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8/48)

17.

딱. 명쾌한 마찰음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찡, 하는 이명이 뇌리를 가로질렀다. 짧게 신음한 차유신이 얼굴을 짚었다. 호젓하며 삭막한 기류가 목덜미를 옥죄어왔다. 가볍게 도리질을 한 뒤 제대로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침침한 실내가 담겼다.

등을 보인 우태원은 골프채를 들고 있었다. 여유로운 스윙 끝에 정확하게 맞은 공이 휙 날아가 그물에 걸렸다. 하얀 망이 통째로 출렁였다. 근처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한 남자가 박수를 쳤다. 기절하기 직전, 차유신에게 인사를 건넨 역운회 간부였다.

“270은 족히 나왔겠는데요.”

“헤드가 너무 가볍네.”

중얼거린 우태원이 들고 있던 골프채를 내려놓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다란 클럽이 바닥을 굴렀다. 남자 하나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것을 챙겼다. 이내 남자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 정자세로 섰다.

둘러보던 차유신의 눈이 연신 미동했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일단은 밀폐된 공간이고, 꽤나 넓다. 안에는 각종 골프 장비가 그득하고, 유일하게 창이 난 벽면에는 공을 막아주는 대형 그물이 설치돼있다.

안에 있는 남자는 총 서른 명가량. 아까 매천회를 치기 위해 들어온 무리에 속해 있던 이들이 종종 보인다. 하나같이 체격이 좋고 인상이 사나워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시하는 우태원은, 막 허리를 틀어 차유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시간이나 걸렸어.”

손목시계를 확인한 우태원이 혀를 찼다. 근처에 있던 역운회 간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클럽 다른 걸로 가져와 봐. 드라이버로.”

무시한 우태원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아까 골프채를 주워간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가 장비를 뒤적였다. 헤매는 남자를 또 다른 남자가 답답하다는 양 닦달했다. 1번, 1번이라고 적힌 거. 그제야 골프채 하나를 뺀 남자가 우태원에게 갔다.

“내가 사전에 얘기했잖아.”

받아든 우태원이 커다란 헤드로 바닥을 짚었다. 우태원을 살피던 간부가 긴장한 듯 움츠렸다.

“어떤 얘기….”

“안전하게 모셔오라고 했지.”

“그러려고 했는데, 형님께서 아시다시피 차 의원님은 저희가 가잔다고 그냥 따라주실 분이….”

“그래도 대화로 해야지. 우린 사람이잖아.”

두어 번 바닥을 두드리고 난 우태원이 골프채를 고쳐 잡았다. 사색이 된 간부가 울대뼈를 꿀꺽거렸다. 덩달아 조용해진 주변의 남자들이 우태원의 눈치를 봤다.

“두 시간이나 기절을 시키면 어떻게 해. 저분이 누군지 잘 알면서.”

휙. 매섭게 허공을 가른 헤드가 간부를 향했다. 억! 정확히 복부를 맞은 그가 고꾸라졌다. 골프채를 위로 한 우태원이 간부의 머리를 구둣발로 건드렸다.

“사람답게 살자. 문직아. 응?”

다시 골프채가 휘둘러졌다. 아까보다 우악스럽게 날아간 헤드가 간부의 등을 가격했다. 뻑, 하는 둔탁한 타격음이 실내를 울렸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터뜨린 간부가 입에 피거품을 물었다. 거의 졸도 직전인 그의 머리를 한번 밟고 난 우태원이 골프채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바닥을 깰 듯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클럽이 빙글거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줍지 않았다.

“문직이 병원 데려가라.”

한숨 섞인 지시를 한 우태원이 양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얼어붙은 듯 멈춰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간부를 부축했다. 간부의 입에서 줄줄 흐른 핏물이 바닥에 고였다. 시체처럼 늘어진 몸이 붉은 자취를 남기며 질질 이끌려갔다.

“박 선생이 뭐래.”

우태원이 남아있는 남자 중 하나에게 눈을 뒀다. 갓 핸드폰을 얼굴에서 뗀 남자가 신속하게 답했다.

“생각보다 일찍 정신을 차렸고, 아까 검진했듯 상태 자체는 양호하니 걱정할 것 없다 합니다.”

“그래.”

우태원이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구겼다 폈다. 곧 주변의 남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일단 상황 끝났으니 전부 나가 봐.”

“알겠습니다. 형님.”

한목소리로 답한 남자들이 움직였다. 내부가 잠시 소란해졌다. 일사불란하게 비워지는 실내 안에서 마지막 남자가 문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바닥의 핏자국이 소리 없이 굳어갔다.

“문직이가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선배가 많이 무서웠나 봅니다.”

뚜벅뚜벅 다가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앞에 섰다. 일어나려던 차유신이 곧 포기했다.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가 별문제는 없다 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건조한 손가락이 차유신의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뺀 차유신이 우태원을 쏘아봤다.

“매천회는 어떻게 됐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직접 매천회하고 붙은 게 아니잖아요.”

피식거리던 우태원이 정색했다.

“곽희서 회장이 병원에 입원했고, 아주 위독하다는 얘기를 전달받긴 했지만요.”

차유신이 치를 떨었다. 허탈한 상념이 머리를 채웠다.

병신 같은 곽희서. 결국 실패했구나.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안 보이는 데서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왜 자꾸 일을 키우세요.”

우태원이 안쓰럽다는 듯 눈매를 접었다. 차유신이 이죽거렸다.

“너 보이는 데서 대놓고 칼춤 추면, 네가 잘도 날 도와주겠다.”

“그건 나도, 선배도 모르는 일이죠.”

우태원이 상냥하게 대꾸했다. 눈 싸움을 하듯 노려보던 차유신이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의미한 신경전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자. 내가 패배한 것 인정할 테니, 비켜. 나가게.”

반쯤 일으켜진 차유신의 몸이 돌연 묵직해졌다. 딱딱한 구둣발이 어깨를 억눌러오고 있었다. 무기력한 몸이 의도치 않게 원상 복구됐다. 차유신이 성을 냈다.

“뭐야. 또.”

“여기도 지문인식이에요. 선배 혼자서 못 나가요. 내 건물이거든요. 내 의원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가장 위층.”

“그러니까 네 손가락 분질러서 인식을 시키든….”

