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너 14특수임무여단 출신이네.’
권헌의 입사 면접을 보던 날, 차유신은 그 말부터 꺼냈다. 놀란 권헌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여기에 써 있잖아.’
차유신이 들고 있던 이력서를 팔랑거렸다. 권헌이 멋쩍게 머리를 매만졌다.
‘아, 네. 그랬죠.’
‘보직 뭐였어.’
‘무전병이었습니다.’
‘나하고 같네.’
픽, 웃은 차유신이 이력서를 내려놓았다.
‘나도 14여단 무전병 출신이거든.’
권헌의 등줄기가 일자로 쭉 뻗었다.
‘몰랐습니다.’
‘중요한 거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권헌이 입을 달싹였다. 도통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좀처럼 눈을 맞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차유신은 점점 미소를 거뒀다. 자신이 지독히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지포 라이터 있어?’
나직한 질문이 나왔다. 권헌의 어깨가 흔들렸다. 조심스레 차유신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극히 예의 바른 언어가 새어 나왔다.
‘14여단에서 은어로 얘기하는 녹음기를 의미하신 거라면, 지금 제 수중에 없습니다. 당연히 보통은 안 갖고 있고요.’
주억거린 차유신이 뇌까렸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똑 부러지게 해줘.’
권헌의 볼이 얼핏 상기됐다. 다부진 대꾸가 건네졌다.
‘네. 의원님.’
*
“의원실 비서가 좀 들여다 보겠다 하는데 거부하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야? 물론 거기다가 입술 들이미는 건 나도 예상치 못했지만, 본인이 걱정해서 그랬다는데. 그냥 넘어가지, 응?”
차유신의 입에서 딱딱한 언어가 나왔다. 우태원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선배가 다른 사람하고 접촉하는 걸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했어요?”
차유신의 윗눈썹이 움찔거렸다. 꿰뚫을 기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하염없는 무채색이다. 그래서 그 의중을 파악하는 게 조금은 어렵다. 단지 당시의 행위가 언짢았던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심상치 않은 뭔가를 발견한 것인지.
차유신의 손이 시트를 덮었다. 습관적인 손짓으로 매끄러운 천을 두드렸다. 툭, 툭, 툭.
14여단에 무전병으로 배치됐을 때, 차유신은 가장 먼저 모스부호를 배웠다. 아주 낡아빠진 교육 과정의 일부였다. 실제 모스부호를 실용성 있게 쓴 일은 손에 꼽히지만, 그럼에도 차유신은 오래도록 당시 배운 걸 잊지 않았다.
한번 배우고 나니, 모스부호 방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버릇이 됐다. 차유신은 때로는 유흥으로, 때로는 자기암시로 그런 손동작을 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몰랐다. 지극히 소수만이 알아봤다.
예를 들어 권헌.
권헌이 이 공간에 왔을 때, 차유신은 CCTV와 서재길의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손을 숨겼다. 그리고 권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의사표시를 했다. 권헌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무언의 대화를 수 회 주고받고, 차유신은 마지막 모스부호를 건넸다.
-갖고 왔어?
권헌이 몸을 숙인 건 그때였다. 차유신의 발목을 감싼 부목을 벌려가며 손가락을 집어넣고, 맨살에 입을 가져갔다. 살갗을 스치는 혀가 간지럽다 못해 저렸다.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걸 차유신은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 막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권헌은 입에 담고 있던 소형 녹음기를 부목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서재길을 통해 권헌에게 ‘지포 라이터를 갖고 오라’는 지시를 하긴 했지만, 그걸 어떤 식으로 전달받을지는 차유신도 생각하던 중이었다. 백지와도 같았던 방식에 색을 입힌 건 권헌이었다.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전혀 상상치 못한 전개였다. 눈에 띄게 발목을 떠는 차유신을 향해 권헌이 눈길을 끌어올렸다. 다소 당황한 기색의 차유신을 그는 눈빛으로 종용했다.
제가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차유신은 그만 발목을 늘어뜨렸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뜸을 들인 끝에 대답이 나왔다. 우태원은 감시하듯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입을 축인 차유신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난 내 사람 챙기는 걸 아주 좋아해. 권헌이 그러고자 했으므로, 나로서는 그러려니 한 거야.”
보통의 상사와 부하직원을 아우르는 모범적인 대답. 그러나 듣고 있는 우태원의 표정은 전혀 모범적이지 못하다. 거기서 아주 거슬리는 마침표라도 찾아낸 것처럼, 그는 검은 입 안에서 이를 드러낸다.
“권 비서를 왜 그렇게 믿어요?”
그건 질문을 위장한 우짖음에 가까웠다. 차유신은 얼얼한 다리를 뒤로 뺐다. 녹음기가 담긴 부목을 최대한 감추고는, 침착하게 반문했다.
“몰라서 물어? 권헌은 내 의원실 비서야.”
“그럼 나도 그렇게 믿었나요?”
이번에는 정말로 질문이었다. 차유신의 턱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주춤거리는 차유신의 시야에 검은 안개가 스몄다. 호젓해진 사위 안에서 차유신은 머릿속 한구석에 처박힌 기억을 뒤적였다. 이제는 현실이었는지조차 가마득한 어떤 기록.
대국민당 차유신 의원실 우태원 비서.
그를 믿었던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절로 치열에 힘이 실린다. 짓무른 점막에서 미지근한 핏물이 터졌다. 입 안에서 범람하는 비린내를 혀로 쓸고, 차유신은 조금 웃었다. 굳이 계산을 하는 것조차 낭비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2년 전의 차유신이 너무나도 잘 알았다.
우태원 비서는, 믿는 것 그 이상이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사근사근하되 뇌호한 음성이 나왔다.
“너하고 권헌은 비교가 안 돼.”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우태원의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분명히 그는 차유신의 의도와 반대되는 해석을 했다. 하지만 차유신은 그걸 정정할 의사가 없다.
중요한 건 현재다. 지금 차유신에게 있어 비서 권헌이 의원실에서 가장 믿는 보좌진인 반면, 2년 전 차유신에게 있어 비서 우태원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의지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건 이제 그다지 중요치 않은 사실이다.
비서 권헌은 현재에 있지만, 비서 우태원은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발목 봐도 돼요?”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제 앞섶을 짚는 우태원의 손이 보였다. 버클 풀리는 마찰음이 귀를 스쳤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빳빳해졌다.
“남의 발목은 왜.”
“그냥 확인하고 싶어요.”
풀린 버클 밑으로 지퍼가 내려갔다. 차유신의 등이 반사적으로 벽에 붙었다. 날 선 외침이 터져 나왔다.
“씨발, 그런데 바지는 왜 내려.”
“선배 발목이 더럽혀진 것 같아서요.”
우태원이 몸을 낮췄다. 시트에 무릎을 올리고는, 차유신의 뒤통수가 밀착한 벽 옆에다 제 손을 붙였다. 내려가기 일보 직전인 속옷 위에서 벌써부터 검은 체모가 비쳤다. 우태원이 혼연히 말을 이었다.
“알잖아요. 저 선배 상태에 아주 예민한 거.”
“그래서, 뭐.”
“선배가 권 비서에게 더럽혀진 게 싫어요. 덕분에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쁜데, 제가 보다 더럽히면 좀 나아질까 해서요.”
“여기다 좆이라도 문지를 셈이야?”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태연자약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은 뒷덜미에서 진땀이 났다. 곤란하다. 우태원의 의도는 그게 아닌 듯하지만, 이러다 안에 있는 녹음기가 발각되면 심히 피곤해진다.
“설마 문지르기만 하려고요?”
우태원이 무심히 대꾸했다. 덧붙은 언어가 꽤나 안온했다.
“문지르고, 싸야죠.”
우태원의 눈이 깔렸다.
“이왕 시작한 거…. 선배 안에다가도.”
