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12월.]
「‘SDB금융 해체법’ 정무위 통과…‘위기의 석일태’ 칩거 지속」
“여당의 치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정안은 신진화당의 푸시 덕에 원활한 위원회 통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정동의 한식당 자로초 룸 안에서는 긴장 어린 공기가 맴돌았다. 오늘 자 신문 1면을 띄운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보며 민아영이 말을 이었다.
“당장 내일 본회의 통과가 관건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가’를 확보할 수 있는 의석수가….”
“됐어. 그만. 앉아 봐.”
최도현이 손짓을 했다. 화들짝 한 민아영이 슬금슬금 자리로 이동했다. 십여 명의 의원들이 심각하게 턱을 괴거나 팔짱을 꼈다. 차유신은 말없이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일명 대국민당 회기동 모임. 연령대는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현재는 탈당한 박신회를 믿고 따르는 젊은 의원들이 주축이며, 목적은 하나.
김후준 라인을 무너뜨리고, 대국민당을 정상화하는 것.
“너무 조급해하지 맙시다.”
차유신이 입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못 본 척 민아영이 건네준 페이퍼를 들췄다. 가장 상단에 있는 문구. ‘중견기업의 2금융사 보유 금지법 발의와 관련한 건’.
회기동 모임은 김후준이 SDB그룹 석일태 회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유신은 회기동 모임의 수장이자 정무위 위원인 최도현에게 해당 법안 발의를 제안했고, 최도현은 받아들였다. SDB그룹이 궁지에 몰리면, 자연스럽게 김후준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차유신에게 해당 법안 통과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김후준을 끌어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석일태까지 위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SDB그룹이 보유한 SDB금융에는 SDB저축은행을 비롯해 SDB캐피탈, SDB캐시 등이 속해있다. 석일태 및 역운회의 저금통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 법적으로 SDB금융이 폐지되고 금융관리위원회에서 해당 회사에 대한 정리 절차를 추진하면 석일태의 비자금 내역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건 당연지사다. 비자금 조성을 위해 유지해 온 SDB금융 중심의 계열사 간 순환출자 구조가 무너지는 건 덤이다.
물론 파급력이 큰 법안인 만큼 통과시키는 것도 쉽지 않을 터다. 특히 김후준이 극구 막아설 가능성이 높다. 차유신이 터뜨린 일명 ‘역운회 실소유주 스캔들’로 석일태와는 거리두기에 나선 상황이지만, SDB금융이 무너지는 건 별개의 문제다.
김후준이 석일태로부터 베트남의 한 마이크로 파이낸스 회사 지분을 선물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이 회사가 SDB금융 베트남 법인에 속해있다. SDB금융이 폐지되면 돈줄이 끊길 뿐 아니라 이 사실 자체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이재하 선배는 잘 지내십니까.”
차유신이 뜬금없이 물었다. 최도현이 의아하게 답했다.
“이재하 원내대표?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와. 그 선배는 더 이상 여의도 일에 관심이 없어. 김민재 선배만 다 키우면 빠질 거라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하고 다닐 정도니까.”
“그 선배도 한때는 박신회 라인이었죠.”
“뭐…. 그랬지. 박 선배가 양심선언하고 국회 떠난 뒤로 완전히 의욕을 잃어 이빨 숨긴 호랑이가 돼버렸지만.”
최도현이 혀를 찼다. 차유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스타검찰 출신 이재하. 전성기에는 김후준을 압도할 정도의 영향력을 자랑한 인물. 다만 최도현의 말처럼 자신의 스승인 박신회가 여의도를 은퇴한 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원내대표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발언이나 임무를 제외하면 딱히 나서는 일도 없다. 덕분에 김후준만 더 활개를 치는 꼴이 됐다.
언젠가부터는 검찰 출신 후배들만 다 육성하면 빠질 것이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그 기준이 되는 게 이재하의 고향 후배이자 검찰 후배인 김민재인데, 김민재가 3선에 성공하는 2년 4개월 후의 총선이 이재하가 말하는 잠정적 은퇴 시기다.
‘이재하 원내대표? 각별했지. 오해는 하지 말고.’
죽기 직전 새초롬하게 건네던 조신희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조신희의 사망 후 차유신은 그녀가 남긴 이재하 핫라인으로 몇 번인가 전화를 했지만, 이재하는 받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번호 자체를 해지하지는 않았다. 차유신은 전화할 때마다 늘 ‘부재중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이재하가 나서주면 참 좋은데. 차유신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김후준 만큼은 아니지만 이재하도 알음알음 대국민당 안에 구축한 본인 파벌이 굳건하다. 이재하가 사실상 김후준 라인에 흡수되며 서로의 라인이 엉켜버린 상황이지만, 이재하가 마음먹고 등 돌리면 그쪽은 따라온다. 회기동 모임도 김후준이라면 학을 떼지만 이재하는 어느 정도 신뢰한다. 합리적이며 머리가 좋고, 무엇보다 본인 사람을 잘 챙긴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재하가 참 대단해. 직장 생활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물론 너도 대단하지. 너 사람 관리하는 거 보면 가끔 그놈하고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는 얘기야.
박신회는 종종 차유신과 이재하를 비교했다. 사람 챙기는 것만큼 여의도에서 중요한 게 없다는 걸 강조할 때였다. 많은 국회의원이 그렇지만, 이재하는 다소 유별났다. 검찰 선배인 박신회를 따르기 위해 국회에 입성했고, 그 박신회가 국회에서 빠지자 의욕을 잃었고. 그러면서도 제 후배들을 챙긴다는 명목으로 원내대표 입지는 유지한다.
차유신에게 잡힌 페이퍼 끄트머리가 뜯겨 나갔다. 곱씹듯 반복해 종잇조각을 뭉쳤다. 그런 이재하가 조신희의 핫라인을 외면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재하와 조신희가 남녀 간 정을 통한 사이가 맞는지와 별개로, 그들은 적지 않은 정재계 인사를 공동 작업한 파트너다. 조신희는 명백한 ‘이재하의 사람’이다.
이재하가 조신희를 무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하시죠.”
생각을 마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최도현이 서둘러 잡았다.
“벌써 가게?”
“예. 일정이 있어서.”
“급한 거 아니면 식사라도 하고 가. 내가 대접할게. 요즘 너 워낙 고생이 많잖아.”
차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선배 말씀처럼 지금 워낙 일이 많아서요. 당장 내일모레 예정된 경찰청 행사 준비해야 합니다. 역현구에 설치하는 AI 모니터링 시스템 설명회가 그날이거든요.”
최도현이 아쉬운 듯 주억거렸다.
“어쩔 수 없지. 내일 결과가 어찌될지는 둘째치고, 어쨌거나 정무위는 통과한 기념으로 한잔 사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연말쯤 자리 한번 하시죠.” “그러자고. 이만 가 봐.”
최도현이 손 인사를 했다. 막 몸을 튼 차유신이 멈칫했다. 곧 다시 최도현을 보며 물었다.
“선배, 혹시.” “응.”
“이번 정무위 회의에서, 우태원은 별말 없었습니까.”
“특별한 얘기는 없었어. 다만.”
머리를 긁적이고 난 최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회의 끝나고 나서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이 법안 차유신이 세팅했냐고.”
“그래서요?”
최도현이 헛웃음을 쳤다.
“아니라고 하려 했는데, 답을 듣기도 전에 우태원이 자리를 떴어. 애초에 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처럼.”
곧 심드렁히 뇌까렸다.
“그 새끼는 그냥 네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프로세스는 간단합니다. 해당 CCTV는 폭행이나 교통사고, 절도 등 30여 개의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이를 인식하고 관할 팀에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이에 따라 신고 여부와 무관하게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며, CCTV 판독 결과를 토대로 정밀한 수사를 진행합니다. 경찰청은 이를 위해 30명의 ‘역현구 치안유지 TF’를 구성했으며….”
수사국장의 브리핑을 듣는 내내 정복 차림의 허대윤은 허리를 쭉 편 채 정면을 주시했다. 차유신은 그 옆자리에서 경청하는 연기를 했다. 저편의 사진기자들이 틈틈이 자신과 허대윤을 찍어대는 게 보였다. 옆에 있던 성윤일이 대뜸 불평했다.
“형. 행사 왜 이렇게 길어요?”
차유신이 심상히 대꾸했다.
“원래 정부 행사는 길어. 이거 2시간짜리인 거, 너도 사전에 얘기 들었잖아.”
“개발한 제가 나서서 설명하면 10분 안에 끝날 텐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절차에 시간을 쏟는 거예요. 기자들은 왜 저렇게 많이 왔고.”
성윤일이 투덜거렸다.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답답하면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 와.”
“화장실은 필요 없어요.”
성윤일이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빨리 사무실 가서 베타버전 모니터링이나 하고 싶어요. 이런 거 저하고 안 맞아요.”
차유신이 낮게 키득거렸다. 성윤일이 철없는 20대 청년이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그가 실력 있는 개발자라는 것과 별개로.
“대민일보 김하선입니다. 마감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잠깐 차유신 의원님께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수사국장의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외쳤다. 차유신이 뒤를 돌아봤다. 기자석에서 반쯤 일어난 젊은 여성이 보였다. 끄덕인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네. 말씀하세요.”
“해당 시스템, 역운회 감시용이라는 의혹이 있는데요. 다시 말해 역운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인 거죠. 역운회 데이터를 해당 시스템에서 따로 관리한다는 얘기도 있고요. 이거 사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역운회 조직원이라 해도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일반시민인 거잖아요. 국회의원과 경찰,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일반인을 범죄자 취급해도 되냐는 논란이 나옵니다.”
