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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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5월.]

「SDB그룹, ‘서울의 실리콘밸리’ 역현T시티 주인 된다

240여 개 스타트업이 밀집된 대규모 벤처 단지 ‘역현T시티’의 사업자가 1년 만에 바뀐다.

SDB그룹은 태류건설로부터 역현T시티 운영권을 인수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인수건과 관련한 정확한 거래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역현T시티는 핀테크, O2O, 모빌리티, 블록체인 등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이 대거 입주한 전문 단지다. 일명 ‘서울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차유신 신진화당(당시 대국민당) 의원의 기획 아래 서울시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동 조성했다. 초기 운영권은 서울시가 갖고 있었으나 지난해 5월 태류건설이 이를 인수하며 민영화가 이뤄졌다.

조신희 태류건설 회장은 사비로 T시티 전용 펀드를 조성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보다 혁신적인 생태계 조성을 위해 SDB그룹에 매각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T시티 운영을 하며 국내 4차 산업혁명의 밝은 미래를 봤다”며 “SDB그룹은 이 미래를 책임질 선도적인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석일태 SDB그룹 회장은 “단지에 입주한 240개 스타트업 하나하나가 모두 만족할 만한 지원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SDB그룹은 생활가전 렌털기업 SDB오션을 비롯해 저축은행·캐피털사를 운영하는 SDB금융, 화장품기업 SDB케어, 골프장·리조트기업 SDB리조트 등을 보유한 유가증권 상장사다. 시가총액은 9조 8000억 원이다.」

*

“혼자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를 멈춘 윤재희가 물었다. 차유신은 대답 대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 안에 있던 진무원과 한수현, 윤재희가 일제히 눈길을 건넸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서려던 차유신이 마지못해 말했다.

“이런저런 사람들 달고 가면 진솔한 얘기가 안 나와. 30분 안에 끝내고 올 테니 대기하고 있어.”

물론 절반은 거짓말이다.

문이 닫혔다. 차창 너머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보좌진들이 보였다. 차유신은 괜히 혀를 찼다. 아직도 자신이 20대 차유신인 줄 아는 모양이다. 보좌진과의 인연이 길어지면 이게 문제였다.

당선이 확정된 후 차유신은 의원실 보좌진 대부분을 과거의 멤버들로 세팅했다. 수석보좌관에 진무원을 앉힌 것을 시작으로 한수현, 김운열, 윤재희 등을 모두 끌어들였다. 신인대 의원실에 있던 김운열은 기꺼이 차유신 의원실로 옮겼고, 윤재희도 막 1년을 다니고 난 행정대학원을 휴학한 후 합류했다. 국회에서 더 일해보고, 이쪽이 맞는 것 같으면 대학원은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식으로 의원실을 다 꾸리고 나니 차유신은 도통 자신이 두 번째 역현구을 의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기존과 너무도 동일했다.

물론 달라진 것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의원실에 우태원과 유해겸이 없다. 그리고 역현T시티를 운영하는 주체가 서울시에서 SDB그룹으로 바뀌었다.

새까만 통유리 창에 휩싸인 나선 모양의 고층 건물을 올려다봤다. SDB빌딩. 45층이나 되는 특이한 형상의 빌딩은 역현구의 대표적인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 정도 높이를 지닌 것은 물론이고 눈에 띄기까지 하는 건물은 역현구에 유일했다.

“어머나, 의원님. 오셨어요?”

로비에 들어선 차유신을 반긴 건 한 젊은 여성이었다. 만면에 인위적인 미소가 그득했다. 차유신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 여자, 연예인 아닌가. 아주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CF 등에서 종종 본 기억이 있다.

“의원님 TV 안 보시는구나? 저 전혀 못 알아보시네. 일단 저쪽으로 모실게요.”

생긋거린 여자가 손짓을 했다.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비를 가로지르는 여자를 따라가자, 대기하고 있던 모델 같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바로 문이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차유신과 여성, 남성이 차례로 탑승했다. 곧 문이 닫히고, 깔끔한 인테리어를 지닌 승강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근무하세요?”

넥타이를 다듬던 차유신이 물었다. 여성이 까르르 웃었다.

“굳이 따지면 프리랜서 정도? 가끔 VIP 오시면 제가 전담해 안내하거든요.”

“석일태 회장하고 친하신가 봐요.”

“당연히 친하죠. 제가 SDB그룹 전속 모델인데.”

“그래도 연예인이 면이라는 게 있지, 이런 것까지 합니까.”

차유신이 고저 없이 말했다. 여성의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부쩍 건조한 한 마디가 다가왔다.

“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차유신이 다시 여성을 봤다. 여성은 그새 웃음을 띤 채 눈을 맞춰오고 있었다. 곤로하게 고개를 가눈 차유신이 중얼거렸다.

“현명하시네.”

엘리베이터가 45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여성과 남성이 먼저 나선 뒤 양옆에서 차유신을 맞이했다. 이내 앞서 걸으며 안내를 시작했다. 저 앞에서 프론트 직원들이 기계적으로 일어나 조아리는 게 보였다. 여성 두 명에 남성 한 명이었는데, 역시나 연예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대단하네.”

차유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석일태 회장이 화려한 걸 좋아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막상 접하니 상상 이상으로 과한 수준이다. 소용돌이 모양의 빌딩도 그렇고, 안을 채운 직원들마저 하나 같이 TV에서나 볼 법한 미남 미녀다. 이렇게까지 보여주는 기에 집착하는 CEO의 특성을 차유신은 그간의 학습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기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물이다. 기업이 곧 자신이기에, 이 공간을 채운 모든 것이 자신의 색깔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것만 둬야 성에 찬다.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최악의 CEO였다.

“차유신 의원님 오셨습니다.”

회장실 앞에 다다른 여성이 노크를 했다. 바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난 여성이 차유신을 향해 슬쩍 눈웃음을 쳤다. 의미를 알아들은 차유신이 성큼 발을 들였다. 그대로 고개를 들자마자 발꿈치가 멈칫했다.

널찍한 사무실 중앙에 고급스럽게 마감된 석재 테이블이 있다. 안쪽 소파에는 석일태 회장이 앉아있고, 그 맞은편에 우태원이 있었다.

