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추락
19.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8월.]
툭, 툭, 툭. 차유신의 발꿈치에 부딪친 기브스가 연신 흔들렸다. 차유신은 심각하게 새하얀 기브스를 내려다봤다. 슬슬 풀어도 될 것 같은데, 의사는 계속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시간을 끌고 있다. 차유신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러고 다니는 것 자체가 볼품이 없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경찰대 특별법은 조율이 필요한 문제 같습니다. 신진화당에서는 좀 더 보완하는 방향으로….”
“이미 여당 쪽 답은 정해져 있는데 보완이 왜 나옵니까. 이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국민당 소속 행정안전위원장의 말에 신진화당 고참 의원이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다. 쯧, 혀를 찬 행안위원장이 넌지시 차유신을 봤다. 닦달하는 입 모양이 다가왔다.
네가 좀 어떻게 해봐라.
차유신은 역시 입 모양으로 답했다.
전 이제 여당이 아닌데요.
행안위원장이 못 당하겠다는 투로 이마를 짚었다. 벌떡 일어나는 신진화당 의원들을 필두로 행안위 위원들이 우르르 회의장을 나섰다. 차유신은 턱을 괸 채 밖으로 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살폈다. 지나가던 문지찬이 차유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안 나가고.”
“발 아파서요. 마지막에 나가려고요.”
“아직도 안 나았어?”
“거의 낫긴 했는데요. 기브스 풀려면 아직 시간이….”
“계속 하고 다녀. 여성 지지자들이 엄청 좋아하더라.”
“뭘 좋아합니까.”
“귀엽대. 보호 본능 든단다.”
낄낄거린 문지찬이 다리를 뻗었다. 차유신은 언짢은 숨을 삼켰다. 세상엔 상상 이상으로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텅 비다시피 한 회의장 입구에서 익숙한 머리통이 기웃거렸다.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바로 들어온 권헌이 입구에 둔 목발을 챙겼다.
“바로 역현구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어. 시간 없다.”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목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황급히 차유신을 안은 권헌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까요.”
“무슨 개소리야. 놔.”
차유신이 권헌의 팔을 쳤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권헌이 일단 목발부터 고쳐 쥐었다. 차유신의 허리를 감은 팔뚝은 그대로였다. 굳이 뿌리치기도 귀찮아 차유신은 잠자코 늘어졌다.
목발을 기다리면서 무심코 굴리던 눈에 입구 너머가 담겼다. 지나가던 유해겸이 대뜸 반가운 기색을 해보였다. 형님! 소리치는 꼴을 보며 차유신이 눈매를 찌푸렸다. 속도 모르며 좋아하던 유해겸이 뒤이어오던 우태원의 팔을 건드렸다. 이내 차유신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진짜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태원아. 권헌 저 새끼 충성심이 아주 그냥. 어? 유신 형님 업고 다녀, 저 새끼가. 한 달 내내.”
“유해겸. 쓸 데 없는 소리 좀.”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무표정으로 차유신과 권헌을 번갈아보던 우태원이 성큼 회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대국민당 의원이 우태원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어. 태원아. 이따 저녁, 자로초. 알지?”
“네. 선배님.”
뚜벅뚜벅 걸어온 우태원이 차유신과 권헌 앞에 섰다. 괜히 맥이 빠진 차유신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이내 탐탁지 않게 우태원을 쏘아봤다.
“또 뭐야.”
“언제 왔지.”
우태원의 시선이 돌아갔다. 대상은 차유신이 아니었다. 권헌이었다. 우뚝 선 권헌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국회에 온 시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난 5월입니다.”
“만족하고?”
“당연히 만족합니다.”
“더 만족할 만한 환경을 내가 제시해준다 해도?”
우태원이 팔짱을 꼈다. 다소 무게감이 실린 눈빛이 권헌을 훑었다.
“BH 경호실에서 신입 모집 중인데, 권 비서가 딱 스펙이 맞는 것 같아서. 학벌 좋고, 신체조건 훌륭하고, 똑똑하고. 의전 경력도 있고. 내가 말 한마디 하면 바로 그쪽에서 OK할 것 같은데 말이야.”
차유신의 눈초리가 흠칫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유해겸이 탄식했다. 그런 거 있으면 나를 주지.
권헌은 정자세로 우태원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잠시 입을 다신 그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망설임 없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차 의원님 밑이 좋습니다.”
우태원이 느긋하게 웃었다.
“차 선배 밑이 그렇게나 좋아?”
권헌이 또박또박 대꾸했다.
“네. 그 어떤 직장보다도, 지금 차 의원님 밑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붓하게 허리를 굽고 난 권헌이 다시 목발을 챙겼다. 차유신의 손에 쥐여 준 뒤, 허리를 안아 신중하게 일으켰다. 서서히 이동하던 우태원의 눈길이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읽었다. 차유신을 지탱한 팔뚝이 단단해질 때마다, 그의 이맛살이 조금씩 좁혀드는 게 보였다.
“겁나는 것도 없고….”
의미심장하게 뇌까린 우태원이 등을 보였다. 저벅저벅 걸어가던 그가 나직한 혼잣말을 남겼다.
“본인이 그렇게 좋다는데, 내가 감히 훼방 놓는 것도 주제넘은 처사겠지.”
권헌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입구에 선 우태원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질 좋은 재킷 원단을 타고 미끄러졌다. 잠시 권헌을 가리킨 그가 입을 뗐다.
“본인이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차유신의 눈이 찡그려졌다. 권헌이 동시에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 의원님.”
손을 주머니에 꽂은 우태원이 발을 내밀었다.
“멀쩡할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놓치는지 모르겠네.”
우태원의 구둣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잠시 얼어있던 권헌이 조심스럽게 차유신에게 물었다.
“의원님. 혹시 제가 우 의원님께 뭔가 실수했습니까.”
차유신은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전한 입 안에서 독언이 굴러갔다. 설마, 아니겠지.
애초에 권헌 정도는 우태원 입장에서 아무 것도 아닌데.
당연히 기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지역구 일정을 마친 후, 차유신은 바로 귀가했다. 집까지 옮겨다 준 권헌은 거실에서 뒷짐을 진 채 차유신이 편한 차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에게 감시라도 당하는 듯한 불편함에 시달리며 소파에 앉은 차유신이 이마를 감쌌다. 관자놀이가 괜히 지끈거렸다.
느슨해졌다. 확실히 뭔가가 늘어져 있다.
몸이 성치 않으니, 의식이며 의지까지 덩달아 지리멸렬하다. 분명히 자신은 차유신이 맞는데, 차유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심지어 진무원을 비롯한 의원실 보좌진들은 이런 루틴한 차유신을 반가이 여기는 눈치다. 권헌이야 애초에 차유신이 뭘 하든 다 좋다는 놈이니 예외라 쳐도.
소파 위에 올라간 손가락이 일정하게 두드려졌다. 옆에 있던 핸드폰이 징, 하며 회전했다. 힐긋한 액정에는 성윤일의 이름이 떠있었다. 바로 통화버튼을 누른 차유신이 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 윤일아.”
-형. 요즘 왜 이렇게 T시티 안 와요?
“엊그제도 갔는데.”
-대충 둘러보고 가셨잖아요. 저도 안 만나고. 할 얘기 많은데.
성윤일이 볼멘소리를 냈다. 멍하니 듣고만 있던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인데.”
-지난주에 역운회 관리사무소가 강제로 입주 스타트업 스무 곳 쫓아냈어요.
“뭐?”
차유신의 톤이 절로 높아졌다. 성윤일이 한탄했다.
-물리적 폭행도 없고, 뭣도 없으니까 쫓아냈다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엄연히 특정 입주기업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건 확실해요. 목격자도 널렸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모르겠어요. 일전에 매천회랑 한바탕하고 관리사무소 다시 잡은 후로 더 막 나가는 것 같아요. 비슷한 민원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렇다고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성윤일이 침울해졌다. 차유신이 시근덕거렸다. 힘이 실린 기브스가 바닥을 질근거렸다. 가까스로 호흡을 고른 차유신이 말했다.
“알았어. 일단 내가 이번 주 안에 T시티 한 번 갈게. 끊어.”
통화가 끊겼다. 권헌은 여전히 저편에서 차유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기브스를 내려다보던 차유신이 질문했다.
“이거 기브스 얼마 남았다고?”
“의사 말로는 이주일은 더….”
“좆 까라고 해.”
