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여의도 재생사
29.
차유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절망은 6세의 봄, 개가 죽은 날 찾아왔다.
사도동 방석집 거리를 돌아다니는 새까만 떠돌이 개였다. 누나들은 그 개를 광견이라고 불렀다. 은지 누나와 연주 누나가 그 개에 물려 병원에 다녀왔다. 차유신 또래의 아이는 그 개 때문에 죽었다고 했다. 다만 이건 소문이었다.
“저 개새끼 어떻게 좀 안 돼? 먹이에 쥐약이라도 쳐서 줘야 하나.”
누나들은 툭하면 개를 욕했다. 차유신은 들으면서 속으로 궁금해했다. 이상하게도 차유신만 그 개를 본 일이 없었다. 차유신만 빼고 다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머리에 뿔 같은 게 달렸을까. 이가 막 서른 개씩 있는 건 아니겠지. 차유신은 개의 모양새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가장 표독스럽고 무서운 생물을 만들어냈다. 어느 날 그림을 본 누나들이 까르르 웃었다. 아니야, 울아. 그냥 개야. 차유신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냥 개.
그냥 개면 괜찮지 않나.
6세를 맞이하고 보름이 지난 겨울, 차유신은 누나들의 담배 심부름에 나섰다. 언제나 가는 동네 구멍가게부터 찾았는데, 주인 할머니가 아파서인지 문이 닫혀있었다. 차유신은 결국 보다 먼 곳으로 떠났다. 차유신이 담배를 살 수 있는 가게는 거기서 삼십 분은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노쇠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담배 열 갑을 사고, 남은 돈으로 과자를 산 뒤 비닐봉투를 흔들며 돌아갔다. 누나들은 왜 이렇게 담배를 좋아할까, 싶은 생각을 하며 길디긴 길을 걸었다. 몇 번이나 이유를 따진 끝에 내린 결론은 어쨌거나 차유신이 나중에 담배 따위를 피울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사도동의 초입을 알리는 작은 교회에 다다랐을 때, 막 코너를 돈 낯선 생명체와 마주쳤다. 꽤나 덩치가 큰 검은색 개였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차유신의 손에서 봉투가 떨어졌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개를 관찰했다. 누나들이 말한 그 개다. 미친개라고 들었는데. 물리는 것 아닌가. 차유신은 숨을 고르며 벽에다 등을 붙였다.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차유신을 탐색하듯 올려다볼 뿐이었다. 차유신 역시 그런 개를 열심히 살폈다. 적지 않은 시간, 그들은 신경전을 벌이듯 마주 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싸늘한 바람이 차유신과 개의 사이를 몇 번이나 갈랐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 희미한 노을이 하늘에 드리웠을 무렵 개가 먼저 움직였다. 천천히 차유신에게 다가와서는 대뜸 다리에 코를 묻었다. 개의 입에 바지가 말려 올라갔다. 드러난 맨다리에 축축한 혀가 닿았다. 간지러움에 낯을 구긴 차유신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 마!”
개는 듣지 않았다. 태연하게 몇 번이고 차유신의 다리를 핥아댔다. 비에 젖은 것처럼 다리를 척척하게 만든 개가 곧 흥미를 잃은 듯 주저앉았다. 이내 제 털을 훑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빤히 내려다보던 차유신의 눈이 골똘해졌다. 엄청난 광견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한 모양이다.
살짝살짝 발을 옮겼다. 개는 눈동자를 굴려 가며 차유신의 동태를 살폈다. 딱 거기까지였다. 갑자기 일어나서 달려들거나, 커다랗게 짖지 않았다. 떨어진 비닐봉투에 이르러 차유신이 몸을 숙였다. 봉투를 챙기고는 뒤를 힐긋했다. 개는 여전히 배를 바닥에 깐 채였다.
평범한 개구나. 속으로 생각한 차유신이 발을 내디뎠다. 방석집 거리를 향해 서벅서벅 걸었다. 열 걸음 가까이 나아갔을 때, 뒤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이 돌아갔다. 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왜 따라와? 볼멘소리를 하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개는 계속해서 쫓아왔다.
교회를 지나고, 술집 거리를 건너, 방석집 초입에 다다를 때까지 개는 내내 차유신의 곁에 있었다. 우뚝 발을 멈춘 차유신이 뒤를 확인했다. 개가 능청스럽게 꼬리를 팔랑거렸다. 머리를 긁적인 차유신이 봉투를 뒤적였다. 스스로 먹기 위해 산 과자를 하나 꺼내 위를 깠다. 이내 개의 앞에다 털어줬다.
“이거 먹고, 이만 가줬으면 좋겠어. 네가 오면 우리 누나들이 싫어하거든.”
어차피 개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진정성을 담아서 얘기하면 개도 알아듣겠지 싶었다. 다만 개는 과자에 입을 대지 않았다. 딱히 먹고 싶지 않은 듯, 열심히 차유신의 주위만 배회했다. 한숨을 쉰 차유신이 허리를 굽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과자 조각 하나를 집어 개에게 들이밀며 닦달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네가 무시하면 내가 뭐가 되냐?”
개는 역시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괜히 오기가 생긴 차유신의 손이 다급해졌다. 아예 개의 이빨 틈에까지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먹으라고! 병신아… 아악!”
손가락이 덥석 물렸다. 비명을 지른 차유신이 손을 뺐다. 스스로도 놀란 듯 주춤거린 개가 물러났다. 이내 부리나케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차유신은 개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래, 가라! 이 개새끼야. 또 내 눈에 띄면 그땐 뒤질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그 개를 길에서 마주쳤을 때 차유신은 건드리지 않았다. 괜히 흘겨보며 걷는 차유신을 개는 또 졸졸 따라왔고, 방석집 거리 초입에 다다르자 눈치를 보다 내뺐다. 저번에 이 자리에서 차유신의 손을 물었다가 호통을 들은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개와 마주친 일이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에 달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뭔가를 가져왔다. 빈 과자 봉투였다. 차유신에게 보여준 어머니가 깔깔거렸다.
“그 무서운 개 있지. 걔가 이 가게 앞에 두고 갔다? 여기다 놓고는 멀리서 보고만 있더라. 너무 웃기지 않니? 대체 이걸 왜 가져 왔을까?”
그저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다가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다짜고짜 봉투를 채고는, 그대로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어머니가 갸웃했다.
“그건 왜 버리고 그래?”
차유신이 불퉁하게 답했다.
“광견병 옮아요.”
그건 언젠가 차유신이 개에게 줬던 과자의 포장지였다. 차유신이 그 봉투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물어온 모양이었다. 과자가 아니라, 봉투를 말이다.
*
어느 순간부터 개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추워 죽었나 봐. 누나들이 수군거렸다. 차유신은 믿지 않았다. 그 개가 어떤 개인데,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다.
개의 부재 속에서 봄이 찾아왔다. 차유신은 또 닫혀버린 사도동의 구멍가게 대신 멀리 떨어진 할아버지의 가게로 담배 심부름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가다 교회 인근에 다다랐을 때, 구석에 널브러진 새까만 물체를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한 차유신의 눈이 커졌다. 눈을 곤히 감은 개가 숨도 안 쉬어가며 자고 있었다.
차유신은 한참이나 그 개를 봤다. 한 시간일 수도 있고, 두 시간일 수도 있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냥 방석집으로 돌아왔다. 왜 담배가 없냐는 누나들의 말에 가게가 전부 닫았다고 답했다. 이내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안에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무슨 일이니?”
“아무 일 없어요.”
“누가 욕했어?”
“아니요.”
“누가 때렸어?”
“아니요.”
“그럼 누가 무슨 일을 당했니?”
담뱃갑을 뒤적인 어머니가 물었다. 차유신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젖은 입술을 질근거리다가, 끝내 끄덕였다.
“네.”
“누구.”
“개요.”
“개?”
“까만 개.”
“그 무서운 개?”
“네.”
“그 개가 왜.”
“죽었어요.”
피를 낼 기세로 아랫입술을 짓씹은 차유신이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차유신의 머리를 쓸고는, 다정히 물었다.
“그 개랑 친했어?”
“친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우니?”
“싫지 않았으니까.”
“그 개가 마음에 들었구나, 울이는.”
어머니가 허탈하게 웃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젖은 눈을 훔치며, 확고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그냥 싫지 않다는 거….”