“나 궁금한 것 많은데, 선배한테. 대답 다 듣기 전까지는 선배 못 보낼 것 같아요.”

우태원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차유신이 버럭 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내가 매천회 쪽에 관리사무소 치라고 사주했어. 네가 CCTV로 봤듯이. 그런데 매천회에서 제대로 못 했고, 결과적으로 역운회가 이겼어. 네가 이겼다고. 이제 됐어?”

“왜 그걸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죠? 생각보다 분해하는 기색이 안 보이네. 선배답지 않게.”

우태원이 몸을 숙였다. 가까워진 시선이 차유신의 얼굴을 관찰하듯 쓸었다. 차유신이 한탄했다.

“나 지금 상당히 피곤하거든? 그러니 빨리 좀 보내자. 그 잘난 면상 긁어버리기 전에.”

“또 숨기는 것 있죠? 나한테.”

어조가 부쩍 서늘했다. 덩달아 그의 눈빛이 냉해졌다. 바닥을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등줄기에 부쩍 한기가 일었다.

씨발 새끼. 하여간 눈치는 빨라갖고.

“그만하지?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거, 없어 보이니까.”

차유신이 외면했다. 우태원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선배는 그냥 못 내보내겠네요.”

우태원이 허리를 세웠다. 주변을 휘 응시하다가,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골프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지압하는 것처럼 꽉꽉 주물러대던 그가 읊조렸다.

“선배는 내가 부탁한 걸 어겼어요. 자꾸 나 몰래 뭔가를 하려고 하잖아.”

“그게 부탁이었어? 나는 꿈에도 몰랐네.”

“네. 부탁이었어요. 덕분에 제가 지금 화가 많이 났고요. 선배 앞이라, 제대로 드러내질 못해서 그렇지.”

“그냥 화내도 돼. 내도, 안 내도 너는 원래 좆같거든.”

차유신이 조소했다. 우태원이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지금부터 그냥 화를 내려고요.”

우태원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대뜸 차유신의 다리를 움켜쥐고는 구두를 벗겼다. 뇌호한 손아귀가 발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당겨 바닥에 고정시켰다. 차유신이 고개가 덜컥 들렸다.

“뭐하는… 아아악!”

콰직. 단숨에 발등에 올라온 골프공이 내리 찍혔다. 피부 너머의 조직들이 갈가리 파열됐다. 발버둥 치는 통각이 다리를 울렸다. 완전히 널브러진 차유신이 바닥을 짚으며 헐떡였다. 꽉 깨물린 이빨 틈으로 욕설이 샜다.

“아아… 씨바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사람 뼈는 생각보다 쉽게 붙거든.”

뇌까린 우태원이 또 한 번 골프공을 짓밟았다. 살을 파고드는 공 밑에서 파삭, 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축 처진 차유신이 부들거렸다. 차라리 절단해버리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온 다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물론 한 달 정도는 고생 좀 하겠지만요.”

우태원의 발에 밀린 골프공이 툭, 떨어졌다. 바닥을 디딘 그가 삐딱하게 물었다.

“얘기 안 할 거예요?”

숨을 몰아쉰 차유신이 일갈했다.

“안 해. 씨발 새끼야.”

“그래요?”

우태원이 등을 굽었다. 차유신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이 쑥 빠져나왔다. 제 것처럼 만지작거리며 우태원이 저벅저벅 걸었다. 저편의 소파에 몸을 앉힌 뒤 물끄러미 눈을 맞춰왔다.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기서 나가는 게 목적이겠죠.”

차유신은 말없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차유신의 핸드폰으로 툭, 툭, 시트를 두드린 우태원이 머리를 쓸었다.

“그래요. 선배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게요. 대신 내가 원하는 걸 몇 가지 해줘요.”

“뭐. 새끼야.”

“일단 여기까지 와 봐요. 물론 기어서 와야겠죠. 지금 두 발로 못 걷잖아요.”

우태원이 다리를 꼬았다. 응달 같은 눈빛이 차유신을 압도했다.

“다른 발등까지 아작나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차유신의 숨이 가빠졌다. 빤히 차유신을 보던 우태원이 턱짓을 했다.

“빨리해요. 시간 많이 줄 생각 없으니까.”

곁눈질로 손목시계를 본 그가 갸웃했다.

“한 일 분?”

다시금 차유신을 관조하는 낯은 완연한 진심이었다. 커다랗게 턱을 떤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잘못 걸렸다. 하고많은 곳 중 하필이면 개새끼 소굴에 들어왔다.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은 입장에서, 이곳을 가장 신속하게 탈출하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뿐이었다.

개처럼 구는 것.

손 하나가 더듬거린 끝에 나아갔다. 앞을 짚고는, 무릎 하나를 세워 바닥을 디뎠다. 나머지 손과 무릎까지 모두 바닥에 올렸을 때 차유신은 개처럼 엎드린 자세가 됐다. 막막해진 입 안에서 욕설이 씹혔다.

씨발, 진짜 살다 살다….

“삼십 초.”

우태원이 고저 없이 한마디 했다. 식식거린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일부러 우태원 쪽을 보지 않은 채 손과 무릎을 번갈아 옮겼다. 깨진 발등이 바닥에 쓸렸다. 아. 신음한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움직임을 이어갔다. 손, 무릎, 다시 손, 또 무릎. 나아가는 내내 뒷덜미에 진땀이 맺혔다. 대체 지금 자신이 뭐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태원에게 향하는 건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래야 뭐라도 한다.

눈앞에 우태원의 구두가 있었다.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턱을 괸 우태원이 흡족히 칭찬했다.

“잘했어요.”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잘해.”

우태원의 얼굴이 다가왔다. 속삭이는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저 꼴리게 한 거요. 그 대단한 차유신이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걸 손수 보여주셨잖아요.”

말을 마친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 정장 바지가 두드러질 정도로 튀어나온 앞섶이 보였다. 흠칫한 차유신이 몸을 빼는 사이, 날렵하게 올라온 구둣발이 가슴을 걷어찼다. 크흡. 탄성을 터뜨린 차유신이 바닥을 굴렀다. 제대로 바닥과 마찰한 발등이 통째로 전율했다. 고통에 사무친 무릎이 덜컥거렸다.

