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일식(日蝕)
18.
넌 우리와 계약을 하나 하는 거야. 우리는 네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먹여주고, 길러주고, 교육을 시켜줄 거야. 대신 너는 우리를 위해 아주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줘야 해. ‘위대한 아이들의 집’ 창립자 부부의 자녀답게,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자녀로 자라줘야 해.
잘 할 수 있지? 유신아.
*
나부끼는 하얀 연기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차유신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정수리를 벽에 기댔다. 뚜렷하며 몽글한 구름을 품은 하늘은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모범적인 원형을 지니고 있다. 이대로 액자에 걸어 ‘하늘’이라는 제목을 달고 미술관에 전시한다면 꽤 호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뚫어져라 같은 곳을 응시하던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작은 꽁초가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추락했다. 부쩍 시야가 허전해졌다.
“씹새끼. 또 담배 피우지.”
저편에서 걸어온 남학생이 다짜고짜 차유신의 등을 찼다. 잠시 기울었던 몸이 곧 제자리를 찾았다. 남학생이 못마땅한 손길로 저편을 가리켰다.
“야. 일단 교감실.”
“거긴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학생회장이야?”
남학생이 볼멘소리를 냈다. 차유신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대로 남학생을 향해 던졌다. 딱, 소리를 내며 머리를 맞은 남학생이 발을 굴렀다. 잔뜩 성난 음성이 쏟아졌다.
“아, 씨발! 이 분노조절장애 새끼가 미쳤나.”
“지시를 전달할 때는 명확한 사유를 같이 제시해야지. 어? 박원락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다음부턴 알아 와.”
몸을 일으킨 차유신이 다리를 뻗었다. 뒤에서 박원락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차유신은 그저 자신의 교복 소매를 코에 댄 채 냄새를 맡는 데 집중했다. 혹여나 담배 냄새가 뱄으면 어쩌지 싶었다.
*
“담배 피우지 마라. 여자한테 버림받는다. 흡연중독이 발기 부전으로 이어진 실제 사례를 내가 알아.”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심상한 경고가 귀를 스쳤다. 고개를 든 차유신이 대꾸했다.
“혹시 교감선생님 본인 사례인가요.”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아니야.”
훅, 연기를 뿜은 40대 중반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 응접용 소파에 다다른 그가 몸을 앉혔다. 이내 반대쪽 소파를 가리켜며 지시했다.
“일단 앉아.”
고분고분 다가간 차유신이 맞은편에 착석했다. 다리를 꼰 교감이 입을 뗐다.
“갑자기 토론대회 안 나간다는 이유가 뭐야.”
“방송사 스폰서가 붙어있기에, 대회내용이 전국 방송에 송출되는 줄 알고 신청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고요.”
차유신이 머리를 털었다. 교감이 허, 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죠. 방송에 나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승했을 때의 영향력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은 바빠서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현장에 직접 방문할 시간이 없습니다.”
차유신이 정자세로 교감을 봤다.
“방송으로라도 부모님이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게 불가능한 대회라면, 그냥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 쪽이 낫습니다.”
교감이 언짢게 팔짱을 꼈다. 차유신은 다소 예의 바른 낯으로 교감을 마주 봤다. 생각에 잠겨있던 교감이 끝내 포기한 듯 시선을 비꼈다. 내젓는 손동작에서 피로함이 느껴졌다.
“그만두자. 네가 네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학생 개인이 결정한 사항에 대해 지나치게 왈가왈부하는 게 교육자로서 적합한 태도는 아니겠지.”
“인정하시니 다행입니다.”
“별개로 그 시건방진 입은 한시바삐 고치는 게 좋겠다.”
혀를 찬 교감이 뻑뻑 담배를 피웠다. 차유신은 입을 다문 채 눈을 굴렸다. 한 편에 놓인 서재에서 빼곡하게 들어찬 액자들이 눈에 띈다. 어딘가에서 표창이나 감사장을 받았을 때 찍은 교감의 기념사진들이었다.
고만고만한 액자들 틈에서 지극히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차유신의 부모인 차재후 류민경 부부와 교감 부부가 골프장에서 나란히 찍은 사진. 차재후와 교감은 오랜 친구지간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서둘러 담배를 끈 교감이 말했다. 말쑥한 차림의 중년여성과 사복 차림의 남학생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몸을 일으킨 교감이 차유신에게 눈짓을 보냈다.
“넌 이만 들어가 봐.”
“알겠습니다.”
꾸벅한 차유신이 발을 옮겼다.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때, 문득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남학생의 동공이 커졌다. 차유신도 덩달아 멈칫했다. 찰나의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차유신의 목구멍으로 꿀꺽 침이 넘어갔다.
어딘가에서, 아주 익숙한 냄새가 났다.
*
한국 나이로 17세.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외국어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자 전교등수 5위 안을 놓친 적이 없는 차유신의 일과는 매우 모범적으로 흘러간다.
아침에 일어나 정시에 등교한다. 교사들의 지시를 절대로 거스르지 않고 수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모든 교시를 마친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 방과 후에 종종 학생회와 모여 순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사안을 논의한다. 주어진 교시가 끝나면 학교에서 자습을 하거나, 학원 수업 혹은 과외 수업을 받는다. 마치고 나면 독서실에서 추가 공부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정 무렵이고, 차유신은 딱히 새는 곳 없이 집으로 간다.
차재후 및 류민경과의 계약사항을 빠짐없이 이행하고,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
“거기 재단이 네임 밸류는 낮아도 예산이 엄청 빵빵해. 대기업에서 다이렉트로 지원해주는 곳이라. 손잡으면 100% 이득이라니까.”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60평대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시시콜콜한 류민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넘기던 차재후가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네.”
“내가 내일 바로 전화해?”
“어. 당신이 하면 좋겠네. 그쪽 와이프랑 공도 몇 번 쳤다며.”
“와. 그 와이프 공 엄청 못 치더라. 비거리가 50도 안 나오는 것 같아.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필드 나오는 거야?”
류민경이 깔깔거렸다. 여전히 신문에 눈을 둔 차재후가 피식거렸다. 막 거실을 밟은 차유신이 두 사람을 차례로 봤다. 이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왔습니다.”
“응. 고생했어.”
등을 보인 류민경이 과일을 깎으며 말했다. 차재후는 묵묵부답이었다. 가방을 어깨에서 내린 차유신이 방으로 향했다. 류민경이 뒤늦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과일 먹을래?”
손 안에서 매끈한 사과가 반짝였다. 차유신은 차분히 답했다.
“네.”
류민경이 바로 손목을 꺾었다. 훅 날아온 둥근 사과를 차유신은 한 손으로 받았다. 막상 보니 한 군데가 상해 있었다. 다른 손으로 방문을 연 차유신이 나직하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온 차유신이 문을 닫았다. 익숙한 방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방 네 개짜리 아파트에서 가장 작은 방에는 딱 책상과 책장, 침대뿐이었다. 가방을 내려둔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과를 입에 대고 아삭, 깨물었다. 설익은 사과에서는 풋내가 났다. 차유신은 꼭꼭 씹어서 삼켰다.
사과 하나를 모두 해치우는 내내 호젓한 방은 차유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둘러쌌다. 차유신은 그 방을 찬찬히 눈으로 쓸었다. 흘러가던 시선이 작은 책장에서 멎었다. 필요한 서적만을 빽빽하게 집어넣은 어느 칸, 유일한 액자. 차재후와 류민경, 차유신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
그건 언론 공개용이었다.
위대한 아이들의 집이 한창 주목받던 시기, 한 타블로이드가 폭로성 보도를 했다. 차재후 류민경 부부의 어린 아들이 부모의 방치 끝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식탁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당시 집에 아이 혼자뿐이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실려 있었다.
