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선악과 (27/48)

8장. 선악과

2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절대로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장 17절 17.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10월.]

“나는 그게 옳다고 믿었어.”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갈색 나뭇조각이 흩어졌다. 차유신은 미간을 구긴 채 칼날의 각도를 바로잡는데 몰두했다. 스윽, 갈리는 느낌과 함께 가운데 심이 나타났다. 차유신은 속으로 흡족해했다. 역시 자신은 연필을 기가 막히게 잘 깎는다.

차유신은 모두가 샤프를 쓰던 초등학생 때부터 연필을 썼다. 샤프로는 대체할 수 없는 연필 특유의 바삭한 필기감이 좋았다. 다만 연필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샤프처럼 단순하게 심을 교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매번 깎아서 심을 내줘야 한다.

확고한 단점이지만 차유신은 이조차 마음에 들었다. 연필을 깎다 보면 자연스레 상념이 정돈된다. 불규칙한 길이로 갈려 나가는 나무껍질에 분노며 증오, 괴로움을 마음껏 투영하다 보면 어느새 지루한 시간이 끝나 있곤 했다.

물론 이 쌓여있는 껍질을 청소하는 건 다소 부담이지만. 덕분에 고등학생 때는 거의 일주일 단위로 박원락의 잔소리를 듣고 다녔지만. 차유신 이 미친놈아, 내 자리에서 연필 깎지 말라고 했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고등학생 때 얘기고, 지금은 꽤 괜찮다. 차유신이 폐기물을 만들면, 버려주는 이들이 생겼으니까.

차유신은 지금 여의도에 있는 300명의 국회의원 중 하나다.

“유신아. 너도 알잖아. 내가 너 정말로 많이 아끼는 거. 내 눈에 너, 너무 위험해 보였어. 그렇게 SDB 들쑤시다가 석일태 회장한테 훅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서 일단 태원이 놈에게 맞춰줘야겠다 생각한 거야. 너를 위한 결단이었고, 동시에 우리 의원실을 위한 결단….”

“형. 고개 들어 봐.”

끄트머리가 뾰족해진 연필을 든 차유신이 고갯짓을 했다. 움칠한 진무원이 얼굴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짧게 마주치고, 곧 연필심이 부러지도록 데스크에 처박은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진무원의 몸이 구부정해졌다.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쓰러진 그가 탄식했다.

“아윽….”

“구질구질하다. 이걸로 끝내자.”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있던 권헌과 윤재희, 김운열이 놀라 그들을 번갈아 봤다. 형, 괜찮아요? 다급히 진무원을 일으킨 김운열이 물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얼굴만 짚었다.

“유신이 벌써 복귀했… 엄마야!”

막 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수현이 기겁했다. 차유신이 눈을 찌푸렸다.

“나 오늘 자로 복귀한다고 했잖아. 뭘 놀라고 그래?”

“아니, 그거 말고.”

손 부채질을 한 한수현이 소파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 왜 여기에 있어?”

내내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보좌진들이 하나같이 동의하는 낯을 해 보였다. 차유신만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일혁이 형 옮기고 나서 정무보좌관 자리 비었잖아. 채워야지.”

“이 사람 우태원 의원실 수보 출신이야. 그런데 어떻게 다른 당인 우리 의원실에….”

닦달하던 한수현이 멈칫했다.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난 차유신이 시선을 옮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진재가 고개를 꾸벅했다.

“다른 당 출신인 게 뭐가 문제야. 실력만 있으면 됐지. 그러는 너희 대부분 다 대국민당 출신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고.”

딱 부러지는 음성이 내실을 가로질렀다. 내실에 있던 보좌진들, 그리고 문 너머의 보좌진들이 일제히 차유신을 주시했다. 아홉 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고 난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내가 이 의원실 주인으로서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인정해. 능력 이상으로 욕심이 많고, 그걸 알면서도 타협하는 법을 모르고. 무엇보다 꽤 많이 피곤한 스타일이지. 일단은 쉬지를 않으니까.”

차유신이 데스크를 짚었다. 손등에 밀려난 연필이 데굴거리며 굴러갔다. 이내 딱, 하며 바닥에 추락했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연필의 곤두선 끄트머리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게 내가 일하는 방식이고, 이걸 고칠 생각은 없어.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T시티를 완성하고, 유지하고, 방해가 될 만한 요인들을 차곡차곡 제거해 올 수 있었던 거야. 차유신 의원실의 존재 의의는 역현구을에 있어. 나는 이 지역을 지켜야 하고, 내 보좌진은 그런 나를 무조건 따라줘야 해. 이걸 게을리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금이 너무나도 아깝잖아.”

차유신이 몸을 숙였다. 완치까지 꽤나 남은 발목은 무게가 실리자마자 바로 꿀렁거리며 저항했다. 신음을 참은 차유신이 연필 쥔 손을 끌어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일혁 보좌관처럼 더 이상 내 곁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은 지금이라도 손을 들어. 다른 의원실 알아봐 줄 테니까. 대국민당 때부터 나와 일했던 사람이라면 이게 빈말이 아니라는 것 잘 알 거야. 그때에도 나와 일하는 걸 버거워 한 몇몇 보좌진은 내가 직접 다른 방에 꽂았어. 나는 나를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취미가 없거든.”

차유신의 손 안에서 빙글, 연필이 돌았다. 올라선 촉이 자신을 가리켰다.

“다만 나를 선택해준 이상, 나는 그 이상으로 보답할 거야. 이게 내가 내 사람을 신뢰하는 방식이야.”

의원실이 조용해졌다. 침묵 속에서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는 몇몇 보좌진이 보였다. 십 초, 삼십 초, 일 분. 짧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손을 들지는 않았다. 어느덧 보좌진 간의 눈 사인도 끝이 났다. 사막처럼 건조해진 공간에서 보좌진들은 다시 차유신을 봤다.

“야, 그만해. 기 빨린다.”

돌연 불퉁한 한 마디가 찾아들었다. 모두의 눈길이 이동했다. 팔짱을 낀 한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사람 아무도 없어. 어제 너 복귀한다는 얘기 듣고, 우리끼리 자리 만들어서 얘기 다 마쳤어. 주일혁 보좌관 제외 전부 스테이하는 걸로.”

한수현이 빈정거렸다.

“따지고 보면 우리 말고 차유신 성질머리 커버쳐 줄 사람도 없어. 당사자만 빼고 다 아는 얘기지.”

차유신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같은 말이라도 좀 좋게 해줄 수 없냐.”

한수현이 얄밉게 입매를 꼬았다.

“싫은데? 싸가지없을 땐 없어야지. 너도 국감에서 말 싸가지없이 할 것 아니야.”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

“생각보다 복귀가 일렀는데, 이와 관련 일부 매체에서 우울증 진위 여부를 두고 가타부타 말이 많아요. 세간의 의구심을 해소시킬만 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0월 마지막 주 경찰청 국정감사가 열렸다. 장소는 경찰청 안에 있는 대회의실이었다. 경찰청 로비에 들어서는 차유신을 보자마자 십여 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핵심 질문은 두 가지였다. 오늘 감사에 석일태 SDB그룹 회장을 출석시킨 것과 관련한 구체적 사유, 그리고 차유신의 이른 복귀를 둔 ‘가짜 우울증’ 논란.

