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피감시자
13.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5월.]
“왜 갑자기 행안위를 얘기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어렵다.”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만년필이 테이블을 굴렀다. 신인대는 턱을 괸 채 차유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차유신은 꿀꺽 침부터 삼켰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식도가 워낙 헐어 있어,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넘기는 모든 일이 힘에 부쳤다.
“제가 조만간 하려고 하는 게….”
입을 열자마자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잠시 얼굴을 짚은 차유신이 제 목을 어루만졌다. 옆에 있던 행안위 소속 문지찬이 물컵을 밀어줬다.
“괜찮아? 감기 심하게 걸린 것 같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 한 잔 마시고 얘기해.”
문지찬이 여유롭게 손짓을 했다. 신인대가 문지찬을 노려봤다.
“지금 상황이 신나는 것 같구나. 문지찬이.”
“어이구, 신이 나죠. 행안위에 유신이 들어오면.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말빨 하면 차유신인데.”
“넌 가오가 없어? 경찰대 출신이라고 믿고 행안위에 꽂아뒀더니, 회의 때마다 여당에 처맞기나 하고… 이러니 경대 놈들이 공천을 못 받는 거야. 벙어리야? 왜 하나같이 해야 할 말들을 못 해.”
“우리라고 그러고 싶어 그러겠어요? 대국민당 행안위 위원들이 워낙 센 걸 어떻게 합니까.”
문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치를 떤 신인대가 다시 차유신을 봤다. 그사이 물을 두어 모금 삼킨 차유신이 정자세를 갖췄다. 이내 신인대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과방위 위원을 삼 년 연속으로 지냈습니다. 더 이상 이미지가 고착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누가 무한정 과방위만 하래? 일단 올해는 그렇게 하자는 거야. 국민들이 너에게 원하는 기대치가 있어. 우리 당 내부적으로도 그렇고. 물론 행안위는 비인기 상임위이기 때문에 너에게 거기를 주는 것 자체가 어렵지는 않아.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당연한 거잖아. 왜 갑자기 뜬금없이 행안위를 달라는 거야. 응?”
차유신의 손에 들린 컵이 끽,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밀려났다. 보다 제대로 신인대와 눈을 맞춘 차유신이 입을 뗐다.
“올해와 내년 중 행안위에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네가 행안위에 들어갈 명분이 있기는 해?”
“없지 않다는 거, 선배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부쩍 미간을 좁힌 신인대가 큼, 소리를 냈다. 맥 빠진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래.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과방위 있을 때, 과기정통부와 경찰청이 합동으로 무인 치안 시스템 개발하게끔 추진한 게 저입니다. 그거 자체가 명분….”
“알았어. 그만. 구문 그만 읊어.”
신인대가 칼같이 말을 끊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팔짱을 꼈다. 복잡한 눈으로 차유신을 훑다가, 진중한 음성을 꺼냈다.
“얘기나 들어보자. 행안위 가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대한민국 치안 문제 좀 다잡아볼까 합니다.”
“그건 과방위 때 이미 했어. 그 무인 치안 시스템, 지금 전국 도입률이 70%야.”
“그건 아주 신사적인 거였고, 이번엔 비신사적으로 하고 싶어서요.”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신인대가 모르겠다는 양 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왜 갑자기 치안 문제에 신경을 써. 역현구을에 치안 문제가 있어?”
“일단은 없습니다.”
“그럼.”
“역현구갑에 있죠.”
“거긴 네 소관이 아니야.”
“왜 제 소관이 아닙니까. 제가 손을 대면, 그 순간 제 소관이 되죠.”
차유신의 목이 꼿꼿해졌다. 신인대의 양손이 심각하게 테이블을 짚었다. 한껏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정확히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차유신이 가벼운 고갯짓을 했다. 더 없이 단조로운 대꾸가 건네졌다.
“역운회를 없애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요.”
*
“너 진심이야?”
