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이 가는 건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개 한 마리더라고.”

“개 입장에서는 좀 그렇겠네요. 자기를 아껴주던 선배가 갑자기 집을 떠났으니.”

“그 정도로 의존적인 개가 아니야. 꽤 독립적인 놈이거든. 일주일 넘게 어딘지도 모를 곳을 혼자 여행하다가 돌아온 적도 잦아.”

“그럼 상관이 없겠군요.”

“맞아. 개는 상관없을 거야. 내가 상관이 있다는 게 문제지.”

박신회가 목을 젖혔다. 먹먹하게 벌어진 입에서 한층 곤로한 목소리가 나왔다.

“개는 확실히 날 그리워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데 자꾸만 나는 그 개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러다 노망난 사람처럼 갑자기 개껌을 산다든가…. 그런 식의 일이 벌어지는 거고. 뭐, 그렇다고 고비사막에서 태어나 자란 놈을 함부로 국내에 들여올 순 없는 일이니 내가 말라죽기 전에 한번 보러는 가야지. 대선이 끝나고, 좀 여유 있을 때.”

“고작 개를 보려고요?”

“어. 고작 개를 보려고.”

박신회가 피식거렸다.

“애타는 사람이 열심히 움직여야 해. 그 대상이 개든 사람이든. 네가 몽골에 있던 날 찾고, 지금 내가 조언을 얻기 위해 널 찾은 것처럼. 세상의 균형은 그렇게 완성되는 거야.”

*

박신회와의 미팅을 마치고 의원실로 돌아왔다. 데스크 위에 쌓인 페이퍼들을 하나하나 치웠다. 가장 밑에 잘 보존된 서류 뭉치가 깔려있었다. 차유신은 가장 윗줄을 주시했다.

남역회(南逆會).

두 달 전부터 들어온 경찰 보고에 따르면 5월 무렵부터 상해에서 한 한인 폭력조직이 빠르게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본래 이쪽에서는 화교 중심의 ‘일화회’가 가장 큰 조직으로 꼽히는데, 이 조직이 단숨에 일화회를 압도했다.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을 통한 일화회의 마약 밀수 루트를 순차적으로 가로채는 방식을 썼다. 주기적으로 일화회의 사무실을 급습한 건 덤이었다.

상해의 코리아데스크*는 ‘이 조직이 역운회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차유신은 이름을 들은 순간 바로 그것이 역운회라는 걸 직감했다. 남역회가 ‘남쪽의 역운회’로 읽혔다. 역현구를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한 상해가 역운회의 새 본거지임을 이름에 내재한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인 사건을 수사하는 한국 경찰청의 파견조직)

상황은 파악했지만 차유신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두고 계산만 거듭했다. 아무리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려도 언제가 최적의 시기고, 어떻게 접근하는 게 최선의 방식인지가 좀처럼 도출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보낸 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곧 있으면 두 달을 넘어선다. 가슴에 쌓인 인내는 고름이 됐고, 덕분에 차유신은 자주 숨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차오른 고름이 숨통을 틀어막고, 숨을 쉬고 있어도 심장이 뛰지 않는 지금에 와서야 차유신은 알았다. ‘최적’이나 ‘최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능에는 숫자가 없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의 수도 무의미할 뿐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경찰청 외사국장의 번호를 누른 뒤 귀에 가져갔다. 두어 번 만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차 의원님. 무슨 일이십니까.

“상해 코리아데스크, 지난달에 확장했죠.”

-네. 원래 네 명이었던 거, 열 명으로 늘렸습니다.

“위문 방문 한번 합시다.”

차유심이 담담하게 말했다. 외사국장이 자못 놀랐다.

-위문 방문이요?

“네. 상해에서 고생이 많은데, 고충도 듣고 개선점도 따져볼 겸.”

-아이고, 차 의원님. 고작 열 명 있는 조직 갖고 뭐 그런 것까지….

“고작 한 명이었어도 전 갔을 겁니다.”

데스크를 툭, 두드린 차유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저는 지금 국회의원 차유신이 내일 당장 상해에 가는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있거든요.”

차유신은 지금 우태원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

9월의 상해는 다소 더웠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윤재희가 감탄했다. 와, 저 상해 처음 와 봐요. 차유신이 어이가 없다는 양 윤재희를 봤다.

“너 베이징대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데려온 건데.”

“네. 나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상해가 처음이야.”

“나 참. 처음일 수 있죠. 중국이 얼마나 넓은데요. 통역도 생각보다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제가 못 알아듣든, 그쪽이 못 알아듣든 해서. 지역별 억양 차이가 엄청나니까요.”

윤재희가 도리어 따져왔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을 굴렸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차유신은 중국에 대해 신문이나 책에 나온 것 이상으로 아는 게 없었다. 업무상 그쪽 정치인이나 공무원과 몇 번의 미팅을 했고, 베이징에도 두어 번 다녀왔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일정이었다. 심지어 상해는 차유신도 처음이었다.

마중을 약속한 코리아데스크를 기다리며 포털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차유신이 코리아데스크 방문을 위해 상해에 출국했다는 기사가 서른 개 넘게 떴다. 사전에 진무원에게 최대한 이를 홍보해두라고 얘기해둔 상황이긴 했다. 다만 생각보다 기사가 많이 나왔다.

“민망하네. 딱히 하는 것도 없는 일정인데 기사만 엄청 나갔네.”

“박신회 후보 신진화당에 입당시키고 나서 형님에 대한 언론 관심이 엄청나게 늘었으니까요. 형님 넥타이 색만 바뀌어도 득달같이 소설 쓰는 분위기잖아요.”

“좋은 건 아니라고 본다.”

“왜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차유신이 고개를 가눴다.

“너무 주목받으면, 그만큼 빨리 내려가.”

윤재희가 주춤했다. 곧 이해한다는 양 끄덕였다. 진중한 한 마디가 건네졌다.

“그래서 형님이 더 일거수일투족에 유의하고 있다는 거 압니다. 의원실에서도 가능한 한 형님 스타일에 맞추고 있고요. 오늘의 돌발 일정은 예외지만.”

“고맙다.”

눈앞에서 까만 세단이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을 열고나온 중년 남자가 열심히 뛰어왔다. 이내 구십도 각도로 몸을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상해 코리아데스크 소속 정윤철 경정입니다. 게이트를 착각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타시죠. 일정은 이동하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정윤철이 세단 뒷좌석으로 안내했다. 차유신이 먼저 타고, 그다음 윤재희가 탔다. 도로 조수석에 오른 정윤철이 문을 닫았다. 바로 차가 출발했다.

공항을 빠져나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 사이 페이퍼를 펼친 정윤철이 또박또박 보고하기 시작했다.

“1박 2일 일정이라 다소 빠듯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과할 것 없어요. 얘기해요.”

“우선 코리아데스크가 있는 상해공안국을 방문할 예정이고, 다음으로 상해공안국 부국장 및 코리아데스크가 함께 하는 오찬이 예정돼있습니다. 이후 두 달 전 한인 교민을 불안에 빠뜨린 ‘한인마트 총기사건’ 현장을 방문한 후, 오후 4시 상해시장과 티타임을 가지고 오후 6시 ‘상해 교민의 밤’ 행사에 참석합니다.”

“진짜 빠듯하네.”

“죄송합니다.”

“내가 자초한 거니 할 말은 없지.”

차유신이 한탄했다. 그사이 세단은 공항을 나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룸미러를 통해 연신 자신을 살펴대는 정윤철이 보였다. 역시 룸미러를 통해 마주 본 차유신이 픽, 웃었다.

“짜증 나죠?”

“네? 무슨….”

