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장. 들개
23.
학교 뒤편의 공터에는 낡은 창고가 있었다. 입구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린, 버려진 곳이었다. 겉보기엔 그렇지만 실은 버려지지 않았다는 걸 아이들은 알게 됐다. 처음 발견한 건 교내에서 질 나쁘기로 소문난 남학생 무리였다. 역현구 운도동에 있는 역현중학교는 사건사고가 잦은 것으로 전국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들은 그런 걸 주도하는 소위 일진 무리였다.
그들의 꿈은 일률적이었다. 18세나 19세 무렵에 역운회 조직원이 되는 것. 역현구 남학생 사이에 흔한 장래희망이었다. 깡패가 되는 조건이야 정해져 있고, 그런 의미에서 또래에 비해 체격도 좋고 싸움도 잘하는 그들이 좀 더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긴 했다.
창고가 비지 않았다는 건 어떤 울음소리 덕에 발각됐다. 무리 중 하나가 끙끙대는 짐승 소리를 들었다. 정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열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틈새를 찾아봤다. 그러다 부서진 뒷문이 있다는 걸 알았고, 억지로 틈을 벌려가며 안으로 진입했다.
어둠 속에서 창고의 주인들이 눈을 떴다. 희번덕거리는 수십 개의 눈을 본 남학생들은 그만 비명을 질렀다. 월, 월, 소리를 내며 커다란 들개 십 수 마리가 뛰쳐나왔다. 혼비백산한 남학생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상당수가 어찌어찌 개들을 따돌렸지만, 몇 명은 결국 개에게 따라잡혔다.
그날 다섯 명이 입원했다. 그중 두 명은 물어뜯긴 팔과 다리가 곪아 수일 밤에 걸쳐 사경을 헤맸다. 아무리 덩치가 좋다 해도 중학교 1학년, 14세가량의 아이들이었다. 톱니 같은 개의 이빨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성인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틀 후 우태원은 문제의 창고로 갔다. 그냥 궁금해서 갔다. 개들이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 많은 학생들이 다쳤는지가 궁금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남학생 몇 명이 길 안내를 맡았다. 그리해 달라 했더니, 아주 순순히 응했다.
우태원은 학교에 특별한 무리를 두지 않고 혼자 다녔다. 눈에 띄는 것이 성가셔 최대한 조용히 지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틈만 나면 우태원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수인을 자처하는 남학생도 많았다. 우태원이 석일태 회장의 양자라는 사실도, 한때 이 구역에서 꽤 유명하던 정훈석이나 석재경의 ‘아끼는 동생’이라는 사실도 딱히 알려진 적이 없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런 우태원이 건넨 “창고에 데려가 달라”는 말은 묘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창고의 뒷문을 눈앞에 뒀을 때, 남학생들은 질겁하며 멀찍이 물러났다. 저번처럼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을까 봐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오로지 우태원만이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둠 속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태원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햇살이 깔린 널찍한 창고 안에서, 스무 마리는 족히 되는 들개들이 눈을 맞춰오고 있었다.
우태원은 좀 더 걸었다. 그들이 아주 잘 보이는 곳까지 간 뒤 우뚝 멈춰 섰다.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엇보다 개들이 자신을 물어뜯어도 상관이 없었다. 우태원은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아직 물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묘한 눈싸움이 시작됐다. 우태원은 개들을 봤고, 개들도 우태원을 봤다. 끊기지 않는 실처럼 팽팽한 신경전을 한참이나 이어가던 무렵, 개 한 마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구부렸다. 다른 개들도 일제히 꼬리를 내린 채 눈만 굴렸다. 몇 마리가 우태원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지만, 그저 냄새를 맡거나 기웃거리는 데 그쳤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 어떤 개도 우태원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동족을 맞이한 것처럼 종종 꼬리를 흔들어댈 뿐이었다. 우태원은 바닥을 지르밟았다. 너무도 시시한 탐색전이었다.
개가 총 24마리 있다는 걸 세고 난 뒤 창고를 나왔다. 멀쩡히 등장한 우태원을 보며 남학생들이 탄식했다. 경외감에 찬 시선이 우태원에게 쏠렸다. 우태원은 그들을 무시한 채 연신 다리를 뻗었다.
걸어가는 우태원을 남학생들이 부리나케 쫓았다. 새롭게 형성된 무리의 우두머리를 따르듯 일사불란한 행보였다. 아까의 개들이 사람이라면, 그와 같았을 것이다.
다음 날부터 우태원을 중심으로 한 무리가 형성됐다. 냄새를 맡은 들개들처럼, 질 나쁜 남학생들은 매우 민첩하게 우태원을 모셨다. 이 버려진 동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자라온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제가 누울 곳을 알아봤다.
학교의 중심이 됐다고 해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우태원은 여전히 조용히 살았다. 그러다 가끔 일탈했다. 필요하면 싸움을 했고, 대상은 선생이든 선배든 가리지 않았다. 14세 우태원은 고학년짜리 중학생보다 컸고 성인보다 작았다. 선배들은 쉽게 꺾었고, 선생들은 물리적으로는 꺾었으나 관습에 의해 제어 당했다.
선생과 크게 마찰하는 바람에 석일태 회장이 학교로 호출되던 날, 석일태는 그를 꾸짖는 대신 단출한 경고를 했다.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마라. 성인은 네가 상대할 수도 없고, 상대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야. 10년 후면 몰라도. 근본적인 격차라는 게 있는 거다. 그 한 마디에 우태원은 어쩔 수 없는 양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더 이상 선생과 충돌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우태원은 제법 풍채가 좋은 성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 무렵부터는 선생들이 우태원을 피하기 시작했다. 학교의 질서와 평화는 지극히 합리적이며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우태원의 인생에 하나의 획이 그어졌다.
