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역현구 치안 유지 프로젝트’ 시행 80일 경과보고
검거: 103명
기소: 68명 (기소율 66%)
집중감시인원: 183명
“여기까지 하시죠.”
단호한 음성이 음악이 흐르는 호텔 커피숍을 갈랐다. 새벽부터 연락을 받고 나와 푸석한 허대윤의 낯이 부쩍 멍청해졌다. 그가 허겁지겁 닦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차 의원.”
“검거한 역운회 조직원이 100명을 넘어섰습니다. 기소율은 66%에 달하고요. 국민들에게 내세우기에 이 정도 실적이면 충분합니다. 이 이상 밀어붙이다가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점,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못질이 지나치면 시끄럽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여당에서 경찰이 역운회를 대상으로 과잉 수사하고 있다는 목소리라도 내면, 청장님께서 곤란해지십니다.”
“아니, 뭐…. 다 맞는 말인데.”
허대윤이 우물쭈물했다. 다분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차유신이 눈을 찌푸렸다.
“맞는 말인데,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갑자기 멈추자는 게 이해가 안 돼서 그렇지. 지금 한창 분위기 좋잖아. 이 기세면 조만간 200명 검거는 우습게 달성해. 이왕 칼 뽑은 거, 되는 데까지….”
“청장님.”
차유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허대윤이 흠칫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이제 슬슬 욕심나시죠?”
그가 어물거렸다.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투였다. 차유신이 꼿꼿이 그를 가리켰다.
“처음에 제가 제안했을 때는 비용이 부담된다, 여당 눈치가 보인다. 갖가지 핑계 대면서 질질 끄시더니 이제 와 검거실적 빠르게 불어나자 신이 나신 모양입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청장님 이미지 굳히고 다음 총선에서 한자리 얻어야겠다 싶으셨겠죠.”
“차 의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틀린 얘기 아니잖습니까.”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허대윤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그들의 틈으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스며들었다.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온 호텔 직원이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생긋 웃은 그녀가 멀어졌다. 허대윤이 큼, 소리를 냈다. 차유신이 보다 몰아붙였다.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이거 제 손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러니 끝도 제 손으로 내겠습니다. 103명 검거. 어디 가서 생색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치안 유지 프로그램 가동하면서 역현구 내 강력범죄도 절반 미만으로 줄었고요. 이거면 된 겁니다.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여기서 접는 게 맞습니다.”
“그래. 뭐…. 차 의원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고려는 해야지.”
“저는 고려하겠다는 답 들으러 온 게 아닙니다.”
나아간 손이 탕, 테이블을 두드렸다.
“결정하세요. 청장님.”
허대윤이 움츠렸다, 눈치를 보듯 굴러가는 눈이 초조했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그가 대뜸 하소연을 했다.
“하나만 묻자. 차 의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렇게나 역운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왜 이제 와서 이래?”
생떼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차유신은 가만히 시선을 떨구었다. 새까만 수면에 새겨진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잔을 들어 형상을 일그러뜨렸다. 권태로운 대답이 나왔다.
“분개할 땐 분개하더라도, 지킬 건 지켜야죠.”
허대윤이 버럭 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차유신은 뚫어져라 잔만을 봤다. 정적을 찾아가는 표면에서 파동이 옅어졌다. 검은 물 위의 자신이 다시 오롯해졌다.
“전 국회의원입니다. 혁명가가 아니라.”
*
허대윤과의 미팅을 마치고 오전 7시에 맞춰 한식당 자로초 룸 안에 발을 들였다. 착석을 마친 실내에서는 팽배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의식하고 있는 건 우태원이었다. 다만 그 우태원은 개의치 않고 앞에 놓인 페이퍼만 들추고 있었다.
“최 선배. 대체 왜 우태원이…. 저 새끼, 김후준 앞잡이 아닙니까. 네?”
한 남성이 벌떡 일어섰다. 평소 우태원을 두고 ‘대국민당 적폐의 산물’이라며 대놓고 저격해온 30대 중반의 청년 의원이었다. 팔짱을 낀 최도현이 고개를 젖혔다. 최도현을 비롯한 몇 명은 이미 지난 밤 차유신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거야,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아, 유신아. 너 몸은 괜찮아? 너무 일찍 퇴원한 것 아니야?”
대충 얼버무린 최도현이 말을 돌렸다. 우태원의 옆자리에 앉은 차유신이 목을 주물렀다.
“안 괜찮습니다. 상당히 좆같아요.”
“얼마나 좆같아.”
“10 중에 7 정도요.”
“많이 좆같구나.”
“그래도 지금 상황이 훨씬 더 좆같으니까요.”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는 사이 청년 의원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휙 차유신에게 시선을 꽂은 그가 외쳤다.
“차유신. 네가 설명해봐. 이게 말이 돼? 지금 상황 안 봐도 비디오잖아. 김후준 죽고 라인 무너질 거 같으니까 우리 쪽으로 갈아탄 것 아니냐고. 어?”
“대열이 형. 지금 그게 중요해?”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반문했다. 청년 의원의 미간에 금이 갔다. 힐긋한 차유신이 말을 이었다.
“형 공화주의 좋아하잖아. 같이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다 우리 편인 것 아니야? 왜 이렇게 갑자기 속이 좁아졌어. 형답지 않게.”
“야. 차유신.”
“여의도에서 사람 탈은 시시때때로 바뀌어. 형은 안 그랬어? 우리 다 그렇게 살아왔잖아. 사람 좋아 보이려고 양 탈 쓰고, 늑대 잡으려고 사자탈 쓰고. 우태원도 마찬가지로 살아왔을 뿐이야. 중요한 건 지금 우리와 같은 탈을 쓰고 있다는 거고. 그게 다야.”
룸 안이 조용해졌다. 최도현이 키득거렸다. 아이고, 아주 그냥 마키아벨리 납셨네. 투덜거린 청년 의원이 끝내 자리에 앉았다.
“다음 주 본회의 상정되는 중견기업 2금융사 보유금지법 ‘가’ 확정표수는 어떻게 돼.”
최도현이 민아영을 봤다. 민아영이 페이퍼를 펼쳤다.
“이재하 선배 라인 포함해 잠정적으로 118표입니다.”
“아슬아슬하네.”
“아슬아슬합니다.”
“추가로 끌어올 만한 라인이 있는지 한 번 더 따져봐야 할 것 같고…. 김지태. 금융관리위원회는?”
최도현이 구석을 봤다. 허리를 세운 김지태가 답했다.
“특사경 통해 석일태 SDB그룹 회장과 금전적으로 엮여있는 대국민당 의원들을 특별 수사하라고 푸시 넣어둔 상황입니다.”
“의원들 명단은?”
“명단은 이전에 드린 것과 거의 중복되고…. 공형우가 새롭게 추가됐습니다.”
최도현의 낯이 확 구겨졌다. 차유신도 덩달아 낯을 굳혔다. 누군가가 헛웃음을 쳤다. 자조적인 혼잣말이 들렸다.
“제대로 망했네. 김후준 바톤 받은 공형우까지 대권 출마선언하자마자 퇴장하게 생겼으니.”
“김후준 뒤꽁무니 쫓아 다닐 때부터 예상한 결과긴 하지.”