의원회관 1층에 있는 카페에 문지찬과 마주 앉았다. 멋대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 온 문지찬이 자신과 차유신의 앞에 각각 컵을 뒀다. 차유신은 문지찬 모르게 잔을 구석으로 치웠다. 물은 어떻게든 먹겠는데, 커피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생채기가 악화될까 봐 정 필요한 음식물 이외에는 섭취를 자제하고 있었다. 창 너머로 우중충한 하늘을 보던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우태원 이 씨발 새끼야.
“역운회 그렇게 쉽게 안 될 텐데. 너도 알다시피 대국민당하고 꽤 깊숙이 결탁해있는 곳이야. SDB그룹 석일태 회장 로비 재주가 보통이 아닌 것 알잖아. 심지어 어찌나 치밀한지 티도 잘 안 나. 골치 아픈 작업이 될 거야.”
문지찬이 텁지근하게 뇌까렸다. 차유신이 도리질을 쳤다.
“그것까지는 선배께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몇 가지 도움만 주십시오.”
“갑자기 왜 역운회를 들쑤시려 하나 모르겠다. 나로서는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허대윤 경찰청장하고 친하시죠.”
차유신이 물었다. 문지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친하지. 경대 선배인데.”
“조만간 식사 자리 하나 마련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어. 안 그래도 그거 내가 조금 전에 얘기해 놨다. 이번 주 일요일 돼? 행안위 들어가기 전에 아이스 브레이킹 차원에서 같이 브런치나 하자고. 그 양반이 좀 센시티브한 구석이 있어. 양식을 엄청 좋아해. 생긴 건 무슨 조폭처럼 생겨갖고.”
“식당 정해졌습니까.”
“장소는 아직.”
“제 보좌진 통해 예약 잡아놓겠습니다. 선배하고 허대윤 청장은 몸만 오는 걸로 하시죠.”
“그러면 나야 편하지.”
차유신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한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 일요일 11시. 총 세 명. 프라이빗한 양식당으로. 전송을 마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을 때, 저편을 보며 피식거리는 문지찬이 보였다.
“이야. 저 새끼도 양반 못 되네.”
“뭐가요.”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깔깔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차유신도 잘 아는 정론관 출입 여기자들이었다. 우태원을 카페 카운터 쪽으로 몰고 간 여기자 무리가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 카페라떼요, 저는 아메리카노! 저는 카모마일 부탁드려요.
꽤나 예의 있게 주문을 받고 난 우태원이 옆에 있던 수석보좌관 백진재를 봤다. 백진재가 카운터에 카드를 건네며 주문에 들어갔다. 별것도 아닌 걸로 여기자들은 까르륵대며 좋아했다.
“이야, 참 인기 좋아. 유신아. 넌 위기감이 안 드니? 저거 딱 2년 전 네 포지션 아니냐.”
문지찬이 흥미롭다는 듯 감탄했다. 차유신의 윗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가 2년 전에 저랬습니까.”
“어. 너 딱 저랬어. 얼굴 제대로 팔고 다니는 느낌.”
“저렇게 천박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한데, 네가 더 심했다.”
문지찬이 낄낄거렸다. 피로한 숨을 내쉬고 난 차유신이 화제를 돌렸다.
“우태원이 양반 못 된다는 건 무슨 얘기입니까.”
“너 몰라? 저 새끼가 역운회랑 엄청 얽혀 있잖아. 알음알음 다 아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SDB그룹 석일태 회장이 쟤 기르다시피 했다면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으니 지금까지 말이 안 나왔다 뿐이지, 뭔가 구린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지. 역현구갑을 거의 80% 지지율로 먹은 것도 결국에는 그 덕이고. 거기가 역운회 소굴 아니야.”
차유신의 눈이 깔렸다. 역시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넘어가는 건, 문지찬의 말처럼 그것 자체에는 문제 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따지려면 작은 것이라도 혐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태원에게는 그 혐의가 없다. 마찬가지로 석일태에게도 혐의가 없다.
그래서 차유신은 그 혐의를 만들어야 했다.
“드시죠.”