씨발. 차유신의 어금니가 깨물렸다. 곁눈질로 확인한 우태원의 걷은 팔뚝 위로 곤두선 핏줄이 비친다. 불쾌한 심정을 고스란히 투영한 혈관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분노를 체내에 흡수시키듯, 그는 끊임없이 제 힘줄을 부풀릴 뿐이다.
차유신이 아는 그였다면 진작 옷을 찢어발기고 위에 올라탔을 텐데, 그럼에도 참는 이유는 차유신의 현재 상태 때문일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유신은 우태원의 손 안에 있었다. 전혀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저 개새끼가 해야 할 마운팅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입에서 밭은 숨이 번졌다. 얼기설기 흩어지는 상념들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돌파구.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이대로 우태원이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기껏 차유신이 설계해 온 것들이 통째로 어그러질 수 있다.
“발, 줘 봐요.”
차유신의 발목에 우태원의 손아귀가 감겼다.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이 시트를 긁었다. 무표정한 우태원의 낯을 노려보다가, 다짜고짜 손을 뻗었다. 우태원의 어깨를 그러쥐고는 있는 힘을 다해 시트에다 내리꽂았다.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우태원은 일단 차유신의 이끄는 대로 시트 위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색색거린 차유신이 자신의 발목에서 우태원의 손부터 치웠다. 이내 완전히 우태원의 위에 올라타서는 그의 두꺼운 목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움켜쥐었다. 우태원의 눈이 의아함을 머금고 움칠거렸다.
“적당히 좀 해, 씨발. 내가 언제까지 너 하자는 대로 다 대주고 앉아있어야 해. 어?”
버럭 하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점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신히 평정심을 찾은 차유신이 그의 울대뼈를 지분거렸다. 강고한 뼈대를 꾹꾹 눌러대는 동안 차유신은 종종 어깻죽지를 움츠렸다. 목덜미의 한기가 그대로였다.
시근덕거린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어차피 여기에 갇힌 이상 차유신이 쓸 수 있는 패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다만 가진 패가 적다 해서 물 흐르듯 게임에서 져야 할 이유는 없다.
차유신은 일단 이 판의 주도권이나마 가져오기로 했다.
“바지 내려.”
지시조 언어가 흘러나왔다. 우태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재수 없는 좆 대가리 끊어버리기라도 하시려고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지금 내 수중에 이걸 자를 게 없잖아.”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닥치고 바지 까. 재수 없는 좆 대가리에 강제로 처박히느니, 위에서 내 안에다 쑤셔 넣는 쪽이 그나마 낫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녹음기는 지킨다. 거기서부터 게임을 다시 세팅할 생각이다.
잠시 들렸던 우태원의 손이 내려갔다. 긴 눈매에서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깊은 상념에 잠긴 낯빛이었다. 무시한 차유신이 고개를 숙였다. 이내 반쯤 풀어진 앞섶을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갑자기 쫄려? 왜 벙어리가 됐어.”
속옷과 바지가 내려갔다. 불뚝 튀어 올랐던 성기가 올곧은 경사를 두고 섰다. 꽤나 발기한 살덩이는 밑동까지 딱딱했다. 다만 완전히 부푼 상태는 아니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우태원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차유신은 일단 제 바지를 풀었다. 우태원의 속내까지 추리할 여유가 사실 없었다. 주어진 과제를 해치우는 것처럼 안에다 처박고, 쑤셨다가, 싸게 한 뒤 빠르게 이 상황을 종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우태원과 하는 건 처음도 아닌지라 더 이상 손해 보는 기분도 아니었다.
물론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 그게 손해 이상의 손해일지도 몰랐지만, 차유신은 자세한 계산을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지금은 복잡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했다.
하체를 감싼 옷가지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맨 치부를 드러낸 채로 허리를 추슬렀다. 우태원의 치골 쪽으로 엉덩이를 가져간 뒤 놈의 밑동을 부여잡았다. 이내 붉은 구슬처럼 두드러지는 귀두를 위로 해 제 엉덩이 틈에 처넣었다.
입구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귀두와 살덩이가 매섭게 안을 파고들었다. 아래쪽 내장이 저항하듯 뒤틀렸다. 흡, 소리를 낸 차유신이 시트에 손톱을 꽂았다. 돌덩이 같은 내벽이 바로 귀두를 토해냈다. 서둘러 엉덩이를 뺀 차유신이 가쁜 숨을 골랐다. 절로 치가 떨렸다.
씨발, 애초에 이딴 걸 어떻게 넣어. 안을 찢어내지 않고서야.
“갑자기 그렇게 하면 아파요.”
밑쪽에서 잔잔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올라온 팔뚝이 차유신의 허리를 둘렀다. 힐긋한 우태원의 낯이 비로소 여유로웠다. 짧은 방황 끝의 곤로함이 비쳤다.
“이리 와요. 선배.”
차유신의 허리가 당겨졌다. 얼어붙은 하체가 앞쪽으로 나아갔다. 양 허벅지에 우태원의 어깨가 스쳤다. 끌려가던 성기가 우태원의 목젖을 쓸었다.
“앉아요.”
우태원이 말했다.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어디에.”
대답을 생략한 우태원이 또 한 번 허리를 당겨왔다. 훅 이끌린 치부가 우태원의 얼굴 위에 자리를 잡았다. 기겁한 차유신이 우태원의 머리를 쥐어짰다. 개의치 않은 우태원이 차유신의 하체를 끌어내렸다. 훤히 드러난 엉덩이가 우태원의 얼굴을 덮었다. 높게 솟은 콧대가 차유신의 음낭을 비볐다.
“여길 풀어야 들어가죠.”
스멀스멀 빠져나온 혀가 차유신의 엉덩이 골을 더듬었다. 곧 회음부를 살살 적셔가며 멋대로 맛을 봤다. 개운치 않은 감각에 차유신의 등줄기가 전율했다.
“아…! 씨발, 뭐….”
“빨아줄게요.”
우태원의 눈이 반쯤 감겼다.
“구멍 더 벌려 봐요.”
부쩍 단단해진 혀의 끄트머리가 입구를 쑤셨다. 척척한 물기가 안을 스미고, 차유신의 턱이 불끈해졌다. 언뜻 본 우태원은 태연하게도 차유신의 다리 사이를 감상하고 있었다. 차유신이 아득바득 언성을 높였다.
“어디서 나한테 명령질이야.”
“명령 아니에요.”
나지막이 답한 우태원이 허리를 두른 손을 풀었다. 그대로 엉덩이 틈에 가져가서는, 다물린 부위를 슬금슬금 벌려왔다. 느슨해진 구멍 안으로 둥글게 만 혀가 들어왔다. 조붓한 틈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어금니가 꽉 씹혔다.
“아아, 씹….”
“애원한 거예요.”
우태원의 입이 보다 벌어졌다.
“난 선배 안에 내 건 다 넣어보고 싶더라고요.”
제대로 입구를 파고든 혀가 쑥 올라왔다. 아까 전엔 몰아내기 급급하던 배 안이 이번에는 제법 고분고분했다. 마치 잘 아는 체취를 맞이한 음물처럼, 유순하게 안을 내줬다.
물렁해진 내벽을 타고 굵직한 혀가 기어갔다. 배 안에서 물길 갈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샜다. 주름 하나하나와 혀의 돌기가 스칠 때마다, 기이한 간지러움에 아랫배가 경련했다. 우태원의 콧대에 기댄 차유신의 성기가 벌겋게 물든 채 꺼떡거렸다. 시트 위의 손톱이 천을 꿰뚫을 양 날카로워졌다.
씨발, 간지러워….
“다행이에요. 선배 몸은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미끄러진 혀가 흐물거리는 주름을 속속들이 핥아댔다. 굳건하던 내벽이 속수무책으로 녹아갔다. 깊숙한 곳에 맺힌 타액이 점막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발가락에 힘을 준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그래서. 아주 우습겠다, 어?”