“우울증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다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막 운을 뗀 차유신의 눈이 깜박였다. 저편에서 다른 기자무리가 술렁이고 있었다. 석 회장 왔다! 차유신을 마크하지 않은 기자들이 우르르 석일태를 둘러쌌다. 석일태는 취재진의 질문에 일체 답변하지 않고 복도만 걸었다. 그런 그를 덩치 큰 정장 차림의 남자 서너 명이 호위했다.

“최근 휴직 사태와 관련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점은 인정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석일태의 고개가 돌아갔다. 차유신의 눈길이 냉하게 그를 머금었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헛기침을 한 석일태가 시선을 거뒀다. 이내 막 열린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경호원들이 우르르 그를 따르고, 느릿느릿 문이 닫혀갔다.

“다만 한동안 국민들 앞에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사정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여기까지 하시죠. 진무원이 기자들을 가로막았다. 권헌과 백진재, 김운열이 친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차유신은 유유히 발을 옮겼다. 막 로비 층으로 내려온 또 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

*

국감에는 행안위 소속 위원 22명 중 19명이 참석했다. 차유신은 19명 중 딱 중간에 해당하는 10번째 순서를 받았다.

“다리 또 다쳤다며? 뭘 그렇게 자주 다쳐. 괜찮아?”

회의를 앞두고 입장한 문지찬이 차유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유신은 천천히 끄덕였다.

“대개 목발 짚고 다니는데, 가끔은 그냥도 다닙니다. 점점 나아지는 중입니다.”

“몸조심해라. 너 다칠 때마다 인터넷에서 말 나오더라.”

“무슨 말이요.”

들고 있던 국감자료를 팔랑인 문지찬이 키득거렸다.

“어떤 악질적인 세력이 훌륭한 차 의원님을 괴롭혀 그 사달이 난 거란다. 네 일부 지지자들이 그런 말을 퍼뜨리고 다녀.”

커다랗게 웃은 문지찬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차유신은 이마를 긁적였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닌지라 웃을 수가 없었다.

오전 10시에 맞춰 감사가 시작됐다. 허대윤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청 고위 간부단이 착석한 가운데, 지극히 의례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경찰대 출신들의 고위직 독식 문제나 올해 이슈가 된 몇몇 사건사고를 두고 허대윤을 집중 질타하는 시간이 반복됐다.

딱히 강도 높은 지적은 없었다. 허대윤 개인과 관련한 특별한 비위 혐의를 찾지 못했는지, 다들 마구잡이로 힘을 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날아드는 질문세례에 허대윤은 지극히 예의 바르게 응수했다. 대답의 팔 할이 ‘죄송합니다’와 ‘시정하겠습니다’로 구성돼있었다. 피감기관장 답변의 모범예시 수준이었다.

“다음으로 존경하는 차유신 의원님 발언하십시오.”

한 번의 휴정을 거친 후 열 번째 질의가 시작됐다. 안경을 고쳐 쓴 행안위원장이 차유신을 일별했다. 차유신이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역현구을 국회의원 차유신입니다. 우선 지난 한 달간 일신상의 사유로 국민들께 심려 끼쳐 드린 점,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숨을 고른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긴장한 허대윤에 눈을 맞추고, 본론부터 꺼냈다.

“그럼 질의 시작하겠습니다. 청장님, 오늘 자 대민일보 보셨죠.”

허대윤의 울대뼈가 울렁였다. 어물거리던 입이 열렸다.

“네. 봤습니다.”

“해당 언론사 보도에 따르면 서울 역현 경찰서는 지난 20년간 석일태 SDB그룹 회장으로부터 연 수억 원에 달하는 ‘수고비’를 받고 관내에서 발생한 역운회 관련 사건사고를 묵인해왔습니다. 이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데스크 위의 종이를 챈 손이 들렸다. 오늘 자 대민일보 1면이었다. 소스는 사전에 차유신이 줬다. 국정감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서는, 파급력 있는 언론사의 채널을 빌려 사전예고를 해두는 것 이상의 왕도가 없다.

“해당 보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허대윤이 고분고분 답했다. 눈빛에서 일말의 애원이 비쳤다. 적당히 좀 하자는 투였다. 무시한 차유신이 물었다.

“본인 직책이 뭡니까.”

“경찰청장입니다.”

“본인이 관리하는 기관에서 발생한 비위 사실을 신문 보고 알았다는 건 대단히 문제가 있는 겁니다. 기본 중에 기본을 굳이 말로 알려드려야 압니까.”

“현재 사실 확인 중에 있습니다. 논란 여지가 있는 사안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점은 송구히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시뮬레이션 된 지금의 상황. 이 대화는 사실 연극이다. 차유신의 진짜 타깃은 허대윤이 아니고, 허대윤도 그걸 안다. 두 사람이 주기적으로 자리를 가지며 세팅해 온 역운회 해체 계획의 일부일 뿐이다.

다만 이 절차에는 목격자가 필요하다. 그것도 최대한 많이. 차유신의 목적은 역운회와 SDB그룹, 그리고 석일태를 사회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동네 깡패처럼 그들의 배를 칼로 찌르는 형태가 아니라, 그들의 추악한 내면을 낱낱이 까발려 공개 처형하는 방식이다. 차유신에게 칼은 필요치 않았다. 이미 자신의 혀가 칼이었다.

“증인으로 석일태 SDB그룹 회장 요청합니다.”

행안위원장이 고갯짓을 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석일태 회장 입장하세요.”

뒤편에서 문이 열리고, 반듯한 정장 차림의 석일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다시 마주친 눈에서 보일 듯 말 듯 한 살기가 비쳤다. 마저 걸은 그가 증인석에 섰다. 이어 손을 든 채 또박또박 외쳤다.

“SDB그룹 회장 석일태입니다. 본인은 국회에서의 증언과 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7조의 규정에 따라 양심에 있어 숨김과 보탬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진술이나 서면답변에 거짓이 있을 시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유신의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석일태가 큼, 소리를 냈다. 보다 제대로 석일태를 본 차유신이 입을 뗐다.

“보도내용은 다 접했을 거라 생각하여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공권력을 매수해 그렇게까지 역운회를 유지하려 했던 이유가 뭡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더없이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석일태가 말을 이었다.

“역운회는 지금은 세상을 등진 제 아들 석재경이 운영해왔습니다. 해당 단체와 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접점이 없기에,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아들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게 사실이라면, 아버지로서 책임지고 사과드리겠습니다.”

돌연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새 변한 석일태의 표정이 자못 침울했다. 차유신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 천하의 석일태가 그냥 죽을 리 없다. 분명히 허수아비를 내세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아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석재경은 고인이다. 혐의를 물을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그런 그를 과도하게 들췄다가 세간에서 고인 모독이라는 손가락질이라도 받으면 차유신 쪽이 불리해진다.

“그래요? 난 전혀 몰랐습니다.”