불현듯 차유신의 앞에 테이크아웃 잔 하나가 내려왔다. 차유신과 문지찬의 얼굴이 동시에 들렸다. 몸을 튼 우태원이 문지찬을 향해 허리를 굽었다.
“문 선배 것은 준비를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도 필요 없어. 새끼야.”
문지찬이 이죽거렸다. 탐탁지 않게 잔을 쏘아보던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이걸 왜 나한… 쿨럭.”
어조가 격해지자마자 바로 기침부터 나왔다. 부어오른 목을 부여잡는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나긋하게 말했다.
“목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 따뜻한 차 들고 안정하시라고요.”
차유신의 눈꺼풀이 치켜 올라갔다. 우태원이 예사롭게 차유신을 마주 봤다. 분연한 숨을 삼킨 차유신의 시야에 지나가던 도의석 기자가 들어왔다. 바로 입이 떨어졌다.
“도의석.”
차유신 쪽을 본 도의석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와,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이거 너 먹어.”
“갑자기요?”
도의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유신은 더 이상 따지기 싫다는 투로 손만 내저었다.
“어. 갖고 꺼져.”
주춤거리던 도의석이 슬금슬금 잔을 챙긴 뒤 내뺐다. 자리에 앉아 차유신과 우태원을 번갈아보던 문지찬이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곧 우태원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점심 약속이 나하고 같다? BH쪽하고. 맞지?”
“맞습니다.”
“잘됐네. 같이 이동하자.”
문지찬이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문지찬을 따라 나아가려는 우태원의 구둣발 앞에 차유신이 제 발을 밀어 넣었다. 우태원이 멈칫했다. 차유신이 냉하게 명령했다.
“넌 잠깐 앉아.”
우태원이 얼굴을 짚어가며 웃었다. 곁눈질을 건넨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좀 힘들 수도 있겠는데요.”
“뭐가.”
차유신의 눈이 매서워졌다. 우태원의 낯이 무표정으로 변해갔다.
“지금 선배하고 마주 앉아 있으면, 저번에 제 좆 빨 때 보여준 야한 얼굴밖에 생각이 안 나서.”
이어지는 음성이 은근했다.
“공공장소인 걸 잊고 꼴릴 것 같습니다.”
차유신의 어금니가 꽉 깨물렸다. 탁. 테이블 다리가 세차게 걷어차였다. 올라온 잔이 아슬아슬하게 덜컹거렸다.
“개소리 처하지 말고 앉아. 이 씨발 새끼야.”
태원아. 안 와? 훌쩍 저편으로 이동한 문지찬이 물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우태원이 허리를 죽 펴며 답했다.
“먼저 가 계십시오. 전 따로 이동하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늦으면 늦는 거죠. 제가 따로 얘기를 해둘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선배 먼저 출발하십시오.”
“뭐… 좋을 대로 해.”
고민하던 문지찬이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마저 몸을 옮겼다. 애초에 문지찬과 우태원은 같은 당도 아니고, 특별한 친분도 없다. 그저 오늘 같은 식사 약속이 잡혔을 뿐이다. 우태원을 챙길 이유가 없는 건 당연했다.
“무슨 얘기를 하실지 기대가 되네요.”
드르륵, 맞은편 의자가 밀려났다. 몸을 앉힌 우태원이 새삼 다정하게 차유신을 봤다. 차유신은 묵묵하게 팔짱을 꼈다. 고요한 테이블 위에서 문지찬이 사준 아메리카노가 찰랑였다.
차 의원이다. 어? 우 의원도 있네. 지나가던 이들이 수군대는 게 느껴졌다. 차유신은 힐끔 그들을 확인했다. 일부는 안면이 있는 대국민당 소속 보좌진들이었다. 눈치챈 보좌진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미적거리며 관찰해오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데, 괜찮겠어요?”
우태원이 넌지시 물었다. 차유신은 딱딱하게 받아쳤다.
“상관없어.”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요.”
“둘이서 어디에 들어가 있으면,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차유신이 날을 세웠다. 우태원이 태평하게 제 얼굴을 감쌌다. 이어 느릿느릿 주억거렸다.