“그게 좋은 거지. 아니니?”
테이블을 더듬던 어머니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 그녀가 곤로하게 뇌까렸다.
“남들에게 솔직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솔직해야지.”
어머니의 입술 틈에서 하얀 연기가 번졌다. 허망하게 사그라져가는 안개가 잔상과도 같은 냄새를 남겼다. 카멜레온처럼 바뀌어 가는 냄새 속에서 차유신은 문득 그리운 체취를 맡았다.
그건 노을에 젖은 개의 냄새였다.
“제가 왜 그래야 해요?”
차유신이 울먹이며 물었다. 피식거린 어머니가 재차 손을 뻗었다.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만져주고는 입매를 꼬았다. 차유신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충만한 개의 냄새가 공허한 오감을 적셔왔다.
“사람이잖니. 사람은 다 그런 거야.”
*
쿠르릉. 내리치는 천둥소리에 눈을 떴다. 바깥에서 쏴, 하며 빗발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숨을 쉬고 난 얼굴이 돌아갔다. 자신은 소파 위였고, 머리맡에 종종 가벼운 훈기가 스쳤다.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안은 채 죽은 듯 눈을 감은 우태원이 보였다.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 걸쳐진 담요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곁눈질로 본 창밖이 완연한 폭우 속이었다. 봄장마가 시작됐구나. 속으로 생각한 뒤 발을 뺐다. 바닥을 딛고는, 몸에서 담요를 걷어 우태원 위에 던졌다.
제법 정돈된 바닥은 아까 우태원과 섹스를 하며 본 그것이다. 아까와의 차이가 있다면 시신들이 전부 치워져있다는 것 정도. 다만 핏물은 제대로 닦을 시간은 없었는지, 벽이며 바닥이 아직도 피투성이다.
몸을 더듬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왜 벗겼지. 눈이 돌아갔다. 소파에 누워있는 우태원이 재차 망막에 걸렸다. 잠이 든 건지, 잠이 든 척하는 건지 잠잠하기만 한 그를 보고 있자니 절로 이가 깨물렸다. 그래, 벗기는 게 낫겠지.
그러면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발을 옮겼다. 내실 입구에 다다라 문손잡이를 잡았다. 돌렸다. 반을 채 틀기도 전에 삐걱거리며 회전이 멎었다. 뭔가 장치를 올린 모양이다. 묵묵하게 내려다보다 손을 거뒀다.
우두커니 선 채 창문을 봤다. 새까맣게 물든 창이 간헐적으로 하얗게 균열했다. 그렇게 번개가 한번 치고 나면, 기다렸다는 것처럼 우악스러운 천둥이 들이닥쳤다. 이내 잠잠한 어둠으로 전환됐다. 빗물조차 비치지 않는 먹지가 된다.
차유신의 동공이 느슨해졌다.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자니,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 하늘만큼이나 까맣던 개. 여울이었던 6세의 봄, 사도동의 교회 앞에서 홀로 장례식을 치러준 개.
차유신은 의무적으로 개를 외면했다.
쿠르릉. 거센 천둥이 귀를 흔들었다. 무심코 뒷걸음질 진 발이 질척했다. 어둑한 바닥 위로 찰랑이는 핏물이 보였다. 잠자코 지르밟은 차유신이 고개를 바로 했다. 검은 소파 위에는 상의를 탈의한 채 눈을 감은 우태원이 있었다.
걸음이 나아갔다. 하나, 둘, 셋, 넷….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빨간 자국이 새겨졌다. 차유신은 그것들의 개수를 속으로 곱씹었다. 소리 없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차유신은 점점 진실에 가까워진다. 먼 과거에 정박해있던 기록이 돛을 올린다. 차유신은 현현하게 드러난 하얀 천 속 글자를 읽는다. 자신이 그 개를 받아들이지 않은 진짜 이유.
차유신은 알고 있었다. 차유신에게만 살가울 뿐인 그 개는 사실 누나들의 말처럼 상당한 맹견이라는 걸. 차유신은 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받아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개를 완벽하게 통제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렸다. 그래서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어중간하게 애정을 주느니, 처음부터 벽을 두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거다.
콰광. 귀가 째질 듯한 천둥이 내실을 메웠다. 소파 앞에 다다른 차유신의 눈이 이동했다. 하얗게 물든 하늘이 우태원의 벗은 상체를 고스란히 비췄다. 우태원은 매우 평화롭게도 잠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지켰다는, 노곤한 충만함에 도취돼 있었다.
무릎이 들렸다. 우태원의 허리 옆에 가져가 붙이고는, 다른 무릎을 반대쪽에 뒀다. 완전히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절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머릿속에서 지긋지긋한 진실이 너울거리며 춤을 췄다.
차유신이 그렇게까지 개를 외면한 건 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싫지 않다고 한 건, 그 개가 너무나도 좋아 인정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여울은 조심성이 많고 신중하며, 비겁한 아이였다.
그 여울은 지금도 많은 것들을 의무적으로 외면한다. 사람, 시간, 그리고 자신의 감정까지도.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한 꺼풀 너머에 존재했고, 필연적으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버릇처럼 스스로를 시험하곤 했다.
양손이 내려갔다. 일정하게 울렁이는 목을 움켜쥐고,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끌어올렸다. 목의 중심에 있는 울대뼈. 그곳을 노려야 한다. 머릿속으로 뇌까리며 가죽을 더듬었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우뚝 튀어나온 지점에 다다랐다.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여기.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사정없이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내리찍었다. 파들거리는 팔뚝 위로 핏줄이 두드러졌다. 곤두선 치아가 꽉 다물렸다.
쿠릉. 잔뜩 성이 난 천둥이 고막을 찢었다. 치뜬 차유신의 눈에 어느새 눈동자를 드러낸 우태원이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천둥 뒤의 고요처럼 맞물렸다. 우태원의 입매가 호를 머금었다.
“나 죽일 거예요?”
차유신은 담담하게 답했다.
“응.”
우태원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면 이걸로는 부족해요.”
소파에 늘어져 있던 손이 다가왔다. 목을 감은 차유신의 손가락을 지분거리다가, 느릿느릿 손목을 감았다.
“여기보다 밑쪽에 꽂고, 더 조여야죠.”
코치하듯 어루만진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 정도로 내가 죽겠어요? 선배.”
이를 악문 차유신의 손가락이 강고해졌다. 두꺼운 피부가 꿰뚫릴 듯 움푹 팼다. 우태원의 고개가 덜컥 넘어갔다. 차유신이 입에서 부들거리는 으름장이 샜다.
“뒤져. 이 개새끼야.”
쾅!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안을 울렸다. 백야처럼 환해진 시야가 흡족하게 눈초리를 접은 우태원을 담았다.
오르가즘 직전처럼 황홀한 표정이었다.
“빨리….”
발작하듯 턱을 떤 우태원의 눈이 뒤집혔다. 달뜬 한 마디가 귀를 옭맸다.
“죽여줘요. 선배.”
차유신의 목에 핏대가 섰다. 정체불명의 분노를 씹어 먹듯, 어금니를 잘근거리며 한계까지 엄지를 쑤셔 박았다. 허억. 우태원의 입이 달싹였다. 흰자위만 남아 덜덜거리는 눈알이 보였다.
“아주 행복하지? 내 손에 뒈지니까.”
차유신이 나직이 조롱했다. 우태원은 미약하게 끄덕였다. 말할 기운을 잃은 중에도 휘어진 눈초리가 여전했다. 차유신의 입 안에서 천천히 혀가 굴러갔다. 크게 전율한 우태원의 고개가 꺾였다. 차유신이 속삭였다.
“그래서 안 돼.”
창 너머에서 파열음이 죽어갔다. 차유신은 허리를 젖혔다. 가죽을 찢어버릴 양 억누르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왜….”
황망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눈이 풀린 채 목을 울컥거리는 우태원이 보였다. 차유신은 가만히 손을 옮겼다. 우태원의 주머니에 다다른 손가락이 안을 뒤적였다. 딱딱한 쇠붙이가 잡혔다.
“이대로 네가 뒈지면 나만 손해야.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니, 우리끼리 해결을 봐야지.”
쇠붙이를 빼낸 차유신이 날을 세웠다. 그대로 자신의 목에 가져간 뒤, 우태원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그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차유신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움직일 힘 없지? 그러니 움직이지 마.”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오른쪽 목에 박혔다. 차유신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아?”