다가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팔뚝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이어서 올라온 다른 손이 차유신의 바지 버클을 박살낼 듯 챘다. 바로 상황을 파악한 차유신이 우태원을 노려봤다.

“또 뭐 하려고.”

“섰으니까, 해결을 해야죠.”

“강간이라도 하게? 짐승 같은 새끼야.”

“엄밀히 말하면 강간이 아니죠.”

우태원의 손가락이 버클을 헤집었다. 찰칵, 소리를 내며 풀린 버클 밑에서 빠르게 지퍼가 내려갔다. 이어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부여잡은 손아귀가 매섭게 옷가지를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치부가 싸늘해졌다. 차분한 음성이 차유신의 귀를 스쳤다.

“짐승하고 하는 건 수간(獸姦)일 텐데요. 선배.”

한껏 인상 쓴 차유신이 손을 내뻗었다. 우태원이 느긋하게 차유신의 다친 발등을 지르밟았다. 무릎까지 파열감이 쫙 솟구쳤다. 아아악! 탄성을 내지른 차유신이 둥글게 몸을 말았다. 머리맡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태원이 조곤조곤 말했다.

“말 참 안 들으시네요. 빨리 나가고 싶다는 분이.”

“하으… 아, 읏.”

“일부러 신경 써서 빨리 회복할 수 있게끔 밟아드렸는데…. 아예 못 걷게 해줘요?”

“개새끼야….”

고통에 젖은 몸이 파들거렸다. 그새 무릎까지 내려온 차유신의 옷가지가 마저 당겨졌다. 발목 밑으로 바지와 속옷이 쑥 빠졌다. 휑해진 차유신의 하반신을 눈으로 쓴 우태원이 뇌까렸다.

“허벅지 예쁘네요. 전 선배 몸 중에서 여기가 가장 보기 좋더라고요.”

“지랄하지 마.”

“물론 선배의 화난 얼굴만큼은 아니지만요.”

어조가 자못 황홀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는 투였다. 양 눈을 질끈 감은 차유신이 고개를 기울였다. 발등의 통증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태원의 무릎 하나가 올라왔다. 차유신의 한쪽 허벅지를 짓누르고는, 다른 손으로 반대쪽 허벅지를 올려붙이며 틈을 만들었다. 동시에 훤히 드러난 엉덩이골로 손가락이 다가왔다. 움츠러든 회음부를 꾹 누른 우태원이 물었다.

“쑤셔본 적 있어요? 여기에.”

“쑤시긴 뭘 쑤셔. 내가 변태 새끼도 아니고.”

따져대던 차유신의 입이 문득 멎었다. 예고 없이 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왔다. 칼로 맞은 것처럼 아래가 찡했다. 입술을 깨문 차유신이 바닥을 짚었다. 절로 목이 꺽꺽거렸다.

“거길 왜 그따위로 쑤시… 흡.”

“여자하고 할 때처럼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남자는 어렵네요.”

“그럼 안 하면 되잖아. 이 씨발 새끼야.”

“그건 싫어요.”

이기죽거린 우태원이 손을 뺀 뒤 제 앞섶을 추어올렸다. 눈치채지 못한 새 버클이 풀린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갔다. 곁눈질로 보던 차유신의 속눈썹이 흠칫했다. 검고 무성한 체모 밑으로 언젠가 봤던 거대한 살덩이가 비쳤다. 아까 바지가 꽤 튀어나와 있어, 이미 많이 발기했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워낙 대물이다 보니 조금 발정한 것만으로 쉽게 두드러지는 모양이었다.

“선배는 강간을 당해서라도 여길 나가고 싶고, 나는 여기가 이렇게 됐는데.”

뭉뚝한 귀두가 차유신의 회음부에 닿았다. 희롱하듯 위에서 아래로 쭉 미끄러뜨리다 입구를 문질렀다. 금방이라도 들어올 듯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끄트머리에 구멍을 감싼 주름들이 움칠거렸다. 우태원이 느른하게 질문했다.

“충분히 해도 되는 상황 아니에요? 나는 우리가 합의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문득 차유신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발등이 깨질 듯 아픈 와중에도, 그 말에는 웃음이 나왔다.

“합의라.”

나아간 손아귀가 우태원의 팔뚝을 감았다. 꼿꼿하게 눈을 맞춘 차유신이 대놓고 비꼬았다.

“너 국어 다시 배워야겠다.”

우태원이 미소로 응수했다.

“무식해서 미안하네요. 선배.”

불현듯 저편에서 지잉, 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와 우태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소파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차유신의 핸드폰이 끝내 시트 밑으로 떨어졌다. 콰직, 소리와 함께 액정에 금이 갔다. 다행히도 기기는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액정의 번뜩임은 끊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차유신의 눈초리가 일그러졌다.

권헌 비서.

“이 친구하고 교류를 자주 하시네요.”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을 챙기려는 그를 차유신이 저지했다.

“건들지 마.”

우태원이 멈칫했다. 차유신을 힐긋한 그의 고개가 삐뚜름해졌다.

“왜 건들면 안 되죠?”

“가져가서 뭐 하게.”

“받을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엉덩이 틈에 머물러있던 귀두가 경고하듯 구멍을 지분거렸다. 차유신의 입술이 피가 날 기세로 깨물렸다.

“흐읍… 그러니까, 왜 받는 건데.”

“정확한 용도는 저도 지금 생각 중인데요.”

심상한 언어를 이어가던 우태원이 돌연 생식기를 세로로 세워 비비적거렸다. 회음부와 마찰하며 쭉 올라온 남근이 차유신의 음낭과 성기를 건드렸다. 차유신의 발가락이 순간적으로 움츠려졌다.

“읏….”

“일단은 지금의 선배 목소리를 저쪽에 들려줄까 합니다.”

우태원이 얼굴을 숙였다. 차유신의 목덜미에 닿은 혀가 살살 살갗을 간지럽혔다. 진동하던 차유신의 눈망울이 돌아갔다. 다시 핸드폰을 잡으려는 우태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부리나케 팔을 뻗은 차유신이 그를 부여잡았다. 쥐어 짜내는 경고가 나왔다.

“하지 마. 씨발.”