“들어와요. 차 의원님.”

석일태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내를 마친 남녀가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내 문을 닫고 사라졌다. 호젓한 공간 안에서 침묵이 맴을 돌았다. 석일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직전에 잡은 우 의원 미팅이 아직 안 끝나서…. 뭐, 둘이 친한 사이라며? 양해 좀 구할게요. 이쪽에 앉아요.”

석일태가 우태원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숨을 들이켠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저벅저벅 소파 쪽으로 다가가, 몸을 앉혔다. 옆에서 페이퍼를 넘기는 우태원이 보였다. 다소 미간을 구긴 그가 테이블 위에 툭 서류를 던졌다. 이내 석일태를 주시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보완한 것 보긴 했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석일태가 실소했다.

“뭘 모르겠다는 거야.”

“역현구갑 내 제조기업들 대상으로 펀드를 조성하겠다는 거, 제가 봤을 때는 별 의미 없습니다. 이쪽 제조기업 대부분이 SDB그룹의 벤더일뿐더러 규모가 크지도 않습니다. 펀드라는 게 수익이 나야하는데, 여기 기업들은 루틴한 사업만 하고 있다 보니 회장님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아웃풋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그걸 원치 않습니다. 투자가 필요 없는 곳들이 태반인데 억지로 돈을 붓는다 하면, 기업 입장에선 부담만 가중됩니다. 대중들 보기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요약하면 SDB그룹이 자기네 벤더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 아닙니까. 대중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게 보여주기라는 걸 누구나 압니다. 잠깐 이목 끌기엔 좋을지 몰라도, 이거 얼마 못 갑니다.”

“허 참, 태원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이걸 얘기가 좀 되게….”

“제가 필요에 따라 소설을 써드릴 수는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소재를 가지고 억지로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누차 말씀드렸듯 저는 이 계획에 부정적입니다.”

우태원의 어조가 엄해졌다.

“게다가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역현구갑에 있는 모든 것들은 현상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자고. 굳이 손대지 않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석일태의 울대뼈가 꿀렁였다. 일순간 굳었던 그의 입에서 곧 헛헛한 웃음이 터졌다. 그만두자는 투로 손을 내젓고는, 텁지근하게 뇌까렸다.

“하여간, 새끼… 고집은.”

돌아간 얼굴이 차유신을 향했다. 무표정으로 듣고만 있는 차유신을 보며 과장되게 손사래를 친 그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놈이 좀 그래요. 나하고 워낙 막역한 사이이다 보니 서로 할 말, 안 할 말 다 합니다. 태생이 엘리트인 차 의원 보기에는 좀 그럴 수도 있겠네. 불편해도 이해해요. 역현구 방식이라 생각하고.”

“아닙니다.”

차유신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를 바로 한 석일태가 손가락 깍지를 꼈다. 이내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먼저 찾아와줘서 고맙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데, 나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 중요한 T시티 운영권을 따내고도 말이야.”

“괜찮습니다. 어차피 얼마 못 갈 테니까요.”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석일태의 눈썹이 비틀렸다. 우태원의 곁눈질이 느껴졌다. 차유신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 명의로 공론화할 겁니다. SDB그룹이 역운회와 결탁해 T시티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몇 달 전부터 우태원 의원실 주도로 단지 내 기술기업을 퇴출시키고, 일반 제조 기업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T시티 설립 취지를 저해해오지 않았습니까. 운영권을 돈으로 매수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T시티는 본래 정부에서 만든 단지입니다. 정부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면, 당연히 그쪽에서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내년이 대선입니다. 한창 표심에 민감할 시기죠. 입주기업들과 언론, 시민단체를 모조리 끌어들여 공론화하면 정부에선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무능한 서울시, 무능한 정부로 낙인이 찍히면 대선 때 큰 마이너스니까요.”

“차 의원.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석일태가 탄식했다. 표정은 여전히 인자했지만, 그 와중에 미묘하게 식은 눈빛이 두드러졌다. 차유신은 무시한 채 제 할 말만 했다.

“T시티를 관리하는 용역업체도 최근 바뀌었더라고요. 역운회 산하 조직으로 말이죠. 관리업체라는 게 본래 이권싸움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보니, 역운회 같은 깡패조직에서 힘으로 밀어붙이면 일반 업체야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 역시 제가 공론화할 내용입니다. SDB그룹의 주먹구구식 T시티 운영에 역운회가 개입돼있다는 걸 방증하는 핵심 증거가 되겠죠.”

말을 마친 차유신이 숨을 몰아쉬었다. 확연하게 낯이 굳은 석일태는 보일 듯 말 듯 이를 갈고 있었다. 매서워진 그의 눈시울 안에서 새까만 동공이 검은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차유신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 이래야 석일태지.

“석 회장님과 긴말 섞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깡패들과 애초에 연을 맺지 말자는 주의라서요. 실수로 한번 엮인 일이 있는데, 아주 안 좋게 끝났습니다.”

차유신의 시선이 옆으로 흘렀다. 무덤덤한 가운데 미세하게 웃고 있는 우태원이 보였다. 도로 석일태를 응시한 차유신이 목소리를 깔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평생의 신분이 결정됩니다. 역현구에서 태어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역현구 옷을 입는 겁니다. 그 옷이 좋다, 나쁘다를 굳이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차유신이 고개를 젖혔다. 부들거리는 석일태를 보며, 쐐기를 박았다.

“이미 회장님 얼굴에 답이 나와 있으니까요.”

입을 다문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입구를 향하는 머리통 너머에서 버럭 호통 치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차유신!”

외면한 채 문손잡이를 잡았다. 휙 돌려 젖히고 난 차유신의 어깨가 움칠했다. 문 앞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에 심상치 않은 인상을 지닌 이들이었다. 찡그린 차유신의 눈길이 돌아갔다. 팔짱을 낀 석일태가 대놓고 조롱했다.

“뭘 놀라. 나 도발하고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석 회장님. 지금 실수하시는 겁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냉해졌다. 석일태가 비아냥거렸다.

