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뜩였다. 조신희는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카메라 프레임은 주로 그녀의 상체를 담고 있고, 전신이 비친 건 단상으로 올라가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인데 그 구두가 꽤나 파격적인 인상을 줬다.
“구두까지 계산해 신은 건가?”
신진화당 사무실에서 지켜보던 정진원이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신인대가 답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니까요. 차유신은 그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계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신고 싶어서 신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런 건 상관없다. 그 어떤 색상의 구두였어도, 조신희의 발에 있었다면 모두가 주목했을 거다.
말하고, 입고, 걸어 다니는 것조차 충분한 이슈거리로 만드는 여자였다.
“태류건설 회장 조신희입니다. 우선 참석해주신 기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 자리를 만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끝내 마련하게 된 것은, 한때 태류건설에서 애정을 갖고 인큐베이팅하던 역현T시티의 몰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박또박한 발성은 아나운서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신진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 차유신은 테이블을 두드려가며 TV 화면을 주시했다. 멘트는 전부 차유신이 짜줬다. 그걸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조신희의 역할이다. 그리고, 지금 조신희는 아주 순조롭게 물꼬를 트고 있었다.
“우선 파일 하나를 공개하겠습니다. SDB그룹에 T시티를 넘기기 전, 석일태 회장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조신희 쪽 조명이 살짝 어두워졌다. 기자회견장이 고요해진 가운데, 거만한 중년 남자 음성이 안을 메웠다.
-기존 인수가의 30% 정도로만 하자고. 차유신이가 손 떼고 나서 T시티 가치 무섭게 떨어진 거, 조 회장도 알잖아.
누가 들어도 석일태의 목소리였다. 조신희가 바로 받아쳤다.
-30은 너무 세다.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나요?
-조 회장. 이럴 거야? 지금 조 회장 딸내미가 누구 며느리로 와있어. 어? 현주 내 며느리야. 좋게 얘기할 때 좋게 해결을 하자고. 진짜 왜 이래?
-석 회장님. 석 회장님이야말로 진짜 왜 이러는데?
-내가 뭐 터무니없는 딜을 걸었어? 일단 제시가로 T시티 줘봐. 우리가 잘 굴려갖고, 수익 나오는 족족 조 회장한테 돌려줄 테니까.
-차유신 의원이 손 떼고 나서 T시티 가치 무섭게 떨어졌다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뭘 굴린다는 거예요.
-T시티를 꼭 벤처로만 굴려야 해? 수익 잘 나오는 제조기업 많아. 차유신이 그 새끼가 한참을 잘못 생각했지. 벤처는 무슨 벤처야. 대한민국에서 돈 놓고 돈 먹기에는 제조업만 한 게 없다는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내가 T시티 아주 확 바꿔놓을 테니까 조 회장은 믿고 우리한테 넘기기나 해.
-애초에 벤처용으로 조성한 단지를 어떻게 제조기업으로 굴려요. 서울시가 가만히 있겠어?
-나 참, 조 회장이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네.
석일태가 느물거렸다.
-내가 대국민당하고 얘기 다 끝내놨어. 서울시에서 일단 가져오기만 하면, T시티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정부에서 터치할 일 전혀 없을 거야.
음성이 끝났다. 기자회견장이 점점 웅성거렸다. 이거 센데? 여당까지 훅 가는 것 아냐? 좀처럼 소란이 그치지 않는 회견장 안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조신희가 턱짓을 했다.
“네. 말씀하세요.”
“질문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요청드려 죄송합니다.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기자님.”
“방금 전의 녹취파일로 상황은 대충 파악했습니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 회장님께서 당시 인수 건이 T시티를 망칠 수 있다 판단했다면, 마지막까지 버티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SDB그룹에 T시티를 내준 것이….”
“저는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조신희의 톤이 엄숙해졌다. 회견장이 또 한 번 조용해졌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제 딸은 SDB그룹의 며느리로 가 있습니다. 딸이 언제라도 그쪽 집안에서 해를 입을지 모르는 입장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당연히 모든 판단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T시티의 전 소유주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제 입장도 있었습니다. 이 점,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조신희가 가벼운 묵례를 했다. 이어 몸을 바로 하고, 기자단에게 손짓을 했다.
