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역공
16.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7월.]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바깥에서 시민들 시위하는 거 안 보여요? 누구 좋자고 대부업 최고금리를 올려. 어? 우태원 의원! 얘기를 해 봐. 이런 걸 12명이나 공동 발의한 여당이 문제예요. 더 인하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인상을….”
“신진화당 김태상 의원. 잘 들었습니다. 지금 발언 시간 초과했기 때문에….”
“듣고 있는 거야? 우태원이! 지금 선배가 얘기하는데 어디서.”
“내려가십시오. 내려가요! 빨리. 김 의원.”
국회의장이 부리나케 손짓을 했다. 한껏 인상 쓴 김태상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한숨을 쉰 국회의장이 본회의장을 둘러봤다. 조금은 진 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대국민당 우태원 의원 올라오십시오.”
일어난 우태원이 뚜벅뚜벅 단상으로 향했다. 야당 의원 몇몇이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지며 보이콧을 했다. 저 새끼 발언을 뭐 하러 들어! 회의장이 술렁였다.
묵묵히 앉아만 있던 김후준이 몸을 틀었다. 서늘한 시선이 야당 의원들을 쓸었다. 막 소리를 질렀던 신진화당 의원이 주춤했다. 들썩이던 야당 의원들도 씩씩거리다 조용해졌다.
“38.5% 폐업했습니다.”
마이크에 입을 댄 우태원이 운을 뗐다.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5년 전 신진화당 김흥수 의원, 고재찬 의원, 박인구 의원, 김희영 의원….”
이름들이 또박또박 호명됐다. 상당수가 지금 본회의장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찌푸린 당사자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우태원의 톤은 한결같은 저음을 유지했다.
“…등 13명이 공동 발의해 시행한 대부업 법정 최고금리 인하 이후로, 38.5%의 제도권 대부업 회사가 폐업했습니다. 기존 회사를 접고 이 회사들이 뭘 했는지는 제가 미리 배포한 자료에 잘 나와 있습니다. 78.6%가 비제도권 금융회사, 즉 불법 사채업 회사를 차립니다. 대부업 등록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높은 이율로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불법 사채업을 이용한 국민은 법정 최고금리 인하 전보다 총 33.7% 증가한 것으로 우리 의원실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료용 문건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우태원이 단상을 짚었다. 뒤늦게 우태원의 자료를 들춰보는 의원들이 보였다. 여전히 단상을 노려보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중 우태원이 지목한 김흥수 의원이 성난 목소리를 냈다.
“5년 전 얘기를 갑자기 꺼내는 저의가 뭡니까. 우 의원.”
“당시 제1야당이었던 대국민당은 이와 관련한 리스크를 충분히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신진화당에서 밀어붙이며 통과가 됐고, 그 결과가 이겁니다. 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만든 법안이 오히려 국민들의 숨통을 옥죈 겁니다. 해당 개정안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하나. 제도권 대부업체들의 도산. 둘.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된 일명 ‘금융 소외 계층’의 증가. 금융권의 신용평가기준은 금리가 낮을수록 더 깐깐해집니다. 대부업 회사는 그간 2금융권보다 폭넓은 대출 심사를 진행해왔지만, 2금융권과 사실상 금리가 비슷해지면서 이들 역시 2금융권 수준으로 문턱을 높이는 수밖에 없게 된 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에는 제도권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받지 못하게 된 소외계층이 대거 발생합니다. 이에 따라 제가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수치가 나온 겁니다. 38.5%의 대부업 폐업, 78.6%의 불법 사채업 전환, 그리고 33.7%의 불법 사채업 이용인구 증가. 저는 이걸 ‘과잉 배려의 비극’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그 문제를 보완할 법안을 발의해야지, 다짜고짜 법정금리를 다시 높이자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말씀하신 김흥수 의원님. 제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김 의원님께서는 생각해 둔 보완용 법안이 있습니까.”
우태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김흥수는 눈을 부릅뜬 채 입술만 질근거렸다.
“그런 것도 생각지 않고 5년 전 무작정 최고금리부터 낮춘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이 좋아해 주니, 그게 답이라 생각한 겁니까.”
“우태원 의원.”
“5년 새 비(非)제도권 금융사로 밀려난 대부업 이용자가 늘어난 사이, 김흥수 의원님 등은 1금융권의 도움을 받아 꾸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김 의원님만 해도 보유한 아파트가 세 채고, 고재찬 의원님은 거주 중인 강남구 아파트값이 5년 새 무려 12억 원이나 뛰었죠.”
