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검은 우리 (25/48)

7장. 검은 우리

24.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10월.]

우태원의 집 안에 갇힌 지 일주일을 넘어섰다. 그 사이 국정감사가 시작됐고, 거기에 차유신의 자리는 없었다. 차유신은 저녁마다 침대에 누워 그날의 국감 하이라이트를 모아 보여주는 보도채널을 보며 다친 다리를 삐거덕거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한 해의 꽃이다. 그해의 주인공이 되는 시즌이다. 그 금 같은 시기에 자신은 부러진 다리만 어루만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뿌리칠 수 없는 건, 자신에게 걸린 목줄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블랙박스 영상. 우태원은 그간 차유신에게 이렇다 할 협박을 대놓고 한 적이 없지만, 그렇기에 작정하는 들이대는 그의 칼날이 아주 위험하게 여겨졌다.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다. 제 주인을 물어뜯어 금배지를 박탈한 개새끼가 바로 우태원이다.

“식사 왜 이것밖에 안 하셨습니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온 서재길 실장이 허리를 짚었다. 차유신은 보지도 않고 답했다.

“메뉴가 별로야.”

“소고기 냄새가 역겹다 하셔서 닭고기 챙겨드렸고, 그것도 별로라 하셔서 양고기로 해드렸잖습니까.”

“고기 자체가 입에 안 맞네. 내가 비건이었나 봐.”

“무슨 비건이 혹시나 해서 챙겨드린 동파육은 또 드셨답니까.”

서재길이 기가 차다는 양 반문했다. 차유신은 무성의하게 벽에다 머리통을 기댔다.

“그건 그나마 낫더라고. 다음에 또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챙겨 오기도 힘듭니다. 오성급 호텔 중식당 셰프 닦달해서 따로 받아온 거라. 그 식당, 절대로 테이크아웃 안 하거든요.”

“잘됐네. 그럼 이제 굶지, 뭐.”

“의원님.”

서재길이 탄식했다. 그런 그를 밀치며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역시 우태원의 오른팔인 권문직 실장. 차유신을 노려본 그가 언성을 높였다.

“진짜 그만 좀 하시죠. 똥개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 우리도 태원이 형님 봐서 오냐오냐하고 있는 건데….”

“권 실장. 됐어.”

득달같이 따져대는 권문직을 서재길이 제지했다. 씩씩거린 권문직이 매서운 눈을 겨눴다. 차유신은 곁눈질로만 그를 봤다. 무심한 한 마디가 나왔다.

“좆같지? 좆같으니까 나 좀 내보내라. 나도 너희 좆같다.”

“저 새끼가 진짜…!”

“권문직!”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권문직을 서재길이 붙들었다. 멈춰선 권문직이 이를 갈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난 서재길이 차유신을 봤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 좆같아.”

“대충 답하지 마시고요. 다리는 어떤지, 밤에 혹 열은 나지 않았는지. 그런 걸 세세하게 얘기를 하셔야죠. 그래야 저희가 적절한 대응을 해드릴 것 아닙니까.”

찌푸린 서재길이 말을 이었다.

“혹시 밤새 태원이 형님께서 괴롭혀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그것도 얘기하시고요.”

내내 깔려 있던 눈꺼풀이 움칠했다. 석연치 않은 시선이 서재길을 향했다. 서재길이 주춤했다. 얼버무리는 언어가 이어졌다.

“언짢아하지 마시고요. 그저 저희 입장에선 의원님 건강 챙기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무슨 우태원 좆집으로 보이냐?”

냉랭한 질문이 나왔다. 할 말을 잃은 서재길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 탕,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친 권문직이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선반에 놓여있던 캘린더가 떨어졌다. 차유신과 서재길이 동시에 그를 봤다. 턱이 불뚝 튀어나올 정도로 어금니를 문 권문직이 몸을 굽었다. 널브러진 캘린더를 쥐어 선반 위에 두고는, 이쪽까지 들릴 정도로 혀를 찼다.

“씨발. 진짜 지랄하고 자빠졌네.”

욕설을 뱉은 권문직이 몸을 틀었다. 목덜미가 온통 시뻘겠다. 성큼성큼 발을 뻗은 그가 침실을 나섰다. 순식간에 공허해진 방 안에서 차유신이 갸웃했다. 서재길이 난처한 듯 머리를 쓸었다.

“제가 말실수를 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의원님께서 워낙 본인 얘기를 하지 않으시니….”

“저 새끼 왜 저러냐? 충성심이 아주 과도한데. 내가 우태원 좆집 어쩌고 한 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 저 새끼가 저러고 나오니까 내 입장이 더 좆같아지잖아.”

말을 끊은 차유신이 혀를 내둘렀다. 서재길이 한숨을 쉬었다.

“의원님께서 이해하십시오. 역운회 조직원들은 더러 그렇습니다.”

“뭐가 그런데.”

“역운회 안에서 태원이 형님은 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 신은 따로 정해져 있잖아. 석일태 회장.”

“석 회장하고는 다릅니다.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찡그린 차유신이 무심코 발을 내뻗었다. 시트에 대충 안착한 발목의 부목이 어긋났다. 아윽. 신음한 차유신이 이를 깨물었다. 서둘러 다가온 서재길이 몸을 숙였다. 이내 차유신의 부목을 조심조심 고쳐 만지며 중얼거렸다.

“역운회에 있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의 조직원 대부분은, 태원이 형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

“태원이 형님께서 사람답게 살게 해주시니까요.”

부목이 알맞게 끼워 맞춰졌다. 잘 자리 잡은 부목을 확인하고 난 서재길이 차유신을 봤다. 낯빛이 다소 결연했다.

