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프락치들
21.
-일명 ‘역현T시티 로비게이트 사태’를 수사 중인 검찰이 손진호 서울시장과 김재성 대국민당 의원을 금품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손 시장과 김 의원은 “역현T시티를 민영화하고, 자신과 사돈 관계에 있는 태류건설을 역현T시티의 최종 인수자로 선정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석일태 SDB그룹 회장으로부터 각 5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신진화당에서 해당 게이트 연루를 강력하게 주장 중인 김후준 의원과 우태원 의원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했다고 검찰은 밝혔습니다. 신인대 신진화당 대표는 “평소 SDB그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김 의원과 우 의원이 해당 게이트를 실질적으로 설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검찰은 보다 면밀하게 두 사람을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정진원 선배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담뱃갑을 뒤적이던 신인대가 물었다. 차유신은 천연덕스레 되물었다.
“뭐가요.”
“대체 일이 있었기에 너를 안 본다고 하는 거야? 졸지에 셋이서 볼 수 없는 상황이 돼, 내가 오며 가며 일을 두 번 하게 됐잖아.”
담배를 문 신인대가 큼, 헛기침을 했다.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낸 차유신이 신인대의 담배 끝에다 불을 붙여줬다. 연기를 뿜은 신인대가 혀를 내둘렀다.
“너 똑똑하고 잘난 것 알아. 그래도 당의 대선배를 무시하고 다니는 게 어디에 있어. 정 선배가 화가 단단히 났어.”
“무시한 적 없습니다.”
“선배를 화나게 만들고 마냥 있는 게 무시하는 거다. 이놈아.”
일침을 가한 신인대가 재차 담배 연기를 흘렸다. 차유신은 묵묵하게 눈을 굴렸다. 의원실 벽에 걸린 TV 화면은 검찰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오는 우태원을 비추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 밑에 빨간 헤드라인이 드리웠다.
「우태원 “석일태 회장과 친분 있는 것 사실…로비게이트는 모르는 일”」
“중앙지검장을 그렇게 닦달했는데, 아무래도 김후준하고 우태원은 이번에 끊어내기 어려울 것 같다.”
신인대가 이마를 짚었다. 차유신은 그저 신인대를 마주 봤다.
“혐의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혐의가 없단다. 석 회장으로부터 뭔가 받은 게 있어야 작업을 할 텐데, 둘 다에게서 그 증거를 일절 찾지 못한 모양이야. 우태원이 과거 석 회장 밑에서 아들처럼 클 때 받은 재산이 좀 되는 모양이던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이 문제와 엮는 건 무리가 있다 하더라고.”
“석일태 회장은요.”
“뇌물을 공여한 사실 자체가 인정은 되겠지만, 정상참작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 석 회장이 국내에서 가장 큰 로펌을 섭외해 ‘강요성 뇌물’ 프레임을 짜고 있어. 한 마디로 서울시장과 김재성의 협박과 강요에 의해 금품을 줬다는 거야. 이게 재판부에서 인정되면, 석 회장은 풀려나.”
신인대가 쯧, 혀를 찼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끝이 손가락질을 하듯 차유신을 가리켰다.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에 그치긴 했지만, 어쨌거나 고생했어. 대선 1년 3개월 앞두고 이런 이슈를 세팅한 것 자체가 큰 성과야. 안 그래도 얇은 대국민당 청년 지지층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대로 무너질 거라는 분석이 우세해. 무엇보다 VIP인 박현래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정권 지지율에도 타격을 입었어. 여러모로 신진화당이 기선제압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지.”
“저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신인대가 갸웃했다.
“그게 무슨 얘기야.”
“김후준과 우태원은 이번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자기 사람이었던 손진호 서울시장과 김재성 의원을 대상으로 일명 ‘꼬리 자르기’를 행했습니다. 금품수수 혐의가 아주 명확한 두 사람을 앞세운 후, 실제 게이트 설계자인 자신들은 교묘히 빠져나간 거죠.”
“그래서.”
“지금 대국민당 주류 라인은 김후준과 우태원이 장악한 상태고, 상당수 여당 의원이 그들을 중심으로 결집해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의의는 김후준과 우태원이 자기 사람을 어떤 식으로 잘라내는지를 대국민당 사람들에게 명명백백하게 노출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야 상황이 그러하면 꼬리를 자를 수도 있고, 제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도 있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요.”