다만 어쩐 일인지 해당 부부는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아이를 화장했다는 게 기사의 요지였다.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 단체를 운영하면서 정작 자기 아이는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의식한 듯하다고 타블로이드는 해석했다.
차재후 류민경은 바로 반박 자료를 냈다. 아이는 무사히 살아있다. 다만 기관지가 좋지 않아 미국의 한적한 시골에서 거주 중인 시부모에게 한동안 맡긴 상태다. 한 달 안으로 아이를 공개하겠다. 허위사실을 유포한 언론사는 고소하겠다.
치열한 진실 공방이 시작됐다. 세간은 부부가 곧 공개하겠다는 친자녀에 주목했다. 짧게나마 시간을 번 부부는 발 빠르게 ‘가짜 아이 찾기’에 나섰다. 나이 6~7세, 남자아이. 쌍꺼풀이 있고 피부가 흴 것.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까만색. 무엇보다, 전산상 신고가 돼 있지 않은 완벽한 고아.
바로 차유신이었다. 언론에 공개됐을 당시의 이름은 차민재였고, 몇 년 후에야 원하던 이름을 찾은. 차재후 류민경 부부의 가짜 자녀.
아삭. 차유신의 입에서 마지막 과실이 깨물렸다. 우물거리다 남은 사과 꼭지를 툭 책상 위에 던졌다. 볼품없는 잔해가 빙글빙글 표면을 굴렀다. 입 안의 풋내가 사라져갔다.
차유신은 지금에 만족한다. 이름이 있고, 집이 있으며, 원하는 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가짜이긴 해도 부모까지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제 차유신의 그림자에는 그 지긋지긋한 역현구가 없다.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죽을 때까지 숨겨야 하는 차재후와 류민경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아무도 여울을 모른다.
*
“울아.”
툭. 차유신의 손에서 꽁초가 떨어졌다. 곁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학생이 갸웃했다.
“누구 부르는 거야?”
“야. 쟤 그 유도하는 전학생 아니야?”
“이쪽으로 오는데?”
주변에서 학생들이 중구난방으로 술렁였다. 그 소음을 잠식하듯, 차유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각기 다른 모양새로 널브러져 있던 대여섯 명의 남녀가 일제히 차유신을 올려다봤다.
“정리하고 가라.”
차유신이 발을 내디뎠다. 차신유 어디가? 한 여학생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차유신은 못 들은 척 창고를 나섰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남학생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맞지? 울이. 설마설마했는데….”
“와 봐.”
대답 대신 남학생의 팔을 잡아끌었다. 남학생은 순순히 따랐다. 그 친근하며 순종적인 태도에 절로 이가 갈렸다. 씨발, 소리가 쉼 없이 입 안을 맴돌았다.
그저 앞만 보며 남학생을 데리고 온 곳은 학생회 사무실이었다. 그 시간대에 비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는 남학생부터 밀어 넣었다. 이어 주변에 누가 없는지를 살핀 뒤, 자신도 들어와 문을 닫았다. 탁. 적막한 공간에서 차유신과 남학생이 서로를 마주 봤다.
“나 기억나지.”
남학생이 살갑게 물었다. 차유신은 잠자코 남학생의 가슴팍을 살폈다. 하복에 새겨진 이름 석 자. 정훈석.
여울의 여자들이 입을 모아 욕을 하던, 그 손버릇 나쁜 정 이사의 아들. 차유신이 울이로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아주 위험한 인물.
“깜짝 놀랐어. 너 엄청 멋있어졌다.”
정훈석이 차유신의 어깨를 잡았다. 창 너머에서 흘러든 햇살을 받아 천진한 눈이 빛났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그를 관찰했다. 차유신보다 손가락 하나는 더 돼 보이는 어깨와 키. 보기 좋게 두드러진 이목구비. 솔직하게 말하면 그건 정훈석 쪽에도 해당 되는 표현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 나 작년부터 고모 집에 맡겨졌어. 아버지가 일이 좀…. 이래저래 사정이 생겼거든.”
정훈석이 부쩍 얼버무렸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이 생겼다. 사정이 생겼다. 역운회 간부인 정 이사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주 높은 확률로 징역일 터다. 다만 차유신이 진심으로 궁금한 건 다른 지점에 있었다.
수재들 일색인 이 학교에, 어떻게 정훈석 따위가 올 수 있었던 거지.
“너 머리가 생각보다 좋았나보다.”
차유신이 가볍게 빈정거렸다. 정훈석이 싱긋 웃었다.
“어. 나도 몰랐어. 원래 특기는 유도였는데…. 학교 대표 선수였거든. 중3 때 부상 당해서 끝났지만. 어쨌거나 공부 쪽 진로를 택한 게 나도 아직 안 믿겨.”
“공부는 언제부터 했는데.”
“작년 초에 고모 집에 거둬지고 나서부터. 우리 고모가 꽤 유명한 입시학원 강사거든. 나 앉혀놓고 매일같이 집중 과외 시켰어.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내내. 그냥 따라서 공부한 것뿐인데 성적이 꽤 나오더라고. 전교 1등도 해봤어. 썩 좋은 학교에서 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거 보고 고모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보라면서 여기 편입시험 제안한 거야. 생각 없이 쳤는데, 합격이 돼서 전학한 거고.”
정훈석이 잔뜩 고조되어 설명했다. 정말로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빤히 올려다보던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짚고는, 이름을 불렀다.
“정훈석.”
정훈석이 바로 주억거렸다.
“응. 울아.”
“나 지금 차유신이야.”
“아… 미안.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 맞다, 너 엄청 유명하더라. 우리 반 애들이 다 너 알아. 여자애들도….”
“따라 해 봐.”
“뭐를.”
“내 이름.”
차유신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서슴거리던 정훈석이 곧 입을 뗐다. 가물가물한 한 마디가 나왔다.
“차유신.”
“제대로.”
“차유신.”
“또.”
“차유신.”
“그래.”
차유신의 손이 떨어졌다. 놈의 가슴을 세게 치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이건 경고야.”
“미안.”
정훈석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한숨을 쉰 차유신이 팔짱을 꼈다. 이동한 눈길이 창문 너머에 걸렸다. 왁자하게 몰려다니며 공을 차는 남학생들이며, 키득거리며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이 망막을 스쳤다. 한층 냉해진 낯이 다시 정훈석을 향했다.
“나 안다는 얘기, 애들한테 했어?”
“했어.”
“뭐라고.”
“그냥, 뭐… 어렸을 때 알고 지냈다고.”
“내가 역현구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그건 안 했어. 그냥 한때 친했던 사이라고만 했어.”
“그래.”
내뻗어진 손이 이번에는 정훈석의 팔뚝을 쥐었다. 부러뜨릴 듯 꽉 옥죄고 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절대로 내가 역현구에서 살았다는 얘기 하지 마.”
“알았어.”
“학교에서 나 아는 척하지도 말고.”
“그건 왜….”
정훈석이 자못 난처해했다. 차유신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쳤다. 충분히 버틸 수 있음에도, 순순히 밀리고 난 정훈석이 도로 다가왔다. 차유신이 볼멘소리를 냈다.
“뭐가 문제야. 나한테 아는 척 안 하면 너 죽어?”
“그런 게 아니라.”
정훈석이 뜸을 들였다. 차유신이 답답하다는 양 그를 쏘아봤다.
“아니면, 뭐.”
“난 너하고 다시 만나서 좋은데. 꼭 그래야 해?”
어조에서 간절함이 비쳤다. 무시한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손잡이를 쥔 뒤 뇌까렸다.
“어. 그래야 해.”
“유신아.”
손잡이가 휙 돌아갔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 뭐든지 할게. 그냥 같이 잘 지내기만 하자.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싫다고 했지. 난 너하고 잘 지내서 얻을 게 하나도 없는 입장이야.”
