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면 안을 채운 수십여 사람의 얼굴 위로 실시간 아이콘이 떴다. 이름, 나이, 직업, 기타 특이사항. 얼굴이 반쯤 가려진 상황에서도 프로그램은 명확하게 대상을 판별해냈다. 1초 미만 노출된 얼굴까지 빠짐없이 잡아내는 건 덤이었다. 웬만한 대기업을 넘어서는 완성도의 AI 얼굴 식별 시스템이었다.
“이거 DB는 어디서 구한 거야.”
한참이나 쳐다보던 차유신이 물었다. 괜히 눈치를 본 성윤일이 답했다.
“페이스북하고 인스타그램 같은 SNS들 연동했어요. 애초에 프로토타입이라… 머신러닝 차원에서, 그냥.”
픽, 웃은 차유신이 성윤일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나중에 외부에 알려지면 큰일 난다.”
“상용화 버전은 아니니까요.”
“하여간 열심히 산다. 이제는 백수면서.”
“저 백수 아니에요.”
성윤일이 강하게 부정했다. 차유신이 끌끌거렸다.
“뭐가 백수가 아니야. 컨리드는 실리콘밸리 쪽 기업에 인수됐고, 공동창업자였던 넌 지분 매각한 다음에 엑시트했잖아.”
“컨리드 상호는 아직 쓸 수 있어요. 인수되면서 명칭 바꿨거든요. 공동창업자하고 협의해서, 저는 계속 한국에서 컨리드라는 이름으로 AI 스타트업 운영하기로 했어요.”
“그래?”
“네. 그러려고 다시 T시티 입주한 건데요.”
성윤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들었다는 투로 끄덕인 차유신이 주변을 둘러봤다. 카페테리아를 닮은 공간 곳곳을 오가는 편한 차림의 직장인이 보였다. T시티 건물마다 마련해 둔 대형 휴게공간이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차유신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나저나, 사람이 예전보다 눈에 띄게 없다.
“역현구갑쪽 법인이 얼마나 들어왔지.”
심각함에 물든 질문이 나왔다. 속으로 셈을 마친 성윤일이 답했다.
“최근 기준 전체의 10% 정도요.”
“엄청 들어왔네.”
“이제 시작이에요. 곧 15% 달성할 것 같아요.”
성윤일이 지겹다는 투로 머리카락을 털었다. 재차 휴게공간을 살피고 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성윤일이 덩달아 일어섰다.
“어디 가요? 형.”
“여기가 관리사무소 본사무소 있는 건물이지.”
“그런 걸로 알아요. 제일 큰 A동이니까.”
“CCTV 관제소가 어디에 있더라.”
저벅저벅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뒤따라오던 성윤일이 난처해했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너한테 물어본 것 아니야.”
손을 휘휘 저은 차유신이 입력을 마친 메시지를 전송했다. 거의 실시간으로 답신이 왔다.
[우태원 의원실] 최근 옮겼습니다. A동 1층 가장 오른쪽 사무실입니다.
[차유신] 우태원은 지금 어디에 있어.
[우태원 의원실] 바로 파악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바로 한 차유신의 걸음이 빨라졌다. 열심히 따라오던 성윤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형.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얘기해.”
“보좌관을 하나도 안 달고 다니시네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유리문 앞에 선 차유신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훤히 드러난 문틈으로 발을 빼고는 안쪽에 있는 성윤일을 봤다. 시큰둥한 한 마디가 나왔다.
“난 혼자 다니면 안 돼? 내일모레면 민방위 끝나는 나이에, 보호자 달고 다니리?”
미적거린 성윤일이 수긍했다.
“물론… 되죠. 형.”
유리문이 닫혔다. 손을 흔든 차유신이 돌아섰다.
*
1층 오른쪽 끝에 있는 사무실 앞에 섰다. 노크도 없이 문부터 열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보던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벌떡 일어나 돌아봤다. 누가 봐도 역운회 소속 조직원이었다. 개의치 않고 다가간 차유신이 두 사람의 틈을 파고들었다.
“잠깐 CCTV 체크 좀 하겠습니다.”
벙 찐 두 사람이 차유신을 주시했다. 이러다 한 대 치려나. 차유신은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뭉쳐 쥐었다. 두 사람 정도는 무리 없이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편하게 보십시오. 의원님.”
불현듯 남자 하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나머지 남자도 따라서 물러났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호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을 찾듯 그들을 훑어보다 끝내 모니터에 시선을 뒀다. 깊이 생각하기도 귀찮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쉰 개는 족히 돼 보이는 모니터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화면이 바뀌고 있었다. 차유신은 빠르게 눈을 굴려 가며 목적지를 찾았다.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모니터 중 두 개가 덩치 큰 남자들로 가득한 사무실을 비추고 있다. 위에 ‘A-501, 502’라고 적혀있었다. A동 5층 1호와 2호. 저기가 관리사무소 본사무소구나.