“개인적인 얘기는 대체 왜 하는 거야!”
쾅. 고재찬이 테이블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우태원이 심드렁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 분들이기에 대부업 이용자에 대한 인식이 전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1금융권 이외의 금융사를 방문할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대부업을 누가 이용하고, 누가 운영하고, 어떤 이해관계들이 존재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안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요. 자격이 없는 분들에게 권한을 줬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우 의원. 선배들 너무 지적하는 것 아닙니다.”
큼, 소리를 낸 국회의장이 우태원을 타일렀다. 쇼맨십에 가까운 저지였다, 들고 있던 종이를 팔랑인 우태원이 말을 맺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울러 밖에서 우태원법 반대 외치는 시민단체, 신진화당에서 섭외한 곳인 것 알고 있습니다. 문제 삼기 전에 속히 철수시키십시오.”
종이를 구긴 우태원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다소 가라앉은 본회의장 곳곳에서 야당 의원들이 치를 떨었다. 차유신의 옆에 있던 문지찬이 헛웃음을 쳤다.
“좆됐네. 우태원 저 새끼 아주 칼을 갈아 왔구만.”
“애초에 논리 자체도 틀린 게 아니니까요.”
차유신이 턱을 괸 채 뇌까렸다. 문지찬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스르르 이동했다. 본회의장이 다소 뒤숭숭한 가운데 기세등등한 대국민당 의원들과 다소 수그러든 야당 의원들이 대조됐다. 특히 김흥수와 고재찬의 안색이 심히 나빴다.
우태원이 배포한 자료용 서류 위에서 손가락이 일정하게 두드려졌다. 사실 이건 대단히 복잡한 문제다. 비제도권 사채업이 거대해진 것이 꼭 최고금리가 낮아져서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므로 최고금리를 높이는 것만이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사회현상은 단 한두 가지의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기에, 단면만 보고 전체를 확신하는 건 위험하다.
다만 우태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아주 자연스럽게 본회의장을 압도했다. 우태원이 ‘금융 소외 계층’을 언급한 순간 승패가 갈렸다. 그가 경고했듯 김흥수나 고재찬은 대부업 이용자, 즉 저소득·저신용자에 대한 이해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단지 그들이 비싼 주택을 보유한 고액자산가여서가 아니다. 둘 다 맡은 지역이 한강 남쪽의 대표적 부촌들이었다. 거기서 게임이 끝났다.
우태원의 방식은 단순하지만 영리했다. 회의의 프레임을 ‘누가 진정 대부업 이용자를 이해하는가’로 세팅한 다음 빠르게 기선을 잡았다. 자신 입장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영역에 깃발을 꽂고 모두가 이 주제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가 맡은 지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빈곤층이 거주하며, 가장 많은 대부업체 사무실이 위치한 역현구갑이었다.
“투표 종료합니다. 총 투표수 243표 중 가 167표, 부 61표, 무 15표로 대부업법 시행령 개정안은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의사봉 내리치는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신속하게 일어나 우태원에게 악수를 청하는 대국민당 의원들이 보였다. 느긋하게 축하를 받던 우태원이 잠시 고개를 가눴다. 지켜보던 차유신과 딱 눈이 마주쳤다. 혀를 찬 차유신이 눈을 깔았다.
*
본회의는 오후 8시를 넘어서야 종료됐다. 가장 큰 쟁점인 주택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설전이 길어지며 회의장에서 갖가지 고성이 오갔다. 가까스로 표결이 끝났을 때, 승리는 대국민당에게 돌아가 있었다. 가뿐한 표정의 여당 의원들과 심각한 표정의 야당 의원들이 하나둘 회의장을 나섰다.
“이따가 한잔 할래?”
일어나던 문지찬이 물었다. 차유신은 도리질을 쳤다.
“일이 있어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선배.”
“하여간 만날 바쁘구나. 넌.”
키득거린 문지찬이 자리를 떴다. 우르르 나가는 의원들을 보며 차유신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이쯤해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고생했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최도현이 빙긋 웃었다. 차유신은 예의 바르게 꾸벅했다.
최도현과 대면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대국민당에 있던 시절 임기가 겹치긴 했지만, 박신회 라인으로 분류되는 회기동모임의 수장 격 인물이라 차유신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다시 국회로 돌아온 후에는 당이며 소속 상임위까지 달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잘 지냈어?”
최도현이 물었다. 차유신이 차분히 주억거렸다.
“네. 별일 없었습니다.”