“얻을 거….”
정훈석이 얼버무렸다. 탁한 숨을 고른 차유신이 마저 손잡이를 돌렸다. 그대로 문을 열어젖히려던 찰나, 정훈석이 대뜸 외쳤다.
“너 혹시 아지트 필요하지 않아?”
살짝 열렸던 문이 도로 닫혔다. 찌푸린 차유신의 낯이 돌아갔다. 정훈석이 가쁘게 말을 이었다.
“나 혼자 살거든. 고모네는 지방이어서, 여기까지 통학할 수가 없으니까 나한테 따로 학교 근처 빌라 내줬어. 방도 두 개야. 너 좋을 때 아무 때나 와도 돼. 친구들 데리고 와도 돼. 편하게 써. 비밀번호 알려줄게. 그냥 네 집처럼….”
“정훈석.”
차유신이 들숨을 삼켰다. 정훈석이 바로 답했다.
“어. 유신아.”
차유신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흡연도 돼?”
*
아빠. 해가 검어요.
TV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어느 날, 아이는 그런 말을 했다. 의아한 듯 아이를 살피던 우종진이 곧 TV에 눈을 뒀다. 화면에서는 새까만 동그라미에 잠식되어 테두리만 남은 태양이 나오고 있었다. 빙그레 웃은 우종진이 말했다.
“저건 일식(日蝕)이라고 해.”
“일식.”
“달이 해를 가려서, 해가 검게 보이는 거야.”
아이가 불만족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우종진이 대뜸 세 살짜리 아들을 안아 들었다. 베란다 쪽으로 가서 커튼을 젖히고는, 하늘을 훤히 드러냈다. 이내 위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지금 해는 밝잖아. 그런데 아주 가끔씩 달에 가려지는 경우가….”
“안 밝은데요.”
아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우종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종진을 힐긋한 아이가 쐐기를 박았다.
“지금도 해는 검어요.”
아이는 단 한 번도 밝은 태양을 본 일이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아이가 본 태양은, 늘 검었다. 그 밑에서 아이는 늘 흑백 무성영화 같은 세상만을 봤다.
빛을 찾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아이는 많은 걸 시도했다. TV를 깨부숴보거나, 책을 찢거나, 일하는 아주머니를 때렸다. 빛은 좀처럼 찾아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수십 번, 수백 번 노력 했고 그것이 천 번 정도 누적됐을 때 비로소 답이 찾아왔다.
계단에서 크게 구른 일이 있었다. 실수였다. 그 찰나의 과실로 기절하기 직전, 아이는 빛을 봤다. 아주 황홀하고 달콤한 빛이었다. 아이는 기쁨에 전율했다.
이후부터 습관적인 자해가 시작됐다. 제 몸을 칼로 긋고,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리고, 머리를 벽에다 찧었다. 그때마다 우종진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아이를 다그쳤다. 효력은 없었다. 아이는 다음 날이면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여름이었다. 매미가 우렁차게 우는 계절이었다. 우태원은 차 안에 있었다. 더운 게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위와 비례해 새까매지는 해가 싫었다.
정훈석은 밖에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우태원이 친구라고 부르는 소년이었다. 정확히는 우태원보다 네 살이 많은 형이지만, 어쨌거나 우태원 입장에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또래는 그뿐이었다.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주변의 또래 친구들은 우태원이 때리면 울면서 도망가기 바쁜데, 정훈석은 아무리 우태원이 때려도 꿋꿋하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우태원은 그에게만 자신의 경계를 아주 조금 느슨하게 해줬다. 그렇다고 아예 푼 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걸 할 생각은 없었다.
정훈석과 함께 다니며 접하는 세상들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우태원의 세상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리고 빛이 느껴졌다. 비록 눈에 와 닿는 빛은 아니지만, 검은색 셀로판지 너머로 저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 인지하는 정도는 됐다. 꽤 흥미로웠다.
그날 정훈석이 만난 건 그보다 한두 살이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정훈석은 그가 꽤 똑똑하며 재밌는 친구라고 했다. 우태원은 뒷좌석에 앉아 뚫어져라 정훈석과 대화하는 소년을 봤다. 잘 보이지 않았다. 차창 자체가 짙게 선팅이 돼 있어, 보이느니 실루엣뿐이었다.
끝내 포기하고 몸을 바로 앉혔다. 아버지든 정훈석이든 빨리 이쪽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차 안은 재미가 없었다. 아버지는 항시 차 안을 깨끗하게 비우고 다녔다. 우태원이 자해할 모든 수단을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당연히 우태원으로서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우태원이 지닌 대부분 시간이 그래왔듯, 지금 이 순간도 따분하기만 했다.
쨍그랑. 불현듯 날카로운 파열음이 귀를 울렸다. 묵직한 무언가가 옆얼굴을 매섭게 스쳤다. 홧홧한 감각이 온 얼굴을 물들이는가 싶더니, 고개가 덜컥 들렸다. 깨진 차창 너머로 훤히 드러난 바깥에서 아득한 무언가가 비쳤다. 넋을 놓고 올려다보던 우태원의 동공이 확 커졌다.
엄청나게 밝은 해가 떠 있었다.
“짜증 나.”
심통 맞은 혼잣말을 한 소년이 낯을 굳혔다. 볼을 타고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우태원은 가만히 손을 올렸다. 젖은 부위를 살짝 훔치자, 발끝까지 짜릿해졌다. 손가락이 크게 달싹였다. 심장이 너무도 뛰어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게 힘들었다.
끌어올린 망막에 소년을 새겼다. 그는 매우 언짢은 낯으로 우태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태원은 그 표정이 매우 그답다고 생각했다. 저런 빛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어떤 오만을 잉태해도 충분히 용인될 것이다.
소년의 머리 위에서 비로소 그늘을 거둔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에 젖은 우태원의 손가락이 꽉 시트를 억눌렀다. 너무도 세게 박는 통에 손톱 하나가 부러졌지만, 우태원은 아무런 자극을 얻지 못했다. 빛을 찾았다는 설렘 앞에서 그간 필사적으로 갈구해온 고통은 녹아가는 겨울처럼 무력했다.
우태원은 이제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았다. 말하자면, 이 깨진 창문 너머에서 우태원을 경멸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것. 해란 그렇게 생긴 것이다.
우태원의 세상에 처음으로 색(色)이 도래한 순간이었다.
*
“애들은 아주 착해. 하나같이 착해. 싸움하는 애들도 없고. 선생들도 하나같이… 뭐라고 해야 하지. 정중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웃기지? 선생이 학생한테 정중하다는 게. 그런데 진짜 이 학교는 그래.”
키득거리며 로비를 걸어간 정훈석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간 정훈석이 손짓을 건넸다.
“들어와. 태원아.”
우태원이 성큼 발을 들였다. 확인한 정훈석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승강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볼은 왜 그래.”
정훈석이 물었다. 어투는 매우 다정했지만, 다분한 꾸짖음이 느껴졌다. 우태원은 모른 척 눈을 깔았다.
“넘어졌어.”
“또 싸웠어?”
“넘어졌다니까.”
“이젠 그러지 마. 중학교 1학년이나 돼갖고 왜 애들이랑 싸워. 싸워서 뭐가 좋다고.”
“난 분명히 넘어졌다고 했어.”
우태원이 고집을 부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나선 정훈석이 가볍게 우태원을 가리켰다.
“한 번만 더 싸우고 다니는 거 나한테 걸려봐. 지금 네 중학교 애들 누구누구인지 내가 다 알아. 역현구 중학교가 다 그 바닥에 그 애들이지. 너하고 걔네 양쪽 다 나한테 아주 죽는 거야. 어?”