차유신이 좀 더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 담긴 남자들의 수를 눈으로 헤아렸다. 보이는 것만 약 스무 명. 외근하는 인물들까지 포함하면, 한 마흔 명 되려나. 생각보다 많다.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게다가 허우대를 보니 하나같이 핫바지들은 아니다. 제법 이쪽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얘기다.
“저기… 죄송하지만.”
뒤편에서 어물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가까워진 남자가 뭔가를 내밀었다. 메모지와 펜이었다.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차유신의 낯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무슨 사인이요.”
남자가 정중히 답했다.
“그냥 사인입니다. 제가 의원님을 평소에 워낙 존경해서요.”
차유신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신체포기각서용 사인 말고, 다른 사인도 받을 줄 아는 놈들이었다.
일단 펜을 잡고 메모지를 데스크 위에다 펼쳤다. 대충 사인을 갈긴 뒤 아까의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꽤나 흐뭇하게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괜히 심경이 복잡해지는 광경이었다.
지잉. 문득 재킷 주머니가 울렸다. 손을 집어넣은 차유신이 핸드폰을 꺼냈다. 막 들어온 메시지 하나가 비쳤다.
[우태원 의원실] T시티 갔답니다. 관리사무소하고 CCTV 관제소 각각 들른다고 하던데요.
“타이밍 참 좆같네.”
치유신이 아랫입술을 질근거렸다. 남자들이 의아한 듯 차유신을 응시했다. 액정을 매만지고 난 차유신이 물었다.
“여기 우태원 왔었나.”
“안 왔습니다.”
그럼 곧 오겠군. 차유신이 얼굴을 짚었다. 마주쳐도 상관은 없지만 피곤해질 소지가 있다. 관제소까지 찾아온 차유신의 동선에 우태원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면, 상황이 다소 복잡해진다.
무심코 돌아간 눈길이 구석에 있는 작은 문에 꽂혔다. 뚜벅뚜벅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열어젖히자, 작은 방 하나가 나타났다. 간이 휴게실인 모양이었다.
“잠깐 여기 있어도 됩니까.”
차유신이 안을 가리켰다. 남자들이 번갈아 주억거렸다. 바로 몸을 들인 차유신이 지시조로 말했다.
“혹여나 나 봤다는 얘기는 어디 가서 하지 말고.”
오만한 손짓이 사인받았던 남자에게 건네졌다.
“입 다물라고 사인해준 겁니다. 내 필체는 아주 비싸거든.”
남자가 신속하게 끄덕였다.
“네. 의원님.”
마저 들어간 차유신이 문을 닫았다. 골방처럼 비좁은 방에는 창문조차 없었다. 흡연하기에는 최악의 공간인데, 그럼에도 차유신은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기탄없이 주머니에 들어간 손이 담뱃갑을 찾아 꺼냈다. 한 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훅, 연기를 뿜자 뒤늦게 머리가 개운해지는 감이 들었다.
서너 번 연기를 뱉었을 때 벽 너머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스라치는 남자들의 반응은 상대방이 누군지를 쉽게도 짐작하게 만들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딱히 답하지 않은 상대방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어딘가를 향했다. 아마도 CCTV 모니터가 붙어있는 쪽인 듯했다. 뭘 확인하는지, 한참이나 조용한 상대방을 속으로 씹어가며 차유신은 새하얀 도넛을 연달아 만들었다.
빨리 좀 꺼지지.
“여기 흡연 건물이었나.”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남자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재차 연기를 내뿜은 차유신이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왜 답이 없어.”
“아니…. 그.”
남자들이 머무적거렸다. 실소한 우태원이 경고했다.
“쥐새끼처럼 숨어드는 꼴 하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쾅. 말이 끝나자마자 차유신의 구둣발이 문을 걷어찼다. 벽 너머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고요를 뚫고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벌컥, 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나타난 우태원이 태연하게 벽에다 등을 붙였다.
“왜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세요. 선배.”
“누가 쥐새끼야.”
툭, 재를 떤 차유신이 눈을 구겼다. 우태원이 도리질을 쳤다.
“선배께 쥐새끼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안에 나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선배 담배 냄새가 났으니까요.”
내려온 손이 차유신의 손등을 덮었다.
“선배 냄새하고.”
스멀거리며 움직인 손가락이 사실상 꽁초만 남은 담배를 건드려 떨궜다. 하얀 꽁초가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며 굴러다녔다. 뒤꿈치로 꾹 지르밟은 우태원이 읊조렸다.
“이렇게 밀폐된 데서 담배 피우지 마요. 나 걱정되니까.”