“이번 게이트가 대국민당의 결집력을 약화시키는 기폭제가 될 거라는 얘기야?”
신인대가 수긍하듯 물었다. 주억거린 차유신이 답했다.
“이번 게이트는 절반의 성공이 아닙니다.”
넘어간 시선이 TV 화면에 걸렸다. 이번에 비친 건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김후준이었다. 잠시 바뀐 화면이 중앙지검 앞에서 ‘비리의원 김후준’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몇몇 이들을 담았다. 차유신이 건조하게 말을 맺었다.
“이 게이트가 대국민당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야기할 겁니다.”
*
“잘 봐요, 형. 이거 아주 기가 막힌 기술이야.”
모니터 안에는 10여 개의 CCTV 화면이 떠 있었다. 성윤일은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나타난 건 꽤 낯이 익은 어느 건물의 입구였다. 번듯한 문을 열고 닫으며 다양한 남자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모니터에 지속적으로 새 메시지가 떴다.
17:39:22 임경수(역운회) 퇴장
17:39:48 김현우(역운회) 입장
17:39:49 이일태(역운회) 입장
17:40:02 신원미상(34세, 남성) 입장
17:41:08 박지원(역운회 외) 퇴장
“이거 다 AI로 스캔한 거야?”
“네. 형이 역운회 건물에다 설치해둔 CCTV에 실시간 인식 시스템 붙인 거예요. 이제 저 건물 안은 모조리 이 시스템 안에서 통제된다고 보시면 돼요.”
“DB는 얼마나 쌓였어.”
“역운회 소속은 654명 쌓였고, 건물 안에서 근무하는 일반인은 123명이요.”
“일반인은 필요 없어. 어쨌든, 이제 이 시스템만 있으면 어떤 영상을 갖다줘도 역운회 소속은 바로바로 파악이 된다는 거잖아.”
“바로 그거죠.”
성윤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차유신이 굽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이내 성윤일의 등을 가볍게 치며 지시했다.
“이 시스템 한동안 돌리고 있어. DB 정교화도 시킬 겸. 혹여나 이 안에서 이상 상황 발생하면 연락 주고.”
“당연하죠. 관련 센서도 포함돼있어요. 싸움이 발생하거나 석일태 회장과 같은 특정 인물이 입장하면, 저한테 알림이 와요.”
성윤일이 흡족히 대꾸했다. 끄덕인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그대로 걸어가려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DB에 우태원도 있어?”
성윤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긴 해요. ‘역운회 외’로 분류돼있지만.”
“우태원도 역운회에 포함시켜서 관리해. 그 새끼 관련한 이상 상황 보고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차유신이 손가락질을 했다. 성윤일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어어…. 네.”
*
T시티 방문을 마치고 행안위 저녁 자리에 참석했다. 대국민당에서 터진 로비게이트 사태 영향으로 여당 의원의 참석률이 저조했고, 거의 야당 의원끼리 단합하는 자리가 됐다. 2차까지 마친 후 녹초가 된 차유신을 문지찬이 부축하며 뒷좌석에 태웠다. 대기하고 있던 권헌이 빠르게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여의도에서 차유신의 집이 있는 역현구 사도동까지 40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서울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동네라 평소 같으면 1시간 40분까지도 걸리는 곳이다. 한밤이라 시간이 적게 걸렸다.
어둠 속에서 눈만 감고 있기를 한참, 돌연 안정적으로 정차하는 느낌이 찾아들었다. 도착했다는 걸 알았지만 차유신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누적된 피로와 취기가 섞여 완전한 가수면 상태였다. 눈을 뜨려면 뜰 수도 있지만, 차유신은 감고 있는 쪽을 택했다. 모처럼 찾아온 단잠의 기회를 최대한 누리고 싶었다.
“의원님.”
부르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차유신은 반응을 포기한 채 차창에 기댄 머리를 늘어뜨렸다. 더 쉬고 싶었다.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아주 잠시만 더.
문득 스륵, 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차유신의 넥타이가 미미하게 비벼졌다. 옷가지와 옷가지가 스치는 소리. 이내 얼굴을 적시는 훈기. 그리고.