최도현이 혀를 찼다. 이내 다시 김지태를 보며 물었다.
“특사경은 언제부터 수사 들어간대.”
“그게 좀…. 부위원장하고 어제도 미팅 가졌는데요, 일단 다음 주 본회의에서 석일태 금지법 통과되는 거 보고 일정 잡아보자는 입장입니다.”
“대놓고 눈치 보고 있네. 석일태 죽는 게 확정된 다음에야 움직이겠다는 것 아니야. 무턱대고 나섰다가 여당 의원들 눈 밖에만 날 수 있으니.”
“그렇긴 합니다.”
김지태가 난색을 표했다. 묵묵하게 듣고만 있던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룸 안의 이들을 쭉 둘러보다가, 입을 뗐다.
“그쪽은 제가 다시 푸시해보겠습니다.”
모두의 눈이 우태원에게 쏠렸다. 최도현이 알았다는 양 읊조렸다.
“어어, 맞아…. 너도 정무위지. 어떻게 푸시하게?”
“신임 금융관리위원장인 박현아 쪽에 얘기하겠습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에 룸 안이 고적해졌다. 최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박현아에게 직접?”
“네.”
내려온 우태원의 손이 페이퍼를 팔랑거렸다.
“제가 꽂았으니까요.”
차유신의 어깨가 떨렸다. 몇몇 이들이 목을 꿀꺽거렸다. 무덤덤하던 최도현의 입매에 호가 걸렸다. 곧 흡족히 주억거렸다.
“그래. 아주 훌륭하네.”
이동한 최도현의 눈길이 차유신에게 걸렸다. 질문이 들어오기도 전에 차유신이 먼저 답했다.
“전 이재하 선배와 논의해 ‘가’로 끌어올 만한 스윙보터들 추가 확보하겠습니다.”
“그러자고. 그럼 대충 중요한 얘기는 끝났고, 그다음….”
“최도현 선배.”
구석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의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김지태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에 국회에서 스캔들 터졌습니다.”
“누구 스캔들.”
최도현이 인상을 썼다. 김지태가 눈을 굴렸다. 의문스러운 시선이 우태원과 민아영을 차례로 쓸었다.
“태원이하고 아영이요.”
쿨럭. 막 입에서 찻잔을 거둔 차유신이 기침을 했다. 잔뜩 놀란 민아영이 우태원을 봤다. 우태원은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마주 봤다. 최도현이 헛헛하게 웃었다.
“이야, 경사 났다. 아주 그냥. 너네 그랬어? 진작 얘기하지.”
“아… 아닌데요! 이거 뭔가 오해가.”
황급히 손사래를 친 민아영이 몸을 들썩였다. 재차 우태원을 확인하다가, 곧 제 입을 가렸다. 순식간에 낯이 사색이 됐다.
“아…. 이거 그건가 보다.”
“뭐가 그거야.”
“차 선배 지시받고 오늘 모임 관련 문건 전달하려고, 어제 밤늦게 우태원 의원 만났거든요. 급한 약속이라 장소를 여의도 공원으로 잡았는데….”
민아영이 울상을 지었다.
“그때 둘이 만나는 사진이 찍혔나 봐요.”
최도현이 커다랗게 웃었다. 곧 재미있다는 양 느물거렸다.
“잘됐네. 이 김에 둘이 만나. 나이도 비슷하고, 태원이 아주 잘 생겼잖아. 저 새끼 좋다는 여자들이 국회에 줄을 섰는데. 어?”
“아니, 아니요. 저는….”
민아영이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당혹감에 찬 눈길이 은근히 차유신을 배회했다. 모른 척 커피잔을 밀어내는 차유신의 등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가붓하게 쓸어내리는 느낌에 등줄기가 확 곧추섰다. 찌푸린 차유신의 옆얼굴을 향해 우태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선배.”
차유신이 곁눈질을 했다.
“어.”
“선배는 아무렇지 않아요?”
“뭐가 아무렇지 않아.”
“질투해주세요.”
나직하긴 하지만, 무게감이 있어 누군가는 들었을 법도 한 한 마디였다. 빤히 눈을 치뜬 차유신이 우태원을 주시했다. 우태원은 차분하게 차유신을 마주 봤다. 차유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더운 누기가 입 안을 스몄다. 느른한 질문이 나왔다.
“질투 받고 싶어?”
“네.”
“그럼, 이 말 들을 거야?”
차유신이 대뜸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우태원이 끄덕였다.
“네.”
제안을 듣지도 않고 한 대답이었다.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뼈대가 굵은 손등을 쥐고는, 지분거리며 경고했다.
“내가 말하는 거 다 듣고 대답해야지.”
“죄송해요.”
“다른 건 아니고, 이거 하나 확실히 하자.”
차유신의 입이 우태원의 귀를 스쳤다. 우태원의 시선이 흔들렸다. 차유신의 어조가 강고해졌다.
“두 번 다시 사람 죽이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우태원의 목이 불끈거렸다. 잘 다듬어진 그의 옆얼굴이 소리 없는 숨을 골랐다. 부쩍 건조해진 입술이 위아래로 맞물렸다가, 고분고분한 답을 내놓았다.
“네. 선배.”
말이 끝나자마자 우태원의 손을 쥔 손아귀가 올라갔다. 그대로 자신의 입에 가져간 차유신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소스라친 룸 안의 이들이 차유신을 주시했다. 차유신은 태연하게 거친 가죽을 혀로 핥았다. 젖은 힘줄이 속수무책으로 두드러졌다.
“하….”
짙은 숨을 몰아쉰 우태원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꿀렁이는 그의 손목에서 시퍼런 핏줄이 튀어나왔다. 춥, 소리를 남기며 입을 뗀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이들을 둘러보다가, 심상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봐? 장난인데.”
은은한 음성이 룸을 메웠다.
“국회에서 우태원과는 내가 가장 가까운데, 스캔들은 아영이하고 났잖아. 이렇게라도 하면, 다음번에는 내가 날까 싶어서.”
질색한 최도현이 얼굴을 감쌌다.
“어우, 씨발. 깜짝 놀랐잖아. 무슨 장난을 그따위로 쳐.”
“놀랐어요?”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최도현은 답하기도 싫다는 양 손만 내저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민아영이 한시름 놓았다.
“깜짝 놀랐어요. 차 선배가 우 의원 진짜로 아끼나 봐요.”
차유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곧 우태원에게 물었다.
“넌 어때. 내가 이러는 거.”
우태원은 대답 대신 상체만 추슬렀다. 조금은 힘겹게 얼굴을 쓸고는, 들릴 듯 말 듯 답했다.
“제가 생각을 잘못했네요. 실수했어요.”
“뭐가.”
우태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한 선배가 아주 야하다는 걸 잠시 잊었어요.”
적막한 시선이 차유신을 훑었다.
“이제 함부로 그런 건 요구하지 말아야겠어요. 덕분에 제가 지금 좀 힘들어졌거든요.”
눈빛을 가라앉힌 우태원이 고개를 바로 했다. 힐끔거리던 차유신이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흥분을 삭이느라 혈관을 곤두세운 그의 목이 더 야해 보였다.
*
[대국민당 집권 5년 차, 5월.]
-석일태 내일 오후 6시 베트남 출국.