“나 평생 실수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야. 역현구 출신들이 다 그렇지, 뭐. 안 그래?”

그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권태로운 턱짓이 이어졌다.

“장님을 만들든, 벙어리를 만들든 적당히 병신 만들어서 내보내. 당연한 얘기지만 증거물 될 만한 건 일체 남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남자들이 일제히 몸을 굽었다. 곧 허리를 세운 한 남자가 차유신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럽게 당겨오는 힘에 절로 몸이 이끌려갔다. 막 한 걸음 딛고 난 차유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개새끼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 혹시나 해 챙겨온 잭나이프가 있었다. 신속하게 날을 세우고, 바로 빼 남자를 향해 내리질렀다. 사납게 허공을 가른 칼날이 남자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억, 소리를 낸 남자가 뒷걸음질을 쳤다.

부리나케 날을 뺀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모두가 주춤거리는 가운데 또 다른 남자가 차유신에게 달려들었다. 그에게도 똑같이 칼을 휘두르려 할 즈음, 뒤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흠칫한 차유신의 머리가 돌아갔다. 차유신을 향해 막 몽둥이를 쳐올렸던 남자가 복부를 감싼 채 무너지고 있었다.

불쑥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손목을 챘다. 이어 잭나이프 쥔 손아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단숨에 흉기를 빼낸 우태원이 차곡차곡 날을 접어 제 주머니에 넣었다. 차유신과 눈을 맞춘 그가 타이르듯 말했다.

“확실하게 말할게요. 찌르려면 목이나 가슴을 겨눠요. 주저하면 선배만 손해야.”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연하게 시선을 비낀 우태원이 회장실 안쪽을 봤다. 담담한 한 마디가 사위를 울렸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차 의원은 이쯤해서 보내는 걸로 하시죠.”

우태원을 노려본 석일태가 언짢게 답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아니요. 제가 결정할 사안입니다.”

우태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석일태가 꿀꺽 침을 삼켰다. 우태원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접혔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버지. 차유신 의원은 제 거라고.”

*

실내는 세련된 콘셉트의 호텔 스위트룸을 연상케 했다. 같은 층인데도 석일태 회장실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새까만 대리석 바닥과 안정적인 톤의 회색 벽이 고급스럽지만 차가운 인상을 줬다. 널따란 거실에는 무채색 응접실이 갖춰져 있었고 안쪽 룸은 침실로 쓰는 듯, 열린 문틈으로 하얀 침대 시트가 비쳤다. 바깥쪽 통유리창 너머에는 심플한 야외 테라스가 있었다.

소파에 앉은 차유신이 이마를 짚었다. 느릿하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거실을 보다 면밀하게 살폈다. 벽에 설치된 대형 TV 옆으로 중간 사이즈 액자가 눈에 띈다. 안에 담긴 건 한 중년 남자와 갓 대학생이 된 듯한 남자,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얼핏 보면 평범한 가족사진이다. 어머니가 빠진, 불완전한 형태이긴 하지만.

“왜 석 회장과 성이 다르지?”

액자를 보던 차유신이 물었다.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간 탓에 사진 속 세 명의 남자가 균열하며 일그러졌다. 그 와중에 그들의 정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고하다. SDB그룹 석일태 회장, 역운회 석재경 사장, 그리고 우태원.

“친아들이 아니니까요.”

등을 보인 채 재킷을 벗던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차유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딱 봐도 알아.”

“저는 정식으로 석일태 회장에 입양된 게 아니에요.”

한손에 쥔 재킷을 툭 소파에 던진 우태원이 차유신의 옆에 몸을 앉혔다. 다가온 손이 차유신의 재킷 자락을 거머쥐었다. 고개를 기운 우태원이 물었다.

“재킷 안 벗을 거예요?”

“둬.”

“여긴 고층이라 산소가 부족해서 답답할 텐데.”

“두라고 했지.”

차유신이 신경질적으로 우태원의 손을 쳤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우태원이 턱을 괴었다. 혼연하게 이동한 눈길이 저편의 액자에 꽂혔다. 차유신이 보던 그것이었다.

“역현구에서 태어난 어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채 무명으로 삽니다. 그런 게 딱히 이상하지 않은 동네죠. 역현구 동사무소 공무원 사이에서도 여섯 살, 일곱 살짜리 아이가 뒤늦게 출생신고를 하러 온 걸 조용히 처리하는 게 일과일 정도니까요.”

차유신의 속눈썹이 덜컥거렸다. 갑자기 우태원이 저 얘기를 해오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순간 먹먹해진 뇌리에서 희미한 지진이 일었다. 차유신의 시선이 새까만 바닥에 떨어졌다.

신경 쓰지 말자. 그냥 한 말일 거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전 운이 좋았죠. 일단 이름은 갖고 태어났으니까.”

우태원이 피식거렸다. 여전히 의중을 알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차유신의 눈매가 조금조금 찡그려졌다.

“아버지는 석일태 회장의 바로 밑에서 일하던 역운회 중간 간부였습니다. 역운회가 한창 내분에 시달리던 시절 몸싸움을 벌이다 칼에 찔려 사망했죠. 석 회장은 아끼던 아버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저를 양자를 들이기로 했는데, 아예 호적에 올리겠다는 걸 제가 거부했습니다. 그때 전 세 살이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가 준 성과 이름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석 회장은 받아들였고, 그렇게 저는 석 회장의 양자 아닌 양자로 이십 년 넘게 산 겁니다.”

입을 다문 우태원이 턱을 덮은 손을 내렸다. 한껏 날연한 눈길이 넓은 공간을 빙 관조했다. 높낮이를 잃은 음성이 거실을 채웠다.

“전 역운회는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곳에 속해있었고, 그곳을 만든 사람의 손에서 길러졌지만 최소한 저 스스로 역운회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차기 역운회 구도를 두고 석 회장의 아들과 제가 대립한 적도 당연히 없고요. 덕분에 지금 역운회를 맡은, 저보다 여섯 살이 많은 재경이 형은 저와의 그 어떤 마찰도 없이 아주 순탄하게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제가 역운회에 욕심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전개죠.”

“그럼 네가 욕심 있는 건 뭐야.”