“우습긴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배 안에서 혀를 내둘렀다. 내벽을 빙글거리며 쓸고 난 혀가 세심하게 점막을 비비적거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한층 짙어졌다. 차유신의 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우태원의 혀와 밀착한 부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싹했다. 팽창하는 자신의 성기 때문에 치부까지 마구 당겨, 하체가 통째로 무지근했다.
“귀엽다고 생각해요. 선배의 이런 몸이.”
유독 진동하는 점막에 자리 잡은 혀가 융기한 부위를 꾹 눌러왔다. 아랫배가 돌연 소스라쳤다. 미지근한 물을 머금은 구멍이 다급하게 벌름거렸다. 차유신이 몸을 굽은 채 색색거렸다.
“아아, 윽….”
“그래서 전 섹스가 좋아졌어요.”
우태원이 입을 모았다. 여전히 배 안에 둔 혀를 널름거리며, 차유신의 입구를 쭉 흡입했다. 내장까지 빨리는 기분에 차유신이 시트를 할퀴었다. 우태원은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에 잇자국을 내며 차유신의 냄새를 음미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선배의 몸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엄청난 특권이죠.”
춥, 소리를 내며 우태원의 입이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나아간 차유신의 손이 우태원의 입을 덮쳤다. 헐떡인 차유신이 허리를 들었다. 우태원에게서 최대한 자신의 치부를 거두고는, 흡족한 얼굴을 향해 쏘아붙였다.
“좀 닥치지 그래.”
차유신의 엉덩이가 빠졌다. 여전히 우태원의 입을 감싼 채, 그의 치골 위에 제 엉덩이를 가져가 허리를 내렸다. 다른 손으로 그의 음경을 쥐어 세우고 말랑한 구멍에 맞췄다. 몇 번 입구에 비벼대자, 쑥 귀두가 들어왔다. 아. 탄식한 차유신이 입술을 짓이겼다. 갑자기 쉬워진 자신의 몸에 미약한 환멸감이 들었다.
배 안은 아직도 물기투성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체향을 찾아가듯, 우태원의 생식기가 쭉 뻗었다. 주먹만 한 두께를 지닌 음경이 배 안에서 마구 삐걱거렸다. 두툼한 표피에 스친 점막에서 투둑, 투둑, 소리가 났다. 우태원의 살덩이가 팽창하는 소리이기도 하고, 차유신의 내벽이 부푸는 소리이기도 했다.
우태원의 입을 가둔 손바닥이 더운 숨에 젖어갔다. 침묵한 우태원은 그저 차유신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차유신은 허리를 젖혔다. 등줄기에 곡선이 생기고, 배 안에서 자못 여유로운 경사가 완성됐다. 잘 만들어진 길을 따라 우태원의 남근이 기어 올라왔다. 차유신의 배 안에서 두 사람의 내밀한 살덩이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뱃가죽을 타고 차유신의 것인지 우태원의 것인지 모를 맥박이 울려댔다. 뻑적지근한 배 때문에 자꾸만 숨 쉬는 게 버거웠다. 최대한 낯을 가눈 차유신이 재차 우태원을 봤다. 냉랭한 경고가 떨어졌다.
“어차피 네가 나에게 뭔 짓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우태원은 그저 눈매를 휘었다. 무언의 동조가 실린 눈빛이었다. 차유신이 책망하듯 인상을 썼다.
“대체 아는 새끼가 왜 이래?”
등 뒤로 우태원의 손이 다가왔다. 아까처럼 차유신의 허리를 두르고는, 꽉 팔뚝으로 조여 왔다.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의 복부가 풀어졌다. 빈틈이 생긴 배 안에서 우태원의 성기가 빠졌다. 귀두만 남겨둔 채 생식기를 전부 내렸다가, 확 올려붙였다.
철썩. 차유신의 엉덩이와 우태원의 치골이 세차게 마찰했다. 사납게 구멍을 파고든 남근이 배 속을 마구잡이로 들쑤셨다. 흉흉한 살덩이가 내장을 지르밟고, 튀어나온 뱃가죽이 차유신의 상의를 안에서 밀어댔다. 차유신의 낯이 일그러졌다. 배가 터질 것 같은 건 둘째치고, 내장이 쑤셔대는 감각에 오금이 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비틀렸다. 우태원의 위에서 살짝 이탈하자마자 바로 허리를 감은 팔뚝이 견고해졌다. 강제로 차유신의 몸을 끌어내리고는, 주저앉은 엉덩이에 가차 없이 생식기를 박아 넣었다. 초 단위로 꺼졌다 치솟는 이물감에 그만 시야가 까매졌다. 멀쩡한 한쪽 다리가 버둥거리다 시트를 걷어찼다.
“아윽…. 그렇게 하지, 좀…!”
위에서 밑으로 꽂는 것보다, 밑에서 위로 꽂는 쪽이 훨씬 더 마찰이 셌다. 게다가 워낙 우태원의 힘이 좋다 보니 한번 성기가 솟구칠 때마다 신장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느긋한 절구질을 이어가던 우태원이 다른 팔까지 동원해 차유신의 몸을 꽉 안아왔다. 이내 허리를 쳐올려 내벽이 꺾이는 지점까지 제 귀두를 찍어버렸다. 배 안이 파열할 듯 두드려지고, 차유신의 눈이 까뒤집혔다.
“씨발…. 아, 흐읍….”
찢겨져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식식거린 차유신이 남은 손을 뻗었다. 두 손으로 우태원의 입을 꽉 움켜쥐고는, 손등을 이용해 코까지 막았다. 우태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차유신의 이가 악물렸다.
“네 좆대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 어?”
허리를 감은 우태원의 팔이 느슨해졌다. 차유신의 허리가 곧추섰다. 하체를 올려 우태원의 생식기를 뱉어냈다가, 다시 밑으로 깔아뭉개며 빨아들였다. 허겁지겁 파고든 성기가 후끈한 내벽과 밀착했다. 다른 극의 자석이 맞붙는 것처럼 끈적한 접합이었다. 배 안에서 우태원의 냄새가 묻은 이물질이 탐색하듯 기어 다녔다. 깨물린 어금니 사이로 신음이 샜다.
“아읏….”
입이 틀어 막힌 우태원의 눈에 정체 모를 이채가 스쳤다. 그 눈을 노려보며 차유신은 또 한 번 엉덩이를 들쳤다 내렸다. 척, 하며 두 사람의 살이 강하게 마찰했다. 꿈틀거리는 음경이 차유신의 체액을 흡수해가며 다시금 부풀었다. 불룩해진 내장 때문에 뱃가죽이 쓰렸다.
“아…. 씨입….”
거칠게 뇌까리는 차유신을 우태원이 빤히 관찰해왔다. 차유신은 외면한 채 반복해 허릿짓을 했다. 귀두가 닿는 지점이 점점 깊어지고, 습기 찬 내벽이 껌처럼 우태원의 분신을 씹어댔다. 손바닥에 들어찬 숨결이 열대야처럼 뜨거웠다. 우태원이 차마 힘든 듯 고개를 돌렸다. 조금 고민에 잠긴 기색이었다.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뚝, 떨어졌다. 제법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혔다. 시야가 불편했다. 머리를 흔들어봤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숨 쉰 차유신이 우태원을 제압한 손 하나를 거뒀다. 이어 눈가를 훔치며 속으로 욕을 했다.
더럽게 안 싸네. 이렇게까지 발정했는데 정작 사정을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면 뭔가 부족한가.
얼굴에서 내려오던 차유신의 손이 돌연 휘어 잡혔다. 우태원의 입을 덮은 다른 손도 연이어 채였다. 능숙하게 차유신의 두 팔을 등 뒤로 뺀 우태원이 제 머리를 쓸었다. 담담한 한 마디가 들렸다.
“그만 해요. 이렇게는 못 싸요.”
차유신이 성을 냈다.
“뭐가 문제야? 씨발.”
“선배 냄새가 안 나잖아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손목을 뒤에서 당겼다. 차유신의 허리가 확 젖혀졌다. 우태원이 한탄했다.