“스타일 바꿨어? 좀 달라 보이는데.”
“아침에 머리 정돈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뒤로 넘겨버렸습니다.”
“잘 어울린다. 앞머리 내렸을 때보다 훨씬 더 분위기 있어 보이는데.”
“감사합니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차곡차곡 접은 쪽지였다. 손을 밑으로 내린 채 최도현의 등 뒤로 가져가자, 그가 능숙하게 받아 제 주머니에 넣었다.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 얘기를 했다.
“얼마 전에 둘째 나왔거든. 딸이야.”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근데 진짜 딸은 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어. 아들 나왔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하여간 희한해.”
피식거리던 최도현의 입매가 굳었다. 막 그들 곁을 지나쳐가던 우태원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안 가십니까. 최 선배님.”
“어. 가야지.”
최도현이 마뜩잖은 숨을 내쉬었다. 뚫어져라 우태원을 보던 그가 문득 입꼬리를 비틀었다.
“쇼 잘 봤어. 응?”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태원이 예사로이 받아쳤다. 최도현이 대소했다.
“네가 공개한 통계 중에 장난친 게 있다는 것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본다. 나 정무위 있을 때 발의한 대부업 관련 법안만 여섯 개야. 내가 그걸 몰라보겠어?”
최도현이 이기죽거렸다. 우태원이 천연덕스레 응수했다.
“그러면 아까 본회의장에서 건의를 하셨어야죠.”
“상도의라는 게 있잖아. 공개된 장소에서 같은 집안 식구한테 어떻게 칼을 꽂아. 집에서 조용히 갈구면 모를까. 게다가 대국민당에서 요즘 아주 잘나가는 우 의원님을 내가 감히 어떻게 건드려? 보고도 못 본 척 해드려야지.”
“친절이 과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만 갈 길 가봐. 우리가 피차 사이좋게 면상 공유할 관계는 아니잖아.”
“전 지금 최 선배님하고 같이 가고 싶은데요.”
우태원이 잔잔하게 웃었다. 최도현이 이마를 구겼다.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최 선배님께서 차 선배 붙들고 무슨 수작을 부릴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조금 감시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야. 내가 유신이하고 수작 부릴 일이 뭐가….”
“솔직히 이상하잖습니까. 두 분이서 아주 보란 듯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제 눈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이거든요. 갑자기 왜 안 하던 일들을 하는지,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태원의 미소가 진해졌다. 최도현이 보다 미간을 좁혔다. 목울대를 꿀꺽한 차유신이 최도현과 우태원을 번갈아 봤다. 절로 입술이 말아 물렸다.
우태원은 최도현을 보고 있었지만, 정작 확인하고자 하는 건 최도현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담긴 차유신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차유신을 보는지를 분석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좋아도 이 단편적인 상황에서 답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차유신은 조금 긴장했다.
우태원은 차유신과 관련한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았다.
“우태원.”
차유신이 벌떡 일어섰다. 최도현을 지나쳐, 저벅저벅 내려간 끝에 우태원을 붙들었다. 우태원이 흔쾌히 답했다.
“네. 선배.”
“쓸데없는 신경전 그만 벌이고, 나가자. 같이.”
우태원을 확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우태원이 재미있다는 듯 발을 옮겼다. 앞서 걷던 차유신이 뒤를 힐끔거렸다. 일단 최도현에게서는 우태원을 떨어뜨리는 게 맞겠다. 최도현도 은근히 성질이 있어, 우태원이 더 시건방지게 나오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게 뻔했다. 그러니 일단 두 사람의 간격을 벌리고….
“어디 갈 건데요?”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이 어정쩡하게 답했다.
“뭘 어디가. 일단 여기는 나가야지. 회의도 끝났는데.”
“식사하실래요?”
“그러든가.”
건성으로 답하고 난 차유신이 주춤했다. 가늘어진 눈초리가 우태원을 향했다. 고개를 숙여가며 웃고 난 우태원이 잡혀있던 손을 뺐다. 올라온 손아귀가 차유신의 어깨에 걸렸다.
“나 오늘 시간 별로 없는데…. 국회 안에서 먹을까요?”
차유신이 탐탁지 않게 따졌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쿠치나 얘기하는 것 아니야? 거기 예약 안 하면 자리 없어.”
“있어요. 내가 하나 해둔 게 있거든. 원래 다른 선배와 가려고 했는데, 1분 후 그 약속은 취소할 예정이고.”
미끄러진 우태원의 손가락이 차유신의 목을 지분거렸다.
“참고로 룸이에요.”