우태원이 사뭇 곤로하게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마주 보던 차유신의 심장이 쉼 없이 덜컹거렸다. 받으면 안 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건 상대방이 우태원인 걸 모르는 권헌이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른다는 거다. 혹여나 차유신이 지시한 비밀리의 임무에 대해 의도치 않게 누설이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힘 있게 우태원의 팔을 끌어내렸다. 제대로 우태원을 본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빨리 박기나 해. 개새끼야.”

우태원이 소리 내 비식거렸다.

“그것참 감사한 얘기네요.”

미소를 지운 우태원이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을 옮겼다. 회음부를 쓸고 난 빳빳한 손가락 두 개가 동시에 구멍을 파고들었다. 동공을 키운 차유신이 어깨를 떨었다. 아래가 밧줄로 꿰뚫린 것처럼 쓰라렸다. 쓸려 올라간 차유신의 셔츠 밑에서 잘 다듬어진 복근이 꿈틀거렸다. 대체 들어오는 게 이것보다 커지면, 그때는 어떻게 된다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프죠? 선배.”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내벽을 살살 긁어대는 자극에 구멍이 소스라치듯 벌름거렸다. 바닥을 쥐어짠 차유신이 그르렁거렸다.

“당연한 걸 묻고 있….”

“빨아줄까요? 잘 풀리게.”

은은한 제안은 조롱을 닮아 있었다. 차유신이 시근덕거리며 눈매를 구겼다.

그딴 걸 우태원과 한다고.

그것참 좆같은 얘기였다.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네 귓구멍에 제대로 처박아줄게.”

차유신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비아냥거리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나 지금 기분 좋자고 너하고 이러고 자빠져있는 것 아니야.”

언어 곳곳에서 독기가 솟구쳤다.

“네 밑에서 다리 벌려주니까 네가 내 뭐라도 된 줄 알아? 아주 좆같은 착각하고 있네. 씨발. 지 주제를 모르고.”

퉤. 우태원의 면상에 침을 갈겼다. 무표정으로 숨을 고른 우태원이 얼굴을 훔쳤다. 다시 차유신을 확인하는 낯이 부쩍 식어있었다.

“그래요. 선배는 부드럽게 풀어주는 건 취향이 아닌가 보네요.”

채워져 있던 손가락이 돌연 빠져나갔다. 차유신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손을 뻗은 우태원이 저편을 짚었다. 굴러다니던 골프공 하나가 그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왔다. 입을 벌린 우태원이 표면을 축였다. 추웁, 소리에 차유신의 귓바퀴가 곤두섰다.

“그래도 풀긴 해야 하니, 아예 처음부터 익숙해지도록 하는 방법을 쓰죠.”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골프공이 차유신의 엉덩이 틈으로 들어왔다. 차유신을 힐긋한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이게 선배가 원하는 방식인 것 같으니, 따라 드리겠습니다.”

“뭐….”

푹. 차유신의 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밑쪽 구멍이 터질 듯 확장됐다. 순식간에 밀려든 골프공이 빡빡한 내벽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자지러진 복근이 움푹 팼다. 차유신이 몸 둘 바를 모르고 버둥거렸다.

“헉… 아윽, 아아…!”

“마음에 들어요? 더 넣어줄 수도 있는데.”

속삭인 우태원이 손가락까지 쑤셔 넣었다. 들어온 손가락이 부쩍 많았다. 네 개는 족히 돼 보였다, 심지어 굵고 기다란 손가락이라 골프공보다도 부피감이 컸다.

슬금슬금 나아간 손가락이 보다 안쪽까지 골프공을 찔러 넣었다. 그러면서 내벽을 탐색하듯 긁어대고, 비벼대고, 꾹꾹 누르기까지 했다. 자신조차 모르는 배 속을 훤히 내보이는 듯한 수치심에 차유신의 치가 떨렸다. 내장을 꽉꽉 움켜잡히는 듯한 고통은 덤이었다.

“하… 으으. 씨발….”

“지금 표정 좋아요. 선배.”

깊숙한 곳까지 굴러들어온 골프공이 점막을 밟아가며 빙그르르 돌았다. 따라 들어온 손가락이 벌름거리는 주름을 관찰하듯 더듬었다. 처음의 고통이 살짝 수그러든 가운데, 수치심이 한층 비대해졌다. 차유신이 악에 받쳐 쏘아붙였다.

“이딴 게 좋아? 변태 새끼야.”

“네. 전 좋아요.”

골프공이 슬그머니 더 내려왔다. 자신조차 모르는 내장기관이 불끈거리며 공을 튕겨냈다. 하윽. 탄식한 차유신이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는 공이 아예 찾지 못할 곳까지 넘어가 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막 벗어나려는 차유신의 허리를 우태원이 감았다. 그대로 끌어당기고는, 차유신의 귓불을 입으로 잘근거렸다. 그 와중에 공을 더 깊은 곳까지 박아버릴 기세로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절박한 숨을 터뜨린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이… 개새끼야… 씹….”

“저는 선배가 제 밑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기 좋고.”

우태원이 농락하듯 공으로 내벽을 지분거렸다. 주름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공이 회전했다. 차유신의 이가 딱, 딱, 부딪쳤다.

“흐으… 윽.”

“선배가 제 품에 안겨서 신음하는 것도 보기 좋아요.”

거의 한계까지 들어왔던 공이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이물질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걸 안 차유신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반사적으로 내뻗은 손이 우태원의 손목을 옥죄었다. 날 선 눈길이 그에게 꽂혔다.

“좆같은 것 빼. 이제.”

우태원이 빙긋 미소 지었다. 만족감에 젖은 손가락이 걸려있던 공과 함께 구멍에서 빠졌다. 크게 경련하고 난 차유신이 미미하게 안정을 찾았다. 그렇다고 우태원을 쏘아보는 눈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우태원의 눈매가 은연히 휘었다.

“그리고 저를 경멸 어린 눈으로 보는 선배도, 사실은 꽤 많이 좋아하죠,”

따악. 엉덩이 밑으로 흐른 공이 바닥을 굴렀다. 숨을 몰아쉰 차유신의 몸이 늘어졌다.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활짝 벌어져가는 자신의 양 다리가 느껴졌다. 다시 드러난 엉덩이 틈을 아까보다 한층 부푼 음경이 쓸었다. 이어 조금 통통해진 회음부를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거의 감길 뻔했던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우태원의 나긋하게 말했다.