“그건 꽤 맞는 얘기네요.”
“내가 엊그제 집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차유의 톤이 낮아졌다. 얼굴에서 손을 거둔 우태원이 눈을 맞춰왔다.
“네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을 떠올렸어. 우종진 이사. 석 회장 배신했다가 제거된 역운회 간부. 석 회장이 역운회 통합을 진행하던 시절, 혼란을 틈타 쿠데타 작업을 했던 걸로 기억해. 내막은 잘 모르지만 결국 들통이 나 석 회장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무렵에 어머니 가게에 자주 왔던 사람이라 기억이 나.”
“그랬군요.”
우태원이 예사롭게 응수했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에서는 피로감까지 비쳤다. 차유신의 이야기에서 딱히 새로운 것을 찾지 못했다는 투였다.
“네가 어떻게 내 과거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하게 묻지 않을게. 이유는 아주 단순해. 나로서는 옛날 일을 들추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야. 언급 자체를 삼가고 싶어.”
차유신이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우태원은 잠자코 손을 늘어뜨렸다. 테이블 위에서 기다란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두드려지는 게 보였다. 단지 그뿐, 우태원은 그 이상의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차유신을 봤고, 그게 다였다.
“다만.”
어조에 힘이 실렸다. 우태원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한껏 정돈한 시선이 우태원에게 걸렸다. 경고에 가까운 언어가 흘러나왔다.
“내가 궁금한 건, 너 말고 이걸 또 아는 사람이 있냐는 거야.”
우태원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제법 큰 폭소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마음 놓고 구경할 정도로, 우태원은 아주 개운하게 웃었다. 차유신은 웃음기 없는 낯으로 그를 노려봤다.
“선배는 참 생각하는 게 귀여워요.”
우태원의 손이 다가왔다. 대뜸 가까워진 엄지손가락이 차유신의 입 안으로 쑥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이 눈을 부라렸다.
손가락은 헤엄치듯 움직였다. 점막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진 지문이 식도 입구에 다다랐다. 자리를 잡은 손가락이 희롱하듯 점막을 간질거렸다. 차유신의 턱이 경련했다. 목구멍 깊숙한 곳이 고통을 털어내려 발버둥 치는 것처럼 울렁였다.
“흐읍….”
“물어봐요. 내 손.”
우태원이 부드럽게 지시했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사납게 들렸다. 우태원이 재촉하는 턱짓을 했다.
“빨리. 응?”
차유신은 대답 대신 가쁜 호흡을 흘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속으로만 헐떡여가며 입 안의 혀를 내둘렀다. 우태원의 손가락을 단숨에 덮은 혀가 찰박이며 타액을 도포했다. 우태원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들었다.
“너 재미있게 해줄 생각 없어.”
다소 식어있는 우태원을 일별한 차유신이 고개를 뺐다. 춥,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차유신이 다시 팔짱을 꼈다. 하. 헛웃음을 터뜨린 우태원이 젖어있는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가볍게 혀로 쓸고는, 읊조렸다.
“안 놀아주니 서운하네요.”
“넌 세 살짜리가 아니야. 이 또라이 새끼야.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윽박지른 차유신이 눈으로 독촉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턱을 괸 우태원이 생각에 잠겼다. 야, 방금 봤어? 우태원에게 음료수를 얻어먹은 여기자들이 저편에서 호들갑을 떠는 게 보였다. 꽤나 뜸을 들인 우태원이 입을 뗐다.
“아는 사람 없어요. 나 말고는.”
“장담할 수 있어?”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데요. 애초에 선배는 왜 그런 걸 신경 쓰죠?”
정말로 궁금하다는 투였다.
“여의도 귀공자 타이틀에 금이 갈까 봐? 그게 걱정인가….”
나직한 혼잣말이 따라붙었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짓 씹혔다. 간신히 가라앉힌 대꾸가 샜다.
“그건 네가 알 것 없어.”