목소리가 한층 느른해졌다.
“널 좋아하기 때문이야.”
곧 단호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잘 봐. 내가 신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운 물질이 목을 파고들었다. 새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튀었다. 우태원이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차유신은 그를 비웃으며 팔을 늘어뜨렸다. 역할을 마친 쇠붙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고개가 몽롱하게 넘어갔다. 쿠웅. 비상등처럼 번쩍이는 시야에서 빨간 방울들이 폭죽처럼 흩어졌다. 차유신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솔직할 수 있어서.
어머니의 조언대로 본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차유신은 온몸이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
헤아릴 수 없는 시간, 깊은 물속에 잠겨있었다. 이따금씩 섬광과도 같은 빛이 뇌리에서 번뜩였는데, 그러고 나면 곧 잠잠한 어둠이 찾아왔으므로 차유신은 노곤하게 휴식에 몰두할 수 있었다.
태어나 누린 가장 완벽한 휴가였다.
가끔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건 권헌이나 진무원, 한수현과 같은 의원실 사람들이기도 했고 정진원이나 신인대와 같은 국회 선배들이기도 했다. 때로는 국회에도 국내에도 없는 박신회가 와 말을 걸었고, 박원락과 같은 대학 친구가 곁에서 수다를 떨어주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다.
담배 아직도 안 끊으셨어요?
새빨간 꽃 그림이 담긴 액자를 보며 어머니는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방 안을 떠도는 누나들의 싸구려 샴푸 냄새가 이불 냄새처럼 포근했다. 앞에 우뚝 선 차유신이 혀를 찼다. 어머니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뗐다.
담배가 뭐 어때서 그러니.
몸에 나쁘잖아요.
너도 피우면서 뭘 그래.
어머니가 끊으면 저도 끊을게요.
됐어. 나는 절대 안 끊어.
어머니가 단칼에 거절했다. 차유신이 지겹다는 양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득거린 어머니가 담뱃재를 떨며 물었다.
개는 잘 있니?
까만 개요? 죽었잖아요.
죽었나?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가 턱을 괴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차유신의 눈망울이 뿌옇게 물들었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양 담배만 빠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그에 대한 기억이 돌연 가마득했다.
개가 죽은 게 아니었던가.
모르겠어요. 이따가 퇴근하면서 한번 살펴볼게요.
어디를.
그 교회 있잖아요. 사도동 입구에 있는 거. 매번 거기서 마주쳤거든요.
차유신이 열심히 설명했다. 어머니는 의미 모를 고갯짓만 했다. 그 담담한 낯을 올려다보던 차유신이 돌연 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교회가 아직도 있나. 못 본 지 2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울아.
차유신은 반사적으로 답했다.
네. 어머니.
어머니가 깔깔거렸다.
왜 네가 답을 해?
차유신이 버벅거렸다.
그야 당연히….
난 울이한테 얘기한 건데.
담배 끼운 손가락이 내려갔다. 그대로 재떨이에 처박고 난 그녀가 일어섰다. 이내 저벅저벅 걸어 차유신을 지나쳐갔다.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뚫린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친숙하게 맞잡은 그녀가 차유신에게 곁눈질을 했다.
너 여전히 두려운 게 많구나.
차유신의 턱이 덜컥거렸다. 어머니가 조곤조곤 덧붙였다.
왜 아직도 네가 누군지를 몰라.
차유신이 말꼬리를 흐렸다.
저는 그런 게 아니….
무시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아 든 채 등을 보였다. 이내 문을 열어젖히고는, 새까만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지고, 고적해진 공간에서 차유신은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두어 번 눈꺼풀을 감았다 뜨고 나니 돌연 사위가 새하얀 빛에 잠겼다. 꽃을 담은 그림도 보이지 않았고, 누나들이 쓰는 샴푸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전한 무(無)였다.
그 허전한 세상 속에서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차유신의 얼굴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빛을 등진 커다란 실루엣은 명명백백한 암흑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차유신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긴 피로를 녹이듯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가눴다. 자신을 주시하는 실루엣을 꼿꼿하게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른한 명령이 머리를 울렸다.
라이터 가져와. 담배 피우게.
상대방이 부드럽게 끄덕였다.
네. 선배.
*
“입 열어보세요.”
가물가물한 시야에 먹구름 같은 것이 떠다녔다. 굳어있던 입술이 조금씩 틈을 만들었다. 주변이 술렁였다. 큼, 소리를 낸 상대방이 좀 더 다가왔다. 먹구름이 선명해졌다.
“눈 조금만 더 떠봅시다.”
하얀 라이트를 거둔 그가 눈가를 만져왔다. 지친 눈꺼풀을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그래봤자 완전하지 않았다. 속눈썹이 연신 무기력하게 흘러내렸다. 부연 망막에 주억거리는 의사 가운 차림의 중년 남자가 걸렸다.
“의식이 잘 회복됐네요. 다행입니다.”
몸을 세운 남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하. 탄식한 여자 하나가 주저앉았다. 몇몇 남자가 부리나케 그녀를 부축했다. 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운열아! 수현이 챙겨라, 어서.”
“네. 형님.”
점점 오롯해지는 눈망울에 익숙한 얼굴들이 담겼다. 한수현, 김운열, 진무원, 윤재희…. 많이도 왔다. 냉소적으로 뇌까린 차유신의 머리가 돌아갔다. 간단한 거동인데도 버거워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몸 자체가 워낙 무거워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물 가져와. 목말라.”
“알겠습니다.”
남자가 신속하게 냉장고 쪽을 향했다. 차트를 끄적거린 의사가 차유신을 힐긋했다.
“날이 경동맥을 비껴갔습니다. 특별한 손상은 없습니다만, 43시간을 내리 주무셨으니 좀 뻐근하실 겁니다. 적지 않은 출혈을 한 탓에 며칠간 기운도 없을 거고요. 한동안은 병상에 누워계시고, 잠이 오면 편하게 주무세요. 한 시간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차트를 내려둔 의사가 이불을 고쳐 덮어줬다. 이내 정중하게 꾸벅했다.
“의원님의 사적 의료기록은 철저한 보안 아래 있습니다.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습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명함 한 장이 차유신의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병원장 정수원입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이동했다. 하얀 종이에 박힌 새까만 글자들 중 일부가 눈에 띄었다. 제일정병원장 정수원. 정수원, 정수원. 소리 없이 곱씹던 차유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신진화당 정진원의 동생이 아닌가.
발길을 돌린 그가 또 다른 의사와 함께 나아갔다. 병실 문을 열고는, 조심조심 닫으며 사라졌다. 안이 조용해지자마자 한수현이 벌떡 일어섰다. 다짜고짜 차유신에게 달려들어서는 착, 소리 나게 어깨를 쳤다. 울분에 찬 외침이 튀어나왔다.
“이 또라이 새끼야. 죽고 싶어? 죽고 싶어서 이랬어?”
“야, 수현아. 그만 좀.”
곁으로 다가온 진무원이 난처해했다. 씩씩거리는 한수현을 일별한 차유신이 제 어깨를 주물렀다. 능청스러운 혼잣말이 나왔다.
“아이고. 어깨 아파 죽겠다.”
“지금 장난이 나와?”
“수현이 좀 쉬게 하자.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한 것 같다.”
차유신이 고갯짓을 했다.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한수현이 턱을 경련했다. 차유신이 그녀의 팔을 다독였다.
“그리고 죽고 싶었던 적 없어. 그냥 충동적으로 철없는 짓거리 한 거야.”
“차유신.”
“이제 별일 없을 테니 들어가서 쉬어. 무원이 형도. 재희하고 운열이도.”
어조가 한층 노곤해졌다.
“좀 쉬고 싶네. 조용하게.”
적막해진 병실 안에서 진무원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 짧은 생각을 마친 그가 의원실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낸 뒤 먼저 등을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진무원의 뒤로 윤재희, 그리고 한수현을 부축하는 김운열이 따라붙었다.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진무원이 보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나는 삼십 분 후에 다시 올 거야. 허튼짓하지 마.”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진 보좌관님.”
문이 닫혔다. 이제야 조용하네. 읊조린 차유신이 눈을 깔았다. 기다렸다는 듯 기운 볼에서 찬기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위를 확인했다. 몸을 낮춘 남자가 차유신을 보고 있었다.