청년 특유의 청량하며 신선한 냄새가 났다. 권헌의 냄새.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의 권헌이 주춤했다. 순식간에 잠을 잃은 낯으로, 차유신이 손을 올렸다. 제 입술을 가볍게 손등으로 훔쳤다. 조금 젖어있었다. 물기에서 나는 건 자신의 냄새가 아니었다. 차유신의 눈이 점점 매서워졌다. 권헌이 죄인처럼 수그렸다.
“나와.”
벌컥 문을 연 차유신이 바닥을 디뎠다. 눈을 질끈 감고 난 권헌이 뒷좌석까지 넘어왔던 몸을 빼, 운전석 문을 열고 나섰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날카로웠다. 서벅서벅 발을 옮긴 권헌이 차를 휘 돌아 차유신의 앞에 섰다. 우뚝 선 남자의 실루엣을 향해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제대로 서.”
“네. 의원님.”
권헌이 기계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동시에 뻗어나간 구둣발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음이 두 사이의 사이를 갈랐다. 턱을 불끈대며 비틀거린 권헌이 신속하게 몸을 바로 했다. 제법 아플 법도 한데, 다리 쪽으로는 손도 가져가지 않았다.
“너 죽고 싶어?”
성난 외침이 단지를 울렸다. 권헌이 부리나케 답했다.
“잘못했습니다.”
“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그르렁댄 차유신이 고개를 반쯤 틀었다. 곧 퉤, 하며 침을 뱉고는 한 번 더 입을 훔쳤다. 아랫입술이 소름 끼칠 정도로 간질거렸다. 입술을 깨문 차유신이 권헌을 쏘아봤다. 권헌은 정자세로 차유신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차유신의 이가 갈렸다.
어디 겁도 없이 모시는 의원을 성추행해.
권헌의 눈이 절망적으로 깔렸다. 인적 하나 없는 평지 위에서 싸늘한 바람이 그들을 휘감았다. 차유신의 입 안으로 색색거리는 호흡이 삼켜졌다.
이유를 물어볼까 싶은 생각을 했다. 궁금해서 키스를 해본 거냐, 그런 걸 물은 뒤 수긍하는 권헌을 보고 그냥 이 상황을 묻어버릴까 싶었다. 달싹이던 입이 끝내 다물렸다.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섬세하게 흔들리는 권헌의 동공에서 괴로움이 비쳤다.
차유신은 답을 안다. 이건 절대로 궁금해서 한 게 아니다.
“내일부로 행정으로 빠져. 이건 제안이 아니라 지시야.”
뚜벅뚜벅 걸어간 뒤 권헌의 넥타이를 챘다. 권헌이 소스라치며 등줄기를 세웠다. 목을 조를 듯 넥타이를 쥐어짠 차유신이 경고했다.
“앞으로 수행은 윤재희나 김운열 시킬 테니, 넌 이제 가능한 한 내 눈에 안 보는 데서 근무해.”
권헌의 어깨가 공률했다.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느릿한 고갯짓을 했다. 씁쓸한 한 마디가 차유신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넥타이를 쥔 손이 풀렸다. 휙 몸을 튼 차유신이 분연히 나아갔다. 로비 입구에 다다라 유리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선 뒤 한참을 걷다 뒤를 돌아봤다. 어둑한 바깥에서 구십 도 각도로 몸을 굽은 권헌이 보였다.
*
“32표.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여당 안에서는 맥시멈 41표. 이 정도로는 본회의 통과가 불투명해. 재적 국회의원 중 절반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하는데, 1야당인 신진화당에서 전부 찬성을 한다 해도 2야당인 대한의당이 친(親) 김후준 성향을 띄고 있다 보니 그쪽에서 무더기로 ‘부’를 택할 가능성이 있어. 이런 식이면 본회의 통과가 어렵다는 얘기야.”
딱. 최도현이 들고 있던 만년필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룸 안이 숙연해졌다. 민아영이 번쩍 손을 들었다. 우태원과 더불어 단 둘뿐인 국회 안의 20대 의원이자, 회기동 모임의 막내였다.
“이번에 꼬리 잘린 김재성 선배의 후배들을 이쪽으로 끌고 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은 김 선배를 자른 김후준 선배와 우태원 선배를 탐탁지 않아 할 텐데….”
“일단 그쪽도 명목상으론 김후준 라인이야. 괜히 들쑤셨다 역풍을 맞을 수 있어.”
최도현이 경고했다. 민아영의 풀이 죽었다. 내내 듣고만 있던 차유신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대국민당 내부적인 분위기는 어때요.”
