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1/48)

10.

새까만 우주를 가르며 찾아드는 빛처럼 과거는 늘 먼 곳에서 온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가, 서글픔이었고, 끝내는 망각에의 갈구였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게나 잊기를 욕망했으므로 그리도 먼 곳에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일한 욕망이 연이어 산화하는 소행성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긴 시간 누적돼온 갈망의 무게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꼬리였다. 차유신은 자주 그 꼬리의 연결고리에서 그들을 만났고,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발화했다. 이 과거에 침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그때의 자신을 태워야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의지만으로 기록을 지울 수 있다면, 사람들은 왜 궂은 밤마다 악몽을 꾸며 살고 있을까.

첫 번째로 올라간 막의 너머에선 땀 냄새가 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반쯤 흐트러진 교복을 입은 키 큰 남학생. 남학생은 학교 뒤편의 창고 바닥에서 두 다리를 뻗고 있다. 차유신은 맞은편에 앉아 우유를 마신다. 사실 차유신은 우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남학생은 차유신에게 항상 제 몫의 우유를 줬다. 우유를 안 좋아한다고 했다. 우유를 먹지 않아도 그는 키가 차유신보다 컸고, 취미로 유도를 하는 놈답게 다부진 몸을 지니고 있었다. 차유신은 그를 보면서 우유를 먹어야 키가 빨리 큰다는 얘기는 성인들의 사탕발림임을 통감했다.

“저번에 얘기한 것 생각해봤어?”

남학생이 물었다. 차유신은 잠자코 입 안의 우유를 굴린 끝에 삼켰다. 퉁명스러운 대꾸가 나왔다.

“뭐.”

“내가 너 왜 좋아하는 것 같냐는 얘기.”

차유신은 대답 대신 입가에 우유팩을 가져갔다. 남은 것을 전부 입 안에 머금고, 꿀꺽한 뒤 답했다.

“그야 내가 잘생겼고 공부도 잘하니까. 게다가 학생회장에 성격도 좋으니까.”

“지랄 마. 또라이 새끼야.”

남학생이 키득거렸다. 차유신은 다 비운 우유팩을 멀찍이 던졌다. 이내 남학생 몫의 새 우유팩을 따면서, 왜 우유라는 놈은 개봉하기 성가신 모양새를 갖고 있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먹고 싶어도 먹기 싫게. 심지어 생긴 것도 정액처럼 생겼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건, 그냥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얘기가 아니야.”

막 입가에 우유를 가져간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한숨 쉰 남학생이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너를 다른 의미로도 좋아해.”

차유신의 눈매가 보다 가늘어졌다. 다른 의미. 그것 말고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지. 물론 짐작 가는 것은 있지만, 차유신으로서는 딱히 와 닿지가 않는다.

정말 그 의미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물론 나는 네가 인간적으로도 좋지만.”

남학생이 숨을 골랐다. 꼿꼿하게 차유신과 눈을 맞춘 그가 서서히 입을 뗐다. 그 순간 치익, 하는 잡음이 뇌리를 갈랐다. 오래되어 늘어지고 찢어진 필름이 재생되는 것처럼, 눈앞의 장면과 음성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져간다.

너하고 나에게는… 아주 큰 공통점이 있어서….

그만.

재생되는 화면을 서둘러 멈춘다. 어느덧 우유도 뭐도 없이 텅 빈 손을 보다가, 몸을 반대로 튼다. 이번에 올라가는 막 너머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재생되고 있다. 쏟아지는 폭우에 파묻혀 식어가는 하얀 차. 안에서 새까맣게 타들어 간 두 개의 머리통이 보인다. 차유신은 마치 그들을 잘 아는 듯, 혹은 잘 모르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주시한다.

한 실루엣이 눈에 띈다. 저 멀리 존재하는 새까만 남자. 워낙 어두운 골목인데다가 비까지 내려 명확한 형상이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그가 차유신을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연히 인지할 수 있다.

남자는 고스란히 비를 맞아가며 자리에 머물러있다. 차유신 역시 우산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두 명의 우산 잃은 청년은 서로를 조롱하듯 꽤 긴 시간 마주보고만 있다.