은은한 바람을 타고 냄새가 났다. 또, 피 냄새. 바람이라는 것이 들어올 일 없는 공간에서 그런 것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에어컨을 타고 흘러온 것이었을 터다. 실제로 그 특유의 인위적인 냄새가 났다. 거기에 비릿한 내음이 섞여 지독한 현기증을 자아냈다. 뒤통수를 벽에다 비빈 차유신이 신음했다.
토할 것만 같다.
“한가한 모양이네. 남의 구역에 잘도 사찰하러 다니고.”
몸을 일으켰다. 우태원을 보지도 않은 채 발을 내밀며 그를 지나쳐갔다. 막 어긋나는 차유신을 우태원이 붙들었다. 손목을 두른 손아귀가 살갗을 아프지 않게 지분거렸다.
“잘 아시잖아요. 역현구갑 제조법인 다수가 이쪽에 들어온 거. 저로서는 그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을 해야죠.”
우태원이 느른하게 눈을 빛냈다.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누가 보면 역현구을 네가 먹은 줄 알겠다.”
“선배는 왜 오셨어요.”
“네가 먹고 싶어 하는 역현구을이 내 지역구니까. 내 지역에서 내가 싸돌아다니는 게 이상해?”
손을 뿌리친 차유신이 관제소에 발을 들였다. 아까의 두 남자는 다소 기가 죽은 채 차유신을 힐끔대고 있었다. 산만한 덩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그건 나도 알죠.”
차유신의 시선이 이동했다. 입구 쪽에 우뚝 선 또 다른 두 남자가 보였다. 조폭은 아닌 것 같고, 멀끔하니 단정한 것이 우태원의 보좌진인 모양이다. 헌데 처음 보는 면상들이다. 차유신의 얼굴이 골똘해졌다.
아무래도 내부에 프락치가 있다는 걸 안 뒤로, 우태원도 나름의 조직 정비를 한 듯했다.
“그런데 선배께서 CCTV 관제소까지 올 필요가 있나, 나는 이게 궁금한 거지.”
멈춰있는 차유신의 허리에 우태원의 팔이 감겼다. 끌어안듯 차유신을 품에 넣은 우태원이 셔츠 자락을 툭툭 건드렸다. 보좌진 두 명이 괜히 다른 곳을 봤다. 득달같이 내려간 차유신의 손이 우태원의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손 치워. 번지수 착각했어.”
“T시티 내부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어요?”
무시한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우태원을 봤다. 우태원은 그새 CCTV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관리사무소 본사무소를 담은 화면이었다.
“예컨대 관리사무소 쪽이라든지.”
“궁금하면 네가 어쩔 건데.”
차유신이 사납게 우태원의 팔을 치웠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떨어질 뻔했던 팔뚝이 보다 견고하게 허리를 둘러왔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옭매고는, 손을 내려 희롱하듯 골반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씨발 새끼가. 치를 떤 차유신이 우태원을 노려봤다. 우태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궁금하면, 확인시켜 드리려고요.”
다시 뿌리치기 위해 더듬거리던 차유신의 손이 멎었다. 우태원이 느긋하게 말을 맺었다.
“같이 위로 올라가 볼래요? 선배.”
*
내부는 CCTV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웬만한 체육관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대체 사무실을 몇 개나 튼 거지. 차유신은 셈을 하듯 구둣발을 꺼떡거렸다.
“오셨습니까. 형님.”
부리나케 달려온 남자가 우태원을 향해 몸을 숙였다. 우태원은 무성의하게 손짓만 했다. 익숙한 듯 허리를 세워가는 남자가 차유신의 눈을 사로잡았다. 낯이 익다. 언젠가 우태원 의원실에 갔을 때, 차유신을 공격해온 역운회 조직원이다. 주변에서 ‘재길 형님’, ‘서 실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름이 서재길인 거다.
“사람이 왜 이렇게 없어.”
내부를 빙 둘러본 우태원이 따졌다. 차유신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왜 이렇게 없냐니. 아까 CCTV로 봤을 때보다 꽤 늘어난 상태인데. 서른 명은 족히 되는데. 여기서 대체 몇 명이나 더 있어야 ‘사람이 있는 상태’가 되는 거지.
“주차장 쪽에 소란이 생겨 일부 나가 있습니다.”
서재길이 빠르게 답했다. 우태원이 되물었다.
“주차장?”
“네. 건너편 공용주차장이요. 거기를 호시탐탐 노리던 연합 하나가 있는데, 한 시간 전부터 차를 열 대 넘게 대두고 안 나간다 버티고 있습니다. 날 잡고 한번 먹어보겠다는 거죠.”
“줘, 그냥. 거기 얼마 하지도 않잖아.”
우태원이 심드렁하게 외면했다. 서재길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안 됩니다. 거기 뺏기면, 이 구역 공용 주차장 다 뺏기는 겁니다.”
“재경이 형은 뭐라고 했는데.”
우태원이 피곤하다는 투로 제 목을 주물렀다. 차유신이 입을 다셨다. 재경이 형. 석일태 회장의 아들인 역운회 석재경 사장을 얘기하는 거다.