“학교에 장사꾼 왔어.”
점심시간 막바지였다. 우태원은 스탠드에 걸터앉아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농구를 내리 삼십 분 동안 한 탓에 제법 더웠다. 우태원에게 차가운 캔 음료를 건넨 남학생이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 봐봐.”
우태원은 캔을 따며 시선을 옮겼다. 운동장에 세워둔 새하얀 세단이 보였다. 저거 저기에 세워도 되나. 언젠가 학교에 후원을 하러 온 석일태 회장 이후로 운동장에 차가 세워진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또 애들 데려간다. 씨발 새끼들.”
우태원의 곁에 있던 남학생이 이를 갈았다. 교복 차림의 남녀 학생 두 명이 주춤거리며 차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인자하게 안내하는 두 남녀가 보였다. 뉴스에서 자주 본 얼굴. 차재후와 류민경. ‘위대한 아이들의 집’, 일명 ‘위아집’ 공동 원장.
역현구 아이들은 차재후와 류민경을 장사꾼이라고 불렀다. 역현구 아이들을 데려다 팔아서 장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근거는 있었다. 차재후와 류민경은 보호자가 불분명한 아이들을 구제한다는 명목 아래 시설로 데려갔다. 시설에 대안학교가 포함돼있었고, 아이들은 거기서 교육을 받았다. 대형 기업과 기관이 거액을 들여 후원하는 곳이라 시설 자체는 꽤 번듯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실제 그곳에 간 아이들은 “괜히 왔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위아집에 소속된 아이들은 세 달에 한 번 허락되는 ‘휴가’를 나왔을 때만 외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규칙에 따라 세 달에 한 번 역현구에 놀러 온 아이들은 묵혀둔 것을 꺼내듯 불평불만을 쏟아댔다.
“생각보다 그리 좋지도 않아. 일단 식단을 일주일 단위로 같은 것만 주는데, 양이 한정적이어서 덩치 큰 놈들은 엄청 힘들어해. 오후 9시에 무조건 취침해야 하고, 함부로 자유행동하면 독방 같은 데 가두기도 하고. 시설 관리자들 성격이 되게 나빠. 알게 모르게 폭행당한 애들이 많아. 나도 몇 번 맞았고.”
“경찰이나 언론에 얘기하면 안 돼?”
“저번에 여기 퇴소한 형이 언론에 고발했다가 묻혔잖아. 위아집 봐주는 기관이나 기업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런가 봐. 게다가 그 형, 증거도 제대로 없었잖아. 개인 소지품이 허용되지 않으니까 증거 수집할 수단 자체가 없는 게 당연하지.”
언젠가 역현중학교에 놀러 온, 이 학교 출신의 위아집 원생은 그렇게 볼멘소리를 했다. 학생들은 일제히 차재후와 류민경이 돈만 밝히는 개새끼들이라며 욕을 했다. 두 시간에 걸쳐 울분을 토한 원생은 통금시간을 지켜야 한다며 급히 돌아갔다. 결국 모든 건 원점이었다.
이후에도 역현구 아이들은 몇 명이나 위아집에 갔고, 그 시설이 감옥과 같다는 증언은 주기적으로 전달됐다. 아이들은 매우 분해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쨌거나 위아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미성년 보호시설인 데다가, 스폰서만 스무 곳 넘게 붙은 기업형 재단이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재후와 류민경을 욕하는 것밖에 없었다.
“저기다가 불이라도 지르고 싶다.”
한 학생이 으르렁거렸다. 우태원은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안 돼.”
“왜? 저 새끼들 따지고 보면 범죄자야. 아동학대범. 어? 횡령도 어마어마하게 했을걸? 그 많은 돈 받아갖고 겁나 후지게 운영한다며.”
“그래도 안 돼.”
우태원이 경고했다.
“저 사람들에게도 아들이 있을 것 아니야. 잘못됐다가 그쪽에서 충격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해.”
남학생이 찌푸린 채 갸웃했다. 대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투였다.
*
학교를 마친 후 아이들 무리와 운도동 빌라촌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싸기로 유명한 그곳은 역현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의 거주지였다. 우태원이 사는 석일태 회장의 고층 아파트 단지와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저거 그 사람들 차다.”
한 남학생이 손가락질을 했다. 우태원은 그가 가리킨 쪽을 힐긋했다. 아까 운동장에서 봤던 하얀 세단이 거기에 있었다. 딱 봐도 비싼 외제차로, 역현구에서 보기 힘든 차종이라 바로 눈에 띄었다.
이쪽에도 볼 일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우태원의 머리통이 흠칫했다. 차 안에서 쑥 빠져나오는 청바지 입은 다리가 보였다. 툭 문을 닫고 허리를 세우는 청년의 실루엣을 타고 햇살이 흘러내렸다. 우태원의 걸음이 절로 멈췄다.
“네. 챙겼어요. 서류 봉투…. 우체국이요? 지금? 시간이 아주 빠듯한데. 저 조별과제 있어서 빨리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통화를 하던 그가 손목시계를 봤다. 곧 한숨을 쉬며 혀를 내둘렀다.