“그럼 추가 발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나눠드리는 보도자료 문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르르 나아간 남자들이 기자들에게 문서를 배포했다. 카메라를 똑바로 본 조신희가 입을 뗐다.
“지금부터 역현T시티 민영화를 둘러싼 SDB그룹과 대국민당간의 로비게이트를 고발하려 합니다. 석일태 회장은 과거 서울시 소유였던 T시티를 민영화하고,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태류건설에 T시티의 인수 우선권을 주는 대가로 대국민당에 상당한 액수의 로비자금을 건넸습니다. SDB그룹이 조직폭력배를 배후에 둔 회사라는 점 때문에 직접 인수에 브레이크가 걸릴 수 있으니, 태류건설을 중간다리로 활용한 겁니다. 지금 배포한 자료에 관련 내용이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회견장이 커다랗게 들썩였다. 신진화당 사무실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적해졌다. 문지찬이 커다랗게 박수를 쳤다.
“이야. 야당에서도 못한 걸 조신희 회장이 해버리네.”
신인대가 언짢게 문지찬을 흘겨봤다. 곧 차유신을 일별하며 물었다.
“차유신이. 너 저거 어디까지 메이드해 준 거야?”
살짝 시선을 비낀 차유신이 테이블을 짚었다. 단출한 대꾸가 나왔다.
“그냥 뭐…. 조금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훗날 구설수에 오를 소지가 있다. 뭐든지 적당히 하는 게 좋았다.
흘러간 시선이 다시 TV 화면에 걸렸다. 쉼 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틈에서 의연하게 고개를 든 조신희가 보였다. 차유신은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키맨이 조신희라서.
키맨을 잘못 선택했다면, 이 작업은 높은 확률로 실패했다.
조신희가 그간 습관적으로 확보해둔 녹취파일이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믿을 사람은 절대 없다는 소신 아래 조신희는 모든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녹취해왔다. 차유신과의 대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차유신은 수많은 석일태의 녹취파일 중 가장 얘깃거리가 되는 것을 골랐다. 이것을 풀며 기자회견을 시작하면, 주목도는 명명백백하게 올라갈 것이라 확신했다. 예측은 들어맞았다. 끊임없이 술렁이는 기자회견장이 그를 방증한다. 이 이슈 메이킹은 성공했다.
이걸로 T시티는 돌려받는 거다.
“대표님. 조신희 회장 기자회견 주요 방송사 순간 시청률 전부 20% 돌파했습니다. 현재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0위 안이 전부 조신희 기자회견 관련입니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보좌진이 가쁘게 보고했다. 끄덕인 신인대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당장 신진화당 입장문 배포해.”
“알겠습니다.”
탁. 도로 문이 닫혔다. 차유신은 화면 밑에서 붉게 빛나는 헤드라인을 응시했다. 하나 같이 야당이 좋아할 만한 문구들이었다.
「조신희, “T시티 민영화, SDB와 대국민당의 합작품”」
「석일태, T시티 민영화 조건으로 대국민당에 거액 로비」
「대국민당-SDB-서울시 ‘역대급 로비게이트’…김후준 “시간 달라”」
*
“대체 누가 SDB 같은 깡패기업과 손을 잡으라 했습니까! 어? 명색의 여당이! 이게 말이 돼?”
쾅. 사나운 마찰음이 복도까지 밀려들었다. 차유신은 심상하게 마저 발을 내디뎠다. 입구를 지키던 정장 차림의 보좌진들이 다급히 막아섰다.
“차 의원님.”
“어. 오 분만. 필히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보좌진의 어깨를 잡은 차유신이 빙글거렸다. 둘러싼 보좌진들이 주춤거렸다.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들의 틈을 비집고, 다짜고짜 문부터 열었다. 철컥 열리는 문 사이로 삼십여 명의 대국민당 주요 의원이 보였다.
“차유신!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대국민당 핵심의원 하나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예사롭게 발을 옮긴 차유신이 빈자리에 몸을 앉혔다. 가장 중앙에 있던 김후준의 눈이 흔들렸다. 차유신은 못 본 척 손을 뻗었다.