*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한강물이 보였다. 무덤덤하게 보던 차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우태원은 전채 요리로 서빙된 관자구이를 입에 넣고 있었다.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포크를 옆으로 치웠다.
“넌 짬밥이 입에 넘어가냐.”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태원이 은연히 응수했다.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너 일주일에 쿠치나 몇 번 와.”
“평균적으로는 두 번?”
“그러니 짬밥인 거야. 국회 안에서 레스토랑이라고 할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어. 이동시간 부족할 때 만만하게 미팅 장소로 잡는 곳도 결국 여기고. 안 지겨워? 난 도무지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는다.”
“솔직히 지겹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인데.”
관자구이를 적당히 씹어서 삼킨 우태원이 테이블 중앙에 놓인 화이트 와인 병을 쥐었다. 반쯤 빈 차유신의 잔 위로 가져가 내용물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선배하고 오니 좀 새로워서요.”
“뭐가 새로워.”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병을 내려둔 우태원이 허공을 봤다.
“제가 선배 의원실 비서로 취직했을 때, 처음으로 선배께서 따로 밥 사주겠다고 데려온 곳이 여기입니다.”
와인 잔 목에 손가락을 건 우태원이 손목을 빙글거렸다. 안에서 노란색 알코올이 출렁였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을 굴렸다. 그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의원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우태원에게 따로 밥을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은 있다. 다만 그래서 어디를 데려갔는지는 불분명하다.
“원래 그런 겁니다. 태양은 땅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반면 땅은 항상 태양을 올려다보고 있죠.”
우태원의 입가로 잔이 올라갔다. 손목을 기울이고는, 꿀꺽거리며 와인을 삼켰다. 반창 투정하듯 포크만 만지작거리던 차유신이 끝내 관자구이에 끄트머리를 꽂았다. 한입에 넣고는 눈꺼풀을 가라앉혔다.
그 태양 앞에서 잘도 고개를 쳐들고 있구나. 저 새끼는.
“두 번째 애피타이저 가지구이 나왔습니다.”
룸 문이 열리며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접시 두 개를 한 팔에 올린 여직원이 두 사람 앞에서 서빙을 시작했다. 우태원을 힐긋한 그녀가 방긋 웃었다.
“우 의원님은 요즘 자주 오시네요.”
“국회 밖까지 나갈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많이 바쁘시죠? 아까 우 의원님 나온 뉴스 봤어요.”
“괜찮았어요?”
“네. 정말 멋있으셨어요.”
서빙을 마친 여직원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우태원은 서비스를 하듯 가벼운 눈웃음을 쳤다. 차유신은 다른 곳을 본 채 속으로 한탄했다.
저 새끼도 미쳐가는구나.
“차 의원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 지지자예요.”
뒷걸음질 친 여직원이 나긋이 인사했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응했다.
“네. 감사합니다.”
여직원이 바깥으로 나섰다.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세상 참 잘 돌아간다. 사채업자 도와주는 새끼 좋다는 국민도 있고.”
차유신이 혀를 차며 가지구이를 썰었다. 반을 토막 내 입에 넣고는, 우물거린 끝에 삼켰다. 바로 다음 조각에 포크를 꽂는 차유신을 보다가 우태원이 제 접시를 밀어줬다. 반들거리는 보라색 표면에서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차유신이 삐딱하게 물었다.
“뭐야.”
“가지 좋아하시잖아요. 더 드세요.”
우태원이 권하는 턱짓을 했다. 눈매를 굳힌 차유신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별걸 다 파악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선배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워낙 티가 나요. 비서 생활 몇 달 하고 나니 웬만한 선배 취향은 다 스터디가 되더라고요. 그걸 토대로 다른 취향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해졌고요.”
우태원이 와인 병을 들었다. 비어있는 제 잔을 채우고는, 잔 목을 잡아 입에 기댔다. 낮아지는 잔의 수면 밑으로 꿀렁거리는 울대뼈가 보였다. 단숨에 반을 비우고 난 우태원이 잔을 내려놓았다. 심드렁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예컨대 지금은 저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건 나에 대한 스터디가 없어도 누구나 알아볼걸.”
차유신이 저소했다. 우태원이 고저 없이 입을 뗐다.
“한편으로는 저에게 궁금한 게 있으신 걸로 보이는데요.”
“자신 있어?”
차유신이 약을 올렸다. 우태원이 혼연하게 반응했다.
“자신 없어도 선배 질문에는 답을 해드려야죠.”