“특별한 얘기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재경 형님 판단은 그리 빠른 편이….”
말꼬리를 흐린 서재길이 차유신을 흘깃했다. 차유신은 못 들은 척 얼굴을 돌렸다. 보다 우태원에게 다가간 서재길이 뭔가를 속닥거렸다. 끄덕인 우태원이 목에서 손을 거뒀다.
“그래도 따라야지. 그 사람이 역운회 보스인데. 제대로 안 모시면 너희들만 손해야.”
서재길이 마지못해 주억거렸다. 발을 옮긴 우태원이 차유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쳐낼까 하다 그만뒀다. 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게 슬슬 지겨웠다.
“잘 봤어요?”
우태원이 얼굴을 기울였다. 차유신은 잠자코 분주하게 오가는 남자들을 살펴봤다. 대충 스물여섯 명에서 서른 명 정도. 그리고 바깥에 있는 이들까지 합하면…. 차유신의 낯이 찌푸려졌다.
“여기 관리사무소에 총 몇 명이나 머무는 거야.”
“글쎄요. 그리 많지는 않은데.”
우태원이 다른 곳을 봤다. 눈이 마주친 조직원들이 급히 꾸벅거렸다.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한 백 명? T시티 관리 인력뿐 아니라, 인근 주차장이나 건물 관리 인력도 전부 여기에 집합하거든요.”
차유신의 등줄기가 움칠했다. 괜히 식은땀이 났다.
백 명이나 된다고.
*
[진무원 수석보좌관] 죽을래? 어디 갈 때는 간다고 얘기를 해야지. T시티를 혼자 가? 거기 역운회 잔뜩 깔려있는 것 알잖아. 너 알아본 그쪽 놈들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재희하고 운열이 데리고 그쪽 가고 있어. 사람들 잘 보이는 곳에 있어.
액정에 줄줄이 뜨는 잔소리에 눈은 물론이고 귀까지 아팠다. 지친다는 양 화면을 끄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알은 체를 했다.
“무원이 형님이네요.”
“남의 문자를 왜 봐.”
“아는 이름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곧 이쪽 올 거야. 역운회 소굴 같은 곳에 혼자 와있는 게 걱정되는 모양이야.”
차유신이 벤치 등받이를 넘길 정도로 고개를 젖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호흡이 자못 노곤해졌다. 아무리 역운회 소굴이니 어쩌니 해도, 차유신은 T시티에 오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 와있으면 다 괜찮아지는 기분이 든다.
T시티는 차유신의 집이었다. 심지어 매우 오래된 집이었다.
“무원이 형은 예전부터 그랬죠.”
차유신의 맞은편에 선 우태원이 뇌까렸다. 차유신이 목을 세웠다. 빤한 시선이 우태원에게 걸렸다.
“선배를 아주 많이 과잉보호해요. 어린애라도 다루는 것처럼.”
“그럴 만도 하지. 무원이 형하고 나는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 나보다 훨씬 전부터 국회생활을 한 사람이고. 처음 금배지 달고 수석보좌관으로 무원이 형 들였을 때, 그 형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세팅해줬어. 말투는 이렇게 해야 하고, 차림새는 이렇게, 사람들 대할 때는 이렇게…. 그 형 없었으면 초선 국회의원 차유신도 없어. 거의 그 수준이야.”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진무원을 떠올리면 절로 할 말이 많아진다. 그만큼 인연이 오래됐고, 또 질기기도 하다. 차유신이 국회에서 퇴출당한 후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에조차 딱히 일자리를 잡지 않고 주변에서 맴을 돈 사람이다. 보통의 관계로 치부하기엔 역사가 꽤 깊다.
“그러게요. 선배를 아주 많이 아끼더라고요.”
조금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였다. 차유신의 눈동자가 살짝 올라갔다. 우태원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선배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변의 애정을 받는 인물이에요. 선배 자체가 워낙 빛이 나 그런 건지도 모르죠.”
흘러간 차유신의 시선이 우태원과 같은 곳에 머물렀다. T시티 입구 쪽 조형용 벽 앞에서 두 남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커다란 동판이 있다. T시티를 완공하고 기념식을 하던 날, 차유신이 직접 남긴 손자국을 남긴 기념물이었다.
“그게 저는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태원이 자조했다.
“신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먼 곳에서 돌풍에 가까운 바람이 찾아들었다. 실내에서 맞이한 에어컨 바람보다 훨씬 더 거세고 살아있는 것이었다. 자연히 아까의 냄새가 달라졌다. 인위적이며 기분 나쁜 내음이, 카멜레온처럼 다른 색깔을 입었다.
