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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장. 소년 (29/48)

8.5장. 소년

28.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1월.]

“하여간 중심이 없어요, 중심이. 내 당이지만 나도 가끔 한숨이 나와. 뭣도 모르는 사람은 이재하, 이재하 하는데. 대체 언제적 이재하입니까. 아주 그냥 10년 전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커피잔을 내려놓은 중년 남자가 혀를 찼다. 맞은편에서 훅 담배 연기를 뿜은 석일태가 느긋하게 끄덕였다.

“그러게요. 이렇게 떡하니 김후준 의원님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눈치도 없나 봅니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스푼을 들었다. 동그랗게 뭉친 셔벗 덩어리에 꽂고는 조각을 냈다. 그중 가장 커다란 것을 떠 입에 가져갔다. 달디 단 얼음 입자는 넣자마자 바로 녹았다.

“어머. 웬일로 셔벗을 다 드시네요.”

우태원의 테이블로 다가온 서빙 직원이 살갑게 웃었다. 비워진 아침식사 접시를 하나하나 거둬가는 그녀를 우태원은 곁눈질로 봤다.

“오늘은 좀 먹고 싶어서요.”

“항상 디저트는 생략하셨잖아요. 석 회장님이나 석 사장님은 한 번도 디저트를 패스한 적이 없는데, 이사님은 아예 입에도 안 대시기에 단 걸 싫어하나 했죠.”

테이블을 정돈한 직원이 생글거렸다. 가슴에 단 명찰에 ‘SDB팰리스 이지수’라고 적혀있다. SDB팰리스. SDB그룹에서 운영하는 역현구 유일의 특급호텔. 석일태는 항상 이곳에서 조식을 먹는다. 그리고 석재경이나 우태원도 종종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직원들은 세 명의 식사 취향과 식사 속도를 고려해가며 최적의 응대를 했다. 이 호텔 안에서 석일태, 그리고 그가 아끼는 두 청년은 그 어떤 VIP보다도 중요한 VIP였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창밖에서 꽁꽁 언 나뭇가지가 나부꼈다. 우태원은 말없이 쓸쓸한 조경을 관조했다. 미세먼지가 짙은 탓인지, 희뿌옇게 물든 공기 때문에 바깥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우태원은 농몽한 풍경 속에서 보고 싶은 광경을 찾는다. 겨울이 아닌 가을에서, 현재가 아닌 23년 전에서.

춥지도 덥지도 않던 그해의 가을, 3세 우태원이 타고 있던 세단의 차창이 깨졌다. 창을 깨뜨린 소년은 뭐가 그렇게 분한지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우태원은 그저 그 소년의 빛나는 얼굴만을 홀린 듯 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입 안에서 반짝이는 아이스크림 조각을 발견했다.

저게 맛있나. 우태원은 궁금했다. 사실 단 건 좋아하지 않았다. 우종진이 사주는 초콜릿이나 사탕을 제대로 먹어본 일이 손에 꼽혔다. 우태원은 단 것이 오히려 썼다. 자연히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심이 갔다. 저 아이스크림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자신도 한번 먹어볼까 싶었다.

소년의 광채에 잠식된 순간, 우태원은 소년의 모든 것이 다 옳아 보였다.

“그래도 솔직히 박신회 의원 있을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말이죠.”

저쪽에서 한 중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김후준이 미세하게 어금니를 씹었다. 화들짝 놀란 또 다른 남자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 사람은 이제 끼면 안 되지. 여의도 떠난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엄연히 김후준 의원님 계신 자리에서….”

“정 회장님.”

싸늘한 호칭이 홀을 갈랐다. 짐짓 경직된 두 남자가 김후준을 봤다. 석일태는 꽤나 흥미롭다는 투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김후준이 목소리를 깔았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체를 들이미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김후준이 점잖게 옷매무새를 고쳤다. 굵은 침을 삼킨 남자가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곧 과장되게 허허실실했다.

“나 참…. 내가 어제 공 치면서 너무 세게 깨졌나 봐. 스윙 습관을 바꾸든지 해야지. 아무튼 어제 충격으로 아직도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예 클럽을 바꿔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래요. 참고하겠습니다.”

