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6/48)

15.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10월.]

“많이 야위었구나.”

주홍빛 석양을 머금은 먼지들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차유신은 소파에 앉은 채 무거운 머리를 기울였다. 스스로가 야위었는지 어떤지, 차유신은 몰랐다. 그저 하루하루 숨을 쉬면서 살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유신에게 허락된 일이라곤 그처럼 지극히 단순한 것뿐이었다.

분명히 시작은 이게 아니었다. 차유신은 차유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진했다. 스스로 입장문을 적고,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지지자들과의 간담회를 마련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멘트와 방안들을 구상했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건 한순간이었다. 대국민당 지도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차유신 언론 및 외부접촉 일절 금지. 앞으로 모든 건 지도부에서 일임하겠음. 차유신은 추가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칩거할 것. 거부할 수 없었다. 그건 지도부의 결정이었다. 제아무리 기고 나는 차유신이라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명백한 영역이 있었다.

“국감 때문에 내부적으로 워낙 바빠 너와 관련한 결정이 늦어졌다.”

김후준이 차유신의 손을 잡았다. 차유신은 잠자코 시선을 떨궜다.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과방위 국감이 이번에 큰 골칫덩어리였어. 야당에서 과기정통부 차관과 너를 둘러싼 비리게이트를 두고 들개처럼 물어뜯는 바람에 아주 난리였거든. 아예 과방위 국감이 차유신 비리게이트 청문회로 전락한 수준이었지. 덕분에 일이 많이 커지면서 네 개인적인 처분을 두고 지도부 회의를 수차례는 번복해야 했다.”

김후준이 차유신의 손등을 쓸었다. 차유신의 마른 입술이 몇 번의 어물거림 끝에 열렸다.

“저는 혐의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시피.”

“그건 나도 잘 알아. 네가 어떤 놈인데. 대국민당에서 나보다 차유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네가 결백하다는 건 내가 보증한다.”

괴롭다는 듯 눈을 감고 난 김후준이 차유신의 손을 풀었다. 이내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왔다.

“유신아. 아버지에게 와봐라.”

차유신은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김후준의 몸에 기댄 머리가 축 늘어졌다. 올라간 김후준의 손이 차유신의 뒤통수를 쓸었다. 더 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만 역시 온기는 없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하는 거야. 금배지의 무게는 인내와 비례해. 참을성이 없으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다독이는 손이 부쩍 찼다.

“그러니 참아라. 참고.”

다소 거친 손아귀가 차유신의 머리를 휘어잡았다.

“당분간 쉬자. 유신아. 다음 주에 사의 표명 기자회견 세팅해뒀다.”

차유신의 얼굴이 덜컥 들렸다. 아무렇지 않게 내려간 김후준의 손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덤덤한 시선이 차유신을 훑었다.

“계속 쉬라는 얘기 아니야. 딱 삼 년만 스테이 해. 삼 년 지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혐의가 없는데, 무슨 핑계를 대고 제가 사의를 표명해야 합니까.”

차유신이 가시 돋친 말을 쏟았다. 김후준이 윽박질렀다.

“네 혐의는 법에 근거한 게 아니야. 네 실수가 T시티 이미지에 먹칠을 했어. 서울의 실리콘밸리에서 한순간에 비리의 온상, 게이트의 중심이 돼버렸다고. T시티 이미지 그렇게 만들어놓고, 계속해서 역현구을 맡고 싶어? 지역민들이 너 믿어주겠니? T시티 만들었으면 뭐 해. 끝까지 지키지를 못했는데!”

“선배님.”

“유신아. 물론 억울한 것 알아. 잘못한 게 없는데, 갑자기 배지를 반납하라 하니 분하고 서글프겠지. 하지만 세상일은 늘 네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아. 변수, 복병은 항상 존재한다는 얘기야. 그걸 피하지 못한 게 곧 유죄야. 꼭 이름에 빨간 줄 그어져야 죄지은 거야?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때로는 죄지은 놈이 돼야 해. 그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 다음 배지도 다는 거고.”

김후준의 손이 차유신의 등을 덮었다. 두드려오는 손길이 암묵적인 협박을 닮아 있었다. 시트를 짚은 차유신의 손이 꿈틀거렸다.