“솔직히 짜증 나잖습니까. 상해에서 본인 할 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국회의원이 온다 해서 일주일 만에 급하게 일정 세팅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섭외하고. 숙소 예약에 운전 같은 잡다한 일까지 전부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런 건 아니….”

정윤철이 미적거렸다. 그 와중에 차마 못 박아 부정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유신이 또 웃었다. 어떤 타입인지 단숨에 파악됐다. 입바른 말 절대로 못 하는 유형. 차라리 함께 일하기에는 이런 쪽이 낫다.

“힘 빼요. 나도 힘 빼고 일하는 스타일이거든. 물론 중요한 순간에는 나도 긴장이라는 걸 하지만, 최소한 이번 출장은 특별한 성과를 내기 위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사사로운 것에 얽매일 이유도 없어요. 내 목숨 위협하는 일만 아니면 그 어떤 사고가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생각이니까. 그냥 우리는 1박 2일간 업무하는 연기를 하는 겁니다. 알겠어요?”

“네.”

정윤철이 들릴 듯 말듯 답했다. 세단이 좀 더 속도를 냈다. 차유신이 피곤한 듯 목을 주물렀다. 옆에 있던 윤재희가 물었다. 형님, 안대라도 드릴까요? 차유신이 손을 내저었다. 집어치워, 없어 보여. 이어 다시 룸미러를 봤다. 여전히 자신을 관찰하는 정윤철이 비쳤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저에게 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죄송합니다.”

“그냥 물어봤는데 뭘 죄송하다 해요. 편하게 얘기해요.”

“정말입니까.”

“제가 경정님께 사기 쳐서 뭐 하겠습니까.”

“그….”

정윤철이 부쩍 얼버무렸다. 재차 눈치를 본 그가 작게 말을 맺었다.

“정말 잘생기셨습니다.”

차유신의 눈 밑이 움찔했다. 윤재희가 흥미롭다는 양 혼잣말을 했다. 오, 정말 하나도 새롭지 않은 얘기네요. 키득거린 차유신이 답했다.

“경정님도 아주 훤칠하십니다.”

*

일정은 생각보다 더 타이트했다. 상해공안국을 둘러본 뒤 식사를 하고, 한인마트 총기사건 현장에 들렀다가 상해시장 미팅을 진행하는 동안 단 오 분도 허투루 보낸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행한 이들이 하나같이 베테랑이라는 점이었다. 윤재희는 빠릿빠릿한 통역으로 미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잉여시간을 최소화했고, 정윤철은 합리적이며 신속하게 이동 시간을 단축했다.

마지막 스케줄인 ‘한인 교민의 밤’ 행사는 상해에서 꽤나 유명한 한식 퓨전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100여 명의 교민이 참석했는데, 대다수가 상해에서 자영업이나 무역업을 하고 있었다. 정윤철과 편히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해 보이는 이들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상해 교민 사회를 꽤나 잘 알고 계시나 봅니다.”

메인테이블에 앉은 차유신이 물었다. 옆자리에 착석한 정윤철이 답했다.

“여기서만 사 년 가까이 근무했거든요.”

“그 정도면 슬슬 국내로 복귀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최대한 여기에 오래 있고 싶은 입장이라….”

머리를 긁적인 정윤철이 말을 이었다.

“와이프가 이쪽 지역에 사는 현지인입니다.”

“아.”

“본청에서 정 복귀를 원하면 하겠지만, 가능하면 상해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그래요.”

“의원님은 어떻습니까.”

테이블에 술병이 세팅됐다. 하나를 들어 뚜껑을 딴 그가 차유신의 잔 쪽으로 병목을 가져갔다. 물끄러미 보던 차유신이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결혼을 한 줄 아는구나 싶었다.

“저 아직 미혼입니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제가 그렇게 들어 보입니까.”

“아뇨. 외관은 오히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정도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사회적 입지가 있다 보니.”

“사회적 입지가 좋은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게 족쇄가 돼 원하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났습니다.”

“그렇군요.”

수긍한 정윤철이 병을 기울였다. 조르르, 소리와 함께 잔이 찼다. 정윤철이 정중히 말했다.

“곧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랍니다.”

차유신이 끄덕였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돌연 저편이 웅성거렸다. 막 병을 거둔 정윤철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반색하며 일어섰다. 저벅저벅 걸어온 풍채 좋은 남자가 정윤철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아이고, 우리 정 경정님. 오랜만입니다.”

“그래요. 묵 회장님은 잘 지내시고요.”

“저야 뭐…. 그냥 그렇지요.”

허허실실 웃은 그가 허락도 없이 차유신의 건너편에 앉았다. 따라서 착석한 정윤철이 차유신에게 말했다.

“상한무역이라고…. 이쪽 교포 사회에서는 아주 유명한 무역회사입니다. 주로 동남아 대상으로 수출을 하고, 그 덕을 본 한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곳 오너입니다.”

남자가 도로 몸을 일으켰다. 키가 이 미터는 돼 보이는 거구였다. 차유신을 향해 목만 까딱한 그가 빙글거렸다.

“뉴스로만 뵈었는데, 실제로 보니 마음이 벅찰 정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한무역 묵영한입니다.”

몸을 내린 묵영한이 손짓을 했다. 무심코 그의 손을 본 차유신의 눈매가 의아한 듯 접혔다. 새끼손가락이 의수다.

“장 사장! 나는 양허다취로.”

허리를 굽고 난 여사장이 부리나케 주방을 향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와 그녀가 적당히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보다 하고 말겠지만, 차유신의 눈엔 보였다.

사장은 묵영한을 불편해한다. 그 이유가 불쾌해서인지, 두려워서인지는 명확지 않지만.

“의원님 뵈면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대뜸 차유신 쪽으로 몸을 고정한 묵영한이 운을 뗐다. 차유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뭡니까.”

“그, 최근….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남역회라고 있습니다. 본래 한국에 있던 놈들인데, 어디서 그렇게 몰려왔는지. 아무튼 요즘 이놈들 때문에 아주 골치입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교민들 상당수가 이 조직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세력 확장하다가 교민들 밥줄까지 위협하면 어찌합니까.”

“제가 알기로 남역회는 마약 거래 위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그게 평범하게 자기 할 일하는 교민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묵영한이 애매하게 웃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밥줄이 아니라, 안전을 얘기한 겁니다.”

그가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그새 다가온 사장이 테이블에 하늘색 양하대곡 병을 올렸다. 묵 회장님, 양허다취입니다. 안내한 그녀가 뒤로 빠졌다.

묵영한이 병목을 쥐었다. 힘차게 뚜껑을 돌렸지만, 안쪽이 불량인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덩치 좋은 남자가 다가왔다. 형님, 도와드리겠습니다. 탕, 소리 나게 병을 내려둔 그가 짜증을 냈다.

“누가 보면 오해한다. 저쪽에 가 있어.”

남자가 빠르게 목을 움츠렸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뒷걸음질 친 그가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그와 비슷한 덩치의 남자 서너 명이 감시하듯 버티고 서있었다. 빤히 살피던 차유신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테이블을 딱, 두드린 손가락이 곤두섰다. 예감이 든다.

아주 안 좋은 예감이.

“아무튼 뭐…. 그래서 의원님 오신 김에 요청을 좀 드릴까 합니다.”

“어떤 요청 말씀이십니까.”