“역운회는 그동안 일개 깡패조직이었는데, 태원이 형님이 한낱 깡패로만 남지 않게끔 많은 것들을 바꿔주셨습니다. 원하는 만큼 역운회에 머물다 나가도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원을 해주고, 집안에 일이 생기면 조직 차원에서 돕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게 모이면 우리 입장에서 아주 크게 다가옵니다. 내가 밑바닥 인생을 택했지만 정말 밑바닥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는 거죠. 덕분에 결속력이며 충성심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아주 조폭계 마하트마 간디 납셨네. 어차피 사람 고쳐서 못 쓰는데.”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서재길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의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한번 깡패는 영원한 깡패죠. 다만 이런 인생에도 빛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보통의 사람들처럼. 자주는 아니어도, 아주 가끔은 말입니다.”

서재길이 바로 섰다. 차유신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조금은 험상궂어 보이는 면상이 새삼 청년 같다. 많으면 27세. 적으면 25세. 대략 그 정도. 한창나이에 조직폭력배 간부가 됐다. 심지어 그것에 만족하고 있다. 차유신의 속이 부대껴온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자신의 소신에 어긋나는 일이다.

차유신은 대학생 때 국무총리실 산하 청년산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국회에 입성한 후에도 청년산업, 청년고용 문제는 늘 차유신의 몫이었다. 주장은 한결같았다. 모든 청년이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못 배우면 못 배운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번듯한 명함 한 장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많은 기업이 차유신의 기획 아래 청년고용을 대폭 늘리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숫자상으로 1만 명이 그 프로젝트의 혜택을 봤다. 차유신에겐 그런 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이 그렇게 생각한다.

“대학 안 나왔지?”

차유신이 물었다. 서재길이 헛웃음을 쳤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나왔어, 안 나왔어.”

“안 나왔습니다.”

“취업 준비를 아예 안 했어?”

“말씀하시는 저의를 잘 모르겠습니다.”

“했어, 안 했어.”

“비슷한 걸 했습니다. 열일곱 살 때.”

“왜 그렇게 빨라.”

“전 고등학교를 안 갔습니다. 그럴 형편이 못 됐거든요.”

서재길이 태연히 답했다. 차유신의 눈 밑이 미동했다.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못 간 사람을 실제로 처음 봤다. 조금은 낯설어하는 차유신의 앞에서 서재길이 재차 웃었다. 곧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흘려보냈다.

“어떤 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열일곱 살 때부터 할머니와 동생 두 명을 전부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해봤는데 도무지 그런 걸로는 감당이 안 됐고, 나 같은 사람도 성인처럼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해서 찾아보다 이쪽으로 오게 된 겁니다. 물론 리스크는 있죠. 목숨과 범죄 이력을 걸어야 하고, 그러니 국가에서 좋게 봐주지 않는 걸 이해합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역운회에는 역운회만의 국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르면 그만이고요.”

그를 응시하던 차유신의 눈매가 차분해졌다. 서재길이 고갯짓을 했다.

“도련님께서 이걸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했어.”

“다행입니다.”

“인정했다는 건 아니지만.”

긴 숨을 삼킨 차유신이 경고했다.

“혈세 먹는 국회의원인 내가 왜 인정을 해야 해? 여긴 대한민국이야.”

서재길은 그저 빙글거렸다.

*

우태원은 오후 10시가 넘어 귀가했다. 집을 지키던 서재길이 우태원을 맞이하는 소리를 방 문 너머로 들었다. 우태원은 차유신이 머무는 침실부터 찾았다. 재킷을 막 벗어 내린 그가 침대에 앉아있는 차유신을 보며 물었다.

“별일 없었어요?”

차유신은 외면한 채 대꾸했다.

“별일 많았지,”

“무슨 일이요.”

“그냥 좆같은 일.”

“어제처럼요?”

“어. 어제도, 그제도 계속 좆같더라고.”

차유신이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다 벗은 재킷을 데스크 위에 던진 우태원이 넥타이를 쥐며 물었다.

“밥은 왜 제대로 안 먹어요?”

“네가 준 건 대체로 좆같거든.”

“내일부터는 선택지를 좀 늘릴게요. 이외에 또 원하는 것 있어요? 편하게 얘기해요.”

“인터넷.”

“그건 안 돼요.”

단호하게 답한 우태원이 뇌까렸다.

“외부하고 소통할 생각 마요.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그럼 내가 뭘 해야 해. 국회의원이라는 새끼가 방구석에서 무식해지는 거, 그거 국가적 낭비야.”

“TV하고 신문 있잖아요. 선배 때문에 신문도 여덟 개나 들여놓고 있는데.”

“너 굉장히 아날로그적이다. 그걸로 세상이 다 읽혀?”

차유신이 탁, 소리 나게 시트를 쳤다. 우태원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네. 저 아주 많이 아날로그적이에요.”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였다. 반쯤 풀다 만 넥타이가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하늘거리는 천을 타고 국회 콘크리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차유신의 어깨가 움츠러졌다.

“어느 정도냐면, 선배 블랙박스 영상 보관해둔 것도 저번의 메모리카드 하나예요. 오리지널 이외의 소스를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자칫했다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골치 아파지니까.”

차유신의 식도를 타고 미지근한 침이 넘어갔다. 문득 마주한 그의 눈빛이 무거웠다. 차유신의 입술이 말아 물렸다. 진심이구나. 하긴, 우태원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게 더 자연스러웠다.

“저는 이만 바깥으로 나가 대기하겠습니다.”

문밖에서 서재길이 말했다. 우태원이 단조로이 응수했다.

“어. 밖에 지켜.”

“네. 편히 주무십시오. 형님.”