차유신이 냉랭하게 물었다. 우태원은 무표정으로 제 머리만 쓸었다. 산소가 부족한 고층 지대의 공기만큼이나 텁지근한 한 마디가 건네졌다.

“제 욕심은 그저 제가 태어난 곳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본연의 모습으로요.”

힐긋한 우태원이 말을 덧붙였다.

“선배처럼 억지로 뒤엎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네가 깡패 새끼라는 증거야.”

차유신이 메고 있던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다소 갑갑한 매듭을 풀고는, 대뜸 몰아붙였다.

“네가 역운회가 아니라고? 거기에 이름만 안 뒀을 뿐, 넌 누가 봐도 그 쓰레기들과 한 패거리야. 네가 역현구를 원래의 형태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건, 거기서 나고 자란 너에게 누구보다 만족하고 있다는 방증이고.”

묵묵하던 우태원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번졌다. 느른한 음성이 다가왔다.

“선배는 제가 깡패가 맞기를 원하시나 봐요.”

“원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디에 있어. 이건 그냥 팩트….”

“뭐, 어쩔 수 없네요. 이제부터는 선배 말처럼 살기 위해 노력해보죠.”

우태원의 기다란 눈이 휘었다. 그의 어조가 은은하게 녹았다.

“나에게는 선배가 정답이니까.”

막 매듭에서 떨어진 손이 멈칫했다. 눈앞의 우태원은 곤로하게 등을 젖히고 있었다. 새까만 소파 등받이가 그의 곧은 등줄기와 맞물리며 소리 없이 어그러졌다. 반쯤 눈을 깐 우태원이 혼잣말을 했다.

“생각 중이에요. 어떻게 하면 여지없는 깡패처럼 보일지…. 나는 선배를 만족시키고 싶거든요.”

지잉. 고요해진 두 사람의 틈을 핸드폰 진동하는 소리가 갈랐다. 멀거니 있던 차유신이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에서 파들거리는 핸드폰이 딸려 나왔다. 발신자는 비서 윤재희였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 차유신이 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 재희야.”

-형님.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윤재희가 덜컥 소리쳤다. 어물거린 차유신이 도리질을 쳤다.

“아니, 뭐… 왜?”

-저 사람들 뭔지 모르겠어요.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저 사람들이 누군데.”

-역운회 사람들 같은데… 우리 차 주변을 다 지들 차로 둘러싸놓고 다가와서 문 두드리고 난리에요. 열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아요. 저런 지 한 십 분 됐어요. 나가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데, 도무지 못 나가겠어요.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요.

“경찰 불렀어?”

-불렀는데 안 와요. 보통 신고하면 한 오 분 안에 오지 않아요? 왜 십분 째 소식이 없고….

속사포처럼 말을 터뜨리던 윤재희가 돌연 아, 소리를 냈다. 핸드폰 너머에서 쨍그랑,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야, 여기가 어디라고 창문을 깨! 한수현이 성난 외침을 터뜨렸다. 새끼들이, 안 떨어져? 항의하는 진무원의 욕설도 들렸다.

핸드폰을 쥔 차유신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초점 잃은 눈이 우태원 쪽으로 흘러갔다. 우태원은 등받이에 목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쉰 차유신이 가까스로 윤재희를 달랬다.

“곧 다시 전화할게. 그쪽에다 차유신하고 갈 데까지 가고 싶으면 좆대로 하라고 얘기해. 할 수 있는 최대한 내 이름 팔아.”

통화를 끊은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이내 성큼성큼 발을 뻗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막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차유신의 귓가에 우태원의 질문이 스쳤다.

“어디가요?”

차유신이 뒤를 힐금했다. 그새 눈을 뜬 우태원이 집요한 시선을 건네 오고 있었다. 잘근거리던 차유신의 입술이 떨어졌다.

“밑에서 벌어지는 상황, 너하고 관계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태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투였다. 허리를 짚은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밑에 있는 우리 보좌진들 둘러싸고 역운회 깡패 새끼들이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는데. 넌 전혀 모르는 일이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역운회와 관계없다고.”

픽, 웃은 우태원이 말을 이었다.

“관계가 있는 건 석일태 회장이겠죠.”

“석 회장은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차유신이 눈을 부릅떴다. 우태원이 심상하게 뇌까렸다.

“석 회장은 자존심이 아주 셉니다. 선배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요.”

“그게 뭐. 내가 그 새끼한테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틀린 말이든 맞는 말이든, 일단 석일태라고 하는 사람은 본인 심기를 조금만 거슬러도 충분한 도발로 받아들입니다. 선배도 아까 상황 보면서 대충 감은 잡았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우태원이 입꼬리를 틀었다. 차유신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고작 내 도발 하나 때문에 역운회 놈들을 십여 명이나 풀었다고? 내 보좌진들 협박하는 데 쓰려고?”

“협박만 하겠어요? 아까 선배에게 하려고 했던 것 생각해봐요. 그 정도로 안 끝날 겁니다.”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 둔 담뱃갑 안에서 한 대를 빼, 입에 물며 읊조렸다.

“열네 살 때부터 밥 먹듯이 피 보면서 산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사람 목숨 알기를 다니는 개미 한 마리 수준으로 취급해왔고요. 선배야 국회의원 타이틀을 지닌 입장이니 봐주기로 넘어갔다 쳐도, 선배 밑에 있는 조무래기들에게도 같을까요.”

“우태원.”

“경찰 불렀는데 안 왔겠죠. 당연한 겁니다. 역현구 관할 경찰들은 모두 역운회와 결탁해있습니다. 미리 그쪽에 출동 신고 묵살하게끔 얘기 나누고 시작한 겁니다. 경찰은 절대로 올 리 없고, 이제부터 역운회는 본인들 방식으로 선배 보좌진들을 처리할 겁니다.”

차유신의 목덜미가 서서히 얼어붙었다. 혈류가 막힌 것처럼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풀려가는 손에 간신히 힘을 줘가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돌려 당기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덜컥거린 차유신이 홱 몸을 틀었다. 분연한 으름장이 터졌다.

“이건 왜 잠겨 있어? 열어. 새끼야.”