“저 수업도 제대로 못 마치고 이거 하나 챙긴다고 두 시간 걸려 왔어요. 아무리 믿을 사람 없고, 결벽증이 심하셔도 그렇지. 저한테 이 심부름 하나 때문에 학교 일 포기하라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니에요?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버지하고 어머니 시종도 아니고. 자꾸 이런 식으로 저 소유물 부리듯 하시는데, 저도 사람이고….”
득달같이 쏟아지던 말이 멎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쩌렁쩌렁 터진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가 섞여서 났다. 멍하니 듣고만 있던 그가 간신히 분을 삭이듯 머리를 쥐어짰다. 곧 잔뜩 질린 투로 입을 열었다.
“알았습니다, 알았고요. 화 좀 그만 내세요. 이만 끊습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처박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지겹다는 양 쏘아보다가, 몸을 틀었다.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그가 분연히 읊조렸다.
“씨발 새끼들, 진짜…. 불에나 타버려라.”
저벅저벅 이어지는 발소리의 여운이 꽤 길었다.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보던 우태원을 한 남학생이 건드렸다. 이내 어서 가자는 양 턱짓을 했다.
“정민이네 가게 가서 라면 먹자. 배고프다.”
“어. 그런 다음에 거기서 불붙일 기름이랑 이것저것 가져오고.”
고저 없이 떨어진 대꾸에 남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왜?”
우태원은 곁눈질로 하얀 세단을 봤다.
“불붙일 거야. 저기에.”
확고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물론 사람 있을 때.”
*
3세 때 한 소년이 던진 돌을 피하지 않은 건 돌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였다. 14세 때 들개들의 터전에 발을 들인 건 개에 물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16세 우태원은 안다. 돌에 맞으면 피가 나고, 개에 물리면 살이 곪는다는 걸.
모든 걸 알고 내린 결단에는 순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태원은 괜찮았다.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건 순수나 합리, 선의처럼 아름다운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이 그것들과 거리가 멀다는 걸 알았다. 우태원은 오로지 하나를 원했다.
자신의 추악함에도 가끔은, 빛을 내렸으면 싶었다.
철저한 목적주의로 무장한 작전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흘러갔다. 차재후와 류민경 부부는 빌라촌에 있는 유일한 VIP용 주차장에 자신들의 차를 뒀다. 거긴 구석진 곳이었고 외부의 눈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이었다. 막 모든 것이 어둑해져가기 시작할 무렵 차재후와 류민경은 나타났고, 남학생들은 단숨에 그들을 제압한 뒤 벽돌로 머리를 깨서 기절시켰다. 이미 성인 수준의 남학생 예닐곱 명 입장에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기절한 두 남녀를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싣고 문을 닫은 후, 무리 중 하나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에서 빼 온 휘발유 통을 열어 기름을 뿌렸다. 마지막으로 불을 붙이기 전, 한 명이 결의에 차 우태원에게 외쳤다.
“진짜로 한다.”
그 눈망울에 어린 건 두려움이나 불안이 아니었다. 설렘과 기대감이었다. 그들이 상상하는 귀결은 범죄가 아니었다. 그건 복수고, 혁명이었다. 그리고 정의였다. 그들을 통제하는 우태원이 허락했고, 그들의 세계에서는 우태원이 도덕이었으므로 그들은 이것이 옳다고 확신했다.
옳지 않음을 아는 건 우태원 뿐이었다.
불이 붙었다. 제대로 휘발유를 뒤집어쓴 차의 정수리까지 새빨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활활 타들어 가던 차에서 펑, 소리가 났다. 놀란 남학생 몇 명이 뒷걸음질을 쳤다. 묵묵하게 보던 우태원이 턱짓을 했다.
“이만 가 봐. 사람들 오면 큰일 난다.”
남학생들이 일제히 머무적거렸다. 우태원이 미간을 좁혔다.
“가라고 했지.”
우물쭈물하던 남학생들이 하나둘 등을 보였다. 이내 후다닥 뛰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동안 불꽃은 더 크게 솟구쳤다. 타닥, 타닥, 타들어 가는 차 안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뒤섞여 났다. 이내 펑, 하는 파열음에 집어삼켜졌다.
희한할 정도로 사람이 오지 않았다. 이쪽이 많이 외진 편이고, 폭발음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을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저편에서 걸어가는 중년 남녀가 보였다. 먼 곳에서 지켜보던 그들은 눈만 껌뻑거리다 곧 지나쳐갔다. 우태원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잠시 잊었다. 여긴 역현구라는 걸.
모든 집단에는 그 집단의 수준에 맞는 상식이 존재한다. 역현구의 상식은 간단했다. 때로는 장님일 것. 거기에 외부인이 개입돼있다면 더더욱. 차는 멀리서 봐도 역현구에서 흔히 탈 것 같지 않은 고급 세단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더욱 흔쾌히 상식을 택한 것이다.
뚝. 문득 정수리가 차가웠다. 먼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태원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점점 우중충해지는 윗세상을 봤다. 그러다 종종 식어가는 차를 봤고, 그러다 종종 그가 있다 떠난 자리를 봤다.
손가락 굵기만 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천둥이 치며 번개가 번쩍일 무렵 새하얀 차는 새까맣게 사그라졌다. 우태원은 비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 내내 기다리고 있다 보면, 다시 만날 것만 같았다. 그를.