“좀 더 날 경멸해줘요. 선배.”

자못 풀어진 입구에 딱딱한 생식기가 쑤셔 박혔다. 아악! 비명을 지른 차유신이 반대편으로 허리를 틀었다. 덩달아 돌아가는 차유신의 머리를 우태원이 움켜쥐었다. 이내 자신과 똑바로 눈을 맞추게 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왜 피해요.”

“하아… 씨발.”

“내가 선배한테 자지 박는 게 좆같잖아.”

“흐… 아, 으읍…!”

“그럼 더 싫어하는 얼굴을 나한테 보여줘야지. 응?”

우태원이 성난 허릿짓을 했다. 분연히 들어온 음경이 내벽에 개처럼 비벼졌다. 표피에 쓸린 점막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우태원의 귀두에서 터진 쿠퍼액이 진득하게 그 위를 도포했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맥을 못 추던 내벽이 끝내 우태원의 생식기를 울컥거리며 조여 댔다. 우태원의 어깨가 늘어졌다.

“후으…. 그 와중에 조이고 싶어요?”

차유신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옴짝달싹 못 한 채 노려만 보는 차유신을 응시하다, 우태원이 팔 하나를 내렸다. 차유신의 하얀 셔츠 안으로 쑥 들어온 손이 단숨에 목 끝까지 맨 살을 드러냈다. 찬기를 느낀 가슴팍이 미동했다. 우태원이 흡족하게 읊조렸다.

“가슴 오랜만에 보네요. 그때 한번 보고, 머릿속으로 수천 번쯤 더 보긴 했지만.”

대뜸 내려온 우태원의 입이 차유신의 유두를 덮쳤다. 유륜까지 한입에 품고는 가지고 놀 듯 이로 짓이겨왔다. 생소한 소름이 정수리까지 솟구쳤다. 차유신이 탁, 소리 나게 멀쩡한 발을 굴렀다.

“하… 씨입…. 좆같은 짓 좀 하지 말라고 했지….”

“좆같아요? 난 예전부터 빨고 싶었는데. 선배 비서하던 시절에, 샤워하고 알몸으로 나온 것 봤을 때부터.”

“그딴 걸 보고 왜… 아윽!”

“나 그때 엄청 흥분했었는데. 하늘 같은 의원님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어 넘어가긴 했지만.”

쭈웁, 하며 우태원의 입에서 젖꼭지가 빠져나왔다. 다른 쪽 유두로 입을 가져간 우태원이 방금 전 빨았던 곳을 손가락으로 쥐어짰다. 동시에 아직 메마른 쪽 젖꼭지를 깨물어가며, 하반신을 쑥 밀어붙였다. 낯선 지점에 다다른 귀두가 멋대로 쿠퍼액을 처발라가며 점막을 범했다. 차유신의 다리 틈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털이 곤두설 정도로 선명해졌다.

쌓아왔던 걸 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갈수록 거칠어지는 우태원의 굴신에 차유신의 몸이 쉴 틈 없이 흔들렸다. 귀두가 꽂혀 들어오는 지점도 점점 깊었다. 게다가 유두를 빨아대는 흡입감까지 짙어, 오감이 약에 취한 것처럼 지리멸렬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차유신은 어느 순간부터 저항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잊었다. 그저 빨리 끝나는 것을 기다리며 이 순간을 버틸 뿐이었다.

어쨌든 끝나면, 이 새끼를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밑에서 세차게 유륜이 물어 뜯겼다. 동시에 깊숙이 처박힌 귀두가 어느 점막 하나를 터뜨릴 기세로 두드려댔다. 흐읍. 간헐적으로 헐떡인 차유신이 가까스로 시선을 가눴다. 눈앞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우태원의 치골이 보였다. 체모 밑으로 남은 살덩이가 꽤 됐다.

차유신의 눈이 일그러졌다. 넣으려면 다 처박지,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스스로 다 넣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고, 생각한 게 있어서 그런 것일 텐데. 설마.

차유신을 봐주려고.

차유신의 잇새로 입 안의 점막이 씹혔다. 잔뜩 매서워진 눈이 돌아갔다. 그물로 점철된 통유리창 너머, 곳곳에서 불을 빛내는 그림자 같은 도시가 보였다. 역현구. 우태원의 고향. 그리고. 차유신의 망막이 부쩍 흐려진 끝에 뚜렷해졌다. 분기에 찬 상념 하나가 뇌리를 가로질렀다.

감히 깡패 새끼가.

“그냥 끝까지 처넣어.”

날카로운 명령이 나왔다. 우태원의 고개가 들렸다. 마주 본 차유신이 눈을 구겼다.

“꼴에 나 배려한답시고 되도 않는 수작질 하지 말고, 그냥 너 하던 대로 해.”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우태원이 느긋하게 물었다. 차유신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하찮은 동정 몇 번 깔짝거렸다고, 내가 너와 같아지진 않아.”

우태원의 표정이 굳었다. 차유신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협박하고 또 회유해도, 내 인생이 너하고 동급으로 떨어질 일은 없어. 평생.”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부쩍 묵직해진 우태원의 숨결이 느껴졌지만, 끝까지 모른 척했다.

차유신은 그저 이 좆같은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선배는 참 영리하세요.”

갑자기 우태원이 상체를 곧추세웠다. 차유신은 바닥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 저를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죠?”

돌연 다가온 팔뚝이 차유신의 허리를 둘렀다. 단숨에 차유신을 안아 든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연결된 하반신이 찌르르 울렸다. 넘어가는 차유신의 목을 우태원이 한 손으로 받쳤다. 은근한 음성이 다가왔다.

“선배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게요. 대신 선배도 나를 위해 하나 들어줘야지.”

우태원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향한 곳이 그물이 쳐 있는 통유리창이었다. 앞에 다다른 우태원이 팔을 풀었다. 흘러내린 차유신의 몸에서 우태원의 성기가 빠졌다. 아. 신음한 차유신이 비틀거렸다. 중심을 잃어가는 몸을 우태원이 챘다. 휙 몸을 틀게 한 뒤, 차유신의 양손을 창에 붙여가며 바깥을 보게 했다.

“잘 봐요.”