“여긴 지문 인식이라서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등록한 사람만 출입됩니다.”

우태원이 태연히 물고 있던 담배를 꺼떡거렸다. 입술 틈으로 훅 흩뿌려지는 연기가 보였다. 예사로운 한 마디가 연무와 함께 내려앉았다.

“게다가 지금 나가면 선배까지 위험해질 텐데, 그냥 여기에 있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우태원. 지금 장난해?”

버럭 한 차유신이 득달같이 우태원을 향했다. 무시하듯 담배를 무는 그를 노려보다, 멱살을 움켜쥐었다. 양 교근이 절로 부들거렸다.

“안에 무원이 형하고 수현이, 재희 있어. 전부 너하고 같이 일했던 애들이야. 당장 역운회 쪽에 연락해서 멈추라고 해. 너라면 가능하잖아. 어?”

“제가 말하면 그만두기야 하겠지만.”

담배 끼운 손이 무심히 내려갔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다다른 끄트머리가 툭, 툭, 소리를 내며 재를 떨궜다.

“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선배 보좌진들이 눈알이 빠지든, 팔이 날아가든 제 입장에서는 상관도 관심도 없는 일이거든요.”

우태원의 입매에 기다란 호가 걸렸다.

“어때요. 꽤 깡패답지 않아요? 선배.”

우태원의 멱살을 쥔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버겁게 숨을 고른 차유신이 턱을 떨었다. 차유신이 드리운 그늘 안에서 점점 식어가는 우태원의 낯이 보였다. 사후경직에 접어든 사체처럼, 느릿느릿 빛을 잃고 있었다.

참으로 우태원다웠다.

“우태원.”

입술이 위아래로 짓이겨졌다. 자꾸만 숨이 가빠왔다. 온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선 나머지 무감각에 치닫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이는 호흡이 반복됐다. 석일태 회장이 마지막으로 비친 언짢은 표정이 부표처럼 머릿속에서 일렁였다. 다름 아닌 차유신의 작품이었다. 깨물리던 입술에서 툭, 핏물이 불거졌다.

설령 보좌진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차유신은 아까의 자신을 내내 책망할 수밖에 없다.

“불안해요? 선배.”

문득 다정한 질문이 다가왔다. 달싹이던 눈꺼풀이 더듬더듬 끌어올려졌다. 다시 제 입가에 담배를 가져가는 우태원이 망막에 걸렸다.

“선배 표정 보니까 마음이 또 약해지네.”

딱. 대리석 바닥에서 구둣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올라온 발이 예고 없이 차유신의 발등을 덮쳤다. 능숙하게 연골을 찾은 발꿈치가 으스러뜨릴 기세로 급소를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날카로운 통증이 무릎까지 솟구쳤다. 악, 소리를 낸 차유신이 무너졌다.

졸지에 무릎을 꿇은 차유신의 턱 밑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들어왔다. 반강제로 고개가 들렸다. 후들거리는 시야에 긴 연기를 내뿜는 우태원이 들어왔다. 느긋하게 입술 끄트머리를 꼰 그가 물었다.

“내가 선배 왜 좋아하는지 알아요?”

차유신은 가만히 눈 밑을 경련했다. 커져 가는 통증에 비례해 흡족함에 물드는 우태원의 표정이 두드러졌다.

“다른 사람은 뭘 하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데, 선배가 하는 건 일거수일투족이 감흥을 줘요. 때로는 선배가 숨만 쉬어도 세포가 꿈틀거리는 걸 느껴요.”

우태원의 입에서 연기가 끊겼다. 비스듬해진 얼굴이 차유신을 주시했다. 부유하는 기체 속에서 그의 낯이 혼탁하게 일그러졌다.

“예컨대 지금도 그래요.”

우태원이 담배 필터를 만지작거렸다. 타들어 간 끄트머리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었다.

“불안해하는 선배 표정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에요. 그게 얼마나 마음에 들었냐 하면.”

우태원의 맨손이 올라갔다. 앞섶 위 벨트에 다다른 손가락이 버클을 풀었다. 철컥, 잠금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솜털이 섰다.

“속옷 입은 게 불편할 정도로 발기했어요. 지금.”

차유신의 동공이 확 커졌다. 나른한 음성이 귀를 감아왔다.

“선배가 이거 입으로 어떻게 해줄래요? 그러면 생각해 볼게요.”

쿵. 심부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추락하는 걸 느꼈다. 전율하던 눈초리가 조금조금 매서워졌다. 치를 간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너 지금 그때 일 복수하는 거야?”

저소한 우태원이 고개를 저었다. 곧 은연히 대꾸했다.

“전 선배에게 복수 같은 것 안 해요. 그런 건 동등한 입장에서나 하는 건데, 나는 선배보다 밑에 있잖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우태원의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간당간당하던 담배 끝이 끝내 꺾였다. 차디찬 경고가 뇌리를 후렸다.

“그러니까 빨아요. 그만 닥치고. 응?”

낙하한 잔해가 말끔한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꽂힌 차유신의 손톱에 날이 섰다. 어금니가 무참하게 갈렸다.

씨발.

퉁. 뒤통수 너머에서 통유리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꽤 센 바람이 몰아쳤는지, 유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덩달아 차유신의 머리에서 지진이 일었다. 수십 개, 수백 개로 균탁하는 상념의 틈바구니에서 차유신은 필사적으로 한 가지를 찾았다.

원점.

끼익. 바람보다도 요란한 소음을 내며 차유신의 손톱이 경계를 그었다. 동시에 폭풍이 잦아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한 고요가 실내를 메웠다.

“우태원.”

딱딱한 부름이 나왔다. 우태원이 단조로이 답했다.

“네. 선배.”

“내가 너 경멸하는 꼴이 보고 싶어?”

우태원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치익, 하며 꽁초가 재떨이에 처박혔다. 남은 연기를 흘리고 난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죠.”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뻑적지근한 망막에 담긴 우태원은 부쩍 현실감이 없었다. 이성을 헤매듯 입 안의 혀를 굴렸다. 입술을 깨물었을 때 터진 핏물이 비릿하게 돌기를 스몄다. 혐오와 죄악을 닮은 맛이었다.

