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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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어둠 속에서 커다란 화염이 일렁이는 환영을 봤다. 달뜬 숨을 고르던 차유신이 눈을 떴다. 뻑적지근하던 머리가 간신히 들렸다. 시트에 앉아있던 우태원이 고개를 돌렸다.

“몸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봅니다. 이 정도에 기절할 분이 아닌데, 정신까지 잃고.”

멍하니 주변을 살폈다. 무채색으로 점철된 공간이 제법 익숙하다. 우태원의 방이구나. 찡그린 눈으로 다시 우태원을 봤다. 우태원이 팔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열이 아주 많이 나네요.”

올라간 차유신의 손이 탁, 소리 나게 우태원의 팔을 쳤다. 차유신이 매섭게 따졌다.

“조 회장 죽을 거 빤히 알면서 석일태에게 정보를 줘?”

우태원이 태연히 대꾸했다.

“조 회장의 사망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석 회장으로부터 요청을 받았고, 그에 응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태원의 눈길이 내려갔다. 차유신의 눈 밑에 남은 흉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차분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선배까지 제거하고자 하는 석 회장을 설득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도 했고요.”

“살인자 새끼야.”

“선배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석재경 역시 선배 손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선배의 설계 아래 조신희 회장으로부터 작업당했으니까요.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이거 다 선배가 시작한 겁니다.”

한 발자국 물러난 우태원의 시선이 넘어갔다.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에 지금의 시간과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우태원이 또 말했다.

“9월 말이네요.”

차유신의 낯이 굳었다.

“선배는 매년 이맘때 몸살이 심하죠.”

우태원이 발을 옮겼다. 데스크 근처에 다다라 서랍을 열고는 해열제를 꺼냈다. 세 개의 알약을 손바닥 위에 턴 뒤, 다시 차유신에게 다가왔다. 새파란 알약을 올린 손이 차유신의 입가에 닿았다.

“먹어요. 이걸로 바로 낫지는 않겠지만.”

“손 치워.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다고 네가 주는 걸 먹어?”

일갈한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반쯤 넘어간 턱이 확 잡아채였다. 강제로 자신의 앞까지 끌고 온 우태원이 이맛살을 구겼다. 엄한 한 마디가 시트에 내려앉았다.

“닥치고 좀 처먹지 그래요.”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정훈석에서 이어 석재경까지. 총 두 명이에요. 내가 지키려던 걸 선배가 망친 게. 지금 선배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중이니까 약이라도 시키는 대로 입에 처넣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단단한 손아귀가 차유신의 입을 덮쳤다. 커다란 알약들이 혀 위에서 데굴거렸다. 씩씩거리고 난 차유신이 끝내 입을 오므렸다. 확인한 우태원이 협탁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채워진 물컵 하나가 차유신의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우태원이 턱짓을 했다.

“입 벌리고.”

뻐끔거리던 입이 조금 열었다. 바로 미지근한 물이 밀려들었다. 적당히 흘려 넣고 난 우태원이 컵을 거뒀다. 꿀꺽, 소리와 함께 알약과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기진맥진한 차유신의 어깨가 늘어졌다.

“어쨌거나 선배도 고생했어요. 석일태와 김후준을 여기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일어난 우태원이 협탁 위에 컵을 뒀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스르르 이동했다. 여전히 등을 보인 우태원이 혼잣말을 했다.

“재미있는 상황 만들어준 거 고맙게 생각해요. 애초에 선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우태원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나직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상황까지 딸려온 건 내 계산 외였지만.”

차유신의 눈매가 탐탁지 않게 접혔다. 대체 뭐가 고생했고, 뭐가 계산 외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태원은 지금을 불쾌해하며, 동시에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 대국민당하고 SDB그룹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언짢은 질문이 나왔다. 우태원이 덤덤하게 답했다.

“김후준 선배도, 석일태 회장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방어에 나설 겁니다. 애초에 이런 일에는 도가 튼 양반들이기도 하고요.”

그의 눈이 자못 의미심장하게 깔렸다.

“물론 그 어떤 사람에게도 완전한 자기방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요.”

실내가 적막해졌다. 차유신은 뚫어져라 우태원을 올려다봤다. 눈을 감다시피 한 우태원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태원도 꿈을 꿀까. 보통의 사람들처럼, 저 짐승 같은 새끼도 꿈을 꾸는 걸까.

만약 꾼다면, 어떤 형태인 거지.

“유신아.”

문이 열렸다. 황급히 달려온 진무원이 침대 시트에 무릎을 올렸다. 차유신의 어깨를 감싼 그가 탄식했다.

“하…. 씨발, 진짜. 깜짝 놀랐네. 조신희 회장이 탔던 차 날아가는 거 보고 너까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

차유신은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진무원의 등 너머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우태원 의원실 소속 백진재가 보였다. 우태원은 관찰하듯 백진재와 차유신을 번갈아 봤다. 차유신의 눈망울이 점점 흐려졌다.

“그런데 눈 밑은 왜 이래. 어? 이거 메이크업으로도 어떻게 안 되겠다, 이렇게 다쳐놓으면….”

“형.”

차유신이 침착하게 운을 뗐다. 진무원이 신속하게 답했다.

“어. 유신아.”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영 너 연락이 안 돼서, 태원이한테 물어봤지.”

“그렇게 친했어? 둘이.”

차유신의 낯이 무표정으로 물들었다. 주춤한 진무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전에 없을 정도로 긴장한 그를 보며, 차유신이 버겁게 얼굴을 감쌌다. 아까 석일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태원 프락치의 눈을 통해 차유신의 동선을 파악하고, 끝내 조신희와 만나는 현장을 적발해 근처에 있던 트럭을 보냈다. 그래서 조신희가 죽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던 차유신의 보좌진은, 단 한 명뿐이었다.

“왜 그랬어. 형.”

허탈한 질문이 나왔다, 진무원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보다 꼿꼿하게 진무원을 올려다본 차유신이 목을 떨었다.

“권헌을 제외한 우리 보좌진 여덟 명 중 한 명을 골라내려고 수백 번을 계산했어. 단 한 번도 형은 나온 적이 없어. 왜냐하면.”

차유신의 숨이 가빠졌다.

“여덟 명의 후보 중에서 형은 항상 가장 먼저 걸러졌거든.”

멎은 입이 색색거렸다. 안 그래도 열이 오른 마당에 두통까지 겹쳐,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 와중에 진무원을 보는 것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원망해서가 아니었다. 원망은 오히려 가벼운 감정이었다. 그건 절망이었다.

믿었던 보좌진에게 두 번째 배신을 당했다. 처음 배신을 당했을 땐 그저 분노였지만, 또 한 번 같은 걸 당하니 이제는 고통이다.

“내가 너….”

진무원의 입이 달싹였다. 질끈 눈을 감은 그가 말을 이었다.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어?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네가 금배지 단 직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 곁에서 떠난 적 없어. 나는, 그저 혹여나 네가 잘못될까 걱정돼서….”

“그래. 형이 나 진짜로 걱정 많이 해줬지.”

차유신의 시선이 옮겨졌다. 벽에 기대있던 우태원에게 눈을 맞추고는, 냉한 한 마디를 흘렸다.

“그래서 저 개새끼 지시받고, 나 백수 생활하던 1년 3개월 동안 내내 내 곁에 머물면서 감시하고….”

할 말을 잃은 진무원이 눈가를 짚었다. 바라보던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무원이 형 말이 맞아요. 선배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나도, 무원이 형도.”

“지랄하지 마.”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게 걱정이야? 그냥 네 입맛대로 나 끼워 맞추고 싶어서 무원이 형 원격조종했다고 하지 그래.”

우태원이 피식거렸다.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우태원의 몸이 바로 섰다.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방 안을 휘 둘러봤다. 뒤편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백진재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무원이 형. 잠시만.”

다가온 우태원이 진무원의 팔을 잡았다. 멈칫한 진무원이 침대에서 물러났다.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묘하게 즐거운 음성이 귀를 옭맸다.

“말 나온 김에 나도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역운회 건물에 CCTV는 왜 설치했어요?”

차유신이 비소를 머금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넌 역운회도 아니라면서.”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죠.”

우태원의 손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빠져나온 건 아까 석일태 회장이 썼던 잭나이프였다. 빛나는 쇠붙이를 쥔 손이 허공에 들렸다. 곧 차유신을 향해 사납게 내리꽂혔다.

“그걸 누가 설치했는지도 확인하고 싶고요.”