“입 막는 건 좋은데, 코는 왜 막고 그래요.”
갑작스레 제압당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이 턱짓을 했다.
“해요. 이제.”
“일단 놔, 씨발 놈아.”
“못 놓겠어요. 선배가 또 선배 냄새 못 맡게 할까 봐.”
“이렇게는 나도 못 해. 누구한테 잡혀서 하는 취미 없어.”
차유신이 으름장을 놓았다. 우태원이 엷게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지금까지 선배 좆대로 했으니, 이제부턴 제 좆대로 하죠.”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앉는 자세를 취하고는 차유신의 허벅지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죽 당겨진 다리가 우태원의 어깨에 걸쳐졌다. 졸지에 한 다리를 빼앗긴 채 우태원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됐다. 고개를 든 우태원이 차유신과 눈을 맞췄다.
“저 이제 쌀 건데, 선배도 쌌으면 좋겠어요.”
“꼴리는 게 없는데 싸긴 뭘 싸. 너한테 소변 정도는 갈겨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좋아요. 전 그냥 선배가 싸는 게 보고 싶어요. 이 자세로.”
차유신의 엉덩이에서 우태원의 남근이 빠졌다. 곧 푹, 밀어 넣고는 안을 헤집어왔다. 바득바득 표피에 갈린 점막이 퉁퉁 부어올랐다. 하윽. 차유신의 허리가 무너졌다.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개처럼 다리 하나 들고 싸 봐요. 나 보기 좋게.”
차유신의 턱에서 아득, 소리가 났다. 연이어 빠졌다 올라온 성기가 내벽에 쿠퍼액을 처바르며 엉겼다. 파들거리는 눈길을 똑바로 겨눈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나를 네 수준으로 떨어뜨리면, 좀 나아져?”
우태원이 묵묵하게 허리를 튕겼다. 강고한 귀두가 물혹처럼 부푼 점막을 짓이겼다. 찡, 하는 이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아득해졌다. 발가락이 오므라들 정도로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새빨간 차유신의 성기가 하느작거렸다.
“선배는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우태원의 음성이 낮아졌다. 불끈한 귀두가 또 한 번 점막을 밟아가며 빙글 돌았다. 흐읍, 소리를 낸 차유신이 고개가 넘어갔다. 거친 숨결이 귀를 덮쳤다. 고개를 기운 우태원이 속삭였다.
“그래도 꿈 정도는 꿀 수 있잖아요. 지옥에서도 잠은 자거든요.”
돌연 배 안에서 후끈한 액체가 터졌다. 밀물처럼 엄습한 훈기에 내벽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순식간에 배 안을 채운 점액이 구멍 틈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꼿꼿하게 고개를 든 차유신의 귀두가 찔끔거렸다. 투명한 액이 주르르 선을 새기며 미끄러졌다.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한 방울 남지 않을 정도로 모조리 차유신의 액을 손으로 훔쳐,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결국 쌌네요. 선배.”
차유신의 호흡이 가빠졌다. 치골이 부대낄 정도로 딱딱하던 성기가 조금씩 식었다. 곧 스르르 꺾였다.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깨끗해진 손을 옮겼다. 조심스레 차유신을 들어 시트 위에 앉히고는, 제 몸을 일으켰다.
떨리는 손이 얼굴을 감쌌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대로 사정한 건 아니지만, 쿠퍼액이 나왔다.
대체 우태원의 뭐 때문에.
침대에서 벗어난 우태원이 등을 보였다. 저편의 거울을 통해 셔츠 단추를 푸는 그가 보였다. 끄트머리까지 해제한 셔츠가 젖혀졌다. 땀에 물든 천이 내려갔다. 넋을 놓은 채 보던 차유신의 동공이 확장됐다. 아. 들릴 듯 말 듯 한 탄성이 나왔다.
눈앞에는 처음 접한 그의 맨 등이 있다. 꿈틀거리는 근육으로 점철된 가죽의 왼쪽 위, 날개뼈를 타고 시선을 사로잡는 형체가 두드러진다. 발톱 모양의 문신. 석일태 회장의 문신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의 것을 빼다 박은 게 분명한 자국. 자세히 보면 커버 문신이다. 새까만 잉크 너머에 흉터 비슷한 것들이 있다. 맥 빠진 차유신이 허, 소리를 냈다.
“너 제대로 깡패 새끼였구나.”
우태원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차유신이 비꼬았다.
“상처는 언제 생겼어? 석일태한테 인정받기 참 힘들다. 굳이 싸웠던 흔적까지 남겨야 하고.”
“열두 살이요.”
우태원이 고저 없이 답했다. 차유신의 턱이 멎었다. 곁눈질을 건넨 우태원이 말을 이었다.
“참고로 싸워서 생긴 것 아니에요.”
협탁에 둔 우태원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우태원이 액정을 귀에 가져갔다. 건조한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짤막한 통화를 마친 우태원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 옷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새 셔츠 하나를 찾아 빠르게 걸치고는, 단추를 채워 올렸다.
그러는 동안 차유신은 반복해 목을 꿀꺽거렸다. 멍했던 머릿속에서 뒤늦게 사고가 회전했다. 아직도 어른거리는 발톱 모양 문신을 떠올리며, 차유신은 눈을 구겼다.
진짜 좆같네.
재킷까지 갖춰 입고 멀끔한 차림으로 돌아온 우태원이 입구를 향해 걸었다. 문을 연 그가 단조롭게 입을 뗐다.
“한 시간 안에 돌아올게요. 필요한 것 있으면 서 실장한테….”
“너 진짜 등신이야?”
버럭 소리가 나왔다. 우태원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차유신이 날을 세웠다.
“열두 살 때 너 학대한 새끼를 아버지라고 모시고 있…!”
“쉬고 있어요. 있다가 몸에 좋은 것 가져다줄 테니까.”
탁. 단칼에 문이 닫혔다. 고적해진 방 안에서 차유신은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곧 입 꼬리를 내리고, 무표정이 됐다.
*
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로 가 샤워를 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부목 안에 있던 소형 녹음기를 CCTV의 눈을 피해 적당한 구석에 숨겨둔 뒤 침대에 앉아 보도채널을 봤다. 화면에서는 아직도 오늘의 국감 하이라이트를 내보내고 있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이은수 금융관리위원장이 먹먹하게 운을 뗐다. 의미를 알아챈 정무위 위원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실상의 사의 표명. 국감 현장에서 바로 고위직 공무원이 꼬리를 내리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돌연 야당 의원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이내 우태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태원 의원! 이건 아니잖아. 왜 이렇게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태원이 단조로이 반문했다. 야당 의원이 이를 갈았다.
‘애초에 이 문제를 왜 제기했어. 이 위원장이 석일태 회장과 수차례 마찰해온 것에 대한 보복성 감사 아니야? 우 의원이 석 회장하고 각별한 관계인 거, 알 사람은 다 알아. 어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증거 있으십니까.’
차분한 한 마디가 회의장을 휩쓸었다. 야당 의원이 주춤했다. 우태원이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 신성한 국정감사장입니다. 증거와 증인을 갖고 오세요. 그런 게 없으면, 그 어떤 주장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툭. 부목에 싸인 발목이 시트 위에서 늘어졌다. 화면에 머물던 차유신의 시선이 비껴났다. 부쩍 추운 침실 공기를 느끼며 발꿈치로 시트를 지분거렸다. 석일태, 그리고 우태원.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석일태는 우태원의 아버지를 죽였고, 어린 우태원을 학대까지 했다. 지금은 우태원을 멋대로 부려 먹고 있다. 우태원은 그런 석일태를 고분고분 따른다. 아주 유순하게, 잘 길들여진 개처럼.
마치 인간도 아닌 것처럼.