꿀꺽, 소리를 내며 핏물을 삼키고 난 차유신이 입을 뗐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명령이 샜다.

“고개 돌리고 있어.”

우태원의 고개가 고분고분 돌아갔다. 그의 옆얼굴을 노려보고 난 차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반쯤 지퍼가 내려간 앞섶 틈으로 불뚝 튀어나온 검은 속옷이 보였다. 가만히 그 새까만 능선을 노려보았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다. 어떻게 실행하는지의 문제다. 차유신은 속으로 몰아붙였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빨리 끝내. 사람 목숨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야.

게다가 자신은 차유신이다. 사내새끼 자지 좀 빤 것 정도에 훼손될 이름이 아니다.

훅 나아간 손가락이 속옷의 밴드 부분을 거머쥐었다. 지체없이 끌어내리려 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중간에서 걸린 듯 덜컥거렸다. 인상 쓴 차유신이 손목에 힘을 줬다. 비로소 당겨진 밴드가 사타구니까지 내려가고, 동시에 검붉은 살덩이가 퉁 튀어 올랐다. 속옷에 갇혀있는 내내 탈출을 갈구해온 듯 세찬 움직임이었다.

다 발기한 건 아닌 듯했지만, 사정 직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크고 굵직한 음경이었다. 신선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모양새를 보며 차유신은 저것이 자신과 같은 것인지를 잠시 의심했다. 눈살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보고서도 허망하다. 아까 전에 우태원이 발기했다는 소리를 했을 때는 그저 도발을 위한 조롱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은 알았다. 그것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우태원은 차유신에게 발정한다.

“조루 새끼도 아니고.”

얼굴을 들었다. 벌름거리는 놈의 귀두를 보다가, 못마땅하게 입술 틈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로 벌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군대에서건 화장실에서건 남자 성기라면 지겹도록 봤다. 다만 이런 크기는 처음이었다.

흉포하다. 그것 말고는 이 음경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무슨 발정을 시도 때도 없이 해. 동네 개새끼처럼.”

이를 가는 차유신의 머리맡에서 풉, 하며 웃는 소리가 났다. 의미심장하게 주억거린 우태원이 뇌까렸다.

“그러게요. 누구하고 있으면 가끔 이렇더라고요.”

차유신의 눈동자가 탐탁지 않게 굴러갔다. 외면한 채 턱을 괴고 있는 우태원이 비쳤다. 그 태연한 옆통수를 보며 새삼 비아냥거렸다.

“다행이네. 조루 새끼라 오래 빨지 않아도 돼서.”

말을 마치자마자 시뻘건 귀두부터 입에 물었다. 생각보다 만들어야 하는 틈이 넓었다. 반사적으로 턱을 늘어뜨리고 난 차유신이 힘껏 표피에 입 안의 점막을 감았다. 살과 살이 접착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물의 파동음처럼 번졌다.

집중하듯 고개를 숙였다. 남근을 제대로 담기 위해 최대한 입 구멍을 확장시켰다. 안의 점막에 비비적거리던 생식기가 주욱 미끄러졌다. 원활하게 들어오는가 싶더니, 돌연 덜컹거렸다. 고작 반 들어온 음경이 벌써부터 목구멍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바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성기를 감싼 입에서 힘을 뺐다. 숨 쉴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나름대로 입술 틈을 만들어봤지만, 좀처럼 새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보다 부풀어 오른 생식기가 입 안을 빈틈없이 채워오고 있었다. 갈수록 딱딱해지는 표피를 덮은 입술이 흐물거렸다. 비좁은 틈으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흡, 소리를 낸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씨발. 도무지 못 하겠다.

황급히 시트를 짚고는 고개를 쳐올렸다. 숨을 쉬기 위한 발버둥에 가까웠다. 딱 귀두만 남기고 물었던 성기를 뱉었을 때, 불현듯 뒤통수가 우악스레 사로잡혔다. 아읍. 차유신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강고한 손아귀가 가차 없이 차유신의 머리통을 내리꽂았다.

“하악!”

성난 귀두가 덜컥 목구멍에 꽂혔다. 호흡이 끊기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부르르 떨고 난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안여한 미소를 머금은 우태원의 낯이 보였다.

“금방 싸게 해줄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우태원의 손바닥이 차유신의 뒤통수를 넓게 덮었다. 진땀이 나는 두피를 지분거리다, 제 앞섶을 추어올렸다. 목구멍을 대번에 확장시켜가며 살 냄새 나는 덩어리가 쑥 들어왔다. 꽉 막혀버린 호흡 탓에 눈알까지 팽팽해졌다. 차유신이 버둥거렸다.

“아윽…!”

“남 빠는 거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래요? 잘 좀 하지.”

빈정거린 우태원이 허리를 추슬렀다. 차유신의 목구멍 안에서 귀두가 빙글 돌았다. 부풀어 오른 식도가 겁에 질려 소스라쳤다. 차유신의 손톱이 시트를 콱 내리찍었다.

“아흐윽…!”

“딱 좋네. 여기다 계속 박아도 돼요? 그럼 금방 쌀 것 같은데.”

“하아… 우태, 아…! 숨… 으읍….”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이성 잃은 손이 소파를 마구 긁어댔다. 우태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성의 있게 빨 거예요? 그럼 잠깐 풀어줄게요.”

“흐으… 읍.”

“말 듣겠다고 해야죠. 선배.”

새삼 부드러운 손길이 차유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차유신은 망연히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자신을 찍어 누르는 이 오만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괘씸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압박하는 손이며 좆, 우태원이라는 이름까지 전부 찢어발기고 싶었다.

조용한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또 한 번 웃었다. 짧았던 웃음이 그치고, 차유신의 뒤통수를 덮은 손아귀에 꽉 힘이 실렸다. 동시에 잠시 빠졌던 성기가 인정사정없이 목구멍에 처박혔다. 아예 식도를 헐어버릴 기세로 후벼온 귀두가 점막 곳곳을 마구잡이로 들쑤셨다. 두툼한 살덩이에 밀려난 울대뼈가 쿨렁거렸다. 차유신의 성대를 타고 구역질을 닮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후으읍…!”