“그러니 참자. 유신아. 다음 배지 달고 싶으면, 무조건 참으렴. 응?”

마지막으로 팔뚝을 힘 있게 주무르고 난 김후준이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서 있던 우태원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우태원을 지나쳐간 김후준이 현관 앞에 섰다.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김후준 의원실 보좌진들이 잽싸게 문을 열어줬다. 막 나가기 직전, 숨을 고른 김후준이 우태원을 일별했다.

“유신이 잘 모셔라. 혹여나 애 몸 상할 일 없게.”

우태원은 대답 대신 허리를 숙였다. 휙 몸을 튼 김후준이 바깥으로 나섰다. 보좌진들이 그를 따라 신속히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

차유신 무죄. 신진화당 OUT. 검찰수사로 차유신 무죄 입증하라. 신진화당 조영현, 이선호, 김주희는 ‘차유신 허위게이트’ 사죄하고 퇴진하라.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빗줄기가 굵은데도, 집 앞을 지키는 백여 명의 지지자들은 꿋꿋하게 피켓을 들고만 있었다. 입고 있는 우비들이 비에 젖어 후줄근했다. 기자들은 좋은 구경거리를 발견했다는 양 플래시 세례를 터뜨리며 그들을 렌즈에 담았다.

“몇 번째지. 저게.”

커튼을 친 차유신이 소파에 앉았다. 등받이에 옆통수를 기대는 차유신의 곁으로 우태원이 다가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이번이 정확히 세 번째입니다.”

“저런 걸 하려면 국회를 가야지. 우리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야.”

“평소엔 국회 앞에서 하는데요, 가끔 의원님 집 앞에서도 하는 겁니다.”

테이블을 보지도 않는 차유신에게 우태원이 아예 잔을 들어서 건네줬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마지못해 받았다. 우태원이 말을 덧붙였다.

“의원님 기운 내시라고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워낙 골수에 베테랑 지지자들이잖습니까.”

차유신의 손 안에서 더운 잔이 찰랑였다. 거의 다물려있는 커튼 틈으로는 비에 젖은 창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울방울이 꽤나 컸다. 비가 저렇게 오는데도, 저들은 잘도 저런 걸 한다.

차유신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던가.

“잠깐 나갔다 올게.”

잔을 내려둔 차유신이 팔을 뻗었다. 소파 구석에 있는 재킷부터 챙겼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저렇게까지 하는 이들에게 인사 한마디라도 하는 게 도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무작정 재킷을 걸치는 차유신을 기다란 팔뚝이 막아섰다. 차유신을 소파에 억누르듯 앉힌 우태원이 몸을 낮췄다.

“안 됩니다. 밖에 비가 많이 옵니다.”

재킷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한 꺼풀 벗겨내듯 재킷을 들춰낸 우태원이 무거운 눈길을 맞췄다.

“무의미하게 움직이지 마시고, 여기에 계십시오.”

“그냥 인사하는 것도 안 돼?”

차유신이 불퉁하게 우태원의 손등을 쳤다. 조금 들렸던 재킷이 도로 몸을 덮었다. 우태원이 묵묵하게 재킷 앞섶을 쥐었다. 강고해진 손아귀가 대번에 겉옷을 끌어 내렸다. 평소 집에서의 티셔츠 차림으로 돌아간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네. 안 됩니다.”

벗겨진 재킷이 멀찍이 던져졌다. 차유신의 머리맡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나마 남은 빛이 빠르게 흡수돼갔다.

“여기에 계십시오. 의원님.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

“지지자들에게 인사 한번을 안 해?!”

쩌렁쩌렁한 외침에 잠이 깼다.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차유신이 멍하니 창문을 봤다. 또 노을이 비치는 시간이었다. 언제 잤더라. 눈동자가 공허하게 미끄러졌다. 밤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앉아만 있다가, 우태원이 챙겨준 늦은 점심을 먹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가 지고 있으니, 세 시간 남짓하게 흐른 셈이다.

“엉망진창이네.”