훈계한 정훈석이 문을 짚었다. 우태원은 시큰둥하게 바닥을 지르밟았다.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한 정훈석이 문을 열어젖혔다. 우태원부터 들여놓고는, 따라서 안에 들어섰다.
거실 한가운데 선 우태원이 주변을 둘러봤다. 소파에 두 개의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힐끔한 정훈석이 말했다.
“큰 방에 친구 와있어. 잠깐 들어가 있어. 난 샤워 좀 하고 갈 테니까.”
“친구? 어떤 친구.”
“지금 고등학교 친구.”
정훈석이 욕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막 문을 연 그가 뭔가 생각난 듯 주춤했다. 이동한 시선이 우태원에게 걸렸다. 우태원은 말없이 정훈석을 마주 봤다. 더듬거리던 정훈석의 입이 곧 다물렸다.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어.”
욕실 안으로 들어간 정훈석이 문을 닫았다. 조용해진 거실에서 우태원은 발을 뻗었다. 저벅저벅 걸어가 큰 방 안에 몸을 들였다. 잠잠하기만 한 실내가 보였다.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곳에 갔나. 홀로 생각하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지도 않고 덜컥 몸부터 앉혔다. 생각보다 시트가 푹신하지 않았다. 빳빳한 이물감까지 느껴졌다. 우태원의 미간이 막 구겨졌을 무렵, 미동도 없던 이불이 확 거둬졌다.
“뭐야, 씨발.”
요란하게 울려대는 음악 소리가 났다. 귀에서 이어폰을 뺀 남학생이 눈을 치떴다. 빤히 올려다보던 우태원이 멈칫했다. 절로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번뜩이는 섬광에 오감이 오그라든다.
“정훈석! 동생 있었어?”
짜증스럽게 이어폰을 집어 던진 남학생이 소리를 쳤다. 방 너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쏴, 하며 샤워기 물 쏟아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서슴거리던 우태원의 시선이 내려갔다. 남학생의 밑에 깔린 문제집이 눈에 띄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제를 풀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친 새끼. 물 틀어놓고 딸치나.”
허리를 세운 남학생이 문제집을 치웠다. 바로 한 몸은 우태원보다 손가락 한두 마디가 커 보였다.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큰 건 큰 거였다. 동급생 중 가장 큰 학생으로 꼽히는 우태원이지만, 아무래도 고등학생과 중학생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머뭇거리던 우태원이 이번에는 남학생의 가슴께를 응시했다. 꼼꼼하게 새겨진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차유신.
“정신 사나우니까 여기서 꺼져. 저쪽에 있는 담배하고 라이터 가져오고.”
벽에다 등을 붙인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우태원은 갸웃했다. 전혀 상반된 주문을 하고 있는 차유신의 앞에서 정확히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걸어 책상 쪽으로 갔다. 위에 놓인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차유신에게 돌아갔다. 휙 채간 차유신이 안에서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고는, 훅 연기를 뱉었다. 우태원은 다시 시트에 걸터앉아 차유신을 관찰했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유신은 굳이 눈길을 주지 않았다. 타인으로부터 감상되는 일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반응을 우태원은 자연스럽게도 수긍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이며 눈동자가 칠흑처럼 검었다. 눈동자 위를 덮은 긴 속눈썹과 그 윗눈썹조차 아주 검었다. 그걸 제외하면 신기할 정도로 희었다. 그 완벽하게 대조되는 색감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공들인 조형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안을 세밀하게 채운 이목구비는 더욱 그랬다. 높다란 콧대는 차라리 평범할 정도였다. 우아하게 세공된 눈매와 입매, 어긋남이 없는 매끈한 턱선은 남들을 압도하거나 혹은 남들로부터 감상되어지기 위해 탄생한 피사체를 연상케 했다.
잘생겼다는 말을 함부로 붙이기가 어려운 생김새였다. 고작 그 언어로 저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건, 차라리 모독에 가깝다.
“사촌이야?”
차유신이 대뜸 물었다. 우태원은 고개를 저었다.
“친한 동생이요.”
“몇 살.”
“열네 살.”
“얼굴은 왜 다쳤어.”
기다란 연기를 뿜은 차유신이 또 물었다. 우태원은 속으로 골똘해졌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그냥 안부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 사람은 생김새뿐 아니라 화법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모든 상황에 공기처럼 스며드는 언어를 건넨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저것이 그의 습관인지, 진의인지를 절로 고민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싸웠어요.”
망설임 끝에 대답이 나왔다. 물끄러미 우태원을 보던 차유신이 헛웃음을 쳤다.
“그거 역현중 교복 아니야?”
“맞아요.”
“뭘 처맞고 다녀. 병신 새끼들한테.”
차유신이 혀를 찼다. 말미에서 묘한 환멸이 비쳤다. 우태원은 조용히 입 안을 혀로 쓸었다. 자신이 때린 쪽이었다는 얘기를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쿨럭. 문득 심부에서 깊은 기침이 터졌다. 눈앞을 드리운 희뿌연 연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반사적인 행위였다. 뭔가를 토해내고 싶어졌다. 숨이든, 기침이든. 혹은. 호흡을 가다듬은 우태원이 가슴팍을 더듬었다. 명찰이 없었다. 저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못 봤겠구나 싶었다.
우태원은 자주 명찰을 잃어버렸다. 성할 날이 없는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됐다. 가방에 남아있는 여분의 명찰이라도 이제 와서 달까, 하다가 그만뒀다. 가라앉은 시선이 차유신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알아봤을 거면 진작 알아봤겠지. 저 사람은 그때의 기억이 없다.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본의 아니게 잊었거나, 혹은 잊고 싶어 잊었거나.
“정훈석 저 새끼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반도 채 피우지 않은 꽁초를 빈 캔에 처박은 차유신이 투덜거렸다. 시트를 짚은 우태원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관심이 없다. 동일한 문장이 우태원의 뇌리에서 반복됐다. 차유신은 지금 우태원에게 관심이 없다. 왜. 담배도 피울 줄 모르는 중학생이어서, 혹은.
차유신이 경멸하는 역현구의 잔재라서.
그렇다면 역시 역현구에서 온 정훈석은.
“훈석이 형 아버지가 형네 어머니 죽였어요.”
단조로운 음성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반쯤 등을 보인 채 재떨이용 캔을 밀던 차유신의 눈이 한번 깜빡였다. 그를 주시하던 우태원 역시 눈을 깜박였다. 스윽, 하며 파란색 캔이 멀어졌다. 다시 벽에다 몸을 붙인 차유신이 허공에다 손을 휘저었다. 우태원이 이마를 찌푸렸다.
“뭐 하세요.”
“연기, 이제 없지.”
차유신이 고저 없이 물었다. 목을 꿀꺽한 우태원이 저 멀리 달아난 캔을 봤다. 일부러 자신 때문에 담배를 일찍 끄고, 캔을 치운 것인 줄은 몰랐다.
“네가 말한 거, 나도 알아. 이 집에다 정훈석이 숨겨둔 걔네 아버지 물품 중에서 우리 어머니 유품 발견했거든.”
차유신이 몸을 늘어뜨렸다. 우태원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먼 곳에 눈을 둔 차유신이 제 머리를 쓸었다. 피로한 손가락 틈에서 까만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다만 그걸 두고 어떻게 할지는 내가 결정해.”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우태원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차유신의 입술 틈으로 심상한 질문이 나왔다.
“그나저나 너, 진짜 누구야?”
탕.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문이 걷어 채였다. 같은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섯 명에서 여섯 명 가량 돼보였다.
“차신유, 대박. 박원락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여학생 하나가 덥석 차유신을 안으며 말을 걸었다. 저편의 남학생이 버럭 했다.
“아, 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너 고자일 지도 모른대. 진짜야?”
“김신혜!”