탁. 대뜸 차유신의 앞이 가로막혔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한계까지 끌어올려졌다. 막아선 백진재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실소한 우태원이 백진재의 어깨에 꽂힌 잭나이프를 빙글거리다 내던졌다. 날이 빠져 몸만 남은 잭나이프가 바닥을 굴렀다.

“프락치 짓 하면 차 의원이 몸이라도 대준대?”

우태원이 이죽거렸다. 백진재가 담담하게 답했다.

“어떤 몸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네 나사 빠진 짓거리 막을 몸 말하는 거면, 사실이긴 하고.”

우태원이 소리 내 웃었다. 백진재와 진무원을 차례로 일별한 그가 낮게 한탄했다.

“이야…. 이거 참. 양쪽 다 수보가 문제네.” (*수석보좌관.)

차유신이 냉소적으로 받아쳤다.

“화났어? 믿었던 네 수보가 프락치라서.”

우태원의 눈초리가 잔잔하게 휘었다.

“네. 아주 많이 났어요. 지금.”

몸을 굽힌 우태원이 차유신에게 속삭였다.

“내 눈에 안 보이는 데서 선배가 일 꾸미는 거 싫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떤 새끼와 붙어먹고 그런 짓들을 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너무나도 나쁘네요.”

올라온 우태원의 손가락이 툭, 차유신의 볼을 건드렸다.

“앞으로 또 뭘 꾸미고 있는지 나에게 설명 좀 잘 해봐요. 좆같이 하면 이번에 아작나는 건 선배 다리야.”

주변이 고요해졌다. 진무원과 백진재의 낯에 미미한 당혹감이 어렸다. 표정을 유지한 건 우태원과 차유신 뿐이었다. 젖힌 커튼 틈으로 들어온 빛이 두 사람과 나머지 이들 사이에 선명한 경계를 쳤다.

묵묵하게 우태원을 보던 차유신이 문득 픽, 소리를 냈다. 우태원의 짙은 눈썹이 비틀렸다. 차유신이 느물거렸다.

“남 하는 일을 뭘 그렇게까지 궁금해해. 무서워?”

명백하게 자존심을 건드릴 의도로 내지른 말이었다. 다만 우태원은 더 인상을 쓰지도, 그렇다고 굳이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다. 탐독하듯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입을 뗐다.

“네.”

무게감 있는 언어가 이어졌다.

“나는 단 한 번도 선배가 무섭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차유신의 상처 입은 눈가를 건드렸다.

“그러니 얘기해 봐요.”

주욱 미끄러진 손끝이 차유신의 아랫입술을 재촉하듯 비벼댔다.

“나에게 더 큰 두려움을 줘 봐요.”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우태원은 매우 차분하게 차유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입에서 거둬지는 손길은 정중하기까지 했다. 차유신은 그의 무표정 너머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읽었다. 너무도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차유신은 최소한 한 가지를 알았다. 확실히 공포가 존재하긴 했다.

쾌락을 닮은 공포도 공포라 할 수 있다면.

“난 두 번 말하는 취미가 없어.”

차유신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확실하게 얘기할게.”

우태원이 흔쾌히 끄덕였다.

“네. 선배.”

“SDB그룹은 1년 안에, 역운회는 1년 반 안에 해체시킨다.”

차유신의 성대가 뜨거워졌다. 부쩍 강고한 언어가 방 안을 울렸다.

“네가 아끼는 네 고향들을 전부 다 내 손에 박살 날 거야.”

우태원의 턱이 미동했다. 곧 느긋한 호가 입매에 새겨졌다. 차유신을 담은 그의 망막에 검은 물과 같은 이채가 스쳤다.

“그것참 무서운 얘기네요.”

우태원이 등을 곧추세웠다. 적막한 눈이 소리 없이 굴러갔다.

“하지만 내가 원하던 답은 아니에요. 역운회 안에 설치한 CCTV가 그걸 위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해줄지, 선배는 그걸 얘기하지 않았어요.”

차유신이 저소했다.

“그건 네가 직접 알아봐야지. 내가 통째로 답을 읊어줄 이유는 없잖아?”

“그래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해요.”

우태원이 몸을 틀었다.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해졌으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란 팔이 내뻗어졌다. 단숨에 백진재의 뒷덜미를 움켜쥐고는, 거칠게 밑으로 내리꽂았다. 콱. 백진재의 이마가 단단한 침대 프레임에 부딪혔다. 억, 소리를 낸 백진재가 목을 꺾었다.

“들었어? 형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해준 거야. 차 의원한테.”

짓이겨진 이마에서 붉은 핏물이 흘렀다. 한동안 부들거리던 백진재의 머리가 가까스로 들렸다. 우태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덕분에 차 의원에게 예쁨도 엄청나게 받았겠어. 응?”

백진재가 허탈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질투나?”

우태원이 느긋하게 답했다.

“어. 아주 많이.”

백진재의 목을 제압한 손이 휙 당겨졌다. 이번에 향한 건 우뚝 솟아오른 침대 모퉁이였다. 맥을 잃은 백진재의 머리가 가차 없이 기둥에 처박혔다. 빠악! 마찰음이 제법 컸다. 저편에서 보던 진무원이 탄식했다.

“우태원! 그만….”

차유신의 외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우태원이 백진재의 고개를 고쳐 세웠다.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인 백진재가 헉헉거렸다. 우태원이 말했다.

“딱 차 의원에게 예쁨받은 값만큼만 해줄게.”

보다 힘이 들어간 손아귀가 백진재의 이마를 깨뜨릴 기세로 기둥에 찍었다. 허억! 백진재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재차 머리를 세운 우태원이 무표정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퍽, 퍽, 퍽.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소음에 현기증이 일었다. 차유신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다리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멀거니 보고만 있기를 한참, 돌연 차유신의 등이 서늘해졌다. 문득 확인한 백진재의 눈동자에 벌건 핏발이 서 있었다. 눈 감기 직전의 시체를 연상케 하는 몰골이었다.

다시 당겨지는 우태원의 팔뚝을 보다가, 차유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부리나케 그가 있는 쪽으로 다리를 뻗은 뒤 백진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내 있는 힘껏 우태원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퍽,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반걸음 물러난 우태원이 혀를 찼다. 서서히 좁혀드는 그의 미간이 눈에 띄었다. 차유신이 가볍게 비틀거렸다. 열감에 젖은 주먹이 욱신거렸다. 입 안에서 욕설이 씹혔다.

씨발. 온전한 상태로 해도 통할까 말까인데, 빌어먹을 몸 상태 때문에 그나마도 안 먹히는 상황이 됐다.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선배.”

백진재의 뒤통수를 쥔 우태원의 손이 풀렸다. 새까만 정수리가 무기력하게 떨구어졌다.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뭐가.”

“방금 전에 내가 참았잖아요. 안 보여요?”

“참긴 뭘 참아. 이 사이코 새끼야.”

“전 정말로 많이 참은 건데.”

우태원의 어금니가 질근거렸다.

“선배한테 화내고 싶은 거, 지금 우리 수보한테 푼 거잖아요.”

차유신이 주춤했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우태원이 상체를 내렸다.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서운하네요.”

“내가 뭘 칭찬해. 미쳤어?”

“그럼 그냥 선배가 당할래요?”

그의 시선이 녹녹해졌다.

“내가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내 질문에 좆같이 답하면, 이번에 아작나는 건 선배 다리라고.”

내려간 손아귀가 덜컥 차유신의 종아리를 낚아챘다.

“선배 취향이 이쪽이라면, 기꺼이 해줄게요.”

성큼 다가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복부를 걷어차듯 무릎으로 찍었다. 아윽! 단말마를 내뱉은 차유신이 시트 위에 널브러졌다. 단숨에 올라탄 우태원이 고개를 숙였다. 이동한 그의 손가락이 차유신의 복숭아뼈를 지분거렸다.

“선배가 자처한 거예요. 지금은.”

우태원이 다른 쪽 팔을 뻗었다. 차유신의 양 손목이 한 손에 휘어 잡혔다. 이를 악문 차유신이 발버둥을 쳤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절망에 사로잡힌 이마가 불덩이처럼 들끓었다. 힐긋한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얌전히 있어요.”

발목을 감은 손가락이 견고해졌다.

“진짜로 병신되기 전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등이 홧홧해졌다. 광속 수준으로 돌아간 발목에서 우둑,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아악!”

“유신아!”

놀란 진무원이 달려왔다.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르르 들어온 서너 명의 역운회 조직원이 우태원을 찾았다.

“형님. 무슨 일이십….”