꾸벅한 서재길이 현관으로 향했다. 삐리릭, 하며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조용해졌다.

“TV 끄고 이만 자요. 눈 나빠져요.”

우태원이 타이르듯 말했다. 차유신이 바로 따졌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한 번도 제 얘기에 협조를 안 하시네요. 가능한 한 선배를 편히 두려고 이렇게나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면 오늘부턴 좀 다르게 해드릴까요?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일부러 선배에게 손 안 대온 거, 모르지 않잖아요.”

위아래 이빨이 절로 곤두섰다. 간신히 분을 삭인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좀 닥치지? 네 아랫도리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으니까.”

“그럼 그냥 원하는 걸 얘기해요. 내가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래요.”

우태원의 어조가 은근해졌다, 소리 내어 꿀꺽한 차유신이 TV를 봤다. 텅 빈 행안위 회의실이 떠 있었다. 화면 밑에 새까만 자막이 나타났다.

8시간 내내 제자리걸음만…‘저격수 차유신’ 없는 행안부 국감

“우리 막내 비서 권헌 이쪽으로 보내 봐.”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태원의 호흡이 얼핏 거칠어졌다.

“권 비서는 갑자기 왜요.”

“난 TV나 신문 너머의 세상이 보고 싶어. 그런데 인터넷은 어렵다며. 그러면 그걸 대체할 만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줘야 할 것 아니야. 권헌이면 돼. 다른 놈은 필요 없어.”

“선배.”

“계속 여기에 두라는 것 아니야. 접견 시간은 한 시간으로 해. 교도소에서 하는 것처럼 서재길이 됐든 누가 됐든 감시관을 붙여도 좋아. 나는 그냥 권 비서를 통해 바깥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차유신이 똑바로 눈을 겨눴다. 마주 본 우태원이 탐탁지 않은 숨을 골랐다. 끝내 끄덕인 그가 입을 뗐다,

“그래요. 솔직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우리 쪽에서 감시하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당장 내일….”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혀 잘려나가고 싶지 않으면.”

무뚝뚝한 한 마디가 귀를 스쳤다. 차유신이 이기죽거렸다.

“이젠 발목에 이어 혀까지 부러뜨릴 셈이야?”

우태원이 무표정으로 답했다.

“설마요. 저는 선배 혀 안 건드려요.”

곧 가볍게 미소 지었다.

“권 비서 얘기였어요. 걱정 마요.”

*

테이블은 빼곡했다. 어디 하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음식이 담긴 하얀 식기투성이였다. 소고기 스테이크며 초밥, 장어구이, 복탕 등 10가지가 족히 넘는 메뉴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별개로 수준이 높았다. 음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범상한 요리사의 재주가 아니라는 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앞으로 모든 식사는 김 셰프 통해 준비하는 걸로 해.”

우태원이 서재길 쪽에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받아든 서재길이 끄덕였다. 차유신은 턱을 괸 채 멀리서 비치는 명함을 읽었다. SDB다이닝 총괄 셰프 김재원. SDB다이닝은 SDB그룹에서 운영하는 특급호텔 SDB팰리스의 레스토랑이었다. 아침부터 어떻게 이 진수성찬이 가능할까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석일태 회장의 아들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요청이니 그쪽에서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한이 있어도 맞춰줘야 했을 터다.

맞은편에서 수저를 드는 우태원을 보며 차유신은 괜히 젓가락을 휘적거렸다. 안 그래도 없던 밥맛이 뚝 떨어졌다. 입 안에 구겨 넣은 장어구이를 대충 씹고는 먼 치에 뒀던 신문을 당겨 펼쳤다. 두어 장 넘기자 정치면이 나왔다. 우태원의 이름이 들어간 톱기사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뇌물수수·낙하산인사·지인청탁…우태원, 이은수에 ‘3종 혐의’ 직격탄

금융관리위원장 이은수. 차유신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속독으로 읽은 기사에는 이은수가 일부 금융사 임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정황, 그리고 역시 밥 먹듯이 행해 온 낙하산인사 및 지인 승진 청탁 증거물을 오늘 국감에서 우태원이 신랄하게 공개할 예정이며, 이 과정에서 이은수가 어떻게 무너질지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이 신문은 친(親) 대국민당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은수는 현 정권 때 위원장에 발탁되긴 했지만, 친 신진화당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금융업계에서는 SDB금융을 비롯한 2금융권 이하 금융사에 혹독한 규제를 일삼는 걸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2금융권에서 가장 규모가 큰 SDB금융을 싫어했고, 그곳의 회장인 석일태를 대놓고 양아치 취급했다.

“이은수가 이걸로 무너지겠어?”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신문을 밀어냈다. 물을 한 모금 삼킨 우태원이 물었다.

“왜 안 된다고 보시는데요.”

“이은수 사돈이 청와대 비서실장 최동하야. 패도 패도 안 죽기로 소문난 그 최동하. 감이 안 와? 이은수가 그간 설쳐온 거,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럼 그 믿는 구석을 같이 무너뜨리면 되죠.”

우태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차유신의 손이 움찔했다. 또 한 번 물을 마신 우태원이 말했다.

“공개 자료에는 포함돼있지 않지만, 낙하산인사와 지인청탁에는 최동하 실장이 연루돼있습니다. 며칠 전 제가 직접 최 선배께 경고를 했고, 최 선배는 그저 알아서 하라고만 했습니다. 이후 이은수 원장 쪽에서 본인이 다 책임질 테니 최 실장 언급은 삼가 달라는 요청이 왔고요. 이 원장은 이번 국감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옷을 벗을 겁니다. 최 실장은 본인까지 다칠 의사가 없고, 이 원장은 최 실장의 방패가 돼야하는 입장에 있으니까요.”