“아까 최도현 선배가 얘기한 것 뭐야. 네 자료 중 장난친 숫자가 있다는 거.”
“뭐, 사실은 별것도 아니에요.”
우태원이 포크를 내밀었다. 자신이 밀어준 접시 위의 음식물에 끄트머리를 꽂고는, 차유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
차유신의 어금니가 일순간 깨물렸다. 불퉁하게 그를 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커다란 조각이 쑥 들어왔다. 한입에 담기 살짝 버거운 수준이었다. 꾸역꾸역 입에 넣은 뒤 열심히 이로 조각을 냈다. 포크를 내려놓은 우태원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렸다.
“불법 사채업 이용 인구가 5년 전보다 33.7% 늘었다는 건 사실 근거가 좀 미비합니다. 모수가 적거든요. 역현구에 존재하는 불법 사금융업체 89곳을 표본으로 조사한 거라서요.”
“거의 사기네.”
차유신이 조각난 음식물을 삼키며 뇌까렸다. 우태원이 갸웃했다.
“아예 의미 없는 숫자는 아닙니다. 역현구에 있는 불법 사채업자가 국내 시장의 60%를 다 흡수하고 있으니까요. 조사한 89곳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곳들이고요. 표본 자체가 그쪽 시장에서 톱100에 해당하는 곳들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대체 뭘 얻으려 하는 거야.”
“별것 있겠어요? 역현구의 평화죠.”
우태원이 기탄없이 답했다. 차유신의 턱이 멈칫했다. 조용해진 룸 안에서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파스타 나왔습니다.”
들어온 남직원이 차유신의 앞에 있는 빈 접시들을 회수해갔다. 곧 각자의 앞에 파스타가 담긴 오목한 그릇을 세팅했다.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굽고 난 그가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정적이 자못 흐무러졌다.
“대부업 법정 최고금리가 낮아진 후, 역현구에 존재하는 제도권 대부업체들이 비제도권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자체 폐업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건 사실입니다. 의원실 내부적으로 조사한 결과, 향후 폐업을 계획하는 제도권 대부업체도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고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역현구 소재 대부업체 사장들을 한데 모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제안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사람답게 살라고 했죠. 비제도권으로 넘어가는 순간 회사고 사람이고 괴물이 됩니다. 언제 어떤 일들을 벌일지 스스로도 몰라요. 석일태 회장이 SDB그룹이라는 제도권 기업을 차린 것도 결국엔 그 이유입니다. 안정적인 틀 안에서 사람 취급 받으며 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그 사장들은 뭐래. 그렇게 하겠다든?”
“당근 없는 말이 어떻게 달립니까. 먹이가 있어야 채찍질이 통하죠. 저는 그 자리에서 대부업 법정 최고금리를 되돌려주겠다는 내용의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의 법안은 그 약속에 대한 책임이고요. 그들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역구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한 겁니다. 그게 다입니다.”
“재밌네. 정작 넌 개새끼면서.”
차유신이 파스타 접시 안에 포크를 집어넣었다. 기름기에 젖은 노란 면을 뒤적이다가, 곧 흥미를 잃은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태원의 시선이 느릿하게 차유신을 머금었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그의 입이 떨어졌다.
“맞아요.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지만.”
우태원이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역현구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아직 돌이킬 수 있죠.”
테이블을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또 침묵에 휩싸인 룸 안을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메웠다. 먼 곳에서 밀려온 훈풍이, 통유리 창을 조롱하듯 두드리고 있었다. 한숨을 쉰 차유신이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사실 진짜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얘기해요.”
우태원이 흔쾌히 부추겼다. 보다 큰 숨을 들이켠 차유신이 우태원을 가리켰다.
“석일태 회장은 너희 아버지를 죽였어.”
“네. 압니다.”
“그걸 알면서 굳이 왜 석 회장 밑에 머물고 있는 거야.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우태원의 입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지극히 상냥하게 차유신을 응시하고 난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를 흘렸다.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선배는 이해하지 못해요.”
차유신의 눈 밑이 경련했다.
“내가 뭘 이해 못 해.”
“선배는 역현구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태원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접시 한가운데 꽂힌 끄트머리가 빙글거리며 돌아갔다. 노란 면발이 소용돌이처럼 딸려 올라왔다. 우태원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직은 말이죠.”
검은 입 안으로 면발이 들어갔다. 덥석 물고 난 우태원이 포크를 뺐다. 단단한 교근이 일정하게 운동했다. 테이블에서 밀려난 차유신의 손이 툭 떨어졌다.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우태원이 다시 차유신을 봤다. 사뭇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선배께 여쭐 게 있어요.”