내려간 손이 덜컥 기브스를 잡았다. 앞뒤 가릴 새도 없이 테이프를 찢고는, 발을 감싼 붕대며 부목을 풀어 휙 던졌다. 비로소 가뿐해진 발로 바닥을 디딘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발목 밑이 꽤 무겁긴 했지만, 일단 몸을 지탱할 수는 있었다.
“이쪽으로 와 봐.”
차유신이 손을 까딱했다. 권헌이 바로 다가왔다. 허리를 짚은 차유신이 마른 침을 삼켰다. 텅 빈 제 다리를 일별하고, 다시 권헌을 본 뒤 입을 뗐다.
“너 왜 내 밑에 있다고 했지?”
“차 의원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권헌이 기계적으로 답을 꺼냈다. 차유신의 어조가 묵직해졌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해도?”
“네.”
권헌은 놀라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 사람을 죽인 게, 제 존경심을 죽이진 않을 테니까요.”
끄덕인 얼굴이 돌아갔다. 유리창 너머에서 어둠에 휩싸인 T시티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탐색하듯 주시하고 난 차유신이 권헌에게 곁눈질을 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것 전부 할 수 있어?”
권헌이 크게 주억거렸다. 절도 있는 대답이 거실을 메웠다.
“네. 존경하는 의원님.”
*
화면 속 정장 차림의 남자를 따라 빨간색 아이콘이 이동했다. 아이콘 위에는 남자의 간략한 신상명세와 함께 역운회 소속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한 사무실 앞에서 한참이나 우뚝 서 있는 남자의 근처로 두 명의 남자가 더 다가왔다. 아이콘은 그들 역시 역운회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남자 세 명이 감시라도 하듯 사무실 앞에 서 있기를 이십여 분, 안에서 겁먹은 남녀 직원들이 슬금슬금 나온다. 남자들의 눈치를 보며 이동한다. 그들의 위에도 아이콘이 떠 있다. 스타트업 ‘디백7’의 직원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이런 식으로 특정 사무실 앞에 한참이나 서 있거나, 안을 감시하듯 배회하면서 직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거예요. 당연히 직원들 입장에서는 근무할 맛이 안 나죠. 결과적으로 디백7은 지난주에 사무실 뺐어요. 그 안으로는 운도동 소재 제조업체가 들어가고요. 비슷한 피해사례가 열 개가 넘어요.”
“경찰은.”
“얘기했지만 소용없어요. 물리적으로 딱히 피해를 입힌 게 아니니까…. 무엇보다, 역현경찰서는 역운회하고 한 패거리나 마찬가지라는 것 아시잖아요. 신경 안 써요.”
성윤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끄러미 모니터를 보던 차유신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지 성윤일이 한 얘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유신은 성윤일이 보여준 화면 자체를 관찰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아이콘을 보고 있었다.
“이거, 저번에 네가 보여줬던 AI 얼굴인식 시스템이야?”
“그거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에요.”
“영상 소스는 어디에서 얻었어.”
“관리사무소 CCTV 해킹했어요.”
성윤일은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차유신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쳤다. 악, 하고 신음한 성윤일이 인상을 썼다.
“왜요? 저놈들이 먼저 시작한 건데.”
“너 그러다 진짜 감방 간다.”
“형만 얘기 안 하면 돼요. 이 프로그램 존재 아는 거, 아직은 형밖에 없으니까.”
“그래?”
차유신의 눈초리가 휘었다. 이번엔 성윤일 쪽이 주춤했다. 텅 빈 T시티 카페테리아를 둘러본 차유신이 다시 성윤일에게 시선을 뒀다.
“이 시스템에 저장된 역운회 DB가 얼마나 돼.”
“한 백 명이요. 관리사무소 오가는 사람들 데이터는 전부 집어넣었으니까.”
“얼굴 인식하는데 필요한 총 시간은.”
“평균 1초? 정지한 상태면 거의 0.1초 만에 스캔하고요. 흔들림이 있으면 3초에서 5초까지도 걸려요.”
“훌륭하네.”
차유신이 피식거렸다. 성윤일이 자못 불안한 표정을 해 보였다.
“뭐 생각하는 거예요. 형.”
“그 수준이면 역운회 전체 조직원 데이터는 엄청 쉽게 확보하겠다. 응?”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조직원들 얼굴 전부를 제가 어디서 따요.”
“다 방법이 있지.”
차유신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한 이름을 누른 뒤, 메시지 하나를 적어 보냈다.
-운도동에 있는 역운회 본사에다 CCTV 좀 설치해봐. 입구 쪽에.
답신은 10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네. 의원님.
*
태류건설 본사는 비싸기로 소문난 서울 강남 한복판의 40층짜리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 태류건설에서 직접 지은 건물로, 모양새는 태류건설 로고인 ‘T’자 마크를 모티브로 했다. 십자가를 연상케 한다며 조금은 흉물스럽다는 얘기를 듣는 건물이었다. 다만 위압감이 있는 건 확실했다.
“들어와요.”
‘회장 조신희’라는 명패가 달린 문 앞에서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명쾌한 여자 목소리를 들은 그가 문을 열어줬다. 성큼 안으로 들어선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신을 따라 들어온 남자가 문을 닫은 채 입구 쪽에서 손을 뒤로하고 섰다.
“잠깐만. 미안, 차 의원.”
차유신을 보지도 않고 손짓한 조신희가 팔짱을 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깔아둔 십여 켤레의 구두를 훑고 있었다. 막 박스에서 꺼낸 구두들은 하나같이 새것이었고, 누가 봐도 고가의 명품이었다.
분석하듯 구두를 보던 조신희가 또각또각 걸어 중간쯤으로 갔다. 깔끔한 라인을 지닌 보라색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은 그녀가 갸웃했다. 약간의 생각을 마치고는 그대로 빼 나머지 구두들에 차례차례 넣어봤다. 뾰족한 앞코를 지닌 하이힐이 탐탁지 않게 까딱거렸다.
“차 의원. 여자 구두 볼 줄 알아?”
대뜸 조신희가 물었다. 차유신은 심상하게 답했다.
“조금은요.”
“이거 어때?”
“용도가?”
“저녁에 이재하 의원 만나.”
“대국민당 원내대표요?”
“어.”
“그럼 저쪽 빨간색이 나을 겁니다.”
차유신이 가장 끝에 있는 빨간색 하이힐을 가리켰다. 조신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가장 낫니?”
“아니요.”
도리질을 한 차유신이 말을 이었다.
“이재하 선배는 빨간색에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그 색깔을 오래 보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조신희가 갑자기 깔깔거렸다. 파란색 하이힐에서 내려온 그녀가 맨발로 구두 무리의 끝 쪽을 향했다. 곧 붉은 가죽 안에 발을 집어넣고는, 입구에 있는 남자에게 지시했다.
“나머지는 다 치워.”
“알겠습니다.”
“저쪽 하얀색은 버리고. 그냥 꼴 보기 싫네.”
“네.”
부리나케 달려온 남자가 널브러진 구두들을 챙겼다. 만족스럽게 발을 가눈 조신희가 또각또각 나아가 소파에 앉았다. 차유신은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본다. 한 삼 년 전에 김후준 의원이 연 송년회 자리에서 보고 처음이지?”
“아마 그럴 겁니다.”
“잘 지냈어? 딱 보니 못 지낸 것 같은데.”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한 조신희가 앞에 있는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더니, 끄트머리를 커터로 자르고 불을 붙였다. 흡연자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한 담뱃잎 내음이 차유신의 코를 스몄다. 한 모금 깊게 빤 조신희가 고개를 젖혔다. 무료함에 사로잡힌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태류건설 회장이자 오너가 2세인 조신희는 끊임없이 정재계 구설수에 오르는 여자였다. 이슈거리는 충분히 많았다. 올해로 52세이지만 30대 후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려한 외모는 양념에 불과했다. 정재계가 주목한 건 그녀의 예측불가능성이었다.
태류건설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회사를 물려받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당시 매우 잘 나가던 톱 남자배우와 결혼했다. 이후 딸을 낳았고, 오 년 만에 이혼했다. 정확한 이혼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다 이혼을 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조신희는 “남의 부부관계를 왜 궁금해하세요”라는 희대를 명언을 남겼다. 조신희의 전 남편이 된 남자배우는 연예계에 복귀했지만, ‘한물간 스타’ 취급만 받다가 소리소문없이 은퇴했다.