예사로이 대꾸한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스피커 앞에 서 있던 권헌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권 비서님. 준비한 것 트십시오.”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헌이 스피커와 연결한 녹음장치를 재생했다. 회의장이 돌연 웅웅거렸다.

-석 회장님이 20년 가까이 역현구 관할 경찰들과 결탁한 덕에 역운회가 얼마나 제멋대로 지역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이번에 낱낱이 까발릴 생각이었는데. 아주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거 차유신 목소리 아니야? 몇몇 의원들이 술렁였다. 석일태의 동공이 두드러질 정도로 커졌다. 차유신은 음악을 감상하듯 묵묵히 녹취를 들었다. 차유신의 목소리가 멎고, 곧 중년 남성의 대답이 들렸다.

-세상일이 차 의원 생각처럼 항상 모범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야. 그런 세상이니 내가 20년 가까이 역운회를 순탄하게 이끌어온 것 아니겠어? 역현경찰서 공무원들이 뒤봐주는 거, 충분히 누리면서 말이지.

듣고 있던 문지찬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양 입을 감쌌다. 이내 차유신을 힐금거리며 낄낄거렸다. 아이고, 예뻐 죽겠다. 씹새끼야. 차유신의 시선이 태연하게 넘어갔다. 데스크를 짚고 있던 석일태의 손이 꽉 주먹을 만들었다.

차유신을 담은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로 부라려졌다. 석일태가 이 대화를 모를 턱이 없다. 우태원의 집에 갇혀있을 때, 잠시 방문했던 그와 나눈 그것이다.

“석 회장님. 다시 한번 얘기해보시죠. 역운회가 누구 거라고요?”

차유신이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석일태의 숨이 거칠어졌다. 검은 입 안에서 날 선 이빨이 곤두섰다.

*

국정감사는 오후 6시에 맞춰 끝이 났다. 주차장으로 나온 차유신은 담배부터 꺼냈다. 흡연공간이 따로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일단 피웠다. 8시간 내내 국감에만 몰두하느라 담배 한 대 피우지 못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의원님.”

뒤따라온 권헌이 말했다. 차유신이 주억거렸다.

“어. 권 비서도 고생 많았어.”

“저는 한 게 없습니다.”

“한 게 왜 없어. 권 비서 없었으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

차유신의 손끝에서 툭, 재가 떨어졌다. 빤히 보고만 있던 권헌이 부쩍 머뭇거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국감 때문에 정신없으신 것 알고 있어서, 일부러 끝난 다음에 말씀드리려 했던 건데.”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뭐.”

또 한 번 재를 떨군 차유신이 무심코 눈을 굴렸다. 저편에 주차한 검은 세단 뒷좌석에 석일태가 타고 있었다. 그 옆에 막 멈춘 같은 차종의 세단에서 키 큰 남자가 나와 석일태의 세단 쪽을 향했다. 멍하니 보고 있던 차유신의 초점이 흐려졌다. 우태원.

“녹취내용에 포함돼있던 조금은 예민한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잠깐만.”

권헌의 얘기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저지한 뒤 보다 면밀히 그쪽을 살폈다. 열린 차창 너머로 석일태가 고개를 내밀었다. 꾸벅한 우태원이 뭔가를 얘기했다. 석일태는 듣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들은 내용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긴 숨을 뱉은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느른한 눈초리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차유신은 피하지 않았다. 희뿌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아득해지는 그의 낯을 감시하듯 지켜봤다.

문득 우태원이 손 하나를 내렸다. 검은색 정장 바지를 짚은 기다란 손가락이 툭, 툭, 두드려졌다. 차유신의 눈이 둥그레졌다. 다물린 입술이 움찔거렸다. 모스부호였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단어를, 문장을, 연결된 메시지를 완성했다. 차유신은 흡연하는 것도 잊은 채 그것을 봤다.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 끝이 치익,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선배, 명령, 수행, 희망, 지금.

선배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제가 희망하는 것을,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차유신의 손에서 식은 담배가 떨어졌다. 바쁘게 얼굴을 쓸어 올리고는, 서둘러 권헌을 확인했다.

“미안. 다시 얘기해 봐.”

권헌의 턱이 불끈해졌다. 연신 숨을 고르고 난 그가 말했다.

“제가 이것 하나는 꼭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영혼 없이 반문한 차유신의 눈길이 벽에 머물렀다. 반쯤 벗겨진 낡은 페인트칠을 보며, 차유신은 방금 전의 환영을 곱씹듯 입술을 짓이겼다. 꽉 쥐었다 편 손이 제 목덜미를 쓸었다. 식다 만 땀이 가죽을 적셨다. 벽에서 달랑거리던 페인트칠이 바람을 맞아 떨어졌다.

저런 우태원은 오랜만이다. 차유신의 지시에 순한 양처럼 나오는 건, 비서 시절 이후 처음 본다. 그러면 안심을 해야 하는데. 저 위험한 짐승을 자신이 길들였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차유신은 지금 불안하다. 아주 많이 불안하다.

우태원이 말하는 차유신의 ‘명령’이, 자신이 의도했던 ‘명령’과는 다른 것처럼 여겨져서. 그 얘기를 건네 오는 우태원의 인영은 흡사 다른 세상의 것처럼 어른어른했다. 그래서 그의 얘기조차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제가 어떤 걸 보고, 어떤 걸 들었든. 의원님에 대한 충성심은 변치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독히 묵직한 언어가 귀를 스쳤다. 전율한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결연한 권헌의 낯이 망막을 점했다. 차유신은 가만히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 알았다. 이 불안감의 정체를. 권헌의 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알 것 같다.

그건 무지였다. 자신은 방금 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우태원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새로운 가면은, 바로 욕망이었다.

우태원이 드디어 욕망을 알았다.

*

“금배지가 별거야? 뭐 그리 대단한 분들이라고 다 보는 앞에서 남한테 망신살을 주고 말이야. 나도 직전 정권 때 신진화당에서 공천제의 받았어. 고향 지역구에 꽂아준다는 옵션까지 더해서. 그런데 내가 안 했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야. 그런 위험천만한 걸 왜 해? 당시 난 청장 승진이 확정된 입장이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별이 있는데, 뭐 하러 밖에 나가서 금을 따냔 말이야.”

식식거린 허대윤이 손을 올렸다. 목 끝까지 채워진 정종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내려 테이블 위의 신문과 함께 치웠다. 차유신은 밀려나는 신문지의 고딕체 글자를 묵묵히 읽었다.

「‘역운회 실소유주 논란’ 한 달… 두문불출 석일태」

경찰청 국정감사 이후 한 달이 흘렀다. 언론은 득달같이 역운회 및 석일태 관련 후속기사를 내보냈다. 핵심은 역운회가 역현경찰서와 짜고 어떤 비위행위를 벌여왔는지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역운회를 실질 운영한 것이 석일태인지, 아닌지였다.

대중은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출한 명제를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국감이 대중에게 남긴 건 ‘역운회 실소유주가 석일태일 수도 있다’는 열린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유신의 의도였다.