“일단 말씀하신 것처럼 역운회 감시용이 전혀 아니라는 점, 우선 강조드립니다.”
차유신이 여유로이 답을 꺼냈다. 기자석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길을 모아 왔다. 입매를 끌어올린 차유신이 남은 언어를 흘렸다.
“경찰청과 역현구청, 그리고 역현을 국회의원인 저는 역운회를 존중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한 우리의 소중한 시민이잖습니까. 핵심은 전국 최대 우범지역으로 꼽히는 역현구의 안전을 꾀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역운회를 비롯한 역현구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최첨단 수단입니다.”
아주 느긋하게, 유연한 거짓말로 못을 박았다.
“역운회 데이터를 따로 관리한다는 건 사실무근입니다. 이 시스템은 모든 역현구 시민을 평등하게 보호합니다.”
*
경찰청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캐럴송이 들려왔다. 우산을 편 성윤일이 차유신과 자신의 머리 위에 차양을 드리웠다.
“형. 이 근처에 형이 말한 수제 햄버거 맛있는 호텔 라운지 있지 않아요?”
“있긴 하지. 왜. 사줘?”
“네. 배고파요. 내가 형 때문에 그 시스템 완성한다고 삼 개월 내내 야근했어.”
칭얼거린 성윤일이 차유신을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가 준 차유신이 경찰청 정문을 나섰다. 맞은편에 펼쳐진 횡단보도 너머로 한 카페 안에 설치한 대형 트리가 보였다. 신호를 기다리며 성윤일과 나란히 선 차유신이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24일이요.”
스마트 워치를 본 성윤일이 답했다. 차유신이 피식거렸다.
“이브였구나.”
“무슨 이브요.”
“크리스마스이브.”
“아, 그러네요. 나도 방금 알았어요.”
“일 그만하고 연애를 좀 해.”
“형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성윤일이 약을 올렸다. 차유신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지잉. 주머니가 진동했다.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우태원. 뚜렷하게 적힌 글자를 머금고 차유신의 눈이 깜빡였다. 뚫어져라 응시한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에 대자마자 은은한 질문이 들렸다.
-시연회 잘했어요?
차유신의 고개가 기우뚱해졌다.
“안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비슷하죠. 최근 국회에서는 거의 본 일이 없으니까.
유독 커다란 눈송이가 머리맡에서 나풀거렸다. 우태원의 톤이 낮아졌다.
-최도현 선배 등이 발의한 ‘SDB금융 해체법’, 어제 국회에서 부결됐어요.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건 나도 알아. 나도 뉴스 봐.”
-하지만 선배는 포기하지 않겠죠.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대놓고 물어보지 않되, 차유신의 혐의를 은연중에 꿰뚫어오고 있다. 차유신은 흔쾌히 인정했다.
“어. 당연하지.”
눈송이가 앞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조금 시야가 불편해졌지만, 차유신은 굳이 걷어내지 않았다.
-오늘 설명회 연 역현구 모니터링 시스템도, 일부 반발과 무관하게 결국 도입할 거고요.
“자꾸 당연한 걸 묻네.”
-네. 당연한 거지만 물었어요.
그의 어조가 자못 느른해졌다.
-차유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굳이 물어봤어요.
머리카락을 타고 미끄러지던 눈송이가 조각났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고드름이 깨지는 것과 비슷한 파열음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가 결국 내 둥지를 전부 박살 낼 거예요.
깨진 눈송이가 차유신의 속눈썹을 덮었다. 시야가 한층 더 답답해졌다. 차유신은 역시 걷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전 그런 선배를 증오하지 못하겠죠.
눈꺼풀이 한번 달싹였다. 순식간에 녹아버린 눈송이가 속눈썹을 눅눅하게 적셨다. 차유신이 말했다.
“그냥 증오해. 그쪽이 너에게도 나을 거야.”
-생각해볼게요.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대답이었다.
-정말 생각만 하겠지만.
뚝. 물이 된 눈이 눈동자에 떨어졌다. 동시에 우태원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쯤 해야 할 인사가 있는데….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둘게요. 푹 쉬어요. 선배.
불현듯 신호등에서 요란한 알림음이 터졌다. 파란불로 바뀌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차유신의 시선이 떨어졌다. 통화가 끊긴 액정이 번쩍이고 있었다. 성윤일이 보채듯 차유신을 붙들었다.
“형. 신호 바뀌었어요. 가요.”
이끌린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던 차유신의 눈에 건너편에 정차한 검은색 세단이 들어왔다. 막 뒷좌석 문을 연 키 큰 남자가 잠시 자신을 주시했다. 차유신은 그만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사이에 펼쳐진 설풍이 무연한 설원처럼 가마득했다.
몸을 밀어 넣은 남자가 문을 닫았다. 바로 세단이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꼬리등을 곁눈질로 보던 차유신이 입을 벌렸다. 싸늘한 눈송이가 입 안에 핏물처럼 고였다. 그것을 느릿느릿 핥고 난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태원.
*
[대국민당 집권 5년 차, 3월.]
「‘대부’ 김후준 대권 출사표…”박현래 바톤 이어받겠다”」
두 개의 TV 화면에는 각기 다른 보도채널이 띄워져 있었다. 둘 다 김후준의 모습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헤드라인도 비슷했다. 김후준의 대권 출마 선언내용과 그에 따른 각종 정계 분석이 줄줄이 송출됐다.
“김후준이 아주 대담해. 남 눈치를 안 봐.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
쯧, 소리를 낸 신인대가 목을 젖혔다. 맞은편의 차유신은 묵묵하게 내실을 둘러봤다. 저편의 데스크 위에 ‘국회의원 신인대’라고 적힌 명패가 올라와있다. 원래는 ‘대표 신인대’였지만, 2개월 전 변경됐다.
해가 바뀌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여당인 대국민당과 제1야당인 신진화당 모두 대표 및 원내대표를 교체했다. 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대권 경선 출마를 둔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선택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출마를 원하는 이들은 갖가지 물밑 작업을 펼쳤다.
김후준에게는 그런 게 필요치 않았다. 대국민당의 대부로 불리는 그에게는 눈치를 볼 경쟁자도, 허락이 필요한 당 지도부도 없었다. 그래서 가장 빠르게 출사표를 던졌다. 이왕 출마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나서는 게 국민들에게 눈도장 찍기에 좋다. 기선제압까지 성공해 자신을 중심으로 한 대권 준비체제를 일찍이 완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정진원 선배가 참….”
신인대가 말꼬리를 흐렸다. 차유신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정 선배가 왜요.”
“틈을 안 줘. 대국민당에서 저러고 나오는데, 뭐가 그렇게 신중한지 컷오프 작업이 이상할 정도로 지지부진하단 말이지.”
신인대가 이마를 구겼다. 차유신은 긍정도, 부정도 삼간 채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와중에도 TV 화면은 계속해서 김후준을 내보내고 있었다.
신인대는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다. 자신 이외에 신진화당에 적합한 인재가 없다는 사실을 대놓고 표출한 적도 적지 않다. 그 같은 얘기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고개를 젓는다. 확실히 스마트한데다가 국민적 호감도도 나쁘지 않은 인물이지만, 내세울 만한 이미지가 없다. 김후준의 ‘대부’처럼 신인대의 이름 앞에 붙일 만한 마땅한 수식어가 없다는 얘기다.
신진화당 지도부의 핵심인 정진원이 후보군 압축을 지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내 대권 후보 1순위인 신인대에게조차 특별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정진원이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신인대 역시 그것을 간파했다. 그의 불안은 필연이었다.
똑똑. 내실 문이 두드려졌다. 들어와. 신인대가 보지도 않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한 보좌진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진원 의원님 방문하셨습니다.”
신인대가 벌떡 일어섰다. 차유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열린 문틈으로 정진원이 나타났다. 신인대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은 표정이었다.
다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잠깐 최홍진 방 가봐라.”
정진원이 신인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신인대가 당황해 물었다.
“최 선배 방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번 본회의 일정 관련해 논의할 게 있단다.”
“그거 전하러 오셨습니까.”
“어.”
칼같이 대꾸한 정진원이 차유신을 힐긋했다.
“유신이는 남고. 할 말 있다.”
마른침을 삼킨 신인대가 마지못해 재킷을 챙겼다. 곧 저벅저벅 내실을 벗어났다. 미지근한 기류가 감도는 방 안에서 정진원이 문을 닫았다. 곧 발을 옮겨 차유신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별일 없고?”
정진원이 물었다. 차유신은 바로 응답했다.
“네.”
“네가 만든 시스템은 아주 잘 돌아가는 모양이더라.”
“네.”
연거푸 수긍한 차유신이 눈을 굴렸다. 정진원은 저편의 TV를 보고 있었다. 차유신도 같은 곳을 봤다. 어느덧 김후준과 관련한 보도를 마친 채널이 이번에는 차유신의 얼굴을 내보냈다.
경찰-차유신, 치안유지 시스템 가동 한 달 만에 역운회 30명 검거…불붙은 ‘조폭과의 전쟁’
“난 아직도 네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 개를 잡으려면 자신도 개가 돼야 한다는 건 백정들이나 할 법한 사고야. 학자 출신이라 고지식하다 비웃어도 좋아. 하지만 내 신념은 변치 않아.”