“분열 조짐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알아챈 김후준 선배 쪽에서 바로 발 묶기에 나섰어. 다음 주에 김후준 라인 전원이 경기도에 있는 골프 리조트에서 단합 대회를 열 거야. 말이 단합대회지, 이탈 조짐이 있는 본인 라인 의원을 공개 처형하는 자리야. 김후준 선배는 상황 판단이 빠를 뿐 아니라 조직을 이끌고 유지하는 방식이 아주 과감해. 문제는 국회 안에 있는 영감들 상당수가 이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거야.”
한숨 쉰 최도현이 말을 이었다.
“김 선배가 우태원을 굳이 제 오른팔에 둔 것도 결국 라인 유지 때문이야. 우태원이 있으면 분위기를 잡기 쉽거든. 나이는 어리지만 우태원은 배후에 조직폭력배를 두고 있는데다가 대다수 대국민당 의원의 약점을 꿴 인물이야. 중진들 중에서도 우태원은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아.”
“아주 개판이네요.”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딱히 부정하지 않은 최도현이 중얼거렸다.
“어. 내 당이긴 하지만 아주 좆같을 정도로 개판이지.”
룸 안이 또 조용해졌다. 턱을 괸 차유신이 화두를 틀었다.
“이재하 선배는 요즘 뭐합니까.”
“우리 원내대표 이재하 선배?”
“네.”
“그 양반이야 뭐, 골프 치느라 바쁘지. 솔직히 그 사람은 정말로 속을 알 수가 없어. 예전에는 여의도 주름잡는 호랑이 소리도 들었던 양반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 할 일만 딱 하고, 대체로 바깥만 나돌고 있으니. 일단 그 사람도 김후준 선배 라인이긴 하지. 다음 주 단합대회는 안 가는 걸로 알지만.”
“그래도 김 선배가 봐주나 보네요.”
“김 선배가 좀 버거워하는 걸로 알아. 같은 시기에 국회에 입성했지만, 입성 십 년차까지는 이재하 선배가 김 선배보다 훨씬 더 잘 나갔잖아. 애초에 커리어가 비교가 안 돼. 김 선배는 그냥 영화배우 출신이고, 이 선배는 대한의당 전신까지 해체시킨 실력 있는 검찰 출신이니.”
“그렇긴 하죠.”
혼잣말을 한 차유신이 테이블을 어루만졌다. 이내 룸 안에 있는 10여 명의 회기동 모임 멤버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일단 SDB 로비게이트 사태와 겹쳐 해당 안건이 무난히 정무위에서 통과가 됐으니, 오늘은 그 자체에 의의를 두는 걸로 합시다. 본회의 통과 문제는 저도 머리 좀 더 굴려본 다음 다시 얘기하죠.”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민아영이 황급히 차유신을 붙들었다.
“저기…. 차 선배.”
“네. 얘기해요.”
보지도 않은 차유신이 테이블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챙기며 답했다. 민아영이 손사래를 쳤다.
“저한테 존댓말 안 하셔도 돼요. 제가 한참 후배인데.”
“얘기해.”
바로 말이 짧아졌다. 망설이던 민아영이 물었다.
“차 선배가 신진화당의 프락치인 거죠? 굳이 회기동 모임 자리까지 찾아와서 조언해주시고….”
민아영이 눈을 깜빡였다. 찌푸린 차유신이 최도현을 봤다. 큼, 소리를 낸 최도현이 민아영을 다독였다.
“아영아. 우리 쪽이 프락치야.”
민아영이 놀라서 답했다.
“아, 네.”
*
“권헌은 왜 갑자기 내근으로 뺐어?”
핸들을 움직이던 진무원이 물었다. 조수석 차창에 머리를 댄 차유신이 답했다.
“그냥, 좀 쉬라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도무지 네 속을 모르겠다. 다짜고짜 권헌 자르자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복직시키더니. 이제는 행정으로 빼지를 않나. 덕분에 졸지에 내가 네 수행역할을 하고 있잖아. 나도 바빠 죽겠는데, 밑에 애들은 다 손이 안 빈다 해서.”
“그래서 나 싫어?”
차유신이 은근히 진무원의 팔뚝을 잡았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은 진무원이 탄식했다.
“싫고 좋고가 어디에 있어. 씨발…. 하루 이틀이냐. 이 사이코패스 새끼야.”