조신희의 아버지인 조구영 회장은 스폰서 관계에 있는 여대생을 만나러 가다가 차에 치여 죽었고, 회사는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조신희가 물려받았다. 조신희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고, 회장으로 취임하던 날에는 웃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조구영의 사고사가 사실은 조신희의 짓이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조신희는 유포자 전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언젠가부터 그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정재계 인사들과는 꽤 자주 엮였다. 미혼은 물론이고 기혼자들과도 종종 스캔들이 났다. 논란이 터질 때마다 상대방 남성들은 꽤나 당황해하며 부인하기 바쁜데, 정작 조신희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며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곤 했다. 애초에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에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깡패 회사’로 암암리에 소문난 SDB그룹과 사돈지간을 맺은 것도 조신희의 이런 성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확인 한번 하십시오.”
주어 없이 말을 꺼낸 차유신이 서류 봉투를 건넸다. 받아든 조신희가 무표정으로 문서를 뺐다. 팔랑거리며 넘어가던 페이지가 중간쯤에서 도로 덮였다. 툭 서류를 던진 조신희가 시가를 물었다. 한 모금 길게 빤 뒤 나오는 질문이 노곤했다.
“이거 어디서 났니?”
“다 방법이 있죠.”
“차 의원이 원하는 게 뭐야.”
“SDB그룹 석일태 회장에게 협박당해 강제로 로비게이트에 연루됐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차유신의 어조가 진중해졌다. 조신희가 가만히 턱을 괴었다. 차유신은 또박또박 말을 덧붙였다.
“제 목적은 단순합니다. SDB그룹으로부터 T시티 운영권을 뺏고, T시티를 정상 궤도에 올리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SDB그룹과 태류건설, 서울시가 엮인 로비게이트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작업은 상당 부분 진행이 됐습니다. 관련 증거가 아주 충분하거든요. 증인들도 있고요.”
“그런데.”
“키맨이 하나 필요합니다. 언론의 주목을 휩쓸어 여당에서조차 함부로 이 문제를 커버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파급력 있는 인물이요. 저는 그 역할을 조 회장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물론 회장님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해당 게이트는 조 회장님과 석일태 회장의 합의하에 이뤄진 것이지만. 조 회장님을 오히려 피해자로 만드는 시나리오 몇 가지를 제가 갖고 있습니다. 조 회장님은 제 제안에 따라 기자회견만 하시면 됩니다. 이와 관련한 후폭풍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 얘기 하나 하려고 이런 것까지 챙겨 왔어? 내 마음 돌리려고.”
생글거린 조신희가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하얀 페이퍼 안에는 두 개의 장부를 비교한 사진과 설명 문구가 실려 있었다. 석일태 회장이 조신희 회장을 농락한 내용이었다.
SDB그룹은 태류건설로부터 헐값에 T시티를 인수하는 대신 운영수익의 일부를 매달 떼어주기로 합의했었다. 그런데 이후 SDB그룹의 장난질이 시작됐다. 장부 숫자를 지속적으로 바꿔치기해 실제 수익보다 적은 수익을 보고하고, 이에 따라 줄어든 액수를 납부해 온 것이다. 명백하게 조신희를 바보로 보는 행위였다.
“나 이거 알고 있었어. 꽤 전부터.”
조신희가 짧게 커트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차유신의 눈이 일그러졌다. 기다란 손톱이 페이퍼를 갉작거렸다.
“알고는 있었는데, 굳이 따지기 싫었어. 귀찮기도 하고, SDB그룹하고 틀어져서 좋을 게 없거든. 앞으로 같이 해나갈 프로젝트도 여럿….”
“프로젝트도 프로젝트지만, 무엇보다 조 회장님의 따님이 석일태 회장의 며느리이기 때문이겠죠.”
메마른 한 마디가 나왔다. 시가를 건 조신희의 손이 싸늘하게 내려왔다.
“우리 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올까, 차 의원. 응?”
조신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고 있지만, 누가 봐도 심기가 거슬린 표정이었다. 숨을 고른 차유신이 손을 옮겼다. 소파에 남아있던 두 번째 서류를 챙겼다.
“전 그저 따님이 걱정되어 한 얘기입니다.”
무서운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없는 조신희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걸 찾았다. 방금 전에.
“조 회장님의 따님인 현주 양은 스물세 살 때 석일태 회장의 외동아들이자 역운회 대표인 석재경과 결혼했죠. 현주 양이 먼저 강력하게 원해 맺어진 혼인 걸로 압니다. 그러다 결혼한 지 삼 년 만인 반년 전부터 홀로 호주로 떠나 별거 중이고요.”
“현주가 공기 좋은 곳에서 한동안 쉬고 싶다고 했어. 하도 임신이 안 되니, 그런 곳에서 쉬기라도 하면 좀 나아질 것 같다고.”
조신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서류를 쥔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은 후 조신희를 주시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차유신은 조신희의 두려움을 인질 삼아 그녀를 끌어들인다.
“현주 양은 임신이 안 된 게 아니라, 했는데 낳지 못한 겁니다. 그 원인이 된 석재경을 피해 호주로 도망친 거고요. 회장님도 내심 의심은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탕. 분연히 내려온 조신희의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냉하게 차유신을 쏘아보던 그녀가 다짜고짜 서류를 챘다. 첫 장을 확인한 그녀의 동공에 미세하게 떨렸다. 달싹이던 손에서 시가가 부러져갔다.
“석재경은 상습적으로 현주 양에게 폭행을 가했는데, 그게 현주 양의 임신 후에도 지속됐습니다. 이는 현주 양의 유산으로 이어졌지만, 본인의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 봐 차마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 드린 서류에 당시 현주 양이 방문한 산부인과 진료기록과 의사와의 상담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면, 가장 뒷장에 있는 담당의 명함으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차유신이 입을 다물었다. 색색거리며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조신희가 보였다. 페이지가 줄어들 때마다 그녀의 목에 핏대가 섰다. 마지막 장까지 확인하고 난 조신희가 찢어발길 듯 종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이내 거친 숨을 뱉으며 얼굴을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눈망울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분기에 젖어든 하이힐 굽이 콱 바닥을 찍었다. 타격과 함께 경련이 찾아온 듯, 하얀 발등 위에서 새파란 핏줄이 꿈틀거렸다. 조신희가 고통을 참듯 입술을 짓씹었다. 몸을 숙인 차유신이 그녀의 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쥐가 난 듯하니, 구두는 벗으시죠.”
막 조신희의 발목에 손가락이 스치자마자 팔 하나가 뒤로 꺾였다. 찌푸린 차유신이 돌아봤다. 내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차유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 어딜 건드리십니까.”
차유신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 그쪽.”
말을 마치자마자 올라간 손아귀가 남자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힘을 실은 팔뚝이 가차 없이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쾅. 졸지에 테이블 모서리에 이마를 처박은 남자가 허우적거리다 반쯤 무너졌다. 보고만 있던 조신희가 커다랗게 웃어댔다. 기다란 눈매가 흥겹게 휘었다.
“그만 웃으시죠. 저는 아주 삭신이 쑤십니다.”
한탄한 차유신이 재차 손을 내밀었다. 사실이긴 했다.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꽂을 때 온몸에다 힘을 싣는 통에, 아직 낫지도 않은 발등이 제법 욱신거렸다.
구두 두 짝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동안 조신희는 말없이 차유신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벗겨낸 구두들을 저편에 밀고 난 차유신이 허리를 폈다. 차유신을 올려다보던 조신희의 입매에 은은한 호가 걸렸다.
“나 사실 자지 달린 새끼들 잘 안 믿어. 차 의원.”
차유신이 담담하게 응수했다.
“참 곤란하네요. 다른 건 다 해드려도, 있는 걸 떼는 건 좀.”
“다른 새끼 거는?”
조신희의 미소가 짙어졌다. 차유신은 웃지도 않고 답했다.
“그건 뭐…. 생각 좀 해보고요.”
*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9월.]
“야, 의사봉 뺏어!”
“신진화당 신인대 의원 외 14인이 발의한 김후준 대국민당 의원 제명안은.”
곳곳에서 야당 의원들이 언성을 높였다. 들숨을 삼킨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들었다.
“가 88표, 부 154표, 기권 4표, 무효 11표로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커다란 아우성이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이게 말이 돼? 같은 국회의원을 폭행한 놈이야! 이걸 내버려 둬? 야, 대국민당!”
한 신진화당 의원의 고함에 바로 대국민당 의원 하나가 삿대질을 했다.
“회의장에서 몸싸움 벌이다 실수로 친 거고, 경찰에서도 무혐의라고 했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실수면 다야? 사람이 기절했다고!”
차유신의 옆에서 문지찬이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다는 듯 혀를 찬 그가 탄식했다.