득달같이 말을 쏟던 서재길 실장이 멈칫했다. 우태원의 등 뒤까지 다가온 진무원도 경직됐다. 느른하게 고개를 돌린 우태원의 낯은 무연한 냉기에 휩싸여있었다.

“신경 쓸 것 없어. 재길이 넌 진 보좌관하고 백 보좌관 데리고 나가. 백 보좌관은 치료 좀 해주고.”

손짓을 한 우태원이 강조하듯 덧붙였다.

“삼십 초 안에.”

조용하던 역운회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한 명은 진무원을 끌어내고, 두 명은 쓰러진 백진재를 부축했다. 허겁지겁 빠져나가는 남자들은 이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문손잡이를 잡은 남자가 물었다.

“문, 닫을까요?”

우태원이 딱딱하게 답했다.

“잠가.”

남자가 잽싸게 문 안쪽 버튼을 누르고는 밖에서 잡아당겼다. 탕. 방안이 고요해졌다.

“괜찮아요?”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은 대답 대신 등을 구부렸다. 차라리 뚝 끊어내고 싶을 정도로 부러진 부위가 쓰렸다. 뒤척일 때마다 부푼 가죽이 터질 기세로 꿀렁거렸다. 간신히 신음을 삼킨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은 가만히 차유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족해? 이제.”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우태원이 아리송한 고갯짓을 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요.”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퉁퉁 부어오른 살덩이에 그의 손가락이 꽂혔다. 차유신의 턱이 전율했다.

“흐읍….”

“이번에는 좀 더 오래갈 거예요. 한 두어 달 정도?”

우태원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그동안 내 생각 많이 해요.”

내내 앓고만 있던 차유신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넘어간 곁눈질이 우태원에게 꽂혔다. 잠잠하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우태원의 눈가가 움칠했다.

“네 생각?”

웃음은 곧 조롱이 됐다.

“이깟 발목 좀 부러졌다고 내가 네 생각을 해? 기껏해야 쌍욕이나 하겠지. 하지만 그 이상은 없어.”

이어진 한마디가 얼음보다도 찼다.

“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우태원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기다란 줄에 감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단조롭게 차유신을 주시할 뿐이었다. 차유신은 그런 그를 조종하듯 쏘아봤다. 보다 강렬한 햇살이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에 금을 그었다.

“정말이에요?”

우태원의 얼굴이 내려왔다. 빛을 잃은 그의 낯은 완연한 암연이었다. 똑바로 마주 본 차유신이 대꾸했다.

“당연한 것 아니야? 애초에 내가 왜….”

“난 내가 선배에게 별것인 쪽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우태원이 까딱거리던 손을 허공에 올렸다. 긴 손가락이 차유신의 몸 위에서 유영했다. 차유신의 얼굴에서부터 목, 가슴, 배, 골반과 다리를 학습하듯 쓸어오는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배회하던 손가락이 결정한 듯 하강했다. 다다른 곳은 차유신의 배였다. 진찰이라도 하는 양 어루만지다가, 보다 아래를 슬슬 더듬어왔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가락이 차유신의 바지 윗단을 헤집고 들어왔다. 공격적으로 올라간 차유신의 손이 우태원을 가로막았다. 쉽게도 그 팔을 치워낸 우태원이 물었다.

“몸 어때요? 지금도 열 많이 나요?”

차유신의 눈빛에 날이 섰다.

“열나는 건 모르겠고, 그냥 더러워. 그러니 손 치워.”

“잘됐네요. 선배는 더러운 걸 싫어하잖아요.”

커다란 손이 차유신의 속옷 안까지 밀려들었다. 씨발! 차유신이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반도 채 일어나기 전에 날아든 우태원의 다른 손이 차유신의 목을 챘다. 이내 인정사정없이 옥죄어왔다. 허윽! 목에 핏대를 사운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우태원이 뇌까렸다.

“성심성의껏 더럽혀 드릴게요. 선배조차 선배를 혐오할 정도로.”

이어지는 언어가 사뭇 농몽했다.

“그러면 나는 선배에게 뭐라도 될 수 있겠죠.”

목에서 떨어진 손아귀가 차유신의 손목을 감았다. 다른 손목까지 마저 잡히려던 찰나 차유신의 온전하게 남은 다리가 올라갔다. 젖 먹던 힘을 끌어내 우태원의 배를 걷어찼다. 퍽, 소리가 시트를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제법 제대로 된 타격이었다. 우태원이 티 나게 눈을 구겼다.

“지랄하네. 저번처럼 또 더러운 좆 대가리 비벼대려고? 꿈도 크다. 새끼야.”

차유신이 씩씩거렸다. 우태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차유신의 바지 안에 들어가 있던 손이 빠졌다. 이어 우태원의 넥타이 쪽으로 옮겨졌다.

“선배는 매를 버는 게 취미인가 봐요.”

스르르 풀린 넥타이 매듭이 늘어졌다. 당겨지는 우태원의 손을 따라 와인색 천이 흘러내렸다. 칼라에서 빠진 천을 털고 난 우태원이 읊조렸다.

“나는 부드럽게 대하고 싶은데, 왜 자꾸 거부해요?”

넥타이가 차유신의 손목으로 다가왔다. 단숨에 두 팔목을 조르고는, 침대 기둥으로 가져갔다. 눈을 키운 차유신이 버둥거렸다. 신열에 사로잡힌 몸은 움직이는 족족 처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유신을 제압한 우태원이 기둥과 손목을 한꺼번에 묶었다. 피가 통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손목이 꽉 조여 왔다. 차유신의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씨바알!”

“사실 저 섹스 별로 안 좋아해요.”

우태원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배하고 하는 건 좋았어요.”

우태원의 무릎이 차유신의 안쪽 허벅지를 찍었다. 뼈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압박감에 차유신의 힘줄이 부풀어 올랐다. 고통은 곧 퉁퉁 부어오른 발목까지 전이됐다. 혈관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차유신이 입을 뻐끔거렸다.

“아윽…!”

“선배의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잖아요.”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앞섶을 부여잡았다.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버클이 풀렸다. 당겨진 바지가 속옷과 함께 주욱 미끄러졌다. 발기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성기가 툭 튀어 올랐다가 허벅지 위에 늘어졌다.

“저로서는 영광일 따름이죠.”

이동한 손이 차유신의 성기를 거머쥐었다. 손잡이라도 되는 양 꽉 쥐어오는 손길에 차유신이 몸서리를 쳤다. 재차 버르적거리는 차유신의 다른 쪽 허벅지로 우태원의 종아리가 올라갔다. 곧 근육을 파열시킬 기세로 사납게 내리찍었다. 차유신이 퍼덕거렸다.

“으윽!”

“가만히 있어요. 선배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으로 쥐어줄 테니까.”

차유신의 음경은 평균보다 큰 편이었지만, 우태원의 손 면적이 워낙 넓어 수월하게 감긴 모양새가 됐다. 그 손으로 우태원은 밑에서부터 위까지를 잘근잘근 압박했다. 그 불쾌하지만 짜릿한 손놀림에 표피가 절로 불끈해졌다. 차유신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선배 구멍을 풀고 싶은데, 지금은 골프공도 없고. 그렇다고 선배가 고분고분 착하게 몸 열어줄 일은 더더욱 없어서요.”

우태원의 어조가 노곤해졌다. 빠듯해진 성기 밑 부분에서 세포들이 움찔거렸다. 곧 툭, 툭, 소리를 내며 가죽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차유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우태원.”

“나는 선배 자지를 직접 입으로 빨아본 적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선배 성감대가 어딘지 잘 알고 있어요.”

주물럭거리는 손아귀 안에서 점점 팽창하는 성기가 느껴졌다. 차유신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씨발,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 마.”

“밑 부분이 약하더라고요. 여자랑 섹스할 때마다 깊이 넣고 싶어서 개처럼 헐떡였겠죠. 뿌리까지 집어넣지 못하면 만족을 못 했을 테니까.”

불현듯 손을 푼 우태원이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곧 음낭을 지분거리다가 딴딴해진 남근의 밑 부분에 손톱을 묻었다. 곤두선 손끝이 주름 하나하나를 펼치기라도 하듯 긁어대기 시작했다. 올라간 엄지는 귀두를 꼬집듯 문질러댔다. 탐색하듯 음경을 가지고 놀던 손아귀에 돌연 힘이 실렸다. 소스라친 성기가 요동을 쳤다. 차유신이 발작하듯 턱을 떨었다.

“흐으… 아으읏!”

“쥐어주는 건 셀수록 좋죠?”