“이해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결과지.”
정진원이 짙은 숨을 내뱉었다.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너 같은 백정이 승리하게끔 세상이 변하고 있어. 그러므로 결국엔 네가 옳은 거야.”
“선배님.”
“하지만 대통령은 조금 다른 문제지. 백정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대통령만큼은 선비여야 한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야. 백정을 위에 세우면, 그 국가가 백정이 된다.”
딱. 정진원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차유신의 동공이 흔들렸다. 죽 미끄러진 정진원의 손가락이 구석에 둔 신문 지면에 다다랐다. 윗부분에 커다랗게 김후준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정진원은 종이를 접어 김후준의 얼굴을 가렸다.
“김후준은 백정이라 안 된다.”
이동한 손이 반대편 면을 짚었다. 거기에는 신인대가 있었다. 김후준은 신인대의 얼굴도 덮었다.
“신인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안 된다.”
내실 안이 싸늘해졌다. 숨을 고른 차유신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하염없이 신문만 내려다보는 정진원을 응시하며, 진중한 질문을 꺼냈다.
“그럼 백정이 아닌 누가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박신회.”
차유신의 턱이 전율했다. 어느새 눈을 부릅뜬 정진원이 차유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호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박신회를 신진화당에 영입할 거다. 그리고 박신회를 경선 후보에 올린다.”
올곧은 손가락이 차유신을 가리켰다.
“박신회를 섭외하는 과정은 차유신 네게 일임할 생각이다.”
정신원의 눈이 빛났다.
“너는 대국민당에서 박신회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으니, 너만 한 적임자가 없겠지.”
*
“사랑하는 청장님께 이 실적을 바칩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수사1과장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오버하지 마, 새끼야. 수사국장이 일침했다. 곳곳에서 남자들이 낄낄거렸다. 허대윤은 흐뭇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리 차유신 의원님도 한 말씀 하시지 그래요.”
허대윤이 차유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테이블을 둘러싼 십여 명의 경찰이 차유신 쪽에 눈을 모았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술잔도 들지 않고 입을 뗐다.
“역운회 검거 30명 달성 축하드립니다.”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술자리에 경찰들은 적잖게 상기돼있었다. 그에 대조될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이 룸을 채웠다.
“앞으로 50명, 100명, 200명까지. 역운회가 해체할 때까지.”
차유신이 가볍게 꾸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수! 한 남자가 소리쳤다. 곧 득달같이 손뼉 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로 자리에 앉는 차유신의 어깨에 허대윤이 팔을 둘렀다. 곧 은근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이렇게 좋은 날, 젊은 친구가 축 처져 있으면 어떻게 해. 누가 보면 누구 죽은 줄 알겠어.”
솜털처럼 가벼운 너스레였다. 차유신은 말없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낮에 정진원이 한 말이 작살처럼 뒷덜미를 당겨왔다. 현기증이 났다.
스스로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떠난 인물을 어떻게 국회로 되돌린단 말인가. 심지어 경쟁 정당에.
“그냥 당 내부적으로…. 고민거리가 좀.”
“아. 알만하네. 슬슬 대선 시즌 다가오니 정신없지? 여기저기서 당 선배들이 도와달라고 난리일 것 아니야. 똑똑한 차 의원이 여기저기서 러브콜 받았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고. 하여간 욕심 많은 양반들…. 누울 자리 따져가며 누워야지 기회만 있으면 개나 소나 다 비벼보려 하고 말이야. 양심도 없이.”
허대윤이 비아냥거렸다. 차유신이 물었다.
“허 청장님은 중립이시죠.”
“응? 내가 왜 중립이야. 신진화당에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히 신진화당 쪽에 힘을 실어줘야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번에 출사표 낸 김후준은 청장님 고교 선배잖습니까.”
“아니, 그거야….”
허대윤이 딴청을 피우듯 얼굴을 긁적였다. 허공을 보며 뜸을 들이던 그가 대뜸 차유신의 팔을 휘어잡았다. 곧 몸을 낮추며 심각하게 귓속말을 했다.
“김후준 얘기 나와서 말인데.”
“네.”
“김후준이 우태원 작업할 것 같아.”
“그거야 그쪽이 4개월 전부터 호시탐탐 노려온 일 아닙니까.”
“아니. 그거 말고.”
깊은 탄식이 옆얼굴을 스쳤다.
“물리적으로 말이야.”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미간을 구긴 허대윤이 말을 이었다.
“작업은 하고 싶은데 잡을 건덕지는 없지, 그 와중에 대권 출마까지 굳혔으니 얼마나 초조하겠어. 사람이 욕심나는 게 많으면 불안한 것도 많아지는 법이거든. 석일태야 4개월 넘게 칩거 중이니 일단 둔다 쳐도, 계속 국회에서 마주치면서 신경 거스르는 우태원을 가만히 두고 싶겠냐고.”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달에 김후준 선배하고 술 먹다가 우태원을 죽여서라도 국회에서는 들어내야겠다는 얘길 들었거든. 술김에 그냥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람이 촉이라는 게 있잖아. 나로서는 찝찝한 거야. 그래서 우리 정보관 통해 김 선배 의원실 좀 파악해봤어. 아니나 다를까, 자기 보좌관 시켜서 꽤 비싼 청부업자를 섭외한 모양이더라고. 아니, 청부업자가 아니라 청부업체지. 팀이라 하더라고.”
“우태원이 어떤 놈인데, 그런 짓거리에 당할…!”
“나도 알아. 당할 놈 아닌 거. 그런데 이제는 당할 수도 있게 됐어.”
허대윤이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물리적으로 석일태, 우태원을 작업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 역운회 때문이야. 국내에서 가장 큰 조직폭력배를 배후에 둔 사람을 어느 간 큰 사람이 작업해?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잖아. 그 대단한 역운회가 하루가 다르게 줄줄이 경찰에 잡혀 들어가고 있으니. 자연히 김후준도 그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지. 따지고 보면 물리적으로 처리하는 것만큼 깔끔한 방법이 없거든.”
차유신의 심장이 뛰었다. 정진원이 했던 말이 새삼 머릿속을 들쑤셔왔다.
김후준은 백정이라 안 된다.
“내가 말을 안 하려다, 아무래도 찝찝해서 털어놓는 거야.”
허대윤이 이마를 짚었다. 차유신이 그를 쏘아봤다.
“뭐가 찝찝하단 겁니까.”
“차 의원은 안 찝찝해? 나는 찝찝해.”
허대윤의 목에 핏대가 섰다.
“우리가 너무 무리하게 역운회를 작업했어. 최소한 숨 쉴 틈은 줘가면서 했어야 하는데. 빠꾸도 없이 조직 하나를 통째로 날리려 하니 결국 뒤탈이 생기지. 우태원 의원 봐. 배지 하나 버리고 끝났을 일에 갑자기 목숨이 걸렸어. 차 의원은 느끼는 바가 없어?”
*
[대국민당 집권 5년 차, 4월.]
“형. 요즘 왜 이렇게 우리 사무실에 자주 오는 거예요.”
새빨간 스무디를 쭉 빨아들인 성윤일이 물었다. 차유신은 신경 끄라는 듯 손만 내저었다.
“시끄러워. 내가 사 온 거나 열심히 먹어.”
“아니. 음료수 사다 준 건 고마운데….”
성윤일이 사무실 안을 둘러봤다. 자신들을 힐끔거리는 10여 명의 직원들을 응시하다가, 차유신에게 귓속말을 했다.
“우리 직원 13명이에요. 근데 왜 12개만 사 왔어요.”
“윤일아.”
차유신이 성윤일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윽, 소리를 낸 성윤일이 빨대를 뱉었다. 차유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빨리 모니터나 전환하자. 응?”
주춤거린 성윤일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곧 차유신의 맞은편에 있는 20여 개 모니터의 채널을 변경했다. 이어 통제시스템 설정을 마치자, 바로 과거의 영상들로 전환됐다. 전부 우태원을 담고 있었다.
“형이 지시한 대로 우태원 의원만 감시하는 새 체계를 가동하고 있는데, 일주일 내내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설정값을 벗어나는 인물과 접촉하는 것도 보지 못했고, 차량접촉 사고와 같은 사사로운 이벤트도 발생하지 않았어요. 그저 우태원 의원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걸로 보여요.”
다시 앉은 성윤일이 스무디를 마셨다. 차유신이 눈살을 찡그렸다.
“역현구 내에서 외부인과 접촉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네. 없어요. 접촉하는 인물은 전원 본인 보좌진이거나 역운회예요. 일반시민을 일체 만나더라고요. 사무실에서 따로 접견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CCTV 안에는 담긴 바가 없어요.”
성윤일이 갸웃거렸다. 차유신은 말없이 턱을 괴었다. 변수가 발생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심지어 허대윤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성윤일에게 특별 감시 시스템 구축을 지시한 직후의 일주일 내내. 차유신으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허대윤이 파악한 게 맞다면, 김후준이 섭외한 청부업체가 우태원을 작업하는 장소는 반드시 역현구 안이다. 역현구만큼 인구밀도가 낮은 곳도 없고, 음습한 구석이 많은 곳도 없다. 모니터링 시스템이 가동하는 걸 알면서도 역운회가 끊임없이 역현구 안에서 활개를 치는 건, 이곳이 여타 서울 지역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기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법천지. 역현구를 설명하기에 그보다 적합한 단어는 없었다.
“형. 메시지 온 것 같은데.”