고요해진 차창 너머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 실루엣이 비쳤다. 가만히 응시하던 차유신의 동공이 커졌다. 급히 문을 열고 나선 차유신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형은 여기서 잠깐 대기하고 있어.”
“무슨 일인데.”
물어오는 진무원을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차유신이 여자의 앞에 섰다. 막 꽁초를 떨군 조신희가 생긋 웃었다.
“퇴근이 늦네? 차 의원.”
“연락도 안 하고 갑자기 집까지 찾아오시고….”
“연락했다 위치 추적 당할까 봐. 지금 내 주변이 완전히 살얼음판이야.”
조신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른 침을 삼킨 차유신이 로비를 가리켰다.
“올라가시죠. 차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차 마실 시간 없어. 비행기 시간이 세 시간도 안 남았거든.”
손목시계를 본 조신희가 뇌까렸다. 끄덕인 차유신이 일단 아파트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뒤, 천장 모퉁이에 달린 CCTV를 올려다보며 주머니 안의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빨갛게 빛나는 렌즈를 조준해 라이터를 던졌다. 쨍그랑. 렌즈가 박살 났다.
“그럼 여기까지만 들어오시죠. 바람이 찹니다.”
다시 문을 연 차유신이 말했다. 조신희가 구둣발을 또각거리며 문틈으로 몸을 들였다. 조신희가 들어오는 걸 확인한 차유신이 손을 놓았다. 바람 소리를 삼켜가며 유리문이 닫혔다.
“어디로 가시게요.”
고적한 로비 안에서 차유신이 물었다. 하이힐 앞코를 까딱거린 조신희가 답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아. 석일태 회장이 단단히 화가 났어. 지 아들 뺏기고, 나를 가만히 둘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딸 호주 소재지를 나만 알고 있다는 거야. 일단 우리 딸은 안전하다는 얘기지.”
“가려는 곳이 호주입니까.”
“어. 호주로 넘어가서 딸하고 둘이 좀 있으려고. 몇 년이 될지는 나도 모르고.”
“회사는요.”
“오전에 긴급 이사회 열었어. 이전부터 점찍어둔 경영기획 전무를 CEO에 올릴 거야. 나도 이제 좀 지쳐. 계산해보니 태류건설 회장을 12년이나 해 먹었더라고. 딱히 능력도 없는 주제에. 그나마 운이 좋아 실적 자체는 꾸준하게 호조세였지만.”
“세상에 운이 좋다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류건설이 성장한 건, 회장님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차유신이 또박또박 말했다. 조신희가 과장되게 웃었다.
“우리 차 의원은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키득거린 조신희가 파우치를 열어 손을 집어넣었다. 빠져나온 건 곱게 접힌 쪽지였다. 그대로 차유신의 손에 얹어준 조신희가 설명했다.
“얼마 전에 요청한 이재하 대국민당 원내대표 핫라인. 핫라인이라고 해봐야 나하고 둘이 내통하는 용도야. 이 의원에게 얘기해놨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그 번호로 연락하면, 차 의원인 줄 알라고.”
“두 분이서 사이가 아주 각별했나 봅니다.”
“어. 각별했지. 둘이 짜고서 작업한 정재계 인사만 열 명이 넘어가니까.”
조신희가 시선을 다른 곳에 뒀다. 곧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말고.”
차유신이 빠르게 답했다.
“압니다.”
“뭘 알아? 사실 이재하 의원이 나 좀 좋아해.”
조신희가 깔깔거렸다. 차유신은 따라서 웃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이재하가 삼 년 전 아내와 사별하긴 했는데.
웃음을 거둔 조신희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곧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 진짜 가봐야겠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
“밖에 제 보좌관이 있는데, 모셔다드리라 할까요? 운전 실력이 아주 뛰어나거든요.”
“아. 괜찮아. 데려다줄 사람 있어.”
조신희가 바깥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신속하게 달려온 남자가 유리문 앞에 섰다. 매천회 곽인하였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차유신에게 그가 꾸벅했다.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턱은 괜찮아? 우태원에게 맞았다고 들었는데.”
차유신이 물었다. 곽인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야죠. 뭐.”
이어 조신희를 본 그가 재촉했다.
“가시죠. 회장님.”
“어. 신세 좀 질게.”