“씨발… 하지 마. 좆같으니까…!”

“좆같은 거 맞아요? 여기가 온통 시뻘건데.”

우태원이 조롱하듯 뻐끔거리는 귀두 구멍에 손톱을 박았다. 요도를 타고 저릿한 파동이 내리꽂혔다. 차유신이 자지러졌다.

“아으으… 흐윽…!”

“선배는 자주 솔직하지 못해요. 그러니 매번 저한테 혼나지.”

뇌까린 우태원이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새빨갛게 물든 귀두를 한입에 물고는, 남은 부분을 손으로 쥐어짰다. 손가락이 간지럼을 태우듯 밑 부분을 주물러댔다. 차유신의 동공이 확 커졌다. 온몸의 피가 치부 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발발거리던 차유신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아아….”

맥을 잃은 신음이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곧 화끈해진 요도를 타고 정액이 솟구쳤다. 줄기차게 쏟아진 액체를 우태원은 한입에 품었다.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모조리 담고는, 귀두를 우물거리며 남은 사출을 재촉했다. 좌절에 사로잡힌 차유신의 얼굴이 시트에 묻혔다. 쭈웁, 소리를 내며 우태원이 머리를 거뒀다. 진 빠진 성기가 꺾였다.

허리를 세운 우태원이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이내 담고 있던 정액을 손바닥 위에 쏟았다. 넘친 액이 시트에 검은 우물 자국을 냈다. 자못 만족한 우태원의 손이 제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차유신은 보기 싫은 영화를 억지로 관람하는 관객처럼 그걸 봤다.

버클이 풀리고, 검은 속옷이 내려가는 내내 차유신은 이미 엔딩 크레딧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치심을 잊기 위한 자기방어였다. 또 우태원 앞에서 사정을 했다. 이 년 전에야 멋도 모르고 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이번에는 알면서 같은 걸 했다.

아주 개 같은 일이다.

뚝. 시트에 낙하하는 물방울 소리에 귓바퀴가 곤두섰다. 흐릿하던 동공이 부쩍 자리를 잡았다. 차유신이 싸지른 정액으로 마사지라도 하듯 제 남근에 처바르는 우태원이 보였다. 희뿌연 액으로 번들거리는 성기의 주름을 타고 두어 방울이 더 떨어졌다. 정신을 차린 차유신이 윽박질렀다.

“또 뭐 하는 거야. 어?”

“긴장 풀려서 흐물거릴 때 어서 넣어야죠.”

차유신의 양 허벅지를 짓누르고 있던 우태원의 다리가 내려갔다. 그의 하반신이 밑으로 빠지자마자 펼쳐진 손바닥이 같은 자리를 내리눌렀다. 한 치의 달아날 틈 없이 제압한 채로, 우태원이 팔을 올려붙였다. 활짝 젖혀진 다리가 허공을 향해 들렸다.

미미하게 휘둘린 발목이 다시금 후끈거렸다. 아. 고통에 사로잡힌 차유신의 낯이 일그러졌다. 우태원은 태연히 치골을 추슬렀다. 우뚝 솟아오른 생식기의 끄트머리가 차유신의 회음부를 쓸었다. 죽 미끄러지는 감각이 송연했다. 등줄기를 경련한 차유신이 또 한 번 걷어찰 기세로 온전한 다리를 꺼떡거렸다.

알아챈 우태원이 차유신의 부푼 발목을 낚아챘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힌 가죽 안에서 뜨거운 핏물이 출렁였다. 차유신이 커다란 비명을 터뜨렸다.

“아아아아악!”

“자꾸 이러면 곤란해요.”

경고 조로 말한 우태원이 장골을 옮겼다. 빳빳한 귀두가 사정없이 구멍에 틀어박혔다. 얼얼한 발목 때문에 덩달아 무감각해진 입구가 활짝 열렸다. 딱딱한 귀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쫙 늘어난 살덩이에 불끈한 생식기의 주름이 감겼다. 바들거리는 입에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허으윽…!”

“왜 자꾸 나에게 선배를 다치게 할 명분을 줘요.”

“흐읍, 으으….”

“내가 그럴수록 더 좋아하는 거 알면서.”

정액을 치덕치덕 바른 성기가 조붓한 배 안을 쑥 갈랐다. 절반이 좀 되지 않게 쑤셔 박은 우태원이 대뜸 허릿짓을 했다. 뻑뻑한 내벽에 진득한 점액을 묻혀가며 귀두가 쿡 묻혔다. 어느 한 군데가 뚫리는 듯한 기분에 차유신이 이를 악물었다.

“하으… 윽!”

“좋아하는 척 해봐요. 연기라도 상관없으니까.”

우태원이 상체를 끌어올렸다. 파들거리는 차유신의 눈에 제 시선을 꽂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솔직히 선배, 이거 좆같잖아요. 내 허리에 선배 다리 감고 박아 달라 애원해 봐요. 그러면 빨리는 끝내줄게요.”

이를 잘근거린 차유신이 우태원을 쏘아봤다. 응달에 잠긴 그의 낯은 구름 뒤에 숨은 달을 닮아있었다. 가깝고도 멀었다. 묵묵하게 응시하고만 있던 차유신이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나긋한 질문이 건네졌다.

“나한테 욕 듣는 게 취미지? 십새끼야.”

우태원이 빙긋 웃었다.

“취미는 아니에요. 별개로 그럴 때마다 흥분되긴 하지만요.”

“귀 대봐. 아주 창부처럼 속삭여줄 테니까.”

차유신이 고저 없이 말했다. 우태원은 흔쾌히 얼굴을 기울였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에 우태원의 귓불이 스쳤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이어 다짜고짜 그의 살을 깨물었다. 제대로 파고든 이빨에 핏물이 스몄다. 우태원이 울대뼈를 떨었다.

“후우… 진짜로.”

의미심장하게 읊조린 우태원이 곁눈질로 차유신을 봤다. 차유신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마주 봤다. 배 안에서 뭔가를 독촉하듯 꿀렁이는 생식기가 느껴졌다. 우태원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렇게 물고만 있을 거예요?”

차유신은 단답으로 응수했다.

“당연히 아니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차유신의 이에 날이 섰다. 꽉 깨문 채로 질끈질끈 살덩이를 씹어댔다. 뜯어진 가죽에서 붉은 핏방울이 땀처럼 떨어졌다. 우태원이 기지개를 켜듯 뒷덜미를 전율했다. 그의 눈에서 동공이 풀려갔다.

아예 뜯어버리고 싶은데, 생각보다 피부가 두껍다. 차유신은 급한 대로 귀를 고쳐 물었다. 비교적 여린 가장자리에 어금니를 갖다 대고는, 세게 지르 물었다. 또 한 번 새어 나온 핏물이 차유신의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북이라도 연주하는 것처럼 배 안이 세차게 울렸다.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은 리듬으로, 우태원의 성기가 박동하고 있었다.

차유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진 살점에 쐐기를 박듯 이를 꽂고는, 확 물어뜯어 버렸다. 툭, 가죽이 떨어져 나갔다. 손톱 절반만 한 크기로 뜯긴 살점을 차유신은 씹지도 않고 꿀꺽했다. 비릿한 내음이 식도 너머까지 물씬 풍겼다.

“이걸로 우린 한 번씩 주고받은 거예요.”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가 입은 하얀 셔츠에 붉은 자국들을 새겼다. 힐긋 확인한 우태원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단추를 풀었다. 벌어진 틈을 확 열어젖히자, 성이 난 것처럼 균열한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회암처럼 단단한 피부는 그가 숨을 쉴 때조차 정적으로 움직였다. 돌로 다져진 것처럼 뇌호한 몸이었다.

흘러간 시선이 우태원의 널따란 어깨에 걸렸다. 한쪽 어깨를 감싼 붕대에서 희미한 핏기가 비쳤다. 아까 석일태의 앞에서 스스로 칼을 찔러 넣었을 때 생긴 것으로 보였다. 간신히 말라가던 붕대가 다시 신선해지고 있다. 아까도 지금도, 결국 원인은 차유신이었다.

“내가 선배가 주는 고통을 즐기듯, 선배도 내가 주는 고통을 즐기는 것이라 믿을게요.”