심증은 충분하다. 역운회 자체가 석일태와 도명진, 배민기가 합심해 세운 곳이고. 거기서 나온 기업이 세 사람의 이니셜을 딴 ‘SDB’다. 다만 명백한 물증이 존재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결국 사태는 역운회를 소유했을 수도, 소유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석일태를 둔 진실 공방으로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역운회가 얼마나 악질적인 깡패조직이었는지가 알알이 드러나고, 실질 소유주일 수도 있는 석일태는 잠정적 죄인이 돼갔다.

석일태는 일단 칩거를 택했다. 외부 노출을 최대한 삼가면서 이 이슈가 사그라지는 걸 기다리는 작전이다. 가장 전통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차유신은 그의 뜻대로 상황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국감 때, 혹은 차유신이 조신희 회장을 앞세워 폭로한 역현T시티 민영화게이트 사건 때, 혹은 차유신조차 모르는 아주 오래전. 이 지난한 게임에 차유신은 차유신의 방식으로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다.

“제가 국감에서 청장님께 제기한 지적의 강도가 과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정중히 사과한 차유신이 정종병을 들었다. 곁눈질을 한 허대윤이 마지못해 하는 척 빈 잔을 밀었다. 조르르, 소리와 함께 잔이 찼다. 연신 힐끔거리는 허대윤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차유신의 눈치는 보고 있었다.

“다음 달 경찰청 종무식에서 송년사 내실 거죠.”

차유신이 물었다. 허대윤이 되물었다.

“우리가 매년 배포하는 그거?”

“네.”

“당연히 내겠지. 연례행사 같은 거니까.”

“잘 됐습니다. 일단 이거 한번 확인하시죠.”

차유신이 빈 의자에 뒀던 서류를 챙겨 건넸다. 받아든 허대윤이 미간을 좁혔다.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고개를 가눈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쓴 송년사 가안입니다. 앞뒤 내용은 크게 중요치 않으니 비서실 시켜 조율하시고, 핵심인

가운데 부분만 최대한 살려주십시오.”

“차 의원.”

“저와 약조한 거 잊지 않으셨죠. 늦어도 내년 2월입니다. 봄부터 시작되는 차기 대권 다툼으로 전 국민 관심이 쏠려버리면, 시기를 놓칩니다. 그보다 앞서 전 언론이 주목할 만한 이슈를 청장님께서 선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프로젝트의 성공확률이 높아집니다.”

차유신이 팔짱을 꼈다. 허대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떨리는 시선이 페이지에 실린 첫 문장을 머금고 있었다.

더 나은 대한민국, 더 나은 국민 치안을 위해 대한민국 경찰은 내년부터 ‘조폭과의 전쟁’을 공식 선포합니다.

일명 역운회 제거 프로젝트. 경찰청으로 하여금 역운회와의 정면 대결에 나서도록 하는 게 골자다. 차유신은 지난 국감 때 역운회라는 음지 조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이제 역운회라는 깡패 조직이 존재하고, 그 조직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 조직에 대한 불안감이 따라붙었다.

그 타이밍에 경찰청장 허대윤이 터뜨린다. 전 경찰을 동원해 조직폭력배를 일망타진하겠다며 초유의 선전포고를 한다. 두루뭉술하게 조폭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타깃은 역운회 하나다. 숫자까지 정해져 있다. 역운회 조직원 최소 100명 검거.

차유신은 그를 위한 특별한 무기도 준비했다.

“예고드린 대로 수사국장 쪽에 베타 프로그램 보냈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해당 프로그램을 개발한 컨리드의 성윤일 대표가 직접 청에 방문해 시연할 겁니다.”

“그래, 뭐. 좋아. 다 좋은데…. 예산이 걸려.”

한참이나 고민하던 허대윤이 얼굴을 들었다.

“CCTV 1200대를 어디서 구해? 그것도 오로지 역현구에만 설치하는 용도로. 경찰청에 돈이 남아나는 줄 알아?”

“얼마 안 합니다. 내년에 본청에 설치한다는 쓸데없는 기념관보다야 이쪽이 효용성은 뛰어나겠죠.”

허대윤이 손가락질을 했다.

“CCTV 수만 절반으로 줄이자. 1200대는 솔직히 무리….”

“그 정도가 들어가지 않으면 역운회의 일거수일투족을 충분히 감시할 수 없습니다. 청장님께서는 기껏 먼저 도발하고 패배자가 되고 싶습니까.”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청장님, 내년 8월에 퇴임하자마자 집으로 숨어드는 일은 없었으면 하시잖습니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신진화당에는 청장님을 원하는 몇몇 선배가 있습니다. 다만 당시 공천이 흐지부지된 건, 국민에 내세울 만한 청장님만의 커리어가 결여돼있기 때문입니다.”

룸 안이 고적해졌다. 허대윤의 낯이 벌게졌다.

“그 커리어, 제가 만들어드리는 겁니다. 역운회 작업하고, 허대윤 방식의 치안 정책으로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이력 앞세워 차기 총선에 나서는 겁니다. 얼마나 이상적이고 매끄러운 방식입니까.”

차유신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일단 CCTV만 설치하면, 그걸로 팔 할은 해결됩니다. 컨리드가 개발한 AI 얼굴인식 시스템은 수백 명의 역운회 조직원을 실시간으로 판별합니다. 역운회 쪽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그걸 추적해 즉각 검거에 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한 건 두 건 실적을 쌓아가며 역운회를 전면 통제하는 겁니다. 역운회의 씨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요.”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또다시 조용해진 룸 안에서 허대윤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곧 손을 뻗어 술잔을 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최대한 맞춰보도록 하지. CCTV 1200대…. 한숨 나오는 숫자지만 수사국에 할당한 예산 좀 조정하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여간 차 의원도 참 고집이 대단해.”

고개를 저은 허대윤이 스스로 잔을 채웠다. 곧 입가에 가져가 쭉 들이켠 뒤 혀를 내둘렀다.

“툭 까놓고 얘기하자. 석일태가 뭘 그렇게 거슬리게 했어? 차 의원이 대국민당의 젊은 의원들과 결탁해 SDB그룹 작업까지 추가로 계획 중이라는 얘기가 들려. 대체 그 깡패 새끼하고 무슨 원수를 진 거야?”

허대윤이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눈빛에서 호기심과 한탄이 비쳤다. 무표정으로 마주 보던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에 올라온 허대윤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겹치고는, 힘을 줘 지분거렸다. 허대윤의 윗눈썹이 비틀렸다. 차유신이 담담히 입을 뗐다.

“허 청장님.”

곤두선 집게손가락이 허대윤의 손등을 찔렀다.

“역현구 국회의원이 역현구 지키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사람 속물로 만들지 마시죠.”

실소한 허대윤이 손을 뺐다. 이내 그만두자는 양 시선을 비꼈다. 적막한 공기가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허대윤이 문득 익숙한 이름을 던졌다.

“그나저나 우태원 의원 말이야.”

차유신이 흠칫했다. 허대윤이 고저 없이 말을 덧붙였다.

“김후준 의원 쪽에서 곧 컷 당할 것 같아.”

다시 마주쳐온 허대윤의 눈이 자못 공허했다. 마른입을 축인 차유신이 몸을 젖혔다. 딱딱한 등받이에 기댄 채 잔잔한 파동이 이는 잔 안을 주시했다. 맑은 표면에 비치는 자신이 조금씩 분열하고 있었다.