“아. 씨발 시끄러워….”
문지찬을 힐긋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좀처럼 회의장을 나서지 않는 의원들을 둘러보다가 문지찬에게 물었다.
“안 나가십니까.”
“지금 나가게 생겼냐. 저기서 신인대 선배 칼춤 추는 거 안 보여?”
문지찬이 손가락질을 했다. 저 앞에서 김후준의 멱살을 잡는 신인대가 보였다. 차유신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 김후준이 소속된 외교통일위원회 회의에서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개정안 상정을 두고 여야가 몸싸움을 벌이던 중 김후준의 팔꿈치에 맞아 신진화당 의원 하나가 기절을 했다. 명백한 사고이긴 했다. 다만 신진화당에서는 ‘폭행의원을 좌시할 수 없다’며 바로 김후준 제명안을 긴급 상정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 부결이었다.
이렇게 될 걸 야당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여의도는 다양한 형태의 쇼맨십을 요구한다. 그래서 모두가 본다는 전제 아래 여러 연극을 한다. 김후준에게 맞은 신진화당 의원이 기절했다 주장하는 것도, 신진화당에서 발 빠르게 김후준 제명안을 올린 것도, 지금 신인대가 김후준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도.
그리고 차유신도 일단은 연극을 해야 하는 쪽이었다.
“저도 여기에 있긴 해야 하는데….”
“있어야지. 어디 가게?”
“급한 민원 일정이 있어서요. 먼저 좀 나가보겠습니다.”
꾸벅한 차유신이 발을 옮겼다. 지친 문지찬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직 본회의가 끝난 상황은 아닌지라 남아있는 의원들이 꽤 됐다. 인적이 띄엄띄엄한 복도를 차유신은 빠르게 나아갔다. 한참이나 걸어 바깥으로 나온 뒤, 건물을 돌아 뒤편으로 갔다. 벽에 기댄 채 서 있던 남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대국민당 최도현. 정무위 소속. 박신회 라인인 회기동 모임의 수장격 인물.
“오늘 아주 최고다. 기 빨려서 죽는 줄 알았어.”
키득거린 최도현이 차유신의 등을 쳤다. 차유신이 예사로이 질문했다.
“선배는 김 선배 제명안 ‘부’였죠.”
“아니? ‘가’였는데.”
최도현이 싱긋 웃었다. 차유신이 눈을 깜박였다.
“김후준 선배가 난리 치겠네요.”
“난리 나면 어때. 김후준 선배는 이미 회기동 모임 버린 지 오래인데.”
최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입을 다신 차유신이 머리를 쓸었다. 다소 무거운 한 마디가 나왔다.
“말씀드린 개정안은 어떻게 됐습니까.”
“얼추 완성됐어. 이달 안으로 정무위에 상정할 거야.”
“잘 될까요?”
“잡음은 있겠지만, 일단 통과는 될 거야. 본회의가 문제지. 너도 알다시피 본회의 안건은 김후준 선배가 이끄는 대국민당 주류 라인 뜻에 따라 가부가 좌지우지돼. 현재 가능한 ‘가’를 전부 따져도 현실적으로….”
“그 답은 제가 찾을게요.”
차유신이 침착하게 답했다. 최도현이 멈칫했다. 보다 눈꺼풀을 끌어올린 차유신이 최도현의 팔뚝을 잡았다.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회의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할 겁니다. 선배는 정무위 통과에만 신경 쓰세요.”
*
회의장에 돌아와 본회의 참석을 마저 치른 후 권헌과 의원회관을 향했다. 묵묵하게 걸어가는 그들 곁에서 국회의원이나 보좌진, 국회 직원, 기자들이 종종 지나쳐갔다. 하나같이 지친 낯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이번 본회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검찰개혁법을 두고 여야 논쟁이 길어지면서 본회의 산회가 올 들어 가장 늦었다.
“경찰청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권헌이 운을 뗐다. 차유신이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그래.”
“내일 정동 돌담길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권헌이 갑자기 뜸을 들였다. 차유신이 곁눈질을 했다.
“그리고, 또. 뭐.”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권헌의 걸음이 멎었다. 덩달아 멈춘 차유신의 옆얼굴에 희미한 담배 연기가 스쳤다.
“얘기해. 권 비서.”
“제 쪽에 미행이 붙어있습니다.”
언제나처럼 군기가 잡힌 한 마디였다. 차유신은 말없이 동공을 키웠다. 하루 종일 일별만 거듭하던 권헌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목덜미 쪽에 붉고 긴 생채기가 난 것도 이제야 알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널 위협했어?”
“그런 적은 없습니다.”
권헌이 한껏 다부지게 답했다. 차유신의 눈이 찡그려졌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난 건데.”
올라간 손이 권헌의 목을 덮었다. 제법 긴 상흔을 타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권헌이 곤란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피부 너머로 빨라져 가는 맥박이 느껴졌다.
“개인적인 사고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까스로 목을 가눈 권헌이 답했다.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권 비서.”
“이 이상의 질문을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가 있어?”
“의원님께서….”
권헌이 머무적거렸다. 어둑한 눈동자에 노란색 가로등 불이 걸렸다. 곧 점점 죽어갔다.
“저를 무능하다 생각할 것이 두렵습니다.”
권헌이 입을 다물었다. 차유신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풀린 눈으로 한 번 더 생채기를 확인한 차유신이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권헌의 어깨가 곤두섰다. 저편에서 밀려오는 담배 냄새가 진해졌다.
“그래.”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시선이 저편의 흡연 장소에 걸렸다. 긴 연기를 내뿜은 키 큰 남자가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굴러가는 눈동자가 선명히 비쳤다. 말없이 그 눈을 마주 본 차유신이 고갯짓을 했다.
“더는 안 물어보는 걸로 하지.”
권헌의 목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대로 흡연 장소로 향하는 차유신을 권헌이 다급히 불렀다.
“의원님.”
“넌 당장 의원실로 돌아가.”
뚜벅뚜벅 남자의 앞에 다다른 차유신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에 있는 담뱃갑을 찾으며, 보다 사납게 윽박질렀다.
“안 돌아가면, 내일부로 잘릴 줄 알아.”
권헌의 낯이 멍해졌다. 그저 쏘아보는 차유신과 그 맞은편에 있는 남자를 번갈아 본 그가 무겁게 꾸벅했다. 이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해진 저편을 일별한 차유신이 재차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뱃갑이 도통 잡히지를 않았다. 두고 왔나. 차유신이 입술을 질근거렸다.
“이거 피워요.”
차유신의 입술 틈으로 담배 한 대가 들어왔다. 차유신이 피우는 것과 동일한 제품이었다. 익숙한 향을 머금은 연기가 입 안을 채웠다. 차유신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반도 안 피웠거든요.”
우뚝 선 남자가 은은하게 말했다. 가만히 담배를 만지작거린 차유신의 눈길이 초점을 찾았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나한테 일부러 왔어요?”
“어.”
“잘됐네요. 나도 선배가 올 것 같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태원이 읊조렸다. 차유신이 딱딱하게 물었다.
“시간 있어? 우태원.”
우태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미소는 여전했다.
“무슨 일인데요? 선배.”
훅. 차유신의 입에서 긴 연기가 샜다.
“어디 가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하고 싶은데.”
우태원이 눈을 감았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부터 김후준 선배 호출이 있어서요.”
“그래서 시간 내기 어려워?”
“아주 어려운 건 아니고요.”
우태원의 눈동자가 느릿느릿 드러났다. 선명해져 가는 망막에 불완전한 달이 걸려있었다.
“나도 목 한번 만져주면 안 돼요?”
뜬금없이 물은 그가 상체를 기울였다. 차유신의 귓가에 입을 가져간 뒤, 속삭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선배 따라가려고요.”
차유신은 그저 또 한 번의 연기를 내뿜었다. 단조로운 질문이 나왔다.
“어떻게 만져줘.”
“아까 권 비서에게 해준 것처럼요.”
우태원의 눈매가 접혔다. 주머니에 꽂혀 있던 차유신의 다른 손이 올라갔다. 우태원의 목을 덮고는, 두툼한 가죽을 가볍게 긁었다. 우태원은 잔잔하게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인적이 드물어진 사위에서는 곤로함에 젖은 하루의 잔향이 났다.
몇 번인가 가죽을 매만지던 차유신이 조금씩 손톱을 세웠다. 그대로 우태원의 목에 꽂고는 차곡차곡 표피를 헤집어가며 끄트머리를 찔러 넣었다. 파고드는 손톱이 점점 척척했다. 노란 가로등 불 밑에서 붉게 익어가는 우태원의 목이 두드러졌다. 반쯤 눈을 감은 우태원이 나른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얼마나 더 만져줄까.”