조신희가 느긋하게 나섰다. 차유신도 따라서 나왔다. 앞서 걸어간 곽인하가 세단 운전석에 올라탄 뒤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으로 간 조신희가 문을 열고 몸을 들였다. 물끄러미 보던 차유신이 문득 운을 뗐다.
“회장님.”
막 문을 닫으려던 조신희가 고개를 내밀었다. 서슴거린 차유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회장님께 거짓말한 게 있습니다.”
조신희가 흥미롭다는 양 미소 지었다.
“뭔데?”
“따님 유산과 관련해…. 사실은.”
“그만.”
조신희가 지겹다는 양 말을 끊었다. 차유신이 멈칫했다. 조신희가 언성을 높였다.
“사람 바보로 알아? 차 의원. 산부인과 의사 만나갖고 죽일 기세로 몰아붙이면서 진작 파악했어.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해? 현주가 유산하지 않았어도 석재경은 제거됐을 텐데.”
조신희가 혀를 찼다.
“우리 딸한테 손대고, 무사하길 바랐어?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나 조신희야. 내 심기 거스른 놈은 가만히 안 둔다는 게 내 철칙이고.”
조신희가 입꼬리를 올렸다. 멍하니 주시하던 차유신이 입을 다셨다.
“알겠습니다.”
“알면 됐어.”
조신희가 문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차유신이 정중하게 제안했다.
“저도 같이 탈까요? 출국 길 배웅이라도 할 겸.”
“필요 없어. 바쁘신 몸한테 뭘 바라. 나중에 호주나 한번 놀러 와. 술 사줄게.”
조신희가 고개를 까딱했다. 차유신은 그만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뒷좌석 문이 닫혔다. 안정적으로 후진한 세단이 단지 입구 쪽으로 차체를 틀었다. 곧 주욱 미끄러지는 차를 보며 차유신이 허리를 짚었다.
어떻게든 한 관문을 마무리 지었다. 불완전한 완결이지만 특별한 피해는 없어 다행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정도면 개가 되는 것도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불현듯 커다란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차유신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대형 트럭이 끼익,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반쯤 구겨져 담벼락에 처박힌 세단이 뻘건 불기둥을 쏘아 올리며 폭발했다. 차유신이 커다랗게 외쳤다.
“조 회장님!”
막 내디뎌진 발걸음이 바로 멎었다. 뒤에서 들이닥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차유신의 뒤통수를 채고는 다짜고짜 내리꽂았다. 엎어진 차유신이 색색거리며 얼굴을 돌렸다. 커져 가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머리를 덮친 커다란 자루에 시야가 껌껌해졌다. 곧 우악스러운 손길이 목을 졸라왔다. 컥, 소리를 낸 차유신의 눈이 뒤집혔다. 청각조차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
촤악!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몸이 자지러졌다. 머리를 덮고 있던 자루가 쑥 빠져나갔다. 눈이 가물가물하게 뜨였다. 내내 가마득하던 시야가 갑자기 환해졌다.
“튀었다.”
담담한 중년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마를 구긴 석일태 회장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다닥 뛰어간 남자가 석일태의 앞에서 몸을 구부렸다. 이내 구두에 묻은 물기를 세심하게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뚝, 뚝, 뚝.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추장스러웠다. 손을 들어 닦고자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양손이 등으로 넘어간 채 결박돼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몽롱한 눈을 열심히 굴려 가며 주변을 살폈다. 새하얀 실내. 한구석에는 칼이며, 삽, 톱 같은 게 수십여 개씩 널브러져 있다. 석일태는 한 가운에 놓인 의자에 다시 앉는 중이고, 벽 쪽에는 십여 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뒷짐을 진 채 서 있다.
SDB 빌딩 안인가. 혹은 역운회 건물. 차유신의 뇌리가 골똘해졌다. 어느 쪽이 됐든 이 공간이 아주 좆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절대로 평범한 사무실 따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작업하기 위한 공간이며, 그 대상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구석구석 더께처럼 남아있는 핏자국이 그를 증명한다.
“차 의원 오랜만이야. 응?”
다리를 꼰 석일태가 넉살 좋게 웃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차유신이 천천히 눈을 치떴다. 석일태가 비아냥거렸다.
“못 본 새 얼굴이 아주 좋아졌어.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조신희 회장 어떻게 됐습니까.”
무시한 차유신이 물었다. 석일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심드렁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차 자체가 아예 날아가 버렸거든. 전부 다 타버려서 재가 됐으니, 조신희가 어떻게 됐는지 알 게 뭐야.”