“물, 가져왔습니다.”
아랫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멍해진 차유신을 보며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나갈까요? 의원님.”
시트에 늘어져 있던 팔뚝이 들썩였다. 무작정 올라간 손이 남자의 얼굴을 덮었다. 헤매듯 더듬다가, 왼쪽 눈을 가린 안대에 다다랐다. 헐떡이는 언어가 터져 나왔다.
“너, 눈…. 괜찮….”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의원님.”
“한번 봐봐.”
“보여드리는 건 좀 그런데요.”
권헌이 난색을 표했다. 전율에 사로잡힌 손목을 매만진 그가 한숨을 쉬었다. 곧 나긋나긋 입을 열었다.
“정진원 의원님 도움으로 이 병원에서 무사히 1차 수술 치렀습니다. 당분간 입원해야 하는데, 의원님이 같은 병원에 입원한 걸 알고 잠깐 병실에서 나온 겁니다.”
“눈 다친 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의안을 맞춰야죠. 다행히 이쪽 병원에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맞춰주겠다 했습니다. 의안 시술까지 포함해 앞으로 삼 개월은 지속적으로 병원을 오가야 하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그 자체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안해. 괜히 나하고 우태원 때문에….”
얼굴을 감싼 차유신이 탄식했다. 고개를 저은 권헌이 보다 상체를 끌어내렸다. 차유신의 이마에 훈기가 스쳤다.
“전 정말로 괜찮습니다. 의원님.”
속눈썹이 서서히 곤두섰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은 진심이었다. 차마 할 말이 없어 시선을 떨구는 차유신을 보며, 권헌이 갸웃했다.
“안대 차고 있는 모습이 의원님 보시기에 많이 흉할까요?”
“왜 그런 걸 물어.”
“의원님께서 지금 저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 같아서요.”
조금은 초조한 목소리였다. 차유신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한번 웅크렸다 펼친 손이 권헌의 안대를 쓸며 미끄러졌다. 간신히 가라앉힌 대꾸가 흘러나왔다.
“아니. 전혀. 여전히 훌륭하네.”
권헌의 입매가 길어졌다.
“감사합니다.”
병실 문이 열렸다. 서너 명의 정장 차림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가장 앞에 있는 이가 익숙했다. 차유신이 알은 체를 했다.
“서재길 실장.”
서재길이 구십 도 각도로 몸을 굽었다. 뒤에 있던 남자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몸을 세운 서재길이 다가왔다. 커다란 화분을 든 뒤편의 남자 중 하나가 창가를 향했다. 창틀에 있던 비슷한 생김새의 화분에 다다라, 기존의 것을 치우고 새것을 뒀다.
“의식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컨디션은 괜찮으십니까.”
서재길이 예의 바르게 질문했다. 뚫어져라 보던 차유신이 대뜸 몸을 앞으로 뺐다. 서재길이 주춤했다. 개의치 않고 귓가까지 입을 가져간 차유신이 물었다.
“김후준은 어떻게 됐어.”
서재길의 목을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숨을 고르고 난 그가 천천히 차유신과 눈을 맞췄다. 침착한 대답이 찾아들었다.
“잘 해결됐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여유 되실 때 뉴스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입을 다문 서재길이 물러났다. 멀거니 올려다보던 차유신이 부쩍 서슴거렸다. 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달싹이던 차유신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사람이 생각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꽤 솔직해진 줄 알았는데.
왜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보지 못하는 건지.
“이만 가주시죠.”
서재길을 힐긋한 권헌이 경고했다. 크게 가슴을 부풀리고 난 서재길이 고분고분 몸을 틀었다. 소모적인 신경전에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서재길이 발을 내밀었다. 역운회 조직원들이 줄줄이 그를 따랐다. 막 문을 열어젖힌 서재길이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심상한 시선이 창틀을 훑었다.
“화분을 교체해야 하거든요.”
문이 닫혔다. 차유신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정처 없이 흘러간 눈길이 창틀에 걸렸다. 성인남자 상체만 한 크기의 화분이 햇볕을 쬐고 있다. 하나하나 뜯어보던 눈이 문득 멍해졌다. 사람의 피를 머금고 피어난 듯 빨갛게 만개한 꽃. 세상의 그 어떤 붉은 것보다 완벽한 붉음을 자랑하는 꽃.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방에서 본 액자 속 그것을 빼다 박았다.
“우태원 의원은 대국민당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단조로운 한 마디가 귀를 스쳤다. 흠칫한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뒷짐을 진 권헌이 착 가라앉은 말을 이어갔다.
“다만 김후준 의원을 잃은 마당에 우태원 의원의 자리까지 비울 순 없다며 대국민당 지도부가 반려했고, 우 의원은 병가라는 명목 아래 단기 휴직 중입니다.”
보고를 마친 권헌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말라붙은 질문이 건네졌다.
“그걸 지금 왜 얘기하는 거지?”
“의원님께서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권헌이 들숨을 삼켰다.
“다만 여기까지입니다.”
그의 어투가 딱딱해졌다.
“이 이상 우태원과 관련한 보고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차유신의 머리가 넘어갔다. 나른하게 벽에 기댄 채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하지 마.”
권헌의 어깨가 움칠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아까의 화분을 머금은 눈망울이 녹녹해졌다. 권태로운 한 마디가 병실을 메웠다.
“남의 입 통해 듣는 것, 아무 의미 없어.”
차유신의 눈초리에 힘이 들어갔다. 새빨간 꽃이 그런 차유신을 감시하듯 마주 봤다.
*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게 사람이야. 하고 싶은 걸 억지로 포기하는 게 사람이고. 그럴 자신이 없어? 그럼 애초에 사람이 되지 말았어야지. 대놓고 인간미만의 삶을 택했어야지.”
엄한 목소리가 병실을 갈랐다. 차유신은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천장을 봤다. 새하얀 평면을 타고 물방울 같은 빛들이 굴러다녔다.
“이게 가당키나 하냐는 얘기야. 제 발로 공천신청서 접수하고, 면접 봐서, 국회 입성한 놈이 어찌 이렇게 경솔한 행동을 해? 이게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처사가 아니면 대체 뭐야. 어?”
훈계가 버럭 고조됐다. 천장의 광채가 깨지듯 번졌다. 관자놀이에서 이동한 손이 윗눈썹을 쓸며 흘러내렸다. 교수로부터 지적받는 일은 대학을 떠나며 같이 졸업한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전혀 아니었다. 국회의사당에서 고개만 돌리면 눈 마주치는 게 교수 출신 영감들이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고. 정신과 의사하고 면담도 했고, 우려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라는 소견도 전달받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그저, 뭐.”
정진원이 미간을 좁혔다. 한숨 쉰 차유신이 고개를 바로 했다.
“충동적으로 사소한 자해를 한 겁니다. 생각보다 정도가 커지긴 했지만, 목숨을 버릴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저 어떤 놈인지 선배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정진원이 팔짱을 꼈다. 뜬금없는 질문이 나왔다.
“너 학과 어디야.”
“정치학과입니다. 아시면서 묻습니까.”
“학교 다닐 때 문학했어?”
“설마요.”
“종교는.”
“무교입니다.”
“애인은.”
“그만하시죠.”
차유신이 진저리를 치며 손을 내저었다. 정진원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관찰하듯 차유신을 주시하다가, 곧 그만두자는 양 팔을 풀었다. 몸을 벌떡 일으킨 그가 병실을 둘러보며 뇌까렸다.
“정수원 원장에게 얘기해뒀어. 차유신의 컨디션 회복에 전력투구하라고. 최대한 빨리 퇴원할 수 있도록 해. 지금 당 내부적으로 많이 바빠. 너도 알다시피, 시기가 시기다.”
발을 뻗는 정진원을 따라 세 명의 의원이 움직였다. 전부 신진화당 지도부 멤버들이었다. 다만 당연히 함께일 줄 알았던 신인대가 없다. 물끄러미 보던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정진원의 소매를 잡고는, 넌지시 물었다.
“우리 대권 준비는 어떻게 돼가는 겁니까.”
차유신의 눈망울이 오롯해졌다. 말없이 내려다보던 정진원이 헛기침을 했다.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손목을 감았다. 그대로 끌어내린 그가 답했다.
“그건 퇴원하고 나서 얘기하지.”