문자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차유신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주변을 의식해 그만뒀다. 250여명이 들어찬 국회 본회의장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최도현 등이 발의한 중견기업의 2금융사 보유금지법.
따지고 보면 중견기업 오너들을 싸잡아 저격하는 보통의 법안이다. 그 중심에 석일태 SDB그룹 회장이라는 특정인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회의장을 얼어붙게 할 만한 요인은 아니다. 이 기류의 원천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법안이 통과돼 SDB금융에 대한 금융당국 조사가 시작되면, 대국민당의 첫 대권 주자인 공형우를 비롯해 대국민당 의원 10여 명이 사회적으로 사살된다. 석일태는 SDB금융 자금을 가지고 정치권 로비를 일삼아왔는데, 거기에 엮인 게 해당 인물들이다. 모두가 김후준을 따르다 게이트에 휘말렸다.
첫 본회의 상정 때는 이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여당인 대국민당 의원 대부분이 이 법안 통과를 반기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부결됐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국민당의 중심세력 중 하나인 이재하가 ‘가’에 붙었다. 이에 따라 이재하 라인 30여 명의 ‘가’가 확정됐다.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어제 늦은 밤까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진행했지만, 안정권이라 할 수 있는 ‘가 150표’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100표 미달이고, 최선도 132표다. 금일 재적인원이 258명이기에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석일태가 왜요.
우선 액정을 두드려 허대윤의 메시지에 응답했다.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답신이 왔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출국하고 보려는 모양이야.
-붙잡아둘 수 있는 법적 수단은 없겠죠.
-당연히 없지. 걸려있는 혐의가 없잖아.
허대윤이 짜증을 냈다. 말로 들은 건 아니지만, 문자만 읽어도 벌써 피로했다. 눈가를 부비고 난 차유신이 침착하게 답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액정을 끄고, 신속히 주머니에 넣었다. 이내 기자들이 모여 있는 쪽을 힐긋거렸다. 재수가 나쁘면 핸드폰 액정에 뜬 내용이 사진기자의 렌즈를 통해 노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가능하면 본회의장에서는 핸드폰 자체를 만지지 않는 게 좋았다.
“다음으로 최도현 의원 등이 발의한 상호저축은행법·여신전문금융업법 일부 개정 법률에 대한 수정안을 상정합니다.”
국회의장이 선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앞쪽에 앉아있던 최도현이 기립해 단상으로 나섰다. 일부 대국민당 의원이 대놓고 인상을 썼다. 무시한 최도현이 정자세로 서서 입을 뗐다.
“대국민당 국회의원 최도현입니다. 현행법은 일반 대기업 자본이 금융지주사를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금융 소비자의 자산이 기업가치 부풀리기 등에 남용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대기업에 준하는 자본력을 지닌 중견기업이 실질적인 금융지주사를 운영하며 이 위험성을 재현하고 있는 점, 알고 계십니까. 사전 자료 배포를 통해 예시로 든 SDB금융그룹은….”
“오늘 아침에 정일일보 통해 물타기는 왜 했습니까.”
한 대국민당 국회의원이 말을 잘랐다. 최도현이 예사롭게 대꾸했다.
“무슨 물타기 말씀이십니까.”
“대국민당 일부 의원이 SDB 석일태 회장으로부터 로비자금 받았고, 이 자금 출처가 SDB금융이라고 정일일보에서 보도했잖아. 이번 법안 상정 앞두고 대놓고 언론플레이 한 게 아니면 뭡니까. 근거도 순 엉터리더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최 의원은 모르는 일이야? 차유신 의원, 그럼 그쪽에서 나왔어?”
의원이 갑자기 차유신을 봤다. 차분하게 숨을 고른 차유신이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이거 최 의원하고 차 의원이 짜고 대국민당 흔들려고 올린 법안이잖아. 선배들이 바보로 보여? 대체 왜 멀쩡하게 돌아가는 정당정치를 건드려. 심지어 대선 앞둔 중요한 시기에. 이거 국민들 기만하는 행위야. 증거도 없는 허위사실 유포하고, 별문제도 없는 금융사에 말도 안 되는 근거 들이밀면서 작업하려 하고. 젊은 놈들이 순 나쁜 것만 배워가지고. 어?”
“김 선배님.”
차유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해당 의원이 이마를 구겼다.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누구 말이 옳은지, 투표로 따지시죠. 지금 물타기 하는 건 선배십니다. 심지어 아주 수준 낮은 방식으로요.”
“야. 차유신! 말을 그따위로 해?”
버럭 소리친 의원이 들고 있던 페이퍼를 내던졌다. 몇몇 대국민당 의원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섰다. 이재하 라인 의원들과 신진화당 의원들이 지지 않고 들썩였다. 순식간에 본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질렸다는 양 고개를 젖힌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잡았다. 땅, 땅, 소리와 함께 지친 음성이 본회의장을 갈랐다.
“정숙! 다들 앉으세요. 최도현 의원 빼고 전원 발언하지….”
“차유신! 너 똑똑히 들어. 이런다고 여당이 무너질 것 같아? 부끄러운 줄 알아. 자격도 없는 새끼한테 금배지 붙여줬더니 이딴 공작질이나 벌이고. 대체 누구한테 배워갖고 이 모양이야!”
돌연 공형우가 차유신을 몰아붙였다. 팔짱을 낀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불퉁한 혼잣말이 나왔다.
“네 애비 김후준한테 배웠다.”
근처에 있던 문지찬이 사색이 됐다. 한껏 정색한 입 모양이 보였다. 오디오 따이면 어쩌려고 그래, 이 또라이 새끼야! 차유신은 그저 눈매를 접었다. 사실 오디오에 노출시키려 한 말이었다.
소란은 이십여 분이나 지속됐다. 가까스로 발언을 마친 최도현이 단상에서 내려오고, 국회의장은 의사봉부터 들었다. 어떻게든 속개하려면 투표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밀어붙이지 않는 이상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들 착석하세요. 투표를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상호저축은행법·여신전문금융업법 일부 개정 법률에 대한 수정안 관련 투표를….”
“박신회!”
뜬금없이 누군가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본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얼굴을 거둔 한 의원이 헐레벌떡 주변을 살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신회 복귀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본회의장이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술렁였다. 투표조차 잊은 이들이 전부 스마트폰을 꺼내 속보를 검색했다. 차유신도 급하게 액정을 켰다. 이미 실시간 뉴스가 전부 ‘박신회’로 도배돼 있었다.
[속보] 박신회 긴급 귀국…대선 출마 선포
[1보] 박신회, 신진화당 입당 선언
[속보] 박신회 대권 출마…새 둥지 신진화당
한 보도채널에서 박신회의 입국 인터뷰를 실시간 송출하고 있었다. 차유신의 손가락이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공항 로비에서 발언 중인 박신회가 나타났다.
-…출마와 관련한 국민 반응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더 걱정이 된 건 대한민국의 현재였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고, 그걸 이행할 힘이 남아있다면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자가 잽싸게 질문했다.
-신진화당의 설득이 인상 깊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원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딱 누구라고 말을 하긴 좀…. 아주 젊은 의원이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마트하고, 추진력이 있고, 무엇보다 옳고 그름이 확실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라면 믿을 만하다 판단했고, 그게 정치권 복귀를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박신회가 얼핏 웃었다.