테이블 한가운데 갖가지 페이퍼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 차유신과 조신희가 함께 있는 사진을 담은 몇 장이 눈에 띄었다. 차유신은 심드렁하게 하나를 챘다. 이내 주욱 찢고는 빈정거렸다.
“고작 이런 걸로 되겠습니까. 제가 단지 조 회장에 마음이 있어 들이댄 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찢긴 종이를 팔랑거린 차유신이 얼굴을 들었다. 이어 대국민당 의원 하나하나를 일별하며 엄한 음성을 흘렸다.
“조신희 회장 2차 기자회견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할지, 말지는 선배들 행보에 따르려 합니다.”
차유신의 눈이 굴러갔다. 한 중진의원이 차유신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희미한 욕설이 들렸다.
이 개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
“2차 회견에서 역현T시티 민영화 로비게이트에 실질적으로 관여한 대국민당 선배들 성함이 고스란히 공개될 겁니다. 이 상황까지 가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몸 사리는 게 좋으실 겁니다.”
종이를 구겨 쥔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테이블 한가운데 하얀 뭉치를 대충 던져두고는, 고개를 가눴다. 적막 속에서 김후준이 물었다.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차유신이 단조롭게 응수했다.
“네. 선배께 기회 드리려고, 굳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최소한의 선배 명예는 지켜드릴까 해서요.”
김후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주억거리는 그의 옆에서 묵묵하게 앉아있는 우태원이 보였다. 차유신을 주시하는 그의 낯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감흥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차유신은 조금 편안해졌다.
너무도 우태원 같은 우태원이다.
“차유신 끌어내!”
돌연 김후준이 입구를 향해 버럭 했다. 바로 문이 열리더니, 김후준 보좌진 서너 명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막 차유신의 어깨를 잡아채는 보좌진의 곁으로 익숙한 남자가 다가왔다. 우악스레 보좌진의 팔을 꺾고는 쿵, 소리 나게 머리를 테이블에 내리꽂았다. 억. 신음한 보좌진이 전율했다. 고개 숙인 남자가 차유신에게 속삭였다.
“이만 자리 정리하시죠. 의원님.”
힐긋한 차유신이 답했다.
“어. 권 비서.”
늘어져 있던 몸이 바로 섰다. 그대로 허리를 틀려던 찰나, 귓가에 스치는 나긋한 한 마디가 있었다.
“권헌 비서는 자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조금씩 싸늘해져 가는 우태원의 낯이 보였다. 차유신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밭은 숨이 샜다. 심박 수가 미미하게 빨라졌다.
우태원이, 슬슬 우태원 같지 않아서. 이제야 긴장이 된다.
그것이 꽤 짜릿했다.
“어. 네 프락치가 그렇게 보고했지? 어제오늘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방해받고 싶지 않아 대외적으로 권 비서 잘랐어. 방금 부로 재채용했고.”
우태원이 미소 지었다.
“역시 연기 잘하시네요.”
“칭찬해줘서 고맙네. 보답으로 선물 하나 줄게. 회의 마치고 T시티 가봐. 네가 아주 깜짝 놀랄 만한 걸 준비해뒀거든.”
차유신이 어조가 상냥해졌다.
“물론 이번엔 연기가 아니야.”
우태원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네. 아주 기대가 되네요.”
*
“너를 신진화당에 영입한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신진화당의 그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할 거야.”
대국민당 당사에서 나오자마자 정진원의 호출을 받았다. 차유신의 공천면접을 본 신진화당 핵심 의원이었다. 부른 곳은 신진화당 당사가 아니었다. 여의도의 한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 겸 카페였다.
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룸 안에서 정진원은 홀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하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소문 난 인물인데, 오늘따라 희한하다면 희한했다. 심지어 대국민당을 한 방 먹인 의미 있는 날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맞은편에 앉은 차유신이 답했다. 조금은 웃으라고 한 말인데, 정진원은 웃지 않았다.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둔 그가 차유신을 가리켰다.
“내가 왜 그 공천면접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차유신 너를 택했다 생각해.”