남학생이 여학생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확 뿌리친 여학생이 차유신에게 달라붙은 채 연달아 물었다. 진짜야? 진짜야? 어? 진짜냐고.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젖힌 차유신이 우태원을 힐긋했다. 가붓한 손짓을 건네고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가.
*
“미안.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못 놀아줬네.”
식탁 맞은편에 앉은 정훈석이 웃었다. 우태원은 가만히 정훈석이 준 하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딱히 좋아하는 간식은 아니지만, 친한 형의 성의니 어느 정도 받아주는 게 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 진짜! 귀찮게.”
“시끄러워, 차신유. 와 봐.”
뒤편에서 돌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성큼성큼 걸어간 여학생이 차유신을 이끌며 작은 방으로 향했다. 차유신부터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서 들어갔다. 거의 닫힐 뻔했던 문이 간발의 차이로 벌어졌다. 턱을 괸 채 보고 있던 정훈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저 누나 좋아해?”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깨물며 우태원이 물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정훈석이 뒤늦게 움칠했다.
“누구?”
“누나.”
“어떤 누나.”
정훈석이 도통 모르겠다는 낯을 해 보였다. 우태원의 입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바스러졌다. 잘게 조각난 얼음들을 꿀꺽한 우태원이 혼잣말을 했다.
“아니야. 나 갈게.”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큰 방 쪽에서 정훈석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훈석! 이 와이파이 공유기 어떻게 된 거야? 우태원의 어깨를 두드린 정훈석이 큰 방을 향했다. 거실에는 우태원만이 남았다.
그대로 현관을 향하려다 무심코 작은 방 쪽을 봤다. 차유신을 벽에다 밀어붙인 여학생이 다짜고짜 입술을 빨아대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받아주던 차유신의 눈길이 돌아갔다. 아찔한 이채를 품은 눈망울에 우태원이 스쳤다.
걸음으로 약 육 보, 많아도 팔 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봤다. 차유신의 곁눈질이 우태원을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훑어왔다. 우태원은 부쩍 몸 안의 혈관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태양에 먹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땀에 젖은 뒤꿈치가 꾹 눌렸다. 마지막으로 우태원을 일별한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쾅.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우태원의 몸이 차가워졌다.
*
그날 밤, 우태원은 처음으로 수음을 했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던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날은 행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희뿌연 점액은 차유신의 눈에 어려 있던 이채를 닮아 있었다. 우태원은 가만히 그 이채를 입으로 핥고, 삼켰다.
꿀꺽, 하며 해의 빛무리가 내장을 가로질렀다. 온몸이 절로 후끈해졌다. 얼굴을 들어 창밖을 봤다. 밖에는 차디찬 달이 떠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온도 차에 우태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다. 몸 안에서 들끓는 해의 잔재는 그대로였지만, 그럼에도 우태원은 간신히 하나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또다시 그 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그 눈을 본다면, 그때는 죽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
“김신혜하고 사귀어?”
2학기에 접어 든지 딱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차유신은 창고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정훈석은 맞은편에서 뚫어져라 시선을 건네 오고 있었다. 입에서 담배를 거둔 차유신이 정훈석을 힐금했다. 놈의 눈빛은 지극히 조심스러웠지만, 그래서 때때로 묘한 긴장감을 줬다.
애초에 남자가 남자를 조심스럽게 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동등한 친구 관계에 있어서.
“안 사귀어. 누가 그래?”
차유신의 손가락에 걸린 꽁초가 수직으로 바닥에 꽂혔다. 질근질근 밟아 툭 밀어낸 차유신이 다시 정훈석을 봤다. 머뭇거리던 그가 답했다.
“걔하고 키스도 했잖아. 몇 번이나.”
“해 달라고 해서 한 거야.”
“마음에도 없는 여자애하고 키스를 할 수 있어?”
차유신의 입에서 노곤한 숨이 샜다. 이번 쉬는 시간에는 여기까지만 피우려 했는데, 갑자기 한 대가 더 고파졌다.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담뱃갑을 더듬었다. 안에다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텅 비어있었다. 씨발. 절로 욕설이 씹혔다.
“김신혜하고는 좀 그렇게 지내야 해. 사정이 있어.”
손을 뺀 차유신이 읊조렸다. 정훈석은 여전히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보던 차유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대놓고 외면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차유신을 버릇처럼 ‘차신유’라고 부르는 김신혜는 국내 중견기업 외동딸이었다. 그 중견기업은 ‘위대한 아이들의 집’ 재단의 주요 스폰서 중 하나였고, 차재후와 류민경 입장에서는 매우 신경 쓸 수밖에 없는 VIP의 자녀였다.
신혜하고는 무조건 친하게 지내라. 입학할 때부터 차재후와 류민경은 누누이 그 얘기를 했다. 차유신은 늘 그래왔듯 그들의 지시를 새겨들었다.
다행히 친해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김신혜는 엄청난 골초인 데다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차유신 이외에도 키스 같은 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학생이 열 명은 족히 됐다. 오로지 차유신만 필요한 입장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막이 어찌 됐든, 차유신이 김신혜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차유신에게 있어 ‘가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최악의 행위로 분류됐다. 계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걸 정훈석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엄청난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쪽팔렸다.
“진짜 너 별것도 아닌 걸 다 신경 쓴다. 사내새끼들끼리 징그럽게.”
탄식한 차유신이 손을 내저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말인데, 정훈석은 오히려 더 심각해진 기색이었다. 나아간 그의 손이 굴러다니던 꽁초를 잡았다. 차유신이 갓 지르밟은 그것이었다.
“나한테는 별것도 아닌 게 아니야.”
꾹꾹 꽁초를 누르고 난 정훈석이 입을 다셨다. 차유신이 눈매를 찡그렸다.
“그럼 뭔데. 너 김신혜 좋아해?”
“아니. 난 너를 좋아해.”
정훈석이 앉은 채로 다리를 뻗었다.
“아마도.”
널브러진 꽁초가 그의 운동화에 콱 덮쳐졌다. 차유신의 눈살이 보다 찌푸려졌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인가.
“너 진짜 개소리를 정도껏….”
“이상하다는 것 나도 알아. 그런데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들어.”
정훈석이 한숨을 쉬었다. 한층 초연해진 눈빛이 차유신의 시야를 잠식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차유신이 먼지투성이 바닥을 짚었다. 손목을 타고 진땀이 맺혔다.
“왜 너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동질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
“동질감.”
몽롱하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끄덕인 정훈석이 입을 뗐다. 더없이 담담한 음성이 창고를 메웠다.
“어. 너하고 나는 닮은 게 많잖아.”
손가락이 삐걱거리며 웅크려졌다. 이어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차유신의 머릿속을 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유신아.”
쿵. 돌연 저편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일어난 정훈석이 저벅저벅 구석을 향했다. 아, 저거 결국 넘어졌네. 저번부터 의자 저렇게 쌓아둔 게 불안하긴 했는데…. 거기서부터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새까매진 사위 속에서, 차유신은 허탈한 비소를 곱씹었다.
내가 너하고 닮았다고.
감히 그딴 얘기를.
*
시작은 분노였다. 분노는 그 어떤 감상 없이 깨끗하기만 한 실체를 보여줬고, 그를 통해 차유신은 비로소 깨달았다. 정훈석이 자신의 모든 걸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잠깐의 평화에 매몰돼 그간 외면해왔던 진실이, 분노라는 거울을 투영하면 아주 잘 보였다.
“근데 유신이하고 정훈석은 이상하지 않아?”
그날 차유신은 창고에 있었고, 창고였음에도 모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가진 담배가 떨어져서였다.
“뭐가 이상한데?”
“정훈석은 태어나서 계속 역현구에 있었잖아.”
“어. 그렇다며.”
“그런데 유신이하고 친해질 일이 있어? 유신이가 그쪽으로 갈 일이 없는데.”