“남역회를 이쪽에서 타이트하게 잡는 게 필요한데…. 아시다시피 코리아데스크는 인력이 한정돼있어, 공안을 움직여 작업하는 게 가장 빠르거든요. 헌데 의원님은 오늘 공안국 부국장도 만나셨고, 상해시장도 만나셨으니 이런 걸 다이렉트로 요청하기에 최적의 입장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억지로 뚜껑을 따는 데 성공한 묵영한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지켜보던 차유신이 천천히 제 잔을 비웠다. 도수 높은 고량주에 불이 붙은 듯 식도가 뜨거워졌다. 가볍게 도리질을 친 차유신이 잔을 내려뒀다. 묵영한이 차유신 쪽으로 양하대곡 병을 들이밀었다. 손을 들어 거부 의사를 표한 차유신이 정윤철 쪽에다 잔을 밀었다.

“제가 술은 사람 가려가며 받아서요.”

묵영한의 표정이 확 식었다. 마른 침을 삼킨 정윤철이 일단 차유신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다시 채워진 잔을 쥔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남역회는 누가 움직입니까.”

묵영한이 탐탁지 않은 호흡을 골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실체가 워낙 불분명해 정확히 위에 누가 있는지도 파악이 어렵습니다.”

“그래요?”

“다만 그쪽을 만나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위에 ‘우 회장’으로 불리는 인물이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차유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우 회장. 사뿐히 들린 잔이 입술 틈에 밀어 넣어졌다. 쭉 들이켠 차유신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어쨌거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 교민 사회의 안전을 위해 남역회를….”

“일화회.”

차유신이 대뜸 뇌까렸다. 묵영한이 움칠했다. 빈 잔을 멀리 치운 차유신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비아냥거리는 한 마디가 나왔다.

“남역회가 상해를 접수하기 전 이곳의 중심 조직이었던 화교 집단 일화회. 그곳과 묵 회장님의 관계성이 궁금합니다.”

묵영한이 간신히 미소 지었다.

“그게 왜 궁금하시죠? 의원님.”

차유신이 느긋하게 답했다.

“묵 회장님이 일화회에 속한 분처럼 보여서요.”

묵영한의 낯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딱딱한 질문이 돌아왔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해도, 의원님과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상관있죠. 감히 깡패 새끼가 제 앞에서 수작질을 벌인 건데. 집에 갈 때 소금이라도 쳐야 제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탕. 묵영한의 손에 밀린 양하대곡 병이 바닥을 굴렀다. 한껏 험악해진 표정으로 묵영한이 눈을 부라렸다. 지켜보던 정윤철이 심각해졌다.

*

행사는 한 시간가량 지속됐다. 상해에서 식당을 하는 사람, 생산업을 하는 사람, 수입업을 하는 사람 등이 수시로 찾아와 악수를 청했다. 대부분이 국회의원을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손을 맞잡고 응원 몇 마디 해줬을 뿐인데 굉장히 좋아했다.

그 사이 묵영한은 행사장을 떴고, 정윤철은 구석 자리로 이동해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통화시간이 꽤 길었으며 내내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교민들은 지속적으로 찾아왔고, 차유신은 손이 닳도록 그들과 악수를 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슬슬 자리에서 뜰 시간이 됐을 때, 따로 임무를 주고 내보냈던 윤재희가 돌아왔다. 차유신의 옆에 앉은 그가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받아든 차유신이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쳤다. 상해 자베이구에 있는 어느 건물 주소가 적혀있었다.

“미리 섭외해 둔 업체 통해 알아본 결과입니다. 거기가 남역회 본거지라 합니다.”

“확실해?”

“유학시절 인연 맺은 형님 통해 연결받은 업체고, 상해에서는 이 업체가 뒷조사에 제일 능하답니다.”

“그 형님 뭐 하는 사람인데.”

“지금 대만에서 삼합회 일원으로 활동합니다.”

“확실하네.”

단번에 수긍한 차유신이 주머니에 쪽지를 넣었다.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공식 일정은 오늘 이 행사로 끝이고, 내일 오후 출국이니 오전 중 윤재희가 섭외한 업체를 대동해 이 주소지에 방문하면 된다. 윤재희는 남역회 자체가 역운회의 새 이름이 아닐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차유신은 그쪽 가능성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의원님. 이만 가실까요.”

통화를 마친 정윤철이 다가왔다.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끄덕인 차유신이 일어섰다. 윤재희도 따라서 몸을 세웠다.

홀을 나서는 내내 정윤철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명백히 말할 것이 있는데, 차마 꺼내기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한숨을 쉰 차유신이 선수를 쳤다.

“그냥 얘기해요. 답답하니까.”

“숙소가 어디셨죠.”

“황푸에 있는 리버사이드. 대체 무슨 일인데요.”

“코리아데스크 내 가능한 인원 전부 호출했습니다. 호텔까지 저희가 모셔다드리고, 출국하기 직전까지 호위하겠습니다.”

더없이 긴장한 어조였다. 차유신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무슨 문제 있어요?”

“우선 제 불찰입니다.”

정윤철이 몸을 구십 도 각도로 굽었다. 차유신이 흠칫했다. 몸을 바로 한 그가 깊게 탄식했다.

“묵영한 회장은 일화회의 간부가 맞습니다. 이전에도 그걸 의심할 만한 정황이 몇몇 있었으나, 워낙 교민 사회에서 이미지가 좋고 코리아데스크와도 친밀한 인물이다 보니 제가 다소 안일하게 판단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공안 쪽 자료를 최대한 요청해 분석한 결과, 묵영한이 일화회의 중심세력 중 하나라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그거하고 갑자기 제 신변 보호에 나선 게 무슨 상관입니까.”

“상해의 화교들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일화회는 그 정점에 있고요. 아까 묵영한에게 내비친 의원님의 경멸은 일화회 간부 입장에서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묵영한을 무시한 건 일화회를 무시한 것이고, 일화회를 무시한 건 상해의 화교들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간주합니다.”

“무슨 종교입니까. 북한에서도 울고 갈 집단주의네.”

“이쪽 화교 사회가 좀 그렇습니다.”

정윤철이 입을 다셨다. 가만히 응시하던 차유신이 팔짱을 꼈다. 담담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혹여나 일화회에서 저에게 해를 가할까 갑작스레 귀한 인력들을 동원해 제 신변보호에 나서겠다는 겁니까.”

“네.”

“끽해야 곤죽이 되도록 처맞기나 하겠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아까 의원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사고만 나지 않으면 괜찮다고. 헌데 지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일화회에서 날 죽일 수도 있다?”

“네.”

“고작 말 좀 잘못했다고 죽입니까.”

“네.”

단호하게 답한 정윤철이 낯을 굳혔다.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는 상해고, 의원님은 한국에서만큼 보호받기 힘든 입장에 있습니다. 심지어 상대는 일화회고요.”

*

호텔로 향하는 세단에는 정윤철과 한 명의 코리아데스크 경찰이 동석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경찰들이 앉고, 뒷좌석에는 차유신과 윤재희가 앉았다. 세단의 앞뒤로 각각 한 대씩의 차가 따라붙었다. 전부 코리아데스크가 탑승한 차였다.

“팀장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검은 세단 파악해봐.”

정윤철이 무전기를 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상대방이 답했다.

-호텔에서부터 쫓아오고 있고, 네 명의 남성이 탑승했습니다. 일화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차는 없어?”

-일단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 예의 주시해. 코드0다. 모든 팀원은 차유신 의원 보호하는 걸 최우선으로 둔다.”

-알겠습니다.

무전이 끊겼다. 차유신은 백미러를 힐긋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쫒아오는 검은 차가 보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일화회에 쫓기게 된 건 그렇다 쳐도, 자신 때문에 현지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이 피해를 입게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치는 건 취향이 아닌데. 속으로 뇌까린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손을 내밀어 정윤철의 어깨를 건드렸다. 정윤철이 뒤를 돌아봤다.

“네. 의원님.”

“남는 총기 있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혹시 모르니, 저도 스스로를 지킬 수단 하나쯤 챙기려고요.”

“총기 다룰 줄 아십니까.”