정진원이 등을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뒤를 지도부 멤버들이 따랐다. 창가 앞에서 대기하던 권헌이 그들을 향해 꾸벅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서는 정진원의 뒤에서 한 의원이 고개를 돌렸다. 권헌을 골똘히 응시하다가, 돌연 질문을 건넸다.
“자네는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 와중에 여기서 차 의원을 모시는 건가?”
몸을 곧추세운 권헌이 응수했다.
“네. 다쳤다고 해봐야 눈뿐이고, 무엇보다 의원님을 모시는 게 제 의무이기 때문에….”
“자네 이름이 뭐지?”
“권헌입니다.”
“혹시 고향이 어떻게 돼.”
“서울입니다.”
“어려서부터 내내 서울에만 있었어?”
“어릴 때는….”
뜸을 들인 권헌이 중얼거렸다.
“잠시 거제에 있었습니다.”
의원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생각에 잠긴 듯 입 안에서 혀를 굴리다가, 곧 단조로이 주억거렸다.
“그렇구만.”
몸을 튼 그가 마지막으로 나섰다. 빠르게 고요해진 병실 안에서 권헌이 숨을 몰아쉬었다. 곁눈질을 한 차유신이 입을 오므렸다.
권헌이 거제에도 있었구나. 처음 알았다.
*
일주일이 흘렀다. 뉴스에서는 대국민당의 ‘만년 2인자’로 불리던 공형우가 대선 경선 출사표를 던졌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국회 입성 초기에는 이재하에게 밀리고, 다음에는 김후준에게 밀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빛을 보지 못한 인물이다. 임팩트는 없지만 캐릭터가 안정적이다 보니 무난하게 지도부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신진화당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언론에서는 신진화당의 첫 경선 후보로 신인대를 점쳤지만, 그 신인대가 묵묵부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진원을 비롯한 지도부에서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그로서도 답답할 것이다.
결국 신인대가 초강수를 뒀다. 기자단 백브리핑을 통해 “신진화당 지도부가 상당히 경직돼 있다”는 말을 흘렸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며 지도부를 압박한 셈이다. 정진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신인대 의원이 지나치게 행동파다”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로 논란을 종료했다.
그리고, 역현호에 김후준의 시신이 떴다. 경찰은 부패한 시신을 부검해가며 사망원인 조사에 나섰지만 뻔한 결과만 나왔다. 타인에 의해 10회 이상의 자상을 입었으며, 목까지 잘린 것으로 보아 원한 관계에 의한 타살이고, 범인은 면식범이 분명하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경찰은 CCTV 분석 결과와 각종 증언을 토대로 김후준이 평소 자신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던 역운회 조직원과의 다툼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냈다. 다만 용의자로 지목된 조직원들이 해외로 도주한 터라 추적이 쉽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꽃 이름이 뭐지?”
일곱 번째 화분이 오던 날의 오후, 차유신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막 창틀에 화분을 둔 역운회 조직원이 흠칫했다. 차유신은 말없이 지면 중간쯤에 새겨진 제목을 일별했다.
우태원-차유신 동시 병가…‘양대 젊은 피’ 부재에 여·야 속앓이
미적거리던 서재길이 답을 꺼냈다.
“포인세티아라는 꽃입니다.”
“포인세티아?”
“서구권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장식용으로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입을 다신 서재길이 말을 이었다.
“구 영미권에서는 붉은색이 악(惡)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준다 믿었는데, 이 꽃을 부적처럼 쓴 게 계기가 돼 성탄절 상징화가 됐다고 합니다.”
차유신의 입에서 비소가 터졌다. 그래, 악으로부터의 보호. 어찌 보면 납득할 만한 얘기다. 우태원이 그런 걸 따져가며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의도가 있었다면.
이 꽃은 우태원이 차유신을 위해 그은 일종의 안전선인지도 몰랐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화분이 교체되는 걸 확인한 서재길이 뒷걸음질을 쳤다. 차유신은 유유히 손 인사를 했다. 돌아선 서재길과 역운회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입구를 향했다. 권헌은 그들의 뒤통수를 석연치 않게 노려봤다.
지잉. 시트에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유신의 시선이 내려갔다. 액정에 빼곡하게 들어찬 검은 색 들자들. 일전에 정진원과 함께 병실에 방문한 신진화당 지도부 의원의 문자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국회에 뜻이 없는 모양이야. 하지만 차 의원도 얘기했다시피 거기에 꽂아두면 무조건 당선되는 배경을 타고났어. 이런 인재는 놓치면 안 돼. 부족한 부분이야 차 의원이 메이드해 주면 되고….
“의원님.”
조심스러운 한 마디가 찾아들었다.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어.”
“신문 더 가져다드릴까요?”
“신문?”
“그건 다 보신 것 같아서요. 다른 걸 가져다드릴까 하고.”
“괜찮아.”
“그럼 또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필요한 것.”
차유신이 읊조렸다. 권헌이 진중한 눈빛을 보냈다. 묵묵하게 이동한 손가락이 액정을 두드렸다. 문자 속 몇몇 글자가 손톱과 마찰했다. 대선, 캠프, 청년정책연구소, 공천…. 적지 않은 시간, 글자를 곱씹고 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권 비서.”
“네.”
권헌이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차유신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너 출마할래?”
권헌의 낯이 멍해졌다. 다물린 입매가 불안정하게 더듬거렸다. 방황하듯 차유신과 신문을 번갈아보던 눈길이 곧 시트 위의 핸드폰에 걸렸다. 또 한 번 지잉, 울리는 액정을 확인한 그가 알았다는 양 눈을 깔았다. 씁쓸한 언어가 건네졌다.
“얘기 들으셨습니까.”
“할 건지, 말 건지만 말해.”
“의원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차유신이 긴 숨을 내쉬었다. 건조하게 맞물린 입술 틈으로 단호한 음성이 샜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해야지. 나 같으면 진작 했어.”
차유신의 눈초리가 꼿꼿해졌다.
“넌 나가기만 해. 당선은 내가 시킬 테니까.”
권헌의 턱이 미동했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다가, 발을 뺐다. 조금은 무력해진 고개가 숙여졌다. 떨리는 호흡과 함께 등줄기를 세운 권헌이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퇴청하겠습니다.”
차유신을 보지도 않은 그가 몸을 틀었다. 이내 성큼성큼 발을 뻗어가며 입구를 향했다. 단숨에 문을 열어젖히고는,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차유신은 혼자가 됐다. 고즈넉한 공간에서 권헌이 남기고 간 발소리가 먼지처럼 맴을 돌았다.
“본인 얘기하는 게 참 힘들어. 말하는 입장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입장도 그렇고.”
뇌까린 차유신이 양반다리를 했다. 벽에 기댄 채 축 몸을 늘어뜨리고는, 새빨간 포인세티아를 주시했다.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어쨌거나 하긴 해야 하는 거잖아. 말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 별 신통할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끼리.”
어깨를 으쓱한 차유신이 앞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 탈탈 털어대다가, 죽 위로 쓸어 올리면서 눈을 치떴다. 빨간 꽃 더미 안에서 희미한 이채가 번뜩였다. 차유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거기서 지켜만 볼 게 아니라, 이만 나와서 나에게 직접 욕을 쳐들어. 이왕 볼 거면, 값을 치러가면서 보라는 얘기야. 알았어? 우태원.”
*
8일째가 되던 날, 권헌은 차유신의 병실에 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신 최도현과 민아영이 방문해 조만간 중견기업의 2금융사 보유금지법이 다시 본회의에 상정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후에는 박원락이 와서 시시껄렁한 수다를 떨다 갔다.
그리고 이재하가 나타났다.
“이야. 병실 좋네. 여기는 특실 중에서도 특실 아니야? 역시 형제 중에 의사 있는 게 최고야. 정진원 선배가 갑자기 부러워지네. 우리는 사 형제가 전부 법대 나왔거든.”
느긋하게 들어온 이재하가 집 구경을 하듯 병실을 둘러봤다. 차유신은 얼어붙은 채 눈을 깜박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게 이재하가 맞는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조신희 회장의 핫라인을 통해 한 서른 번의 전화 내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가, 갑자기 등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긴장한 목소리가 나왔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이재하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담배 줘 봐.”
“환자가 무슨 담배입니까.”
“거짓말 치지 마. 네가 목 따인 것 수술 좀 했다고 안 피울 놈이야?”