부쩍 짙어진 한기에 어깨가 미동했다. 차유신을 뚫어져라 주시해 오는 사위가 갈수록 공허하다. 차유신의 시선이 심각하게 미끄러졌다. 좌에서 우로 한 번, 위에서 아래로 한 번. 기묘할 정도로 허전한 방 안을, 눈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이 방이 우태원의 방이 맞긴 한가.
물론 맞을 거다. 과거 언젠가 이 방에서 처음 눈을 뜬 이후 내내,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한 적 없다. 게다가 이 아파트의 다른 방을 모두 둘러본 결과 침실다운 침실은 여기뿐이다. 당연히 여기가 우태원이 쓰는 방이다.
못 자국 하나 없는 벽을 머금은 눈이 식었다. 그런데 그렇게 인지하지 않으면, 이 방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태원의 방이라는 증거가 없다. 우태원의 사진, 표창, 국회의원 당선증, 졸업앨범. 일반적인 사람의 침실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자기 증명 소품이 하나도 없다.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별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따지고 보면 우태원 자체가 그렇다. 그의 언어와 행동, 습관에는 스스로를 증명하는 그 어떤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배역을 맡아 무대 위에 선다면, 우태원은 그들을 부유하는 공기를 맡고 있다. 그에게는 역할이 존재하지 않고, 우태원은 그 배역을 아주 잘 소화하고 있다.
자기혐오. 차유신의 입 안에서 혼잣말이 굴러갔다. 곧 정정하듯 머리를 저었다. 아니, 자기혐오는 아니다. 최소한 혐오라는 것에는 일말의 애정이나 관심이 전제돼있다. 우태원의 공허와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이 색채도, 형태도 없는 결핍을 굳이 규정한다면, 최소한의 일반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건 무관심에 가깝다.
문 너머에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서재길이 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거기에 대고 우태원이 뭔가를 말하는 게 느껴졌지만, 너무도 작아 들리지는 않았다. 긴 숨을 뱉은 차유신이 벽에다 머리를 기댔다.
움직이기 귀찮다. 다리도 아프고, 아래도 아프다. 어차피 우태원이야 알아서 이 방에 올 테니, 그냥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다. 그리고 그때 몇 가지를 물어볼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를.
시트를 짚은 손이 까딱거렸다. 톡, 톡,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부딪치는 동안 보도채널의 국감 하이라이트가 끝났다. 이어지는 프로그램에서는 교수와 정치 칼럼니스트 등이 나와 오늘의 국감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이은수 위원장이 오늘 국정감사에서 사실상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이거 대단히 이례적인 일인데요, 국감의 격이 높아졌다 해야 할지 정부기관장의 격이 낮아졌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오늘 상황, 어떻게들 보십니다. 운을 뗀 진행자가 패널들을 둘러봤다.
기다렸다는 듯한 칼럼니스트가 신랄하게 말을 쏟았다. 격이 낮아지고 높아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감의 취지가 갈수록 퇴색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죠. 오늘 당장 이은수 위원장 사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어딜 봐서 정무위 국감입니까? 그냥 이은수 공개처형이지. 우태원 의원이 말이죠…. 갑자기 진행자가 그를 저지했다. 너무 격양된 태도는 삼가주시고요. 김윤희 교수님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칼럼니스트가 인상을 썼다. 진행자는 친 대국민당 성향의 언론인 출신이었다.
똑똑. 문이 두드려졌다. 열린 틈을 통해 들어온 건 서재길이었다.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시트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위에는 깨끗하게 손질한 뿌리식물과 꿀 종지가 올라가 있었다.
“산삼하고 꿀입니다. 태원 형님께서 손질해서 의원님 드리라 하셨습니다.”
“우태원은.”
차유신이 물었다. 미적거린 서재길이 답했다.
“주무십니다.”
“잔다고?”
“예. 많이 피곤하시다고.”
뚫어져라 서재길을 보던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 트레이를 치워두고는 절름거리며 문을 향해 걸었다. 서재길이 다급히 불렀다.
“안 드십니까.”
“난 됐어. 서 실장 먹어.”
“어디 가시는데요.”
“우태원 방.”
“주무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뭐.”
차유신이 데스크에 둔 자신의 담배와 라이터를 챘다. 서재길이 부쩍 머뭇거렸다. 지극히 진중한 한 마디가 건네졌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지만.”
담배를 문 차유신이 갸웃했다. 서재길이 입을 다셨다.
“암살 시도는 곤란합니다.”
차유신의 눈이 찡그려졌다. 짜증스러운 욕설이 나왔다.
“아주 지랄하고 있다. 씨발.”
*
우태원은 가장 안쪽 방에서 자고 있었다. 거기에도 침대가 있긴 했지만, 차유신이 머무는 침실에 비하면 다소 방이 좁았고 침대와 커튼 외에는 아무런 물건이 없는 허전한 공간이었다. 약 60평짜리 이 아파트에는 방이 총 네 개였는데 침대가 놓인 건 침실과 우태원이 자고 있는 이 방뿐이고, 나머지 방들은 서재와 드레스룸으로 쓰였다. 서재길은 거실의 소파에서 자거나 바깥에서 잤다.
시트에 몸을 앉힌 채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어둑한 방 안에서 훅 연기가 퍼져나갔다. 열린 커튼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우태원의 얼굴을 희미하게 적셨다. 곤히 잠든 낯에는 새삼 신경을 집중케 하는 힘이 있었다.
우테원이 처음 의원실에 찾아오던 날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감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몸에 밴 듯한 음영이 타고난 옷처럼 잘 어울리는 얼굴. 우울과 고통을 아주 보기 좋게 빚어낸 오묘한 피사체. 우태원.
벗은 흉부가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단단한 근육이 붙은 가슴팍을 타고 새까만 뱀이 쿨렁거린다. 가만히 보던 차유신이 담배 끝을 두드렸다. 새하얀 재가 허공에서 흩날렸다. 재차 두드렸다. 파삭, 소리와 함께 보다 큰 재 덩어리가 떨어졌다.
우태원이 눈을 떴다.
“피곤하다면서 금방 깨네.”
연기를 뿜은 차유신이 말했다. 우태원이 심상히 답했다.
“선배 담배 냄새가 났거든요.”
“피우길 잘했네.”
“일부러 피웠어요?”
“어.”
차유신이 들숨을 삼켰다.
“내가 담배를 피우면, 네가 깰 줄 알았거든.”
끄덕인 우태원이 이마를 짚었다. 이내 고개를 기울며 입을 열었다.
“선배가 이 방에 올 줄 몰랐어요.”
“나도 십 분 전까지는 몰랐어.”
“아까 그게 그렇게나 신경 쓰였어요?”
“신경?”
털지도 않은 재가 낙하했다. 차유신이 입매를 꼬았다.
“조롱도 관심이라면, 적어도 맞겠지.”
“그래요. 선배라면 조롱할 거라 생각했어요.”
“왜?”
“선배는 합리적이니까요.”
우태원의 얼굴을 덮은 달빛이 흐려졌다. 차유신이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조롱받으니 기분이 어때.”
“그것도 관심이라면, 저로서는 조금 기쁘겠죠.”
“넌 지금 네 상황이 잘못됐다는 자각이 하나도 없어?”
“글쎄요. 저는 내내 이렇게 살았고, 그게 다예요. 세 살 때부터 이십오 년 동안 계속. 당연히 자각이랄 게 없죠.”
죽어가는 달의 파편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우태원이 권태롭게 말을 덧붙였다.
“세 살 때 내가 선택을 했고, 살다 보니 나쁘지 않아 계속 이어가는 거예요. 후회한 적은 없어요. 석 회장이 아버지를 죽인 것? 내게는 중요치 않아요. 애초에 그 사실에 별 감흥이 없거든요.”
우태원의 눈이 깔렸다. 완연한 어둠에 잠긴 낯이 나지막한 언어를 꺼냈다.
“내게 있어 감흥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하나뿐이에요.”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담배를 끼운 손가락이 우태원의 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대로 내려가는 걸 보면서도, 우태원은 그저 누워있었다.