“자동권총은 대체로 다 다룹니다.”

정윤철이 제 턱을 매만졌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생각을 마친 그가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안에서 새까만 권총이 하나 나왔다. 차유신의 손에 들려준 그가 말했다.

“미등록 총기로 제가 사입한 겁니다. 다룰 수 있는 모델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루거 9mm, 이거면 됩니다.”

“총기 쓸 줄 아는 국회의원은 처음 봅니다.”

“그냥 뭐…. 금배지 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난 국정원장 권유로 삼 개월 정도 거기서 사격훈련을 좀 받았습니다. 언제 어떤 일 생길지 모르니, 개인 호신 차원에서 배워두라고 원장이 당부했거든요. 그런 걸 한 의원이 저 말고는 없는 걸로 알지만요.”

차유신이 재킷 주머니에 총을 넣었다. 실은 집에도 개인적으로 구비해 둔 루거사의 SR9이 하나 있었다. 실제로 쓴 적도 없고, 어디 가서 얘기한 적도 없지만.

예약한 호텔 앞에서 세단이 멈췄다. 정윤철이 부리나케 조수석 문을 열고 나섰다. 앞뒤로 정차한 차에서도 경찰들이 나왔다. 세단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선 그들이 주변을 엄호했다. 그러는 사이 쫓아오던 차가 멀찍이 섰다. 다만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차창을 통해 주변을 살피던 차유신이 돌연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이내 운전대를 쥔 경찰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가져갔다. 움찔한 그가 룸미러를 봤다. 차유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액셀러레이터 밟아요, 세게.”

“의원님.”

“이러다 애먼 사람만 다칩니다. 그러니 어서 밟아요.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져. 내 말 듣는 게 좋을 겁니다.”

파들거리던 경찰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굵은 침을 삼킨 그가 마지못해 발등에 힘을 줬다. 윙, 소리를 내며 세단이 나아갔다. 차창 너머로 사색이 된 정윤철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은 경찰이 되는 대로 핸들을 꺾었다. 끼익. 급하게 회전한 차가 오른쪽 도로로 빠졌다. 이내 한참을 나아갔다.

차유신은 내내 경찰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옆에 있던 윤재희가 질렸다는 양 얼굴을 감쌌다. 형님은 정말로 빨리 뒤질 거예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재수 없는 얘기야?”

윤재희가 탄식했다.

“아주 효율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법을 알잖아요.”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넌 참 좋겠다. 빨리 뒤질 상사 밑에서 일해서.”

직진과 커브를 반복하며 돌진하던 차의 속도가 떨어졌다. 저편에 번화가가 보였다.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여기서 스톱.”

경찰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들숨을 삼킨 차유신이 총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내 뒷좌석 문을 열며 경찰에게 인사했다.

“돌아가서 정윤철 팀장에게 보고해요. 생명의 위협을 참지 못해 지시를 거슬렀다고.”

“의원님. 어디로 가시려고….”

“제 과오 수습할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재희 너는 이분 따라가. 내일 공항에서 보자.”

그대로 닫히려는 문을 윤재희가 다급히 잡았다. 이내 다짜고짜 바깥으로 발을 빼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형님.”

“넌 쓸모가 없잖아.”

“그래도 갈 거예요.”

윤재희가 고집을 부렸다.

“한국 가면 무원이 형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제 영감 안 지켰다고.”

차유신이 혀를 찼다.

“너나 나나 나이 먹고 노인정에서 만날 일은 없겠다. 객기 부리다 사십 전에 둘 다 뒤질 테니.”

무시한 윤재희가 문을 닫았다. 탁, 하며 주변이 고요해졌다. 차유신이 말없이 등을 보였다. 윤재희는 열심히 따랐다.

겉보기엔 분명히 번화가였는데, 한 블록만 들어가도 금방 컴컴해졌다. 이쪽은 안 되겠다. 고개를 저은 차유신이 다시 대로변을 향했다. 막 빛이 들어오는 지점에 발을 뒀을 때, 저 앞에서 연달아 정차하는 차 두 대가 보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문에서 덩치 좋은 남자 일곱 명이 줄줄이 나왔다. 차유신이 욕설을 씹었다. 씨발, 존나게 빠르네.

일단 물러난 후 골목 안쪽으로 돌아왔다. 깊이 들어갈수록 더 어둑한 동네였다. 불을 켠 건물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개발 지구인가. 홀로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골목의 중간쯤 방치해 둔 커다란 수레가 보였다. 윤재희에게 손짓한 뒤 그쪽을 향했다.

수레를 가림막 삼아 몸을 앉혔다. 윤재희가 그 옆에 앉았다. 막 몸을 숨기자마자 남자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윤재희가 갸웃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차유신이 답했다. 글쎄. 저 새끼들이 찾다 지쳐 돌아갈 때까지? 윤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무식한 방법이네요. 차유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차유신으로선 지금이 최선이었다. 무작정 경찰들을 끌어들였다가 일화회와 난사전이라도 벌이게 되면 경찰 두어 명은 우습게 죽어 나간다. 차유신의 원칙은 확고했다. 자신 이외의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것. 본인이 뿌린 씨니, 본인이 거두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쪽이 스스로에게도 편했다.

탁. 돌연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수레 너머로 기다란 그림자가 비쳤다. 차유신은 소리 없이 권총을 고쳐 쥐었다. 윤재희가 움츠린 채 눈치를 봤다. 정적이 짙어졌다.

“你是啥东西!”

대뜸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소리쳤다. 침착하게 손목을 움직인 차유신이 남자의 허벅지를 겨냥했다. 귀 막아. 윤재희에게 한마디 하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크게 휘청이고 난 남자가 쓰러졌다. 동시에 먼 곳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둘러 몸을 일으킨 차유신이 남자가 떨어뜨린 총을 채 윤재희에게 던졌다. 받아든 윤재희가 난색을 표했다.

“저 총 쏠 줄 모르는데요.”

“그럼 중고장터에 팔던가. 지금은 갖고 있어.”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윤재희를 이끈 차유신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끔 움직이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내 열린 창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쓰러진 남자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차유신은 차례로 그들의 다리를 쐈다. 탕! 탕! 탕! 약간의 어긋남은 있었지만 세 발 다 원하는 부위에 맞았다. 지켜보던 윤재희가 박수를 쳤다.

“잘 맞추시네요.”

“특등사수였으니까.”

“14연대는 일반사병도 저격수 할 수 있지 않아요? 왜 무전병을 했어요.”

“무전병이어야 꿀 빨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뒤 권총을 거뒀다. 뒤이어 뛰어오는 또 다른 세 명이 보였다. 네 명은 다리를 맞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고, 남은 건 세 명. 쓰러져있던 남자가 위쪽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차유신은 신속히 움직였다. 가로로 난 복도를 분연히 뛰어, 건물 옆 편에 있는 창문에 다다랐다.

텅 빈 밑을 확인한 뒤 뛰어내렸다. 착지하자마자 끙, 소리가 났다. 무릎을 생각보다 세게 부딪쳤다. 다리를 털며 위를 확인했다. 창틀에 발을 걸친 채 머뭇거리는 윤재희가 보였다. 차유신은 일부러 가는 척을 했다. 윤재희가 바로 뛰어내렸다. 오히려 차유신보다 착지를 잘했다. 뒤따라온 윤재희에게 차유신이 성질을 냈다.

“잘하면서 왜 망설여?”

“형님께 자괴감 드릴까 봐서요.”