곤로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털었다. 며칠 내내 이 모양이다. 자신의 게이트가 터진 직후 시작됐고, 김후준이 사의 표명 기자회견 일정을 전달하고 간 후로 더 심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있다 보면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했다. 집에서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TV나 신문조차 보기 싫어 그저 소파에 앉아만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우태원 뿐이었다. 거의 차유신의 집에 상주한 채로 식사를 챙기고, 간단한 말동무가 돼줬다. 잠이 들 때도 우태원이 있어야 했다. 없으면 불안해서 눈이 감기지 않았다. 머리맡에 우태원을 둔 채로 잠을 청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싶은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는 그런 의문도 들지 않았다. 아예 이런 삶이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차유신은 구구절절한 의구심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아주 자연스럽고 소리 없이, 차유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우태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일 기자회견하고 나면, 유신이는 이제 국회의원도 아니야. 그때 가서 뒤늦게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것, 아무 의미 없어. 최소한 배지라도 달고 있을 때 고맙다는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유신이 언제라도 다시 여의도에 돌아갈 애야. 그런 상황에서 지지자를 남 보듯 무시하고….”

“무슨 일이야.”

침실 문을 연 차유신이 탐탁지 않게 물었다. 열린 문틈으로 씩씩거리는 진무원과 우뚝 선 우태원이 보였다. 차유신을 발견한 진무원이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야, 유신아. 이게 말이 돼? 네 집 앞에서 지지자들이 집회 연 게 어제까지 총 다섯 번이야. 그동안 한 번도 그 사람들을 안 만났다고? 너 진짜 정신 나갔어? 얼마나 얼이 빠졌으면 본인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의원님은 원했는데 제가 저지했습니다. 지금 지지자들 만나기엔, 의원님께서 워낙 심신이 불안정해 그쪽이 더 나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우태원이 또박또박 말했다. 진무원이 눈을 부릅떴다. 부들거리던 그의 손이 확 들렸다. 짝, 하며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차유신의 뒤꿈치가 꾹 짓눌렸다. 분기 어린 호흡을 가다듬은 진무원이 고개를 쳐올렸다.

“이 새끼가 진짜…. 유신이 케어하라고 붙여뒀더니, 지가 감히 훈수를 두고 앉아있었네.”

진무원이 그르렁거렸다. 우태원은 무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붉은 석양 속에서 그의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너 유신이가 이쪽 지역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기는 해? 얘가 일개 국회의원으로 보여? 차유신은 아예 여기를 갈아엎은 놈이야. 황무지 같던 지역을 다시 만든 놈이라고. 유신이 오고 나서 새롭게 전입한 역현구을 지역민이 전체의 20%야. 차유신 지지자들이 할 일 없어서 한 달 내내 밖에서 저 짓거리 하고 있는 걸로 보여? 이 새끼 없으면 지들 인생이 좆 되니까 저러는 것 아니야! 새끼야.”

진무원이 버럭 했다. 우태원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차유신이 골치가 아프다는 양 이마를 짚었다. 이내 서벅서벅 나아가 진무원의 팔을 잡았다. 애써 달래는 손길이 건네졌다.

“그만하자. 형. 우태원이 얘기하긴 했는데, 나도 동의한 거니까. 이만 들어가. 내일 기자회견 준비해야지.”

“너 진짜…. 내가 돌겠다.”

진무원이 탄식했다. 차유신은 멀거니 진무원을 올려다봤다. 한껏 복잡해진 낯이 차유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네가 하나도 너 안 같아서, 내가 아주 미쳐버리겠다.”

분연히 입을 다문 진무원이 등을 보였다. 성큼성큼 현관으로 간 그가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다. 곧 나서는 진무원의 뒷모습이 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차유신은 홀린 듯 깨끗한 문짝을 봤다. 저 말끔한 표면에 답이 새겨져있는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알려면 알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걸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차유신은 태어난 이래 자주 지쳤다. 지금도 그런 고비 중 하나다. 다만 처음이 아니라 해서 그 고통이 전보다 가볍다 할 수는 법이다. 제각기 다른 이름과 모양을 지니고 찾아드는 해일은 맞닥뜨릴 때마다 새로운 파열을 자아냈다.