넋 놓고 앉아있는 차유신을 성윤일이 건드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유신이 테이블 위의 액정을 확인했다. 새하얀 창에 단정한 고딕체 글자가 찍혀있었다.
[박신회는.]
-신진화당 정진원.
씨발. 차유신의 목구멍으로 욕설이 삼켜졌다. 분연히 핸드폰을 끄고는 주머니에 처박았다. 몇 번이나 반복해 온 무능한 대답을 또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제는 여덟 번이나 아홉 번째였다.
박신회는 지금 그 누구에게도 응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국내에 없다.
몽골. 지금은 이혼한 박신회의 부인이 살아온 국가. 박신회는 청년 시절 몽골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가 전 부인을 만났다. 정치권에 입문할 무렵 이혼을 했지만, 이후에도 종종 몽골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자연풍경을 즐기며 아이들을 돕는 일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차유신이 알던 박신회의 연락처는 해지돼있었다. 그래서 일단 박신회의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한 통. 읽지 않았다. 두 통. 역시 읽지 않았다. 세 통, 네 통, 다섯 통. 메일은 점점 쌓여갔으나 단 한 번도 수신 알림은 뜨지 않았다. 이쯤 되면 못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안 읽는 거다.
더 이상 여의도와는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머리가 무거웠다. 저도 모르게 잘근거리며 손톱을 씹는 동안 20여 개의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빼곡하게 담겨 있던 우태원의 모습이 사라졌다. 뒤늦게 입에서 손을 거둔 차유신이 옆을 봤다.
“왜 바꿔.”
“아까 형이 다 봤잖아요. 별일 없는 거. 그래서 돌렸어요. 우리 기본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성윤일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의 입에서 쭈웁, 하며 스무디 흡입하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이 떼를 썼다.
“내가 언제 다 봤다고 했어. 다시 복구해 봐.”
“아니, 무엇보다 우리 AI로부터 이상 상황 보고가 없었고…. 기본적으로 이건 실시간 모니터링을 위한 거라서.”
성윤일이 우물쭈물했다. 버럭 할 뻔한 차유신의 입이 가까스로 다물렸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차유신을 살피며 성윤일이 물었다.
“근데 진짜 형, 왜 이렇게 신경을 써요? 지금 우태원 의원 스토킹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말에 바로 눈매가 찌푸려졌다. 차유신이 실소했다.
“내가 누굴 스토킹한다고 그래.”
“지금 일주일 내내 이러고 있잖아요. 우태원 의원 특별감시 시키고, 형도 매일 같이 와서 확인하고.”
“그야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이 돼서….”
“당사자는 형이 이러는 거 알아요? 그렇게 걱정이 되면, 그 이유를 장본인에게 알리는 편이 가장 낫지 않나.”
성윤일이 진지하게 읊조렸다. 차유신의 입이 더듬거렸다. 지극히 합리적인 성윤일의 문제 제기에 절로 할 말이 없어졌다.
메마른 입술에 젖은 혀가 스쳤다. 무력해진 치아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 사실을 우태원에게 알린다고. 알리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태원에게 연락을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차유신은 우태원의 둥지를 부수는 게 목적이고, 실제로 그걸 진행 중인 사람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적절한지 차유신 스스로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오. 저 차,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부쩍 말이 없어진 차유신을 두고 일부러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성윤일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무심코 성윤일이 보는 모니터에 시선을 둔 차유신의 동공이 커졌다. 정말로 역현구에서 보기 힘든 고급 외제세단이 화면에 담겨 있다. 하지만 차유신이 주목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거 캡처.”
벌떡 일어난 차유신이 말했다. 성윤일이 서둘러 화면을 저장했다. 모니터를 짚은 차유신이 지시했다.
“여기 키워봐.”
가리킨 곳은 세단의 뒷좌석 차창이었다. 해당 지점이 점점 확대됐다.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얼핏 보이는 실루엣이 익숙하다 했는데,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김후준이다. 왜 역현구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김후준이 여기에 있다.
“우태원 집하고 사무실 건물 동시에 띄워.”
성윤일이 발 빠르게 해당 화면을 모니터에 올렸다. 우선 나타난 건 우태원의 집.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잠잠하기만 하다. 반면, 우태원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은.
석양을 등진 우태원이 입구를 향하고 있다. 보좌진도 없이 혼자다. 느긋하게 빌딩 입구에 다다른 그가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고개를 든다. 경직돼있던 차유신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기분 탓인지, 그가 묘하게 이쪽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우태원은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쓸쓸해진 빌딩 입구만 주시하기를 한참, 곧 두 대의 차가 나타났다. 안에서 여덟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일부 남자는 칼을 들고 있다. 모니터가 자동으로 그들의 신상을 띄웠다.
김성철 / 34세 / 역운회
박윤호 / 21세 / 역운회
공승혁 / 29세 / 역운회
여덟 명 전원 역운회. 약간의 뜸을 들인 그들이 일제히 빌딩 안으로 들이닥쳤다. 차유신의 등줄기가 확 송연해졌다. 우태원의 사무실 건물에 칼을 갖고 뛰어드는 역운회. 그 의아한 장면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태원에게는 지난 일주일간 특이 이벤트가 없었다. 접촉한 건 보좌진. 그리고 역운회.
그 역운회.
“성윤일!”
차유신이 급하게 소리쳤다. 성윤일이 놀라 응수했다.
“네. 형.”
“네 차 좀 빌려줘.”
“보좌진이 데려다준 것 아니었어요?”
“같이 왔었는데 일이 있어 잠깐 사무실로 돌려보냈어. 일단 네 차 빌려 이동할 테니, 그 보좌진에게 연락해 내가 가는 주소지로 오라고 해줘.”
“보좌진…. 어느 분인데요.”
스마트폰을 뒤적이는 성윤일을 스쳐지나가며 차유신이 답했다.
“권헌 비서.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
*
운도동으로 가는 내내 차유신은 무작정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도착한 직후에는 차를 버리는 것처럼 뛰어내린 뒤 건물 안에 들어섰다. 로비로 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내려온 승강기에 탑승해 올라간 후에는 새까만 복도를 잡아먹을 듯 질주했다.
‘국회의원 우태원 사무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사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새하얀 실내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몇몇 역운회 조직원이 놀란 눈으로 차유신을 봤다. 꽤나 당황했는지, 빠르게 가로질러 내실로 향하는 걸 잡지도 못했다.
다짜고짜 내실 문을 열어젖혔다. 확 트인 문틈으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차유신의 발이 멈칫했다. 아까의 역운회 조직원 여덟 명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형님. 누가 온 모양입니다.”
데스크에 걸터앉아 피 묻은 칼을 닦아내던 서재길이 한마디 했다. 우뚝 선 채 바닥을 주시하던 우태원의 얼굴이 서서히 들렸다. 자신을 보는 걸 알았지만, 차유신은 차마 그를 볼 수 없었다. 쓰러진 남자들의 몸뚱이 너머, 어느 공 같은 물체에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괜찮아.”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새빨간 피로 점철한 물체를 머금고 차유신의 망막이 흔들렸다. 가쁜 숨을 삼킨 목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꺼떡거렸다.
그건 김후준의 머리였다.
우태원의 입매에 흡족한 초승달이 걸렸다. 피 칠갑을 한 대가리보다도 섬뜩한 미소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기기묘묘할 정도로 산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애인이 왔거든. 방금 전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던 차유신이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허망한 혼잣말이 나왔다.
“진짜 어쩌려고 그래, 너.”
다 닦은 칼을 데스크에 내려둔 서재길이 몸을 일으켰다. 차유신을 힐긋하고는, 정중하게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인 뒤 발을 뻗었다. 저벅저벅 걸어간 그가 내실을 나섰다. 곧 신중하게 문을 닫기까지 했다. 실내에는 차유신과 우태원, 그리고 피투성이 시신들만이 남았다.
“어떻게든 되겠죠.”
“대권 후보 하나가 날아갔어. 경찰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선배가 만든 시스템의 맹점이 뭔 줄 알아요?”
우태원이 뜬금없이 물었다. 차유신은 멍하니 멈춰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시스템이라, 경찰이 자연스럽게 그 시스템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거죠.”
“그게 무슨 얘기야.”
“다시 말해, 시스템 너머의 범죄가 아주 쉬워졌다는 겁니다.”
우태원이 발을 내밀었다. 김후준의 머리통을 구둣발로 밟고는, 툭 밀어 공처럼 굴렸다. 데굴거리며 굴러간 머리통이 구석에 처박혔다. 김후준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다.
“하루에서 이틀 동안, 경찰은 시스템에 기록된 영상을 분석하는데 전력을 쏟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그들의 사각지대에서 증거인멸에 들어갈 거고요. CCTV는 우리의 혐의를 포착하지 못했거든요.”
“김후준이 네 건물 안에 들어왔어. 그 영상이 분명히 남아있을…!”
“그런 건 없어요.”
우태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노곤하게 뇌까렸다.
“김후준은 건물 뒤편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거든요. 우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진해서 그렇게 했어요. 왜? 그쪽에는 CCTV가 없으니까.”
차분한 언어가 이어졌다.
“김후준은 제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온 거예요. 당연히 본인 기록을 남기면 안 됐겠죠. 역현구에 온 사실 자체는 영상으로 남아있겠지만, 김후준은 역현구에서 시민단체 미팅이 있다며 의원실을 통해 알리바이까지 세팅했어요. 결과적으로 그 알리바이가 김후준의 발목을 잡았지만.”