곤로한 호흡이 물처럼 번졌다. 예상했다. 대국민당의 최도현이나 민아영으로부터 언질을 받은 바도 있다. 우태원은 곧 제거당한다. 그를 국회에 끌어들인 김후준 당사자로부터.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SDB그룹과 석일태가 논란의 중심에 선 지금, 김후준으로서는 그들과 거리를 두는 일이 급선무다. 우태원은 그 과정의 핵심에 있다. 김후준의 측근이자 석일태의 측근으로, 두 사람의 연결고리와도 같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차유신이 물었다. 허대윤이 갑자기 뭉그적거렸다. 말을 할 듯, 말 듯 서슴거리던 그가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김후준 대표 본인으로부터.”

차유신의 어깨가 경련했다. 허대윤이 부쩍 자세를 고쳤다. 힘겹게 떨어진 입술 틈으로 텁지근한 언어가 새어 나왔다.

“실은 김후준 의원으로부터 요청이 왔어. 나와 차 의원이 아주 가까이 지낸다는 걸 어찌 안 모양이야. 차 의원하고 자리 한 번 마련해달라 하더라고.”

“김후준 선배와 친하셨습니까.”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허대윤이 딴청을 피웠다.

“아주 친한 건 아니지만…. 경주외고 선배거든.”

“그래서요.”

“나야 방도가 있겠어? 그리하겠노라 했지.”

“자리는 언제 마련할 생각이신데요.”

차유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허대윤이 유독 짙은 숨을 내뱉었다.

“지금.”

동시에 룸 문이 열렸다. 벌어진 틈으로 검은색 정장 바지가 들어왔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허탈한 혼잣말이 나왔다.

“김후준 선배.”

우뚝 선 김후준이 차유신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응?”

“이쪽에 앉으십시오. 선배.”

서둘러 일어난 허대윤이 김후준에게 제 자리를 내줬다. 느긋하게 앉은 김후준이 입매를 꼬았다.

“잘 지냈고? 요즘 대단히 잘 나가던데. SDB 저격수로 명성이 아주 자자해.”

“잘 못 지냈습니다. 딱히 잘 지냈던 기억이 없습니다.”

차유신이 냉하게 쏘아붙였다.

“2년 전 선배에 의해 국회에서 쫓겨난 이후, 한 번도요.”

김후준이 피식거렸다. 표정이 기이할 정도로 상냥했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상처도 주고, 또 상처도 받고 하는 거야. 너는 누구한테 안 그랬어? 우리 다 그러면서 사는 거잖아. 안 그래?”

“여긴 일부러 오신 겁니까.”

“아니. 이 식당에서 태원이하고 저녁 약속 있었어. 방금 전에 마치고 여기로 이동한 거야.”

“우태원은 선배 손에 제거당할 예정인 걸로 아는데, 그 와중에 마주 보며 밥이 넘어가시나 봅니다.”

“보낼 땐 보내더라도 써먹을 수 있을 데에는 다 써먹어야지. 너 때도 그랬잖아. 네 로비게이트 터지기 일주일 전, 나하고 여기서 식사했지. 혁신 핀테크 지원책 논의하면서.”

김후준이 입매에 호를 걸었다. 석연치 않게 마주 보던 차유신의 대뜸 테이블을 짚었다. 이내 커다랗게 숨을 삭인 뒤 벌떡 일어났다. 김후준이 유유히 질문했다.

“가게? 너하고 인생 얘기 좀 찐하게 해볼 생각이었는데.”

“원하시는 게 뭡니까.”

“우태원 작업해야 하는데, 네 머리 좀 빌리자.”

걸어가던 차유신이 움찔했다. 김후준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약점이 없더라고. 석일태와 밀접하게 연관된 건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친인척 관계인 것도 아니고 SDB에 우태원 주식이 깨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태원 끔찍하게 혐오하는 차유신이라면 답이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거지.”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알아. 나 뻔뻔한 거. 하지만 충분한 대가가 뒷받침된다면 그리 뻔뻔할 것도 없지.”

김후준의 눈초리가 은근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내년 대선은 대국민당에서 내가 출마해. 이런저런 절차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당에는 나 이외의 선택지가 없어.”

이어지는 언어가 자못 부드러웠다.

“대국민당으로 돌아와서 내 러닝메이트 역할 좀 하자. 당선되고 나면, 네가 원하는 커리어를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세팅해주지. 너도 알다시피 후배 키우는 데에는 나만 한 선수가 없어. 미리 얘기하지만 이번엔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을 거다. 아니, 이제는 내가 못 버려. 너 같은 놈을 어떻게 버리니? 이 기회, 절대로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중간에 낀 허대윤이 난처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김후준을 힐긋한 차유신이 문득 헛웃음을 쳤다. 김후준의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다. 차유신이 새삼 다정히 말했다.

“정말 선배만 한 선수가 없네요.”

나아간 손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빙글 돌려 연 뒤, 바깥으로 성큼 나서며 뇌까렸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좆같기로는 선배께서 일등이십니다.”

탁. 복도에 선 차유신이 문을 닫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복도를 좌우로 보다가 무작정 발을 뻗었다. 일단 우태원이 있었다는 그 방에 가볼 생각이다. 우태원도 눈치는 챘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우태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예전에 당한 적이 있는 입장에서 이미 들은 걸 묵과하고 싶지 않았다.

발을 내딛던 차유신의 손목이 덜컥 잡아채였다. 멈춰선 차유신이 뒤를 돌아봤다. 로비에서 대기하는 줄 알았던 권헌이 차유신을 붙든 채 헐떡이고 있었다. 차유신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여기에 있어? 이쪽에는 앉아있을 곳도 없는데.”

“어디 가십니까. 의원님.”

“잠깐 다른 방 좀 들르려고. 볼 일만 마치고 금방 나올 거야. 밖에서 대기하고 있….”

“안 가시면 안 됩니까.”

다소 절박한 어투로, 권헌이 재차 물었다.

“우태원 의원, 안 만나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꼬리와 부여잡은 손이 동시에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차유신의 낯이 식어갔다. 그저 권헌을 주시하는 일만 이어가다가, 대뜸 다른 손을 뻗었다. 이어 그의 팔을 휘어잡으며 지시했다.

“잠깐 나와.”

야멸찬 손길에 권헌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이끌려갔다. 단숨에 복도를 가로질러 건물을 나선 후, 옆 편에 있는 작은 공터로 이동했다. 가로등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멈춘 차유신이 허리를 짚었다. 권헌은 난감한 듯 고개만 숙였다.

“대체 뭐가 문제야.”

날 선 질문이 나왔다. 수그린 권헌이 답했다.

“죄송합니다.”

“사과 필요 없어. 내가 할 말 있어서 우태원 만나는 게 대체 뭐가 문제인지 얘기를 해.”

“우태원 의원이.”

망설인 권헌이 덧붙였다.

“의원님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먼 곳에서 날아온 바람에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잠시 어깨를 떨고 난 차유신이 시선을 끌어올렸다. 온통 어둠뿐인 공간 속에서 권헌의 눈동자가 죽어갔다.