“국민들 사이에서 선배 이미지가 그런 쪽이라는 건 알아요. 이전에도, 지금도. 아주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인 이미지. 뭐 일단 생긴 것부터가 그렇고, 유명 자선 기업 설립자의 외동아들이라는 출생기록이 큰 역할을 했죠. 덕분에 역현구을 지역민 사이에서는 황제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고. 실제로 T시티는 선배가 세웠으니, 그 취급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죠.”
우태원이 등을 젖혔다. 더 없이 나른하고, 그에 비례해 묵직해진 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선배의 다른 얼굴인데… 귀공자 차유신은 재미가 없어요. 전 좀 더 선배가 선배답게 보이길 원해요.”
자못 깔아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예컨대 내 좆 빨면서 눈 풀렸던 그때처럼요.”
“우태원!”
버럭 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목구멍이 터질 듯 박동했다. 쿨럭. 커다랗게 기침한 차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마실 수 있는 건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뿐이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컵을 잡아 드는 차유신을 굵은 팔뚝이 저지했다. 몸을 일으킨 우태원이 지나가던 남자를 불렀다.
“박보.”
“네, 의원님.”
바로 멈춰선 남자가 다가왔다. 우태원이 남자가 들고 있는 테이크아웃 잔을 가리켰다.
“새거야?”
“네.”
“티?”
“네. 얼그레이. 드려요?”
남자가 흔쾌히 잔을 내밀었다. 받아든 우태원이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등을 보였다. 이내 차유신에게 다가와 입가에 컵을 가져갔다.
“벌려요. 입.”
움찔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우태원은 심상하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대로 잔을 낚아채 스스로 마실까 하다가, 그만뒀다. 쿨렁이는 식도에 진이 빠져 그런 것에까지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풀 향을 머금은 온수가 흘러들었다. 꿀꺽거리며 삼키는 차유신을 감상하며 우태원이 긴 숨을 내뱉었다. 입 안을 채운 액체보다도 짙은 우태원의 내음이 차유신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실컷.”
꿀꺽. 커다랗게 뭉친 온수가 식도를 꿰뚫었다. 차유신의 동공이 흠칫했다. 우태원이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단, 내 눈에 보이는 데서 해줘요.”
꿀꺽. 어느덧 삼 분의 일 가량 비워진 잔 안에서 불투명한 물이 찰랑였다. 우태원의 목소리를 깔았다.
“따지고 보면 선배하고 나는 형제까지 될 뻔한 사이잖아. 그 정도는 해줘야지.”
꿀꺽. 한 모금 더 삼킨 차유신이 얼굴을 돌렸다. 거부 의사를 읽은 우태원이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탁. 잔 내려앉는 소리가 두 사람의 틈을 가로질렀다.
“안 그래요. 형?”
차유신의 눈매가 언짢게 비틀렸다. 동시에 지잉, 소리를 내며 주머니가 진동했다. 안에다 손을 넣은 차유신이 액정을 확인했다.
[한수현 비서관] 을지로 라칸티네라. 11시. 3명. 예약 완료.
“참고로 허대윤 경찰청장은 요즘 양식 잘 안 먹어요. 최근에 위궤양 수술받은 뒤로, 한식이나 일식만 합니다.”
우태원이 허리를 짚었다. 막 고개를 든 차유신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까칠한 시선이 우태원을 쏘아댔다.
“너 아직도 우리 의원실에 프락치 두고 다녀?”
“선배도 아직 우리 의원실에 두고 있잖아요. 피차 마찬가지죠.”
우태원이 나긋나긋 비꼬았다. 곧 몸을 돌려 다리를 뻗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의 여운이 제법 길었다. 숨을 몰아쉰 차유신이 고개를 젖혔다. 새하얀 형광등 빛에 망막이 아렸다. 눈을 한번 깜박이고 난 차유신의 입 안에서 텁텁한 혼잣말이 굴러갔다.
작전 변경이다. 씨발.
*
똑딱거리며 시계 침 움직이는 소리가 맴을 돌았다. 긴 연기를 내뿜은 차유신이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흘러간 눈길이 벽에 붙은 종이에 걸렸다.