완고한 손이 차유신의 허벅지를 거머쥐었다. 윽. 차유신이 치를 떨었다. 순간 귀 안에서 찡, 하는 이명이 샘솟았다. 동시에 목덜미를 타고 열기가 훅 치고 올라왔다. 차유신은 속으로 뇌까렸다. 씨발, 뒈질 놈의 몸살. 양다리가 축 처졌다. 기진맥진한 몸에서 거부반응이 옅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서로를 할퀴는 일에 몰두하는 우리 시간이 아깝잖아요.”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뚫어져라 보던 차유신이 입을 뗐다. 피로감이 만연한 가운데 착 가라앉은 대꾸가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누가 주는 고통을 반기는 변태 새끼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네 강간을 즐거워할 일도 없어.”

“지금까지는 그랬나 보네요.”

우태원의 목소리가 달콤해졌다.

“지금부터는 아니길 바랄게요.”

콱. 음경이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쑥 들어왔다. 기겁한 내벽이 항거하듯 안을 수축했다. 그래봤자 그 커다란 살덩이를 꽉꽉 조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밭은 숨을 뱉은 우태원이 허리를 추켜올렸다.

살짝 빠졌던 성기가 척척한 정액을 윤활제 삼아 멋대로 안을 헤집어왔다. 빼곡해진 차유신의 배 안에서 온갖 힘줄이 아우성을 쳤다. 점점 진입하던 음경이 차유신의 잘 다듬어진 복근에 산등을 만들었다. 갈수록 길어지는 줄기에 차유신의 숨이 막혀왔다. 목구멍을 타고 가쁜 호흡이 터졌다.

“흐으… 읏!”

“하아…. 본인이 싼 정액을 스스로 안에 처박고 있는 기분이 어때요.”

“지랄하지 마… 후윽.”

“별로예요? 그러면 제거라도 처넣어줄게요.”

우태원이 대뜸 생식기를 튕겼다. 매트리스가 거세게 출렁이고, 차유신의 다리가 넘어갔다. 무릎이 시트에 닿을 정도로 차유신의 양 허벅지를 젖히고 난 우태원이 발정 난 것처럼 굴신했다. 조금 말라붙었던 내벽이 그의 표피에 사포 갈리듯 비벼졌다. 꼭 끼워 맞춰진 채 마찰하던 서로의 주름이 홧홧해지고, 복통에 휩싸인 것처럼 배가 위아래로 욱신거렸다. 차유신의 숨소리가 절박해졌다.

“아! 으으… 윽, 씹! 그만 좀….”

“금방 부드러워질 거예요.”

우태원이 어르듯 말했다. 그 말이 종식되자마자 마법처럼 우태원의 음경에 맞물린 주름들이 녹녹해져 갔다. 우태원의 귀두에서 찔끔거리며 나온 쿠퍼액이 부어오른 점막을 낱낱이 적셔오고 있었다. 알아챈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이 다정하게 말했다.

“더 필요하면 얘기해요.”

“하…. 씨발. 진짜 뭐 하는 짓거리야. 나하고 연애라도 하게? 어차피 할 거면 빨리 싸고 끝내. 진짜 좆같아서 못 해 먹겠으니까.”

“연애요? 제가 감히 어떻게 선배하고 연애를 해요.”

작게 웃은 우태원이 몸을 낮췄다. 살짝 빠졌던 남근이 헤엄을 치듯 차유신의 내벽을 확장시켜 왔다. 조금은 익숙한 듯 벌어진 점막이 우태원의 표피를 살살 감아왔다. 이내 꿈틀거리며 짜대기 시작했다. 차유신의 눈이 자못 커졌다. 정말이지 끔찍했다. 스스로 생생하게 느낀 배 안의 변화에 소름이 끼쳤다.

몸이 우태원의 좆을 알아본다. 단 두 번 만에.

“나는 그저 선배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우태원의 목소리에 서서히 그늘이 졌다.

“선배가 한때는 저를 원했던 적도 있다는 거.”

잠시 떨어졌던 위아래 어금니가 꽉 물렸다. 뒷덜미가 저려올 정도로 진저리를 치고 난 차유신이 시근거렸다. 우태원은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그러니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선배가 원하게 될지.”

지긋한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차유신은 그저 사냥개를 기다리는 주인처럼 우태원을 올려다봤다. 마주 보던 우태원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 까딱, 까딱, 까딱.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잔상. 어느 낡은 페이지에 기록된 그날의 사자(死者).

그는 차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무슨 얘기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대답은 새빨간 노을처럼 시작됐다. 새벽의 연무 같은 종용의 눈빛을 무시한 채, 차유신은 할퀴듯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나 지껄일 거면 그 입 닥치고 박기나 하지 그래.”

목소리는 최대한 가다듬은 채였지만, 그 와중에 간헐적으로 찾아드는 울림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울림은 곧 병화가 됐다. 지독한 열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오한이 일기 시작한다.

그 빌어먹을 비 오는 날.

“추워요? 따뜻하게 해줄게요.”

부쩍 조용해진 차유신을 달래는 양 우태원이 무지근한 뒤통수에 제 팔을 집어넣었다. 베개를 대듯 팔뚝으로 받친 채, 차유신의 배 안에서 꿈틀대는 성기로 담금질을 했다. 뱃가죽 위로 불뚝 솟구쳤던 생식기가 침식하듯 내려가고, 그러면서 더 깊이 들어온 귀두가 젖어든 내벽에다 절구를 찧는 것처럼 자신을 새겼다.

움푹 팬 점막이 체념한 듯 우태원의 성기를 쫀쫀하게 감았다. 두 사람의 내밀한 신체가 완연하게 접착되고, 이음새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철썩, 소리가 유독 크게 번졌을 때 전류가 흐르는 듯한 섬뜩함이 발가락까지 번졌다. 차유신은 발악하듯 기함했다.

“아으… 흐읍!”

“그때 선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고, 아직 소년 같았어요.”

목소리는 봄처럼 다정했고, 그에 스며든 언어는 겨울처럼 싸늘했다. 차유신은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자신의 영원한 악몽이었다.

“나는 그게 선배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빗물에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차유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이 움직였다. 살짝 내려온 손가락이 경련하는 볼을 톡, 건드렸다. 차유신은 밭은 숨을 고르며 귀를 닫았다. 그러나 진실은 쉽게도 닫힌 문을 뚫으며 들어온다.

“선배가 나한테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재차 이동한 손가락이 차유신의 마른 눈을 어루만졌다.

“그때 난 16세였어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줄 몰랐죠. 게다가 선배는 감히 제가 다가가선 안 되는 존재였기에, 그냥 나는 그 자리에서 서 있었던 거예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마디가 눈꺼풀에 균탁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배도 사실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쿠릉. 어디선가 천둥이 쳤다. 메마른 사위가 갑자기 추적해지고, 역겨운 비 비린내가 혈관까지 파고든다. 달싹이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렸다. 어둑했던 시야가 환해지고, 눈앞의 존재가 선명해졌을 때. 차유신은 봤다.

거기에 있는 건 우태원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라도 칭찬해주면 안 돼요? 그때 나, 잘한 거 맞잖아요.”

쑥 내려갔던 남근이 예고 없이 치솟았다. 내장을 뚫어버릴 양 파고들어서는 채근하듯 다물린 배 속을 후벼 팠다. 움찔거리던 점막이 반강제로 느슨해지고, 기다렸다는 듯 침입한 귀두가 흐늘거리는 내벽에 제 점액을 처발랐다. 갈구하듯 내벽을 짓이기고 난 귀두가 한계까지 들어와 두터운 살을 건드렸다. 차유신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하으으… 아… 아아…!”

“왜 말이 없어요? 고결한 척 그만하고, 있는 그대로를 봐요.”

황급히 깔리는 차유신의 속눈썹에 우태원이 엄지를 갖다 붙였다. 반쯤 눈을 뜨게 한 채로, 느른한 숨을 몰아쉬었다. 덜덜거리던 차유신의 초점이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이내 보인 건 다시 우태원이었지만, 차유신은 더 이상 그걸 믿지 않았다.

그건 12년 전의 가을이었고, 비가 오던 날이었으며,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첫 페이지에 19세의 차유신이 있다. 그의 앞에는 새까맣게 불탄, 원래는 하얗던 고급 세단이 있다. 질척한 창문 너머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두 구의 남녀 시신이 비친다. 마치 행위예술 같다.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빗물투성이 거울. 성년도 미성년도 아닌 애매한 나이대의 실루엣이 버릇처럼 고개를 까딱거린다. 차유신은 빗물 속에서 그것을 본다.

지금처럼.

“그냥.”

파들거리던 턱에서 진이 빠졌다. 부쩍 풀린 눈길이 위를 향했다. 의도한 것이었다. 지금 저 거울을 온전히 볼 수 없기에, 차유신은 눈을 닫는 쪽을 택한다. 그 지긋지긋한 역사 앞에서라면 잠시나마 천치가 돼도 좋았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은 차유신이다. 잠깐의 눈속임이 그 차유신을 해치진 않을 것이라고, 자신은 믿는다.