그리고 그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유독 커다란 천둥이 귀를 흔들었을 때, 저편에서 어떤 실루엣을 발견했다. 차 뒤편으로부터 약 다섯 보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멈춰 있었다. 우태원은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이 지저분하고 흉한 거리에서 오로지 그의 실루엣만이 빛났다. 우태원은 절로 등을 곧추세웠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는 한동안 서 있기만 했다. 거기서 더 차 쪽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저 탐색하듯 뚫어져라 차 안을 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를 배경 삼아 질척한 빗물이 커튼처럼 나부꼈다. 우태원은 커튼 너머의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신호를 보내듯. 까딱, 까딱, 까딱.
콰앙. 하늘이 선명하게 쪼개졌다. 어딘가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귀에 찡, 하는 이명이 찾아들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우태원은 봤다. 미미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그러다가도 다시 내려가고 마는, 절제에 사로잡힌 미소를.
우태원은 무작정 입을 떨어뜨렸다. 소리라도 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그를 방해하는 것에만 그칠까 싶어 결국 그만뒀다. 대신 정적인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노출하기로 했다. 그건 결국 바라보는 것이었다. 봉화를 앞에 둔 들짐승처럼 종종 기웃거리며, 그를 빤히 보는 것이었다.
앞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거슬렸다. 서둘러 이마를 훔쳤지만 쉬이 개운해지지 않았다. 조금은 찝찝한 기분으로 손을 거두고, 다시 앞을 봤을 때 우태원은 비로소 확인했다. 자신을 보고 있는 그를.
쿵. 이번엔 심장에서 천둥이 쳤다.
그의 눈빛은 다정하지 않았지만 고결했고, 부드럽지 않았지만 거룩했다. 지금 역현구에 쏟아지는 모든 빗방울을 모아 얼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조각을 만들어낸다 해도 저 광채를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숨이 막혔다. 저 사람은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늘 새로운 형태의 우주가 된다. 우태원은 그의 세계가 경이롭고,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태원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감히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도 없고, 말을 걸 수도 없다. 또 쓸모없는 어린애 취급이나 받을까 두렵다. 그래서 우태원은 자신만의 접근방식을 만든다.
웃기로 했다. 아주 환하게.
입꼬리가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우태원은 평소에 웃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 사람이 자신의 앞에 있고, 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웃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입매에 걸린다. 태양계에 걸려 공전하는 행성처럼 그의 궤도에 맞춰 얼굴 근육이 움직인다.
멀찍이서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우악스러운 빛줄기 속에서도 우태원은 그 변화를 알아봤다. 태양이기에 알아봤다. 그 색채에 홀려 그저 눈만 떨고 있을 때, 그의 입꼬리가 화답하듯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태원은 그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드디어 태양이 웃었다.
굵은 침이 넘어갔다. 우태원은 뛰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고갯짓을 했다. 그를 불렀다. 어서 와달라고, 마음으로 얘기했다. 이번만큼은 용기가 났다. 자신에겐 자격이 있었다. 당신을 웃게 했으니, 작은 보상이라도 해 달라 소망했다. 태어나서 그렇게나 격렬히 열망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목적은 지극히 소박했는데도.
그저 칭찬을 듣고 싶었다. 당신에게 내가 필요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눈앞에서 아찔한 섬광이 번뜩였다. 잠시 멀었던 눈을 부여잡은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그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에 물든 얼굴은 심지어 돌아가고 있었다. 우태원의 반대편을 향해.
아주 짧았던 쇼를 흡족하게 감상하고 난 관객처럼 그는 몸을 틀었다. 이내 척척하게 물이 차오른 길을 걸어, 사라져갔다. 우태원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제 자취를 숨겨버렸다.
또 거절당했다.
우태원은 그날 밤 자살 기도를 했다. 손목을 그은 지 삼십 분 만에 석재경이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갔다. 운이 나쁘게도 살았다. 손목의 상흔은 반년 만에 사라졌다.
*
당신에게 내가 안 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그가 너무 멀었고, 또 끝내 묻는다 해도 결국 자살을 기도할 빌미만 추가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예 포기할 수도 없었다. 분명히 차유신은 그때 웃었다. 자신이 차유신을 웃게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자신이 준 것을 마음에 들어 하긴 했는데, 끝내 자신에게 오지는 않는다.
완전한 절망보다 괴로운 건 한 가닥의 희망을 동반한 절망이다. 아무것도 없는 밀폐공간에 가둬진 것과, 절대로 열리지 않는 통조림과 함께 가둬진 것을 비교했을 때 당연하게도 후자 쪽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 우태원도 그랬다. 심지어 우태원은 그 통조림의 맛을 잠깐이나마 봤고, 그것이 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태원의 시간은 흘렀다. 역현고에 진학했고, 소위 말하는 꼴통들 일색인 학교에서 어렵지 않게 전교 1등에 올라섰고. 더 이상 교내 싸움 따위에 휩싸이지 않고 조용히 공부만 한 끝에 전국 수학능력시험에서 100위 안에 드는 성적을 얻었다.
대학원서 접수 시즌 우태원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와 같은 학교, 같은 계열을 지원했다. 애초에 거기 말고는 아는 학교도, 아는 학과도 없었다. 우태원의 합격이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현고는 우태원의 합격기념 플래카드를 정문에 걸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봄, 우태원은 키가 190cm에 가까운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높아진 눈으로 본 차유신은 여전히 멀었다.
특별히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같은 계열이라지만 학년도 달랐고, 이따금씩 캠퍼스에서 본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무렵부터 전 캠퍼스 안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스무 살 때 스타트업 케이마를 설립했고, 정부 규제로 사업을 접은 이후에는 정부 청년산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TV나 신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게다가 교내 활동도 아주 적극적으로 하는 편인지라 항상 사람이 따랐다. 그런 것들이 단지 그가 지닌 히스토리나 눈에 띄는 생김새, 매력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란 걸 모두가 알았다.