우태원에게 얼굴을 들이민 차유신이 상냥하게 경고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차유신을 보던 우태원이 돌연 손을 뻗었다. 자신의 목을 찌르는 손톱을 거두고는, 부드럽게 손목을 감아왔다.
“여기까지만 하죠.”
“왜. 이 이상은 너도 곤란해?”
“네. 곤란해요.”
우태원의 미소가 사라졌다. 다른 손으로 축축한 목을 주무른 그가 뇌까렸다.
“이 이상하면, 서거든요.”
그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아니면 이대로 국회 야외에서 강간당할래요? 선배.”
물끄러미 보던 차유신이 그만 픽, 웃었다.
“괜찮네. 그걸로 너는 확실히 골로 갈 테니까.”
우태원이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선배도 골로 가겠죠.”
차유신의 낯이 싹 식었다. 저편에서 남자들 목소리가 왁자하게 들렸다. 아 씨발, 개 같은 본회의! 기자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차유신의 손을 손수 주머니에 넣어준 우태원이 턱짓을 했다.
“제 방으로 가요. 선배.”
*
우태원 의원실은 텅 비어있었다. 본회의가 끝나자마자 보좌진들은 전부 퇴근한 모양이었다. 휑한 사무실 안에서는 적당히 오래된 건물 특유의 콘크리트 냄새가 났다. 차유신의 의원실에서 나는 냄새와 동일한 것이었다.
“선배는 김후준 제명안 ‘가’였겠죠.”
전용 내실로 들어온 우태원이 진열장을 열며 물었다. 가장 위층에 개봉도 안 한 히비키 30년산이 있었다. 무거운 병을 꺼낸 그가 그 밑층에서 위스키 잔 두 개를 함께 챙겼다. 먼저 소파에 앉은 차유신이 머리를 짚었다.
“기억 안 나.”
“본인이 투표한 게 기억이 안 난다….”
“아무거나 했거든. 애초에 관심이 없고, 어차피 결과는 빤하니까.”
“김후준 선배에게 관심이 없어요?”
차유신의 맞은편에 앉은 우태원이 두 개의 잔을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능숙하게 오픈한 병이 잔 위로 올라갔다. 조르르, 소리와 함께 잔들이 차례차례 연갈색으로 물들었다.
“반가운 얘기네요.”
적당히 채워진 잔 위에서 병이 거둬졌다. 하나가 차유신의 앞으로 밀어졌다. 갓 자리를 잡은 잔 안에서 나이테를 닮은 섬세한 파동이 번졌다.
“뭐가 반가워?”
잔을 든 차유신이 물었다. 덩달아 잔을 쥔 우태원이 답했다.
“김후준 선배에게 이제는 관심이 없다는 거요.”
“만약 아직 관심이 있다면.”
우태원은 대답 대신 손을 끌어올렸다. 입가에 다다른 잔이 점점 기울었다. 벌컥거리는 굵은 울대뼈가 보였다. 단숨에 절반을 비운 우태원이 잔을 내려두며 뇌까렸다.
“저는 질투가 나겠죠.”
차유신의 한쪽 눈매가 탐탁지 않게 접혔다. 일단 입술 틈에 끼워 넣은 잔이 경사를 만들었다. 소리 없이 밀려드는 위스키에서는 쇳물에 숙성한 오크향이 났다. 길게 목구멍으로 넘긴 차유신이 읊조렸다.
“네 질투심은 정신병이야.”
우태원이 안여하게 답했다.
“알아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할 필요가 없죠.”
차유신이 눈빛에 날이 섰다.
“권헌한테 왜 그랬어.”
“정확히 뭐를 말씀하시는 거죠.”
우태원이 잔을 톡, 건드리며 또 물었다.
“미행한 거요, 아니면 폭행한 거요.”
“이젠 부정하는 성의조차 안 보이는구나.”
“선배 주변을 감시하는 건 제 의무니까요. 부정할 이유가 없죠.”
“나하고 비슷하네. 나는 네 주변 감시하는 게 의무인데. 이딴 허튼짓 할까 봐.”
올라간 차유신의 손가락이 자신의 넥타이에 감겼다. 파란색 천이 우태원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잡아당기는 걸 보며 우태원이 느긋하게 주억거렸다.
“영광이네요.”
“영광인 것 알면, 권헌은 내버려 둬. 걔가 뭘 알겠어. 그냥 내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야.”
“선배는 그 꼭두각시에게 좆 빠는 걸 시킨 적이 있죠.”
피식거린 우태원이 말을 덧붙였다.
“그게 실은 선배의 취향이었는지가 저는 종종 궁금해요.”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다소 헛헛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권헌한테 미행 붙이고, 폭행까지 가한 게 단지 그 이유야?”
황당함에 말꼬리까지 흐려졌다. 우태원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저도 정확히 어느 쪽인지 모르겠네요. 권헌을 통해 감시하고 싶었던 게 선배가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였는지, 선배와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였는지 ….”
우태원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다시금 차유신은 머금은 눈에는 채도가 없었다.
“어차피 정신병인데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차유신이 어금니가 으스러질 기세로 깨물렸다. 우태원은 그런 차유신의 반응을 즐기듯 미소만 지었다. 검은 환부를 닮은 그의 동공이 점점 깊어졌다. 차유신은 속으로 헐떡였다. 저 지긋지긋한 개새끼.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건, 차유신은 결국 저 개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간 많은 일들을 했다. 회유하고, 협박하고, 몸까지 섞었다. 그럼에도 달라진 건 없다. 결국 모든 원인은 하나로 귀결된다. 차유신이 사냥해야 하는 대상은 개지만, 정작 차유신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를 잡으려면 차유신 역시 개가 되는 게 가장 빠르다는 걸 알면서도.
불현듯 내실 너머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유신과 우태원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모든 것이 고요한 가운데 안정적으로 새겨지는 발소리가 차유신의 솜털을 세웠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는지, 상대방은 딱히 말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의원실의 어느 지점에 다다른 그가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조용히 앉아만 있던 차유신과 우태원 사이에서 문득 빛이 번뜩였다. 차유신의 핸드폰이었다. 본회의 내내 설정해둔 무음을 해제하지 않은 탓에 액정은 통화 알림화면을 띄우는 데 그쳤다. 그리고 함께 표기된 것은, 우태원 입장에서 아주 익숙할 숫자였다.
씨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은 묵묵하게 번쩍이는 숫자를 관찰하고만 있었다. 소파를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웅크려졌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이다. 이대로 우태원이 일어나 내실 문만 열면, 차유신이 심어둔 프락치가 여과 없이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이야 당장 인기척을 내 그를 떠나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러면 우태원 역시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일단 상대방이 의원회관에 남아있는 한, 우태원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불안해요?”
우태원이 낮게 물었다. 숨을 고른 차유신이 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불안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이어지는 언어가 물처럼 번졌다.
“나를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게 해봐요.”
차유신의 발꿈치가 꾹 지르밟혔다. 한참이나 우태원을 노려보다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서벅거리며 옮겨지는 발이 우태원을 향했다. 우태원은 자못 기대감 어린 낯으로 차유신을 감상했다.
“내 위로 대가리 내밀 생각하지 마.”
우태원의 어깨를 짚은 차유신이 뇌까렸다. 차례로 올라간 양 무릎이 우태원의 단단한 허벅지를 가뒀다. 손아귀에 꽉 힘을 주자, 우태원이 곤로하게 어깨를 풀었다. 빤히 올려다보던 그가 엷게 웃었다.
“생각보다 쉽게 맞춰주시네요.”
“난 내 사람은 무조건 챙기자는 주의거든. 네 보좌진을 보호할 의무가 지금은 나에게 있어.”
“그러면 나는요.”
우태원이 눈초리가 휘었다.
“나는 선배 사람이 아니에요?”
차유신이 단칼에 답했다.
“난 사람만 취급해.”
싸늘한 공기가 그들을 휘감았다. 내실 너머에서 달칵,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내 뚜벅거리며 입구 쪽을 향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흐르고, 입구에 다다른 그가 의원실 문을 닫았다. 탕. 한층 고적해진 사위 안에서 차유신은 속으로 되뇌었다.
최대한 멀리, 빠르게 달아나길.
도망은 길고 사냥은 짧은 법이다.
“계속 그러고만 있을 거예요?”