“아무리 김후준이 백정처럼 달려들었다 해도, 너까지 그러면….”
“내가 그러면 안 돼요?”
우태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초점 없는 눈이 검게 빛났다.
“선배도 사실은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잖아.”
꿀꺽. 식도를 타고 굵은 침이 내려갔다. 차유신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우태원은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었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점점 내려가는 체온을 느끼며, 차유신은 싸늘한 심호흡을 반복했다.
급한 상황인 거예요? 그럼 경찰을 부르지, 왜 보좌진을 불러요.
막 뛰쳐나가는 차유신의 뒤에서 성윤일은 물었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사뭇 침착한 대꾸가 나왔다.
별로 급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차유신은 사실 예감했다. 이 잔악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건 결국 우태원이 될 거라는 걸. 김후준과 그가 청부업자로 섭외한 여덟 명의 역운회 조직원은 전부 죽고 말 거라는 걸. 근거는 없지만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권헌 한 명만을 불렀을 뿐이다.
어차피 지금 우태원의 사무실에 간다면, 남아있는 건 김후준의 시신뿐일 테니까.
쾅! 바깥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저지하는 역운회 조직원의 말이 단칼에 잘렸다.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 가격당한 남자가 신음하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곧 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시근덕거린 권헌이 눈을 부릅떴다.
“의원님. 괜찮으십….”
헐떡이던 말이 끊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확인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춤했던 몸이 간신히 바로 섰다. 차유신은 탄식하며 손사래를 쳤다.
“별것 아니야. 대기하고 있어.”
곁눈질로 권헌을 본 우태원이 발을 옮겼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검은 정장차림의 그가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심상한 눈길이 차유신을 스쳤다.
“맞아요. 이거 사실 별것 아니에요.”
차유신의 눈 밑이 미동했다. 우태원은 혼연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걸 이제 와서 바꿀 수가 없어요.”
“내가 이 방식을 싫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우태원은 느릿하게 끄덕였다.
“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네가 무슨 노력을 해.”
“적어도 선배가 시킨 대로, 나를 위해 살기 시작했잖아요.”
한껏 치켜뜬 차유신의 속눈썹이 부들거렸다.
“내가 말했지. 내가 얘기한 건, 이따위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맞아요. 선배는 이런 걸 원한 적이 없죠.”
우태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자조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나름의 방식으로 선배 말에 따라요. 정답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그런 걸 택하죠.”
웃음은 곧 사그라졌다.
“이렇게 백 번쯤 반복하면, 한 번 정도는 선배가 좋아해줄지도 모르잖아요.”
차유신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저도 모르게 밀려난 구둣발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맥없는 시선이 깔렸다.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진 시신 밑으로 둥글게 뭉친 핏물이 비쳤다. 차유신의 발은 그 원의 중심에 있었다.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녹아가는 시야 속에서 원은 대조적으로 뚜렷해졌다. 새빨갛게 익은 과실처럼 탐스럽게 흐드러졌다. 차유신은 그 과실을 핥듯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정체 모를 단내가 고였다.
선악과.
차유신은 우태원을 설득하는 과실이다. 우태원은 지옥에서 그 과실을 먹는다. 과실을 이해할수록, 우태원은 지옥에 걸맞은 인간이 돼간다.
우태원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가시죠. 의원님.”
보고만 있던 권헌이 다가왔다. 차유신의 팔을 쥐고는, 끌어내듯 힘을 줬다. 이어지는 언어에서 경멸이 묻어났다.
“의원님께 해를 입히고, 강간까지 한 범죄자입니다. 이 이상 얘기 들어줄 필요 없습니다.”
풉. 돌연 우태원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차유신과 권헌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입을 가린 채 어깨를 떨고 난 우태원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새까만 동공이 지옥의 입구처럼 차유신을 빨아들였다.
“섹스도 안 좋아하는 내가, 왜 그렇게 선배를 취하는 일에는 환장했는지 알아요?”
차유신은 굳은 채 우태원을 주시했다. 우태원의 음성이 조금씩 무뎌졌다.
“선배하고 자면 구원받는 기분이 들어요. 그게 너무나도 좋았어요.”
우태원의 눈이 반쯤 감겼다.
“어차피 허상이라는 걸 알았지만, 저는 상관없었죠.”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권헌의 손목을 부여잡고는, 가볍게 뿌리친 뒤 구둣발을 내디뎠다. 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발자국이 새겨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움직임이 멎었다. 우태원의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우태원은 느긋하게 차유신을 마주 봤다.
“네가 말하는 구원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네가 가장 멍청해지는 순간이라는 건 잘 알겠어.”
차유신이 제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순식간에 풀어헤친 손가락 밑으로 적색 실크 원단이 늘어졌다. 기다란 천을 둥그렇게 뭉친 뒤 우태원의 입으로 가져갔다. 차유신이 고갯짓을 했다.
“입 벌려.”
우태원은 고분고분 입을 열었다. 검붉은 천 뭉치가 우태원의 입에 쑤셔 박혔다. 차유신의 집게손가락이 딱딱한 그의 가슴팍을 짚었다.
“잘 들어. 사람이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어. 원하는 걸 포기하는 게 바로 희생이야. 나는 지금부터 너에게 희생을 가르칠 거고.”
고개를 튼 차유신이 권헌을 봤다. 단조로운 명령이 건네졌다.
“권 비서는 나가. 내실뿐 아니라, 이 사무실에서도 나가. 역운회도 포함이야. 이 공간을 완전히 비워.”
“의원님. 갑자기 무슨….”
권헌이 말끝을 흐렸다. 외면한 차유신이 다시 우태원에게 시선을 꽂았다. 넥타이를 문 채 내려다보던 우태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나가라면 나가.”
경고한 차유신이 자신의 셔츠칼라에 손을 가져갔다. 가장 윗단추를 풀자마자 벌어진 틈으로 쇄골이 훤히 드러났다. 우태원의 굳건한 어깨가 움찔했다. 차유신의 입술 틈으로 나른한 목소리가 샜다.
“구원? 원한다면 해줄게. 그리고 알려주지.”
연달아 단추를 풀던 차유신이 다른 손으로 우태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태원의 울대뼈가 울컥했다.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난 신이 아니야. 우태원.”
그 말과 함께 가장 끝 단추가 해제됐다. 단숨에 셔츠를 벗어젖힌 차유신이 뒤를 봤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권헌이 눈에 들어왔다. 차유신이 윽박질렀다.
“권 비서. 나가라고 했지.”
“저 못 나갑니다. 우태원이 의원님께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권헌.”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순식간에 권헌의 낯이 어두워졌다.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마지못해 바로 섰다. 이내 직각으로 몸을 굽고는, 터덜터덜 바깥으로 나섰다.
탁. 문이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을 보진 않았지만, 대략적인 대화를 들은 터라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점점 잦아드는 소음 틈으로 사무실 문조차 닫히는 게 들렸다. 사위가 완전히 적막해졌다.
“기대가 되네요.”
넥타이를 입에서 뱉은 우태원이 뒷걸음질을 쳤다.
“선배가 제게 알려줄 것들이.”
데스크용 의자에 앉은 그가 차유신을 눈으로 쓸며 제 넥타이를 풀었다. 차유신은 저벅저벅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우태원의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는, 고저 없는 언어를 꺼냈다.
“나도 참 기대 돼. 네 반응이.”
우태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차유신은 웃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어 우태원의 바지 앞섶을 잡았다. 철컥, 버클이 풀렸다. 우태원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진짜 여기서 할 생각이에요?”
“왜. 싫어?”
차유신이 반문했다. 우태원이 미약한 도리질을 쳤다.
“설마요. 다만….”
이어지는 음성에서 울림이 비쳤다.
“갈수록 선배의 저의가 궁금해져서요.”
“내가 왜 아까 전에 네 입에 넥타이 물렸는지 알아?”
차유신이 난데없이 물었다. 우태원은 그저 빙글거렸다.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반쯤 풀린 우태원의 남색 넥타이를 쥐고는, 그대로 끌어올려 그의 입에 처넣었다. 얌전히 문 우태원이 시선을 끌어올렸다. 차유신의 목소리가 묵직해졌다.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야.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남색 천 쪼가리 틈으로 헛헛한 웃음이 샜다. 크게 주억거린 그가 목을 가지런히 세웠다. 이내 반쯤 내려간 제 지퍼를 매만졌다. 지익, 갈라진 지퍼 틈으로 짙은 회색 속옷이 비쳤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차유신을 힐금한 우태원이 보란 듯이 속옷을 끌어 내렸다. 검붉은 살 뭉치가 기다렸다는 듯 속옷을 헤집고 나와 우뚝 섰다.
훤히 제 생식기를 드러낸 채 우태원은 흑염 같은 눈으로 차유신을 관조했다. 도발을 위한 도발이었다. 긴 숨을 고른 차유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완전히 우태원에게 몸을 붙인 채, 무릎을 들어 의자 팔 받침에 올렸다. 이윽고 나머지 무릎도 다른 쪽에 뒀다. 도발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우태원의 턱밑까지 제 앞섶을 들이밀고는 버클을 풀었다. 곧 지퍼를 해제했다. 드러난 속옷도 마저 끌어 내렸다. 미미하게 발기한 적색 성기가 우태원의 볼을 스치며 꺾였다. 그대로 바지와 속옷을 무릎 언저리까지 내렸다. 허전해진 엉덩이를 낮춰, 우태원의 허벅지에 앉혔다. 양 다리는 팔 받침에 걸친 채 밑으로 뺐다.