차유신의 입술이 가까스로 떨어졌다.
“뭔데.”
“최근에 매천회 곽희서 회장 만나셨죠.”
우태원의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차유신은 최대한 침착하게 받아쳤다.
“그게 뭐.”
“왜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깡패들이 어떻게 사는지 하도 궁금해서 만났어. 문제 될 것 있어?”
“별일이네요. 손수 오물에 손을 대시고.”
“살다보면 더러운 것을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뭐 그런 법이지. 나라고 깨끗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
차유신이 포크를 쥐었다. 다시금 파스타 접시에 날을 꽂는 차유신의 귓가에 우태원의 질문이 스쳤다.
“그것 이외에 또 어떤 더러운 것들을 선배 손에 묻히고 있죠?”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우태원은 다소 서늘한 낯으로 차유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유신이 경고했다.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권헌 비서라고 있던데…. 가장 최근에 선배 의원실에 들어간.”
우태원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차유신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권헌 얘기가 왜 나와.”
“권 비서하고 개인적으로 많이 교류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네 프락치가 그렇게 보고해?”
“네.”
우태원은 피하지 않았다. 차유신이 픽, 웃었다.
“대체 권헌한테 왜 관심을 갖지? 걘 일개 막내 비서야.”
“권 비서하고 따로 어떤 얘기들을 나누는지, 저는 상당히 궁금한데요.”
“신경 꺼. 애초에 별것도 아니니까.”
“불가능합니다. 참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거든요.”
우태원이 낯빛이 냉해졌다. 정말로 불쾌해하는 기색이었다.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차유신이 문득 꿀꺽였다.
조금 위험할지도 몰랐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선배. 선배 마음대로 다 하셔도 된다고. 단, 제 눈에 보이는 데서 하라고.”
엄한 음성이 테이블에 깔렸다. 차유신이 매섭게 반박했다.
“안 하면, 네가 어쩔 건데.”
우태원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듯 관자놀이를 짚을 뿐이었다. 차유신이 비식거렸다.
“역운회 새끼들한테 하는 것처럼 머리 터지도록 패게? 해. 난 나쁘지 않아. 맷집은 좀 되는 편이거든.”
“그건 제가 별로 원치 않습니다. 선배를 다루기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어조만큼이나 싸늘해진 눈동자가 차유신을 담았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을 원하시면, 다른 형태로 제공해드리는 방안이 있긴 하지만요.”
차유신의 턱이 움찔거렸다. 다소 심각해진 언어가 덧붙었다.
“문제는 제가 그걸 딱히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굳이 택하지 않은 건데….”
우태원의 손가락이 둔탁하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생각해보니 선배라면 즐거울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확인한 적도 몇 번이나 있고.”
얼음장 같은 고요가 둘을 휘감았다. 멍하니 속눈썹만 달싹이는 차유신에게 우태원이 갑자기 미소를 건넸다.
“식사 마저 하시죠.”
테이블 밑에서 부유하던 차유신의 손이 꽉 뭉쳐졌다. 달그락거리며 식기 부딪치는 우태원의 기척이 뇌리를 압박하듯 울려왔다. 입 안에서 거칠한 혼잣말이 굴러갔다.
이 새끼 진짜 어떻게 하지.
*
쏴아, 소리가 귀를 덮쳤다. 차유신은 젖은 벽에다 머리를 박았다. 샤워기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속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른 상념이 물안개처럼 사그라졌다. 그것이 수없이 반복됐다.
‘진짜 너 요즘 왜 이래?’
오전에 내실에서 만난 한수현은 다짜고짜 그 질문부터 했다. 차유신이 시치미를 뗐다.
‘내가 뭐.’
‘왜 이렇게 권헌만 싸고돌아? 다른 보좌진들이 서운해서 너 따르겠어?’
‘그래서. 너 서운해?’
‘난 별로 안 서운해. 너한테 미련 없거든. 그런데 다른 보좌진들은 그런 입장 아니잖아.’
‘그 말에는 내가 좀 서운하다.’
차유신이 어이가 없다는 양 따졌다. 한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의원실에 두루두루 관심 좀 가져. 보좌진들 전부 다 너 하나 보고 여기 온 사람들이야. 그런데 한 명하고만 대놓고 내밀하게 굴면 어떻게 해. 있던 충성심도 사라질 거 불 보듯 뻔한 일 아니야? 아는 애가 왜 이렇게 눈치 없이 굴어? 심지어 일부러.’