차유신은 그저 쉬고 싶었다. 아주 많이.

“자야겠어.”

다시 침실 쪽으로 향하던 차유신이 뇌까렸다. 숨죽이고 있던 우태원이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먼저 침실로 들어간 차유신이 시트에 누웠다. 우태원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선 채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의자 갖고 오겠습니다.”

우태원이 걸음을 뺐다. 차유신의 곁을 지키기 위해 앉을 의자를 챙겨오겠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튼 차유신이 손을 내저었다. 우태원이 멈칫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저편의 우태원이 부쩍 흐릿해졌다.

“의자 갖고 오지 말고, 옆에 누워 봐.”

손목이 시트에 늘어졌다. 굵은 침을 삼킨 우태원이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늘이 다가왔다. 차유신은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아가며 숨을 쉬었다. 어둑한 세상에서 그저 호흡을 고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보면 곁에서 종종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편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차유신의 손목이 흘러내렸다. 또 난다. 저 냄새.

여울로 살던 유년기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쫓아오는 지독한 내음.

그날 어머니를 끌고 간 남자들의 냄새.

“안 불편하시겠습니까.”

우태원이 이불을 끌어 올렸다. 차유신의 목 끝까지 덮어주고는, 밀려나지 않게 위치를 다졌다. 차유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침대는 아주 컸고, 성인 남자 두 명이 어떻게든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우태원 쪽으로 넘어간 시선이 빤히 그의 얼굴부터 목, 쇄골 밑을 훑었다. 우태원은 위를 벗고 있었다. 냄새가 꽤 짙다 했더니, 상의를 탈의해서인 모양이었다. 단단한 가슴팍 위로 울렁이는 흉곽이 보였다. 간헐적으로 움직이는 두꺼운 피부를 타고 죽은 뱀이 꿈틀거렸다.

“위에는 왜 벗었어.”

“셔츠 구겨질 것 같아서요.”

우태원이 이번에는 차유신의 베개를 추슬러줬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어디 나갈 일 있어?”

“아마도요.”

“언제.”

“일단 의원님을 재운 다음에요.”

“어디 가는데.”

저도 모르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우태원이 픽, 웃어버렸다.

“그리 멀리는 가지 않습니다. 안심하세요.”

우태원이 달래듯 차유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우태원의 말이 맞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불안했다. 이미 자신의 칩거 기간은 철저한 우태원의 둘레 안에 있었다. 숨을 쉬고, 먹고, 잠을 자는 일들이 우태원 없이는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태원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격차는 갈수록 깊어진다. 차유신은 우태원에게 자신의 패를 거의 다 보여줬다. 실로, 바닥까지 드러냈다. 반면 우태원은 딱히 보여준 게 없다. 명목상으로는 비서인 우태원이 자신의 밑에 있는 관계라지만, 차유신은 도통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꾸만 자신이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국회에서 짐 싸면 넌 김후준 의원실로 돌아가. 김 선배에게 얘기 해뒀으니까. 잘하면 비서관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얘기 잘 해뒀거든.”

애써 고뇌를 지우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우태원이 물끄러미 차유신을 응시했다.

“무원이형하고 수현이, 재희, 운열이, 해겸이…. 남은 사람들도 적당히 갈만한 곳 세팅해뒀어. 회기동모임에 있는 최도현 선배가 책임지고 배치해줄 거야. 각자 특기 잘 고려해서.”

“최도현 선배는 박신회 선배 라인인데요.”

“그게 뭐.”

“그쪽 라인과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습니다.”

“아주 좋지는 않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아. 일단 나이대부터 크게 차이가 나지 않잖아. 최 선배가 나보다 열 살이 많긴 하지만, 여의도에서 그 정도 나이 차는 친구지. 그냥 인연이 안 맞아 친해지지 못한 거야. 그 선배는 박신회 선배 밑이고, 난 김후준 선배 밑이었으니까.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어긋나버렸다 뿐이지, 사람 대 사람으로 따지면 썩 괜찮다 생각해.”

차유신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뚫어져라 건네 오는 우태원의 눈길이 느껴졌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빨판처럼 얼굴을 기어 다녔다. 차유신은 살짝 고개를 틀어 기꺼이 원하는 걸 보여줬다.