우태원은 여전히 넥타이를 물고 있었다. 차유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포착하듯, 눈동자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물끄러미 마주 보던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우태원이 문 넥타이 밑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축축한 입 안에서 손가락을 굴리다가, 턱짓을 했다.
“빨아.”
말을 마치자마자 손가락이 올곧게 펼쳐졌다. 우태원이 유순하게 혀를 내둘렀다. 질척이는 소리가 들리고, 차유신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녹녹해졌다. 빤히 차유신에게 시선을 둔 채 우태원은 음미하듯 손가락을 희롱했다. 쑥 들어온 혀가 중지와 검지 사이의 여린 살을 간질거렸다. 표피가 녹는 듯한 위기감에 차유신의 손가락이 경련했다. 소름에 젖은 다른 쪽 손이 꽉 움츠려졌다.
“그만.”
날 선 한 마디가 두 사람의 틈을 갈랐다. 우태원은 순순히 혀를 거뒀다. 그의 입 안에서 차유신의 손가락이 빠졌다. 멀어지는 손가락과 입술 사이에 가느다란 실이 걸렸다.
“역치라는 게 있어.”
엉덩이를 들친 차유신이 제 다리 사이를 짚었다. 엉덩이 틈에 손가락을 맞추고는, 회음부를 비비적거리며 구멍을 찾았다. 쉽사리 입구가 나오지 않았다. 들숨을 삼킨 차유신이 억지로 하체를 풀었다. 버겁게 드러난 구멍에 집게손가락을 꽂고는, 확 쑤셔 박았다. 젖은 손가락이 다물린 곳을 송곳처럼 뚫으며 치솟았다. 차유신의 어금니가 꽉 깨물렸다.
“흣…. 제정신이 아닌 새끼한테는, 그보다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해줘야 최소한 말귀를 알아먹더라고.”
한 마디, 두 마디, 세 마디. 손가락은 점점 들어왔다. 뻑뻑한 내벽을 조금조금 적셔가며 미끄러지다가, 들어올 수 있는 최대한의 지점에 안착했다. 전율하던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맞은편에서 관음하듯 주시해오는 우태원이 보였다. 점점 느슨해지는 그의 동공이 빛났다.
“그래서 때로는 정신 나간 짓거리가 필요한 거야.”
숨을 고르고는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을 한꺼번에 처박았다. 차유신의 몸이 반사적으로 기울었다. 무리하게 채워진 입구가 이물감을 호소하며 곳곳의 힘줄을 당겨왔다. 갑자기 팽팽해진 신경에 몇몇 세포가 소스라쳤다. 등줄기를 떤 차유신이 굴하지 않고 제 배 안을 헤집었다. 점막 비벼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다리 틈에서 샜다. 물기와 건기가 섞인 마찰음이었다.
“이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야.”
가까스로 우태원에게 눈을 맞춘 차유신이 헐떡였다. 우태원은 넋이 나간 채 넥타이를 질근거렸다. 딱딱한 가슴팍이 쉼 없이 울렁였다. 잘 다져진 몸 선 밑으로 한껏 건장해진 그의 음경이 비쳤다. 금방이라도 꽂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불끈하게 솟아오른 채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닥치고 누려.”
차유신의 구멍에서 손가락이 빠졌다. 허전해진 틈을 싸늘한 공기가 파고들었다. 재차 아랫입술을 씹고 난 차유신이 우태원의 남근을 잡았다. 핏줄이 두드러지는 살덩이의 끝에서 시뻘건 귀두가 뻐끔거렸다.
“어쩌면 오늘로 끝일 수도 있으니까.”
생식기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대뜸 솟구친 귀두가 차유신의 안을 꿰뚫었다. 흡. 허리를 덜컥이고 난 차유신이 우태원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우태원은 차분하게 차유신의 팔을 뺐다. 이내 그대로 끌어 자신의 목을 두르게 했다. 이어 남은 팔도 자신의 목에 감았다.
실팍한 음경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비좁은 배 안에서도 굵다란 살덩이는 아주 유연하게 움직였다. 차유신이 딱히 애를 쓰지 않아도, 알아서 점막을 비벼가며 길을 만들었다. 이 흉흉한 물질은 차유신의 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성기가 질질 흘리고 간 쿠퍼액이 배 안에 녹진한 흔적을 남겼다. 순간적으로 복부의 긴장이 풀렸다. 후들거리고 난 차유신의 아랫도리가 보다 내려갔다. 꾸역꾸역 맞춰져 가는 나사처럼 우태원의 음경이 차유신의 내벽에 접합했다. 환장한 듯 꿈적거린 점막이 우태원의 살덩이와 교접했다.
교착이 길어지며 배 안에서 지진과도 같은 파동이 일었다. 오싹하며 알싸한 자극이 차유신의 아랫배를 옭매왔다. 차유신의 턱이 감전된 것처럼 덜컥거렸다. 좀이 쑤신 양 하반신을 미적거렸다. 짓씹은 입술 틈으로 괜한 욕설이 나왔다.
“하아…. 씨, 바알….”
애매하게 팔 받침 밑으로 빠진 무릎이 불편했다.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는 차유신을 알아챘는지, 우태원이 팔을 뻗어 차유신의 양다리를 끌어안았다. 죽 당겨 자신의 팔뚝에 걸고는, 마저 손을 내밀어 차유신의 등을 안았다. 차유신은 완전히 우태원의 위에 내려앉은 모양새가 됐다.
놀랄 정도로 편해진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불안정한 눈길이 우태원을 머금었다. 조금은 난처해하는 차유신을 관찰하다 우태원이 넥타이 문 입을 내밀었다. 차유신의 볼에 넥타이를 비비고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고 싶은 것 해요. 선배.
차유신의 목이 확 뜨거워졌다. 하고 싶은 것. 그 한 마디에 열쇠가 꽂힌 것처럼 욕망이 해제됐다. 차유신의 뇌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움직이고 싶다.
명명백백하던 초기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욕구였다. 그저 우태원의 위에서 몸을 흔들고, 응어리진 뭔가를 분출하고 싶었다. 이기적이며 저급한 욕망이었다. 인간의 말단, 혹은 짐승의 상단 정도에 자리한 욕심에 차유신의 심장이 뛰었다.
마법처럼 몸이 움직였다. 우태원의 목을 두른 팔뚝에 힘을 줘가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잠깐 빠졌던 음경이 푹, 안을 후볐다. 단숨에 내벽을 벌려가며 기어 올라오더니, 거의 꺾이는 지점까지 들어와 점막을 건드렸다. 버튼처럼 눌린 점막을 타고 자리자리한 소름이 퍼졌다. 차유신은 절박하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하으… 읏. 씹….”
고개를 푹 숙인 채 재차 허리를 튕겼다. 철썩, 하며 엉덩이와 치골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아까와 같은 부위에 파묻힌 귀두가 터질 듯 부풀었다. 맞붙은 점막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했다. 차유신의 턱이 덜덜거렸다. 저도 모르는 새 우태원의 목덜미에 박힌 손톱이 척척했다. 피가 나오고 있었다.
“아직….”
그럼에도 아직이었다. 이 갈증 난 응어리를 해소할 버튼이, 아직 눌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차유신은 또 움직였다. 그저 이 일에 환장한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굴신했다. 게걸스러우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살이 부딪쳤고, 의자가 부서질 것처럼 삐걱거렸다.
철썩거리는 소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됐지만, 적당히 솟아오른 차유신의 성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문득 멈춘 차유신의 안에서 꺼지지 않는 우태원의 생식기가 몽둥이처럼 점막을 찔러왔다. 오줌보가 터질 듯, 찌릿찌릿한 감각에 차유신이 등을 전율했다.
“왜 아직… 안 오는. 읏.”
발가락이 접힐 기세로 말려들었다. 배 안에서 쿵쿵거리는 울림이 짙어졌다. 차유신은 배탈이 난 사람처럼 제 배를 감쌌다. 견고한 복근을 일그러뜨리며 윤곽을 남길 정도로 솟구친 우태원의 분신이 울렁이고 있었다. 지켜보던 차유신의 눈이 허망해졌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가라앉았던 속눈썹이 느릿느릿 들렸다.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하는 망막에 적잖이 상기된 우태원의 낯이 걸렸다.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처럼, 버겁게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입에서 넥타이가 떨어졌다. 가물가물하게 눈을 깔고는. 고개를 숙였다. 차유신의 귀에 후끈한 숨결이 스쳤다. 가볍게 차유신의 귓불을 씹은 그가 말했다.
“선배. 말 안 들어서 미안해요. 그런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사람보다는 갓 태어난 짐승에 가까운 눈빛이 차유신을 엄습했다. 벌어진 짐승의 입에서 습한 한 마디가 샜다.
“선배 가슴 빨게 해줘요.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두꺼운 팔뚝이 차유신을 안아 들었다. 그대로 일어난 우태원이 데스크를 향했다. 단박에 차유신을 내려두고는, 양다리를 잡아 제 목에 둘렀다.
“아까 속으로 아홉 번 정도 사정했어요.”
우태원이 몸을 숙였다.
“열 번째는 진짜로 할 거예요.”
내려온 입술이 차유신의 유두를 덮쳤다. 공기 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쭉 흡입해가며, 다른 손으로 반대쪽 젖꼭지를 조였다.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붉은 살이 자지러지며 부풀었다. 우태원은 탐미하듯 튀어나온 유두를 혀와 손으로 핥아댔다.