벽에 난 창문 너머로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여학생 하나에 남학생 둘의 조합으로 보였다. 누군지는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리를 둘 이유도 없는 다른 반 학생들이었다. 차유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지만, 그들은 차유신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 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말이다.
한 남학생의 말이 여학생 하나가 맞장구를 쳤다. 쌓였던 걸 그제야 표출하는 기색이 비쳤다.
“아, 맞아. 나도 그거 진짜 이상하더라. 심지어 둘이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친해졌다고 얘기한 적도 없잖아.”
“진짜 희한하지 않아? 둘이 별로 맞지도 않는 것 같던데. 같이 다니기는 또 엄청 잘 다니더라.”
“뭐, 알고 보면 차유신도 역현구에서 살았다거나.”
“아, 말이 되는 소리를 좀.”
잠잠히 있던 또 다른 남학생의 말에 남녀 학생이 동시에 일갈했다.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됐다. 서벅거리며 저편으로 걸어가는 학생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묵묵하게 앉아만 있던 차유신의 등이 넘어갔다. 거칠한 벽에다 뒤통수를 비벼대며, 눈을 깔았다.
바닥에서는 개미 떼가 기어가고 있었다. 졸졸 이어지는 행렬이 꽤나 길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그들의 자취를 눈으로 쫓으며 차유신은 아까 학생들이 남기고 간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그간 적당히 넘어가곤 했던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 역시.
‘차신유 근데 왜 정훈석이랑 같이 다녀?’
‘정확히 둘은 뭐 때문에 친해진 거야?’
‘차유신 가끔 존나 웃겨. 틈만 나면 정훈석하고만 따로 대화하는 거. 사귀어?’
탁. 운동화를 신은 발이 바닥을 짚었다. 선두에 있던 개미가 화들짝 놀라 다른 길로 빠졌다. 질서정연하던 행렬이 지리멸렬해졌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점점 매서워졌다.
이 이상 안 된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발이 허공에 떴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개미들이 방황 끝에 둥그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더 의심받기 전에, 정훈석은 잘라내야 한다.
와글거리는 개미 떼 위로 운동화가 올라갔다. 고통을 느낄 겨를조차 만들지 않고 단숨에 밟아 숨을 끊어버렸다. 직, 바닥을 긁어 확인사살까지 마친 후 몸을 일으켰다. 쪼그라든 개미 사체들이 바닥을 굴렀다.
작은 창문 틈으로 희미한 빗줄기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 건물이 보였다. 차유신은 서서히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희뿌연 오후의 햇살을 머금고 건물이 여러 개로 쪼개졌다. 어금니가 무겁게 씹혔다.
어떻게 얻은 지금의 삶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
*
“내일부터 따로 다니자.”
툭. 눈앞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황급히 등을 굽은 정훈석이 굴러다니는 우유 팩을 주웠다. 차유신은 심드렁하게 손에 들린 빈 우유 팩을 던졌다. 휙 날아간 팩이 거세게 벽에 튕겼다. 그것을 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미동하는 정훈석의 얼굴 근육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싫다는데, 이유를 말해야 해?”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어물거리던 정훈석이 간신히 입을 뗐다.
“그건 그렇지만, 최소한 나로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줘야….”
차유신의 입에서 탄식이 번졌다. 공허한 입 안에서 여러 가지 무언을 굴렸다. 단 하나를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유는 많았다. 나와 너는 같이 다니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서, 너와 다니는 것을 내 무리들이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네 존재 자체가 짜증 나서. 그리고.
“너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 죽였잖아.”
차유신이 발꿈치가 날카롭게 바닥을 긁었다. 정훈석의 동공이 확 커졌다. 널따란 어깨가 소스라치며 부들거렸다.
“그거…. 네가 어떻게.”
“내가 병신이야?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 죽기 전에 끌고 간 거, 너희 아버지였던 거 아직도 기억해. 너희 아버지 물품 챙겨놓은 서랍장에는 우리 어머니 지갑도 있더라. 뭐, 네가 한 것도 아닌 걸 굳이 네 탓처럼 입에 올리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긴 했지만.”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노곤한 손이 제 이마를 지분거렸다. 부쩍 서늘한 시선이 정훈석에게 꽂혔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일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잖아.”
“유신아.”
“여기까지 하자. 더 이상 너하고 말 섞고 싶지 않아.”
차유신이 등을 보였다. 그대로 걸어가는 차유신의 뒤쪽으로 다급한 기척이 찾아들었다. 다짜고짜 팔뚝을 부여잡은 정훈석의 입에서 가쁜 숨이 터졌다.
“미안해. 유신아. 그건 정말 미안한데….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잖아. 무엇보다 네가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너 좋아하는지.”
“네가 나 좋아하면, 있던 과거가 사라지기라도 해?”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정훈석이 크게 움칠했다. 마른 침을 삼킨 차유신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몸에 사무친 독기와 분기가 스멀거리며 혀를 옭맸다. 날 선 눈길이 정훈석을 관통했다.
“난 처음부터 네가 싫었어. 정훈석. 네가 깡패 새끼 아들이라서 싫고.”
차유신의 팔뚝을 거머쥔 정훈석의 손아귀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간신히 참아가며 차유신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죽여서 싫고.”
정훈석의 커다란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벽에 내몰린 채로, 차유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네가 그 버러지 같은 역현구 출신이라서 싫어. 네 존재 자체가 존나 더러워.”
우득. 정훈석에게 사로잡힌 팔에서 연골 짓무르는 소리가 났다. 찌릿한 아픔이 팔뚝을 울렸지만, 차유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띤 낯으로 정훈석을 올려다봤다. 이성이 끊긴 정훈석은 눈이 풀려있었다.
“너 말 다했어?”
차유신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어. 다했어.”
말이 끝나자마자 정훈석의 손이 올라갔다. 날렵하게 바람을 가른 주먹이 차유신의 흉부를 강타했다. 타격을 입은 가죽 너머의 신장들이 자지러지며 울렁였다. 나직이 신음한 차유신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위에 있는 교내 CCTV에 곁눈질이 걸렸다.
비릿한 피가 혀 밑에 고였다. 차유신은 퉤, 침을 뱉었다. 모든 전개가 자신의 계산과 한 치의 오차 없이 전부 맞아떨어져, 솔직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운회 간부의 아들이다. 저 손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
“야. 정훈석 퇴학!”
득달같이 열린 뒷문에서 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잔뜩 신이 난 외침에 교실이 크게 웅성거렸다. 차유신은 무덤덤하게 책상 밑 서랍만 뒤적였다. 다음 교시를 위한 교과서 준비를 해야 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걔 눈빛이 진짜 이상했다니까. 언제 한번 차신유 해코지할 줄 알았다고.”
손을 팔랑거리며 다가온 김신혜가 차유신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몇몇 학생들이 빠르게 차유신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걔 예전에도 몇 번 그랬다며. 진짜야?”
“넌 그걸 참고 있었냐? 이 병신아.”
“차유신이 봐준 거겠지. 어릴 때 엄청 친했다며.”
저희들끼리 질문하고 답변하는 말들이 공기처럼 부유했다. 차유신은 조금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눴다. 풍선처럼 부푼 소란이 무중력 상태에 접어든 듯 먹먹하게 다가왔다.
“차유신.”
드르륵. 뒷문이 또 열렸다. 김신혜가 바로 알은 체를 했다. 어? 박원락. 박원락은 잠자코 손짓만 했다. 차유신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한 학생이 물었다. 박원락의 옆으로 간 차유신이 신경질을 냈다.
“내 앞에서 더 이상 정훈석 얘기하지 마.”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박원락이 차유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걷자.”