이재하가 이기죽거렸다. 나 참. 탄식한 차유신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바로 담배와 라이터가 나왔다. 건네받은 이재하가 한 대를 빼 입에 물었다.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고는, 차유신에게 줬다.
“자. 먼저 해라.”
병실 안은 당연히 금연이지만, 이곳에서는 종종 예외가 허용됐다. 마지못해 담배를 받은 차유신이 필터를 물었다. 역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이재하가 긴 연기를 뿜었다. 그의 눈초리가 느른해졌다.
“몸은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운동해. 몸 보전하는데 운동만큼 좋은 게 없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선배보다 운동은 많이 할 겁니다.”
“너 요즘도 복근 있어?”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있긴 합니다.”
차유신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이재하가 대뜸 손을 뻗었다. 복부 쪽 환자복을 쓸고 난 그가 시시덕거렸다.
“새끼. 아직 안 죽었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차유신이 진지하게 물었다. 이재하가 안연히 답했다.
“근처 지나가다가, 네 생각나서 왔지.”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아. 그거?”
이재하의 낯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벌어진 입술 틈에서 수증기 같은 것이 번졌다. 고개를 젖힌 그가 뇌까렸다.
“미안해서.”
“누구한테요.”
“조 회장.”
몽글몽글 피어오른 연기가 도넛 모양을 형성했다. 훅 불어 흐트러뜨리고 난 이재하가 몸을 바로 했다. 이어지는 음성에서 누기가 묻어났다.
“나 때문에 나락으로 갔어. 애초에 정치싸움에 관심이 없던 여자야. 나하고 친분 생기면서 그쪽에 눈을 뜨게 된 거고.”
“조 회장이 죽은 건 선배 때문이….”
“그런 세세한 건 상관이 없어.”
이재하가 손사래를 쳤다. 나직한 한 마디가 시트에 내려앉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잖아? 그러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요인이 내가 돼.”
차유신의 낯이 굳었다. 달싹이던 입이 끝내 다물렸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이 정도의 관계인 줄 몰랐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재하가 말을 돌렸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이재하의 담배 끝이 차유신을 가리켰다.
“상황은 대충 들었어.”
“최도현 선배한테서요?”
“아니. 정진원 선배한테서.”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였다. 차유신의 동공이 커졌다. 이재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놀랄 일이야?”
“정 선배와는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습니다.”
“좋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아. 한때 옆 지역구였던 적도 있고. 교수 출신이라 꽉 막히긴 했어도, 사람 자체는 나이스한 편이잖아. 무엇보다 이 바닥에 완전한 적이 어디에 있어? 물론 완전한 동지도 없지만.”
이재하가 협탁 위의 종이컵에다 재를 떨었다. 하얗게 흩어지는 부스러기를 응시하던 그가 주억거렸다.
“그거 한번 해보자고. 유신이 네가 총대 멘 여의도 재생 프로젝트.”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프로젝트가 있었습니까. 처음 들어봅니다.”
“정진원 선배는 그렇게 표현하던데.”
이재하가 낄낄거렸다.
“당내 선후배간 커뮤니케이션이 엉망이구만.”
“아니,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선배께서는 대국민당 사람이시잖습니까. 심지어 핵심 인물이고. 그런데 이런 걸….”
“너 아직 얘기 못 들었어? 난 이 년 후에 이 바닥 떠.”
이재하가 못을 박았다. 차유신이 주춤했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실천하는 건 다른 문제다. 많은 국회의원이 은퇴 결정을 번복한다. 국회라는 땅은 교활하지만 달콤한 늪과도 같아. 한번 발을 담은 이상 제 발로 헤어 나오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재하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말라붙은 입술이 희미한 언어를 흘렸다.
“여의도에서 사시사철 살다 임종도 못 지키고 떠나보낸 우리 마누라에 이어 조 회장까지 그렇게 되는 걸 봤는데, 너 같으면 계속 여기에 있고 싶겠니?”
이재하가 완연한 무표정이 됐다. 차유신은 가만히 시선을 비꼈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
오후에는 찾아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서재길 및 역운회 조직원이 방문해 화분을 교체해간 게 전부였다. 차유신은 내내 혼자 있었다. 간병인이 있긴 했으나 차유신이 의도적으로 꾸준히 외출을 보냈으므로 별 의미가 없었다. 호젓한 공간에서 차유신은 반듯하게 누워 허무를 곱씹었다. 사막을 걷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시간이었다.
밤은 잔잔한 모래폭풍처럼 찾아왔다.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 명도가 꽤나 짙다는 걸 인지했을 때 차유신은 씻고, 침대에서 잘 준비를 했다. 불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댔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다. 생각이 많았다.
권헌, 이재하, 여의도 프로젝트. 무엇보다.
줄줄이 이어지는 나선처럼 생각할 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차유신은 견고한 덩굴에 얽매여 아득한 미래를 헤매고 있었다.
탁. 등 너머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이어지고, 정수리에 신선한 훈기가 스쳤다.
“의원님.”
차유신의 머리가 돌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청년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차유신은 가만히 끄덕였다.
“그래.”
“말씀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해.”
권헌이 버거운 숨을 골랐다. 늘어진 그의 팔뚝이 미미하게 떨렸다.
“의원님께서 들은 것, 다 맞습니다.”
“내가 뭘 들었지?”
차유신은 모르는 척 반문했다. 권헌이 주먹을 쥐었다. 그 와중에 몸의 진동이 그대로였다. 머무적거린 그가 입을 뗐다.
“아버지께서 거일실업 창업주시고…. 다만 일찍이 어머니와 이혼 절차를 밟아 저만 어머니 쪽에 가게 돼, 아버지와 함께 산 날은 얼마 안 됩니다. 당시 거일실업이 아주 작을 때라서,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얘기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딱히 말씀을 안 드린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 전 병실에 방문한 윤재필 의원이 아버지와 친한 지인이라, 제 얼굴만 보고 바로 상황을 파악하신 듯합니다. 아버지가 윤재필 의원에 아내 쪽으로 간 아들이 국회에서 근무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합니다.”
지은 죄를 읊듯 경건한 언어였다. 차유신은 말없이 시트를 두드렸다. 툭, 툭. 일정한 마찰음에 복잡했던 상념 중 하나가 정리됐다. 그래, 거일실업.
권헌이 차유신에게 얘기한 적 없는 그의 배경.
거제시 일학동에 본사를 둔 그곳은 본래 적당한 크기의 섬유공장이었다. 초기에는 딱히 유명한 회사가 아니었다. 같은 지역에 대기업 산하 섬유기업이 있었다. 일학동 및 인근 경제가 그 기업 하나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
문제는 그 기업이 부도가 나면서부터다. 완전히 일학동 경제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그때 나선 것이 거일실업의 창업주 백인서 회장이었다. “이렇게 일학동을 무너뜨릴 수 없다”며 거액의 빚을 내가며 해당 섬유기업을 인수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일찍 해외 유학을 다녀온 백인서 회장은 이후 영미권과 유럽을 대상으로 다양한 수출계약을 체결하며 위기에 내몰린 기업을 회복시켰다. 현재는 섬유업계 부동의 1위 기업이다. 자연히 일학동 경제는 활기를 띠었고, 그 일대에서 백인서 회장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제 일자리와 지역경제에 이바지한 인물이니 당연했다.
윤재필로부터 “권헌을 다음 총선 때 ‘거제을’에 출마시키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차유신은 오 분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일단 이번 대선 캠프에 청년정책연구소를 만들어 감투를 하나 주고,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노출시킨 다음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푸시 하는 걸로 하시죠. 캐릭터가 좋아 초선 때만 거제에 두고 바로 서울로 옮겨도 먹힐 놈입니다.
차유신이 쉽게 동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권헌은 현재 백인서와 호적을 달리했지만, 친아들인데다가 윤재필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백인서가 끔찍이 아낀다. 그 지역에서 출마하면 백인서의 지지를 등에 업고 높은 확률로 당선된다.
유능한 보좌진 출신이라 국회 사정에 빠삭하고, 부족한 부분은 차유신이 채워주면 된다. 성실하며 우직한 이미지라 이후 서울에 올려도 바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높다.
“윤재필 선배하고 연락했어?”
“했습니다.”
“윤 선배는 뭐라고 했고, 넌 뭐라고 답했는데.”