“녹취파일의 그 부분에 나온 의원님은, 제가 알던 의원님이 아니었습니다.”

차유신의 등줄기가 전율했다. 권헌이 얘기하는 ‘그 부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권헌의 숨결이 분연해졌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해도, 어떻게 강간당하다시피 그런 일을…. 그런 건, 제가 알던 의원님이.”

“권헌.”

차유신이 매섭게 외쳤다.

“그 입 닥쳐.”

미약하게 소스라친 권헌이 재차 고개를 떨궜다. 바로 사죄가 찾아들었다.

“죄송합니다.”

“네가 뭔데 나를 규정해.”

“죄송합니다.”

“우태원에게 강간당한 적 없어. 좆같은 얘기 함부로 지껄이지 마.”

차유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권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그시 눈가를 짚고 난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어둠에 젖은 조경용 수풀을 응시하다가, 허망한 질문을 흘렸다.

“너 그래서 그랬어?”

권헌이 주춤했다. 차유신이 차가운 곁눈질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T시티에 불을 질렀냐고. 내가 얘기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잖아. 대체 왜 그렇게 한 거야. 거기에 나온 내가 네가 생각하던 내가 아니라서, 그게 열 받아서 그딴 짓을 했어?”

“그건 그래서가 아닙니다.”

권헌이 다급히 부정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가쁜 숨이 샜다. 권헌의 양 눈이 질끈 감겼다.

“질투가 났습니다.”

이윽고 드러난 눈망울이 흐렸다.

“우태원 의원에게 질투가 났습니다. 당시에는 주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나마 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권 비서. 너 아직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의원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권헌의 입이 다물렸다. 완전히 질려버린 차유신이 제 얼굴을 감쌌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고는, 성난 팔을 뻗었다. 올라간 손이 권헌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두터운 뼈대가 움칠거리며 반응했다. 차유신이 똑바로 눈을 맞췄다.

“내가 너 총 두 번 봐줬어.”

권헌의 턱이 덜덜거렸다.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나 잘 때 허락 없이 입 맞춘 것 한 번 봐주고, 내가 아끼는 T시티에 지시한 것 이상으로 불 지른 것 한 번 봐줬어. 하지만 세 번째는 없어.”

차유신의 손이 떨어졌다. 강고한 경고가 두 사람의 좁은 틈을 갈랐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마음에 사로잡혀 내 신경 거스르면, 그땐 내 의원실에서 짐 싸.”

권헌은 쉬이 답하지 않았다. 고요에 사로잡힌 사위에서 또 한 번의 바람이 찾아들었다. 흩날리는 앞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차유신은 이마를 더듬었다. 엄한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숨만 삭이던 그때,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 누구야.”

차유신이 매섭게 소리쳤다. 차유신과 권헌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건너편 수풀 위로 어떤 그림자가 비쳤다. 정확히 무엇의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삐죽삐죽 선 풀의 끄트머리 때문에 형체가 지리멸렬했다. 분명한 건, 눈이 아릴 정도로 새까맣다는 것 정도였다.

월! 돌연 그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낯이 굳었다. 생각해보니 이 식당에서 바깥에 두고 키우는 큰 개가 하나 있긴 했다. 하여간 개새끼가 문제지. 혀를 찬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곧 권헌을 스쳐지나가며 명령했다.

“난 다시 안에 들어갔다 나올 테니까, 차에서 대기하고 있어.”

등 너머로 무기력한 대답이 들렸다.

“네. 의원님.”

*

우태원과 김후준이 미팅했었다는 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바로 알려줬다. 우태원 의원님 쪽 몇 분은 아직 안에 계세요. 상냥하게 안내한 매니저가 어느 룸 앞에 섰다. 이내 손수 노크를 하고는, 뒤로 빠졌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두 남자가 재깍 얼굴을 들었다. 한 명은 우태원 의원실 정무보좌관이고, 한 명은 유해겸 비서였다. 차유신임을 확인한 두 사람이 동시에 기립했다. 유해겸이 놀라 물었다.

“형님! 여기에 계셨어요?”

“우태원은.”

“먼저 나갔습니다.”

“나갔어?”

“네. 애인 만난다고.”

유해겸이 빠릿빠릿하게 답했다. 차유신이 눈을 일그러뜨렸다.

“애인?”

“네.”

“우태원에게 애인이 있어?”

“어, 뭐…. 있나 보죠? 본인 얘기는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우리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차유신의 입에서 저소가 번졌다. 진짜 어이가 없네. 혼잣말을 뱉고는 등을 보였다. 형님, 가세요? 뒤에서 유해겸이 부르는 게 들렸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도로 복도를 걸어 밖으로 나왔다. 아까의 공터로 간 뒤 벽에 등을 붙인 채 주저앉았다. 별조차 빛나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를 물고는, 불을 붙인 뒤 입 안에 고인 연기를 내뿜었다. 새까만 시야에 흐릿한 안개가 꼈다.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뭐.”

날연한 한 마디를 연기와 함께 곱씹었다. 정말이지 우태원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힘든 싸움이 될 거다. 그렇게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란 걸 알지만, 상대는 대국민당의 중심과도 같은 김후준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김후준에게 제대로 제거당하는 게 차유신에게도 편할 터다.

그러면 그 거슬리는 면상을 최소한 국회에서는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반쯤 타들어 간 담배가 입에서 떨어졌다. 연신 연무를 흘리며 어깨를 주무르던 차유신의 팔뚝에 간질거리는 뭔가가 닿았다. 힐긋 확인한 차유신이 기겁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개가 차유신의 몸에다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씨발…. 좀 묶어두고 다니지.”

짜증스럽게 뇌까린 차유신이 개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한번 거절당한 개는 기도 안 죽고 졸졸 따라와 또 차유신에게 붙었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식당 사장 말로는 순종 진돗개라더니, 하는 짓거리가 동네 똥개 수준이다.

“적당히 해라.”

경고한 차유신이 도로 담배를 물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개로부터 억지로 신경을 끈 채, 먼 곳을 봤다. 건너편 수풀에서 또 부스럭,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눈이 깜박였다.

아까의 그림자가 그대로 있다.

지잉. 그림자 쪽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짧게 불빛이 번뜩이고, 어긋나있던 형체가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차유신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머리, 어깨, 팔, 다리. 명백한 사람이다.

“어. 어디 갔냐고? 그건 왜 묻는데.”

나직나직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히 익숙하다. 핸드폰을 얼굴에 댄 검은 실루엣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갈증 난 듯 차유신을 핥아대던 개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풀죽은 모양새로 실루엣의 눈치를 보다가, 곧 도망치듯 내뺐다.

“아. 차 선배가 나를 찾았어?”

가까워지는 얼굴에서 느긋하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비쳤다. 그것도 잠시, 완연한 암흑이 차유신의 시야를 메웠다. 희미하게나마 찾아들던 가로등 불이 남자에게 가로막혔다. 빛을 삼킨 남자에게서는 아까의 개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애인? 내가 애인이 있었어?”

남자가 헛헛하게 물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상대방이 닦달했다.