차유신 의원실 조직도. 수석보좌관 진무원, 정무보좌관 주일혁, 정책비서관 한수현, 지역비서관 박재관, 비서 윤재희, 김운열, 최진익, 권헌…. 인턴을 제외하고 총 8명. 이 중에 최소 한 명은 프락치다.
이름 하나하나를 눈으로 곱씹던 차유신의 속눈썹이 끝내 내려앉았다. 그만두자.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자칫하면 의원실의 신뢰가 무너진다. 우태원 역시 그 점을 노린 것일지도 몰랐다.
의원실에 속해있는 보좌진 대부분은 이전 임기 때 차유신과 함께 일했거나, 과거 차유신의 신임을 얻은 다른 의원실 출신이다. 하나 같이 차유신과 끈끈한 연대를 지니고 있다. 저 중 누구 하나가 배신을 했다 해도 차유신으로서는 큰 타격이다.
훅, 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몽롱해진 머리를 가누며 차유신은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까딱거렸다. 굳이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신의를 무너뜨릴 뿐이다. 게다가 차유신은 당분간 우태원 의원실에 꽂아둔 프락치를 뺄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우태원의 말대로 피차 마찬가지인 입장에서, 지금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다만 위기를 최소화할 수단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는 있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단축번호 하나를 눌렀다. 바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의원님.
“방으로 들어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재를 털었다. 유독 큰 재가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남자가 성큼 들어와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차유신은 재떨이에 수직으로 꽁초를 꽂았다. 이내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좀 더 앞으로 와봐.”
“네.”
절도 있게 다가온 남자가 데스크 앞에서 뒷짐을 졌다. 재떨이를 옆으로 밀고 난 차유신이 양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꼈다. 이어 남자의 면모를 낱낱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권헌. 28세. 서울대 경제학과 졸. 사회단체 경력 전무. 국회 경력 전무. 유일한 경력은 일주일 전, 차유신 의원실에 막내 비서로 입사한 것. 말 그대로 아주 깨끗한 여의도 이력의 소유자. 무엇보다, 내부에 프락치가 있다는 걸 인지한 후 보좌진이 된 유일한 인물.
그가 우태원의 프락치일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지난주에 면접 봤을 때.”
차유신이 운을 뗐다. 권헌은 뚫어져라 차유신을 봤다.
“왜 내 의원실에 지원했다고 했지?”
“의원님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걸 했나.”
“저는 역현T시티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지역 리모델링 우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아주 젊은 나이에 이룬 의원님을, 저는 당연하게도 존경합니다.”
“내가 의원실에서 뭘 시킬 줄 알고, 나 하나 보고 직장을 골라.”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권헌이 신속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원님께서 제게 뭘 시키셔도 제 존경심은 변치 않습니다.”
“핸드폰 줘봐.”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지체 없이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진 핸드폰이 위에 올라왔다. 받아든 차유신이 잠금 화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권헌을 보지도 않고 따지듯 물었다.
“비밀번호.”
“제 입사일입니다.”
차유신의 어깨가 움찔했다. 의원실에 들어온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까지 했나 싶었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속내였다.
일단 키패드를 눌러가며 권헌의 입사 날짜를 완성했다. 바로 화면이 활성화됐다. 메시지 앱으로 들어가 최근 주고받은 내역을 살폈다. 대체로 같은 의원실 보좌진이나 국회 사람들, 친구끼리 주고 받은 뻔하디 뻔한 것이었다. 다른 메시지 앱이나 메일함도 마찬가지. 특이사항은 없다. 예상했던 대로다.
“내가 갑자기 뒤져서 불만이야?”
화면을 끈 차유신이 물었다. 권헌이 또박또박 답했다.
“전혀요. 아닙니다.”
“이건 가져가고.”
권헌의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받아서 주머니에 넣은 권헌이 다시 손을 뒤로 했다. 그 사이 몸을 내린 차유신이 맨 밑 서랍을 열었다. 새 핸드폰이 든 박스가 나타났다. 꺼내서 데스크 위에 툭 올렸다. 담담한 명령이 나왔다.