차유신은 제대로 서지 못했다. 으스러진 발등 때문에 한 다리로만 서야 하는데다가, 하반신의 감각이 진창난 탓에 자꾸만 고꾸라졌다. 사뭇 친절히 차유신의 허리를 감아 지탱해준 우태원이 제 치골을 차유신의 엉덩이에 붙였다. 차유신의 시선이 간신히 창 너머에 걸렸다. 나직한 목소리가 귀를 옭맸다.

“이 앞은 내가 태어난 운도동이고.”

엉덩이 틈에 쿡, 귀두가 박혔다. 윽. 차유신의 고개가 꺾였다. 남은 손으로 차유신의 고개를 잡은 우태원이 강제로 창밖에 눈을 맞췄다. 한층 나른한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저 너머에서 밝게 빛나는 곳이 선배가 태어난 사도동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새삼 불끈한 귀두가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 퉁퉁 부은 내벽이 저항하듯 꿈틀거리다, 끝내 흐무러졌다. 차유신의 양 팔뚝이 절박하게 창에 달라붙었다. 애써 비명을 참는 입술 틈으로 색색거리는 숨이 샜다.

“선배가 잘 모르는 것 같아 제가 굳이 확인시켜 드리는 겁니다.”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가슴을 덮었다. 반쯤 들어온 음경이 대번에 뿌리까지 들이닥쳤다. 아랫배를 중심으로 위아래 세포가 소스라쳤다. 차유신의 고개가 꺼떡거렸다. 시야에 걸린 역현구 전경이 갑자기 현현했다. 등줄기에 쫙 소름이 일었다. 이제야 인지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이건 마치 이 섹스를 전부에게 구경시켜주고 있는 것과 같았다.

“후읏… 씨발…! 뭐 하는 거야.”

“여기 지역민들도 그걸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 이번 기회에 알려주는 걸로 하죠.”

“뭐하는 거냐고 했지!”

“하지만 부정했던 대가는 치러야죠. 그들에게 선배 벗은 몸 감상시켜주는 것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엉덩이에 밀착된 우태원의 치골이 강하게 들썩였다. 마찰한 우태원의 체모를 타고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이 헤매듯 창을 짚어댔다. 우태원이 손가락을 모아 차유신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차유신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씹… 아, 읏…!”

“인정하세요. 선배. 일단 나부터 인정하죠. 내가 사실상 역운회라는 거.”

“우태원… 씨발, 씨바알! 좀….”

“그리고 선배는 그 역운회에게 다 대주는 걸로 소문난 마담의 아들이었고요. 그러니 지금은 그냥 선배 운명이라 해두죠.”

차유신의 속눈썹이 시근덕거리며 달싹였다. 휙 돌아간 시선이 우태원에게 꽂혔다. 우태원이 안여하게 물었다.

“내 말이 틀렸나요?”

다시 차유신의 턱을 챈 우태원이 보다 제대로 바깥을 보게끔 고정했다. 흔들리는 망막에 촘촘하게 빛나는 낮은 건물들이 걸렸다. 차유신의 호흡이 가빠졌다. 운도동 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우태원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층이니, 바깥에서 이쪽을 보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다만 그렇다고 치욕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감히 나를 창부로 취급해.

차유신의 어조가 부쩍 낮아졌다.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놔. 씨발 놈아.”

“글쎄요. 전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한없이 예사로운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선배도 지금은 나 못 벗어날 거고.”

말을 마친 우태원이 팔뚝에 힘줄을 세워가며 허리를 쳐올렸다. 철썩, 소리를 내며 차유신의 엉덩이가 홧홧해졌다. 쑥 들어온 생식기가 점막 곳곳을 마구잡이로 들쑤셨다.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는 차유신을 우태원이 꽉 끌어안았다. 애초에 쓸 수 있는 다리가 하나뿐이다 보니, 이 상황에서는 압도적으로 차유신이 불리했다. 강고한 팔뚝에 둘러싸진 차유신의 심장이 박동했다.

그렇다고 이딴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렁이던 동공에 사뭇 초점이 잡혔다. 검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벗은 몸이 오롯이 비쳤다. 끝까지 들어온 우태원의 생식기가 차유신의 뱃가죽에 선명한 능선을 새기고 있었다. 우태원이 장골을 뺐다 밀어붙일 때마다, 차유신의 배가 불뚝불뚝 튀어나왔다. 차유신의 턱이 전율했다.

좆같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어떻게든 답을 찾기 위해 이동하던 시선이 멈칫했다. 찢겨 늘어진 그물 한 자락이 눈에 띄었다. 위치를 가늠하고 난 차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을 뿜으며 막 얼굴을 든 우태원과 눈이 마주쳤다. 차유신이 담담하게 말했다.

“발 아파. 안아서 해줘.”

우태원이 비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저에게 뭐가 좋죠?”

차유신이 딱 잘라 말했다.

“네 무식하게 크기만 한 좆대가리를 쉽게도 끝까지 처넣을 수 있겠지.”

헛웃음 친 우태원이 흔쾌히 차유신의 어깨를 잡았다. 자신 쪽으로 향하게끔 몸을 틀고는, 양 팔뚝으로 허벅지를 받쳐가며 안아 올렸다. 높아진 어깨에 차디찬 창이 닿았다. 가볍게 등을 떠는 차유신의 다리 틈으로 퍽, 하며 성기가 꽂혔다. 넘어간 뒤통수가 딱딱한 표면에 부딪혔다.

치고 빠지는 생식기의 움직임이 꽤 난폭했다. 연신 쑤셔대는 음경에 맞물린 내벽이 진 빠진 채 쿨렁였다. 차유신의 눈이 괴로운 듯 구겨져 갔다. 다만 이성까지 구기진 않았다.

꽤나 열이 오른 우태원이 돌연 상체를 숙였다. 차유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다짜고짜 젖꼭지를 빨아댔다. 흡. 발가락을 바짝 세우고 난 차유신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지금이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

늘어진 그물을 잡아채고는 우태원의 목으로 가져갔다. 새까만 그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단숨에 목 안쪽부터 둘렀다. 촌각의 시간에 걸쳐 감고 난 차유신이 있는 힘껏 당겼다. 우태원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차유신이 고저 없이 말했다.