한 동기가 얘기했다. 차유신 선배는 그냥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 우태원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실로 동의하는 것조차 실례일 정도의 얘기였다.
반면 우태원은 대학에서도 매우 조용한 학생으로 취급됐다. 수업이나 조별과제처럼 정말 필요한 상황이 전제되지 않으면 타인과 교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우태원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곧 아무도 남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종종 우태원에 대한 상상이나 가설들을 뒤에서 얘기하고 다녔다.
거기엔 좋은 얘기도 나쁜 얘기도 있었지만, 우태원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태원이 관심을 원하는 건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그거면 충분한데, 그것이 아주 컸다.
캠퍼스에 푸르름이 완연하고, 조금씩 사람들의 옷이 얇아져 가기 시작하던 1학년 1학기 말. 우태원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어느 강의실에 있었다. 1학년생은 거의 듣지 않는데, 우태원은 그냥 듣고 싶어서 택한 수업이었다.
적당히 뒤편에 자리를 잡고 노트와 펜을 꺼냈을 때 뒷문 쪽에서 탕, 소리가 났다. 얼굴을 어루만진 남학생이 주변을 보지도 않고 걸어오고 있었다. 앞자리에 있던 여학생이 깔깔거렸다.
“와, 쟤 진짜 미쳤나 봐. 박큐하고 낮술 많이 먹었어?”
“시끄러. 큰 소리 내지 마.”
으름장을 놓은 그가 덜컥 우태원의 옆에 앉았다. 빈자리가 딱히 없는 상황이긴 했다. 분명히 시험을 보러왔을 터인데, 펜이나 노트는커녕 가방도 없었다. 연신 얼굴을 감싸는 그의 곁을 지나쳐가며 몇몇 학생들이 인사를 했다.
“다음 달에 입대라며. 특전사 가는 거 진짜냐?”
“시험 이게 마지막이지? 끝나고 영현이 형이랑 술 먹으러 가자.”
“졸사 어떻게 할 거야. 어? 저번에 홍보모델 할 때처럼 대충 입으면 후회한다. 정장 내 거 빌려줘?”
남학생은 귀찮다는 양 연신 손만 내저었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눈길 한번 받아보려고 기를 쓰는데, 정작 장본인은 그걸 공기처럼 예사롭게 받아들이는 상황.
어깨를 으쓱한 학생들이 곧 흩어졌다. 그의 기분이 언짢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후, 소리 나게 한숨을 쉰 그가 대뜸 손을 뻗었다. 움칠한 우태원이 그를 봤다. 우태원을 보지도 않은 채 데스크부터 짚어온 그가 말했다.
“나 펜 하나만 빌려줘.”
잠시 얼어있던 우태원이 들고 있던 펜을 건넸다. 받아든 그가 혀를 찼다.
“와. 존나게 비싼 것도 쓴다.”
우태원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비싼 건 맞았다. 고등학생 때 석일태 회장이 사준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다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좀처럼 인식되지 않았다. 우태원은 그저 벅차오르는 숨을 가까스로 고르느라 바빴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낙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에선 빛이 났고,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차유신이! 너 박규재 교수하고 낮술 했다며. 정신은 차리고 시험 봐라. 어?”
불현듯 문을 열고 들어온 교수가 언성을 높였다. 몇몇 학생이 키득거렸다. 재차 숨을 몰아쉰 차유신이 얼굴을 쓸었다. 이내 우태원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나 많이 안 좋아 보이냐?”
반쯤 얼굴을 가린 손 위로 높다란 콧대가 고스란히 비쳤다. 좀 더 위에는 가느다랗게 접힌 눈매의 붉은 언저리가 있었다. 그게 묘하게 야릇하게 다가왔다. 우태원이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젖힌 차유신이 뇌까렸다.
“그럼 다행이고.”
앞쪽이 수런거렸다. 시험지가 넘어오고 있었다. 강의실을 휘 둘러본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시험지를 확인 중인 학생들을 종종 눈으로 훑었지만, 별다른 기대감은 비치지 않았다.
첫 번째 장은 1학기 때 강의한 내용을 테스트하는 단순서술형 질문들이었다. 어렵지 않게 푼 뒤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잠시 펜이 멎었다.
페이지에는 최근 불거진 한 사회현상을 두고 각기 다른 시각을 내놓은 정당과 사회단체, 언론사의 입장문 및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어지는 지문은 해당 현상을 본 정치 칼럼니스트의 입장에서 기고문을 완성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하, 진짜. 몇몇 학생이 대놓고 탄식했다. 다소 손이 많이 가는 문제였다. 평소 난해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교수인지라 크게 놀랄 건 없었다. 다만 해당 문제의 배점이 30점이나 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한 문제에 대한 답으로 사실상 성적이 갈리는 셈이다.
내려온 펜 끝이 가볍게 페이지를 두드렸다. 우태원은 저 앞에 있는 교수를 봤다. 교수는 피로한 듯 다리를 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은 문제만 냈을 뿐, 해석은 학생들의 몫이라는 것처럼.