죽을지도 모른다. 야트막한 빙판처럼 깨져가는 이성 속에서 생각했다. 목구멍을 채운 수컷의 살 내음에는 몇 번이고 맡아온 묘한 피비린내가 섞여 있다. 질식을 부르는 지독한 냄새였다. 헐떡이던 차유신의 팔이 나아갔다. 더듬거린 끝에 덥석 우태원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우태원이 심상하게 응했다.

“네. 선배.”

“놔… 아. 흐으.”

“숨 쉴래요?”

“빨리… 흡.”

“그럼 착하게 굴겠다 해봐요.”

우태원의 다른 손이 차유신의 턱을 쥐었다. 강아지라도 달래듯 살살 만져오며 우태원이 눈을 맞췄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진이 빠진 채 속눈썹만 달싹이던 차유신이 끝내 끄덕였다. 우태원이 나긋나긋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진짜?”

푹. 일순간 빠졌던 음경이 또 식도를 쑤셔왔다. 허억. 자지러지는 소리를 낸 차유신이 우태원의 팔에 손톱을 꽂았다. 단단한 가죽에는 핏물조차 맺히지 않았다. 우태원 역시 별 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한 듯, 낯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머리통을 고쳐 쥐었다. 이내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느긋하게 제 치골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차유신의 혀 위에서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덩이가 비벼졌다. 마지막 남은 이성 한 자락까지 우태원의 좆 냄새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허우적거린 차유신이 우태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니까… 좀. 우읍.”

“알았어요.”

우태원이 만족스럽게 차유신의 뒤통수를 젖혔다. 입에서 커다란 생식기가 쑥 빠져나왔다. 허억. 비음 섞인 탄성을 뱉은 차유신이 바닥을 짚었다. 입에서 비릿한 액체가 하염없이 떨어졌다. 절반은 차유신의 침이고, 절반은 우태원의 쿠퍼액이었다.

“십 초?”

우태원이 고저 없이 물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흠칫거렸다.

“뭐가.”

“십 초면 되냐고요.”

“그러니까, 뭐를.”

벽시계를 힐긋한 우태원이 다시 차유신에게 눈을 뒀다. 이죽거리는 음성이 차유신의 귀를 덮쳤다.

“선배 숨 쉬는 거.”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뒷덜미가 잡아채였다. 안 그대로 무기력한 머리통이 하릴없이 우태원의 앞섶으로 이끌려갔다. 적당히 고정시킨 우태원이 다른 손으로 제 성기의 밑동을 잡았다. 이내 다짜고짜 귀두부터 차유신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까의 살 내음이 시신경까지 자욱하게 덮었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파들거렸다.

“아…!”

“잘 빨아 봐요. 담배 피울 때처럼.”

우태원이 조소했다. 조금이나마 이성을 찾은 차유신이 우태원을 노려봤다. 우태원은 가만히 갸웃했다. 한껏 곤두섰던 차유신의 속눈썹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물고 있는 커다란 기둥 밑으로 새까맣고 거칠한 체모들이 보였다. 도무지 저기까지는 삼킬 자신이 없다.

다만 사정까지 치닫는 데 전부 다 넣는 행위는 필요치 않다. 귀두를 비롯한 일부 성감대를 얼마나 자극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러니 적당히 입으로 조여주면 끝까지 이르도록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해본 적은 없지만, 받아본 적이 있으니 아는 얘기다.

입 안으로 밭은 숨이 삼켜졌다. 다시 한번 우태원을 일별한 차유신의 목구멍을 타고 쓰라린 침이 넘어갔다.

시간이 없다. 빨리 끝내자.

고개를 기운 차유신이 귀두를 꽉 물었다. 이내 꿈틀거리는 표피를 따라 쭉 입을 끌어내렸다. 욱여넣어지는 생식기에서 두근거리는 맥박 소리가 전해졌다. 덩달아 입 안의 점막이 요동을 쳤다. 딱 목구멍 입구까지만 귀두를 넣고 난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더럽게 맛없었다.

춥, 소리를 내며 이번에는 입을 끌어올렸다. 척척하게 젖어든 음경이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귀두만 문 차유신이 표피를 잘근거린 끝에 재차 성기를 품기 시작했다. 단순한 행위인데 자꾸만 진땀이 났다. 자신이 지금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불편한 질문이 종종 내면을 건드렸다.

목구멍 입구로 귀두를 조여 대면서 우태원을 살폈다. 우태원은 눈을 감고 있었다. 흥분을 한 것인지, 하지 않은 것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입 안의 성기가 조금 더 팽창한 듯했으므로, 최소한 자신의 행위가 자극을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남근을 위쪽으로 핥아가며 눈을 굴렸다. 무심코 돌아간 시선이 소파 구석에 걸렸다. 하얗게 빛나는 잭나이프가 보였다. 분명히 차유신의 것인데, 아까 앉아있을 때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모양이다. 가만히 보던 차유신의 눈 밑이 움찔했다. 명확한 사실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아니. 애초에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다시 한번 우태원을 확인했다. 단잠에 빠진 듯 여전히 눈을 감은 채다. 힘 있게 입술을 모아가며 두드러진 핏줄들을 혀로 쓸었다. 역한 내음이 치고 올라왔지만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슬금슬금 나아간 손이 잭나이프를 챙겼다. 소리 나지 않게 날을 세우고, 우태원의 등 뒤로 숨겼다. 열심히 표피를 우물거리며 손을 끌어올렸다. 덩달아 칼날이 올라갔다.

살 내음과 함께 생각을 곱씹었다. 냉철하며 빠른 판단력이 필요한 때였다. 어디쯤이 좋을까. 가장 좋은 건 경동맥이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 잘못했다간 차유신 쪽이 살인자가 된다.

이동하던 눈동자에 쇄골과 쇄골 사이, 움푹 팬 부위가 들어왔다. 쭈웁, 성기를 빨아올린 차유신이 날을 옮겼다. 눈여겨본 지점에 끄트머리를 댄 뒤 눈을 깔았다.

쇄골절흔 정도면 딱 좋다.