“씨발 놈아. 그냥 죽어버려.”

“하아…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으신가 봐요. 선배.”

우태원이 비식거렸다. 차유신이 바로 쏘아붙였다.

“어. 네 섹스 좆같거든.”

콱. 불현듯 달아오른 귀두가 내벽 끄트머리에 처박혔다. 아. 외마디 소리를 낸 차유신의 다리가 달달거렸다. 그 와중에 그물을 쥔 손을 놓지는 않았다. 시뻘겋게 충혈한 눈으로, 우태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머리가 좋으시네요. 덕분에 빨리 싸겠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랫배의 온도가 쫙 올라갔다. 폭발한 듯 터진 점액이 배 안을 질척하게 채워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굳은 양 무릎이 덜컥거리고, 그물 쥔 손이 느슨해졌다. 느릿느릿 내려온 우태원의 얼굴이 차유신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다정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기절은 선배가 먼저 해야겠어요. 내가 기절하면, 나갈 때 선배가 고생하잖아.”

그대로 뒷덜미가 휘어 잡혔다. 곤두선 손가락 두 개가 맥이 뛰는 부위를 찾아 꽉 조여 댔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차유신의 뒤통수가 유리창에 충돌했다. 꽤나 여유롭게 차유신의 배 안에서 성기를 휘젓고 난 우태원이 볼에 입을 맞춰왔다. 나긋한 언어가 귀를 녹였다.

“나하고 하는 섹스 안 좋았어요? 난 좋았는데. 지금까지 한 것 중에서 제일.”

쿵. 머릿속이 까맣게 암전됐다.

*

천장에 하얀 빛 조각이 걸려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차유신의 시야에 들어온 첫 피사체였다. 차유신이 눈을 뜬 순간, 그것은 갓 알에서 깬 것처럼 환하게 만개해 일렁였다.

불하나 켜져 있지 않아 다소 어둑한 공간 안에서 빛 조각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천장 한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다시 모서리로, 또 벽으로. 느릿느릿 이동하는 빛 조각을 차유신은 내내 눈으로 따라갔다. 저것이 어디에 다다를지가 궁금했다.

끝내 향한 곳은 입구 쪽의 문이었다. 새까맣고 조용한 문이 낯이 익었다. 차유신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역시나 우태원에게 목이 졸려 기절하던 날, 다시 눈을 떴을 때 차유신을 맞이하던 무채색 사위. 우태원의 공간.

매끈한 표면을 애무하듯 빛 조각이 미끄러질 때, 문이 열렸다. 주춤한 차유신이 벽에다 등을 붙였다. 밀려난 암막 커튼이 완전하게 창을 가렸다. 빛 조각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들어온 남자가 구십도 각도로 몸을 굽었다. 차유신은 그저 눈을 한번 깜빡였다. 다가온 남자가 침대 아래쪽으로 갔다. 차유신의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들친 후, 발등을 덮은 얼음주머니를 거둬갔다. 이어 허전해진 자리에 가져온 새것을 고정했다.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차유신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백진재 수석보좌관.”

막 손을 뺀 백진재가 멈칫했다. 몸을 세운 그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갔다.

“네. 의원님.”

“언제 왔지?”

“세 시간 전에 왔습니다.”

“이 방으로 바로 왔어?”

“아니요. 우 의원 사무실 꼭대기 층에 있는 골프연습장에 먼저 갔었습니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진재가 막막하게 입을 다셨다. 덩달아 입술을 질근거린 차유신이 싸늘하게 물었다.

“거기서 뭘 봤지?”

백진재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본 것은 없습니다.”

도리질이 서서히 멎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저는 전혀 모릅니다.”

차유신의 손톱이 꾹 시트에 박혔다. 사라졌던 빛 조각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백진재가 좀 더 다가왔다.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집에 가고 싶어.”

“움직이기에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저와 유해겸 비서가 아는 병원에 모셔다드리려 합니다. 치료를 받고, 국회까지 함께 가는 걸로 하시죠.”

“그럼 담배.”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백진재가 신속하게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빠져나온 한 대가 차유신의 입 앞까지 왔다. 그대로 문 뒤 고개를 들었다. 백진재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칙. 끄트머리에 빨간 불씨가 피었다.

“우태원은 어디에 있어.”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백진재가 부쩍 다른 쪽을 봤다. 차유신도 같은 곳을 봤다. 천장 모서리에서 까만 CCTV가 반짝이고 있었다. 백진재가 긴 숨을 내쉬었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높낮이 없는 한 마디가 시트에 내려앉았다.

“그건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보안?”

백진재가 끄덕였다.

“우 의원과 관련한 모든 사항이 제게 있어 보안입니다.”

차유신이 고개를 젖혔다. 넘어간 뒤통수가 벽에 쓸렸다. 나른한 한 마디가 연기와 함께 번졌다.

“그래. 보안.”

눈꺼풀이 가물거렸다. 삭막한 정적에 휩싸인 채 차유신은 하염없이 연기를 삼켰다. 아주 짤막한 나태를 즐겼다.

짙어지는 연기 속에서 백진재가 점점 흐려졌다. 백진재 뿐 아니라 차유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일그러져갔다. 유일하게 오롯한 것은 빛 조각뿐이었다. 꺼질 듯하면서도 집요하게 차유신의 곁에서 맴을 도는, 해의 잔재.

번뜩이는 조각을 홀린 것처럼 주시했다. 한참이나 보고 있자니 거기에 쓸린 것처럼 발등이 달아올랐다. 감싸고 있던 얼음주머니 안에서 녹아내린 액체가 출렁였다. 차유신은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이 얼음이 모조리 녹고, 열기를 흡수해, 끝내 끓어오를 때까지.

철컥. 세 대를 연달아 피웠을 때 문이 열렸다. 성큼 들어서는 기다란 그림자를 도화지 삼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은 담배꽁초가 사선을 그었다. 차유신의 손가락이 재떨이로 내려갔다. 볼품없이 짓씹힌 꽁초가 너저분한 표면을 굴렀다.

우태원이 다가왔다. 한 걸음 물러난 백진재가 차유신을 일별했다. 한껏 예의바른 인사가 건네졌다.