-아주 끈질긴 친구였습니다. 몽골까지 사람을 보냈더라고요.
차유신이 움칠했다. 몽골로 사람을 보냈다고. 그런 적은 없는데. 차유신은 박신회를 직접 찾는 걸 최후의 보루로 남겨왔다.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끼익. 본회의장 뒤편에서 문이 열렸다.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우태원과 이재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힐끔거린 대국민당 의원 일부가 경직됐다. 두 사람은 유유히 발을 옮겼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제법 컸다. 멍하니 지켜보던 차유신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문득 어깨에서 툭, 소리가 났다. 어느새 다가온 이재하가 몸을 숙여가며 귓속말을 건넸다.
“박신회 섭외 완료했다. 태원이가 본인 보좌진 두 명 몽골로 보내서 며칠간 진을 치게 한 끝에 데려왔어. 워낙 극비 사항이었던지라 정진원 선배를 비롯한 신진화당 지도부, 나하고 우태원만 공유한 내용이야. 물론 가장 큰 공신은 너지만…. 그간 네가 보낸 이메일 전부 읽고 나서 박신회가 마음 정했다 하더라고. 어쨌거나 표정 관리 해. 나하고 태원이에게 뒤통수 맞은 여당은 지금 초상집일 테니까.”
“대국민당은 우태원이 몽골로 사람 보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차유신이 질문했다. 이재하가 주억거렸다.
“어. 박신회 때문이었다는 건 방금 전에 깨달았겠지만.”
몸을 세운 이재하가 마저 내려가 자리에 착석했다. 우태원도 근처에 앉았다. 싸늘하며 고적한 공기가 본회의장에 내려앉았다. 대국민당 의원들이 눈치를 보듯 주변을 탐색했다. 한껏 초조해진 공형우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짧은 시간, 대국민당은 시험에 들었다. 현역 시절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박신회가 복귀했다. 라이벌 정당에 입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당 지도부인 이재하, 그리고 당의 젊은 페이스메이커인 우태원이 그의 복귀에 힘을 실어줬다. 끈끈하던 대국민당의 신의에 제대로 금이 갔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정면 돌파를 택할 것인지, 혹은 굴복할 것인지.
“투표 시작합니다.”
국회의장이 운을 뗐다. 의원들이 손이 버튼 위를 배회했다. 탁, 탁, 이어지는 소리는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물결처럼 번졌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새까만 화면에 들어차는 빨갛고 파란 불의 개수를 셌다. 각기 다른 색깔의 봉화들 같았다.
“투표를 마칩니다. 결과 발표합니다. 최도현 의원 외 7인이 발의한 상호저축은행법·여신전문금융업법 일부 개정 법률에 대한 수정안은.”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들었다. 몇몇 의원이 한숨이 흘렀다. 국회의장이 목에 힘을 줬다.
“재적 의원 258명 중 가 156표, 부 82표, 무효 20표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커다란 마찰음이 귀를 울렸다. 체념한 공형우가 얼굴을 감쌌다. 기다란 레이스를 마치고 난 후의 경기장처럼, 형형한 권태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차유신은 가장 선두에서 달리기를 종료한 선수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직도 번쩍이는 전광판의 불빛들이 보였다. 차유신은 그것이 여의도를 형상화한 하나의 그림으로 보였다.
빨갛게 될 뻔한 불을 파랗게 밝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꺾어서라도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것.
그건 권력이었다.
*
본회의를 마치자마자 흡연 장소로 이동했다. 텅 빈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훅 들어오는 매연이 제법 개운했다. 담배 연기가 신선한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입구 쪽에서 서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우뚝 선 정장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차유신의 입에서 담배가 거둬졌다. 하얗게 번지는 연기를 흐트러뜨리며 바람이 지나갔다.
“왜 말 안 했어?”
우태원은 대답 대신 새까만 재킷을 한번 추슬렀다. 단조로운 답이 돌아왔다.
“선배께서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네. 몽골로 사람을 보낼 수 있음에도 그간 보내지 않은 건, 선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였겠죠. 그런데 제가 그걸 무시하고 멋대로 사람을 보냈으니….”
우태원의 톤이 낮아졌다.
“선배를 거스른 거죠.”
차유신은 묵묵하게 끄덕였다. 바닥을 짚은 구둣발에서 딱, 소리가 났다. 퍼석거리며 흙바닥이 갈라졌다. 차유신이 뇌까렸다.
“맞아. 아주 거슬리는 짓을 했지.”
“죄송합니다.”
“잘못한 건 알아?”
“네.”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담배 끝을 툭툭 털며 발을 뻗었다. 우태원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를 좁힌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내가 너 어떻게 할 것 같아.”
“한마디할 거라 생각합니다.”
“학습 효과가 있네.”
“26년 동안 선배만 연구했으니까요.”
차유신이 입매를 꼬았다. 가벼운 턱짓이 건네졌다.
“고개 들어봐.”
우태원이 목을 바로 했다. 차유신이 좀 더 다가갔다.
“요즘은 담배 안 피워?”
“애초에 선배와 피우는 게 아니면 안 피웁니다.”
“내가 피우면 피운다는 거지?”
“네.”
차유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대뜸 벌어진 입이 우태원의 입술을 덮쳤다. 입 안의 연기가 흐늘거리며 반대편으로 흘렀다. 우태원의 턱이 경련했다. 빠져나온 차유신의 혀가 우태원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부드러운 지시가 새어 나왔다.
“나 피워 봐.”
돌연 헐떡인 우태원이 차유신의 뒤통수를 잡았다. 덜컹거린 손에서 꽁초가 떨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목이 달아 왔다. 성급하게 틈을 만든 입술이 차유신의 것과 겹쳤다. 이를 세워 표피를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안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점막을 마구 핥아댔다. 더운 숨이 얼굴을 덮쳤다. 우태원이 작게 포효했다.
“후우….”
“여기 오픈된 공간인데.”
“전 상관없어요.”
“난 상관있어.”
“내가 상관없게 할게요.”
우태원의 입이 잠시 떨어졌다. 짙은 눈매 안에서 눈망울이 조금조금 선명해졌다.
“내가 선배를 범했다고 할게요.”
“난 범해지는 거 싫어.”
“그래도 범해져야 해요.”
우태원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차유신의 입에다 제 것을 붙이고는, 우악스럽게 혀를 엉겨왔다. 접착된 혀의 돌기를 타고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입꼬리를 타고 타액이 줄줄 샜다. 우태원의 목에 핏대가 섰다.
“나도 선배에게 범해질 테니까.”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더듬거리는 손가락이 두꺼운 목덜미를 쓸었다. 언젠가 차유신이 박아 넣은 손톱자국이 딱딱한 피딱지로 남아있었다. 곤두선 손톱이 상흔을 긁었다. 금세 핏물이 터졌다. 우태원이 격렬히 등줄기를 떨었다. 차유신이 물었다.
“너는 범하는 것과 범해지는 것이 아니면 생각하지 못해?”
우태원의 눈이 굴러갔다. 자못 진중해진 차유신을 응시하다가, 고저 없는 대답을 꺼냈다.
“네.”
그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저는 선배와 엮이면, 머리가 나빠져서요.”