-제가 애인 만나러 가냐고 했을 때 형님께서 부정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죠.

“그래? 난 그거 못 들었어.”

-그래서 형님 지금 누구 만나러 간 건데요. 방금 김후준 의원도 물어보고 갔어요.

상대방이 채근했다. 차유신을 향해 몸을 낮춘 남자가 긴 숨을 내쉬었다. 미지근한 훈풍이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밤을 머금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응. 애인.”

올라간 손가락이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점멸하는 액정이 우태원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낯을 구긴 차유신이 입을 뗐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한 시간 전부터요.”

“뭐 하러.”

“그냥…. 바람 쐬려고요.”

이동한 손가락이 차유신의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럼 왜 기척도 없이 있었어?”

“기척, 했어요. 했는데.”

우태원의 어조가 사뭇 딱딱했다.

“권 비서 죽이려고, 아까 움직였었거든요.”

차유신의 속눈썹이 덜컥 곤두섰다. 귓바퀴를 타고 우태원의 목소리가 뱀처럼 기어 다녔다.

“말했잖아요. 내게 있어 선배하고 접촉한 건 다 섹스로 취급된다고.”

곧 귀 안에서 똘똘 똬리를 틀었다.

“선배에게 키스한 건, 선배 입에다 좆 처박은 것하고 같아요.”

반사적으로 옮겨진 손이 주머니 안에 처박혔다. 액정을 더듬어 권헌의 단축번호를 새겼다. 통화 버튼까지 누르고 난 손가락이 멈칫했다. 불쑥 내려온 손아귀가 차유신의 손목을 감고 있었다.

“어디에 전화 걸어요?”

우태원이 은은하게 물었다. 동시에 핸드폰 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예, 의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차유신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나왔다. 진짜 죽인 건 아니구나. 고개를 내린 차유신이 짤막하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대기해.”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보다 제대로 우태원을 응시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제가 진짜 죽였을 줄 알았어요?”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너라면 아주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지.”

“그건 맞아요. 솔직히 아까는 진짜 죽일 생각도 있었는데.”

우태원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러갔다.

“그러면 선배가 저를 싫어할 거잖아요.”

기묘할 정도로 진중한 대답. 차유신의 입이 달싹였다. 아까의 개가 슬금슬금 근처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어대는 게 보인다. 가만히 그 개를 일별한 우태원이 입을 열었다.

“사실 나에게는 아직도 어려워요.”

소용돌이와도 같은 바람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팔랑거리며 나부끼는 머리카락 틈으로 우태원의 고요한 얼굴이 비친다. 모든 것이 깜깜한 가운데,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커다랗고 둥근 달만이 환하다.

“선배를 얻고 싶은데, 어떻게 얻어야 할지.”

우태원의 눈에도 검은 달이 걸렸다.

“혹은 얻을 수나 있을지.”

바닥을 짚고 있던 차유신의 손이 움츠려졌다. 파삭, 소리와 함께 모래알이 깨졌다. 기웃거리던 개가 털썩 몸을 내렸다. 아예 웅크린 채 이쪽을 주시하는 짐승이, 마치 유일한 관객 같다.

“그래도 일단은 선배가 길을 알려줬잖아요.”

우태원의 손이 다가왔다. 얼기설기 흩어진 머리카락에 기다란 손가락이 걸렸다. 다정하게도 정돈하는 손길에 차유신의 어깨가 울렸다. 소름이 돋았다. 그 손길이, 마치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아서.

언젠가의 불안감이 짙어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나에게 선배 맛의 과실을 물려줬잖아요.”

이어지는 음성이 귓가를 범하듯 옥죄었다. 차유신의 목구멍으로 꿀꺽, 침이 넘어갔다. 밭은 숨을 고른 얼굴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다시금 우태원에게 시선을 꽂은 채, 올곧은 경고를 꺼냈다.

“네가 어떻게 해석한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얘기는 지극히 원론적인 것이었어. 더 이상 석일태나 김후준의 바운더리 안에 머물지 말고, 너 자신의 의지에 따르라는….”

“그 얘기가 결국 그 얘기죠.”

우태원이 상체를 숙였다. 묵직한 숨결이 옆얼굴을 스쳤다. 차유신의 턱이 덜컥거렸다.

“나는 역현구를 얻으면 선배도 얻을 줄 알았어요. 선배도 결국 역현구의 일부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게 아니더라고요. 둘은 결국 다른 존재더라고요.”

차유신의 머리에서 우태원의 손이 거둬졌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눈썹을 간지럽혔다. 차유신은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거기에까지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긴장한 오감이 오로지 하나의 존재를 향해 곤두서있다.

“역현구는 지옥에 있지만, 선배는 천국에 있거든요.”

우태원이 머리를 까딱했다. 차유신의 동공이 공률했다. 우태원의 어깨 너머에 존재하던 달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존재하는 건, 커다랗고 새까만 구름이다.

온 세상이 암흑이다.

“처음에는 선배를 제가 있는 곳으로 끌어내리려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월! 돌연 저편의 개가 짖어댔다.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그쪽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끝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차유신의 어깨를 붙든 우태원이 벽에다 박제할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제가 선배가 사는 천국으로 간 다음 그곳을 무너뜨리면, 그땐 선배가 저에게 올까요?”

조곤조곤 물은 우태원이 답을 헤아리듯 차유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그곳까지 지옥으로 만들면…. 그땐 내가 원하는 대로 될까요.”

“우태원.”

월월! 보다 세찬 개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얼어있던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제대로 공격 자세를 취한 개가 저편을 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방황하던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급히 우태원의 가슴팍을 짚고는 밀어냈다. 이내 어둠에서 달아나듯 그의 품에서 빠졌다.

“의원님.”

낯익은 음성이 들렸다. 차유신의 눈이 커졌다. 땀을 뻘뻘 흘리는 권헌이 보였다.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걱정이 돼서.”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물끄러미 보던 우태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할딱인 차유신이 우태원을 막아섰다. 이내 권헌 쪽으로 저벅저벅 걸으며 지시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우물쭈물하던 권헌이 꾸벅했다.

“네. 의원님.”

막 들린 차유신의 발등이 문득 축축했다. 헥헥거리며 차유신의 구두를 핥던 개가 뚫어져라 눈을 맞춰왔다. 멈춰선 차유신이 긴 숨을 들이켰다. 이어 몸을 틀며 뒤를 확인했다. 우태원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두 가지만 얘기할게.”

가라앉은 눈으로 우태원을 바라봤다. 우태원은 기꺼이 끄덕였다. 차유신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우선 하나. 너는 절대로 내가 사는 세상을 망치지 못해. 아무리 올라와봤자, 넌 결국 밑바닥이거든.”

차유신의 손이 들렸다. 꼿꼿하게 우태원을 가리킨 채, 말을 이었다.

“그런 밑바닥 인생이어도, 결국 너 역시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한 가지 조언을 해주자면.”

손가락이 꺼떡거렸다. 선명한 한 마디가 밤을 갈랐다.

“둘. 김후준 조심해. 거기서 더 올라갈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떨어지지는 마.”

우태원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피식거린 그가 눈매를 접었다.