“역현구을은 제가 아니면 가져올 수 없는 지역이니까요.”
“그래. 당시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진짜 이유가 될 수 없어. 내게 있어 공천면접은 신진화당이라는 조직 자체를 설계하는 일이야. 고작 지역구 하나 가져오는 사람 뽑는 자리가 아니었단 얘기지. 물론 신인대 앞에서라면 그 답이 통했을 거야. 신인대는 당 대표로서 본인 업적을 내세워야하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이 정당에서만 20년을 있었고, 앞으로의 20년을 또 만들어나가는 역할을 부여받았어. 4년짜리 지역구 하나 가져왔다고 머리 똑바로 들고 대꾸하지 말라는 소리야. 차유신.”
정진원의 손이 내려갔다. 움칠한 차유신이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곧 정진원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7개월 전 공천면접 볼 때, 너는 너를 물어뜯었던 개 얘기를 꺼냈어.”
정진원이 뇌까렸다. 잠시 생각하던 차유신이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나는 그 대답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한숨 쉰 정진원이 말을 이었다.
“매우 타당한 분노라고 생각했거든.”
차유신의 속눈썹이 달싹였다. 여전히 차유신을 외면한 채, 정진원의 입술이 일정하게 움직였다.
“여의도 바닥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분개해 일을 그르치거나 키우는 놈들이 너무나도 많아.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쥐어도 되지 않는 칼자루까지 쥐는, 일종의 병이지. 그에 반하면 너는 어때. 지극히 정상이잖아. 분노한 이유와 그래서 선택한 해결책, 앞으로의 계획이 너무나도 설득력 있고 이성적이잖아. 그래서 내가 너 뽑은 거야. 네가 그저 잘나서가 아니야.”
정진원이 숨을 골랐다. 테이블을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더듬거렸다. 문득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허대윤 청장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정진원의 손에 부딪힌 테이블이 거세게 흔들렸다. 차유신은 그저 입을 한번 오므렸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걸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다. 다만 하필 얘기를 들고 나온 게 정진원일 줄이야. 신인대였다면 말이라도 통했을 텐데.
차유신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어떻게든 가다듬은 언어가 흘러나왔다.
“T시티 운영사업자가 교체돼도, 역운회가 점령한 관리사무소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이건 조폭들 이권 다툼 영역이라서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역운회에 맞설 카드를 끌어오기로 했고, 그에 따라 조신희 회장의 태류건설 용역 전문 조직들과 매천회를 연합시킨 겁니다. 그 정도 규모면 역운회와 대등하게 붙을 정도는 된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할 경찰 도움을 소소하게….”
“네가 깡패야, 이 새끼야? 어디 빌릴 손이 없어서 그딴 놈들 손을 빌려!”
정진원이 와락 소리쳤다. 차유신이 차분하게 반박했다.
“선배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조직폭력배 문제는 제도권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때로는 진흙탕에서 같이 구르는 용기도 필요한 겁니다.”
“용기? 그게 용기야?”
정진원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지금 내 눈에는 네 분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냉소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너, 그것 말고도 허대윤 청장에게 몇 가지를 더 요청했지.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네가 메이드한 조신희 회장 기자회견으로 T시티는 확실하게 SDB 손에서 독립해. 운영사업자 교체되면, 관리사무소 문제는 자연히 그쪽에서 해결할 거고. 설령 해결 못 한다 해도 그건 네 영역이 아니야. 대체 어디까지 네 입맛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거야? 100%는 아니어도 네가 원하는 환경은 세팅됐잖아. 이번 게이트의 핵심에 있는 김후준, 우태원이야 바로 대국민당에서 내쳐지지는 않겠지만 일단 그쪽 라인도 이번 사건으로 충분히 타격을 입을 거고.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네 의중을….”
“SDB그룹과 역운회 둘 다 끝까지 무너지는 꼴을 제가 봐야겠습니다.”
부쩍 단호한 한 마디가 나왔다. 정진원의 표정이 확 굳었다.
“차유신.”