차유신의 팔이 흘러내렸다. 핏물로 척척해진 손을 당겨 입에 가져갔다. 혀로 맛보았다. 훈풍을 머금은 비린내가 머리를 울렸다. 차유신은 잠자코 음미했다.
따스하지만 잔혹한 맛이었다.
*
앉아. 일어서. 가져와.
어린 차유신이 검은 개를 내리 외면만 한 건 아니었다.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횟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길들여보기 위해 애를 썼다. 여러 형태의 간단한 훈련을 시도했다. 그를 위해 TV에서 방영하는 애완동물 관련 프로그램도 유심히 봤다.
다행히 개는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세 번 만에 ‘앉아’, ‘일어서’, ‘가져와’, ‘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특히 ‘물지 마’는 절대로 듣지 않았다.
물면 아프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스스로 개를 문 다음 등을 때려보기도 했는데, 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며칠 후에 또 사고를 쳤다. 사도동 방석집 사이에서 개에게 물렸다는 피해자는 주기적으로 속출했다.
‘왜 개가 말을 안 들을까요.’
다섯 번째 ‘물지 마’에 실패한 날, 차유신은 우울하게 은지 누나에게 그런 걸 물었다. 은지 누나는 집에서 말티즈와 요크셔테리어를 길렀다. 차유신을 살피던 누나가 넌지시 저편을 봤다. 언제나처럼 ‘여울’ 입구를 맴도는 개가 보였다. 누나가 한숨을 쉬었다.
‘저 개는 처음부터 그런 게 안 되는 개야.’
‘“앉아”하고 “일어서”는 했어요.’
‘그건 널 좋아하니까 한 거지.’
‘날 좋아하는데 왜 ‘물지 마’는 안 해요?’
‘그건….’
은지 누나가 말을 흐렸다. 자못 씁쓸한 시선이 다시 개에게 걸렸다. 개는 눈치를 보듯 수그렸다. 누나가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저 개는 처음부터 물기 위해 태어난 개라 그래.’
‘그런 개도 있어요?’
‘응. 투견으로 태어났어. 이 근처에 투견장 있는 것 알지? 거기서 도망친 개야. 물고 싸우기 위해 태어났고, 그러면서 살아왔어. 그게 저 개의 존재 이유야.’
‘이제라도 고칠 수는 없어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은지 누나가 손을 내밀었다. 풀이 죽은 차유신의 머리를 만져주고는, 조곤조곤 달랬다.
‘그러니 포기해, 울아. 타고난 걸 바꾸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거든.’
*
“출국 금지 요청이 반려됐어요?”
오전 7시에 만난 허대윤은 완전히 피로에 찌든 면상이었다. 쯧, 혀를 찬 그가 팔을 올렸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호텔 커피숍 직원이 서둘러 다가왔다.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상냥한 질문에 허대윤이 주문했다. 물. 아주 차가운 걸로. 몸을 굽고 난 직원이 돌아섰다.
“법무부 차관과 긴 시간 논의했는데, 출국을 막을 만한 시나리오 자체가 안 나와. 금융관리위원회의 SDB금융 감사는 오늘 오전 9시부터 시작이야. 출국 금지를 때리려면 거기서 석일태의 혐의가 뭐라도 나와야 하는데, 그게 반나절 만에 가능하겠어? 관련 절차는 또 어떻게 하고. 석일태가 출국하는 오후 6시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해.”
“석일태는 출국 이후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걸 내가 몰라? 나도 답답해, 차 의원.”
허대윤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위에 놓인 커피잔 두 개가 덜컹거렸다. 막 물 잔을 들고 온 직원이 주춤했다. 이내 허대윤을 힐긋거리다가,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조금씩 밝아오는 광화문대로가 보였다. 출근하는 차들로 벌써부터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얗고 까맣게 빛나는 보닛을 머금은 눈이 가늘어졌다. 입 안에 쓴 침이 고였다. 이제 시작인데, 첫 단추부터 꼬이고 말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돌발 상황이다.
“왜 하필 오늘 오후일까요.”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허대윤이 갸웃했다. 의아한 질문이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봐도 도망칠 의도가 다분한 출국을 하고 있는데, 어제나 그제가 아니라 오늘을 택했습니다. 그것도 오후 6시나 돼서.”
“오늘 오전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나보지.”
“급하게 처리할 일….”
차유신이 곱씹었다. 덩달아 골똘해졌던 허대윤이 움칠했다. 경악에 찬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차 의원. 설마…!”
“청장님.”
저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신속히 다가온 중년 남성이 몸을 숙였다. 경찰청 수사1과장이었다. 거칠한 손이 페이퍼를 건넸다.
“미팅 중에 죄송합니다. 이거 한 시간 후 언론에 배포할 내용인데, 최종 보고 차….”
“어어, 그래. 잠깐 실례하지. 차 의원.”
눈짓을 보낸 허대윤이 서류를 받았다. 곁눈질로 종이를 살피던 차유신이 휘둥그레졌다. 짧은 순간 발견한 글자가 심히 익숙했다. 생각할 겨를도 나아간 손이 종이를 챘다. 허대윤이 화들짝 놀랐다.
무시한 채 페이퍼를 노려봤다. 새까맣고 올곧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훑다 보니, 절로 손목에서 경련이 일었다. 쥐고 있던 손이 금방이라도 구겨버릴 기세로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역운회 집단 폭행 사건’ 수사와 관련한 건.
일시: 5월 3일 오후 10시 28분.
장소: 서울시 역현구 운도동 31-8 (역현공원 후문)
피해 규모: 매천회 및 기타 조직폭력배 35명
가해 규모: 역운회 62명
현장 검거 인원: 19명
내려가던 시선이 점점 부들거렸다.
CCTV 인식 프로그램 기반으로 추적 중인 가해자: 서재길(역운회 간부), 권문직(역운회 간부)….
입술을 깨문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허대윤은 딴청을 피웠다.
“아직도 역운회 때려잡기 하시는 겁니까.”
“무슨 때려잡기를 해? CCTV 통해 폭행 사건 인지했으면, 검거에 나서는 게 경찰의 도리….”
“역현공원 후문에는 원래 CCTV가 없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져 현장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경찰이 설치를 반려하지 않았습니까.”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사건 현장을 인지했다는 겁니까.”
침묵이 흘렀다. 우물쭈물한 수사1과장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마를 긁적인 허대윤이 긴 숨을 내쉬었다. 곧 차유신에게 눈길을 두고는, 탄식 비슷한 답을 꺼냈다.
“지난달에 새로 설치했어. 공원 나무 몇 개 벤 다음에.”
“청장님. 제가 여기서 멈추자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아.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고 싶어. 80년대 이후 조직폭력배 단기 검거건수가 이렇게까지 많았던 적이 없어. 경찰청장으로서 숫자 최대한 늘리고 싶은 거, 당연한 것 아니야?”
“가해자는 왜 역운회로 특정한 겁니까. 누가 봐도 조직들끼리 이권다툼 벌인 건데.”
“거의 일방적으로 상대방이 당했어. 역운회 놈들 힘 좋은 것 알잖아. 뼈도 못 추리고 처맞는 거, CCTV에 제대로 찍혔다고.”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차 의원. 지금 역운회 편드는 거야?”