“네 선택지에 ‘석일태가 사라진다’가 있기는 해?”
“있을 수가 없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하나 말고는 감흥도 없다는 새끼가, 석일태는 왜?”
“석일태가 역현구의 중심이니까요.”
우태원의 얼굴이 완전히 차유신을 향해 돌아갔다. 달빛을 등진 낯은 연옥의 구렁텅이를 닮아있었다.
“역현구는 내가 선택한 내 둥지예요. 내 습관이고, 안식처고, 삶이기 때문에 그 어떤 변수도 허용할 수 없어요. 만약 생긴다면 모조리 내가 제거할 거고.”
“그래?”
차유신이 나른하게 되물었다. 새빨간 끄트머리가 검게 울렁이는 뱀의 모가지에 꽂혔다. 단단한 가슴팍에서 치익, 소리가 났다. 희미하게 신음한 우태원이 목을 떨었다. 간헐적으로 요동하는 가죽에서 피 냄새와 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동시에 났다. 빙글 비비고 난 차유신이 고개를 숙였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달빛에 눈이 부셨다.
“내가 그 변수 한번 제거해볼까.”
우태원의 가슴팍에서 담배가 거둬졌다. 툭 바닥에 떨구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말했다.
“아무리 선배라도 그건 못해요.”
“왜?”
“선배도 결국 역현구 사람이죠. 선배는 못 해요. 내가 알아요.”
차유신이 저소했다. 가붓한 반달 모양이 된 시야에 다부진 우태원의 낯이 걸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난 분명히 역현구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해.”
뜨겁게 달아오른 뱀의 상흔에 차유신의 손이 덮였다.
“나는 아주 합리적인 사람이거든.”
*
출근하는 우태원에게 ‘내 메모리카드는 주고 가라’는 얘기를 했을 때, 그는 무색무취의 행위예술가처럼 목에 멘 넥타이를 한번 추스르는 데 그쳤다. 다 채워진 넥타이를 밑으로 뺀 그가 물었다.
‘메모리카드는 왜요.’
‘볼 게 없어. 보도채널 보는 것도 이제 식상해.’
‘그래서 그거라도 감상하시려고요?’
‘안 돼?’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우태원은 말없이 서재길이 들고 있던 재킷을 빼 몸에 걸쳤다. 새까만 원단이 두터운 몸에 착 붙는 사이 그는 연달아 고갯짓을 했다.
‘안 될 것 없죠.’
‘그럼 주고 가.’
‘권문직 실장에게 맡길게요. 오늘은 서 실장이 일이 있어, 권 실장이 여길 지킬 예정이니까.’
‘의외로 순순하네.’
차유신이 싱겁다는 듯 말했다. 소매를 턴 우태원이 뇌까렸다.
‘순순해야죠. 그거 결국 선배 건데.’
우태원이 집을 나서고, 차유신은 침실로 돌아왔다. 시트에 널브러져 언제나처럼 보도채널 화면을 돌려보고 있다 보니 문이 열렸다. 들어온 권문직은 완전히 차유신을 외면한 채 TV로 돌진했다. TV 밑 서랍장을 열고는, 안에서 메모리카드 리더기를 꺼냈다. 안에는 이미 메모리카드가 꽂혀 있었다. 차유신이 허탈해했다.
“그게 거기에 있었어?”
“네. 의원님 오신 직후 내내요.”
권문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몸을 세운 그가 TV에 리더기를 연결하는 동안 차유신은 혀를 찼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과연 그랬다.
리더기 연결을 마친 권문직이 TV 화면을 전환했다. 자욱하게 비가 내리는 음침한 거리가 나타났다. 한가운데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 서있다. 석연치 않게 보던 차유신이 그만 고개를 돌렸다. 힐끔거린 권문직이 질문했다.
“안 보십니까.”
“조금 있다가 볼 거야. 이만 나가.”
“못 나갑니다. 의원님께서 메모리카드 갖고 장난질이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너 나 힘으로 이길 수 있겠냐.”
차유신이 훈수를 놓았다. 권문직이 움칠했다. 차유신이 그간 몇몇 역운회 조직원을 때려눕힌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간신히 호흡을 삭인 권문직이 얼굴을 들었다. 제법 결연한 눈에서 빛이 났다.
“못할 것 없습니다.”
“하긴, 다리 병신인 나하고 싸워서 못 이길 놈이 누가 있겠냐.”
“의원님이 다리 병신이 아니었어도, 저는 이겼을 겁니다.”
권문직이 또박또박 말을 덧붙였다.
“태원 형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의원님의 일탈을 저지하라 했습니다. 지시받은 건 지켜야죠.”
차유신의 눈이 찌뿌둥해졌다. 양손을 뒤로 한 채 우뚝 선 권문직은 새삼 소년 같다.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이나 몸에 걸친 반듯한 정장은 20대 후반의 느낌이지만, 얼굴만 보면 20대 초반에 가깝다. 언젠가는 그저 곱상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앳되었다는 감상이 먼저 든다.
“너 몇 살이냐.”
차유신이 물었다. 찌푸린 권문직이 답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혹시 고등학생 아니지?”
“스물다섯입니다.”
빈정거리는 차유신에게 권문직이 바로 쏘아붙였다. 곧 말려들었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차유신이 과장되게 감탄했다.
“스물다섯에 간부야? 이야. 대체 몇 살에 들어온 거야.”
“열여섯에 들어왔습니다. 그 무렵에 들어와 20대 중반에 실장 다는 거, 역운회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권문직이 귀찮다는 듯 뇌까렸다. 차유신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서 실장은 몇 살인데.”
“스물일곱입니다.”
“서 실장도 빠르구나.”
“대체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우태원은 언제부터 좋아했어?”
권문직이 멈칫했다. 차유신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뭐가 궁금한 거냐며? 그래서 물어봤어.”
“역운회에서 태원 형님 안 좋아하는 조직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거 말고. 권 실장은 좀 다른 것 같아서.”
차유신이 느물거렸다. 권문직이 그만두자는 투로 얼굴을 감쌌다. 낮은 숨을 고르고 난 그가 곧 등을 곧추세웠다. 이내 올곧은 답변을 흘렸다.
“정확한 시기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처음 역운회에 들어와 방황할 때부터 태원 형님께서 꾸준히 길을 잡아주셨으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간 겁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제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신 분입니다. 가벼이 얘기하지 마십시오.”
의외로 솔직하고 직관적인 대답이었다. 빤히 권문직을 보던 차유신이 천천히 끄덕였다. 곧 수긍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훌륭하네.”
입을 다문 권문직이 미미하게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차유신은 잠자코 시트 위에 올려둔 발목을 기웃거렸다.
식은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상념이 정리돼갔다. 그래, 확실히 알겠다. 예전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제는 명백하게 알았다. 역운회 조직원들이 체감하는 우태원의 가치. 형태는 다를지언정 근본은 같다. 그들에게 우태원은 구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석일태 회장보다도 더.
우태원은 그들을 아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조용해진 침실 안에서 지잉,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권문직이 액정을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차유신을 일별한 그가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섰다. 차유신은 한 손으로 시트를 지분거리며 정지화면을 닮은 TV 액정을 봤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차유신은 거기에 있었다.
“권헌 비서 왔습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권문직이 다시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권헌을 앞세운 그가 뒤로 빠졌다. 차유신은 벽에다 등을 붙인 채 정면을 봤다. 허리를 꾸벅한 권헌이 다가왔다.
“주일혁 보좌관이 결국 옮긴다고?”
사각지대에 숨은 손가락이 일정하게 두드려졌다. 힐긋한 권헌이 주억거렸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특출하니까.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제 몫 이상을 할 사람이지. 그 형은.”
손가락이 멈췄다. 권헌이 재차 고개를 움직였다.
“네. 그렇죠.”
차유신의 시선이 넘어갔다. 협탁에 찻잔 하나가 놓여있었다. 손을 뻗어 쥔 차유신이 그대로 권헌을 향해 내밀었다.