우태원의 살냄새.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차유신이 떨떠름한 욕을 뱉었다. 우태원은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막 비 내린 후를 연상케 하는 침묵에 휩싸여있을 때, 저편에서 차 멈추는 소리가 났다. 허겁지겁 뛰어온 남자가 차유신의 앞에 섰다. 비서 김운열이었다.
“무원이 형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일정 마쳤으면 들어가시죠. 형님.”
김운열이 서둘러 차유신의 팔을 당겼다. 우태원을 일별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김운열을 따라 일정하게 걸어간 끝에 차 뒷좌석에 다다랐다. 김운열이 손수 문을 열어줬다. 그대로 들어가려다, 재차 우태원을 확인했다. 뒤편에 보좌진 두 명을 둔 우태원이 구십도 각도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지나치게 예의가 발라, 조금 열이 받았다.
*
창틀에는 화분이 많았다. 하나같이 분홍색 내지 금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리본에는 개업을 축하한다는 문구와 함께 ‘OOO 회장’이라는 이름이 주로 박혀있었다. 차유신은 새삼 생각했다. 대한민국에는 회장이 참 많다. 광화문에서 ‘회장님’이라고 불렀을 때, 중년 남성 태반이 고개를 돌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나도 아는 국회의원 많아요. 경남 쪽 국회의원은 다 나하고 술 한 번쯤 마셔봤다고 해야 할 정도니까.”
매천회 회장 곽희서는 40대 초반이었다. 60대 초반인 석일태 회장에 비해 다소 어렸다. 후발 주자이면서 젊기까지 한 조직이 역운회 다음 가는 수준으로 세를 키웠다. 곽희서가 범인(凡人)은 아니라는 얘기가 알음알음 나오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다만 어디서나 인정받는 건 아니었다. 매천회는 철저한 2인자였다. 한 번도 역운회를 넘어본 일이 없다. 곽희서 입장에서는 떨칠 수 없는 콤플렉스일 터다.
“내 앞에서 굳이 무게 잡을 것 없다는 얘기야. 알겠어? 차 의원.”
곽희서가 비식거렸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무게 잡은 적 없는데요. 제가 그래 보입니까.”
곽희서가 코웃음을 쳤다.
“허, 참.”
옆자리의 진무원은 내내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오전에 운도동에 있는 매천회 사무소에 간다는 얘기를 했을 때부터 강한 우려를 내비쳐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거부하는 진무원에게 차유신은 시니컬하게 답했다. 어. 그렇게까지 해야 해.
살다 보니 깨끗한 것만 접하면서 원하는 걸 이루는 게 어렵더라고.
“제안한 건 내가 대충 들었습니다. T시티에 있는 역운회 조직원들을 전부 몰아내 달라고. 허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거기에 상주해 있는 인원이 몇인데.”
곽희서가 다리를 꼬았다.
“역운회 본사무소가 역현구 운도동에 있다면, 2사무소는 T시티 관리사무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뭐, 차 의원에게는 그 2사무소를 먹는 게 엄청 간단한 일처럼 보였겠지. 사람들을 모은다, 사무소를 친다, 그리고 차지한다. 하지만 이게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한 일이야. 관리업이라는 게 다 이권다툼이에요. 건물, 주차장, 노상. 이런 것들 전부. 주인이라는 게 따로 없어. 증빙이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센 놈이 모조리 차지하는 구조야. 역운회가 T시티를 먹은 건 그네들이 세기 때문인 거고.”
“매천회도 그 정도는 충분히 되지 않습니까.”
차유신이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곽희서가 한숨을 쉬었다.
“단지 T시티만 먹는다고 하면 솔직히 가능은 하지. 다만 여기엔 보다 부차적인 문제가 따라. 우리가 T시티를 먹으면 역운회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가 본거지인 부산을 두고 서울에 사무소를 차린 것처럼, 역운회에도 부산 사무소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서울에 대놓고 깃발을 꽂으면 부산의 역운회가 똑같이 날뛴다는 얘기야. 아주 끝까지 가는 거지. 그러다 둘 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고.”
“그걸 알면서 왜 굳이 서울에 진출을 했습니까.”
차유신이 훈계하듯 말했다. 곽희서가 혀를 찼다.
“그래도 기회라는 게 있잖아. 일단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역운회 것 몇 개 정도는….”
“그 기회를 제가 지금 드리려 하는 겁니다. 감이 잘 안 잡히십니까.”
차유신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뺐다. 액정을 몇 번 두드리고는 번호 하나를 찾았다. 김정수 역현경찰서장. 통화버튼을 누른 후 얼굴에 가져갔다. 두어 번 신호음이 간 끝에, 바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차 의원님.
“통화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청장님께 얘기 들으셨죠.”
-들었습니다.