윤재희가 뻔뻔히 답했다. 언짢게 눈매를 구긴 차유신의 귓가에 투박한 뜀박질 소리가 스쳤다. 골목 어귀에 두 개의 남자 실루엣이 비치더니, 그중 하나가 숨 쉴 틈도 없이 차유신을 향해 총알을 날렸다. 탕! 급하게 윤재희를 안은 채 몸을 수그린 차유신이 총구를 끌어 올렸다. 남자들의 어깨부터 쐈다. 탕! 탕! 탕! 한 번의 빗나감 끝에 두 명이 전부 어깨를 맞았다. 비틀거리는 남자들의 다리를 연달아 아작 냈다. 탕! 탕! 이번엔 두 발만에 전부 성공했다.

남은 건 한 명.

입에서 달뜬 숨이 번졌다. 속으로 남은 총알 개수를 셌다. 12발짜리였고, 그중 아홉 개를 썼다. 이제 총 세 개 남은 셈이다. 세 발 안에 끝내지 못하면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뒷걸음질 치던 차유신의 등에 딱딱한 뭔가가 닿았다. 씨발, 뒤에 있었구나. 바로 팔꿈치가 나갔다. 총구를 겨누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콱, 하며 남자의 명치가 가격당했다.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멍해지고만 차유신의 턱이 움찔했다. 아. 아랫입술이 조금 떨어졌다.

그리운 냄새가 났다.

뒤에서 훅 다가온 손이 차유신을 얼굴을 감쌌다. 살살 지분거린 그가 낮게 포효했다.

“하…. 아파서 기분 좋은 거 오랜만이에요. 선배.”

차유신의 눈이 확 커졌다. 저편에 쓰러져 있던 한 남자가 꿈지럭거리며 권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막 차유신을 겨누려던 그의 팔이 탕!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쓰러진 남자의 머리통을 걷어차며 십여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재희가 화들짝 놀라 차유신을 가로막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남자가 거구의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신음한 그가 바닥을 짚었다. 차유신을 쫓던 일화회 중 하나였다. 고개를 든 서재길이 외쳤다.

“형님! 나머지 한명 잡았습니다.”

끄덕인 우태원이 차유신의 손목을 감았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차유신이 잡고 있던 방아쇠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금씩 힘을 줬다. 은은한 음성이 귀를 옭맸다.

“권총 참 잘 다루더라고요, 선배. 넋 놓고 봤어요.”

탕! 커다란 총성이 골목을 울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우태원이 차유신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 죽였으니 이제 저 혼낼 거예요?”

반쯤 눈을 깐 차유신이 답했다.

“어. 아주 많이.”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카랑카랑한 공명에 머리가 빙글 돌았다. 버겁게 얼굴을 감싼 차유신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의 총성도 아무렇지 않게 견뎠는데, 이상할 정도로 지금 머리가 아프다. 대로변을 힐긋한 서재길이 말했다.

“형님. 공안 떴습니다.”

“알아.”

차분히 수긍한 우태원이 시선을 내렸다. 차유신의 턱을 쥔 손이 풀렸다.

“재길이 통해 숙소 모셔다드리라 할게요. 전 잠깐 들를 곳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유신의 총구가 끌어올려졌다. 우태원의 목에다 끄트머리를 처박은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이 시간에 일화회 가서 뭐 하게.”

속내를 꿰뚫린 우태원이 입을 다물었다. 차유신의 총구가 돌아갔다. 우태원의 가죽이 움푹 팼다. 역운회 조직원들이 일제히 얼어붙은 채 이쪽을 주시했다.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일 키우지 마. 오늘 밤은 코리아데스크도 날이 서 있어. 사고 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야.”

“그럼 제가 오늘 밤 선배를 위해 뭘 해야 하죠.”

우태원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방아쇠를 만지작거렸다. 매끈한 표면을 타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권태로운 대답이 새어 나왔다.

“나하고 있어.”

“선배하고요?”

“어.”

“그건 명령인가요.”

두통에 휩싸인 머리가 크게 울렸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은 차유신이 보다 제대로 우태원을 봤다. 심상한 한 마디가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니. 애원.”

총구가 다시 꾹, 우태원의 목을 짓눌렀다. 무표정으로 보던 우태원이 좀 더 얼굴을 끌어내렸다. 차유신의 귓불에 더운 입술이 스쳤다. 훅, 열기를 내뿜은 우태원이 속삭였다.

“따를게요.”

“내 애원 듣는 거야?”

“네.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대뜸 올라온 손이 차유신의 이마를 짚었다. 차유신의 목덜미가 전율했다. 미간을 구긴 우태원이 말했다.

“지금 열 많이 나요. 선배.”

차유신의 눈망울이 동그랗게 뭉쳤다. 멈춰있던 입이 더듬거렸다. 투박한 혼잣말이 삼켜졌다.

씨발, 지금 9월이구나.

*

코앞까지 다다른 공안을 뒤로 하고 역운회의 차에 탑승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샛길을 찾아 빠져나갔다.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거의 십 분 만에 공안을 따돌린 후 돌고 돌아 으슥한 동네에 접어들었다. 표지판에 ‘Zhabei’라고 적혀있었다. 윤재희가 보고한 남역회 본거지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집 앞에 내려다 줘.”

우태원의 지시에 끄덕인 서재길이 핸들을 꺾었다. 스르르 미끄러진 차가 어느 빌딩 앞에 멈춰 섰다. 머리를 쥐어짜는 차유신을 우태원이 단번에 안아 들었다. 이내 뒷좌석 문을 열고 나서며 안에다 말했다.

“윤재희 비서는 재길이 네가 책임지고 돌봐.”

“알겠습니다.”

“저는 시, 싫은데요!”

윤재희가 다급히 외쳤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사색이 된 윤재희가 차유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형님. 저 혼자 두고 가시면….”

“서재길 실장은 믿을 만해. 중졸이긴 하지만.”

차유신이 대수롭지 않게 윤재희를 달랬다. 서재길이 황당하다는 양 비식거렸다. 윤재희가 도리질을 쳤다.

“저 조폭하고 안 맞아요. 정말로 안 맞아요.”

“아는 형 중에 삼합회도 있다는 놈이 뭘 그래.”

“처음 만났을 땐 삼합회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럼 이번에 맞춰 가면 되겠네. 나 머리 아파서 이만 들어간다. 내일 공항에서 보자.”

차유신이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허망하게 올려다보던 윤재희가 탕, 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우태원이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차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의 눈이 감겼다.

우태원의 품에 안겨 그의 집으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걸쳐, 차유신은 잠시 꿈을 꿨다. 몽중의 차유신은 상해가 아닌 역현구에 있었고, 어두침침한 골목의 어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탈 때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기다리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유신은 조금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때 비가 왔다.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운무회명 속 9월이 찾아왔다. 숨을 틀어막는 잔상 속에서 무기력한 발버둥을 반복하던 그때, 차유신은 어떤 냄새를 맡았다.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형형한 짐승의 체취였다.

“선배.”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다리에 밀려난 이불 색이 낯설었다. 눈동자가 굴러갔다. 말끔한 잿빛 천장이 보였다.

“해열제 먹어요. 열이 너무 높아요.”

시트에 앉은 우태원이 가져온 알약과 물컵을 협탁에 뒀다. 차유신은 입만 뻐끔거렸다. 현재의 체온을 확인하고 싶은데,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갈 기운조차 없다. 우태원이 탄식했다.

“그 몸으로 잘도 움직였네요.”

“아까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밖에 없었거든.”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어. 적어도 오늘은 살아야 했어.”

차유신의 눈이 가물거렸다. 지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래야 내일 너를 보니까.”