“이것도 가져가.”
“이건 뭡니까.”
멋모르고 박스를 짚은 권헌이 머뭇거렸다. 차유신이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이건 이제부터 권 비서가 나하고 소통할 때만 쓰는 개인 핸드폰이야. 번호는 물론이고 그 존재조차 외부에 알리면 안 돼.”
“알겠습니다.”
권헌은 다짜고짜 수긍부터 했다. 차유신이 빈정거렸다.
“이유도 안 물어보고, 대답부터 하네.”
“이유는 저에게 중요치 않으니까요.”
지극히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차유신의 눈이 찡그려졌다. 숨을 고른 권헌이 또 말했다.
“의원님께서 그 어떤 이유를 대시든, 저에게 거부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흘륭하네. 국회에서 빨리 올라가고 싶은가 봐?”
차유신이 흡족히 미소 지었다. 권헌이 다급히 반박했다.
“그런 게 아니….”
“굳이 포장할 필요 없어. 권 비서도 여의도 밥 일주일 먹었으니 어디서든 한 번쯤 들어봤을 거야. 차유신이 본인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챙기는 영감이라는 거. 물론 사실이고. 심지어 그 대상이 일까지 잘한다면, 더욱 그렇겠지.”
제 할 말만 마친 차유신이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긴장한 권헌이 등을 곧추세웠다. 불을 붙인 차유신이 연기 섞인 한숨을 흘렸다. 날연한 손가락질이 건네졌다.
“이제부터 나는 권 비서에게 몇 가지 임무를 줄 거야. 임무와 관련한 모든 사항은 철저한 보안에 부치고. 이와 관련해 의구심을 품거나 이의를 제기하지도 마. 아주 생산적인 일이고, 부당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
“당연히 그러리라 믿습니다.”
권헌이 열심히 끄덕였다. 두어 번 재를 떤 차유신이 시선을 비꼈다.
“이만 나가 봐. 자세한 사항은 내가 차후 메시지로 보낼 테니까, 이따가 확인하고.”
“네. 의원님.”
권헌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머무적거리던 그가 갑자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몸을 튼 그가 문을 향해 다가갔다. 어쩐지 만족감에 젖은 사내의 등을 보며, 차유신은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대체 뭐가 감사한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
오전 10시 55분에 맞춰 정동 돌담길에 있는 한정식 레스토랑 로비에 도착했다. 익숙한 듯 차유신을 안내하는 매니저를 따라 가장 안쪽 룸으로 갔다. 문이 열린 곳에는 문지찬과 경찰청장 허대윤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따로 뵙는 건 처음이네.”
몸을 일으킨 허대윤이 악수를 청했다. 건성으로 손을 맞잡고 난 차유신이 맞은편에 앉았다. 허대윤이 메뉴 책자를 펼치며 갸웃거렸다.
“여기 오랜만에 오는 거라 나도 뭐가 좋은지 헷갈리는데, 일단 런치 코스 중에….”
“시간 없으니 본론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차유신이 갖고 온 서류 봉투를 툭 테이블에 올렸다. 문지찬이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고자세냐는 투였다. 마른 침을 삼킨 허대윤이 책자를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그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성격 급하시네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
“젊어서 그런가? 좋지 않은 습관인데. 지나치게 서두르면 빨리 가는 법이거든.”
“그래서 한번 빨리 갔다 왔지 않습니까.”
차유신이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헛헛하게 웃은 허대윤이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에 놓인 갈색 봉투를 어루만지고는, 넌지시 질문했다.
“선물입니까.”
“네. 열어보십시오.”
차유신이 권하는 손짓을 했다. 허대윤의 손가락이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며 새하얀 종이 몇 장이 나왔다. 자세히 보려는 듯 얼굴 가까이 가져간 허대윤이 일순간 멈칫했다. 황급히 미끄러진 눈동자가 차유신을 담았다. 차유신은 못 본 척 물컵을 들었다.