허대윤이 정색했다. 차유신의 턱이 멎었다. 관자놀이를 짚고 난 허대윤이 손을 뻗었다. 꼿꼿한 손가락이 차유신을 가리켰다.
“차 의원이 말했지. 이거 차 의원 본인이 시작한 거라고. 맞아. 이거 차 의원이 결정해서 벌인 일이야. 그런데, 일만 벌이면 다야? ‘조폭과의 전쟁’ 프로젝트에는 수백 명의 경찰이 투입돼있어. 지금도 일선 경찰들은 이것 때문에 며칠 밤을 새워. 왜? 차 의원에게는 끝난 일일지 몰라도, 경찰들에게는 아니거든. 여기 공무원 조직이야. 프로젝트 구상하는 데 삼 개월 걸렸지? 그러면 끝나는 데도 삼 개월 걸리는 거야. 이거 경찰들 밥줄 문제야. 내 밥통 문제이기도 하고.”
전에 없이 분연한 반응이었다. 할 말을 잃은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허대윤이 고개를 젖혔다.
“솔직히 나로서는 서운해. 차 의원 얘기 다 들어주고, 하나하나 맞춰줬더니 이제 와서 말 바꾸고 말이야. 나이는 어려도 뚝심 있고 똑똑한 친구인 것 아니까 내가 그렇게까지 해준 건데.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져? 이러면서 신뢰라는 게 깨지는 거야. 차 의원, 우리 지금 소꿉장난하는 것 아니잖아. 어?”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맥없는 혼잣말이 나왔다. 허대윤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굴러갔다. 차량으로 빽빽한 광화문대로가 꽉 막힌 탈출구 같았다. 차유신의 목에서 힘이 빠졌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해야 할까요.”
역운회에서 태어나, 역운회를 고향으로 두고 살아온 우태원에게.
*
호텔에서 나온 직후 차유신은 국회로 가지 않았다. 운전을 맡은 백진재에게 얘기해 광화문을 한 바퀴 돌라고 했다. 백진재는 이유도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머리통이 흔들리며 두통을 자아냈다.
뒷좌석에 기댄 채 백미러를 응시했다. 꽉 막힌 도로 틈바구니에서 고만고만한 차들이 거북이처럼 나아갔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지금 시간에 인사동은 좀 한가하지?”
난데없는 질문에 백진재가 룸미러를 봤다. 차유신을 천천히 살핀 그가 담담한 고갯짓을 했다.
“그다지 붐비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그쪽으로 빠져.”
“목적지가 따로 있으십니까.”
“목적지….”
읊조리고 난 차유신이 재차 백미러를 확인했다. 햇볕을 반사하는 수많은 보닛들을 일별하다 중얼거렸다.
“인적이 아주 많이 드문 곳.”
백진재가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내려간 그의 구둣발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시트가 진동하고, 스르르 미끄러진 차가 차선을 변경했다. 저 앞에 광화문삼거리가 있었다. 거기서 왼쪽으로 빠지면 인사동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안정적으로 좌회전 한 차가 효자로에 진입했다. 한산한 길을 죽 나아가다 적당한 지점에서 방향을 꺾었다. 인적 하나 없이 텅 빈 골목이 나타났다. 백진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안이 고요해졌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또 주문할 것 있으십니까.”
차유신은 대답 대신 버릇처럼 백미러를 봤다. 뒤에서 줄줄이 정차한 검은색 세단 두 대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몽둥이를 든 채 뛰어왔다. 차유신이 나직이 운을 뗐다.
“백 보좌관.”
“네.”
“맷집 좋아?”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됐네.”
차유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백진재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차유신이 빙글거렸다.
“그럼 좀 맞을까? 나하고 같이.”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네 개의 차창이 동시에 박살났다. 불쑥 들어온 손이 차유신의 머리에 비닐봉투를 씌웠다. 이어 대뜸 목을 조르며 숨통을 찍어 눌렀다.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의 어깨가 들썩였다.
단단한 엄지가 두어 번 만에 급소를 찾았다. 콱 압박하자마자 기도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텅 빈 시야에서 회전목마처럼 섬광이 회전했다. 무지근한 머리가 푹 꺾였다.
*
어딘가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감각이 워낙 둔해 쉽지가 않았다. 일단 움직여보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웠다. 잠시 꼿꼿했던 상체가 금세 기울었다. 몸 자체가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워 일거수일투족이 버겁다. 그리고 조금 추웠다.
“벗겨.”
중후한 지시가 귀를 스쳤다.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옥죈 봉투가 빠졌다. 무연한 어둠이 걷히고, 새하얀 빛이 눈을 스몄다. 절로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질 나쁜 TV 속 장면처럼 모든 것이 희끄무레했다.
“약 얼마나 때렸어.”
중앙에 선 남자가 물었다. 근처의 남자가 답했다.
“큰 걸로 세 개 박았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못 차리지. 왜 오버를 해?”
“시정하겠습니다.”
버럭 훈계하는 남자 앞에서 상대방이 몸을 사렸다. 쯧, 소리를 낸 남자가 발을 뻗었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괜한 구역질이 났다.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난 뒤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조도가 돌연 낮았다. 조명을 가로막은 남자가 허리를 짚고 있었다.
“안 추워? 차 의원.”
조롱을 닮은 질문이었다. 차유신은 서둘러 눈을 깜박였다. 몽롱한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는, 시각부터 살려야 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점멸하던 시야가 느릿느릿 선명해졌다. 인화지에 나타나는 피사체처럼 사물들이 가물거리며 피어올랐다. 마침내 자리를 잡은 동공이 흔들렸다. 조금 웃음이 터졌다.
석일태 회장.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별것 아니야. 얼마 전에 필리핀에서 들여온 칵테일 약물인데, 이런 거에 내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별 재미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고 투약하면 멀미하는 느낌만 나거든. 그래도 힘 빼기에는 이만한 게 없지. 웬만한 마취제보다 훨씬 더 나은 수준이거든.”
석일태가 피식거렸다. 차유신이 덩달아 입매를 비틀었다. 왠지 웃음이 났고, 그걸 숨길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석일태의 낯에서 서서히 미소가 가셨다. 무표정이 된 그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피차 웃을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대뜸 내뻗은 구둣발이 차유신의 배를 갈겼다. 인정사정없이 채인 몸이 무너졌다. 쿨럭. 기침을 한 차유신이 후들거렸다. 딱딱한 바닥과 마찰한 팔뚝이며 무릎이 꽤나 쓰렸다. 찌푸린 시선이 이동했다.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제 알몸이 보였다. 씨발. 절로 욕설이 씹혔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일으켜.”
석일태가 턱짓을 했다. 튀어온 두 남자가 차유신을 부축했다. 강제로 일으켜진 몸이 무릎 꿇린 자세로 앉혀졌다. 찌뿌둥한 팔뚝이 덜컥거렸다. 등 뒤로 묶인 손목 때문에 영 갑갑했다.
“일단 축하해, 차 의원. 이긴 거.”
석일태가 뇌까렸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을 치떴다. 그의 발이 다시 다가왔다. 새까만 가죽구두가 훤히 드러난 성기를 건드렸다. 이내 꾹 지르밟았다. 아악! 차유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석일태가 빈정거렸다.
“지금은 스타일 좀 구겼지만. 어?”
“하아…. 씨발, 진짜….”