차유신은 말없이 발을 뻗었다. 복도는 적당히 혼잡하고 적당히 한적했다. 이따금씩 자신을 향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유신은 능숙하게 외면했다.
“궁금한 게 있어.”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박원락이 운을 뗐다. 차유신이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뭔데.”
“정훈석이 너를 폭행했다는 사실에 대해 굳이 의문을 제기할 생각은 없어. 명백하게 CCTV 증거가 존재하니까.”
“그런데.”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해.”
“정훈석이 갑자기 그렇게까지 나온 게 이해가 안 돼. 엄청 순한 놈이라는 것 알잖아. 나도, 너도.”
박원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심지어 폭행한 현장은 교내 뒤편에서 유일하게 CCTV가 설치된 곳이야.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좀…. 마치 모든 상황이 계산된 것처럼.”
“박원락.”
차유신의 걸음이 멎었다. 박원락이 덩달아 자리에 섰다. 차유신이 허리를 짚었다. 창문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우중충한 하늘이 비쳤다.
“팩트만 얘기하자. 쓸데없는 의구심 품지 말고.”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박원락의 어깨를 쥐고는, 차분하게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타이르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친구끼리 왜 이래. 어?”
할 말을 잃은 박원락이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진이 빠진 시선이 비껴났다. 차유신은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을 함께 응시했다. 한층 더 침침해진 하늘이 꾸물거리다 쿠르릉, 소리를 뱉고 있었다.
“유신아.”
익숙한 부름이 들렸다. 박원락이 황급히 차유신을 살폈다. 뚜벅뚜벅 다가온 정훈석이 그들의 앞에 섰다. 차유신은 단조롭게 끄덕였다.
“어.”
“얘기 좀 할까?”
정훈석의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또 한 번 주억거린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저편에 보이는 화장실 쪽으로 발을 옮기며 정훈석을 손으로 불렀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박원락이 곧 입을 다물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남학생 서너 명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걸 돈 주고 사냐? 미친놈아. 뭐 어때, 간지 나잖아. 누구 찌르기라도 하게? 시시덕거리는 학생들을 보다가 차유신이 가볍게 벽을 쳤다.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곧 사색이 된 채 주춤거렸다.
“잠깐 여기 좀 비워 줘.”
차유신이 손을 까딱했다. 학생들이 서둘러 바깥으로 나섰다. 그들이 있던 자리 쪽에서 쨍그랑, 하며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학생이 흠칫거리며 뒤를 확인했지만, 곧 포기한 듯 마저 문 사이로 몸을 뺐다.
학생들이 모두 나가고, 조용해진 화장실 안으로 정훈석이 들어왔다. 차유신은 곤로하게 벽에 기댄 채 정훈석을 올려다봤다. 매끈한 바닥에 서벅거리는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차유신의 머리맡에 그늘이 드리웠다.
“일단…. 미안해.”
정훈석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차유신은 그저 제 머리를 쓸었다.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너 때렸으니까. 그때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더라고. 정말 미안해.”
정훈석의 허리가 바로 섰다. 차유신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숨을 가다듬은 정훈석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나한테 사과해줬으면 좋겠어.”
차유신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사과? 무슨 사과.”
“너 그때 말 함부로 한 것. 그리고.”
꿀꺽거린 정훈석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때 너를 때리게 한 것이며 나중에 네가 학교에 신고한 것, 전부 다 네가 사전에 계산한 일이었던 것.”
차유신의 눈초리가 미동했다. 정훈석은 여전히 진중한 낯으로 차유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 안에서 길게 혀를 굴린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시큰둥한 대꾸가 나왔다.
“아니라고는 얘기 안 할게.”
“유신아.”
“그런데 사과할 생각은 없어.”
차유신이 팔짱을 꼈다. 딱딱한 한 마디가 정훈석의 면전에 내뱉어졌다.
“정 사과받고 싶으면 너희 아버지한테 받아. 너에게 아주 더러운 운명을 부여했으니, 네 입장에서는 가장 시급하게 사과받아야 할 대상이지.”
차유신의 시선이 내려갔다. 바닥에 널브러진 은색 잭나이프가 보였다. 아까 화장실에서 남학생들끼리 돌려보던 것이 저것이었던 모양이다. 떨어질 때 튀어나왔는지, 솟구친 칼날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차유신이 몸을 숙였다. 뻗어나간 손이 잭나이프의 밑 부분을 쥐었다.
“따지고 보면 너나 나나 무슨 죄가 있겠어? 그저 역현구에서 태어난 게 죄지.”
손에 들린 잭나이프가 정훈석을 향했다. 다소 격양된 채 숨을 몰아쉬는 시뻘건 낯이 보였다. 차유신은 침착하게 정훈석의 손을 잡았다. 경직된 손아귀 안에 잭나이프의 밑 부분을 밀어 넣고는, 꽉 손가락을 조였다. 정훈석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꼼꼼하게 잭나이프를 쥐여 준 차유신이 손을 거뒀다. 심상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사과할 생각은 없지만, 네 분노를 한 번 더 받아줄 의향은 있어. 이번엔 딱히 수작 부리는 게 아니야. 여긴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없으니까. 너한테 칼 맞았다고 어디 가서 지껄이고 다닐 생각도 없어.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해? 나도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 못 해.”
차유신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적막한 정훈석의 얼굴을 보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 붙였다.
“역현구 방식으로 해결하자. 너도 따지고 보면 이게 편하잖아. 안 그래?”
차유신이 입을 다물었다. 지독한 정적이 사위를 에워쌌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화장실 안에서 쿵, 하며 또 한 번 천둥이 쳤다. 언뜻 확인한 창문 너머가 번쩍였다. 정말로, 곧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칼을 쥔 정훈석의 손이 달싹였다. 간헐적으로 고개를 드는 칼끝을 차유신은 무심하게 응시했다.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정훈석에게 칼 한 번 정도는 맞아줄 의향이 있었다. 그걸로 이 골치 아픈 연결고리를 종식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지쳤다. 기껏 지워낸 역현구의 그림자를 하염없이 들추는 정훈석의 존재가, 차유신은 너무도 지겨웠다.
쿠르릉. 천둥은 계속해서 쳤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셀 수 없을 정도의 천둥이 귀를 흔들었지만, 잭나이프를 쥔 정훈석의 손은 그대로였다. 차유신은 말없이 얼굴을 짚었다.
위선적이다. 차유신도, 정훈석도.
불현듯 화장실 문이 열렸다. 막 농구를 마친 듯한 땀투성이 남학생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병신아! 내가 얘기했잖아. 저 새끼 수비 허벌이라고. 낄낄거리는 남학생들을 본 정훈석이 잭나이프를 주머니 안으로 숨겼다. 속으로 혀를 찬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냉한 경고가 나왔다.
“네가 선택한 거야. 정훈석.”
그대로 정훈석을 스쳐지나갔다. 휙 문을 열고 나서는 차유신의 등 뒤로 뒤늦은 남학생들의 숙덕거림이 들렸다. 야, 쟤 그 학생회장…. 그 폭행했던 새끼랑? 무슨 그림이야? 헛헛한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문을 닫았다. 탁. 정훈석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발만 뻗었다. 그저 최대한 정훈석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멀어져서, 이 지저분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여울, 어머니, 역운회, 역현구. ‘차유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모든 것들 전부. 지워버리고 싶었다.
차유신은 그저 평범하고 싶었다.
“유신아.”