막 컵을 쥔 우태원의 손아귀가 멈칫했다. 목을 꿀꺽거린 그의 낯이 조금 굳었다. 차유신은 완전히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넘실거리는 열기와 현기증 탓에 고개를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약 먹여줄게요.”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고개를 끌어올렸다. 차유신은 고분고분 얼굴을 내보였다. 새하얀 알약이 차유신의 입술 틈에 밀어 넣어졌다. 쓰고 딱딱한 약을 대충 이로 짓이겼다. 이어 가붓한 턱짓을 했다.

“물.”

“먹여줄게요.”

막 제 입에서 컵을 거둔 우태원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의 냄새가 짙어졌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색색거리는 차유신의 머리를 우태원이 부드럽게 부여잡았다. 동시에 다가온 입술이 차유신의 아랫입술을 할짝거렸다. 맞붙은 입술이 열리고, 후끈한 온수가 찾아들었다. 차유신의 눈이 깜박거렸다.

건네주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적당히 삼킬 시간을 줘가며 우태원은 조금조금 액체를 흘렸다. 덕분에 수월하게 알약을 넘길 수 있었다. 머금고 있던 모든 물을 전해주고 난 우태원이 입을 뗐다. 눈을 맞춘 차유신이 말했다.

“옮아.”

“전 괜찮아요.”

“누가 보면 나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한 줄 알겠다.”

차유신이 고개를 젖혔다. 비아냥거리는 혼잣말이 이어졌다.

“실상은 주인 물고 도망친 개새끼면서 말이야.”

우태원의 입이 더듬거렸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그가 맥없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알아?”

“네.”

“아는 놈이 왜 그랬어.”

시트에 옆으로 누운 채 턱을 괴었다. 우태원의 얼굴을 감상하려면 그 자세가 가장 편했다. 차유신을 뚫어져라 보던 우태원이 입을 열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엄한 훈계가 나왔다.

“내가 궁금한 건, 나를 배신하고 도망칠 정도로 네 두려움이 컸냐는 거야. 그 정도로 나약한 놈은 나도 필요 없어. 이건 경고하는 게 아니야. 내 신념을 얘기한 거야.”

“그럼 저….”

우태원이 부쩍 서슴거렸다. 달싹이던 입이 버겁게 자리를 잡았다.

“버려질 수도 있겠네요.”

차유신의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심드렁한 대꾸가 나왔다.

“글쎄.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네가 형편없는 놈이라면, 버리는 것도 고려해야겠지.”

“그건 싫은데요.”

낯설 정도로 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시트 위에서 꿈지럭거리던 손이 훅 다가왔다.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차유신의 팔을 붙든 우태원이 헐떡였다. 찰싹 붙은 가죽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차유신은 아픔을 참으며 따졌다.

“다시 한번 납득이 가게 설명해봐. 왜 도망쳤어.”

“죽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시름 섞인 한 마디가 침실을 울렸다. 차유신의 턱이 미동했다. 스르르 올라간 눈동자가 불안감에 찬 실루엣을 머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우태원이 읊조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을 접하고 나니 불안하고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꿈에도 생각 못 한 선배라는 이름의 선물이, 시한폭탄처럼 무서웠어요.”

“나 안 보고 사는 건 안 무섭고?”

“지금은 그게 더 무서워요.”

팔을 옥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사로잡힌 근육이 욱신거렸다. 차유신의 낯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빼지는 않았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그의 팔뚝에 차유신의 심장도 덩달아 뜀박질을 쳤다.

아파서 좋은 게 오랜만인 건 우태원 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밤 선배 생각을 했고, 그때마다 제 안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했습니다. 머릿속의 선배가 온전치 않을 때 저는 죽었고. 선배의 표정이며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면 비로소 살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진작 돌아오지 않았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 다시 선배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정도로 모든 형태의 삶에 의연해질 수 있는 시간이. 또 도망치면, 그때는 정말로 선배를 잃게 될 테니까.”

이를 질근거리고 난 우태원이 덧붙였다.

“상해로 거점을 옮긴 역운회를 정비할 시간도 필요했고요.”

“역운회는 너 없으면 안 돌아가?”

“네. 안 돌아갑니다.”

우태원이 단호히 답했다.

“지도자라곤 저밖에 모르는 놈들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를 찾기 전까지는 저만이 역운회를 다룰 수 있습니다.”

차유신의 동공이 흐무러졌다. 굳건한 그의 어깨에 점점 무게감이 실리는 환영을 봤다. 그를 내리찍는 건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니었다. 순리였다. 괴고 있던 차유신의 고개가 기울었다. 비슷한 생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그 무리를 관장하고 결집하는 우두머리가 사라지면 살아남지 못한다.

“개 냄새 나.”

차유신이 팔에 걸린 우태원의 손을 털었다. 우태원이 주춤했다. 시트에 늘어진 차유신이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잘래. 불 꺼.”

“그럼 전 밖에 있겠습니다.”

머무적거린 우태원이 시트에서 벗어났다. 등을 보인 그를 향해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단숨에 손목이 잡힌 우태원이 뒤를 돌아봤다.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어딜 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편히 주무시라고….”

“옆에 있어. 몸 안 좋은 사람, 네가 책임지고 지켜.”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네 냄새 맡아야 잠 올 것 같아.”

“하지만.”

우태원이 부쩍 난처해했다.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뭐.”

“봐주시면 안 됩니까.”

“뭘 봐줘. 내가 뭐 돈 빌려 달래?”

“선배께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폐.”

“그런 게 있습니다.”

우태원이 곤란하다는 양 제 얼굴을 감쌌다. 영문 모르는 시선이 흘러내렸다. 적잖게 배회하던 눈길이 무심코 그의 앞섶에 꽂혔다. 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너는 이 와중에 서?”

“죄송합니다.”

얼굴을 덮은 우태원의 손가락 틈에서 그의 입술이 짓씹혔다. 그 와중에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검은색 정장 바지 앞부분이 선명했다. 황당하다는 양 혀를 찬 차유신이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여전히 얼굴을 가린 우태원이 보였다.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나 생각하면서 딸 많이 잡았어?”

“선배.”

“잡았어, 안 잡았어.”

“잡…. 했습니다.”

“얼마나.”

“그야.”

우태원의 목이 후끈해졌다. 이어지는 한 마디가 눅눅했다.

“매일이요.”

차유신이 피식거렸다.

“체력 좋네.”

“죄송합니다.”

“그건 감사하다고 해야지.”

차유신의 손이 들렸다. 우태원을 가리킨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차유신의 입매에 호가 걸렸다.

“스스로 하는 거 보여줘 봐.”

“지금 말입니까.”

우태원의 면상에서 손이 흘러내렸다. 난색이 현현한 표정이었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섰잖아. 그럼 빼야지.”

“선배. 아무리 그래도….”

“하는 거 봐서 상 줄게.”

차유신의 미소가 진해졌다.

“혼나기로 했으면 혼나야지. 나 생각하면서 할 때처럼 좆 잡아봐. 필요하면 기꺼이 네 포르노가 돼줄게.”

우태원의 울대뼈가 곤두섰다. 가만히 차유신을 바라보다가, 상체를 낮춰가며 진중하게 물어왔다.

“진짜로 제가 혼자 하는 게 보고 싶어요?”

“어.”

“변태 같아요.”

“말했잖아. 나 좀 변태 같다고.”

차유신이 뻔뻔하게 받아쳤다. 순간 들썩인 머리에서 지독한 두통이 일었다. 아. 우태원에게 티 나지 않게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갈수록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우태원이 하는 건 똑바로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 같았다.

긴 숨을 뿜고 난 우태원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이내 느릿느릿 제 앞섶으로 가져가, 벨트 를 잡았다. 철컥, 버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지퍼가 내려가고 검은색 속옷이 드러났다. 불뚝 튀어나온 앞부분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망설이던 우태원이 말했다.

“선배 보면서 할 거예요.”