“지금 매천회 곽희서 회장 연결하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거의 기계 수준의 답변이었다. 손을 뻗은 차유신이 핸드폰을 곽희서에게 넘겼다. 멋모르고 받은 곽희서가 액정을 본 후 소스라쳤다. 잠시 얼어있던 그가 곧 귀에 핸드폰을 댔다. 부쩍 유순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아, 차 의원님이요.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만간 제가 꼭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곽희서의 얼굴에서 핸드폰이 내려왔다. 손을 내밀어 되돌려준 그가 숨을 삼켰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낯이었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차유신이 대수롭지 않게 반문했다. 곽희서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 했다. 아까보다 한층 예의를 갖추는 기색이었다.
“차 의원님이 너무 젊어서, 제가 저도 모르게 약간의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전혀요. 딱히 그리 느끼지 않았습니다.”
차유신이 심상하게 테이블을 더듬었다. 위에 놓인 담뱃갑이 여러 개였다. 차유신이 늘 피우는 것은 없었기에, 그중 가장 향이 가까운 것을 찾아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 대를 뺀 차유신이 곽희서를 일별했다.
“결례가 안 된다면 한 대 피우겠습니다.”
곽희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남자가 미세하게 이마에 금을 새겼다.
입에 문 차유신이 진무원을 봤다. 바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 진무원이 불을 붙여줬다. 피어오른 연기가 자욱하게 흩뿌려졌다. 몽롱하게 소파에 기댄 차유신이 곽희서를 힐금했다. 여전히 차유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차마 드러낼 수는 없어 시트만 억눌러 대는 그가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역현구 경찰로부터 특혜받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주시기 바랍니다.”
차유신이 태평하게 말했다. 곽희서가 뭉그적거리다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의원님.”
“또 궁금한 것 없습니까.”
테이블 위에서 빙빙 유영하던 차유신의 손이 멈칫했다. 재떨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짧은 고민 끝에 대충 끄트머리를 털었다. 재떨이가 없으면, 없는 대로 떨면 되는 일이다. 투명한 테이블 표면에 자잘한 조각들이 내려앉았다. 지켜보던 곽희서가 억지로 입매를 비뚤었다.
“담배 참 잘 하시네요.”
“합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최적의 기호식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차유신이 고개를 가눴다. 유심히 마주 보던 곽희서가 돌연 소리 내 웃었다.
“불법적인 것도 원하시면 얼마든지 얘기하십시오. 제가 기꺼이 세팅해드릴 테니까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귀공자 이미지 유지하느라 평소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습니까. 필요에 따라 우리 곱상한 의원님을 여자 취급해줄 남자들도 충분히 제공하겠습니다. 우리 쪽 업소 물이 상당히 좋아요. 의원님만큼은 아니지만요.”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이블이 세차게 차였다. 벌떡 일어난 진무원이 곽희서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매천회 사람들이 공격적인 태세로 달려들었다. 손을 들어 저지한 곽희서가 진무원을 노려봤다.
“밑에 있는 보좌관분 충성심이 상당하네요.”
차유신은 무시하듯 테이블에 재만 떨궜다.
“그만하자, 무원이 형. 나 밑바닥 사람들하고 너무 엮이는 것 취향 아니야.”
진무원이 차유신을 돌아봤다. 곽희서가 헛웃음을 쳤다.
“이야…. 차 의원님. 말을 함부로 하시네.”
곧 이를 갈았다.
“그러다가 혀 잘려요. 의원님.”
차유신이 흔쾌히 응수했다.
“자르시던가요. 그런다고 밑바닥인 곽 회장님하고, 위에 있는 내 인생이 뒤바뀔 일은 없을 테니까.”
반쯤 피운 담배를 툭 던진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가붓하게 진무원의 등을 두드리고는, 몸을 틀었다.
“가자. 형.”
진무원이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 소파에 주저앉은 곽희서가 시근덕거렸다.
*
밖으로 나온 뒤 바로 새 담배를 물었다. 사실 담배는 진작 있었다. 아까는 기선제압을 위한 쇼에 불과했고, 지금이 진짜 흡연이었다. 막 연기를 뿜은 차유신의 손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문자 메시지가 떴다.
[권헌 비서] 지시하신 증거 전부 수집했습니다. 증인도요.
눈을 굴린 차유신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짤막한 답신이 전송됐다.
-고생했어. 증인들 모일 날짜는 추후에 공지할게. 오늘은 여기까지.
느른하게 몸을 가누는 차유신의 곁으로 진무원이 다가왔다. 다소 식어있는 낯이 두드러졌다.
“하나만 묻자. 유신아.”
막 입에서 담배를 뺀 차유신이 진무원을 주시했다. 진무원이 심각하게 따졌다.
“너 요즘 우리 의원실에 숨기는 게 많은 것처럼 보여. 내 착각이야?”
뚫어져라 보기만 하던 차유신의 손이 올라갔다. 진무원의 어깨에 다다라, 달래듯 슥 쓸었다. 이윽고 등을 보인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어. 형 착각이야.”