우태원의 입에서 컵이 거둬졌다. 은은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선배?”

차유신의 손가락을 타고 펜대가 돌아가듯 젓가락이 회전했다. 다분히 언짢은 한 마디가 나왔다.

“글쎄. 너 좆같다는 거?”

우태원이 빙긋 웃었다,

“꽤 식상한 얘기네요.”

현관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들어선 권문직이 우태원의 곁으로 왔다. 몸을 기운 그가 바쁘게 보고했다.

“역운회 부산지회 귀국 시간, 토요일 오후 11시로 잡혔습니다.”

“항구로?”

“물건은 항구로 오고, 부산지회 조직원들은 따로 공항으로 옵니다.”

“한번 봐야겠네.”

“네. 서울에서 누가 가긴 해야 합니다. 물건도 확인하고, 필리핀 다녀온 조직원들 얘기도 들을 겸.”

“권 실장이 가는 걸로 해.”

권문직이 순간 멈칫했다. 망설이던 그가 운을 뗐다.

“형님하고 같이 가는 거죠?”

“나는 힘들어. 권 실장 혼자서 가. 혼자가 부담되면 다른 실장 누구하고 같이 가던가. 다만 재길이는 여기에 있어야 하니 제외.”

“부산 일정은 형님께서 자주 챙겨오셨잖습니까. 갈 때마다 바람 쐬는 기분도 좋다 하셨고.”

권문직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태원은 무시하듯 차유신을 봤다. 지극히 예사로운 언어가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당분간은 서울에만 있을 거야.”

바로 의미를 알아챈 권문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간신히 숨을 삭인 그가 읊조렸다.

“네. 형님.”

돌아간 권문직의 낯에 침울함이 어렸다. 투박한 이름과 달리 생김새 자체는 제법 곱상한 편인지라 표정 변화가 신기할 정도로 눈에 잘 띄었다. 우태원과 부산에 못 간다는 게 저 정도로 서운해할 일인가. 차유신의 눈이 두어 번 깜박였다. 순간적으로 아주 황당한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차유신은 속으로 머리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보통의 남성이라면, 그럴 턱이 없지.

“태원 형님. 왔습니다.”

잠시 집을 나섰던 서재길이 나타났다.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

“권헌 비서…. 차 의원님께서 요청하셨던.”

테이블을 짚은 차유신의 손이 곤두섰다. 얼굴이 절로 돌아갔다. 서재길의 뒤편에서 커다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차림의 권헌이 긴장한 채 뒷짐을 졌다. 차유신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넌 복장이 왜 그래?”

“아침에 연락받고 급히 나오느라 그랬습니다. 송구합니다.”

“그게 말이 되는 얘기야? 지금 오전 7시 40분이야. 평소 같으면 복장 갖춰 입고 의원실에 앉아있어야 할 시간에….”

“저 휴직 신청 했습니다.”

권헌의 울대뼈가 단단해졌다. 굵은 침을 삼킨 그가 말을 덧붙였다.

“의원님 없는 의원실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아, 수보께 얘기해 당분간 쉬겠다 했습니다. 아까 거의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받는 바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느라 이 꼴입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차유신의 낯이 멍해졌다. 권헌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머뭇거리던 차유신이 급하게 테이블을 짚었다. 확고한 지시가 나왔다.

“일단 저쪽 방으로 가봐. 가서 얘기를….”

“앉아요.”

반쯤 일으켜졌던 몸이 멎었다. 맞은편에서 우태원이 가붓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뭘 앉아?”

“식사 시간이잖아요.”

“난 밥 다 먹었어.”

“선배는 하나도 안 먹었어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앞에 놓인 앞 접시를 가리켰다. 위에는 식사 초반에 우태원이 챙겨준 장어와 초밥, 고기 조각 따위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태원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거 다 먹고 일어나요.”

“내가 안 먹고 싶다는데 뭘 다 먹으라는 거야. 어?”

차유신이 성을 냈다. 우태원은 대답 대신 눈을 굴렸다. 목적지는 저편에 서 있는 권헌이었다. 마주친 권헌의 눈이 미동했다. 그의 어깻죽지에 점점 힘이 실리는 게 보였다. 그에 비례해 조금씩 냉해지는 표정이 두드러졌다. 전에 없이 싸늘해진 톤으로, 권헌이 입을 열었다.

“의원님 개인행동을 지나치게 터치하십니다.”

“권 비서에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차유신 의원님은 제가 모시는 분이기에….”

“그 얘기가 아니라.”

말을 끊은 우태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무게감 있는 으름장이 거실을 울렸다.

“지금 누구 앞에서 훈수를 두는 거야. 응?”

권헌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보일 듯 말 듯 어금니를 문 그가 등 뒤에 둔 손을 추슬렀다. 거실이 한없이 적막해졌다. 우태원이 나직한 혼잣말을 했다.

“역시 괜히 불렀나.”

차유신의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정말로 고민하는 것처럼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는 우태원을 보다가, 대뜸 널브러진 젓가락을 쥐었다. 곧 음식물 더미에 끄트머리를 꽂으며 쏘아붙였다.

“시키는 대로 처먹을 테니까, 그만 해.”

“뭘 그만 해요?”

우태원이 갸웃했다. 차유신이 차갑게 받아쳤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발작하지 마. 가오 떨어져.”

우태원이 나긋하게 눈매를 접었다.

“그야 발정 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죠.”