“입 닥치고 박기나 해. 내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잠시 자신을 내려놓아도 괜찮다.

“겨우 대답이 그거예요?”

우태원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차유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비 갠 후를 닮은 정적이 침실을 메웠다. 차유신의 눈꺼풀을 짚고 있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자신을 제압하던 그물이 사라지고, 차유신은 아주 희미한 환영만 들어올 정도로 시야를 잠갔다. 관찰하듯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끝내 끄덕였다.

“그래요. 차유신이 괜히 차유신이 아니지.”

말을 맺은 우태원이 깊숙이 들어왔던 성기를 쑥 뺐다. 끄트머리만으로 입구를 간질거리다가, 곧 굵은 생식기를 힘차게 밀어붙였다. 배 안이 쫙 갈라지는 감각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랫배 빼곡히 때려 박힌 이물에 차유신의 배가 불룩해졌다. 돌아간 이마가 우태원의 팔뚝을 짓눌렀다.

“흐… 아, 으읏…!”

“나는 첫 수음 상대가 선배였어요. 아마도 여덟 살 때의 일이죠.”

높낮이를 잃은 목소리엔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차유신은 인내하듯 우태원의 팔에 재차 이마를 비볐다. 단단한 그의 가죽이 차유신의 머리와 교접할 때마다, 배 안의 음경이 내벽을 찍어댔다. 갈수록 짙어지는 열감에 두통이 심해졌다. 차유신은 한 가닥의 이성만을 남겨둔 채 무릎을 떨었다.

“아아…. 흐읍….”

“어렸을 땐 그게 수음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그거였더라고요.”

느릿느릿 들어온 성기가 다시 조붓한 틈을 파고들었다. 저항하듯 단단해지는 점막을 가뿐하게 지르밟은 귀두가 딱딱한 내벽에 처박혔다. 미끈거리는 표피가 쿨렁이는 살을 마구 두드려댔다. 우태원의 복근이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해졌다. 그것과 맞닿은 차유신의 아래쪽 복근도 잔뜩 힘이 들어가 갈라지기 직전이었다.

“그…. 하아, 씨발, 좀 그만 넣…!”

“왜 하필 선배였을까, 그걸 여러 번 생각했어요. 처음엔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그랬을 거라고 추측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란 걸 알았죠.”

“그만 닥치고…. 아, 좀…!”

“선배는 물론 아름답지만, 전 사실 아름다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우태원의 머리가 내려왔다. 차유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땀에 젖은 맨살을 살살 혀로 핥았다. 달팽이가 기어가듯 미끄러진 혀가 오톨도톨한 유륜을 쓸다가, 유두에 다다랐다. 우태원의 입이 모였다. 춥, 소리와 함께 도톰한 꼭지가 빨렸다. 침대 기둥에 묶인 손목이 덜컹거리며 부딪쳤다. 개운치 않은 소름에 양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바로 언성이 높아졌다.

“씹, 그딴 거… 흣, 하지 말라고 했지!”

“지금부터 여기서 더 넣을 건데.”

우태원의 어조가 곤로해졌다. 차유신의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이미 한계까지 들어온 귀두는 금방이라도 분출할 기세로 요탕을 치고 있었다. 긴장감에 또 오금이 저려왔다. 헉헉거리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가눴다.

“어서 쑤시라고 선배가 얘기해요.”

차유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뭘 더 쑤신다는 거야.”

“꺾으면 더 들어가요. 뒤로 해본 건 선배밖에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래요.”

“우태원.”

“아니면 여기서 끝내고 옛날얘기 더 해도 돼요.”

우태원이 혀를 내밀었다. 날름거리는 살덩이가 바짝 선 젖꼭지를 농락했다. 무지근한 열기가 가슴께를 치고 올라왔다. 차유신의 어깨가 부들거렸다. 맥 빠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읏….”

“난 사실 그게 더 좋아요.”

나른하게 깔린 혀가 유두와 겹쳤다. 돌기를 핥아먹듯 비벼대고는, 다시 입을 모아 쭙쭙 빨아댔다. 차유신의 한쪽 무릎이 덜컥 들렸다. 곧 탕, 소리를 내며 시트를 내리쳤다. 개의치 않고 유두를 흡입하던 우태원이 위를 봤다. 심상한 한 마디가 귀를 파고들었다.

“물론 선배 몸은 선배를 닮아 아주 야릇하고… 덕분에 머리보다 좆이 먼저 반응하고, 그 어떤 교미보다도 선배를 강간하는 일이 훨씬 더 짜릿하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선배의 경멸하는 눈을 보는 것과 비교하면 그건 아주 하잘것없거든요.”

보다 비좁아진 입술 틈이 차유신의 젖꼭지를 쥐어뜯었다. 더운 혈류를 머금은 꼭지가 봉긋해지고, 배 안에서 우태원의 분신이 뱀처럼 뒤틀렸다.

“내가 선배를 가지고 첫 수음을 한 것도 결국 선배의 그 눈 때문이었어요.”

흐읍. 차유신의 다리가 재차 시트를 걷어찼다. 우태원의 톤이 나긋나긋 바뀌어 갔다.

“그러니 그냥 나와 마주 보며 내 얘기를 더 듣겠다 해줘요.”

차유신의 입에서 공허에 찬 숨이 흩뿌려졌다. 우태원은 미소 지은 채 차유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유신은 표정을 빼앗긴 낯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다시 침묵이 흐르고, 조용해진 귓가에 또 한 번의 빗소리가 찾아들었다. 뚝, 뚝, 뚝.

굵어져 가는 빗발 틈으로 그를 본다. 새까만 가을밤을 고스란히 담은 낯에는 물기가 없다. 그래서 그날 그렇게도 많은 비가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날 그를 보던 차유신의 낯에도 물기는 없었다.

말라붙은 두 사람은 척척한 빗물에 서로를 투영했다.

그건 거짓이었다.

“더 넣어.”

떨어진 입에서 건조한 지시가 새어 나왔다. 우태원의 미간이 흠칫했다. 차유신의 목울대에 힘이 실렸다.

“끝까지 처넣어.”

차유신의 눈꺼풀이 한계까지 들렸다. 우태원의 입에서 비 내음 섞인 웃음이 번졌다.

“그 아가리 좀 닥치고, 그냥 씨발…. 아주 안에 너 처박고 싶은 대로 처넣, 흐읍…!”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랫배가 잔뜩 소스라쳤다. 배 안의 벽을 타고 꺾인 남근이 기역자로 난 길을 따라 귀두를 끼워 넣고 있었다. 이미 불룩해진 아랫배에 이어 윗배까지 뻑적지근해졌다. 커다란 귀두에 짓눌린 점막이 퉁퉁 부어올랐다. 하염없이 부르트는 내벽에 심장까지 욱신거렸다. 넘어간 차유신의 정수리가 쿵, 소리를 내며 침대 헤드에 부딪혔다. 손을 내민 우태원이 차유신의 머리를 감쌌다.

연신 솟아오르는 생식기를 점막들이 감고 조여 댔다. 쉼 없이 내벽에 꼴아 박히는 귀두에서 점액이 새어 나왔다. 아까 우태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더럽혀 드릴게요. 그래, 이제 알았다. 우태원은 지금 차유신을 제대로 더럽혔다.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태원은 12년간 공들여 완성한 ‘차유신’을 더럽혔다.

곤두선 손톱이 자학하듯 헤드에 찍혔다. 바로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손끝이 화끈해졌다. 차유신은 그게 아프지 않았다. 지금의 고통과 비교하면, 손톱이 부러진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걸로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밑동까지 박아 넣은 우태원이 허릿짓을 했다. 폐부 언저리까지 처박힌 생식기가 배 안을 희롱하듯 들쑤셔왔다. 복부가 그대로 까뒤집히는 기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흐읍. 홉뜬 차유신의 눈에서 흰자위가 두드러졌다.

우태원이 또 한 번 치골을 추켜올렸다. 철썩, 소리와 함께 배 안에서 후끈한 뭔가가 터졌다. 순식간에 그득해진 액이 내벽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빈틈없이 채워진 입구가 뻐끔거릴 때마다 정액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전 지금 이 순간부터 국감이 끝날 때까지 선배를 풀어줄 생각이 없거든요.”