뚜벅거리며 구둣발이 나아갔다. 단호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그리고 그게 착각이 아니라 해도, 형이 나를 저지할 권한은 없지.”
주차해 둔 차의 뒷좌석에 다다른 차유신이 진무원을 돌아봤다. 탄식하듯 얼굴을 짚은 진무원이 희미한 혼잣말을 흘렸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
맥 빠진 걸음으로 진무원이 다가왔다. 뒷좌석 문을 열어준 그가 차유신을 밀어 넣었다. 나직한 한탄이 들려왔다.
“내가 널 어떻게 하겠니. 넌 원래 이랬는데.”
*
룸 안은 적막했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괜히 수그린 채 차유신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차유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서류를 넘겼다. SDB그룹, 태류건설, 서울시에서 각각 넘어온 내부 자료를 두고 숫자 하나하나까지 일치하는지를 세세하게 따졌다. 옆에 앉은 권헌은 정자세로 그런 차유신을 지켜봤다.
“일단 숫자나 날짜 구멍 난 건 안 보이네요.”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차유신이 테이블 위에 툭 종이뭉치를 던졌다. 조금은 안도한 남녀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차유신은 가장 왼편에 있는 남자에게 정종병을 건넸다. 남자가 과장되게 양손으로 감싼 잔을 내밀었다. 하얀 도자기 잔 안에 조르르, 액체가 들어찼다.
“여러분께서 주신 자료들은 향후 국가 안정을 꾀하는데 아주 귀중한 소재가 될 겁니다.”
잔을 받고 난 남자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미동하는 눈동자가 차유신을 담았다. 차유신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세 장의 명함을 읽었다. 차례대로 서울시 박동석 과장, SDB그룹 조인나 차장, 태류건설 김대우 부장. 권헌이 확보한 T시티 운영사업 로비게이트의 증인들이었다. 동시에 해당 게이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이었다.
“스토리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태류건설이 서울시에 뒷돈을 주고 역현T시티 운영사업 건을 인수. 이후 장부상 숫자를 장난친 태류건설이 헐값에 T시티를 SDB그룹에 내줬습니다. 최대 수혜자는 SDB그룹. 한 마디로 이건 T시티를 사유화하기 위한 SDB그룹의 큰 그림이었던 겁니다. 여기에 서울시와 태류건설이 공조한 거고요.”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잔을 받았던 박동석 과장이 어색하게 실실거렸다. 조인나 차장과 김대우 부장도 슬금슬금 입꼬리를 올렸다. 커다란 테이블을 채운 접시들 위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서빙 된 지는 삼십 분이 넘었는데,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 식은 지 오래된 음식에서 빛이 바랬다.
“편하게 드십시오. 이 자리는 제가 대접하는 겁니다.”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이 삐걱거리며 수저를 들었다. 다시 조용해진 룸 안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잡음처럼 흩어졌다. 고기를 한 점 집은 김대우 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차 의원님.”
차유신이 덤덤하게 김대우 부장을 봤다. 그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이런 거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말씀하십시오.”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건 있겠지요? 의원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국가 안정을 위한 중요한 자료를… 저희가 드렸는데.”
김대우가 입을 오므렸다. 차유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상냥한 시선이 세 사람을 물처럼 훑었다.
“그럼요.”
세 사람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살포시 눈매를 휜 차유신이 말을 맺었다.
“게이트가 오픈돼도, 여러분이 감옥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환하던 낯빛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한층 더 고요해진 공간에서 차유신이 젓가락을 쥐었다. 눈에 띄는 접시를 대충 뒤적이고는, 세 사람은 보지도 않은 채 권했다.
“어서 드시죠. 앞으로 오래 사시라고 대접하는 제 성의입니다.”
*
“바로 PG 준비할까요.” (*PG: 정부 기관 등에서 내놓는 언론공개자료.)
세 사람이 탄 차가 차례로 멀어져 갔다. 휑해진 식당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차유신에게 권헌이 물었다. 차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때가 아니야.”
“증인도, 증거도 있는데요.”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해. 언론을 주목시킬 만한 키맨 하나를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야. 아주 섹시하고, 파급력이 있는 인물로. 그런 게 없으면 이런 이슈는 하루 이틀 논란만 되다가 묻힐 가능성이 높아. 파급력이 낮으니 여당에서 덮기도 쉬울 거고.”
“그럼 키맨을 제가 추가로 알아볼까요?”
“아니. 됐어. 거기까지는 권 비서 영역이 아니야.”
차유신이 권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권헌이 목을 꿀꺽였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고생 많았어.”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돌담길을 내려가는 차유신의 뒤로 권헌이 급하게 따라붙었다. 곤란해하는 음성이 다가왔다.
“그쪽으로 내려가면 광화문입니다.”
“알아.”
“퇴근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사람이 꽤 많을 텐데요. 혹여나 의원님께서 난처한 상황에 빠지시면….”