“처음엔 그냥 T시티 돌려받고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으로는 제 성에 차지 않습니다. 갈 데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정진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커다랗게 탄식한 정진원이 이마를 짚었다. 착잡한 혼잣말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나아간 정진원의 손이 위스키 잔을 쥐었다. 입가에 가져간 그가 반가량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내려오는 잔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알코올에 젖은 한 마디가 차유신의 귀를 울렸다.
“네 분노가 결국 너를 잡아먹을 거다.”
정진원의 눈에 핏발이 섰다.
“네가 감히 개 얘기를 해? 두 번 다시 그딴 얘기 꺼내지 마라. 내가 봤을 때는 너도 지금 다르지 않아.”
차유신은 느릿하게 주억거렸다. 고요해진 테이틀 위에서 차유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매천회 곽인하’라는 글자가 찍혀있었다. 재차 꾸벅한 차유신이 정중하게 말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다만 후회는 없습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정진원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
T시티 A동 복도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입주자 대표회의에 속해 있는 성윤일을 통해 금일 A동에 대한 긴급 보수공사 공지를 내려둔 상황이었다. 상당수가 오늘 이 건물에 출근하지 않았고, 출근했다 해도 소란 통에 겁을 먹고 나갔을 테니 복도가 텅 빈 것이 당연하긴 했다.
깨끗하고 하얀 계단을 올랐다. 평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만, 오늘은 그냥 계단을 쓰고 싶었다. 기이할 정도로 넓고 공허한 공간 안에서 차유신은 무중력 상태에 잠긴 것처럼 그저 올라가는 일만을 반복했다.
5층에 다다라서야 사람 소리가 들렸다. 정장 차림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분주하게 차유신의 곁을 오갔다. 차유신은 그들과 같은 무리인 듯 아닌 듯, 유유히 사이를 가로질렀다. 남자들은 차유신을 힐끔거리면서도 굳이 잡거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벽 곳곳에 빨간 페인트로 칠한 것처럼 붉은 자욱이 낭자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관리사무소’라고 적힌 문을 열자마자 한 남자가 차유신을 반겼다. 곽인하였다. 곽희서 회장의 조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삼촌의 조직에 몸을 담은 인물이다. 차유신과 동년배지만 습관적으로 찌푸리고 다니는 미간 탓에 외관상의 나이는 좀 더 들어 보였다. 그 인상과 대조될 정도로 성품 자체는 유연하며 무엇보다 머리가 좋았다. 차유신이 그를 매천회 차기 회장으로 점찍은 이유였다.
“역운회는.”
“전부 병원에 가거나 본사로 돌아갔습니다.”
곽인하가 저 구석을 가리켰다.
“한 명 빼고요.”
차유신은 같은 곳을 봤다. 매천회에 어깨가 잡혀 버둥거리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석재경 사장을 만나러 갔을 때, 그의 주변을 굳건하게 지키던 이들 중 하나였다. 흘러가던 남자의 시선이 차유신과 마주쳤다. 무표정하던 그가 갑자기 실실거렸다. 즐거워서 웃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뭘 쪼개, 새끼야. 여기에다 사무실들 비밀번호나 적어.”
남자의 옆에 있던 매천회 사람이 그의 머리를 세게 쳤다. 딱, 소리 나게 정수리를 맞았음에도 남자는 요치부동이었다. 보다 집요하게 차유신을 살피고 난 그가 의미심장한 호를 입매에 걸었다. 비아냥대는 혼잣말이 들렸다.
“지독한 새끼.”
차유신은 무덤덤하게 얼굴을 돌렸다.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형님. 일 층에 우태원 의원 들어왔습니다.”
한 남자가 바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소 위축된 곽인하가 되물었다.
“우태원 의원이?”
“네.”
“몇 명이나 달고 왔어.”
“그….”
머뭇거린 남자가 숨을 죽였다.
“혼자입니다.”
곽인하의 이마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상대적으로 예사로운 표정을 유지한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곽인하가 급히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우 의원 곧 이쪽으로 올라올 텐데.”
“오면, 잘 안내하고 ‘그거’ 전달해.”
“의원님은요.”
차유신의 눈길이 저편의 창문에 걸렸다. 화창한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노곤한 대답이 나왔다.