올라간 손이 물을 껐다.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크고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넘어갔다. 입가에서 누기 어린 숨이 번졌다.
알고 있다. 지금의 차유신이 과할 정도로 특정 인물 위주의 교류를 하고 있다는 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의원실 보좌진들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폐쇄적으로 상황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쪽이 서로에게 좋았다.
게다가 마무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저벅저벅 걸어가 서랍장을 열었다. 안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머리를 털었다. 후드득, 튄 물기가 사방팔방 흩어졌다. 차유신은 생각을 추스르듯 수건질을 반복했다.
매천회의 T시티 관리사무소 접수, T시티 인수를 둘러싼 로비게이트 고발, 그리고 또…. 복잡하지만, 복잡하다고 생각하면 피곤해지는 몇 가지 일들을 전부 해결하고 나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갈 거다.
과거처럼 평화로운 의원실을 유지할 수 있다.
탕. 욕실 너머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진무원인가. 서둘러 머리를 말린 차유신이 주변을 둘러봤다. 입을 옷이 없었다. 또 무작정 옷부터 벗고 욕실로 들어왔다. 시간도 정신도 없어 벌어진 사소한 실수였다.
지난밤은 의원사무실에서 새웠다. 해가 뜨자마자 국회로 갔고, 오후 회의까지 마친 후 구의원들과의 회의 차 다시 역현구에 왔다. 회의 전 잠깐 목욕재계나 하겠다고 집에 들른 게 지금이었다.
“나 안에 있어. 나갈게.”
머리에서 수건을 거두고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따지고 보면 진무원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일은 익숙했다. 함께 사우나를 간 것이 열 번은 된다. 성큼 바깥으로 나선 뒤 벗어뒀던 옷을 찾아 소파로 향했다. 막 지나친 입구 쪽 실루엣이 툭, 뭔가를 떨어뜨렸다.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몸을 숙인 권헌이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주웠다. 차유신이 눈을 일그러뜨렸다.
“너였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의원님께서 벗고 계신 걸 제가 보…. 아니, 아무튼 갑자기 들어와서.”
“급한 일 있으면 갑자기 들어와도 되지. 사실상 내 집 비밀번호 우리 의원실 공공재잖아. 그리고 벗은 걸 본 게 뭐가 문제야? 같은 남자 새끼들끼리.”
손을 내젓고는 마저 걸음을 내디뎠다. 소파 위에다 벗어뒀던 옷가지를 챙긴 후 몸을 앉혔다. 속옷부터 발목에 끼워 넣던 차유신이 곁눈질로 권헌을 봤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곽희서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곽 회장?”
“네. 방금 전 매천회가 T시티 관리사무소를 접수했다 합니다.”
속옷 착의를 마치고, 막 바지를 잡았던 차유신이 흠칫했다.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벌써?”
“네. 선배께 직접 연락할 루트가 없어, 저에게 연락을 했다고….”
“나 참석하기로 한 구의원 회의 몇 시지.”
“5시입니다.”
“취소해. 대충 핑계 대고.”
빠르게 바지를 챙겨 입고 난 차유신이 셔츠를 챘다. 이내 권헌을 보지도 않은 채 지시했다.
“넌 지금 바로 내려가서 차 대기시켜. T시티로 이동한다.”
*
“막상 겪어보니 역운회 별거 아니던데요, 뭐.”
거만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던 곽희서가 차유신을 반겼다. 차유신은 무덤덤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싼 매천회 조직원 수십여 명의 눈길이 차유신에게 꽂혔다.
“역운회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할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원래 패배한 새끼에게는 혀가 없어요. 도망칠 다리는 있어도.”
곽희서가 껄껄거렸다. 매천회 조직원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따라 웃었다. 다소 심각하게 그들을 둘러보던 차유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신속하게 빼낸 뒤 액정을 확인했다. 진무원의 메시지가 비쳤다.
[진무원 수석보좌관] 구의원 회의 참석 왜 갑자기 취소했어? 그런 상황이 발생했으면 가장 먼저 나한테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대체 이게 몇 번째야?
한숨을 쉰 차유신이 시선을 넘겼다. 권헌이 물끄러미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일단 너는 국회로 복귀해.”
“지금요?”
“어. 가서 무원이형한테 적당히 내 상황 둘러대. 지도부에서 개인적으로 오더 내려온 건 처리하느라 오늘은 내내 재택근무를 한다고 하든지, 뭐 대충.”
“그건 상관없지만.”