우태원이 물어왔다. 차유신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생각 중이야. 은근히 너하고 할 건 다 했더라고.”
“우리가 그렇게 많은 걸 했나요?”
“좆 빨아주고, 대주기까지 했으면 할 것 다 한 거지. 이외에 또 할 게 있어?”
“그럼 같은 걸 또 하면 되죠.”
우태원이 이죽거렸다.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싫어. 좆같은 걸 굳이 또 하는 취미는 없거든.”
“인풋도 없이 아웃풋을 얻을 셈이에요?”
“어차피 너는 내 자극에 적지 않은 내성이 생겼어. 이미 했던 짓거리 또 하는 걸로는 너를 막기 힘들 거라는 얘기야.”
차유신의 상체가 낮아졌다. 우태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역시 좆같은 짓거리라도 안 했던 걸 한다면, 다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
말을 마친 차유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대로 우태원의 입을 덮치고는,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씹어줬다. 전류에 맞은 것처럼 우태원의 입꼬리가 빠르게 내려갔다.
“인풋도 없이 아웃풋을 얻어? 그건 내 신조를 거스르는 일이야.”
이를 거둔 차유신이 이번에는 우태원의 윗입술을 빨았다. 덜컥 소파에 등을 붙인 우태원이 신음을 흘렸다.
“후으….”
“너는 잊었을지 모르겠는데, 나 스타트업 CEO 출신이거든.”
추웁, 하며 표피를 흡입하고 난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우태원의 눈이 짧게 미동했다. 고갯짓을 한 차유신이 지시했다.
“깨물어.”
우태원이 홀린 듯 입을 열었다. 갈증 난 것처럼 차유신의 아랫입술을 물고는, 제 이를 박아 넣었다. 말랑한 표피가 순식간에 시큰해졌다. 비릿한 액체가 혀 밑에 고였다.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하아….”
“멀어지지 마요.”
확 다가온 팔뚝이 차유신의 허리를 둘렀다. 그대로 당기자, 몸이 털썩 우태원의 무릎에 앉혀졌다. 밀착된 두 사람의 수트 틈에서 각기 다른 색깔의 넥타이가 사각거리며 스쳤다.
“적당히 선배 갖고 놀다가, 바로 프락치 잡아낼 생각이었는데.”
희롱하듯 차유신의 입술을 질근거리는 내내 우태원의 눈이 풀려갔다. 노곤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오늘은 포기해야겠네요.”
우태원이 입술을 모았다. 질척하게 고인 핏물이 단숨에 빨렸다. 아. 또 한 번 탄식한 차유신이 턱을 떨었다. 집어삼킬 듯 주시해오는 우태원이 망막에 걸렸다. 차유신이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왜. 꼴려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우태원이 입을 뗐다. 동굴 같은 입 안에서 굴러가는 혀가 뜯겨나간 살점 같았다. 꿀꺽, 삼키고 난 그가 중얼거렸다.
“조금 당황했거든요.”
나직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떡 치는 건 몰라도, 다른 사람 입술 빤 건 처음이라서요.”
*
“매천회가 태류건설 쪽과 얘기를 잘 끝낸 듯합니다. 조신희 회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권헌의 보고가 불완전한 모스부호처럼 뚝뚝 끊겼다. 차유신은 고개를 기운 채 곁눈질로 창밖을 봤다. 지은 지 5년여밖에 되지 않은 멀끔한 건물들 사이로 세미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가을이었고, 한창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바쁘게 발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들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조금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지켜보던 차유신의 낯이 골똘해졌다. 희한한 일이다. 자신이 저 거리를 한창 오가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저렇게 관대한 표정을 지어본 기억이 없는데. 늘 주변을 경계하고 의심하기 바빴는데. 저 자리를 사도동 방석집이 점령하던 시절, 차유신은 제대로 웃어본 일이 없다. 여섯 살의 가을, 저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쭉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웃는 사람이 생겼다. 저 자리에는 더 이상 방석집이 없고, 일반 사무용 건물이나 빌라 따위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리하고 있다. 환경이 달라졌으므로 그 틈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양새와 표정도 달라졌다.
‘만족해요?’
지난밤, 우태원은 꽤 오랫동안 차유신의 입에다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바람 소리조차 투과하지 않는 창 덕분에 그들의 공간은 지독하게 호젓했다. 이따금씩 우태원의 낮은 숨소리나,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재킷끼리 스치는 소리 따위가 들리긴 했지만 곧 환영처럼 사그라졌다. 결국 남은 건 자신의 입술에 맹목적으로 겹쳐진 우태원의 숨결뿐이었다.
‘뭐가.’
차유신이 예사롭게 반문했다. 차유신은 내내 우태원의 위에 올라탄 채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 같은 자세를 취한 탓에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차유신은 아무렇지 않았다. 우태원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있다 보면 다른 생각은 절로 하지 않게 된다. 저 소리가 언제 멎을지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이외의 상념은 쉽게도 희석되곤 한다.
‘선배가 변화시킨 역현구가.’
벌어진 우태원의 입에서 차유신의 입술이 떨어졌다. 가볍게 혀로 제 입을 축인 차유신이 투박하게 답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데.’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같은 걸 할 거고요?’
‘당연한 걸 물어?’
‘그러다 후회할 텐데요.’
등을 젖힌 우태원이 권태로운 한 마디를 흘렸다. 차유신의 손아귀에 덮인 그의 어깨가 소파 등받이에 묻혔다. 올라간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맨살에 손가락을 쭉 미끄러뜨린 그가 읊조렸다.
‘세상은 선배 것이 아니에요.’
차유신이 비식거렸다.
‘아니. 내 거야.’
우태원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주시하며, 차유신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판단도, 결정도. 당연한 얘기지만 후회할 일은 없어. 내가 곧 정답이니까.’
‘선배는 스스로가 꽤 고결하다 생각하시는군요.’
‘일단은 고결해야지. 자칫하면 더러워지기 십상인 처지인데.’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그저 주억거린 우태원이 차유신의 손아귀 안으로 제 엄지를 집어넣었다. 미끈한 손바닥을 헤아리듯 만지작거리다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갑자기 기대되네요. 그 고결한 선배가 어디까지 더러워질지.’
“권 비서.”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권헌이 부쩍 허리를 곧추세웠다.
“네. 의원님.”
“보고 끝났어?”
“네.”
“그럼 가까이 와봐.”
차유신이 턱을 까딱했다. 권헌이 미적거리며 다가왔다. 내뻗은 차유신의 손이 권헌의 팔뚝을 감았다. 권헌의 손끝이 전율했다.
“조신희 회장 비서실 전달사항 제외하고는, 보고에 알맹이가 하나도 없네.”
“송구합니다.”
“잘못한 걸 알고 있어?”
“네.”
권헌은 고분고분 수긍했다. 권헌의 팔을 두른 손가락에 점점 힘이 실렸다. 움찔거리는 그의 가죽이 재킷 너머로 현현히 느껴졌다. 성의 없이 권헌을 일별한 차유신이 곧 손을 풀었다. 이내 그를 외면한 채 뇌까렸다.
“알면, 당장 짐 정리해. 내일부터는 출근할 필요 없어.”
*
“너 미쳤어?”
다짜고짜 내실 안으로 들어온 한수현이 커다랗게 발을 굴렀다. 차유신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멀쩡히 다니던 애를 갑자기 왜 잘라! 소문나면 큰일 나, 이거.”
“다른 보좌진들이 원치 않는 것 같아 잘랐어. 너희 내심 권헌 탐탁지 않아 했잖아. 차라리 잘 된 것 아니야? 의원실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할 말을 잃은 한수현이 더듬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잠깐 나와 봐. 수현아.”
일어난 차유신이 그녀의 몸을 살짝 밀치며 걸어갔다. 이내 반쯤 열린 내실 문틈으로 발을 내밀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무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일곱 명의 보좌진들이 흠칫했다. 권헌은 사무실을 나선 지 오래였다.
“내가 그동안 특정 보좌진을 지나치게 편애한다는 인상을 준 게 마음에 걸려, 오늘부로 권 비서는 퇴사 처리합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분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니 괘념치 않았으면 합니다.”
“유신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저편에 서 있던 진무원이 훈계했다. 차유신은 무시하듯 손사래만 쳤다.
“형은 이와 관련해 악의적인 얘기가 국회에 퍼질 일 없게, 잘 관리해주고.”
“차유신.”
“여기까지. 당장 다음 달에 국감이 있기 때문에 관련 업무처리가 시급한 시점입니다. 운열이는 문서작업 맡을 단기 아르바이트생 한두 명 뽑는다는 내용으로 채용공고 올려놔.”