뒤편에서 헐떡이는 외침이 찾아들었다. 멈칫한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동시에 주변에서 술렁임이 번졌다. 야, 저거 뭐야? 미친 것 아니야? 칼은 왜 들었어? 질겁한 학생들이 너도나도 뒷걸음질을 쳤다. 텅 빈 차유신의 사위 안으로 정훈석이 들어왔다. 한 손에 아까 차유신이 쥐여 준 잭나이프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코앞까지 다가온 정훈석이 차유신의 어깨를 감쌌다. 꺄악! 여학생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정훈석이 차유신에게 칼이라도 찔러 넣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학생들이 몰려있는 쪽은 차유신의 등 뒤였다. 앞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나 너하고 진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완연히 젖어든 한 마디였다. 차유신은 차분하게 속눈썹을 치켜들었다. 후들거리는 정훈석의 턱이 보였다.
“사과 필요 없어. 그런 거 없어도 돼. 조용히 자퇴할게. 그냥 아주 가끔만…. 평범한 친구처럼 지내자. 아무도 모르게, 너하고 나 둘이서만.”
“나는 싫은데.”
단출하며 냉한 대꾸였다. 정훈석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팼다. 꼿꼿하게 눈을 맞춘 차유신이 뇌까렸다.
“난 죽어도 싫어. 정훈석.”
올라간 차유신의 발이 정훈석의 복부를 찔렀다. 이내 가차 없이 발목에 힘을 실었다. 무방비하게 걷어 채인 정훈석이 벽에 부딪혔다. 헉, 소리를 낸 그가 옆을 내디뎠다가 밑에 죽 늘어진 계단을 굴렀다. 곳곳의 학생들이 요란한 소음을 터뜨렸다.
한 걸음 나아간 차유신이 밑을 내려다봤다. 꽤나 긴 계단을 굴러떨어진 정훈석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의 밑이 조금조금 붉어졌다. 어딘가에 제대로 부딪혔는지, 머리에서 흐른 핏물이 시뻘건 강을 이뤄가고 있었다.
날연하게 올라온 손이 눈가를 덮었다. 할딱이던 호흡이 점점 무뎌졌다. 덩달아 흐릿해지는 뇌리에, 차유신은 같은 위로를 연달아 새겼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이제야 괜찮아졌다.
*
전일 저녁 뉴스에서는 100년 만에 서울에서 개기일식을 보는 기회가 오늘 오후 찾아온다고 했다. 우태원은 왠지 그날 아침 일찍 기상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석일태 회장의 심각한 낯을 접했다.
정훈석이 오늘 새벽 죽었다고 했다.
*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 쉰여 명이 우르르 장례식장 복도를 가로질렀다. 정무경이 기획 이사를 맡은 SDB그룹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역운회였다. 가장 먼저 빈소에 들어선 석일태 회장이 성큼성큼 안쪽을 향했다. 새까만 상복을 입은 중년여성이 기겁했다. 부산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정훈석의 고모였다. 석일태 회장의 뒤편에 있던 비서가 예사로운 인사를 건넸다.
“정무경 이사의 휴가 요청이 교도소 측에서 반려됐습니다. 예우 차원에서 석 회장님이 직접 빈소에 방문하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들이 적당히 열을 맞춰 섰다. 덜덜거리던 중년여성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뒤편에 서 있던 우태원이 빠끔히 여성을 봤다. 비로소 안도한 여성이 손짓을 했다.
“왔구나. 태원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우태원이 여성 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일으킨 여성이 우태원을 꼭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어떻게 하지? 태원이가 그렇게 좋아하던 형이 갑자기 이렇게 돼서.”
우태원은 그저 눈만 굴렸다. 가장 앞에 선 석일태가 영정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국화 한 송이를 두고는, 곧 물러났다. 표정 없이 사진을 보던 그가 묵례를 했다. 그를 시작으로 쉰여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머리를 굽었다. 우태원을 안은 여성의 손목이 들썩였다. 우태원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말이 들렸다.
“저 깡패 새끼들…. 무경이하고 훈석이 인생 망쳐놓고, 뭘 잘했다고 얼굴을 비치고.”
목을 바로 한 석일태가 몸을 틀었다. 바깥쪽으로 나서는 석일태를 따라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돌연 여성이 콱 우태원의 어깨를 잡았다. 버겁게 숨 고르는 소리가 귀를 옭맸다.
“태원이는 저렇게 크지 마라. 응? 저러고 살다가 일찍 죽어.”
*
밖으로 나왔다. 뉴스에서는 지금쯤 개기일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 없는 뭉게구름만이 두 개, 세 개로 겹쳐져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우태원은 뚫어져라 위를 보며 교복 재킷을 매만졌다.
어딘가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저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교복 차림의 남학생이 보였다. 우태원은 한눈에 알아봤다. 해였다. 우태원이 처음으로 본 태양이 그곳에 있었다.
화단에 걸터앉은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담배 연기가 흘렀다. 묵묵하며 올곧은 실루엣은 숨을 쉬는 것 같으면서도 쉬는 것 같지 않았고, 어딘가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웃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의 입매를 우태원은 집요하게 관찰했다. 정말로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환희였고, 서글픔이었으며, 절망이었다. 저리도 복잡한 미소가 있다는 걸 우태원은 처음 알았다.
쉼 없이 화염을 분출하는 태양처럼, 차유신은 초 단위로 자신의 기의(記意)를 발화했다.
우태원의 발이 나아갔다. 터벅터벅 걸어 차유신의 근처로 다가갔다. 알아챌 법한 거리가 됐음에도 차유신은 우태원을 보지 않았다, 그저 꽁초만 남은 담배 끝을 툭, 툭, 두드리며 눈을 깔 뿐이었다.
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우태원의 시선이 이동했다. 석일태 회장을 비롯한 정장 차림의 남자 몇몇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태원은 다시 한번 차유신을 확인했다. 차유신의 입매에는 여전히 호가 걸려있었다.
“저기.”
우태원의 손이 올라갔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마저 뻗어진 손이 차유신의 눈가를 짚었다. 나지막한 음성이 건네졌다.
“안에 뭐 들어갔어요. 형.”
말랑한 눈 밑을 가붓하게 눌렀다. 휘어있던 눈매가 사그라지고, 망막이 차츰 녹녹해졌다. 그대로 손을 끌어내린 우태원이 눈을 깜박였다. 침묵에 물든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저편에서 막 담배를 문 석일태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훅, 연기를 뿜은 석일태의 근처로 한 남성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훈석이한테 칼 맞을 뻔했다가 실수로 밀었다는 학생이….”
우태원이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쳤다. 차유신을 방어하듯 막아선 채 시선을 정면에 뒀다. 자신을 주시하는 차유신이 보였다. 기꺼이 마주 본 우태원의 얼굴이 올라갔다. 차유신의 머리 위로, 새빨간 테두리를 두른 검은 구렁텅이가 보였다. 차유신의 동공처럼 새까만 원이었다.
아. 우태원의 입이 떨어졌다. 구렁텅이와 수직을 이루는 자리에 차유신의 정수리가 있었다. 다 피운 꽁초를 집어 던진 차유신이 느른하게 등을 폈다. 감겨가는 그의 눈꺼풀 안에서 까만 원이 죽어갔다. 우태원의 울대뼈가 꿀렁였다.
우태원은 그날 한 가지를 알았다. 완전한 태양은 없다는 걸.
저 사람은 분명히 태양이지만 언제나 빛나는 태양은 아니다. 그는 언제라도 달에 삼켜져 검게 물들기도 하고, 일그러지기도 하며, 녹아내리기도 한다. 그걸 깨달았을 때 우태원은 태양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옅어졌다. 여전히 두렵다면 두려웠지만, 그걸 가볍게 압도하는 욕망 앞에서 공포는 찰나의 불꽃에 불과했다.
우태원은 저 태양을 거머쥐고 싶어졌다. 그리고 끌어내리고 싶어졌다. 자신이 있는 이 밑바닥으로 추락시켜, 새까만 구렁텅이에 가두고 싶어졌다.
개기일식을 마주한 열네 살의 가을, 우태원은 처음으로 욕망을 이해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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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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