“마음대로 해.”

“가슴 보면서 하고 싶어요.”

“그걸 보고 싶었어?”

“네.”

속옷의 밴드를 쥔 우태원이 남은 손을 뻗었다.

“빠는 상상을 수백 번은 했거든요.”

차유신의 셔츠 가장 윗부분을 만지작거린 그가 단추를 풀었다. 이어서 해제되는 단추를 차유신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점점 드러나는 자신의 맨살이 우태원의 훈기에 익어갔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추울 테니 여기까지만 할게요.”

반쯤 단추를 풀고 난 우태원이 이번에는 셔츠의 칼라를 잡았다. 어깨를 타고 죽 미끄러뜨리자 맨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우태원의 목을 타고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뭔가를 보면서 수음하는 거, 처음이에요.”

“그동안은 상상으로 했어?”

“네.”

“뭘 상상했어?”

차유신이 다시 턱을 괴었다. 빤히 올라간 시선이 우태원의 불그스름한 볼을 머금었다. 우태원이 나지막이 답했다.

“이런 선배요.”

“상상 속의 나는 음란했어?”

“네. 아주 많이요.”

시트 위에서 무릎을 꿇은 우태원이 속옷의 밴드 안으로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껏 힘이 실린 손가락이 밴드를 끌어 내렸다. 빳빳하게 발기한 살덩이가 퉁, 튀어 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귀두가 꽤나 원색적이었다.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아예 망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우태원의 손이 이동했다. 꿈틀거리는 밑동을 움켜쥔 그가 무지근한 숨을 골랐다.

“실제 선배가 훨씬 더 야하거든요.”

밑동을 지분거리고 난 손아귀가 끌어올려졌다. 두툼한 귀두를 꽉 쥔 끝에 능숙하게 미끄러뜨렸다. 마찰한 주름들이 꿈틀거리며 발작했다. 실팍한 몽둥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음경에 단 침이 고였다. 차유신의 고개가 조금 비스듬해졌다. 몸이 무거웠다. 뜨거워서 무거웠다.

착, 하며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한 손으로 시트를 짚고 허리를 낮춘 채 제 성기를 부여잡은 우태원이 보였다. 제 살덩이를 쥐락펴락하는 손길이 다소 거칠었다. 확실히 세게 하는 게 취향이구나. 차유신은 멍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머리….”

유독 짙은 숨을 터뜨린 우태원이 혼잣말을 했다. 차유신의 고개가 좀 더 올라갔다. 머리, 뭐. 의아함에 찬 입이 막 뻐끔거렸을 때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다짜고짜 뒤통수를 챈 손이 강제로 목을 젖혔다. 차유신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

“하아…. 이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도무지…. 선배만 보면 주체가 안 돼요.”

우태원이 목덜미를 떨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조금씩 금이 가는 그의 미간이 들어왔다. 차유신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 안 좋아해.”

“놓을게요.”

“놓지 마. 계속해.”

차유신의 눈꺼풀이 살짝 흘러내렸다. 은연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네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머리카락에 감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차유신의 어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예 얼굴에다 비벼.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우태원이 멈칫했다. 차유신이 또 웃었다.

“안 좋아해?”

“좋아해요.”

바로 차유신의 머리가 당겨졌다. 얼핏 보이는 우태원의 팔뚝에서 굵은 핏대가 꿀렁거렸다. 두꺼운 음경이 차유신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태원이 뇌까렸다.

“엄청 좋아해요. 선배 얼굴에다 비비는 거.”

들이닥친 남근이 차유신의 눈가에 달라붙었다. 귀두에서 터진 쿠퍼액이 감긴 눈에 스몄다. 차유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 신음하는 걸 본 우태원이 황급히 손 하나를 올렸다. 젖은 눈매를 타고 엄지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우태원이 물었다.

“아파요?”

“어.”

“뗄까요?”

“아니.”

차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은은한 언어가 이어졌다.

“계속해. 방금 좋았어.”

우태원의 호흡이 가빠졌다. 차유신의 머리를 쥔 손가락이 꽉 움츠려졌다. 커다란 성기가 접합할 기세로 차유신의 얼굴과 밀착했다. 눈가에서 흘러내린 귀두가 볼에 붙었다. 삽입하듯 끄트머리를 짓누른 우태원이 제 밑동을 고쳐 쥐었다. 이내 남근을 부러뜨릴 양 위아래로 짜댔다. 강렬한 파동에 절로 턱이 덜덜거렸다. 차유신의 발끝이 오싹거렸다.

찔끔거리며 새어 나온 점액이 뺨 위에다 그림을 새겼다. 왼쪽 볼에 줄줄 쿠퍼액을 묻힌 우태원이 오른쪽에도 마찬가지로 체액을 처발랐다. 미끄덩한 액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차유신의 입이 움찔거렸다. 미약한 신음이 나왔다.

“으음….”

“후으…. 다른 데다가도 비벼도 돼요?”

“가슴?”

“어떻게 알았어요.”

단번에 맞춘 차유신을 두고 우태원이 난처해했다. 차유신이 입매를 비틀었다.

“내 가슴 좋아하잖아. 너.”

“맞아요.”

“젖꼭지에 비비고 싶어?”

“네.”

차유신은 더 이상 응수하지 않았다. 조용해진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질문했다.

“가슴은 싫어요?”

“글쎄….”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늘린 차유신이 손을 내렸다. 남은 단추를 차곡차곡 푼 뒤, 벌어진 천을 활짝 펼쳤다. 완전히 상체를 드러낸 채 앞 머리카락을 털었다. 몽글몽글 맺힌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른한 도리질이 이어졌다. 열감 때문에 머리가 깨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정신을 붙드는 중이었다.

우태원이 더 발정하는 걸 보고 싶다. 저 야성적이며 포악한 짐승이 오로지 차유신의 손에서만 순해지는 걸 확인하고 싶다.

목줄을 쥔 건 차유신이다. 주인 노릇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

“내 얼굴에서 좆 떼.”

단호한 경고가 나왔다. 흠칫한 우태원이 마지못해 성기를 거뒀다. 그를 가리킨 차유신이 지시했다.

“나 보지 말고, 혼자 할 때처럼 상상하면서 해봐.”

“선배.”

“말 들어. 안 들으면 아무것도 없어.”

차유신이 못을 박았다. 탄식한 우태원이 끝내 고개를 떨궜다. 요구받은 대로 더 이상 차유신을 볼 수 없는 시트에 눈을 꽂고는, 허리를 굽히며 성기를 부둥켰다. 혈기 왕성한 생식기는 차유신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도 꼿꼿했다. 연신 음경을 쓸고 난 손이 착, 하며 치부와 마찰했다. 그의 입에서 흩어진 열풍이 차유신의 얼굴을 덮쳤다.

정적 속에서 우태원은 한참이나 홀로 수음했다. 완전히 얼굴을 숙인 채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의 수음이 실제 삽입을 연상케 하는, 매우 야릇하며 적나라한 광경이었다는 사실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팔뚝과 허벅지가 수시로 불끈거렸다. 음영 진 낯에는 고독과 욕망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보고 있자니 이상할 정도로 체온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예술품 같은 짐승의 수음을 포르노 감상하듯 지켜보던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우태원의 옆얼굴에 다다른 손가락이 귓바퀴를 쓸며 미끄러졌다. 우태원의 어깨가 경련했다.

“하아…. 선배.”

“무슨 생각하고 있어.”

“선배 생각이요.”

“그러니까, 내 무슨.”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요?”

“어.”

“선배가 빨아주는 거 상상했어요.”

우태원의 턱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시근덕거린 그가 보다 느른하게 남근을 조여 댔다. 차유신이 물었다.

“그런 상상 자주해?”