석일태가 시시덕거렸다. 차유신이 덜컥 앞발을 내밀었다. 분연히 일어나려는 차유신의 곁으로 두어 명의 남자가 몰려왔다. 훅 날아온 발에 배가 걷어차였다. 어금니를 문 차유신이 털썩 주저앉았다. 석일태가 목을 젖혔다.
“시작은 조신희 그년이 했지. 어디 겁도 없이 남의 자식새끼 머리를 날려? 아주 제대로 조져버릴 요량으로 조신희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정작 그년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라고. 그 와중에 호주로 튄다는 얘기가 들려오기에, 혹여나 출국 전 차 의원 얼굴이나 보고 가지 않을까 싶어 차 의원 동선 파악 좀 해봤지. 다행히 우리 태원이가 차 의원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뒀데? 결과적으로 그 덕을 잘 봤어. 차 의원 집 앞에서 둘이 만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마침 근처에 우리가 작업용으로 쓰는 트럭이 있어 바로 보낸 거야.”
석일태가 씩 웃었다.
“고마워. 차 의원.”
차유신이 숨이 거칠어졌다. 방금 들은 이야기 속에서 깨달은 믿고 싶지 않은 진실에, 머리가 요동을 쳤다.
이런 씨발.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조신희가 내 아들 머리를 날렸다면, 차 의원은 SDB를 날리려 했잖아.”
차유신을 힐금한 그가 턱을 괴었다.
“내가 사실 서울대 출신을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싸가지들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들더라고. 그래서 가능한 한 엮일 여지를 안 만들어. 차 의원하고도 사실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문제는 우리가 결국 여기서 또 만났다는 거겠지.”
석일태가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 발을 옮긴 그가 차유신의 앞에 섰다. 허리를 기운 뒤, 차유신의 턱을 잡아챘다. 찡그린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똑바로 눈을 맞춘 석일태가 갸웃거렸다.
“그것참 희한한 일이야. 나는 엮이지 않겠다 다짐한 놈들하고는 정말로 엮인 적이 없거든. 그런데 차 의원하고는 왜 자꾸 이렇게 되나 몰라. 우리가 전생에서 찐하게 떡이라도 쳤나.”
“이거 놓고 얘기하시죠.”
차유신이 경고했다. 석일태는 오히려 더 견고하게 손아귀를 조여 왔다. 단단한 그의 엄지가 위로 미끄러졌다. 이내 미동하는 눈 밑을 질근질근 비벼댔다. 석일태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의 눈깔이 낯익어서 그런가.”
흠칫한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석일태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내가 25년 전에 아주 예뻐했던 방석집 마담이 있어. 그년이 참 요물이야. 그냥 입 다물고 마주만 보고 있어도 남자를 그렇게 홀려. 야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눈이지. 그년한테 꼬인 역운회 놈이 스무 명을 훌쩍 넘어갈 정도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 차 의원 눈깔이 그년하고 아주 똑 닮았네. 죽일 기세로 올려다보는 꼬라지 보니 알겠어. 거참 신기해. 응?”
석일태가 좀 더 몸을 낮췄다. 차유신과 그의 얼굴이 손 한 뼘 거리만큼이나 가까워졌다. 가만히 차유신을 관찰하던 석일태가 입매를 꼬았다.
“이 재수 없는 눈깔을 아주 파버려야 우리가 다시 엮일 일이 없으려나.”
석일태의 다른 손이 제 주머니로 들어갔다. 안을 더듬는 그의 뒤편에서 한 남자가 소리쳤다.
“회장님.”
“어. 얘기해.”
보지도 않은 석일태가 답했다. 남자가 신속하게 보고했다.
“건물 안에 태원이 형님 들어왔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등을 보인 남자가 핸드폰을 통해 뭐라고 얘기를 했다. 긴 숨을 뱉은 석일태가 재차 주머니를 뒤졌다. 곧 잭나이프 하나를 꺼내 날을 세웠다. 번쩍이는 표면에 차유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내가 25년 동안 후회한 게 하나 있어. 그때 그년 눈깔은 들어내고 담가버렸어야 하는데. 그 생각을 못 하는 바람에 역현호에 담글 때까지 나 죽일 듯이 째려보는 걸 그대로 봐야 했다니까? 가끔 꿈을 꾸는데, 그년이 그 눈깔로 나를 그렇게나 노려봐. 재수 털리게.”