권헌이 입을 다셨다. 주변의 조직원들을 눈으로 훑은 그가 이마를 구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데 혼자 계셔도.”
차유신이 대수롭지 않게 팔짱을 꼈다. 한없이 예사로운 음성이 건네졌다.
“어. 아주 많이 괜찮아. 내가 깡패 새끼들하고 하루 이틀 얽혔어? 신경 쓰지 말고 복귀부터 해.”
머뭇거리던 권헌이 끝내 허리를 숙였다. 이내 무겁게 발을 떼며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사라지는 권헌의 등을 확인한 차유신이 다시 곽희서를 봤다. 다리를 꼰 곽희서가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하이고. 깡패 새끼들이라…. 차 의원님 혀는 참 변치를 않네요.”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혀죠.”
차유신의 입매에 나긋한 호가 걸렸다.
“사실만 말하거든요.”
곽희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석연치 않은 숨을 고른 그가 곧 그만두자는 투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어 담뱃갑 하나를 빼낸 뒤 안을 뒤적이며 뇌까렸다.
“아무튼, 차 의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이쪽은 처리했으니 경찰 쪽 연결고리는 마저 세팅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뭐, 감사하다는 말은 안 드리고 싶어도 안 드릴 수가 없네요. 덕분에 T시티 먹고, 관할 경찰도 먹었으니.”
허허실실 웃은 곽희서가 입 쪽으로 담배를 가져갔다. 근처에 있던 조직원이 빠르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훅, 하얀 연기가 퍼졌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 잘 유지했으면 합니다.”
차유신이 선을 그었다.
“그건 곽 회장님 하는 거 봐서 제가 결정하는 걸로 하죠.”
크게 한 모금 빨고 난 곽희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차유신은 묵묵하게 또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새롭게 점령한 사무실을 정리 중인 매천회 사람들이 보였다. 다만 정리할 것이 딱히 없어 보였다. 국내에서 가장 큰 범죄조직과 그다음으로 큰 범죄조직이 몸싸움을 벌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현장 보존이 잘 돼 있다. 파손된 물품도 몇 개 보이지 않는다.
차유신의 낯이 골똘해졌다. 굴러가는 눈이 안에 있는 조직원들을 낱낱이 담았다. 보이는 이들의 수를 셌다. 열, 스물, 서른, 마흔…. 쉰까지는 안 되는 것 같은데.
“여기 칠 때 몇 명 투입하셨죠.”
차유신이 찌푸린 채 곽희서를 봤다. 연기를 뻐끔거린 곽희서가 답했다.
“총 대기인원은 일흔 명이었고, 실제 투입한 건 마흔 명입니다.”
“그것밖에 투입을 안 했다고요?”
차유신의 동공이 확 커졌다. 단 마흔 명으로 여기를 먹었다고. 그렇게나 쉽게.
상주 인원이 총 백 명인 T시티 관리사무소를.
“당시 역운회가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목소리가 절로 다급해졌다. 곽희서가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한….”
쿵. 돌연 바깥에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씨발, 이 새끼들은 또 뭐야! 다급한 남자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곽희서의 말투에서 힘이 부쩍 빠졌다.
“스무 명….”
탕. 반쯤 열려있던 문이 거칠게 걷어 채였다. 우르르 들어온 남자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매천회 조직원들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매천회 쪽에서 빠르게 반격에 나섰지만, 달라붙는 족족 무너졌다. 애초에 들이닥친 남자들의 수가 너무도 많았다.
“씨발.”
차유신이 사납게 이를 악물었다. 저 위 천장에서 빨간 불을 빛내며 돌아가는 CCTV 렌즈가 보였다. 빤히 노려보던 차유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 새끼가…. 아주 그냥 좆같은 덫을 쳐놨네.”
함정이었다. 역운회는 일부러 관리사무소를 내준 거다.
매천회의 습격 배경을 파악하려면 일단 빠져주는 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부러 사무소를 비웠다. 이후 누가 찾아오는지를 관찰했다. 저 CCTV로.
“반갑습니다. 의원님.”
사위가 온통 소란한 가운데 지극히 다정한 목소리가 뒤에서 찾아들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건, 몇 번인가 본적이 있던 역운회 간부였다. 차유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싱긋 웃었다.
“잠깐 좀 주무십시다. 태원이 형님께서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저희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통수가 힘차게 내리쳐졌다. 눈이 멀 정도의 섬광이 시야를 점했다가, 곧 사그라졌다. 플러그가 빠지듯 오감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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