“나는 좀 쉬어야겠어.”
*
밀폐된 공간에서는 짙은 페인트 냄새가 났다. T시티를 완공한 직후 나던 냄새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차유신은 조금 안정이 됐다. T시티 본연의 냄새가 이렇게나 달콤한 줄 처음 알았다. 갓 완성된 T시티를 보던 2년여 전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내음이었다.
차유신은 스물아홉 살이었고, 많은 것을 사랑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지난한 염원을 이뤘고, 그 결과를 모두가 인정했다. T시티는 차유신이 살면서 새긴 가장 달콤한 족적이었다. 그 감미(甘味)에 도취되면 도취될수록 차유신의 씁쓸한 과거는 옅어져 갔다. 때로는 용서를 받듯, 때로는 용서를 구하듯.
3단계에 걸쳐 완성된 T시티를 보던 차유신에게 비서 우태원이 다가왔다. 그는 말했다.
‘좋으시겠습니다.’
차유신이 답했다.
‘어. 어쩌면 살면서 가장.’
우태원이 엷게 웃었다.
‘그럼 지금을 즐기셔야겠네요. 의원님 인생에서 이런 기쁨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차유신이 물었다.
‘우 비서는 어때.’
‘뭐가요.’
‘언제가 가장 기뻤어? 살면서.’
우태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꾹 다물린 입에서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사뭇 담담한 대답이 꺼내졌다.
‘있었지만, 너무도 오래돼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차유신은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며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우태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잠자코 응시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귀에 가져가며 입을 뗐다.
“어.”
-어디세요.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는 질문이었다. 고개를 넘긴 차유신이 벽에다 정수리를 기댔다. 권태로운 대꾸가 흘러나왔다.
“얘기해줘야 하나.”
-선물을 보냈으면, 편지도 같이 주셨어야죠.
“편지 보냈는데. 그거 건네준 매천회 곽인하하고 대화 못 나눴어?”
-그 편지라면 제가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턱이 나가서 병원에 실려 가는 중이죠.
차유신이 헛웃음을 쳤다. 우태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전 친필만 취급해요. 선배.
차유신의 눈동자가 올라갔다. 새하얗고 환한 천장을 망막에 새기며, 이기죽거렸다
“아직 T시티에 있긴 한데, 네가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담배 피우고 있나요?
“어떻게 알았어?”
벽을 타고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진 발 기척이 차유신이 머무는 밀실을 울렸다. 긴 연기를 뿜은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알잖아요. 내가 선배 냄새에 예민한 거.”
마지막 한 마디가 핸드폰과 근처에서 동시에 들렸다. 뚜벅뚜벅 다가온 우태원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열린 문 너머로 오십여 개의 CCTV가 보였다. 언젠가 우태원과 만났던 CCTV 관제소 안쪽 방에서, 그들은 또다시 만났다.
“훌륭하네.”
귀에서 핸드폰을 내린 차유신이 읊조렸다. 벽에다 등을 붙인 채 바닥에 걸터앉은 차유신을 우태원은 보고만 있었다. 짙은 속눈썹을 지닌 그의 눈꺼풀이 반쯤 가라앉았다.
“몸은 어디 갔죠.”
“몸?”
차유신이 모른 척 갸웃했다. 우태원의 눈꺼풀이 도로 들렸다. 서서히 드러나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석재경 사장 말입니다. 곽인하가 머리만 건네주던데요.”
차유신의 입에서 담배가 빠져나왔다. 우태원을 향해 훅, 연기를 뱉고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글쎄. 내가 그런 것까지 너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나.”
우태원의 입이 꽉 다물렸다. 무미건조하게 차유신을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차유신이 주억거렸다.
“어. 얘기해.”
“몸, 어디에 뒀어요.”
빤히 우태원을 보던 차유신의 입에서 갑자기 폭소가 터졌다. 만성적인 무표정에 어린 천연한 감정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지 않고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우태원은 꼭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곽인하에게 물어보지 그래? 아니면 조신희 회장이나. 조신희 회장이 지시했고, 곽인하가 속한 매천회 놈들이 처리했으니.”