날카로운 칼끝이 차유신의 눈망울을 겨눴다. 석일태가 읊조렸다.
“대신 차 의원 눈깔이라도 들어내야겠어. 혹시 알아? 이걸로 그 개 같은 악몽을 다시는 안 꾸게 될지.”
석일태의 낯이 흡족해졌다. 꽂을 곳을 찾듯 눈앞에서 칼끝이 빙글거렸다. 부릅뜬 채 주시하던 차유신이 대뜸 머리를 끌어올렸다. 단숨에 석일태의 손등을 물고는 콱, 소리 나게 이를 박았다. 석일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크흡…. 씨발!”
쨍그랑. 떨어진 잭나이프가 바닥을 굴렸다. 새빨갛게 물든 손등이 훅 빠져나갔다. 손을 턴 석일태가 차유신을 쏘아봤다. 빤히 마주 본 차유신이 물고 있던 살점을 퉤, 뱉었다. 날 선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냥 그 여자 눈이 오줌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고 해. 이 등신 새끼야.”
석일태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활짝 입을 연 그가 대꾸했다.
“그래. 그년 눈깔이 좀 무섭긴 하더라고. 차 의원.”
다가온 남자가 떨어진 잭나이프를 주웠다. 건네받은 석일태가 다시 칼끝을 차유신의 눈 밑에 뒀다. 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러니까 차 의원이 대신 고생 좀 하자고. 그럴 짓 했잖아. 어?”
칼끝이 슬금슬금 피부를 파고들었다. 바로 터진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차유신은 여전히 석일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낼 테면 파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을 가져가든, 자신이 열 배로 되돌려줄 테니.
불현듯 문이 거세게 걷어 채였다. 줄줄이 들어오는 남자들이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중간 중간 눈에 띄는 건 우태원의 측근인 서재길 실장과 권문직 실장이었다. 석일태가 고함을 쳤다.
“여기에 없다고 하라고 했지!”
서재길과 권문직이 차례로 등을 굽었다. 서재길이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태원이 형님 속이기는 좀 그래서요.”
마지막으로 들어선 우태원이 뚜벅뚜벅 구둣발을 옮겼다. 석일태의 앞에 선 그가 곁눈질로 차유신을 봤다. 한쪽 볼에 피 칠갑을 한 꼴을 확인하고는, 덜컥 석일태의 손목을 챘다. 차유신의 얼굴에서 잭나이프가 멀어졌다. 석일태가 언성을 높였다.
“우태원! 지금 어딜 막아서고….”
푹,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석일태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를 그대로 제 어깨에 찔러 넣은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높낮이 없는 음성이 사위를 울렸다.
“저하고 한 약속, 지금 무시하시는 겁니까.”
석일태의 턱이 부들거렸다. 우태원이 걸친 검은색 재킷이 검붉게 젖어갔다. 곧 하얀 셔츠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조신희 회장 소재지 알려주는 대가로, 차유신 의원에게는 손대지 않기로 약조하셨잖습니까.”
“지금 나 훈계하는 거야?”
석일태가 눈을 부라렸다. 우태원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약조한 사항을 지킬 건지만 얘기해주십시오. 지금부터 삼십 초 드리겠습니다.”
우태원의 어깨에서 쑥 날이 빠져나갔다. 석일태의 손과 잭나이프를 한꺼번에 붙든 그의 손이 제 복부로 내려갔다. 윗배에다 지그시 칼끝을 꽂아 넣고는, 힘 있게 뇌까렸다.
“물론 제가 필요 없으시다면, 이 이상 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
석일태가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짙은 숨을 몰아쉰 그가 잭나이프 붙든 손을 뺐다. 튀어 오른 잭나이프가 저 구석까지 날아갔다. 몸을 튼 석일태가 지시했다.
“차유신 끌어내.”
부리나케 달려온 두 남자가 차유신의 몸을 양옆에서 잡았다. 이어서 다가온 권문직과 서재길이 두 사람을 제치고는 대신 차유신을 부축했다. 갑작스럽게 전개된 상황을 억지로 머리에 욱여넣던 차유신의 입에서 돌연 기침이 나왔다. 쿨럭인 차유신이 목을 꺼떡거렸다. 저도 모르는 새 무지근해진 몸 때문에 발걸음이 무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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