테이블이 바로 화기애애해졌다. 우태원은 스푼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텅 빈 디저트 접시를 멀찍이 치웠다. 일어나는 우태원의 곁으로 아까의 직원이 따라붙었다.

“벌써 가세요? 티는 안 드시고요?”

“괜찮습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입고 있던 재킷을 가다듬은 우태원이 직원을 힐긋했다. 담담한 한 마디가 나왔다.

“그리고 저 이사 아닙니다. 역운회도 아니고요.”

멈칫한 직원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네에…. 죄송합니다.”

그대로 등을 보인 우태원이 뚜벅뚜벅 걸었다. 여전히 대화가 한창인 테이블 앞에 서서 꾸벅했다. 석일태와 김후준, 그리고 중견기업 회장 두 명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석일태가 인자하게 물었다.

“이제 나가니?”

“예. 면접이 좀 이른 시간에 잡혀서요.”

“그래. 잘하고 오렴.”

우태원의 등을 두드린 그가 김후준을 일별했다.

“김 의원님께서 얘기를 잘 해두셨단다. 채용에 큰 걸림돌은 없을 거다.”

김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형식상의 면접이니 힘 빼고 임해.”

우태원이 보다 깊숙이 몸을 굽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

의원회관 1층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애매한 시간대라 크게 북적이지 않았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잔을 쥐었다 놓으며 창 너머의 국회 조경을 감상했다. 아까 호텔에서 본 조경에 비해, 조금 더 밝았다.

시계를 봤다. 면접까지는 이십 분가량이 남았다. 일어나기까지 십 분. 속으로 가늠하며 턱을 괴었다. 무심코 이동한 눈길이 두어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걸렸다. 파란 털모자를 쓴 어린 남자아이가 혼자서 발장난을 치고 있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공청회는 그냥 취소하라니까? 시간이 너무 빡빡해. 아무리 맞춰 가도 한 시간은 늦어. 별로 중요한 자리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포기를 못 해?”

저편에서 짜증스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크아웃 잔 두 개를 챙긴 그녀가 곁에 선 남자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든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중요하지. 순수 과학인들이 지방에서 지원제도 부족 문제 두고 토론하는 자리인데.”

“안 중요해. 당장 너 말고 섭외된 영감도 없고. 대충 각이 안 나와?”

“그러니까 내가 간다는 거야.”

잔을 가볍게 머금은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안 가니까 내가 가는 거야. 문제 있어?”

말을 잃은 여자가 입을 오므렸다. 이내 기다란 머리카락을 넘기며 학을 뗐다.

“됐다. 그만두자. 차유신 고집을 누가 꺾어.”

“최대한 신속히 이동해야 하니까 KTX 끊어. 비행기 말고. 그게 제일 빠를 거야.”

“네에. 그러시죠.”

괜히 빈정거리고 난 여자가 주춤했다. 차유신도 덩달아 멈췄다. 시선들이 저편의 어린아이에게 쏠려있었다. 손을 꼬물거리던 아이가 그들을 마주 봤다.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우신 아저씨다!”

반색하는 외침이 제법 컸다. 여자가 배를 잡고 웃었다. 너보고 아저씨란다, 심지어 이름도 틀렸어. 깔깔거리는 그녀를 차유신이 흘겨봤다.

“내가 왜 아저씨야. 29밖에 안 됐는데.”

“29면 아저씨야.”

“그럼 나하고 비슷한 넌 아줌마야?”

“야 이 새끼야.”

여자가 사납게 차유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태연하게 허리를 주무른 차유신이 아이를 향해 나아갔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달가워하며 일어났다. 단숨에 아이를 안아 든 차유신이 물었다.

“나 어떻게 알아.”

“티비.”

“TV 말고 신문 봐. 눈 버려.”

차유신이 훈수를 뒀다. 뒤편의 여자가 갸웃했다. 그거나 저거나 아냐? 차유신이 아이를 고쳐 안아가며 또 물었다.

“엄마는.”

“일하러.”

“엄마가 여기서 일해?”

“아니.”

“그럼 아빠가 여기서 일해?”

“아니.”

“여기엔 어떻게 왔어.”

“앉으러 왔어.”