어느덧 석양이 저문 창문 너머에서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것이 제법 춥다고 생각했을 때 우태원이 이불 안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굵다란 뼈대가 허전한 차유신의 어깨를 감쌌다. 저릿한 압박감에 목덜미가 전율했다. 두어 번 떨고 나자 한기가 신기루처럼 증발했다.

“의원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차분한 질문이 다가왔다. 차유신은 도리질만 쳤다.

“나야, 뭐….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어디서 굶고 다니진 않을 거야. 그것 하나는 확실해.”

“정해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깨를 쓸고 난 손이 올라왔다. 차유신의 귓불을 살짝 건드렸다가, 마사지를 하듯 목을 어루만졌다. 아. 희한한 소름에 차유신의 어깨가 들썩였다.

“작은 것이라도 얘기해줘요. 전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음성이 아주 낮았다. 그의 눈빛이 스멀스멀 차유신의 면면을 탐색했다. 차유신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최소한 비참하게 살지는 않을 거야.”

“그건 저도 잘 아는….”

“거기까지. 네 계획이나 얘기해 봐. 너야말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차유신이 사뭇 엄하게 따졌다. 우태원이 다른 쪽 팔꿈치를 시트에 올렸다. 턱을 괸 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내 의원실에 들어온 목적이 있었을 것 아니야. 여기서 경력을 쌓고 다른 정부 조직에 들어가고 싶다든지, 국회에서 끝까지 가보고 싶다든지…. 혹은 공천을 받고 싶다든지.”

“굳이 따지면 공천 쪽이긴 합니다만.”

우태원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차유신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괜찮네.”

“뭐가요.”

“너 금배지가 어울려. 내 직감이야. 무엇보다 넌 재목이 돼. 스토리도 비주얼도 좋거든.”

“감사합니다.”

“김후준 선배께 잘 보여야겠네. 기회 잘 주는 분이야. 어디까지나 능력이 있다는 전제 아래 하는 얘기이지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또 너무 믿지는 말고.”

차유신의 어투가 냉해졌다. 우태원의 낯이 살짝 굳었다.

“네.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의원실, 다른 당 소속이어도 베테랑 보좌관 몇 명은 항상 포섭해두고 있어. 그들이 네 프락치가 돼줄 거야.”

“알겠습니다.”

“결국 여기는 사람 싸움이야. 네 편이 많아야 해. 회유를 해서든, 협박을 해서든 최대한 네 사람 많이 확보해두라는 얘기야.”

차유신의 눈꺼풀이 부쩍 흘러내렸다. 점점 잠이 오고 있었다. 노곤해져가는 차유신을 알아챈 우태원이 자못 부드럽게 몸을 안아왔다. 농몽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네. 그것도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나 선배라 불러.”

아예 눈을 감은 차유신이 웅얼거렸다. 우태원이 주저했다.

“전 아직 배지를 달지도 않았는데요.”

“예비 선배도 선배지. 시키는 대로 해.”

뜸을 들인 우태원이 결국 지시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선배.”

“그래. 잘했어.”

차유신의 입매에 엷은 호가 피어났다. 무채색으로 물든 어느 하늘 아래, 차유신은 낭떠러지를 보고 서 있다. 여기서 한 끗만 더 나아가면 오늘이 끝난다. 추락처럼 깊은 잠을 치르고 눈을 떴을 때, 차유신은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닐 것이다.

“잘 자요. 선배.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잠결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우태원이 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 다가왔는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차유신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의 휴식이 너무도 달콤했다.

우태원의 냄새를 품은 숨결이 조금씩 짙어졌다. 앞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흩날렸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이마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났다. 그 상쾌함에 도취되기도 전에 후끈함이 찾아들었다. 이마에 닿은 표피가 빨아들이듯 살갗을 축여오고 있었다.

“아….”

신음한 차유신이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까지 쭉 빨아오는 감촉이 목울대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기묘한 간지러움에 오금이 저려올 무렵, 표피가 떨어졌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려온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얼굴을 덮었다. 까무룩해진 뇌리를 담담한 한 마디가 파고들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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