펜촉이 페이지를 짓눌렀다. 일단 이 문제에는 한 가지 트릭이 존재한다. ‘정치 칼럼니스트’라는 입장을 굳이 특정한 것이다. 통상 칼럼니스트는 비판을 하는 포지션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같은 관점에서 답안을 적어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어느 쪽은 옹호하되 어느 쪽은 비판하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정치성향이 드러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결론으로 문장이 끝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태원은 알고 있었다. 저 교수가 지독한 회색분자를 표방하고 있다는 걸. 그는 학창시절 운동권에 있었고, 졸업한 뒤에는 보수 매체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3년 2개월 간 국회의원을 지냈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건 자녀의 불법 취업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오르면서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말이 그랬다는 거고 실은 당파싸움에서 밀린 결과다. 이후 교단으로 흘러왔는데, 자신의 치열했던 과거에 지친 탓인지 특정 정치 성향을 편애하는 걸 지극히 꺼렸다. 강의할 때는 습관적으로 양시론을 펼쳤다. 결국엔 다 피곤해서다. 모든 사회인에는 나름의 과로 사유가 존재하는데, 그에게는 정치 자체가 그랬다.
그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습관적으로 편을 가르는 정치 칼럼니스트일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를 모범적인 비판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건 위험했다. 정치 칼럼니스트가 반드시 어느 편에 있어야 한다는 법칙은 따지고 보면 없기 때문이다.
앙가주망. 우태원은 아주 단순한 관점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사회 참여를 위한 각자의 방식이 존재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자세에 대해 적기로 했다.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지 역시 시민이 행하는 앙가주망의 일종이므로, 그에 대해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전개로 흘러갔다. 거기에 강의 시간에 나왔던 몇몇 이론을 때려 박는 건 덤이었다.
피곤한 문제에 피곤한 답을 적었다.
드르륵. 반쯤 적은 우태원의 옆에서 의자 밀려나는 소리가 났다. 벌써 다 채워진 페이지를 쥔 차유신이 앞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을 살짝 뜬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이내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술 처먹고 시험 치니까 엄청 빠르구나.”
“문제가 너무 쉽네요.”
차유신이 객기를 부렸다. 비식거린 교수가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너 이거 스펠링 써봐.”
다른 손은 그가 제출한 답안지의 어딘가를 짚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차유신이 마카를 들었다. 이내 대충 영자를 휘갈겼다. engagement. 프랑스어로 앙가주망. 교수가 낄낄거렸다.
“많이 취한 줄 알았는데, 아니구만.”
“많이 취했어요. 취했으니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됐고, 나가 봐라. 술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한다.”
교수가 손을 내저었다. 등을 보인 차유신이 앞문을 향해 걸었다.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고는, 잠시 교수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에 나온 신문 기사, 그거 잘못 넣으셨어요.”
교수가 갸웃했다.
“뭘 잘못 넣어.”
“지면에 그 기사 나가고, 이틀 뒤에 온라인 버전은 수정됐거든요. 마지막 문단이 엄청 온건하게 바뀌었어요. 정당에서 난리쳐갖고 좀 져줬나 봐요. 아무튼 최종 버전 그거 아니에요.”
차유신이 문을 열고 나섰다. 교수가 혀를 찼다.
“아주 잘 났다. 새끼야.”
*
시험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쪽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청바지 차림의 청년이 보였다. 그 곁을 서너 명의 남녀 학생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태원은 못 본 척 발을 옮겼다. 그로부터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나아가고 있을 때 저편에서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태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담배를 비벼 끄고 난 차유신이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몽블랑. 와 봐.”
멈칫했던 우태원이 다가갔다. 차유신을 둘러싼 학생들이 슬금슬금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한 여학생이 얼굴을 감싸며 좋아했다. 쟤 일학년이지?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야. 옆에 있던 남학생이 쏘아붙였다. 근데 쟤는 너 가까이서 보기 싫단다. 여학생이 남학생의 무릎을 걷어찼다. 억, 소리를 낸 남학생이 몸을 구부렸다.
“이거 내가 깜빡하고 갖고 왔다.”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아까 빌려 간 만년필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우태원이 도리질을 쳤다.
“괜찮습니다. 가지세요.”
“뭘 가져? 내가 도둑놈도 아니고. 아무튼 잘 썼어.”
“오늘은 펜 더 안 필요하십니까.”
“이따가 또 쓸 일 있긴 한데, 그거야 거기서 빌리면 되고.”
“그럼 저는 안 받겠습니다. 선배 가지세요. 대신 사인이나 한 장 해주십시오.”
올곧은 한 마디가 나왔다. 차유신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뚫어져라 우태원을 올려다보던 그가 곧 헛헛하게 웃었다. 이내 재차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 좋을 대로 해. 사인은 어디다 하면 되는데.”
끄덕인 우태원이 들고 있던 노트를 건넸다. 차유신은 능숙하게 뒤편에다 제 서명을 새겨 넣었다. 우태원의 이름은 묻지도 않았다. 되돌아온 노트를 받아든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제 이름은 안 물어보시네요.”
“별 의미 없잖아.”
“왜 의미가 없어요?”
“들어도 내가 기억 못 할 것 같아. 솔직히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지금 아주 많이 취했거든.”
차유신이 곤로하게 목을 기울였다. 우태원은 수긍했다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이어 정중하게 꾸벅한 뒤 몸을 틀었다. 멀어지는 우태원에게 차유신이 말을 걸었다.
“다음에 또 보면 아는 척해. 내가 밥 살 테니까.”
우태원은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선배가 절 알아본다면 말이죠.”
차유신은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태원은 보다 먼 곳으로 발을 내뻗었다. 부쩍 휑한 도보 위에서 쓸쓸한 훈풍이 맴을 돌았다. 자신과 그가 더 이상 캠퍼스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차유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입대했다. 제대한 후 대국민당에 정식 입당했다는 사실을 기사를 통해 접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당선됐다는 사실도 기사를 통해 알았다.