차유신이 약을 올렸다. 고개를 저은 우태원이 답했다.
“나는 선배에게 듣고 싶어요.”
“나하고 상관없다니까. 왜 자꾸 나한테 이러나 모르겠네.”
우태원의 울대뼈가 쿨렁였다. 간신히 화를 삭이듯, 널따란 어깨가 시근덕거렸다. 대뜸 다가온 우태원의 손아귀가 차유신의 손목을 감았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옥죈 그가 조곤조곤 말했다.
“이거 다 선배가 설계한 거잖아.”
우태원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 선배에게 물어봐야죠.”
차유신이 빙글거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범죄자라도 되는 줄 알겠다.”
우태원이 도리질을 쳤다.
“당연히 선배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나직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최소한 범죄자는 사람이니까.”
차유신은 이번에는 입을 가려가며 웃었다. 폭주 직전의 쾌감이 성대를 간질거려, 틀어막지 않고서는 웃음소리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바닥에 죽 미끄러진 구둣발이 자리를 잡았다. 내내 늘어져 있던 등줄기에도 축이 섰다. 고개를 기운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새삼 인생 참 잘 살았구나 싶다.”
차유신의 몸이 일으켜졌다. 올라가는 차유신의 얼굴을 따라 우태원의 시선이 이동했다. 허리를 세운 차유신이 정장 바지와 재킷을 털며 말을 이었다.
“개새끼한테 이딴 칭찬을 다 듣고.”
“선배.”
“석재경 몸 갖고 싶어? 깡패 새끼들은 의리도 희한하지. 남의 대가리며 몸은 아무렇지 않게 날려대면서, 지 새끼들 사지는 온전히 챙기려 하니.”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차유신을 머금은 우태원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숨죽인 한 마디가 건네졌다.
“어서 얘기해줘요. 선배.”
“나한테 물어도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작업한 매천회 놈들이 갖고 어디로든 이동하는 중이야. 그와 관련한 디테일한 사항을 나는 몰라.”
차유신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까딱거렸다.
“그러니 나한테 애원해봐야….”
지잉.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이 미동했다. 액정에 곽인하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 밑으로 그가 보낸 메시지가 비쳤다.
-의원님. 석재경 시신은 조금 이따 얘기하신 대로 역현호에 담그려 하는데, 관련해서 뒤탈 없게 경찰 쪽에 잘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확인한 차유신이 쯧, 혀를 찼다. 같은 곳을 본 우태원의 턱이 불끈거렸다. 입을 다신 차유신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대체 왜 그렇게 석재경에게 집착하는 거야. 저번에 정훈석도 그렇고. 그게 깡패 새끼들 의리야?”
우태원은 그저 공허한 숨을 골랐다. 착 가라앉은 대답이 밀실을 메웠다.
“역현구의 역사를 위해 필요한 인물들이니까요.”
“무슨 역사.”
“선배가 그렇게나 경멸하는 역현구에도, 사람은 살았거든요.”
“역현구에는 사람이 살았던 적이 없는데.”
“괴물이 살았다고 얘기하고 싶은 거겠죠. 선배는. 뭐,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태원이 탁하게 뇌까렸다.
“선배를 포함해서 말이죠.”
차유신은 가볍게 저소했다. 또 화가 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분개했을 언어에, 이상할 정도로 평정심이 유지된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해, 차유신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졌다.
“석재경 몸 갖고 싶어?”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우태원은 말없이 목을 꿀꺽였다. 마주 본 차유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라도 해봐. 그냥 줄 순 없잖아.”
새까만 구둣발이 우태원의 정강이를 찼다.
“네 발로 기기라도 해서 네 의지를 보여. 그래야 내가 고민이라도 할 것 아니야.”
사위가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우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유신이 덩달아 피식거렸다.
“웃음이 나와?”
“네.”
지그시 눈매를 접은 우태원이 말했다.
“지금의 선배가 너무나도 선배다워서요.”
입을 다문 우태원이 몸을 내렸다. 바닥을 짚은 그가 양 무릎을 바닥에 디뎠다. 네 발로 선 그의 얼굴 밑으로 차유신이 구둣발을 밀어 넣었다. 이내 담담하게 지시했다.