뜨거운 액이 넘실거리는 배에다 우태원이 손을 덮었다. 펼쳐진 손가락이 여전히 불룩한 뱃가죽을 조롱하듯 눌러댔다. 차유신은 성낼 기운도 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다시금 솟구친 신열 때문에 온몸이 돌덩이 같았다. 살기 위해 널브러지는 차유신의 머리를 어루만진 우태원이 속삭였다.

“물론 이건 회유나 거래가 아니에요. 아주 순수한 통보예요.”

쿠릉. 머릿속에서 마른번개가 쳤다.

“씨발. 그게 무슨….”

다짜고짜 열렸던 입이 곧 멎었다. 현기증에 사로잡힌 머리가 핑 돌고, 곧 목이 꺾였다. 풀썩 시트에 파묻힌 얼굴에서 연신 욕설이 샜다. 씨발, 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좆같은 새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12년 전, 차재후와 류민경이 탄 그 하얀 차 보닛에다 대가리라도 박아버렸어야 했는데.

*

월, 월, 월! 어딘가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트에 앉은 채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텅 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정액 냄새가 났다. 거기에 칠을 덧댄 것처럼 피 냄새도 났다. 몽롱하던 정신이 곧 자리를 잡았다. 냄새의 주인을 파악했다. 정액도, 피도. 전부 우태원.

사지는 자유로웠다. 침대 기둥에 걸려있던 넥타이는 어딘가로 사라진 채였다. 차유신은 잠자코 손을 털었다. 발목이 뒤늦게 시큰거렸다. 살짝 이불을 젖혀 아래를 확인했다. 부은 부위를 제대로 감은 부목이 보였다. 일단 조치는 잘 됐고. 중얼거린 차유신이 허리를 폈다. 반쯤 열린 커튼을 걷고는 창 아래를 살폈다. 좁다란 골목을 무리 지어 다니는 들개가 보였다.

개들은 누가 봐도 완전한 날짐승이었다. 음습한 거리가 제집인 양 횡보하면서 연신 짖어댔다. 월, 월, 월. 성난 외침이 20층에 가까운 이 침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차유신은 물끄러미 그들을 관조했다.

역현구 내에는 저런 떠돌이 개가 흔했다. 과거 이 근처에 대형 투견장이 있었다. 차유신이 여울이던 시절 꽤 성행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투견장에 간 기억이 두어 번 있다. 나중에 관할 구청에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며 결국 폐쇄되긴 했지만. 그때 뿔뿔이 흩어진 개들은 역현구 곳곳에 새끼를 싸지르며 자기들만의 터전을 완성했다.

역현구을은 T시티를 중심으로 한 신도시화를 진행하며 그 개들을 쫓아냈다. 다만 역현구갑은 여전히 들개 천지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사람을 향해 이부터 드러내는 맹견을 보면 이 구역의 주인이 사람인지 개인지 때때로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다.

역현구갑은 그랬다. 모든 걸 받아들였고, 그래서 모든 게 지리멸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문이 열렸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공손하게 다가왔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그를 봤다. 역운회의 젊은 간부이자 우태원의 최측근. 서재길 실장. 우태원보다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데,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 우태원을 아주 맹목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이번에 다친 건 좀 오래갑니다. 아무리 빨라도 삼 개월이에요. 그러니 함부로 어디 돌아다닐 생각하지 마시고….”

“내 핸드폰.”

말을 끊은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서재길이 도리질을 쳤다.

“그거 저한테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는데.”

“글쎄요. 쓰레기장? 태원이 형님께서 박살 내서 버리라고 지시하셨거든요.”

차유신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서재길은 정자세로 차유신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뚫어져라 마주 보던 차유신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가까이 와봐. 할 말 있으니까.”

서재길이 기탄없이 몸을 기울였다.

“네. 의원님.”

차유신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바로 올라간 손아귀가 둥근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이내 가차 없이 침대 기둥에 박아버렸다. 억, 소리를 낸 서재길이 허우적거렸다. 꿈틀대는 이마에 새빨간 상흔이 걸렸다. 차유신이 경고했다.

“없으면 만들어 와야 할 것 아니야. 씨발 새끼야. 그게 어떤 핸드폰인데.”

“허억…. 잠깐. 이것 좀 놓고 얘기하십시오.”

서재길이 손사래를 쳤다. 완전히 기가 질린 모양새였다. 휘청거리는 손 안에서 약 봉투 같은 것이 너울거렸다. 마뜩잖게 보던 차유신이 끝내 손을 풀었다. 실은 더 이상 쥐고 있을 기운도 없었다. 불현듯 고개를 든 열감 때문에 손톱까지 얼얼했다.

“손이 아주 뜨거우십니다.”

이마를 훔친 서재길이 약 봉투를 뜯었다. 빠져나온 알약이 대여섯 개는 돼 보였다. 이어 협탁에 놓인 생수병을 챙긴 그가 손을 뻗었다. 약과 물이 한꺼번에 차유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차유신이 불퉁하게 물었다.

“이건 또 뭐야.”

“드십시오, 약. 밤새 40도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요. 그 몸에 어떻게 저 휘두를 기운은 남아있었답니까.”

혀를 내두른 서재길이 재차 손으로 약을 권했다. 마지못해 나아간 차유신의 손이 약과 물을 챘다. 한입에 약을 털어 넣고는, 생수병을 까 물도 쏟아부었다. 틈틈이 헌 입 안 빼곡하게 싸늘한 물이 찼다. 차유신은 입 안의 것들을 한꺼번에 삼켰다. 식도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너희 지금 실수하는 거야.”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서재길은 가만히 갸웃했다. 차유신이 쯧, 소리를 냈다.

“나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이야. 경찰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우리 의원실은 또 어떻고. 우태원이 시키니 뭘 해도 문제없을 것 같지? 세상 그렇게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아. 멀쩡한 국회의원 24시간 가까이 감금해놓고 무탈하길 바라? 그런 건 너희 깡패 새끼들 세상에서나 실컷 해 처먹어. 적어도 나한텐 안 통하니까.”

서재길은 대답 대신 제 어깨를 주물렀다. 떨떠름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글쎄요. 그런 걸 저에게 아무리 얘기하셔도…. 저는 그저 지시받은 것에 따르는 입장이라, 잘 모르겠다는 대답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 깡패 새끼나 하고 있는 거겠지.”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주억거린 서재길이 손을 뒤로한 채 섰다. 머리카락을 턴 차유신이 그를 힐끔거렸다. 붙박이처럼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언성이 높아졌다.

“대체 왜 안 나가고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야.”

“태원이 형님께서 의원님을 지키라 하셔서요.”

주변을 휘 둘러본 그가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 자살 기도라도 하면 곤란하다면서요.”

차유신의 낯이 멍해졌다. 뭔가를 빼앗기기라도 한 표정으로 서재길을 보다가, 곧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시작된 너털웃음이 제법 길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차유신을, 서재길은 묵묵하게 보기만 했다.

“아주 지랄들을 한다.”

웃음을 싹 거둔 차유신이 이불을 걷어찼다. 툭 밀려난 천 뭉치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차유신이 이죽거렸다.

“자살? 내가 그딴 걸 한다고.”

화기에 젖은 혼잣말이 덧붙었다.

“사람을 병신으로 아나. 또라이 새끼가.”

조용하던 서재길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재차 침실을 둘러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이내 TV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럴 의지가 전혀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아주 다행이진 않아. 네 덕분에 기분이 꽤 좆같아졌거든.”

“그럼 기분을 전환할 만한 것이 필요하겠네요. 태원이 형님께서 볼거리를 하나 얘기해두고 가셨습니다. 의원님께서 큰 흥미를 느낄 거라고 하시면서요.”

서재길이 TV를 틀었다. 신호를 입력하라는 알림이 떴다. TV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조정하는 서재길에게 차유신이 물었다.

“그게 뭔데.”

“저도 내용은 모릅니다. 의원님께서 깨면, 이 TV를 틀어서 보여주라고만 하셨습니다. 심심해하는 것 같으면 이걸로 달래주라고.”

“무슨 애니메이션 틀어주면 조용해지는 초등학생이야?”

“뭐 비슷하겠네요.”

웃지도 않고 응수한 서재길이 연신 버튼을 눌러댔다. 이 제품은 처음 만져봐서 그런지 다루는 게 서툴렀다. 계속해서 바뀌어 가던 화면에 어느 뉴스 화면이 걸렸다. 커다랗게 비친 건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차유신이 바로 제동을 걸었다.

“잠깐만.”