아이가 해맑게 답했다. 차유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생각을 마친 그가 몸을 틀었다. 카페를 둘러보다가, 막 지나가던 남자를 불렀다.

“야, 김혁주.”

“어이구. 형님. 오랜만입니다.”

남자가 넉살 좋게 뛰어왔다. 우태원도 아는 대국민당 어느 의원실의 보좌진이었다. 바로 그의 품에 아이를 안겨준 차유신이 지시했다.

“민원인 애 같은데, 길을 잃은 모양이야. 네가 책임지고 부모 찾아줘.”

“갑자기 이렇게 맡기고 가시는 겁니까.”

남자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그럼 십 분 후에 보좌진 면접 잡힌 내가 하리?”

“아니, 그래도…. 저도 일정이란 게 있는데.”

“네 일정이 뭔데.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러 가는 거?”

“아, 형님. 좀.”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가볍게 그의 얼굴을 건드린 차유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애 부모 찾아주고 나서 나한테 보고해라. 안 하면 죽는다.”

남자가 골치 아프다는 양 이마를 짚었다. 그대로 돌아서는 차유신의 뒤통수에 대고 애가 손을 흔들었다.

“차우신 아저씨 잘 가!”

막 한 걸음 내디딘 차유신이 도로 돌아왔다. 깊숙이 몸을 낮춰 애와 눈을 맞추고는, 조곤조곤 말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잘 따라다녀. 어?”

“응.”

“한눈팔지 말고. 그러다 부모님하고 영영 헤어지는 거야.”

“응.”

“알았으면 여기다 뽀뽀해.”

차유신이 볼을 내줬다. 애가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흡족히 얼굴을 거둔 차유신이 애의 머리를 쓸었다. 잠잠하던 그의 눈매가 무디게 녹았다. 헤아릴 수 없는 열망과 절망을 빛무리로 둘러싼 듯, 완벽한 눈웃음이었다. 우태원은 넋을 놓은 채 그 미소를 봤다.

빨려 들어가듯 하나의 현상만을 주시하던 그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눈이 멀 정도로 현란한 광채가 시야를 압도하고, 반사적으로 가늘어진 눈에 아주 그리운 피사체가 담겼다. 우태원과 마주친 23년 전의 그 소년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순간적인 반가움에 몸이 일어날 듯 들썩였지만 우태원은 곧 그만뒀다. 신기루는 빠르게 사라졌고 그는 떠나고 있었다. 우태원의 그리움 따위는 한낱 겨울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빛은 자신을 등졌다.

일렁이는 새까만 커피의 표면 속에서 무표정한 우태원의 낯이 부서졌다.

*

문이 열린다. 들어간다. 아까 카페에서 봤던 여자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지나간다. 의미심장한 한 마디가 귀를 스친다. 합격. 곧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내실에는 우태원과 차유신만이 남는다.

“저쪽 소파에 앉아요.”

턱짓을 한 차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태원은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응접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 본 채 앉았다.

면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 문신을 보여주기 위해 탈의를 하고, 이후에 또 몇 번의 대화를 나눴다. 그사이 똑딱거리는 분침은 반 바퀴나 이동해있었다. 우태원의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그는 내내 우태원을 응시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진지하게 그를 분석했다. 늘 올려다보기만 하던 태양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각인한 순간이었다.

“출근은 다음 주 월요일, 오전 6시.”

단호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우태원이 고개를 바로 했다. 머리를 비스듬히 한 차유신이 구둣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우태원은 돌연 한기를 느꼈다. 차유신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는다. 빛이 사라져간다.

달콤한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자마자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내 집 앞으로 와. 앞으로 매일.”

멍해진 뇌리에 또 다른 한 마디가 찾아들었다. 재차 고개를 든 우태원의 울대뼈가 다부지게 곤두섰다. 즉각적으로 끄덕였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 6시. 그의 집 앞으로 간다. 머릿속에 메모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오전 6시, 우태원은 차유신의 집 앞으로 간다.

그에게 기억되기 위해 간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우태원은 일과를 반복할 것이다. 태양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고도 자신을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지속할 것이다. 그 이유에 애정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에게 그런 이름으로 각인되기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므로 우태원은 차라리 증오와 경멸을 떠올렸다. 그것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우태원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허황되지 않은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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