“이거 마시고 가.”
접혀있던 엄지손가락 틈에서 녹음기가 빠졌다. 찻잔 안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태연하게 받아든 권헌이 물었다.
“뭡니까.”
“산삼 달인 물이야. 얼마 전에 우태원이 산삼을 꽤 가져다줬는데, 나는 영 입에 안 맞더라고. 그래서 차로 달여 마시고 있어.”
“귀한 차네요.”
“아마도.”
입가에 가져간 권헌이 고개를 젖혔다. 제법 더운 차를 두어 모금 만에 비운 그가 손을 내렸다. 근처의 데스크에 잔을 올려두고는, 입을 훔치며 녹음기를 빼 주머니에 넣었다. 아주 능숙하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예사롭게 차유신을 본 그가 입을 열었다.
“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의원님.”
“그.”
차유신이 사뭇 머뭇거렸다. 권헌의 눈이 둥그레졌다. 차유신이 차마 곤란하다는 양 머리를 쓸었다. 그간 웬만한 건 대체로 무심히 넘겨왔는데, 이건 적잖게 민망했다.
“거기에.”
“네. 여기예요.”
권헌이 부드럽게 말을 따라 했다. 한숨 쉰 차유신이 희끄무레한 언어를 흘렸다.
“좀…. 그런 부분도 담겨 있어.”
“그런 부분이요?”
권헌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유신이 버겁게 머리를 쥐어짰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듣고 있는 권문직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건 권문직이 없었어도 드러내기 곤란한 내용이다.
우태원과 떡 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걸 어떻게 얘기해야 한단 말인가.
탕! 불현듯 침실 밖에서 커다란 소음이 났다. 차유신과 권헌, 권문직의 얼굴이 일제히 돌아갔다. 묵직한 발 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내에게서 찬기가 느껴졌다.
“태원 형님.”
권문직이 놀라 불렀다. 허리를 짚은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신과 권헌을 번갈아 보고는, 무게감 있게 운을 뗐다.
“두고 온 게 있어서.”
“어떤 거….”
“일단 나가.”
권문직의 말을 자른 우태원이 손짓을 했다. 다소 굳은 권헌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우태원이 강조하듯 말했다.
“권 비서도 볼일 끝났으면 이만 나가고.”
“볼일이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랬어도 나가.”
저벅저벅 발을 옮긴 우태원이 권헌의 앞에 섰다. 충분히 큰 권헌보다도 거대한 실루엣이 권헌의 얼굴에 응달을 드리웠다.
“여긴 내 공간이야. 권 비서.”
주춤했던 권헌의 시선이 비껴났다. 눈을 맞춰오는 권헌을 보며 차유신은 난처한 숨을 내쉬었다. 곧 권헌을 향해 차분히 지시했다.
“우태원 말에 따르는 걸로 해. 권 비서.”
“의원님. 하지만….”
“권 비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권헌이 꿀꺽 침을 삼켰다. 차유신의 어조가 냉해졌다.
“내가 지금 지시했잖아.”
권헌의 입이 더듬거렸다. 반사적으로 내려온 그의 상체가 크게 굽었다. 이어 몸을 바로 한 권헌이 우물거렸다.
“알겠습니다.”
몸을 튼 권헌이 다리를 뻗었다. 눈치를 보던 권문직도 밖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빠지고, 문이 닫힌 침실 안에서 싸늘한 공기가 부유했다. 팔짱을 낀 차유신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대체 뭐야? 조찬 회의는 엿 바꿔먹었어?”
“불참석 통보했어요. 몸살이 심하다는 사유를 댔고요.”
우태원의 무릎이 시트를 짚었다. 그대로 팔을 내민 그가 차유신의 쭉 뻗은 다리를 잡았다. 이내 곧은 허벅지에 제 머리를 기대고는, 몸을 눕혔다.
“국회에 가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어요.”
조용조용 차유신의 냄새를 맡던 우태원이 뇌까렸다. 차유신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선배가 여기에서 떠나는 꿈을.”
차유신의 속눈썹이 하늘거렸다. 우태원이 목소리가 죽어갔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우태원의 눈이 감겼다. 차유신은 미약한 들숨을 삼키며 등을 젖혔다. 필사적으로 잠에 빠져드는 우태원에게서는 자못 생소한 냄새가 났다. 단 것을 탐하는 세 살짜리 아이 같은 내음이었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우태원이 일정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차유신의 몸이 늘어졌다. 냄새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차유신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우태원과 같은 간격으로 호흡했다.
*
침실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물가물하던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위의 우태원은 어느덧 사라진 채였다. 언뜻 확인한 창밖에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문득 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새까만 연기가 보였다. 바로 차유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원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역현T시티, 그중에서도 중심이라 할 수 있는 A동. 그곳에서 연기가 난다. 심지어 제법 규모가 크다. 커다란 화마(火魔)가 차유신의 공들인 족적을 덮쳐오고 있다.
“우태원! 서 실장! 권 실장!”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우태원이었다. 헐떡인 차유신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T시티…. T시티 가봐.”
“선배.”
“T시티 가자고! 빨리!”
덜컥 윽박지른 차유신의 눈에 핏줄이 섰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안면근육이 떨렸다. 멀거니 보던 우태원이 힘겹게 어금니를 씹었다. 곧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며 저편에 주문했다.
“서 실장. 차 대기시켜.”
*
우태원의 집에서 T시티까지는 차로 밟고 밟아 20분가량이 걸렸다. 불이 난 곳은 과연 A동이 맞았다. 건물에서 대피한 입주자들과 구경꾼으로 북적이는 광장에 세단이 섰다. 차유신은 목발을 짚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 운전석의 서재길과 옆에 있던 우태원이 동시에 나서서 차유신을 부축했다.
“차 의원님.”
막 소방차에서 내린 역현소방서장이 차유신을 알아봤다. 부리나케 달려온 그가 차유신을 향해 몸을 굽었다.
“화재는 진압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안에 한 번 확인합시다.”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망설인 서장이 좀 더 몸을 낮췄다.
“화재는 진압했지만, 아직 연기가 남아있고 붕괴 위험이 있어 위험합니다. 지금 출입하시면….”
“내가 T시티 만든 사람입니다. 내가 만든 게 얼마나 망가졌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차유신이 꼿꼿하게 목을 세웠다. 서장이 차마 난처하다는 양 머무적거렸다. 삽시간에 벙어리가 된 그의 어깨를 우태원이 잡았다. 곧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30분 안에 나올 테니 허가해주시죠. 보니까 연기도 꽤 빠져나간 것 같은데, 별문제 없을 겁니다.”
서장의 낯에 짙은 난색이 어렸다. 우태원을 힐끔거린 그가 차마 버티기 힘들다는 투로 입을 다셨다.
“그럼 우리 대원을 붙여드릴 테니, 안전하게 동행하시는 걸로….”
“대원은 필요 없습니다.”
차유신이 손사래를 쳤다. 서장이 주춤했다.
“제 보좌는 우태원 의원이 맡을 겁니다. 안에서 업무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을 예정이니, 대원은 밑에서만 대기하는 걸로 하시죠.”
이번에는 우태원이 당황했다. 울대뼈를 꿀렁인 서장이 물러났다. 곧 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역현구 의원 두 분 들어가신다. 필요 인원은 밖에서 대기.”
*
몸에 걸친 재킷 주머니에서 치직, 치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장이 비상용으로 준 무전기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차유신은 느릿느릿 목발을 디디며 나아갔다. 희뿌연 연기 속은 텅텅 빈 폐허였다. 자신의 기억 속 A동이 반쯤 사멸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건 없었는데.”
차유신이 들릴 듯 말듯 혼잣말을 했다. 옆에 있던 우태원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도리질을 친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우중충한 사위 틈으로 위를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야 화재가 난 직후 멈췄을 테니, 올라갈 수 있는 수단이라면 계단뿐이다.