“네.”

“얼마나.”

“거의 매일.”

“일상생활이 안 될 것 같은데.”

“생활은 돼요. 밤에 몰아서 하는 편이거든요.”

우태원이 진지하게 답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차유신이 손을 내렸다. 옮겨진 손이 우태원의 생식기를 감아쥐었다. 우태원의 팔뚝이 울렁거렸다. 후끈한 살덩이를 흉포한 애완동물 다루듯 매만지고 난 차유신이 상체를 추어올렸다.

“가슴에 비벼도 돼.”

“이제는 괜찮아요?”

“어.”

차유신이 노곤하게 덧붙였다.

“네가 상상으로 딸 칠 때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알았어. 그러니 이제 실물 가지고 해봐.”

들숨을 삼킨 우태원이 무릎을 내디뎠다. 차유신의 가슴에 음경을 들이민 그가 읊조렸다.

“악질이에요. 선배.”

“그래서 내 말 안 들을 거야?”

“설마요.”

차유신의 유두를 짚은 귀두가 꾹 짓눌렸다. 찌릿찌릿한 자극에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덜컥거렸다. 달뜬 호흡이 터졌다.

“하으….”

“말 들어야죠.”

“읏…. 더 세게 해….”

“변태 같은 주인 모시는 것도 제가 원한 거니까요.”

우태원의 귀두가 유륜을 타고 둥글게 굴러갔다. 차유신의 가슴팍이 파르르 울렸다. 치골 쪽이 찡, 하며 당겨오는 게 느껴졌다. 꽤 흥분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온몸을 점한 병마가 발정을 압도했다. 아무래도 이 이상은 힘들 것 같다. 아쉬운 듯 달싹인 차유신의 입이 꾹 깨물렸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할 생각이다.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대놓고 가슴에 음경을 묻은 우태원이 젖꼭지에 박아 넣을 기세로 끄트머리를 찍어댔다. 귀두에 밀려난 젖꼭지가 움칠거리다 부풀어 올랐다. 차유신의 호흡이 질어졌다.

“흐으…. 아….”

“몸, 너무 뜨거워요. 선배.”

“알… 아…. 흐읍….”

“괜찮겠어요?”

“어…. 해….”

미적거리던 팔이 올라갔다. 자신의 어깨를 쥔 손을 찾아, 그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쪽 유두에 묻힌 귀두가 빙글거리며 솟아오른 부위를 지분거렸다. 속눈썹을 떤 차유신이 위를 확인했다. 저도 모르는 새 고인 침이 입꼬리를 타고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딱 눈이 마주친 우태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빨갛던 그의 목덜미가 부쩍 익었다. 차유신이 따졌다.

“왜.”

“죄송해요. 지금 너무 야했어요.”

“쌀 것 같아?”

“아까부터 쌀 것 같았는데, 참는 중이에요.”

“참아. 그리고 나 봐.”

차유신이 명령했다. 약간의 공백 끝에 우태원이 다시 차유신을 주시했다. 이내 귀두를 움직여가며 살살 유륜을 문질렀다. 스친 부위가 따끔거리면서도 기분 좋았다. 으음. 야릇한 탄성을 흘린 차유신이 할딱였다. 저 밑에서 유두를 만지작거리며 생동감 있게 꺼떡이는 생식기에 가슴이 뛰었다. 더 가까이서 접하고 싶어졌다.

아예 안에다 품고 싶었다.

“자지 올려봐.”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의아한 듯 이마를 구긴 우태원이 일단 제 하체를 추어올렸다. 막 얼굴 앞으로 다가온 음경을 보자마자 절로 혀가 달았다. 떨어진 입술이 본능적으로 귀두를 물었다. 우태원이 시트를 쥐어짜며 효후했다.

“허윽…. 아…!”

“아직도 물 나오네.”

혀로 주름을 핥아댄 차유신이 조롱했다. 시트에서 떨어진 우태원의 손이 제 얼굴을 덮었다. 우태원이 애원했다.

“더 세게 해줘요…. 하아….”

“내가 밑에서 조이는 것처럼?”

“네.”

우태원의 어조가 녹녹해졌다.

“제발요. 선배.”

짧게 미소 지은 차유신이 우태원의 치부를 향해 얼굴을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쑥 들어온 귀두가 목구멍에 처박혔다. 막힐 뻔했던 숨통을 가까스로 틔우고는 아예 코를 치부에 묻어버렸다. 새까만 체모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식도 입구까지 귀두를 끼워 넣은 채 입과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조였다. 우태원이 포효하듯 허리를 떨었다. 쾌감에 사로잡힌 살덩이가 입 안의 점막과 마찰하며 쿨렁였다. 빠듯하게 좁힌 입이 귀두를 삼켰다. 꿀꺽, 소리가 선명하게 나고 머리가 조금 하얘졌다. 동시에 찾아든 손이 차유신의 목을 감았다. 우태원이 헐떡였다.

“하… 진짜…. 후읏…!”

“싸고 싶어?”

“안에다…. 싸게 해줘요….”

“그래. 싸.”

차유신이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풀린 눈으로 마주 보던 우태원이 거칠게 치부를 들썩였다. 콱, 하며 귀두가 식도 깊숙이 꽂혔다. 동시에 터진 점액이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 쉴 틈을 빼앗긴 차유신이 속으로 쿨럭였다. 알아챈 우태원이 자신의 생식기를 살짝 뺐다.

혀 위에 안착한 귀두가 보다 진한 액을 사출했다. 녹진하며 더운 액에서는 신선한 비린내가 났다. 눈을 깐 차유신이 혀를 굴렸다. 아직도 뜨거운 귀두의 입구를 혀끝으로 쿡쿡 찔렀다. 배출하는 액의 줄기가 더 굵어졌다. 미처 입 안에 담지 못한 액이 입술을 타고 줄줄 샜다.

쿨럭. 또 기침이 나왔다. 그럼에도 성기를 뱉지는 않았다. 응어리진 액체가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물고 있다가, 줄기가 끊긴 걸 확인한 후에야 조심조심 내놓았다. 입 안을 채운 액은 전부 삼키고, 얼굴에 묻은 액도 훔쳐 핥았다. 말없이 바라보던 우태원이 차유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내 느릿느릿 차유신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기운 머리가 우태원의 어깨에 묻혔다.

“저 인간 같지 않죠.”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차유신이 눈을 일그러뜨렸다. 우태원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아픈 선배 두고…. 발정한 게.”

“너 인간 아니야. 그걸 아직도 몰랐어?”

차유신이 이죽거렸다. 할 말을 잃은 우태원이 입을 다셨다. 하늘거리던 차유신의 속눈썹이 처졌다. 내내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이 다소 옅어졌다. 대신 잠이 왔다. 눈을 깐 차유신이 우태원의 어깨에다 이마를 비볐다. 나긋한 혼잣말이 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우태원의 눈이 돌아갔다. 힐긋 마주 본 차유신이 한탄했다.

“짐승용 포르노 보는 취미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어.”

말을 마치자마자 제대로 눈이 감겼다. 타오르는 욕정을 식히고 난 뇌리가 바로 노곤해졌다. 차유신의 정수리를 활짝 펼친 손바닥이 덮었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헤아리고 난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우태원이 뇌까렸다.

“선배가 변태라 다행이에요.”

낮게 웃고 난 차유신의 숨이 점점 잦아들었다. 자못 일정해진 호흡에 몸을 맡긴 채, 익숙한 무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피로감을 단숨에 녹일 정도로 단 휴지(休止)였다.

꿈속의 차유신은 또 상해가 아닌 역현구에 있었고, 거기엔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이제 차유신은 그 상황이 서글프지 않았다.

차유신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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