“그래요. 고마워요. 선배.”

등을 보인 차유신이 다시 나아갔다. 엉거주춤 물러나던 개가 또 저편을 봤다. 이내 자지러지게 월! 짖어댔다. 곁에 있던 권헌이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개와 권헌을 번갈아 보던 차유신의 낯이 일그러졌다.

개가 권헌을 보며 짖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코너 너머에서 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개가 보다 소리를 높였다. 월! 월! 경계감이 역력한 울음소리 틈으로 중년 남자 음성이 끼어들었다.

“생각보다 사이가 좋네. 미처 몰랐어.”

차유신의 뒤꿈치가 꾹 지르밟혔다. 코너를 타고 검은색 가죽구두가 들어왔다. 부들거리던 개가 구두의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방이 대수롭지 않게 발 하나를 올렸다. 이내 거칠게 개의 목을 걷어찼다. 끼잉, 소리를 낸 개가 철퍽 넘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주 실망이다. 유신아. 스스로 오물 뒤집어쓰는 걸 자처하고.”

혀를 찬 김후준이 멈춰 섰다. 권헌의 낯에서 난색이 비쳤다. 차유신은 잠자코 고개를 가눴다.

“어디 손잡을 데가 없어서 우태원이하고 손을 잡아. 자존심도 없어?”

김후준이 빙글거렸다.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자존심이 없다…. 선배 입에서 나올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최소한 나는 맺고 끊을 줄은 알아. 쓰레기는 딱 이용할 만큼만 해 먹고 폐기 처분하거든.”

“나중에 대국민당에서 버림받는 날이 오더라도, 그 사고방식 여전하시길 바랍니다.”

차유신이 이기죽거렸다. 김후준이 뜬금없이 칭찬했다.

“유신아. 너 그 표정 참 보기 좋다.”

차유신이 움찔했다. 김후준이 느물거렸다.

“석일태 회장이 보여준 네 엄마 사진하고 아주 똑 닮았다. 그 쏘아보는 모양새가 엄청나게 매력적이야. 저 표정하고 사람 이목 끄는 게 쉽지 않은데. 응?”

심박수가 돌연 빨라졌다. 권헌이 놀라 차유신을 봤다. 숨을 몰아쉰 차유신이 뒤로 물러났다. 김후준은 계속해서 도발했다.

“네가 역현구에서 태어난 건 나도 최근에 알았다. 석 회장이 얘기해주더라고. 어머니가 그쪽에서 아주 유명한 술집 여자였다면서? 진작 얘기하지. 내가 물장사하는 여자들에게는 또 일가견이 있거든. 상상 이상으로 여린 사람들이야. 얼마나 여리냐면, 조금만 잘해줘도 금방 마음을 열어.”

김후준이 가볍게 우태원을 가리켰다.

“너도 봐봐. 우태원이 좀 잘해줬다고, 금방 마음 열고 말이야.”

비아냥거리는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술집 여자, 심지어 역현구. 그 피 어디 못 간다. 유신아. 개과천선하고 싶으면 마음 다부지게 먹어야지. 똑똑한 놈이 왜 이래? 나처럼 훌륭한 선배 모시는 법도 잊고 말이야.”

김후준이 심히 다정하게 말을 맺었다.

“잘해주는 건 내가 더 잘한다, 유신아. 네 엄마처럼 취급당하는 거 원하면, 그것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고.”

차유신의 입에서 찬 호흡이 번졌다. 미동하던 눈동자가 돌아갔다. 뒤편의 우태원이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걸 감지한 시선이 김후준의 등 뒤에 쏠렸다. 멀찍이 주차한 세단에서 예닐곱 명의 정장차림 남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전원 역운회. 차유신의 어금니가 깨물렸다.

우태원이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 이르면 오 초, 늦으면 십 초 안에 이 자리에서 김후준은 반시체가 된다. 그건 좋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이미 우태원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김후준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우태원과 역운회의 관계, 이 자리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 등을 모조리 공론화해 우태원을 제대로 매장시킬 거다. 어쩌면 이조차도 그의 의도였는지 모른다.

머릿속에서 물레방아처럼 상념이 돌아갔다. 어느 쪽이 최선일까. 김후준을 폭행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우태원. 저 걸레 같은 아가리를 보전한 채 안전하게 귀가할 김후준. 몇 번을 계산해도 일단은 후자다. 다만 문제는 우태원에게 후자를 택할 의향이 전혀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차유신이 변수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허무맹랑한 변수를 내놓을 생각이다. 우태원이 폭행한 사실은 당연히 모든 대중이 믿겠지만, 이건 아무리 얘기해도 대중이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차유신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 생각하니까.

“죄송하지만 전 치졸한 인간하고 엮이는 것보다야 쓰레기랑 엮이는 쪽이 나아서요.”

차유신이 부드럽게 말했다. 김후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차유신이 우태원의 앞에 섰다.

“우태원.”

우태원이 담담하게 답했다.

“네. 선배.”

“저거 멈춰.”

“싫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우태원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태연하게 뻗은 차유신의 팔이 우태원의 목덜미를 감았다.

“왜 깡패 새끼들은 참는 법을 모를까.”

우태원의 목을 고정한 차유신이 얼굴을 끌어올렸다.

“잠시만 참으면 천국인데, 그걸 못하니 천국에 못 가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유신이 우태원의 입을 덮쳤다. 다가오던 남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정지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김후준, 그리고 권헌까지 굳어버린 채 차유신과 우태원을 주시했다.

있는 힘껏 우태원의 목을 조인 채 그의 입술 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올라온 우태원의 손이 부러뜨릴 듯 차유신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접착한 입술 틈새로 후덥지근한 숨이 번졌다. 차유신은 눈을 깐 채 우태원의 혀 위에서 죽 제 혀를 미끄러뜨렸다.

“하아…. 갑자기 왜 이래요?”

더운 숨을 몰아쉰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은 대답 대신 질척이는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귀를 울렸다. 우태원의 안에 제 체향을 처바르듯 점막을 비비고 난 차유신이 천천히 혀를 뺐다. 젖은 우태원의 입술을 지분거리며,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어때. 정신이 확 들어?”

우태원이 높낮이 없이 대꾸했다.

“조금요.”

차유신이 픽, 웃었다.

“그럴 줄 알고 한 거야. 이 씨발 새끼야.”

추웁, 하며 우태원의 입술이 빨렸다. 눈을 질끈 감은 우태원이 대뜸 차유신의 뒤통수를 쥐어짰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겹쳐졌다. 이번에는 차유신의 입술이 부르틀 듯 흡입됐다. 흡, 소리를 낸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됐으니까 이제 떼.”

우태원이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차유신의 이에 날이 섰다. 단숨에 우태원의 아랫입술에 치아를 박고는, 콱 깨물었다. 우태원의 달뜬 낯이 살짝 떨어졌다.

“또 말 안 듣지.”

우태원의 입술에서 붉은 점액이 떨어졌다. 새삼 다정하게 핏물을 핥아 준 차유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부쩍 눈이 풀린 우태원을 주시하며, 나긋나긋 조롱했다.

“그런다고 나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인생 쉽게 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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