“9급 비서를 새로 뽑지 않고요?”
“비서 뽑으려면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지금 시간이 없잖아. 일단은 아르바이트생으로.”
“알겠습니다. 형님.”
김운열이 신속하게 자리에 앉았다. 경직된 보좌진들을 휘 둘러본 차유신이 또 한 번 손짓 했다. 이번에는 윤재희 쪽이었다.
“재희는 나하고 같이 어디 좀 가자.”
윤재희가 바로 자리를 나섰다.
“네. 형님.”
*
정동 돌담길에 있는 한정식집에 도착한 건 오후 6시 55분이었다. 먼저 운전석에서 나온 윤재희가 뒷좌석으로 달려와 문을 열어줬다. 밖으로 나서는 차유신의 곁으로 발렛 파킹 직원들이 다가왔다. 차유신이 앞서 걷고, 키를 맡긴 윤재희가 뒤를 따랐다.
한정식집 내부는 이제 눈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따라붙은 매니저가 상냥하게 물었다. 허대윤 청장님 미팅이시죠? 저 안쪽 방입니다. 먼저 걸어가던 매니저가 한 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몸을 들인 차유신이 윤재희에게 눈으로 지시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네.”
문이 닫혔다. 뚜벅뚜벅 자리를 찾아가는 차유신의 맞은편에서 심각하게 제 잔에 와인을 채우는 허대윤이 보였다. 몸을 앉힌 차유신이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위궤양 환자에게 술하고 담배는 극약인 걸로 아는데요.”
“오늘 새벽에 부산에서 한바탕 조폭 새끼들이 날뛰었어.”
고개를 든 허대윤이 운을 뗐다. 팔짱을 낀 차유신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요?”
“매천회하고, 또 다른 조직이 연합해서 부산에 있는 역운회 사무소를 털었어. 사이즈 자체가 비교가 안 됐던 모양이야. 애초에 매천회 거점이 부산이기도 하고. 그 역운회가 바로 깨졌거든. 비록 부산사무소이긴 하지만, 거긴 역운회 사무소 중에서 세 번째로 큰 곳이야. 운도동 메인사무소, T시티 관리사무소 다음으로 역운회에 중요한 곳.”
“처음 듣는 얘기네요.”
“곽희서 회장 아직 병원에 있어. 매천회 우두머리가 공석인 상태란 말이야.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새끼들이 움직여. 어?”
탕. 허대윤이 테이블을 쳤다. 쓰러질 듯 비틀거린 와인 잔이 간신히 바로 섰다. 차유신은 피곤한 듯 제 머리만 쓸었다.
“왜 그걸 저에게 와서 따지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국회의원이지, 조폭이 아닌데요.”
“어떻게 차 의원을 의심을 안 해! 매천회하고 결탁한 걸 내가 빤히 아는데. 아니, 그리고 그런 일이 있으면 사전에 귀띔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관할 경찰들 전부 멍청하게 그걸 보고만 있는 꼴만 됐어. 사상자만 쉰 명이 되는 대규모 싸움이 벌어졌는데, 경찰들이 손조차 못 댔다고. 이게 말이 돼? 나하고 손잡자며. 그럼 일거수일투족을 다 공유해야 할 것 아니….”
“지방에서 깡패 새끼들 좀 치고받은 일이잖습니까. 고작 그런 것 갖고 뭘 그러십니까.”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허대윤의 앞에 놓인 잔을 채고는,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잔이 빠르게 비워졌다. 텅 빈 잔을 내려둔 차유신이 입을 훔쳤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닙니다. 매천회에서 자기네 거점인 부산 쪽을 확실하게 정리한 후 시작하고 싶다며 벌인 일입니다. 그냥 부산 쪽 교통정리 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게다가 제가 조만간 청장님께 제안드릴 내용에 비하면, 오늘 새벽일은 고작 양아치 싸움에 불과합니다.”
차유신이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밀폐된 공간에 묵직한 냉기가 흘렀다. 멍하니 차유신을 보던 허대윤이 탄식했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지난 일을 어찌하겠나. 그만두지. 차 의원.”
“식사하실까요?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메뉴 책자를 들친 차유신이 허대윤을 힐긋했다.
“청장님 말씀대로 저와 청장님은 손을 잡은 사이잖습니까. 제가 을이니, 청장님께 맞춰드려야죠.”
허대윤이 얼굴을 감쌌다. 전혀 동의하는 투가 아니었다.
*
세 시간에 걸쳐 홀로 두 병의 와인을 비웠다. 영업이 끝나는 10시에 맞춰 한정식집을 나선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11시 무렵이었다. 취한 것도,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뒷좌석에 앉은 채 차유신은 담배를 피웠다. 열린 창문 너머로 저편에서 깜빡이는 전조등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형님.”
미동하는 차 안에서 윤재희가 뒤를 돌아봤다. 끄덕인 차유신이 긴 연기를 내뿜었다. 새하얀 안개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새까만 차를 덮었다.
“그래. 고생했어.”
“내일 몇 시쯤 모시러 올까요.”
“6시.”
“알겠습니다.”
벌컥 문을 연 차유신이 밖으로 나섰다. 뒷좌석 문을 닫자마자 차 안에서 꾸벅한 윤재희가 운전대를 제대로 잡았다. 매끄럽게 후진한 차가 단지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차유신은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까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편의 차에서 빠져나온 남자들 무리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유신의 앞에 다다른 한 남자가 허리를 굽었다. 다른 남자들도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곧 몸을 바로 한 남자가 정중히 말했다.
“잠깐 같이 가시죠. 차 의원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
“역운회 석재경 사장님이십니다.”
딱히 놀라지 않은 차유신이 이기죽거렸다.
“직접 오라고 하지, 왜.”
“지난 새벽에 다리를 크게 다치셨습니다. 매천회가 부산사무소를 칠 때, 석 사장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거든요.”
남자가 들숨을 삼켰다. 빤히 남자를 보던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손 줘봐.”
남자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훅 내려간 꽁초가 남자의 손등에 꽂혔다. 파삭, 하며 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남자가 움찔거리며 이마를 구겼다. 소리를 내진 않았다. 불이 꺼질 때까지 꽁초를 비비고 난 차유신이 손을 거뒀다. 이내 우뚝 선 남자를 지나쳐가며 읊조렸다.
“교육이 잘됐네. 우태원 라인이 아니라 그런가?”
*
운도동에 있는 역운회 본사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 어린 차유신이 익숙하게 맡아온 냄새였다. 어머니를 찾아오는 역운회 남자들의 몸에서는 늘 그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그것이 사실은 피 냄새라고 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매일 피를 묻히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그 냄새가 남는다. 몸에 냄새를 입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없을 때조차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
차유신은 지금 이 순간 어떤 남자를 생각했다. 그 냄새가 가장 짙게 나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 차유신은 그의 냄새를 맡았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역운회 대표실은 의외로 깔끔했다. 일반 오피스의 CEO 사무실이 연상되기도 했다. 소파에 앉은 석재경은 오른쪽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칼을 맞았구나. 차유신은 맞은편에 앉으며 생각했다.
“귀한 분이라 일어나서 맞이해야 하는데, 제가 지금 다리가 이래서.”
석재경이 제 허벅지를 가리켰다. 도리질을 친 차유신이 대꾸했다.
“어쩔 수 없죠.”
“감사합니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이 자리는 처음 다친 것도 아니라서요. 나쁘지 않습니다.”
“완전히 체면을 구기셨네요. 지방 양아치들 싸움에 한 조직 우두머리 다리가 날아갈 뻔했으니.”
손을 뻗은 차유신이 멋대로 새 생수병 하나를 까며 중얼거렸다. 석재경의 뒤편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인상을 썼다. 보지도 않고 분위기를 알아챈 석재경이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담담한 한 마디가 건네졌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별게 다 부끄러우시네.”
생수병을 입에 가져간 차유신이 꿀꺽거리며 맹물을 삼켰다. 사위가 고즈넉해졌다. 숨을 고른 석재경이 주변을 둘러봤다. 곧 십여 명의 남자들에게 하나하나 손짓을 했다.
“인석이 한 명 빼고 전부 다 나가 있자.”
“앞에서 대기할까요?”
“좋을 대로.”
남자들이 신속하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우르르 나가는 남자들을 차유신은 곁눈질로 살폈다. 아무래도 석재경의 최측근처럼 보이는데, 희한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태원의 주변에 상주해있던 역운회 조직원이, 이 안에는 한 명도 없어 보인다.