우태원의 목에 걸린 다리가 버둥거리다 교차했다. 저도 모르게 우태원의 목을 조인 채, 차유신은 데스크를 긁었다. 우태원은 집요할 정도로 미동도 없이 입 안의 젖꼭지만 죄었다. 허우적거린 차유신의 입에서 달뜬 탄성이 번졌다.
“하으, 아아… 으응…!”
“하아…. 선배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태원이 차유신을 힐긋했다. 곧 춥, 유두를 뱉고는 다른 쪽에 얼굴을 묻었다. 오톨도톨한 유륜을 혀로 농락하다가, 남은 젖꼭지를 꼬집으며 뇌까렸다.
“선배 몸은 이제 내가 더 잘 알아요. 그러니 내가 알아서 해요.”
한 치의 여지 없이 단호한 언어였다. 말을 마친 우태원이 보다 세게 젖꼭지를 빨아들였다. 유륜이 문드러질 정도로 아렸다. 완전히 곤두선 유두가 속수무책으로 우태원에게 깨물렸다. 차유신은 탕, 소리를 내며 데스크를 쳤다. 번쩍 들린 발가락이 덜덜거렸다. 달아오른 치부가 뻐근했다. 오금이 저려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해… 으읏….”
“그럼 안에 더 넣어줄까요?”
차유신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우태원이 허리를 세웠다. 그저 색색거리는 차유신을 바라보다가, 풀어지다시피 한 자신의 넥타이를 당겨 밑으로 뺐다. 곧 하얀 셔츠만 남은 상체를 기울였다.
“내 옷 벗겨요.”
흔들리는 시야에 우태원의 셔츠 칼라가 들어왔다. 눈을 감았다 뜬 차유신이 늘어져 있던 손을 뻗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처음의 목적은 퇴적된 지 오래였다. 차유신은 그저 늪처럼 이 순간을 탐닉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치 않았다.
차유신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습관적으로 머물러 온 천국, 그 밑에 존재하는 세계를. 이제야 이해했다.
단추가 점점 풀어졌다. 하나, 둘, 셋…. 남자 셔츠 단추가 총 몇 개더라. 순간적으로 계산이 무뎌진 차유신을 재촉하듯, 우태원이 허릿짓을 했다. 불현듯 파고든 성기가 내벽을 쑥 가로지르다 발끈한 점막에 파묻혔다.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이 우태원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미끄러진 손가락이 마지막 단추에 걸렸다. 애써 풀 필요도 없이 실이 끊겨 떨어졌다. 단추가 해제된 셔츠를 뒤로 젖힌 우태원이 힘줄이 두드러지는 맨몸을 드러냈다. 이내 차유신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계속 나 보고 있어요.”
차유신은 그저 입을 말아 물었다. 그의 의도는 알 것 같았으나 그 이해는 완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수긍하지 않았다. 버릇에 가까운 의사 표시였다. 차유신은 그의 모든 것을 통제한 그물이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가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물 안은 하염없는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태원은 익숙한 듯 그걸 받아들였다.
문득 빠졌던 치골이 도로 들이닥쳤다. 데스크가 통째로 덜컹이고, 한계까지 들어온 귀두가 부르튼 점막을 문질렀다. 보이진 않지만 붉게 부어있을 게 분명한 그곳에 쿠퍼액을 처발라대며, 우태원은 점점 제 기둥을 꺾기 시작했다. 꽁꽁 다물려 있던 내벽의 또 다른 부분이 벌어져갔다.
차유신의 동공이 확 커졌다. 그곳이 제법 고통스럽다는 걸 기억하는 몸이 황급히 뒤틀렸다. 일단 빠져나가고 보려는 차유신을 우태원이 저지했다. 이내 똑바로 눈을 맞추며 경고했다.
“어딜 가려고요. 선배.”
“윽, 잠깐…. 우태원, 아… 좀…!”
“도망가지 말고 있어요. 내가 아니까.”
강제로 차유신의 뒤통수를 채 자신을 보게 한 채로, 우태원이 허리를 밀어붙였다. 훅 쑤시며 들어온 남근이 젖은 길을 미끄러지다 굴절했다. 예고 없이 귀두와 충돌한 은밀한 점막을 타고 찌르르한 전류가 번졌다.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아윽…. 하아. 아읏…!”
“선배는 깊이 넣어줄수록 좋아하죠.”
“우, 으으…. 태원, 아, 흣….”
“아예 여기다 끼고 움직일게요.”
우태원의 목소리가 사뭇 상냥했다.
“선배 몸 안에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겨줄게요.”
훅 빠졌던 생식기가 힘차게 안을 파고들었다. 막다른 점막을 찍고, 후비다가, 휘어 보다 깊숙한 지점에 다다라 마구 주름을 밟아댔다. 차유신은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발버둥을 쳤다. 이곳저곳 뻗어대던 손에 새까만 만년필이 밀렸다. 그대로 구르다 아슬아슬하게 데스크에 걸친 펜이 익숙했다. 차유신의 호흡이 돌연 식었다.
내내 빼곡하던 배 안이 갑자기 공허했다. 곧 오감이 새하얗게 물드는가 싶더니, 새싹이 돋아나듯 아랫배가 통째로 간질거렸다. 부쩍 움직임이 잦아든 가운데 꼼지락거리기만 하던 차유신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짜고짜 우태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부들거리는 시선을 떨궜다. 쿠퍼액을 질질 쏟는 자신의 귀두가 보였다. 차유신의 목이 멨다.
“흐읍…. 그냥, 씹…. 빨리 박, 아읏….”
“나하고 이러는 거, 죽을 만큼 싫죠.”
무지근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차유신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우태원은 아무렇지 않게 차유신의 볼에 입술을 비볐다.
“상관없어요. 그쪽이 나에게는 더 어울리고, 더 익숙하니까.”
쪽, 소리 나게 볼에다 입을 맞춘 우태원이 허리를 움직였다. 불쑥 꺾인 음경이 차유신의 안에서 풍선처럼 팽창했다. 아랫배가 터질 듯 부풀었다. 넘어간 뒤통수가 데스크에 부딪혔다.
“하, 으으…. 우태워언….”
차유신의 눈에서 흰자위가 두드려졌다.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혔다. 차유신은 입만 연 채 턱을 덜커덕거렸다. 다시금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을 우태원의 목소리가 얄궂게 갈랐다.
“어느 정도로 익숙해졌냐 하면, 이젠 선배에게 증오받는 나를 사랑하게 됐을 정도예요.”
마지막 한 마디가 제법 황홀했다.
“그러니 날 아주 많이 증오해줘요, 선배.”
배 안에서 뜨거운 액이 분출했다. 갑작스레 높아진 체온에 차유신이 발작했다. 내벽 깊숙한 곳에서 새빨갛게 피어오른 열점이 혈류를 타고 미끄러졌다. 곧 차유신의 치부에서 서서히 발화했다. 기겁한 손이 우태원의 팔을 부둥켰다. 차유신의 허벅지가 갈피를 못 잡고 들썩였다.
우태원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 떨어진 땀방울이 차유신의 성기를 적셨다. 한계까지 달궈진 귀두가 벌컥거렸다. 차유신은 그만 눈을 감았다. 하얗게 타들어 간 심장이 추락했다.
결국 응어리가 터졌다.
툭, 튀어나온 액이 우태원의 뺨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훔치고 난 우태원이 멍하니 밑을 확인했다. 차유신은 완전히 데스크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분출에 데스크 위의 서류며, 우태원의 맨 배며, 차유신의 허벅지가 줄줄이 젖어갔다.
“하아….”
어떻게든 멈추기 위해 성기를 움켜쥐었다. 소용이 없었다. 한번 시작한 사출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아주 오랜 기간 고인 물을 토해내는 것처럼 길고 처절한 사정이었다. 수치심에 휘말려 벌벌거리던 손목이 곧 늘어졌다. 기진맥진한 입에 헛헛한 미소가 걸렸다. 차유신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말했지. 역치가 필요했다고. 너에게도, 나에게도.”
가까스로 분출을 멈춘 성기가 기울었다. 탁한 숨을 고른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잔뜩 굳어있는 우태원의 턱이 보였다. 차유신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너에게 알려줘야 했고, 동시에 나 스스로도 알아야 했어.”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메마른 망막에 완전히 혼이 빠진 우태원의 낯이 박제됐다. 차유신은 스스로를 비웃듯 입매를 꼬았다.
“미안하게도 나는 널 더 이상 증오하지 못해. 우태원.”
방황하던 우태원의 손이 데스크를 짚었다. 커다란 주먹에 밀려난 펜이 끝내 추락했다. 툭.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의 여운이 꽤 컸다. 차유신의 귀가 뻥 뚫린 것처럼 울렸다. 뒤늦은 사정의 여운이 벌레처럼 오감을 갉아왔다. 차유신은 가마득해지는 시야에서 우태원을 찾았다. 창을 통해 비치는 달빛을 가린, 텅 빈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의 절망을 확인했다.
“이유가 뭐죠?”
데스크의 손이 거둬졌다. 서랍을 열어 손수건을 꺼낸 그가 차유신의 정액투성이 치부를 닦았다. 손길은 정중했으나 간간이 느껴지는 숨결이 거칠었다. 체액으로 점철된 아랫도리가 깨끗해져 갔다. 대충 닦이는 걸 본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온전한 나신이 우태원의 앞에서 바로 섰다. 우태원의 손에서 손수건이 반쯤 흘러내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동공이 미동했지만, 곧 잠잠해졌다. 어둑한 얼굴이 돌아갔다.