뭉텅이 진 음식물이 그만 목에 걸렸다. 서둘러 컵을 채 찬물을 벌컥거렸다. 커다란 바위가 쓸고 내려간 것처럼 식도가 뻥 뚫렸다.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저편을 살폈다. 꽤나 당황한 기색으로 차유신과 우태원을 번갈아 보는 권헌이 보였다. 씨발. 차유신의 손에 들린 젓가락이 딱, 소리를 내며 그릇을 스쳤다.

일단은 계속해서 먹었다. 장어도, 소고기도, 해산물도. 다른 곳은 보지 않았다. 오로지 먹기만 했다. 그러는 내내 맞은편에서 자신을 관찰해오는 우태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꾸역꾸역 삼켜지던 음식물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목울대가 덜컥거렸다. 역류할 뻔했던 것들이 버겁게 낙하했다.

접시를 비웠지만, 개운치 않았다. 매서운 눈길이 맞은편에 쏠렸다. 우태원은 웃지도 않고 차유신을 마주 봤다. 캄캄한 동공이 차유신을 집요하게 머금었다. 거기에 갇힌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텅 빈 그릇을 민 차유신이 입을 훔쳤다. 또 뭘 계산하는 거지. 차유신은 두려운 게 없지만, 불안한 건 많았다. 지금은 그중에서 우태원이 가장 불안했다.

범도, 사자도 없는 도시에선 주인 없는 들개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의원님. 수행비서 도착했다 합니다.”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 서재길이 말했다. 주억거린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이내 서재길에게 턱짓을 했다.

“차 선배 잘 보필하고.”

“네. 형님.”

우태원의 손이 셔츠 칼라로 올라갔다. 걸쳐만 두고 있던 넥타이를 쥐어 매듭을 만드는 손길이 노곤했다. 형태를 잡아가는 넥타이 위에서 점점 골똘해지는 낯이 눈에 띄었다. 한층 무거워진 우태원의 시선이 다시 권헌을 향했다. 새까만 심연을 헤집듯, 그는 넥타이와 권헌을 손과 눈으로 곱씹었다.

차유신의 입 안에서 불안정한 혀 놀림이 반복됐다. 언짢다. 우태원은 지금 아주 많이 언짢다. 그 언짢음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지금 머릿속으로 수많은 해결방안을 떠올리고 있을 터다. 그 수는 모양도 색채도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공통된 저변을 지니고 있다.

우태원은 권헌을 보는 게 싫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유신의 곁에 있는 권헌을 보는 게 불쾌하다. 그런 그에게는 아주 고질적이며 단순한 해결방식이 존재했다.

들개는 거슬리는 걸 먹어서 없앤다.

“우태원.”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멈칫한 우태원이 눈길이 넘어왔다. 차유신을 담은 망막이 새삼 탁했다. 그는 아직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와 봐.”

손을 까딱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우태원이 발을 뻗었다. 갑자기 온순해진 들짐승처럼, 유유히 다가온 그가 차유신의 앞에 섰다. 들숨을 삼킨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불완전하게 감긴 넥타이를 움켜쥐고는 차곡차곡 매듭을 만들었다. 우태원의 낯에서 근육이 풀어졌다.

“이은수 원장 살살 다뤄. 보낼 땐 보내더라도, 공직자 간의 예의라는 게 있는 거야.”

칼라 틈새에 정확하게 매듭을 맞춘 후, 죽 끄트머리를 빼내며 차유신이 말했다. 우태원이 비식거렸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차유신의 머리맡을 스몄다.

“일부러 이래요?”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어느새 어둠을 거둔 그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차유신은 애매한 고갯짓을 했다. 상대가 답을 알고 있다 해서 굳이 인정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해.”

우태원이 낮게 웃었다. 텁지근한 웃음소리가 거실을 휘감았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저편을 봤다. 얼어붙은 권헌이 이쪽을 주시하며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아주 묘한 표정이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으며. 조금은 흥분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넥타이도 매준 적 있어요?”

완성한 넥타이를 두고 내려가던 손을 우태원이 잡아챘다. 질문에 흥미가 어려 있었다. 빤한 시선이 우태원에게 걸렸다. 차유신은 미약한 도리질을 했다.

“아니.”

“왜요? 이렇게 잘 매면서.”

“매줄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는데.”

“지금은 느꼈고?”

우태원이 입매에 긴 호가 걸렸다.

“내가 권 비서에게 뭐라도 할지 모른다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요?”

차유신의 입술이 안에서 깨물렸다. 자못 즐거워하는 우태원을 보며, 차유신은 또 한 번 애매한 고갯짓을 했다. 긍정도 부정도 생략한 채 분노만 담은 대답을 꺼냈다.

“목줄 하나 채워준 것뿐이야. 개소리하지 마.”

우태원의 눈이 곱게 휘었다. 제 넥타이 매듭을 한번 건드린 그가 몸을 틀었다.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걷다가, 문득 팔을 뻗었다. 우두커니 있던 권헌의 어깨가 확 휘어 잡혔다. 권헌의 낯이 일순간 구겨졌다. 우태원이 고저 없이 말했다.

“삼십 분 줄 거야. 서재길 실장이 지켜볼 거고, 침실에 설치한 CCTV 통해 나도 보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 할 생각하지 마.”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권헌이 우태원을 봤다. 차가운 음성이 건네졌다.

“예를 들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권헌의 어깨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대로 차유신을 가리킨 우태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차 선배 너무 똑바로 보지 마. 장님 되고 싶지 않으면.”

*

시계침 똑딱이는 소리가 쓸쓸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차유신의 몸이 늘어졌다. 정자세를 유지한 권헌이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차유신이 신경질적으로 손짓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의원실에서 거취가 불투명한 사람이 총 몇 명이야.”