“매천회를 완전히 본인 편으로 만든 것 같더라고요. 차 의원님께서.”
석재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생수병 뚜껑을 돌려 닫은 차유신이 답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타이밍이 좋긴 하죠. 곽희서 회장이 오늘내일하는 통에 매천회 보스는 사실상 공석이 됐고, 거길 노리는 이들이 한둘은 아닌 걸로 압니다. 그런 와중에 차 의원님께서 가장 센 놈을 골라 기선을 잡게 한 거죠. 그래서 벌어진 일이 오늘 새벽 부산에서 일어난 역운회 사무소 습격이고요.”
“상상력 좋으시네요. 시나리오 작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차 의원님. 저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석재경의 어조가 엄숙해졌다. 생수병을 내려둔 차유신이 무심하게 그를 마주 봤다. 조금씩 사나워지는 그의 눈매가 보였다. 차유신은 그 눈빛마저 관찰했다.
석재경. 올해로 34세. 석일태 회장의 외아들. 전국적으로 7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역운회의 공식 우두머리. 다만 어쩐 일인지 그에 관한 정보는 온통 베일 속에 잠겨있다. 한정적으로만 활동하며, 사교모임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그렇다 보니 아직도 역운회 보스가 석일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실체 자체가 묘연한 인물이다.
그나마 알려진 건 태류건설 조신희 회장의 외동딸인 유현주의 남편이라는 것 정도. 둘은 골프장에서 만났다. 석일태 회장을 닮아 석재경 역시 풍채가 좋고 남자다운 인상이었는데, 이에 매료된 유현주가 먼저 석재경을 쫓아다녔다. 결국 삼 년 전 결혼을 했지만, 이후에는 아이 소식도 없고 두 사람이 동반으로 대외적인 자리에 나선 일도 없다. 그런 와중에 유현주가 혼자 호주로 떠났다.
“차 의원님께서 조신희 회장과 손을 잡았다 들었습니다. 이유는 충분히 알 만합니다. SDB그룹이 지닌 T시티 소유권을 빼앗는 게 목적이겠죠. 차 의원님은 T시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니까요.”
“잘 아시네요. 그게 뭐 잘못된 겁니까.”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신희 회장을 차 의원님 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가 작용한 걸로 압니다.”
석재경이 낯이 굳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뭐 말씀이십니까.”
“현주의 유산은 저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닙니다. 현주가 그냥 자발적으로 낙태를 한 겁니다.”
석재경이 숨을 몰아쉬었다. 차유신은 천연덕스레 되물었다.
“그랬어요?”
“모르는 척하지 마시고요. 차 의원님도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알면서, 조 회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말장난을 했던 것 아닙니까.”
“대충 아다리만 맞으면 됐지, 뭘 더 따집니까. 석 사장님께서 조 회장님 딸 폭행한 게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고.”
“한두 번 가벼운 손찌검을 가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현주의 유산은 별개….”
“됐고. 원하는 게 뭔데요.”
손을 내저은 차유신이 눈을 찌푸렸다. 입을 다신 석재경이 말을 꺼냈다.
“조신희 회장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뭐라도 하는 여자입니다.”
“그건 나도 압니다. 그래서 끌어들인 거고.”
“조 회장이 곧 저를 죽일 겁니다.”
석재경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천하의 석 사장님도 두려워하는 게 있으시네요.”
“조 회장을 잘 아는 차 의원님이라면, 그저 웃으며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 파악이 되실 텐데요.”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조 회장에게 다시 말을 잘 해주셨으면 합니다.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지 않도록.”
“그러면 역운회를 T시티에서 뺄 겁니까.”
차유신이 턱을 괴었다. 석재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허하게 내뱉어진 숨이 차유신의 목에 감겼다. 깊게 눈을 감았다 뜬 석재경이 입을 뗐다.
“그건 어렵습니다.”
“본인 조직에 대한 결정을, 왜 본인이 못합니까.”
“역운회는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제 결정 권한은 사실상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석재경이 버겁게 입을 다물었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소파 시트에 둔 손가락을 세웠다. 매끈한 가죽을 가붓하게 긁어가며 석재경을 살폈다. 그늘에 잠긴 낯에서 무력함이 비쳤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느슨해졌다. 그래,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왜 석재경이 그간 전면에 나서지 않았는지, 왜 조신희 회장의 협박에 맥을 못 추고 차유신에게 호소부터 하고 나오는지. 차유신은 이제 잘 알았다.
석재경에게는 힘이 없다. 역운회의 일거수일투족은 석일태 회장의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 석재경이 역운회 사장 자리에 오른 건, 그렇게 해야 석일태가 ‘깡패 우두머리’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제 아들을 총알받이에 세워두고, 석일태는 버젓한 기업의 CEO 행세를 하고 있는 거다.
석재경은 아들 같지도 않은 아들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저는 문신이 없습니다.”
석재경이 읊조렸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문신이 없는 조폭 두목도 있군요.”
“문신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까닭이죠.”
석재경이 손을 넘겼다. 제 어깨를 짚고는, 날개 뼈가 있는 부근을 건드렸다. 높낮이 없는 언어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이 자리에 기다란 손톱 모양 문신이 있습니다. 본인 말에 따르면 ‘개싸움 문신’. 도명진 사장 및 배민기 사장과 역운회 통합을 두고 다툼을 벌이던 시절, 둘 중 하나가 아버지의 등에 남긴 손톱자국을 문신으로 새긴 겁니다. 본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상흔이라는 이유로요. 저는 아버지가 같은 것을 제 등에도 새겨주길 원했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제가 문신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제 몸은 아주 깨끗하게 남았습니다.”
“석 사장님에 대한 애정이 딱히 없는 아버지인가 봅니다.”
“최소한 아버지라고는 생각합니다. 혹여나 제가 목숨을 잃는다면, 크게 분노할 유일한 사람이죠.”
석재경이 잠시 눈을 굴렸다. 희미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그러니까, 두 명 중 한 명입니다.”
차유신의 손톱이 꾹 시트를 짓눌렀다. 나머지 한 명이 충분히 예상됐다.
그리고 그것이 차유신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아무튼…. T시티에서 아예 빠져준다고는 못 하지만, 차 의원님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관리 운영을 할까 합니다. 매천회 일부를 T시티에 상주시켜도 됩니다. 두 조직이 서로 공생하는 거죠.”
“그건 좀 곤란한데.”
“어차피 매천회는 T시티 못 먹습니다. 이미 실패한 사례도 있잖습니까.”
석재경이 눈을 부라렸다. 차유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젖혔다. 불현듯 문 너머에서 탕, 하는 굉음이 들렸다. 감히 어딜 들어와! 득달같은 남자의 호통이 곧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에 묻혔다. 곳곳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남자들이 고함이 이어졌다. 반쯤 눈을 깐 차유신이 뇌까렸다.
“역운회 부산사무소 인원은 약 100명입니다. 제압당하기까지의 시간은 총 10분이었고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 많은 인원이 빠르게 털렸죠.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석재경의 교근이 꿈틀거렸다. 바깥의 소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편 차유신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 본사에는 역운회 조직원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매천회를 치러 부산으로 내려갔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매천회 부산사무소는 텅 비어있죠. 대신 경찰이 깔려 있고요. 혐의는 딱히 없지만, 일단 조직원들은 앞으로 24시간 동안 구금될 겁니다. 타인에게 위협을 가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경찰에서 판단할 예정이거든요.”
“차 의원….”
석재경의 어깨가 부들거렸다. 차유신은 차분히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부산사무소를 비운 매천회 조직원들은 전부 서울로 올라와 있습니다. 제법 사이즈가 커진 상태죠. 태류건설 용역으로 뛰는 몇몇 조직을 붙여서 연합을 형성했거든요. 역운회 부산사무소가 그렇게나 빨리 털린 것도, 애초에 이 연합 사이즈가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쾅. 사무실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들어온 남자가 차유신의 옆에서 몸을 숙였다. 곽희서 회장의 조카이자 차유신이 차기 회장으로 점찍은 곽인하였다.
“나가시죠. 의원님.”
몸을 일으킨 차유신이 석재경을 힐긋했다. 석재경이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기세로 헐떡였다.
“역운회와 매천회를 T시티에 함께 두겠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불완전한 선택지를 혐오합니다. 그 안일함이 오히려 독이 될 테니까요.”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냉랭한 한 마디가 사무실을 울렸다.
“그럼 다시는 보지 맙시다. 석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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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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