“오 층으로 가자.”
차유신이 말했다. 우태원이 한숨을 쉬었다.
“굳이 오 층입니까.”
“거기서 확인할 게 있어.”
“목발 짚고 오 층까지 올라가는 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거기로 가야 해.”
“그럼 제가 돕겠습니다.”
대뜸 우태원의 팔이 다가왔다. 차유신의 허리를 감은 그가 겨드랑이에 댄 목발을 뺐다. 이내 차유신의 앞에 선 채 뒤를 봤다.
“업혀요.”
내려다보던 차유신의 입 안에 쓴 침이 고였다. 이 잿빛 공간 안에서 그의 넓은 등판만이 유일한 이정표처럼 두드러진다. 기기묘묘한 아이러니다.
상체가 내려갔다. 우태원의 등에 몸을 붙인 채 팔을 늘어뜨렸다. 키가 180센티미터를 조금 넘기는데다가 적정 체중인 차유신은 웬만한 성인남자가 감당하기 힘든 체구였다. 그럼에도 우태원은 거뜬히 업고 섰다. 따지고 보면 평균치와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몸집의 소유자였다. 차유신을 아무렇지 않게 안아 든 적도 몇 번이나 있다.
출발하는 지점에 목발을 두고, 우태원은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다. 연기와 재가 난무하는데다가 차유신을 업기까지 한 상황에서도 그의 호흡은 안정적이기만 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느른한 감까지 있었다.
오 층까지 올라가는 데에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더 빨리 갈 수도 있지만, 차유신이 불편해 할까 봐 일부러 여유를 두고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계단을 밟은 우태원이 시선을 건넸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우태원의 등에 이마를 기댄 차유신이 답했다.
“기념관.”
“기념관이요?”
“어.”
“그게 어느 쪽인지…. 저는 잘.”
“오른쪽.”
차유신의 입매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기념관 있는 것 처음 알았지? 애초에 T시티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드물더라고. 하찮아서 그런가.”
키득거리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은 반복해 발만 지르밟았다. 곧 다리를 뻗은 그가 성큼성큼 나아갔다. 적잖게 이어지던 걸음이 어느 지점에서 멎었다. 희뿌연 시야에 한 팻말이 들어왔다. T시티 기념관.
방향을 튼 우태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화마가 미치지는 않았는지, 공간은 오롯하게 보존된 채였다. 다만 뿌옇게 들어찬 연기 때문에 기념관보다는 공동묘지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저쪽 가봐.”
차유신이 손가락을 뻗었다. 가리킨 곳을 따라 우태원이 걸었다. 마침내 다다른 곳에서 ‘국회의원 차유신 기증품’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차유신이 입을 뗐다.
“내려줘.”
우태원이 조심스레 팔을 풀었다. 한 발로 딛고 선 차유신이 절룩거리며 나아갔다. 투명한 아크릴판 너머로 두 개의 만년필이 보였다. 차유신은 위를 덮은 판을 들었다. 특별한 제어장치가 없는 탓에 쉽게도 넘어갔다.
잠자는 만년필 두 개를 챙긴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나치게 많은 연기를 삼킨 탓에 목이 칼칼했다. 쿨럭, 소리를 내는 차유신의 앞에서 우태원이 몸을 낮췄다.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차유신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우태원이 갸웃했다.
“그거 찾으러 일부러 오신 겁니까.”
“어.”
“그게 뭔데요.”
“T시티 완공식 때 내가 기념으로 이거 두 개 기증했거든. 개인적으로 아끼는 건데, 혹시나 이것까지 소실됐을까 봐 걱정했어.”
차유신의 손 안에서 만년필 두 개가 부딪혔다. 우태원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의미가 궁금하네요.”
“하나는 박신회 선배가 줬어. 박 선배 잘 알지? 대국민당에서 양심선언하고 자진 사퇴한 국회의원. 박 선배가 나 국회 입성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조언 많이 해줬거든. 당선 확정되던 날에는 선물로 이거 줬고. 그런 걸 준 국회 선배가 처음이었어. 나로서는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지. 한동안 내내 이것만 썼으니까. T시티 최종 승인 서류도 이걸로 서명했고.”
차유신이 박신회의 만년필을 주머니에 넣었다. 남은 만년필이 손가락을 타고 빙글거렸다. 우태원이 또 물었다.
“그거는요.”
“이거는.”
차유신의 목구멍으로 짙은 숨이 삼켜졌다. 이동한 시선이 우태원의 낯을 머금었다. 달싹이던 입술이 떨어졌다.
“아마도 네 거겠지,”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우태원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차유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 대학 졸업 앞두고 마지막으로 친 시험 때, 몽블랑 빌려준 1학년생이 있었어. 그때 받고 한동안 엄청 잘 썼어. 군대에서도 쓰고, 선거 때도 쓰고. 이게 어쩌다 나한테 왔는지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쓰긴 썼어. 애초에 나에게는 출처 불명의 물건이 워낙 많았거든. 다만 다소 값이 나가는 몽블랑은 좀 예외지. 그래서 이거 주인이 한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 너 만나고 나니까 알겠더라.”
우태원의 손 위로 만년필이 올라갔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내 사인은 잘 있어?”
우태원의 동공이 미동했다. 삭막한 원 안에서 흐무러지는 탐욕적인 색채가 이 죽은 공간을 밝혀온다. 차유신은 그만 눈을 감았다.
그날 만년필을 빌려준 1학년생도, 저런 눈을 갖고 있었다.
지잉. 우태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얼어있던 손이 급하게 내려갔다. 안에서 핸드폰을 뺀 그가 귀에 액정을 댔다.
“어, 그래…. 어?”
마무리가 심히 공허했다. 차유신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다소 멍해진 우태원을 응시하며, 차유신은 고이 눈매를 접었다.
“그런데 만년필이 고마운 건 스무 살 우태원에게나 할 얘기고, 지금은 다소 다르지.”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서 수백 번에 걸쳐 재활 운동을 실시한 발목은 불편할지언정 당장 딛고 서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우태원도 덩달아 몸을 세웠다. 우뚝 선 두 사람의 눈길이 황망한 세상 속에서 맞물렸다.
“집은 많이 탔대?”
우태원의 눈빛이 탁해졌다. 차유신은 여유로이 그를 비웃었다. 그렇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차유신에게 있어 지나간 모든 것은 과거다. 그러므로 여울도, 역현구도 흔쾌히 버릴 수 있다.
물러난 손이 텅 빈 아크릴판 내부를 만지작거렸다. 더 이상 만년필이 존재하지 않는 빈자리를 헤아리며, 차유신은 또 하나의 과거를 사멸시켰다. 어쨌든 다 끝났다. 권헌에게 모스부호로 지시한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T시티에 불을 낼 것. 차유신이 우태원 및 역운회 조직원과 T시티로 이동한 사이, 메모리카드를 빼돌리고 우태원의 집에 불을 내 도둑이 들었던 흔적을 없앨 것. 그렇게 우태원으로서는 차유신을 묶어둘 명분이 없어진다. 차유신의 유일한 약점도 소거된다.
묵묵하던 우태원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의외로 심상한 반응이었다. 끄덕인 그가 읊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아는데 맞춰준 거야?”
“어느 정도는요.”
다시금 드러나는 우태원의 눈망울이 잔허와도 같았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치 못했지만요.”
피식거린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우태원의 뺨을 가볍게 쥐고는, 위로하듯 쓸었다. 곧 그의 옆얼굴에 입을 가져간 뒤 귓불을 비벼대며 말을 흘렸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차유신의 눈길이 돌아갔다. 우태원은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차유신의 미소가 은연해졌다.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야? 우태원.”
식어있던 그의 동자가 흔들렸다. 꽉 쥐어짜이는 커다란 손 안의 만년필이 보였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테니까.”
차유신이 나긋나긋 속삭였다.
“여의도에서 봐. 우리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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