“수보와 한수현 비서관 빼고는 사실상 전부 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뜸을 들인 권헌이 중얼거렸다.

“일혁이 형님은 박용택 의원실에서 오퍼가 들어와 고민 중인 단계이고, 김운열 비서는 신인대방 복귀를 고려 중인 걸로 압니다. 윤재희 비서는 대학원으로 돌아가는 걸 생각하고 있고….”

이어지는 말들이 안개처럼 귓가에서 흩어졌다. 듣고만 있던 차유신의 시선이 돌아갔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서재길이 머무적거렸다. 차유신이 얼굴을 감싸며 어금니를 씹었다.

“내가 의원실 운영을 잘못한 모양이다.”

시트를 짚은 손이 밀려났다. 서재길에게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은 손이 툭, 매트리스를 건드렸다. 권헌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의원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국회의원 보좌진이라는 건 고정된 일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변수가 생기면….”

“그야 이성적으로 보면 내 탓이 아니지. 하지만 나는 당사자야. 제3자는 객관적으로 볼 문제도 나는 감정적으로 봐. 내 착잡함은 자연스러운 거야.”

차유신이 재차 시트를 두드렸다. 권헌의 시선이 떨어졌다. 차유신이 노곤하게 경고했다.

“그러니 권 비서는 그냥 받아들이기나 해.”

권헌의 눈길이 일정하게 움직이는 차유신의 손끝에 머물렀다. 돌연 그의 숨이 가빠졌다. 곧 안정적으로 턱을 가누고는, 차분하게 입을 뗐다.

“네. 의원님.”

“또 할 말 있어?”

차유신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물끄러미 마주 보던 권헌이 입을 다셨다. 미미하게 붉어진 볼이 눈에 띄었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 조금은 격양된 반응이었다.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할 말 있냐고 물었잖아.”

“실례가 안 된다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다물렸다 열렸다를 반복하던 그의 입이 힘겹게 자리를 잡았다. 지극히 정중한 언어가 새어 나왔다.

“의원님의 다친 발목을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침실이 또 조용해졌다. 뒤편의 서재길이 뒤꿈치를 지르밟았다. 권헌이 사죄하듯 고개를 떨궜다.

“부탁드립니다.”

꾹 입을 다문 차유신의 시선이 비껴났다. 멀찍이 선 서재길에게 눈을 두고는, 불퉁한 질문을 건넸다.

“이 정도는 상관없지? 서 실장.”

서재길이 더듬거렸다. 요지부동으로 멈춰 있는 권헌을 힐끔거리다, 마지못해 주억거렸다.

“뭐…. 아마도요.”

말이 끝나자마자 권헌이 상체를 숙였다. 소리 없이 내려오는 얼굴에서 짙은 숨이 흩뿌려졌다. 훈풍에 스친 살갗이 간질거렸다. 차유신의 턱이 미동했다. 부목에 감싸인 발목에 얼굴을 붙인 권헌이 무릎을 꿇었다.

“정확한 사정을 저야 잘 모릅니다만.”

권헌의 손이 다가왔다. 부목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공간을 만든 그가 턱을 내밀었다. 드러난 맨살에 미지근한 입술이 닿았다. 춥, 소리를 내며 표피가 미끄러졌다. 차유신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이번에는 많이 간지러웠다. 바로 목소리가 커졌다.

“권 비서.”

“빨리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의원님.”

입을 거둔 권헌이 몸을 일으켰다. 이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바로 섰다. 완연하게 고적해진 침실 안에서 차유신이 고개를 끌어올렸다. 서재길이 큼, 소리를 내며 이마를 훔쳤다. 이 상황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가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권 비서.”

침묵을 깨고, 차유신이 소리를 냈다.

“네. 의원님.”

“왜 내 의원실에 왔다고 했지?”

차유신이 훈계하듯 물었다. 권헌은 뜸도 들이지 않고 답했다.

“의원님을 매우 훌륭한 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권헌의 눈에서 빛이 났다. 끄덕인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부쩍 생기가 흐르는 권헌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기고는, 어르듯 말했다.

“그래. 난 아주 훌륭한 사람이니, 언제라도 금방 괜찮아져. 그 어떤 것도 나를 쉽게 다치게 할 수 없어.”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저 구석에서 빨간 불을 번뜩이는 CCTV가 망막에 걸렸다. 우태원의 동공처럼 새까만 렌즈를 바라보며, 차유신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내 동의 없이는 나를 죽여도 죽인 게 아니야.”

*

권헌이 돌아간 후 차유신은 간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차유신은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여행하듯 건너다녔다. 여울로 불리던 유년 시절, 수많은 학우들에 둘러싸여 보낸 고교 시절, 만인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은 대학 시절.

차유신은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대개 기억한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은 차유신이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건 빠짐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긴 여행의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차유신은 문득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져 오는 걸 느꼈다. 기이한 의구심이 뇌리를 스몄다. 단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의문이 자아를 들쑤셨다. 혹 이 기억이 상상 이상으로 불완전한 건 아닐까. 자신이 얻은 것보다 놓친 것이 훨씬 더 많았던 건 아닐까.

힘겹게 완성한 차유신의 삶에, 진짜보다 가짜가 많았던 건 아닐까.

“회장님! 일단 태원이 형님과 통화는 해보시고….”

다급한 애원이 귀를 덮쳤다. 감겨있던 눈꺼풀이 들렸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 뒤 얼굴을 쓸었다. 잠이 채 달아나지 않은 몸에서는 단내가 났다.

무작정 시트에 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자기 전에 틀어놓은 TV에서는 오늘의 국감 하이라이트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상단에 새겨진 시간이 오후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거의 12시간을 잤구나. 차유신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이 집에 온 내내 불면에 시달리기는 했다. 그러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이렇게 된 모양이다. 입 안에 쓴 침이 고였다.