“아버지와 미리 대화 나누고 연락 주셨더라고요. 아버지가 푸시를 약속했으니 한번 그쪽 지역구에서 데뷔해보라고. 무엇보다 차유신 의원이 당선되게끔 잘 메이드해 줄 거라고…. 물론 전 싫다고 했지만요.”
“괜찮은 조건 아니야? 그게 왜 싫어.”
“당연히 싫지 않겠습니까.”
권헌의 톤이 탁해졌다. 맥없는 손이 시트를 짚었다. 울적한 음성이 병실을 메웠다.
“저 이 의원실 떠나기 싫습니다. 의원님.”
권헌의 등이 울렁였다.
“애초에 의원님 하나 보고 들어와서 버틴 국회입니다. 의원님 곁에 없는 게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권헌.”
“그런데 의원님은 아무렇지 않게 저에게 출마하라 하시고….”
권헌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축축했다. 울컥거림이 짙어졌다.
“얘기해주십시오. 정말로 저 버리려 하셨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가 자못 쓸쓸했다. 빤히 올려다보던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죽 상체를 펴고는, 권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담담한 대답이 나왔다.
“버리려고 한 적 없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반짝이는 외눈박이 눈망울이 보였다. 차유신은 그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너는 날 버려.”
“의원님.”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네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어.”
나아간 손이 권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일렁이던 눈에서 끝내 맑은 물이 떨어졌다. 차유신은 그의 귀까지 입을 가져갔다. 울고 있는 그에게서는 이슬을 머금은 풀 냄새가 났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남들보다 밑에 있는 사람이야. 방석집 마담의 아들로 태어났고, 다음에는 문제적 사회기업가의 가짜 아들 행세를 했고, 다음에는 뭐…. 지옥에서 발버둥 치다 운이 좋아 땡잡은 삶이라고 보면 돼. 나는 그래.”
단출하게 인생사를 정리한 차유신이 팔을 옮겼다. 권헌의 목덜미를 가붓하게 감고는, 꽉 끌어안았다. 권헌은 울컥거리면서도 고분고분 자신의 몸을 내줬다. 등을 두드린 차유신이 속삭였다.
“확실한 건, 난 네가 원하는 이상형이 되지 못한다는 거야. 네가 나를 떠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야.”
펼친 손바닥이 권헌의 등에 밀착했다. 둥둥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차유신이 다정하게 말을 맺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네가 원하는 건 거기서 얻을 수 있어.”
권헌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또 한 번 눈물을 떨굴 뿐이었다. 빈 눈에서 흐른 핏물이 겹쳐, 차유신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차유신은 제 과오를 받아들이듯 잠자코 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
권헌을 보내고 십 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또 문이 열렸다. 왜 다시 왔을까. 조금은 머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며 차유신은 머리카락을 추슬렀다. 대놓고 일어나지 않는 차유신의 곁으로 상대방이 다가왔다. 빤히 벽을 보던 차유신의 눈매가 움칠했다. 아. 올라간 손이 가슴을 덮었다. 거세지는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감을 바싹 곤두세우는 동물적인 냄새가 났다.
“오라고 하셔서.”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얼어붙은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조금조금 선명해지는 실루엣이 밤의 환영 같았다.
“왔습니다.”
머리카락과 엉킨 손가락이 삐걱거렸다. 어금니를 깨문 그가 서둘러 손을 거뒀다.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진 후 불안해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숨을 고른 차유신이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밤에 오라고 한 적은 없는데.”
나지막한 답이 돌아왔다.
“제가 선배를 찾는 건, 언제나 선배가 의사를 드러낸 직후입니다.”
고저 없는 언어를 들으며 차유신은 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손길이 닿았던 그곳이 아직도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왜 이제야 왔지?”
차유신이 물었다. 병실 안의 공기가 사뭇 싸늘해졌다. 우뚝 서 있던 그가 제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이마를 짚고 난 손이 가슴으로 내려갔다. 적적한 언어가 안개처럼 번졌다.
“죄송합니다. 선배.”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차례로 건드린 손이 멎었다. 그건 성호였다.
“하지만 제 죄를 사하지는 마십시오.”
꽉 뭉쳤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저 같은 걸 좋아하지도 마십시오.”
참혹한 한 마디가 귀를 울렸다.
“선배께서는 이 이상 더럽혀지시면 안 됩니다.”
바람 소리가 났다. 외풍에 부딪힌 창이 덜컹거렸다. 안의 온도가 부쩍 낮아졌다. 무표정하던 차유신의 입매가 비틀렸다. 비아냥거리는 한 마디가 나왔다.
“무섭구나, 너.”
우태원의 턱이 움칠했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오늘만 알던 인생에 갑자기 내일이란 게 찾아오니, 갑자기 두려워?”
우태원의 뒤꿈치가 지르밟혔다. 부정도 긍정도 잃은 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애써 밤을 연막 삼는 그를 보며 차유신은 조금 웃었다. 너무도 예상한 반응이라 차라리 허무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우태원을 잘 알고 있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우태원의 모든 욕망은 사실 신기루다.
가져본 일에 익숙한 사람만이 의연하게 원하는 것을 얻는다. 상실만 배운 사람은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꿈만 꾼다. 그것이 자신에게 걸맞은 옷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태원은 수없이 차유신을 욕망하면서도 결국 모든 것을 허상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는 차유신을 원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이었다.
그런 우태원에게 차유신의 고백은 공포일뿐이다. 우태원이 지닌 상실의 굴레는 차유신이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와서도 안 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차유신이 먼저 발을 밀어 넣었다. 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우태원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잡아봐.”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우태원은 거친 호흡만 골랐다.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이젠 나 만지지도 못해?”
“죄송합니다.”
우태원의 울대뼈가 들썩였다. 극한의 긴장에 사로잡힌 그의 허리가 뻣뻣해졌다. 차유신이 혀를 찼다.
“일단 끄트머리만 잡아봐.”
가벼운 손짓을 했다. 머뭇거리던 우태원이 끝내 손을 뻗었다. 다가온 손가락이 차유신의 손끝을 스쳤다. 곧 움츠려졌다. 차유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잡아. 제대로.”
뜸을 들인 끝에 약지 끄트머리가 잡혔다. 우태원의 손목을 타고 전율이 느껴졌다. 차유신이 또 지시했다.
“그대로 내려와서, 손바닥 붙여.”
약지가 간질거렸다. 미적거리는 손이 살결을 훑으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곧 후끈한 손바닥이 차유신의 것과 겹쳤다. 접착한 면에 물기가 찼다.
“펼치고.”
우태원의 손가락이 확 드러났다.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다음으로 팔.”
꾸물거리는 진동이 차유신의 손목을 감았다. 이내 느릿느릿 팔뚝을 쓸며 올라왔다. 차유신의 어조가 곤로해졌다.
“어깨 잡고.”
손은 계속해서 이동했다. 환자복을 훑으며 기어오르다가, 어깨를 덮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끌어올려졌다. 꽤 가까워진 우태원이 보였다. 한쪽 무릎이 시트를 딛고 있었다.
“신발 벗어.”
우태원이 고분고분 구두를 발에서 뺐다. 툭, 하며 가죽구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이 재촉했다.
“좀 더 가까이.”
머리맡에 짙은 음영이 졌다. 굵은 팔뚝이 차유신의 얼굴 밑으로 들어와 벽을 짚었다. 자못 후끈해진 호흡이 느껴졌다. 차유신의 눈이 깔렸다.
“내 눈 만져봐.”
꿀꺽거린 우태원이 어깨에 둔 손을 옮겼다. 차유신의 눈가에 가져가서는, 속눈썹의 수를 헤아리듯 어루만졌다. 저릿한 감각에 차유신의 눈이 찡긋거렸다.
“코.”
잘 교육받은 애완동물처럼, 우태원은 곧이곧대로 따랐다. 미간을 누른 손가락이 제법 높은 경사를 타고 흘러내렸다. 콧등에 도착한 뒤 끄트머리를 지분거렸다. 별것 아닌 손길이 괜히 나른했다. 차유신의 어깨가 늘어졌다.
“입.”
우태원이 갑자기 물었다.
“이 손으로 해야 합니까.”
차유신이 대충 답했다.
“힘들면 다른 손으로 해.”
우태원이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요. 다른 손도.”