“천하의 차유신이 꿀릴 게 어디에 있어. 알몸으로 광화문 광장 갖다 둬도 국민들은 다 좋아해 줄 텐데.”
낄낄거린 석일태가 발을 거뒀다. 통증이 남은 사타구니가 움찔거렸다. 석일태가 안여히 고개를 돌렸다. 저 구석에서 역운회에 붙들려있는 백진재를 힐긋하고는,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핸드폰 가져와.”
뛰어온 남자가 석일태의 손에 새까만 스마트폰을 쥐여 줬다. 차유신의 눈 밑이 경련했다. 자신의 것이었다.
“이렇게 하자고. 차 의원.”
석일태가 몸을 구부렸다. 핸드폰이 차유신의 뺨을 건드렸다. 차유신은 잠자코 그를 쏘아봤다.
“나 아직 국내 정리 못 했어.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뭐 어쩌라…. 허억!”
갑자기 다가온 손아귀가 뒤통수를 잡아챘다. 차유신의 목을 꺾을 듯 젖힌 석일태가 경고했다.
“금융관리위원장에게 지금 전화해서 얘기해. SDB금융 감사 일주일 보류. 딱 그거 한 마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은데.”
차유신이 키득거렸다. 석일태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개의치 않은 차유신이 비꼬았다.
“나 행안위 소속이야. 금관위는 정무위고. 이런 협박은 정무위 위원한테 해야지.”
“이론적으로는 그게 맞지. 하지만 차 의원은 그 이상이잖아.”
석일태가 목소리를 깔았다.
“박신회의 복귀가 확정된 이상 웬만한 정부부처 관료들은 알음알음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그 박신회의 결정적 복귀 계기가 된 게 바로 차 의원이니, 공직자들이 덩달아 차 의원 눈치까지 볼 건 당연지사지. 관료 사회에서 줄타기 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아는 양반들이야. 정신 제대로 박힌 공직자라면 차 의원 요청을 거절할 리 없어.”
핸드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석일태가 으름장을 놓았다.
“권력이란 게 참 좋지? 그러니 기회 줄 때 써먹어.”
차유신이 코웃음을 쳤다.
“싫다면.”
이번에는 석일태도 웃었다.
“그러면 나로서는 차 의원을 멀쩡하게 둘 이유가 없지.”
석일태가 손짓을 했다. 성인 남성 팔뚝만 한 크기의 절단기를 든 남자가 다가왔다. 차유신의 앞에 덜컥 내려둔 절단기에서 시퍼런 날이 빛났다. 석일태가 지시했다.
“새끼부터 잘라.”
지체없이 몸을 앉힌 그가 차유신의 발목을 잡았다. 그대로 당기고는, 절단기 위에 새끼발가락을 올렸다. 반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차유신을 곁에 있던 두 남자가 붙들었다. 연신 달아나려는 발목을 힘 있게 고정한 남자가 날을 내리찍었다. 서걱, 하며 발가락이 잘려져 나갔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등줄기가 전율했다. 소스라친 차유신이 악을 썼다.
“아아아아아악!”
휘파람을 분 석일태가 몸을 숙였다. 굴러다니는 발가락을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둘러봤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이를 재미있다는 양 만지작거린 그가 다시 차유신과 눈을 맞췄다. 피투성이 발가락이 차유신의 볼을 찍었다. 곧 목과 가슴까지 죽 미끄러지며 그림을 그렸다.
“우리 차 의원님은 발가락도 예쁘네. 벗은 것도 보기 좋고. 응?”
“허윽…. 씹, 정신 나간 새….”
“나는 차 의원이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제일 선호하는 게 잘생긴 놈이야. 그냥 신뢰가 가거든.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얼굴이 딱 증명하잖아. 난 놈인 거. 우종진 이사하고 태원이를 내가 왜 그렇게 예뻐했는데. 둘 다 얼굴도 출중하고, 실력도 그에 걸맞게 출중하거든.”
눈을 굴린 석일태가 심드렁하게 말을 맺었다.
“물론 이제는 둘 다 아니지만.”
차유신의 목울대가 쿨렁였다. 고통으로 머리가 빙빙 도는 와중에도 우태원의 이름은 선명하게 각인됐다. 차유신이 버겁게 눈을 부라렸다.
“우태원은 지금 어디에 있어.”
석일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새끼도 지금쯤 어디 하나 잘려나갔을 거야. 솔직히 나로서는 실망이 커. 지 애비 닮은 건 진작 알았지만, 그 못된 버릇까지 닮았을 줄이야.”
발가락을 꽉 쥐고 난 석일태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일그러진 차유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차 의원이 태원이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 나 엿 먹인 건 그렇다 쳐도, 역운회 엿 먹인 건 태원이에게도 타격이야. 어떤 의미에선 나보다도 더 역운회 아끼는 놈이거든. 태원이 죽어라 쫓아다니는 서재길이며 권문직 같은 놈들까지 차 의원 때문에 전부 경찰에 잡혀 들어가게 생겼는데. 우태원 속이 편안하겠어?”
차유신의 호흡이 가빠졌다. 몸을 튼 석일태가 저편의 기기를 가리켰다. 한 남자가 바로 전원을 가동했다.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며 기기 안의 모터가 돌아갔다. 분쇄기였다. 석일태가 공놀이를 하듯 발가락을 던졌다.
정확히 입구에 안착한 발가락이 위잉,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기기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백진재가 차마 보기 힘들다는 양 얼굴을 감쌌다. 차유신은 멍하니 사라진 자신의 발가락을 봤다. 허전해진 절단 부위에 한기가 스몄다. 척추가 어는 듯한 소름이 일었지만, 차유신은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충격보다 큰 절망에 온 신경이 압도당해 있었다.
이제 알았다. 자신이 망친 우태원의 부분은 사실 그의 전부였다는 걸.
“전화.”
고저 없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석일태의 얼굴이 돌아갔다. 시선을 건넨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금융관리위원장 번호 눌러. 그리고 나에게 줘.”
석일태의 표정이 사뭇 누그러졌다. 흔쾌히 다가온 그가 바닥에 뒀던 핸드폰을 챙겼다.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연락처를 찾고는, 통화버튼까지 누른 후 차유신 앞에 들이밀었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신호음에 또 구역질이 났다. 가까스로 참고는, 목에 칼이 겨눠진 사람처럼 허망하게 액정을 봤다.
-어. 차 의원. 무슨 일이야?
서너 번의 신호음 끝에 박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텁지근한 언어가 샜다.
“SDB금융 조사…. 그거 말입니다.”
돌연 액정이 어둑해졌다. 어두워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위가 완연한 암흑이었다. 한 남자가 소리를 쳤다. 뭐야, 누가 불 껐어! 다소 술렁이던 실내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열린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석일태가 언성을 높였다.
“불 켜! 어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남자들의 신음이 터졌다. 우악스럽게 들이닥친 남자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안에 있던 남자들을 몰아붙였다. 곳곳에서 타격음이 난무하고, 분수가 터지듯 핏물이 튀었다.