종이들이 팔락거리며 넘어갔다. 남은 종이가 한 장, 한 장 줄어들 때마다 허대윤의 낯에서 수심이 깊어졌다. 차유신은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곁눈질로 관찰했다. 문지찬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느라 바빴다.
“원하는 게 뭡니까.”
전부 넘어가고 난 종이 뭉치가 테이블에 내려왔다. 차유신은 팔을 뻗어 서류를 회수했다.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가장 앞장에 적힌 타이틀을 꾹 눌렀다.
허대윤 전 경찰청 경비국장 및 외사국장의 납품비리 지시 정황과 관련한 건
“서울에 아파트 두어 채는 족히 사신 걸로 압니다. 경비국장 시절 경찰장비 납품업체들로부터 뒷돈 받은 걸로요. 이전 정권 말기에 살짝 말이 나올 뻔했는데, 바로 정권이 교체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죠. 청장님께서 워낙 또 대국민당 몇몇 의원과 돈독한 고향 선후배 관계지 않습니까.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요. 이후 외사국장으로 옮긴 뒤, 같은 방식으로 뒷돈을 받아 이번에는 일부를 고향 선배들에게 나눠줬죠. 청장님을 커버 쳐준 그 대국민당 의원들 말입니다. 덕분에 관련 게이트 판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청장님뿐 아니라, 대국민당 의원 다섯 명이 줄줄이 연루된 상황입니다.”
차유신이 종이를 스르륵 넘겼다. 일으켜진 미풍에 허대윤의 머리카락이 떨렸다.
“이거 공론화하면 꽤 파급력이 클 겁니다. 청장님 하나 덕분에 여의도가 제대로 뒤집히는 거죠. 여당에서 청장님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하고요. 임기 마친 뒤 고향에서 공천받는 건 물론이고, 지금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해질 겁니다.”
“차유신 의원! 본론만 얘기해.”
허대윤이 탕, 소리 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차유신이 가지런히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견고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제 요청은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저 청장님께서 제 사람이 돼주셨으면 합니다.”
허대윤의 낯이 굳었다. 문지찬이 주춤거리며 눈을 키웠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민 차유신이 문제의 서류 귀퉁이를 쥐었다.
“이 시간부로 이 문건은 없는 겁니다.”
다른 손이 서류 반대편을 잡아당겼다. 찌익, 소리를 내며 종이가 길게 갈라졌다. 찢긴 종이를 커다랗게 뭉쳐 구석에 던져둔 차유신이 다시 허대윤을 봤다. 조금씩 질려가는 허대윤이 얼굴이 보였다.
“청장님께서 알고 지내시던 대국민당 의원들로부터 등 돌리라는 얘기 아닙니다. 관계는 계속 유지하십시오. 다만, 저와 손을 잡고 몇 가지 일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나아가 청장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는 일들입니다.”
허대윤이 제 머리를 쥐어짜며 탄식했다. 반쯤 체념한 대답이 찾아들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차 의원.”
차유신이 빠릿빠릿하게 응수했다.
“우선 첫 번째. 부산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매천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경남 지역에서는 역운회 수준으로 규모가 큰 조직입니다. 삼 년 전 서울에 진출하기 위해 역현구 운도동에 사무소를 차렸는데, 역운회에 세가 눌려 사업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운회가 역현구 일대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건, 오래 전부터 그쪽 경찰들과 암암리에 결탁해 온 커넥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왕 열린 경찰의 문, 매천회에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청장님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한 일입니다. 역현경찰서장에게 말이죠.”
“지금 나한테 깡패와 손을 잡으라고…!”
“원치 않으면 여기서 나가셔도 됩니다.”
차유신이 안내하듯 문을 가리켰다. 허대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허대윤을 보던 차유신이 갸우뚱했다.
“왜 안 나가십니까.”
허대윤의 낯이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살짝 열린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모양만으로 알아챈 차유신은 그만 속으로 웃어버렸다.
별 개새끼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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