“글쎄. 내 안에도 네가 있었나 보지.”
읊조린 차유신이 몸을 숙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제 옷가지를 챙기고는, 속옷과 바지를 차곡차곡 입었다.
“지옥에 사로잡힌 게 좋아 사정까지 한 걸 보면.”
우태원을 힐긋거렸다. 침묵에 잠긴 그는 감각을 잃어버린 시체 같았다. 쥔 것도 편 것도 아닌 그의 손아귀가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마저도 생동감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태원.”
하의를 갖춰 입고 난 차유신이 저편의 셔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노곤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난 이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손가락에 구겨진 셔츠가 걸렸다.
“그러니 더 이상 내 핑계 대가면서 네 죄악을 정당화하지 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깨가 부여 잡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차유신을 밀어붙였다. 간신히 쥔 셔츠가 떨어졌다. 동시에 벗은 등이 벽에 부딪혔다. 입술을 깨문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초조함에 젖은 우태원의 낯이 망막을 메웠다.
“그럼 선배에게 나는 이제 뭐죠?”
성급하게 이동한 손아귀가 차유신의 팔뚝을 감았다.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쥔 우태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찡그린 차유신이 억지로 팔을 뺐다. 우태원은 놓치지 않고 따라와 보다 세게 옥죄었다. 투정과도 같은 억압이었다. 차유신이 버럭 했다.
“증오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존재, 너는 이제 그거야. 씨발, 아까 봤잖아, 싼 거. 싫어하는 새끼가 박는데 싸겠어?”
“제게는 그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들려요.”
허공을 가로지른 언어가 부쩍 삭막했다. 차유신의 목이 꿀꺽거렸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불현듯 이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혐오를 해요. 선배.”
차유신의 팔을 두른 손가락이 부들거렸다. 압박감이 거세졌다. 속으로만 신음한 차유신이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 심장이 뛰었다.
살면서 말하는 일이 가장 쉬웠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섹스하고, 사정할 수 있는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우태원의 입이 다물렸다. 메마른 입술 틈으로 짙은 누기가 번졌다. 차유신은 그만 그를 외면했다. 창 너머로 높이 떠오른 달을 보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진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멀스멀 움직인 구름이 달을 덮자, 먼 곳에서 찾아든 빛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걸쳐 인류를 기록해 온 위성이 숨어들고, 현재만이 남아 어둠을 밝힌다.
하나의 역사가 종식됐다.
증오. 차유신과 우태원을 잇는 강렬한 연대. 그건 그들의 기록에 있어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차유신이 증오를 하면, 우태원은 희열을 느낀다. 거기서 그들의 역사가 시작됐다.
증오, 희열, 증오, 희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완성한 과거가 지금 이 자리에 그들을 뒀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첫 단추에 끼울 감정으로 증오 이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한다. 쏟아지는 폭우처럼 맹목적이며 전투적인 감각에 그만 수몰(水沒)되고 말았다.
서로를 증오가 아닌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차유신도 우태원을 이제는 모르게 됐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차유신은 애매한 답을 했다. 정말로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였다. 뜸을 들인 입에서 가까스로 확고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다만 중요한 건, 더 이상 너는 나를 기점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우태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어둠마저 잃은 얼굴이 기울었다. 차유신은 자유로워진 팔을 내밀었다. 자신처럼 상체만 탈의한 우태원의 널따란 어깨를 짚고는, 달래듯 두드렸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다독였다.
동시에 갑자기 길을 잃은 스스로를 추슬렀다.
소리 없는 위로가 멎었다. 차유신은 손을 거뒀다. 이내 몸을 틀어 셔츠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널브러진 천을 챙겨 몸에다 걸치고는, 하나하나 단추를 채우며 문을 향해 걸었다.
막 손잡이를 잡고 난 차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틈을 두고 열려있다. 이게 원래 이렇게 돼 있었나. 아니다. 분명히 마지막에 닫힌 걸 봤는데.
권헌이 닫고 나갔는데.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선배.”
다시금 차유신의 어깨가 잡혔다. 흠칫한 차유신을 옆으로 빼고는, 우태원이 문을 활짝 열었다. 환한 사무실의 소파 쪽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확인한 차유신이 소스라쳤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가 제 신이 되는 걸 거부한다 해도, 저는 끝까지 선배를 섬길 거예요.”
우태원이 뚜벅뚜벅 걸었다. 권헌은 묵묵하게 몸을 세웠다. 굳게 잠긴 사무실 문 너머에서 남자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났다. 근데 아까 차유신 보좌관도 나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우리만 나온 거야? 차유신의 다리가 덜컥 풀렸다. 목구멍에서부터 가쁜 숨이 터졌다.
권헌은 처음부터 안 나간 거다.
“실컷 봤어? 권 비서.”
우태원이 물었다. 권헌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적당히 봤습니다.”
“실컷 본 것 같은데.”
우태원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의 구둣발이 권헌의 앞섶을 건드렸다. 불뚝한 중심부를 걷어차듯 쓸고는, 비아냥거렸다.
“흥분 많이 했네. 듣는 것하고 보는 것, 어느 쪽에 반응했어.”
권헌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듣는 건 지난번에 한 번 겪어서, 보는 쪽 반응이 빨리 오긴 했습니다.”
우태원의 다리가 서늘하게 내려갔다. 권헌을 재차 일별한 우태원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뜬금없는 질문이 건네졌다.
“왼쪽하고 오른쪽 눈, 각각 시력 얼마야.”
“그걸 제가 알려드려야 합니까.”
“대답이나 해. 어느 쪽 눈이 더 나빠.”
“왼쪽이 더 나쁘긴 합니다.”
권헌이 마지못해 응수했다. 끄덕인 우태원이 딱, 소리 나게 구둣발을 지르밟았다. 이상할 정도의 적막이 흐르기를 잠시, 곧 그의 주머니에서 빛나는 물체가 불쑥 빠져나왔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화들짝 들렸다. 자신이 본 것이 바로 인지되지 않았다. 굳어있던 턱이 파들거렸다.
단숨에 쇠붙이를 튕겨 날을 드러낸 우태원이 권헌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컥, 소리를 낸 권헌이 고개를 젖혔다. 우태원이 사뭇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왼쪽으로 받지. 기능이 나쁜 쪽이 도태돼야 맞는 거잖아.”
동시에 잭나이프가 내리 찍혔다. 시퍼런 날이 권헌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허어어억! 자지러지는 비명이 사무실을 울렸다. 순식간에 뒤집힌 권헌의 오른쪽 눈에 핏발이 섰다. 경련하는 그의 얼굴을 타고 핏물이 줄줄 흘렀다. 차유신의 등줄기가 무너질 듯 전율했다. 완전히 맥을 잃은 몸이 털썩 내려앉았다.
“내가 섬기는 사람 포르노 본 대가로 이 정도는 싸지. 안 그래?”
권헌의 목덜미를 쥔 손에 불끈 힘이 실렸다. 한층 꼿꼿하게 그의 목을 세운 우태원이 경고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러다 더 다쳐.”
“커흑….”
“두 개 다 있는 신체 기관이라면 하나 정도는 없어도 괜찮아.”
우태원이 뇌까렸다.
“나도 석 회장에게 맞아서 한쪽 귀는 잘 안 들리거든. 그래도 잘 살잖아?”
입매를 꼰 우태원이 다른 손을 내밀었다. 권헌의 왼쪽 눈 안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능숙하게 긁어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짐승과도 같은 포효가 차유신의 귀를 흔들었다. 이어 투둑, 힘줄 뜯기는 소리가 들리고 둥근 눈알이 빠져나왔다. 허전해진 왼쪽 눈을 부여잡은 권헌이 주저앉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유신이 뛰쳐나갔다.
“권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권헌을 끌어안고 소리쳤다. 형체가 가늠되지 않는 피투성이 얼굴을 흐린 눈으로 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지혈…. 지혈을 해야….”
서투른 손이 안을 헤맸다. 손수건이 잡히지 않는다. 바지에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럼 재킷인가. 그런데 재킷은 어디에 뒀지.
“의원님.”
문득 침착한 손이 등을 덮어왔다. 움칠한 차유신의 눈동자가 이동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감싼 권헌이 엷게 웃었다.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차유신의 호흡이 눈에 띄게 가빠졌다. 권헌의 머리통이 느른하게 다가왔다. 곧 차유신의 어깨에 기댄 채, 천천히 호흡을 삭였다.
조금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우태원.”
차유신의 입에서 허망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분노에 찬 눈동자가 한계까지 끌어올려졌다.
“너 이 새끼 진짜….”
그르렁거리던 소리가 돌연 멎었다. 멈춰버린 입술 틈으로 한기가 스몄다. 곤두섰던 무릎이 풀썩 바닥을 찍었다. 차유신의 눈이 풀렸다.
“그럼 이제 다시 저 증오할 거죠? 선배.”
우태원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럽게.
“씨발….”
읊조린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갑자기 차가워진 머리가 속수무책으로 기울었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엎어진 몸이 빙하에 갇힌 듯 무지근했다. 멸등하는 뇌리에서 우태원의 잔상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깜빡였다. 죽기 직전, 찬란한 무용수 같은 몸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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