우태원의 예상이 맞았다. 그들이 그날 이후로 캠퍼스에서 만나는 일은, 정말로 없었다.
*
히터를 통해 더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우태원은 가만히 목에 걸린 넥타이를 추슬렀다. 조금 답답했다. 제대로 된 정장을 입어보는 것이 대학 졸업사진을 찍은 날 이후 처음이었다. 가슴팍을 스치는 타이 원단조차 괜히 불편했다.
“김후준 의원하고 가까이 지내면 여러모로 좋아.”
어둑한 차창에 시선을 꽂은 석일태가 혼잣말을 했다. 우태원은 그저 주억거렸다.
“네.”
“나하고 이전부터 각별한 사이야.”
석일태가 우태원을 힐끗했다.
“앞으로는 더 각별해질 거고.”
저 앞에 기와집 형태의 한정식당 입구가 보였다. 운전대를 쥔 비서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용해진 차 안에서 문을 열어젖힌 석일태가 말했다.
“태원이는 나오고.”
다소 냉한 시선이 조수석에 쏠렸다.
“재경이는 여기서 대기하자.”
막 문을 열고 나온 우태원이 흠칫했다. 언뜻 본 석재경은 단정하게 고개만 굽었다.
“네. 아버지.”
탁. 떨떠름한 손이 뒷좌석 문을 닫았다. 성큼성큼 입구로 걸어간 석일태를 식당 사장이 반겼다. 서둘러 안내해오는 손길을 따라 석일태가 움직였다. 우태원도 뒤를 따랐다.
손님들은 진작 내보낸 듯, 홀은 고적하기만 했다. 일정한 석일태의 발걸음 소리가 어둑한 공간을 울렸다. 저 안쪽에 불 켜진 룸의 입구가 보였다. 빛나는 문의 앞까지 다다른 석일태가 갑자기 물었다.
“내가 너 많이 믿고 있는 것 알지? 태원아.”
우태원이 담담하게 답했다.
“네. 회장님.”
“재경이보다도 더 말이다.”
우태원의 턱이 멈칫했다. 석일태가 나긋하게 읊조렸다.
“그러니 잘하자.”
식당 사장이 손을 뻗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열렸다. 홀로 앉아있던 풍채 좋은 남자가 양팔을 벌리며 일어섰다. 대국민당의 중심에 있는 인물. 김후준.
“어, 그래요. 석 회장님. 잘 왔어요.”
“그간 격조했습니다. 김 의원님.”
호탕하게 웃은 석일태가 다가갔다. 가볍게 김후준을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눈 뒤, 몸을 빼 테이블 반대편으로 향했다. 우태원을 본 그가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지정한 자리로 간 우태원이 몸을 내렸다.
“내 둘째 아들입니다. 우태원이라고.”
“둘째 아드님으로 생각할 정도로 아끼는 청년이라는 얘기겠죠.”
김후준이 눈치 좋게 받아쳤다. 석일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맞는 얘기이긴 한데, 아들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세 살 때부터 내가 키웠으니까요.”
“훌륭하십니다. 남의 집 자식 데려다 기르는 거,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니까요.”
석일태가 소리 내어 웃었다. 김후준도 따라서 웃었다.
“석 회장님 안목이 어디 가겠습니까. 저로서는 그만큼 대단한 놈이구나, 할 따름이지요.”
입을 다문 김후준의 주머니가 진동했다. 핸드폰을 빼 액정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통화버튼을 누른 뒤 귀에 가져갔다. 돌아간 고개가 석일태에게 양해를 구하듯 꾸벅했다. 석일태는 괜찮다는 양 손사래를 쳤다. 김후준의 입이 열렸다.
“어, 어. 그래. 대민일보 기사…. 봤지. 어. 그게 뭐.”
듣고만 있던 김후준의 낯이 티 나게 일그러졌다.
“그걸 나한테 와서 물어보면 어떻게 해? 적당히 책임질 놈 골라서 덮어씌워. 만만한 놈 많잖아. 유신이라든지. 그래, 차유신. 그 새끼한테 연락해서 직접 입장문 작성하라고 해. 절대로 내뺄 새끼 아니니까. 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해? 눈치껏 네가 플랜을 생각해서 나한테 바쳐야 할 것 아니야.”
한숨을 쉰 김후준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끊어.”
‘통화 종료’ 글자를 띄운 액정이 깜빡였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김후준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합니다. 유력 매체에서 또 우리에 대한 공격성 기사를 띄워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이긴 한데, 아주 피곤합니다.”
“아닙니다. 고생이 많으시죠.”
이해한다는 양 응수한 석일태가 우태원 쪽으로 팔을 뻗었다. 어깨를 감싸는 손이 아주 다정했다.
“그나저나 제가 얘기한 건 생각해보셨습니까.”
“아, 보좌진 추천. 그래요.”
김후준이 턱을 괴었다. 골똘한 눈길이 우태원에게 꽂혔다.
“얘기한 친구가 저 친구 맞습니까.”
“네. 아주 똘똘한 놈입니다. 서울대 정치학과 나왔고, 과에서 탑을 놓쳐본 일이 없습니다. 생김새도 아주 출중해서 어디다 갖다 놓아도 좋은 소리만 들을 겁니다. 곁에 둔 이상 절대로 후회할 일 없다는 거, 제가 보장합니다.”
“그래요. 딱 보고 아주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톱 배우 출신이 그런 얘기를 하시니 기분이 묘하네요.” “그거야 한참도 옛날 일이지.”