“그럼 저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입을 다문 백진재가 등을 보였다. 반쯤 열려있는 입구 너머로 몸을 뺀 뒤, 문을 닫고 사라졌다. 고적한 공간에는 이제 차유신과 우태원 뿐이었다.

“괜찮아요?”

우태원이 팔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퉁퉁 부은 발등을 쓸었다. 순간적으로 소리가 나올 뻔한 것을, 차유신은 이를 악 무는 것으로 갈음했다.

“괜찮아 보여?”

차유신이 우태원을 쏘아봤다. 우태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선배가 말씀하지 않으면, 저는 모릅니다.”

“우습네. 그렇게나 나를 잘 아는 척 할 때는 언제고.”

“제가 파악한 선배는 편린에 불과합니다. 선배도 사실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우태원의 손이 이동했다. 맨 종아리를 스치며 올라간 손가락이 무릎과 허벅지를 차례로 더듬었다. 우태원의 어조가 노곤해졌다.

“지금은 다리가 예쁘다는 것 이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벅지를 가볍게 주무른 손이 점점 안쪽에 감겼다.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따라 우태원의 팔뚝이 꿈틀거렸다. 지켜보던 차유신이 팔을 뻗었다. 탁, 소리를 내며 우태원의 손이 밀려났다.

“더러우니까 치워.”

가시 돋친 경고가 나왔다. 우태원이 심상하게 대꾸했다.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를 얘기하지 않으시니… 직접 제가 확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냥 내 망가진 구멍이 구경하고 싶었다고 해. 가증스러우니까.”

차유신이 내려간 이불을 챘다. 발끝까지 통째로 덮고는, 우태원에게서 떨어졌다.

“거슬리니까 이만 꺼져. 내일 아침에 네 보좌진들이나 올려보내고.”

“혼자 남아서 뭐 하시게요? 그때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

우태원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차유신이 무시한 채 답했다.

“생각을 해야지.”

“무슨 생각.”

하나하나 캐묻는 언어가 꽤 다정했다. 차유신은 그만 웃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소였다.

“일단은 이 개새끼를 내 의원실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

냉랭한 입술이 다물렸다. 우태원이 갸웃했다.

“그걸 선배가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차유신의 눈 밑이 미동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그때 선배가 나를 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어떻게든 선배와 얽혔을 텐데.”

우태원의 손이 또 이동했다. 연한 주름을 남기며 미끄러진 손가락이 시트를 짚은 차유신의 손등에 올라 톡, 톡, 살갗을 건드렸다. 차유신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은 과제를 풀고도.”

우태원이 물끄러미 눈을 맞춰왔다. 손등을 자극하던 손길이 멎었다. 곧 힘이 실린 손아귀가 꽉 손목을 옥죄어왔다.

“선배 문제 잘 풀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답을 모르죠?”

우태원이 다른 손을 뻗었다. 향한 곳은 차유신의 눈가였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반사적으로 달싹였다. 개의치 않은 손끝이 눈꼬리를 길게 쓸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경련했다. 고개를 낮춘 우태원이 속삭였다.

“안에 뭐 들어갔어요. 형.”

정말로 안에 뭔가가 들어갔고, 그것을 지워내려는 것처럼 손가락이 촘촘하게 속눈썹을 스쳤다. 반쯤 감겼던 차유신의 눈꺼풀이 스르르 들렸다. 잠시 잠겼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그에 따라 바랬던 어떤 기록에 빛이 든다.

안에 뭐 들어갔어요. 형.

진심으로 경멸하고 싶었던 존재와 얽힌 어떤 과거사.

“정훈석.”

차유신이 두서없는 한 마디를 뱉었다. 우태원의 손목이 움칠했다.

“하… 맞아. 정훈석.”

느릿하게 주억거린 차유신이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우태원의 손이 떨어졌다.

“네가 그 새끼랑 친했지. 깜빡했네.”

차유신이 헛웃음을 쳤다. 우태원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난 웃음이 나오는데.”

차유신이 연신 피식거렸다. 사실 웃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아프지도 않았다. 차유신은 아주 오래전 그 기록을 무덤에 묻었다. 그리고 그것이 삭아 문드러질 때를 기다리며 꺼내 보지 않았다. 자연히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럼에도 지금 웃은 이유는 하나였다.

우태원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유가 그거였어? 진작 얘기하지.”

차유신이 피곤하다는 투로 얼굴을 짚었다. 손가락 틈으로 한껏 식은 우태원의 낯이 보였다. 심드렁한 언어가 이어졌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우태원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차유신은 또 웃었다. 이번에는 꽤 크게 웃었다.

수면 안에 잠겨있던 우태원의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해가 안 가네. 그게 그렇게까지 나한테 굴 일이었던가.”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가볍게 우태원의 볼을 감싼 뒤, 아이라도 달래듯 쓸어내리며 뇌까렸다.

“그래. 나 때문에 고등학교 때 정훈석 죽었어. 그런데 그게 뭐.”

차유신의 입술 틈으로 쯧, 소리가 샜다.

“진짜 끝까지 피곤하게 군다. 역현구 바닥 인생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멱살이 부여 잡혔다. 눈이 까뒤집힐 정도로 세게 목을 조여 온 우태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으신가 보네요. 선배는.”

숨통이 막혀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럼에도 차유신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어. 정훈석은 그래도 돼.”

지금 우태원의 표정이 너무도 짜릿했다.

“역현구에서 태어났으니까.”

우태원에게 쏠린 눈길이 꼿꼿해졌다. 뚫어져라 차유신을 보던 우태원이 대뜸 어금니를 깨물었다. 멱살을 쥔 손아귀가 확 풀렸다. 한계까지 피가 몰렸던 얼굴에서 갑자기 진이 빠졌다. 간신히 목을 가눈 차유신이 쿨럭였다. 그 와중에 웃는 낯은 그대로였다.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자신을 보는 우태원을 조롱하듯 마주봤다. 우태원은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끈질기게 엉겼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우태원의 낯이 조금조금 무뎌져갔다. 느슨해진 입매에 자조적인 호가 걸렸다. 차분히 고갯짓을 한 우태원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좀 좆같네요. 선배.”

간헐적으로 반짝이던 빈 조각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비로소 어둑했지만, 차유신은 이제 괜찮았다.

이 짙은 어둠에 오히려 심장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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