“핥고.”
주춤했던 우태원이 곧 머리를 숙였다. 차유신의 구두에 얼굴을 묻은 채로 혀를 내밀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핥아 내려간 혀가 미끈거리는 흔적을 남겼다. 움직임이며 표정에는 절도가 있었지만, 차유신은 알아봤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그의 윗눈썹을.
“우태원.”
차유신이 불렀다. 우태원이 고개를 올렸다.
“네. 선배.”
차유신이 경고했다.
“내 얼굴 보면서 핥아야지. 씨발 새끼야.”
우태원의 입에서 밭은 숨이 터졌다. 기다랗고 깊은 눈매가 눈에 띄게 경련했다. 보이지 않는 답을 헤아리듯 차유신의 눈치를 보다, 우태원이 다시 턱을 내렸다. 이내 순종적인 맹견처럼 까만 구두를 핥았다.
정말로 섬세한 혀놀림이었다. 부드럽게 가죽을 찌르는 혀끝에 차유신의 발등이 흠칫거렸다. 우태원은 가죽을 널름거리는 내내 차유신을 주시했다. 차유신도 그런 우태원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한 낚싯줄처럼 당겨졌다.
얼마 남지 않은 윗부분을 핥기 위해 우태원이 혀를 옮겼을 때, 그의 윗눈썹이 새삼 움찔거리는 걸 차유신은 봤다. 단속적으로 떨리는 얼굴 근육에서 차유신은 저 조각 같은 피사체 안의 진짜 우태원을 발견한다. 그 우태원 안에 잠겨있는 감정을 읽었을 때, 목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그건 치욕감이었다.
“씨발….”
딱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만 욕설을 씹은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라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옷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발기한 성기 때문에, 차마 몸을 가누는 게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게나 발정한 것이 근래 수년 만에 처음이었다.
“개새끼가.”
차유신의 입술이 깨물렸다.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질 거면서, 감히 자신을 갖고 놀려 했다. 지독하게 괘씸한 일이다. 동시에 그 과실을 우태원에게 각인시킨 지금의 상황이 형용할 수 없는 쾌감으로 다가온다. 이 정도의 짜릿함을 느낀 적이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에 없었다.
완공된 T시티를 봤을 때조차 발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가장 완전한 오르가즘이었다. 자신의 밑에서 우태원이 네 발로 기고 있는 상황이, 그런 채로 개처럼 자신의 구두를 핥고 있는 상황이, 그 와중에 이따금씩 분기 어린 숨을 자신의 발목에 비벼대는 상황이. 차유신은 그 어떤 때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이 쾌감을 오롯하게 분출하고 싶어졌다.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찾아 꺼냈다. 통화목록 중 하나를 누른 후 귀에 가져갔다. 뚜르르, 하는 신호음이 들리자 우태원의 얼굴이 살짝 들렸다. 두어 번 신호가 간 끝에 상대방이 받았다.
-네. 의원님.
“지금 어디지?”
-역현호입니다. 인하 형님께서 의원님 사인 떨어지기 전까지는 시신에 손대지 말라 해서요.
“그래?”
차유신의 입꼬리가 비스듬해졌다. 나른한 곁눈질이 우태원을 향했다. 전에 없을 정도로 다정하게 우태원을 바라본 채, 차유신이 말했다.
“그럼 지금 담가.”
바로 통화가 끊겼다. 목에 핏대를 세운 우태원의 쾅, 소리 나게 주먹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유유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차유신이 구두를 거뒀다. 이내 대놓고 비꼬았다.
“고생했다는 얘기는 안 할게. 개가 개처럼 구는 게 뭐가 힘들어. 안 그래?”
하염없이 차유신을 올려다보던 우태원의 낯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차유신은 태연히 등을 보였다. 비로소 확인한 제 앞섶이 사정하기 직전처럼 딱딱했다. 차유신은 순순히 인정했다. 저 우태원의 무너진 꼴을 감상하는 일이, 그 어떤 포르노를 보는 것보다도 색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추락하는 자신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아주 악독한 쾌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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