껄껄거린 김후준이 등을 젖혔다.
“어쨌거나 석 회장님이 보증하는 친구가 와주면 나야 좋지. 일단 제 방 인턴 자리가 남아있으니, 처음인 만큼 맨 밑에서 좀 일해보고 조정합시다. 괜찮겠어요?”
“상관없습니다.”
은근히 관찰하던 김후준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래서, 우리 친구는 꿈이 뭔가? 국회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우태원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흥미로움에 사로잡힌 김후준의 얼굴을 응시하다, 또박또박 답했다.
“대국민당에서 아주 비중 있는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건 참 추상적인 답변인데.”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그러면 나야 좋지.”
“지금의 차유신 의원 포지션을 차지하고 싶습니다.”
김후준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우태원의 어깨를 두른 손이 덩달아 경련했다. 난생처음 듣는 얘기에 석일태의 낯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우태원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은 김 의원님 사무실에서 몇 개월간 막내로 근무하며 실무를 익히겠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인턴이지만, 의원님의 수족이 되어 하나부터 열까지 충성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걸 하고 싶습니다.”
“다른 거, 뭐.”
김후준의 이마에 금이 갔다. 들숨을 삼킨 우태원이 입을 뗐다.
“차유신 의원실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거기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네.”
“뭔데.”
우태원의 눈초리에 힘이 들어갔다. 김후준의 울대뼈가 미세하게 울렁였다.
“한 집단 안에 두 개의 같은 개체가 공존할 이유는 없죠. 저는 차유신 의원을 대국민당에서 들어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자리에 깃발을 꽂으려 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만에 하나 그쪽이 대국민당 배지를 달고자 한다면, 나이로 봐서나 이미지로 봐서나 우리 유신이하고 아주 많이 겹치기 때문에 공천을 받는 게 어려울 수 있지. 하지만 갑자기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해오면, 나는 할 말이 없어. 유신이는 지금 대국민당에서 아주 파급력이 있는 존재야. 이미 역량이 보장된 인물을 굳이 수술한 뒤 다른 인물로 대체하라 하면….”
“의원님께서는 석일태 회장님이 베트남에 세운 마이크로 파이낸스 회사에 본인 사위 명의로 50%의 지분을 획득하셨습니다. 해당 회사가 설립 후 이 년 만에 바로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의원님은 연간 수 십억 원의 이익을 최소 10년간 취할 수 있게 됐죠.”
우태원의 톤이 낮아졌다. 김후준이 입을 오므렸다. 우태원의 어조가 확고해졌다.
“그거 사실 제 아이디어입니다. 석 회장님께 얘기했습니다. SDB그룹이 앞으로 더 성장하려면 정치권과 제대로 결탁할 필요가 있고, 그중에서도 기업에 대한 이해가 깊은 김후준 의원을 본인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그게 두고두고 좋을 거라고. 무엇보다, 김후준이라는 사람은 앞으로 더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절대로 내려갈 사람이 아니라고요.”
테이블 위에서 김후준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긴장한 숨을 몰아쉰 석일태가 제 얼굴을 짚었다. 한순간에 싸늘해진 룸 안을 위잉, 하는 온풍기 소리가 메웠다. 조금은 허탈하게 우태원을 주시하던 김후준이 갑자기 입매를 꼬았다. 부쩍 즐거움에 젖은 질문이 다가왔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우태원입니다.”
“그래. 우태원 씨. 다 좋아. 일단 나를 인정해준 게 고맙고, 나에게 거액의 연금을 챙겨준 것도 고마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그렇게까지 차유신을 잡아먹어야겠어? 유신이와 함께 대국민당에서 공존하는 방법도 있잖아. 포지셔닝이야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해. 결국 사람은 제각각이고, 300명의 국회의원은 각기 다른 얼굴로 대중에게 각인되기 마련이거든. 물론 우태원 씨의 여의도 입성에 있어 유신이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수술부터 할 생각을 하는 게, 나로서는 아주 대담하고 위험하게 여겨져.”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우태원이 물었다. 김후준이 흔쾌히 대꾸했다.
“그래. 얘기해.”
“그냥 차유신 의원이 마음에 안 듭니다.”
이번엔 우태원도 미소 지었다. 김후준의 낯이 식었다. 석일태가 황급히 우태원을 쏘아보았다. 우태원은 개의치 않고 말을 덧붙였다.
“저는 김 의원님께 재산확보의 길을 열어드리고, 차유신 의원보다 나은 수족이 되어 드리겠다는 결단도 내걸었습니다.”
3세의 초가을, 그리고 14세의 여름, 이어 16세의 가을, 다음은 20세의 초여름. 총 네 번에 걸쳐 차유신을 만났다. 시작과 끝은 항상 같았다. 차유신은 빛과 함께 다가왔고, 망각과 함께 사라졌다. 우태원의 머릿속에서 차유신은 점점 뚜렷해졌지만, 차유신의 머릿속 우태원은 언제나 어둠이었다.
“이 정도면 제가 차유신 의원을 대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더 이상 그 같은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차유신에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빛나는 태양을 우태원은 매일같이 보고 있는데, 정작 태양은 그걸 모른다. 너무도 낮아서 모르고, 너무도 어두워서 모른다.
“제 손으로 차유신 의원을 끌어내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를 우태원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리는 것. 아주 어두컴컴하며 음습한, 버려진 구렁텅이로.
“제가 김 의원님을 VIP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을 잊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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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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