“별로 신경 안 써.”
손사래를 친 차유신이 마저 발을 옮겼다. 망설이던 권헌이 일단 차유신의 곁에 몸을 붙였다. 저벅저벅 내려가는 내내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차유신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차유신은 무시한 채 갈 길만 갔다. 옆에 있던 권헌만 주변을 경계하느라 바빠졌다.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의원님께서는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본인께서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이라는 걸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것 알아. 이 얼굴로 태어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따졌다. 권헌이 움칠했다.
“그런데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 해. 지금은 6월이고, 밤바람이 아주 좋아. 무엇보다 광화문은 아름답고. 이런 상황에서 걷는 일조차 원하는 대로 못 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정면을 본 차유신이 멈춰 섰다. 눈앞에 커다란 대로변이 펼쳐져 있었다. 쌩쌩 달려가는 차들이 미지근한 훈풍을 남겼다. 차유신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곧 광화문 한복판이었다.
“안 그래도 금배지 단 이후로 많은 걸 포기하며 살아온 입장인데.”
차유신이 방향을 꺾었다. 따라온 권헌이 차유신을 응시했다.
“이미 한번 그런 걸 겪었으면서, 결국 다시 여의도에 돌아왔다는 건 그만큼 지금의 직함이 매력적이라는 방증입니까.”
“매력적인가? 잘 모르겠어. 사실 내가 왜 이 직업을 택했었는지를 이제는 잊었어. 다시 돌아온 건, 그냥 이 자리가 내 습관이 됐기 때문이야.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시작을 해버렸으니 이것이 아닌 나를 상상하는 게 어려워진 거지.”
일정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또 멎었다. 허공을 본 차유신이 읊조렸다.
“그냥 그때 그 선배 얘기를 들을 걸,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하지만. 이미 늦었지. 시간이 너무 흘렀어.”
“그 선배요?”
“제대하고 나서 김후준 선배로부터 공천제의 받고 고민할 때, 그쪽 중진의원 하나가 따로 나와 만나 이런저런 충고를 해줬거든. 말이 충고지 사실상 저지였어. 나보고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좀 더 인생 겪어보고, 이런 일 저런 일 해보다 그래도 이거다 싶으면 그때 하라고. 지금 여의도에 오기엔 내가 경험도 짧고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댔어.”
“그분께서 그런 얘기를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뭐….”
차유신이 구둣발을 내밀었다. 딱딱한 바닥을 타고 터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직업적 만족도로만 따지면 사실 국회의원은 최악이거든.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으니까. 대한민국에 좋은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걸 하고 싶냐 묻더라고.”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차유신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대국민당에서 양심선언하고 자진 사퇴한 박신회 선배. 지금은 국회에 없는.”
권헌이 주춤했다. 차유신의 걸음이 느려졌다. 커다란 사거리 한편에 한 신문사의 고층빌딩이 솟아있고, 그 옆에서 대형 전광판이 번뜩이고 있었다. 네모난 화면 안에는 아주 잘 아는 인물이 담겨있었다.
「대부업 법정최고금리 상향되나… ‘우태원법’ 다음 주 본회의 오른다」
“저 새끼는 저러려고 정무위 갔나.”
차유신이 허리를 짚었다. 덩달아 화면을 본 권헌이 눈을 껌벅였다.
“우태원 의원 쪽에 확실히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신경 쓸 만한 새끼이긴 하지. 언제, 어떤 일 벌일지 모르니까. 지금도 봐. 사채업자 금리 높이자는 게 사람 새끼 대가리에서 나올 법안이야?”
“굳이 그런 이유에서 뿐 아니라….”
권헌이 말을 흐렸다. 차유신이 찌푸린 채 권헌을 봤다. 권헌이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다 말아.”
“그냥 다른 것이나 여쭙겠습니다.”
권헌이 빙그레 웃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다른 거, 뭐.”
“우태원 의원은 의원님께 선배라 부르죠.”
“그렇지. 국회 선배니까.”
“의원님 비서 시절에도 그렇게 불렀습니까.”
“비서 시절에는 그 호칭이 아니었….”
즉각적으로 답하던 차유신의 턱이 돌연 얼었다. 머릿속을 가로지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속눈썹을 달싹이던 차유신이 급히 말을 돌렸다.
“그건 왜 묻는데.”
“우 의원이 비서 시절에도 의원님을 그렇게 불렀다면.”
권헌의 톤이 진중해졌다.
“저도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요.”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권헌은 자못 침착하게 차유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유신의 목을 타고 커다랗게 뭉친 숨이 넘어갔다. 도시 내음이 물씬 풍기는 선선한 공기로 입가심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딱 자르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안 돼.”
차유신이 엄한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허락한 임무, 호칭, 프라이버시 이외의 것을 침해하지 마.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일자를 유지하던 권헌의 입꼬리가 허탈하게 올라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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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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