의원실 사람 하나 만난 게 안정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불현듯 침실 입구가 열렸다. 회장님! 문 너머의 서재길이 소리를 쳤다. 못 들은 척 발을 뻗어가며 다가오는 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헛웃음을 친 차유신이 등을 젖혔다. 벽에다 뒤통수를 기댄 채, 조곤조곤 인사를 건넸다.

“운이 좋으십니다. 석일태 회장님.”

양 주머니에 손을 꽂은 석일태가 차유신의 앞에 섰다. 부목에 감긴 발목을 일별하고는, 약 올리듯 입매를 꼬았다.

“보기 좋네. 차 의원.”

“저 구경하러 오셨어요?”

“겸사겸사.”

“석 회장님이야 말로 보기 좋네요. 저와 국감장에서 만났다면 지금쯤 기자들 피해 칩거하느라 바빴을 텐데, 현재는 일단 자유인 신분이잖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그 신분, 지금이라도 실컷 누리십시오.”

석일태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간신히 가라앉힌 음성이 건네졌다.

“말조심하지, 차 의원. 응?”

차유신은 태평하게 다친 발만 기웃거렸다.

“부정은 못 하시네요.”

석일태의 입에서 탐탁지 않은 호흡이 번졌다. 서재길이 체념한 듯 문을 닫으며 바깥으로 빠졌다. 고즈넉한 침실 안에서 TV 잡음이 간간이 맴돌았다. 한참의 생각을 마친 듯한 석일태가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목소리가 새삼 무지근했다.

“그래, 뭐…. 잘 클 거라는 예상은 했지. 이렇게까지 잘 클 줄은 몰랐지만.”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석일태가 높낮이 없는 언어를 이어갔다.

“나를 그렇게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거, 이제는 이해해. 서인 마담 아들내미였다고 진작 얘기를 하지 그랬어. 일전에 나 노려보던 차 의원 눈빛도 신경 쓰이고, 워낙 차 의원 관련해서는 의아한 구석이 많아 태원이 놈 붙들고 캐물었더니 거기서 답이 나오더라고.”

석일태가 혀를 찼다.

“역현구 출신이라는 거 왜 숨겼어? 알았다면 내가 잘 챙겨줬을 텐데.”

허. 차유신은 그저 웃었다. 부쩍 부드러워진 석일태를 보고 있자니, 깊은 구석에서부터 구역질이 치밀었다. 빈정거리는 대꾸가 나왔다.

“약점 하나 잡아서 좋으시겠습니다.”

“약점?”

“제 유일한 약점이죠. 실은 역현구 출신인 거. 기자들 한두 명에게만 흘려도 엄청난 파급력을 갖춘 가십거리가 될 겁니다.”

“설마 내가 이런 걸 어디서 떠벌리고 다닐 거라 생각하는 거야? 난 남 좋은 일 안 해.”

키득거린 석일태가 뇌까렸다.

“차 의원이 역현구 출신이었다는 과거, 원래 지니고 있던 ‘비운의 귀공자’ 타이틀에 히스토리만 덧붙일 뿐이야. 아주 좋은 쪽으로. 이 구질구질한 곳에서 태어나 혼자 꾸역꾸역 자수성가했다는 건데, 이게 대중들에게 좋게 작용하면 좋게 작용했지 나쁘게 작용할 건 없잖아. 차 의원도 사실은 알 것 아니야. 안 그래?”

석일태가 갸웃했다. 차유신은 그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석일태 말이 맞다. 차유신이 역현구에서 태어났다는 건, 고난과 역경을 거듭해온 ‘비운의 귀공자 차유신’ 인생사에 하나의 빛나는 액세서리가 될 뿐이다. 결코 약점일 수가 없다. 약점으로 작용하는 구석이 있다면, 단 하나.

차유신의 자긍심.

“서 사장 참 괜찮은 여자였는데.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지, 센스 있지. 무엇보다 아주 섹시하고 말이야. 특히 그 눈.”

석일태가 능청을 떨었다. 차유신은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어머니를 희롱하는 석일태라면 이골이 났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목격해 온 일이다. 차유신에게는 내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성도 있었다.

차유신은 이제 7세짜리 ‘여울’이 아니다.

“남자만 잘못 만나지 않았으면 내가 끝까지 예뻐해 줬을 텐데. 아주 아쉬워.”

석일태가 팔짱을 꼈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스르르 이동했다. 자신을 조롱하는 석일태를 보다가, 서서히 입을 뗐다.

“회장님은 양아들을 잘못 만난 것 같은데요.”

석일태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차유신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회장님 담그려다 실패한 오른팔이 우태원 아버지입니다.”

“그건 알아. 아주 잘.”

“회장님은 지금 매우 사나운 들짐승을 제집에 들인 겁니다.”

침실이 조용해졌다. 일자를 유지하던 석일태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긴 숨을 뱉은 그가 팔짱을 풀었다. 곧 뜬금없는 한 마디를 꺼냈다.

“죽은 내 아들에게는 문신이 없었어. 관행대로라면 내가 재경이 문신을 해줬어야 하는데, 나는 도통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

석일태의 한 손이 등으로 넘어갔다. 제 두툼한 가죽을 두드리고는, 느른하게 허리를 폈다. 잃었던 과거를 헤아리듯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만약 재경이 문신을 내가 해줬다면, 분명히 내 등에 있는 것과 같은 걸 주문했겠지.”

“발톱 모양 문신 말씀이십니까.”