말이 끝나자마자 덜컥 뒷덜미가 채였다. 차유신의 고개를 고정시킨 우태원이 급하게 얼굴을 끌어내렸다. 숨 쉴 틈도 없이 입술이 덮쳐졌다.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반사적으로 올라간 손이 우태원의 어깨를 쥐어짰다. 개의치 않은 우태원이 잡아먹을 듯 입술을 빨아들였다. 압박감에 사로잡힌 턱이 후들거렸다.
입맞춤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키스였다. 그건 입으로 하는 교미에 가까웠다. 허겁지겁 들이닥친 입술이 차유신의 입술을 위아래로 빨고, 곧 혀를 뿌리까지 집어넣은 채 안을 헤집었다. 소스라친 점막을 타고 단 물이 샘솟았다. 우태원은 갈증 난 것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 추웁, 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귀를 뒤흔들었다.
“허억, 잠깐… 숨 막….”
완전히 밀착한 입술 탓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버둥거린 차유신이 우태원의 어깨에 손톱을 찍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우태원이 하울링을 하는 짐승처럼 등줄기를 떨었다. 가까스로 헐떡임을 그친 뒤, 차유신의 입술 틈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미약하게나마 빈 공간이 생겼다.
“이제 숨 쉬어요.”
“하아… 씨발, 누구 맘대로…. 흐으.”
“미안해요.”
우태원이 눈을 맞췄다. 조곤조곤한 언어가 다가왔다.
“그러게 제게 가까이 오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죠. 선배.”
서너 모금가량 숨을 삼켰을 때, 다시 입이 틀어 막혔다. 불쑥 혀부터 집어넣고 점막을 핥아대는 키스에는 더 이상 욕정이 없었다. 그건 애걸이었다. 차유신은 그만 호흡에 대한 갈구조차 잊고 넋을 놓아버렸다. 무성하게 들어찬 열기에 목구멍이 눅눅해졌다.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기조차 숨을 죽인 시간, 우태원은 죽음 같은 키스를 이어갔다. 치열 하나하나가 녹아버린 듯 무감각했다. 차유신은 손을 옮겨 우태원의 목덜미를 잡았다. 금방이라도 멎을 양 맹렬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우태원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다.
“전 선배가 무서워요.”
타액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헤집어대고 난 입술이 떨어졌다. 사뭇 낮아진 음성이 불안정했다. 차유신은 잠자코 눈꺼풀을 가눴다.
“하지만 선배를 만지지 못하는 건 더 무서워요. 그래서 녹화 장면으로만 선배를 접해야 했던 지난 열흘이 공포스러웠어요.”
미동하는 그의 낯에 달의 조영이 붉게 내려앉았다.
“다 선배 잘못이에요.”
곧 검게 물들었다.
“어떻게 나 따위를 좋아할 수가 있죠?”
차유신의 눈동자가 미끄러졌다. 흘러간 시선이 꽉 움츠러든 그의 주먹에 다다랐다. 꿈틀거리는 뼈대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차유신의 입이 열렸다.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차유신의 손이 내려갔다. 전에 없이 단정하게 목을 조인 우태원의 셔츠칼라를 잡고는, 만지작거렸다. 힘줄이 견고한 우태원의 팔뚝이 쿨렁거렸다.
“그래서 나는 책임이라는 걸 지려고 해.”
툭. 가장 윗단추가 풀어졌다. 우태원이 놀라 몸을 뺐다. 차유신은 달래듯 그의 목을 쓸며 손을 옮겼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목의 오른편을 눌렀다. 부드러운 재질의 천이 만져졌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다만 이런 방식은 책임이라고 할 수 없어.”
확 내려젖힌 칼라 너머에서 하얀 거즈가 나타났다. 색색거린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은 말없이 눈길을 피했다.
“스스로 목 따보니까 어때.”
나지막한 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랬어요.”
“아프지 않았어?”
“아프지 않았어요.”
초점 없는 눈이 차유신을 담았다.
“볼 때가 훨씬 더 아팠어요.”
차유신이 엷게 웃었다.
“나도 할 때는 별로 안 아팠어.”
“경동맥을 스쳤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죠.”
우태원이 뇌까렸다. 차유신의 입이 멈칫했다. 점점 냉해지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왜 그랬어요?”
우태원의 동공이 새까매졌다. 차유신은 최대한 예사롭게 답했다.
“별 의미 없었어. 죽으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
“선배는 정말 죽으려고 했어요.”
대뜸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어깨를 쥐어짰다. 짤막하게 신음한 차유신이 목을 움츠렸다. 우태원의 눈 밑이 사납게 경련했다.
“내가 그때 선배 허벅지를 밑에서 당기지 않았다면, 그래서 선배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선배는 제대로 경동맥을 겨눴을 거예요.”
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선배는 분명히 칼끝으로 경동맥을 가늠하고 있었어요. 그걸 내가 봤어요.”
식도를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흐리멍덩해진 머리가 꺼떡거렸다. 차유신은 약에 취한 듯 벽에다 뒤통수를 붙였다.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래. 경동맥 노린 거 사실이야.”
눈이 감겼다. 멸등한 시야에서 오래된 페이지 속 한 장면이 펼쳐진다. 역운회 남자들에게 끌려가던 어머니. 조잡하고 비좁은 그 방석집 복도에서, 차유신은 직감했다. 어머니가 죽을 거라는 걸.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걸.
차유신은 멀어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봤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삼 개월간 어두운 방석집에 갇혀 기다렸으며, 그러다 어머니의 시신이 떴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홀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 흘러가야 하는 운명에 순응하듯, 그런 걸 했다. 여섯 살 차유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참으로 많다고. 그건 사람의 영역 너머에서 찾아오는 일이며, 그래서 그저 관조하거나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그걸 인지한 순간, 차유신은 죽음이 무감각해졌다.
“내가 죽어서 네 성서가 불타고, 그래서 네가 새롭게 태어나길 원했어. 충동적인 선택이지만 당시에는 진심이었어.”
차유신의 눈이 뜨였다.
“그만큼 내가 널 좋아해. 우태원.”
우태원의 낯이 식었다. 차유신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말라붙은 그의 입술 틈에서 고저 없는 한 마디가 샜다.
“정말로 무서운 얘기네요.”
차유신이 키득거렸다.
“오줌 지릴 정도로 무섭지?”
우태원이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 여기서 선배를 강간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요.”
차유신이 웃음을 거뒀다.
“그건 곤란해.”
“왜요.”
“말했잖아. 네 섹스 좆같다고.”
“키스는요.”
“키스도 좀. 기본적으로 너는 모든 교접이 사람 같지 않아. 짐승 새끼랑 하는 기분이야. 지금까지 너 같은 여자들만 만났어?”
“저 같은 건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대체로 좋아했습니다.”
“좋아는 했겠지. 좆이 크니까.”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빤히 보던 우태원이 물었다.
“사실 거짓말이죠?” “뭐가.” “제 섹스하고 키스 좆같다는 거.”
힐긋한 차유신이 협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우태원의 목이 조금 붉어졌다. 차유신은 모른 척 협탁에 놓인 수첩 내지를 뜯고는 펜으로 글자를 적었다. 내일 오전 7시, 자로초. 메모를 마친 종이를 우태원에게 들이밀었다. 우태원이 영문도 모르고 받았다.
“거기에 적힌 시간, 장소에 맞춰서 나와.”
“갑자기 이건 왜….”
“말했잖아. 책임을 지겠다고. 나는 지금부터 너를 책임질 거야. 대신 너도 내 명령에 따라 책임을 져.”
“무슨 책임 말씀이십니까.”
“그간 석일태를 등에 업고 국회 개판 만든 것에 대한 책임.”
차유신의 속눈썹이 빳빳해졌다. 우태원이 멈칫했다.
“김후준 죽었다고 다가 아니야. 이번에 출마 선언 한 공형우 비롯해 김후준 라인이 아직 국회를 장악하고 있어. 그중 일부가 석일태와 로비로 엮인 인물들이고. 그거, 네가 책임지고 정리해.”
“그러면.”
우태원이 초조하게 운을 뗐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뜸을 들인 우태원이 덧붙였다.
“저에게 키스해주실 겁니까.”
차유신의 시선이 제대로 우태원과 맞물렸다. 입 안에 달큼한 침이 고였다. 날연한 대꾸가 나왔다.
“너 하는 거 봐서.”
우태원이 천천히 주억거렸다.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5권에 이어서.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