서재길의 손이 멎었다. 눈치를 보던 그가 잠시 뒤로 빠졌다. 차유신은 홀린 것처럼 TV를 응시했다. 커다란 화면 밑으로 새하얀 자막이 떠올랐다.

「‘T시티 황제’ 차유신 병가 신청…”우울증 심각해 국감 쉰다”」

-‘T시티 로비게이트’를 폭로하며 주목받은 차유신 신진화당 의원의 병가 신청이 하루 만에 국회사무처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차유신 의원실은 이날 자료를 내고 “최근 업무가 과중해진 탓에 차 의원이 오랫동안 앓아왔던 정서불안 증세가 악화됐다”며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2개월간 칩거하며 정비 기간을 갖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의원실은 이와 함께 차 의원이 3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받아온 정신과 진료기록 중 일부를 공개했습니다. 신진화당은 “국정감사 기간에 공백이 생기는 건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차 의원이 최근 중대한 과제들을 연일 해결해온 점을 고려해 국민께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휴직 기간 차 의원에게 들어가는 세비는 전액 반납됩니다.

“저거 대체 뭐야!”

차유신이 버럭 했다. 서재길이 우물쭈물 답했다.

“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이….”

“그간 고생 많으셨잖아요, 선배. 한동안 쉬셔야죠. 국민들도 응원하고 있는데.”

또 한 번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태연히 들어온 우태원이 서재길을 향해 손짓을 했다. 꾸벅한 서재길이 신속히 침실을 나섰다. 한층 고적해진 침실 안에서 차유신은 허망하게 이마를 짚었다. TV 화면은 자신의 정신과 진료기록 일부를 내보내고 있었다. 떨리던 눈매가 가늘어졌다. 씨발, 저게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그냥 불면증 때문에 몇 번 약 처방받은 건데, 대체 왜 저게 병가 증거물로 나오는 거야.

“제가 지시했고, 무원이 형이 세팅했어요. 신진화당 원내대표 최준필 선배 있죠? 정진원, 신인대에 이어 신진화당 넘버3. 저하고 아주 친하거든요. 그 선배께 얘기해 신 선배하고 정 선배 잘 설득해 달라 했어요. 차 선배가 아주 아프니, 두어 달만 쉬게 해달라고. 최 선배 통해 얘기 들은 신인대 선배는 아주 어이 없어 했지만 일단 선배 최근 실적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말았고. 정진원 선배가 꽤 석연치 않아 했나 봐요. 그런데도 당 전반적인 분위기가 받아들이자는 쪽이니 결국 넘어가는 걸 택했고. 그나저나 정 선배하고는 최근 싸웠다면서요? 안 싸웠으면 정 선배 성격상 이게 말이 되냐면서 차 선배 집까지 찾아갔을 텐데, 싸웠던 바람에 다행히 쉽게 마무리됐네요. 대국민당이야 차 선배 투입하면 행안위 국감 난장판 될 것 뻔히 아니까 초고속으로 OK했고, 그러면서 자연히 국회사무처도 OK. 선배 상태가 워낙 안 좋아 외부 연락 거리낀다고, 개인적인 연락은 진무원 수석보좌관 통하는 걸로 무원이 형 선에서 정리했고요. 미심쩍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무원이 형이 워낙 차 선배 초년 때부터 챙겨온 붙박이 오른팔인 거 아니까, 국회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원이 형 얘기를 대체로 믿는 게 당연하죠.”

우태원이 침대 시트에 몸을 앉혔다. 차유신이 아득바득 따졌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결국 됐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죠.”

우태원이 나긋하게 답했다. 차유신은 그만 반쯤 넋이 나가버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박게 해줬잖아, 씨발. 대외적으로 나 묶어놔서 뭐 하게.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핸드폰 없는 다리 병신 됐다고 여기서 나갈 방도 하나 못 찾겠어? 나 나가자마자 넌 바로 죽는 거야. 너 이거 감당할 수 있어?”

“당연히 감당 못 할지 몰라요. 그래서 생각 끝에 선배를 여기에 가둬둘 명분 하나를 세팅해뒀죠.”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TV 앞으로 걸어간 그가 물었다.

“선배 아직 이거 못 보셨죠.”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뭐를. 애니메이션?”

차유신이 비꼬았다. 우태원은 그저 웃었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우태원이 뭘 보여주든, 차유신은 그와 상관없이 하루 이틀 안으로 여길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다리가 불완전해 물리적으로는 어렵겠지만, 우태원 쪽 사람 한둘을 매수할 정도의 머리가 차유신에게 없지 않았다.

“한번 봐요. 제 선물이에요.”

우태원이 버튼을 눌렀다. 뉴스 화면이 사라지고, 점멸했던 화면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느 차창 너머로 비치는 폭우였다. 탐탁지 않게 보던 차유신의 눈초리가 움칠했다. 더듬더듬 속눈썹이 달싹이고, 곧 입이 다물렸다. 꽉 막힌 입 안에서 욕설이 굴러갔다.

씨발.

빗속에 멈춰 있는 한 청년이 보인다. 차유신은 그를 잘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안다. 그 이목구비는 자신 그 자체였으니.

생동감 있는 사진처럼 새겨진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그런 그를 마주 본 차창 안에서 뭔가가 터진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번뜩이는 불꽃이 생생해, 누가 봐도 폭발이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불꽃이 일고, 내부에 연기가 차오르지만 청년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죽어가는 차 안을 주시할 뿐이다. 미술관에 설치한 유명 예술품을 살피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화면 안이 자욱해진다. 연기와 불꽃에 사무쳐 삭아간다.

한참이나 보고만 있던 그가 입매를 끌어올린다. 웃고 있다. 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있다. ‘웃음’이라는 언어에 아주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현현한 미소를 두고 또 한 번의 안개가 인다. 청년의 낯이 미지근해진다. 그 애매모호한 얼굴을 빗줄기가 잠시 가린다. 툭, 툭, 툭. 장막 같던 빗살은 곧 걷히고, 청년은 개운한 표정이 된다.

“죽은 차재후와 류민경의 차에는 블랙박스가 두 개 있었어요. 앞에 하나, 뒤에 하나. 앞에 있는 건 폭발 때문에 망가졌지만, 뒤에 있는 건 무사했죠.”

TV를 끈 우태원이 뇌까렸다. 차유신의 눈빛이 냉해졌다. 우태원은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저는 경찰이 오기 전에 그걸 확보했어요. 그땐 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그냥, 그 안에 담긴 걸 간직하고 싶었거든요. 몇 번이고 보고 싶었어요. 제 양부모가 죽는 꼴을 보면서도 발 하나 움직이지 않고 흡족하게 웃기만 하던.”

우태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선배를.”

차유신의 목울대가 쿨렁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태원을 쏘아봤다. 팔짱을 낀 그가 눈을 깔았다.

“선배가 하는 거 봐서, 이 영상은 언론사에 보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솔직히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선배를 여기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알죠? 국회의원에게 있어 범죄보다 큰 게 이미지 손상인 거. 이거 공개되면, 선배는 끝나요.”

“너 대체 목적이 뭐야.”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우태원은 그저 발을 뻗었다. 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상한 한 마디가 귀를 울렸다.

“일단은 선배를 국감에 내보내지 않는 게 목적이에요. 국감장에 석일태 회장 출석 요구했죠? 행안위에서 석 회장에 그런 요구할 이유는 하나죠. 경찰과의 유착에 따른 역운회 봐주기 의혹. 다만 선배의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아요. 국감은 한 마디로 이용당한 거예요. 그 자리에서 석일태 회장과 관련해 논란이 될 만한 건 전부 까발린 다음, 석 회장에 대한 본격적인 사냥에 들어갈 속셈이었던 거겠죠.”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

차유신이 실소했다. 우태원은 고개를 저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석일태 회장은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그런 이유로 저에게 선배를 어떻게든 저지하라 했고, 그래서 저는 따르기로 했지만. 제가 선배를 여기에 묶어두려는 건 사실 그 이유가 아니에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어온 그가 차유신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나아간 손이 차유신의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지극히 상냥한 음성이 건네졌다.

“저는 선배가 이만 저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차유신의 어깨가 곤두섰다. 우태원이 읊조렸다.

“신진화당 최준필 선배하고 상의를 했어요. 선배가 쉴 수 있는 기간으로 최대 두 달을 얘기하더라고요. 국감 때 쉬었던 영감이 연말에도 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여기서 저하고 잘 지내봐요. 선배가 원하는 건 전부 해줄게요. 선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줄 생각이에요.”

곧 어조가 나른해졌다.

“선배를 위해 준비한 제 목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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