“기껏 찾은 데가 거기예요?”

노곤한 질문이 찾아들었다. 막 힘을 실었던 손이 멈칫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확 들렸다. 우태원이 지루한 곁눈질로 차유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뭐….”

“또 망설이네.”

한숨 쉰 우태원이 거칠게 차유신의 손목을 챘다. 부러뜨릴 기세로 옭매고는, 가볍게 칼날에 입을 맞췄다. 차유신의 눈이 점점 커졌다. 우태원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얘기했잖아요. 주저하면 선배 손해라고.”

차유신의 손목이 밑을 향해 고꾸라졌다. 우태원의 허벅지를 스치며 내려간 칼날이 소파 시트에 푹 꽂혔다. 차유신의 입에서 아, 소리가 났다. 날에 스친 우태원의 정장 바지가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태원은 예사롭게 차유신의 뒷덜미만 다잡았다.

“선배는 마음이 너무 약해요.”

차가운 손가락이 차유신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잠자코 차유신을 주시하던 우태원이 제 하반신을 살짝 뺐다. 반쯤 빠졌던 생식기가 곧 사납게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식도를 틀어막은 귀두가 삽입하는 것처럼 안쪽 점막을 찔러댔다. 큽. 차유신이 목을 꺾었다.

“그래서 나 흥분시킬 수 있겠어요?”

어조가 더 없이 냉랭했다. 성기는 안을 헤집어가며 더 깊숙한 곳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번에 굵직해진 차유신의 목이 덜덜거렸다. 갑작스럽게 빼앗긴 호흡 때문에 머리가 어질했다. 초점을 잃어가는 차유신의 눈을 보며 우태원이 이기죽거렸다.

“그래, 차라리 이런 거라도 보여주던가.”

돌연 정신이 확 들었다. 차유신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숙였다. 지금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새삼 소름 끼쳤다.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숨지 마요. 벌 받아야지.”

우태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차유신의 뒤통수가 사정없이 당겨졌다. 고개가 확 넘어갔다. 똑바로 눈을 맞춘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차유신의 식도에서 귀두가 비죽 빠져나왔다. 우태원이 경고했다.

“삼 초.”

하아. 절박한 숨이 터뜨려졌다. 이번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 할딱이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우태원이 차유신의 뒤통수를 고쳐 잡았다. 이내 제법 풀려있는 목구멍에다 의무처럼 귀두를 처박았다. 피비린내와 살 비린내가 밀물처럼 식도를 덮쳐왔다. 질척해진 구멍이 마구 부풀어 올랐다. 차유신의 눈이 까뒤집혔다.

“하읍…!”

“잘 기억해요. 내가 오늘은 선배 봐줄 거야.”

마구 점막을 짓밟고 난 귀두가 빠졌다. 곧 숨 고를 겨를도 없이 다시 목구멍을 막아버렸다. 차유신의 목이 감전된 듯 넘어갔다. 남근을 에워싼 살들이 아우성을 치듯 울렁거렸다. 하얗게 질려가는 점막 하나하나를 생식기로 문질러가며, 우태원이 다정한 음성을 꺼냈다.

“다음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아으….”

“나 더 흥분시켜줘야 해.”

“우태… 흐읍…!”

“오늘 넘어가는 건, 그냥 선배 얼굴 때문이야.”

콱, 귀두가 목구멍 깊숙한 지점을 억눌렀다. 표피에 달라붙은 점막들이 꿈적거리며 전율했다. 거의 넋이 나간 차유신이 우태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심코 잡은 곳이 피에 젖어 축축했다. 아까 벤 허벅지를 감싼 부위였다. 그 아찔한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 식도가 돌연 홧홧해졌다. 점액을 닮은 뭔가가 주욱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에 또 구역질이 났다.

“이 얼굴을 보고 누가 안 싸겠어요. 응?”

우태원이 비소를 흘렸다. 식도에 박혀있던 성기가 훅 빠져나갔다. 쿨럭이는 차유신의 입을 커다란 손이 덮었다. 차유신을 바라본 그가 지시하는 고갯짓을 했다.

“삼켜요. 꿀꺽.”

크흡, 속기침을 한 차유신이 억지로 목울대에 힘을 줬다. 비린내 물씬 나는 정액이 내장에 쌓였다. 안이 빈 걸 확인한 우태원이 입에서 손을 거뒀다. 기진맥진한 차유신이 바닥에 엎어졌다. 몽롱해진 뇌리에 우태원의 통화 소리가 간간이 스쳤다.

“어, 어… 해산. 그냥 해산. 더 묻지 마. 내 지시가 곧 석 회장 지시야. 다 보내. 차유신 의원실 보좌진 전부. 차 의원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얘기하고.”

단출한 대화를 마친 우태원이 소파 위에다 핸드폰을 툭 던졌다. 먹먹해진 귓속을 핸드폰 구르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침투했다. 수그리고 있는 차유신을 향해 우태원이 다가왔다. 앞에서 몸을 굽히고는, 차유신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파들거리던 눈꺼풀이 올라갔다. 무표정한 우태원의 낯이 시야에 담겼다. 차유신은 반사적으로 치를 떨었다.

“우리 선배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요.”

우태원이 노곤하게 읊조렸다. 차유신이 냉하게 따졌다.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해?”

“조금은요.”

차유신은 그만 소리 내어 웃었다. 명백한 실소였다.

“진짜 너 지랄 잘한다.”

우태원은 웃지 않았다. 대신 검은 동공을 번뜩이며 목소리를 깔았다.

“해줄 수도 있잖아요. 우린 서로 닮은 게 많으니까.”

“내가 너 따위하고?”

“아니라고 하기 힘들 텐데요, 선배.”

우태원의 이마에 금이 갔다. 그를 에워싼 모든 여유와 웃음이 석양처럼 지고, 하염없는 밤만이 남아 차유신을 휘감아온다.

“선배도 역현구 출신이잖아. 나하고 같은.”

이번에는 차유신의 이마가 움찔거렸다. 텅 빈 동굴 같은 입 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혼잣말이 굴러갔다.

씨발, 그걸 저 새끼가 어떻게 아는 거야.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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