차유신이 심드렁히 물었다. 석일태가 빙긋거렸다.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맞아. 24년 전 도명진, 배민기와 내분을 벌일 때 그중 배민기가 내 등에 상처를 냈어. 아주 심하게. 그걸 커버하려고 발톱 모양 문신을 했어. 영광의 상징이지. 그 문신이 자리를 잡자마자 내가 비로소 SDB그룹을 통합했으니까.”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덕분에 아드님은 아버지 선물 하나 못 받고 저세상 간 처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석일태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언사였다. 알아챈 석일태는 그저 가슴을 울렁이며 호흡하는 것에 그쳤다. 한껏 말라붙은 언어가 차유신과 그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역운회를 물려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면 진작 해줬겠지.”

석일태의 목소리가 음험해졌다.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어 몸에 잘 자리 잡은 흉터 하나 없는 놈에게, 내가 굳이 기대감을 심어줄 이유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런데 우태원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석일태는 대답 대신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길이 꽂힌 TV 화면에서는 정무위 국감 현장이 나오고 있었다. 마이크에 입을 가져간 우태원과 긴장한 채 앉아있는 이은수 원장을 카메라가 분할해 담았다. 이은수에게 시선을 둔 우태원이 아주 정중하게 운을 뗐다. 지금부터 제가 화면에 띄우는 의혹들에 대해 원장님께서는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해명을 하셔야 합니다. 움츠린 이은수가 답했다. 따르겠습니다. 의원님.

“차 의원 말대로, 태원이는 태생이 들짐승이야.”

석일태의 눈이 미끄러졌다. 차유신은 석연치 않게 그를 올려다봤다.

“물론 위험하지. 하지만 나는 그보다 위험한 놈들도 얼마든지 상대해왔어.”

닫힌 문 너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서재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런 의미에서 태원이는 차라리 안전해. 아무리 기고 나는 놈이라 한들, 태생이 결국 우종진 아들이거든.”

철컥, 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몸을 들이미는 우태원이 보였다. 석일태는 개의치 않고 쐐기를 박았다.

“지 애비 다루듯이 하면 아주 쉬워. 개처럼 부려먹다가, 물어뜯을 기미가 보이면 내가 먼저 목을 치면 되는 거지.”

안으로 들어선 우태원이 멈춰 섰다. 씩 웃은 석일태가 다가갔다. 곧 툭, 소리 나게 어깨를 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았다. 우리 태원이.”

우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차유신이 쯧, 소리를 냈다.

“중요한 건 아직 저 개새끼는 회장님을 물어뜯지 않았고, 덕분에 회장님은 그 개새끼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거겠죠.”

“그럼. 아주 많이 보고 있지.”

“그 개새끼가 저를 감금한 덕에 빌어먹을 국감 출석할 명분도 날아갔고요.”

석일태가 여유로이 미소 지었다.

“그러게. 아주 아쉬워.”

“석 회장님이 20년 가까이 역현구 관할 경찰들과 결탁한 덕에 역운회가 얼마나 제멋대로 지역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이번에 낱낱이 까발릴 생각이었는데. 아주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저 웃은 석일태가 등을 보였다. 뚜벅뚜벅 침실을 나선 그가 호기롭게 외쳤다.

“세상일이 차 의원 생각처럼 항상 모범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야. 그런 세상이니 내가 20년 가까이 역운회를 순탄하게 이끌어온 것 아니겠어? 역현경찰서 공무원들이 뒤봐주는 거, 충분히 누리면서 말이지.”

석일태의 뒤통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실에서 서재길이 커다랗게 소리치는 게 들렸다. 살펴 가십시오, 회장님! 바깥쪽은 보지도 않은 우태원이 침실 문을 닫고 걸어왔다. 넥타이부터 푸는 걸 응시하던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넌 가오가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우태원의 손이 매듭을 추슬렀다. 차유신이 대놓고 비꼬았다.

“아버지에 이어 너까지. 2대가 석일태에게 개 취급당하고 있는데 쪽팔린 걸 모른다?”

막 매듭을 해제한 손이 내려왔다. 반쯤 늘어진 넥타이를 둔 채, 허리를 짚은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신에게 꽂힌 눈길이 자못 냉했다.

“대체 왜 그래요?”

“내가 틀린 말 했어? 석일태가 얘기하잖아. 우종진 이사하고 너, 둘 다….”

“그거 말고요.”

말을 끊은 우태원이 다가왔다. 차유신의 얼굴에 새까만 음영이 드리웠다. 눈을 깐 우태원이 팔을 뻗었다. 훅 내려온 손이 차유신의 다리를 덮었다. 미끄러지듯 맨살을 훑다가, 발목에 감긴 부목을 부여잡았다.

“왜 자꾸 내가 싫어하는 걸 하죠?”

“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야.”

“여기다 권 비서 입술 비비게 했잖아요. CCTV로 다 봤어요.”

우태원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잠시 넋을 잃은 차유신이 황당하다는 양 버럭 했다.

“그게 그렇게 열 받을 일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권헌하고 떡이라도 친 줄 알겠다.”

“저에게는 떡 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선배하고 접촉하는 모든 행위가, 저에게는 섹스한 것과 동일하게 다가와요.”

칠흑에 잠긴 눈은 하염없는 진심이었다. 할 말을 잃은 차유신이 멍해졌다. 우태원이 상체를 들이밀었다. 몰아붙이는 질문이 찾아들었다.

“전 궁금해요. 왜 가만히 있었어요?”

부목을 잡은 손에 불끈 힘이 실렸다. 악, 소리를 낸 차유신이 시트를 쥐어짰다. 우태원의 목소리가 눅눅해졌다.

“다른 남자가 섹스하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선배.”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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