머리가 잡아채인 한 남자가 분쇄기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대로 전원을 올리는 상대방을 향해 남자가 외쳤다. 하지 마, 이 씨발 새끼야! 다른 쪽에서는 연달아 문손잡이에 머리가 찍힌 남자가 허우적거린 끝에 주저앉고 있었다.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차유신의 어깨가 늘어졌다. 이 새끼들이 진짜! 석일태가 대뜸 뛰쳐나갔다. 탁. 떨어진 핸드폰이 빙글거리며 멀어졌다. 아, 위원장. 눈을 키운 차유신 핸드폰 쪽으로 기어갔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혹시 모르니 통화는 마무리해야 한다.
막 핸드폰과 가까워진 차유신의 몸 위에 뭔가가 내려앉았다. 커다란 사이즈의 남성용 재킷이었다. 스치는 원단이 무겁고 서늘했다. 그리고 짐승의 가죽과 같은 질감이 느껴졌다. 움칠한 얼굴이 돌아갔다.
컴컴한 세상 속에서도 차유신은 태양 밑에서 보듯 그를 인지했다. 암연이 짙을수록 선명한, 모순적인 피사체. 차유신의 입이 더듬거렸다. 맨몸에 걸친 재킷이 덩달아 미동했다.
“우태원. 내가 얘기할 게 있는데, 역운회….”
말을 맺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그대로 차유신의 얼굴을 감싼 우태원이 속삭였다.
“그냥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선배. 저 지금 하나도 안 들려요.”
차유신의 턱이 굳었다. 우태원의 눈길이 사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훤히 드러난 알몸을 주시하던 그의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저 기분이 안 좋거든요. 아주 많이.”
이동한 손이 차유신의 가슴을 덮었다. 그대로 쓸어내리는 손길이 복부와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탐색했다. 종아리와 발목까지 훑고 난 손이 문득 멎었다. 비어있는 발가락에 다다른 손가락이 조금 곤두섰다. 그의 낯이 얼음장처럼 식었다. 묵직한 욕설이 들렸다.
“씨발….”
우태원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생각을 곱씹듯 바닥을 지분거리다가, 돌연 일어섰다. 딱딱한 지시가 실내를 울렸다.
“불 켜.”
탁. 컴컴하던 사위가 새하얘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십 수 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전부 아까 전 석일태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었다. 그들보다 두 배가량 많은 남자들이 우뚝 서서 우태원을 지켜봤다. 우태원은 말없이 바닥의 한 곳에 시선을 뒀다. 두 명의 남자에게 제압당한 석일태가 주저앉은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쿨럭! 허억…. 우태원.”
“예우라는 게 있습니다. 삼십 년 가까이 저 키워주신 것 감안해, 최대한 아버지께는 손대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태원이 저편을 봤다. 눈이 마주친 서재길이 목을 세웠다. 우태원이 손짓했다.
“장갑.”
끄덕인 서재길이 주머니에서 가죽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그대로 던져진 걸 챈 우태원이 천천히 제 손에 그것을 끼웠다. 반질반질한 가죽이 빳빳해져 갔다.
“살려드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려 했는데….”
우태원이 뒤를 힐긋했다. 냉한 눈길이 차유신의 오른쪽 발밑에 머물렀다. 베인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태원이 그르렁거렸다.
“이건 선을 넘은 겁니다. 그러니 책임을 지셔야죠.”
오른손에 장갑을 끼우고 난 손이 왼손에다 같은 것을 끼웠다. 착, 소리를 내며 가죽이 그의 피부와 밀착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 갑자기 장갑을 낀 이유는 너무나도 뻔했다.
“편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목 꺾어서 숨통 끊는 것, 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거든요.”
우태원의 구둣발이 나아갔다. 딱, 소리가 귀를 때렸다. 차유신의 눈이 점점 떨렸다. 굳어있던 귓불에 지잉, 소리가 스쳤다. 시선이 돌아갔다. 스마트폰 액정에 뜬 뚜렷한 글자들이 보였다.
1분 30초 내 도착.
-허대윤 경찰청장
“석일태에게 손대지 마. 우태원.”
단호한 명령이 터졌다. 우태원은 못 들은 척 발걸음만 옮겼다. 딱, 딱, 이어지는 발소리에 귓바퀴가 꿈적거렸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내뻗은 손이 바닥을 쥐어짤 기세로 움켜쥐었다. 한껏 날 선 음성이 튀어나왔다.
“곧 경찰 올 거야. 지금 석일태 죽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현장 발각돼.”
우태원의 발이 멎었다. 주변의 남자들이 놀란 듯 차유신을 봤다. 호흡을 가라앉힌 차유신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는 커다란 등을 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 핸드폰이 누구에게든 통화를 한 순간 바로 위치추적이 시작돼. 추적 개시 후 5분 안에 경찰이 오게 돼 있고.”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 너머에 있던 석일태의 낯이 멍해졌다.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차 의원.”
“너무 급해서 의심할 겨를조차 없으셨겠죠. 제가 왜 그렇게 순순히 역운회의 납치에 응했는지.”
차유신이 숨을 골랐다. 느른한 언어가 덧붙었다.
“석 회장님의 출국을 막을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일단 경찰에 체포될 만한 빌미를 만들고, 다음으로 금관위 조사 통해 최대한 빨리 혐의 메이드해서 완전히 국내에 묶어둘 생각이었던 거죠.”
“대체 뭘 가지고 체포한다는 거야. 차 의원 폭행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애들이야!”
“회장님께서 저에게 손을 안 대셨다고요.”
차유신의 목소리가 건조해졌다. 바닥에 뒀던 발이 죽 미끄러졌다. 새끼발가락이 뎅강 잘려 나간 피투성이 발을 내보이고는, 차갑게 물었다.
“이거 누구 지시로 완성한 작품입니까.”
곧 비아냥거리며 말을 맺었다.
“제 몸에 남은 수많은 지문은, 또 누구 거고요.”
석일태의 낯이 확 일그러졌다. 떨리는 성대를 타고 분연한 한 마디가 솟구쳤다.
“이 여우 같은 새끼가….”
무시한 차유신이 눈을 옮겼다. 무표정한 우태원을 응시하며 다시금 입을 뗐다. 한층 부드러운 톤이었다.
“다 끝났으니 그만 하고 이리 와.”
우태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유신의 팔뚝이 들썩였다. 아직도 묶여있는 탓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정한 어조를 유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하고 약속했잖아. 사람에게 손 안 대기로.”
차분한 턱짓이 건네졌다.
“말 들어야지. 태원아.”
우태원의 등줄기가 곧추섰다. 미미한 생기를 머금은 눈이 차유신을 담았다. 차유신은 눈을 맞춘 채 재차 주억거렸다. 우태원의 입술 틈으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인 시간이었다.
딱. 구둣발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 거리감이 옅었다. 차유신은 못을 박은 듯 우태원의 구두만 봤다. 정적인 무성영화 속 한 장면처럼, 까맣게 빛나는 구두가 일정한 간격으로 다가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유신의 호흡이 느슨해졌다. 뇌리의 농몽함이 여물었다.
“저 왔어요.”
차유신의 앞에 선 우태원이 몸을 숙였다. 이내 차유신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가, 묶인 손목을 풀었다. 혈류를 꽉 조여오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길게 목을 젖히고 난 차유신이 손을 올렸다. 자신만을 뚫어져라 보는 우태원을 살피다가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직한 칭찬이 나왔다.
“그래.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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