쿠르릉. 커다란 굉음이 귓속을 가로지른다. 빗물에 젖은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선다. 뿌연 물안개 틈으로 남자의 모습이 조금 선명해진다. 지저분한 유리벽 너머의 그가 빙긋 웃는다. 그 미소를 보며, 홀린 것처럼 차유신도 웃는다.

나락의 미소였다.

*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9월.]

지이이잉. 집요한 진동음에 눈을 떴다. 충혈한 눈동자가 돌아갔다. 머리맡에서 절박하게 덜컥이는 핸드폰이 보였다. 황급히 챈 뒤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전 10시 10분. 차유신의 눈이 확 커졌다.

망할. 오전 토론회.

-너 무슨 일 있어? 전화를 스무 통 넘게 했어, 새끼야.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진무원이 버럭 소리 질렀다. 헐떡인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진정한다 했는데,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미안해, 형. 시간이 이렇게 된 걸….”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야?

부쩍 조심스러운 질문이 다가왔다. 차유신은 가만히 제 목울대를 짚었다. 퉁퉁 부은 살덩이가 잡혔다. 목을 덮은 가죽마저 통째로 홧홧했다. 이마를 짚은 차유신이 무기력하게 답했다.

“그런 것 같아.”

-야, 그러면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우리는 엄청 걱정했어. 너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태원이가 지금 네 집 앞에서 몇 시간째 대기하고 있는지 알아?

“우태원?”

차유신이 화들짝 놀랐다. 진무원이 탄식했다.

-그 새끼 새벽 6시부터 네 집 앞에서 대기 중이다. 벨도 여러 번 눌렀대. 그런데 네가 숨소리도 안 들려줬다며.

“우태원이 왜….”

비밀번호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일단 넌 쉬어라. 딱 봐도 상태 안 좋아 보인다.

“어. 미안. 일정 전부 취소해 줘. 위에다 얘기 잘해주고.”

-알았어. 몸조리 잘해라.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연락 늦어서 미안.”

-진짜 푹 쉬어. 어? 허튼짓하지 말고.

진무원이 아득바득 경고했다. 긴 숨을 내쉰 차유신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는, 비척거리며 침대를 나섰다. 이어 막 침실 문을 열자마자 어깨가 소스라쳤다. 기척도 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의원님.”

“하… 새끼야.”

욕설을 뇌까린 차유신이 얼굴을 감쌌다. 벌떡 몸을 일으킨 우태원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의원님.”

“씨발.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깨웠는데, 워낙 안 일어나셔서요.”

“그럼 무원이 형한테라도 얘기를 했어야 할 것 아니야. 그쪽은 여태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던데.”

“얘기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우태원이 입을 다셨다. 그의 어조가 진중해졌다.

“우리 방에서는 의원님 집 비밀번호 자체가 성역으로 취급받는데, 저 혼자 알고 있다고 하기가 뭐해서요.”

“무원이 형이나 다른 놈들이 질투라도 한다는 얘기야?”

“질투는 아니지만요.”

뜸을 들인 우태원이 곧 수긍했다.

“네. 사실은 그쪽에서 질투를 합니다.”

“아주 징그럽다. 사내새끼들이.”

혀를 내두른 차유신이 부엌 쪽으로 걸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탄산수를 찾았다. 남은 것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는 입에 가져갔다. 꿀꺽꿀꺽 삼키는 내내 우태원은 차유신을 관찰하고만 있었다.

“와서 나 이마 좀 봐줘.”

반쯤 비운 병을 내려놓은 차유신이 말했다. 바로 다가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가 이맛살이 미미하게 접혔다.

“심각한데요.”

“그렇게 열이 높아?”

“40도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환장하겠네.”

“여름철 감기는 꽤나 피곤합니다. 일단 침실로 가시죠.”

우태원이 반강제로 차유신의 어깨를 이끌었다. 거부할 이유도 기운도 없었으므로 도로 침실 안에 발을 들였다. 거의 안아서 차유신을 시트 위에 눕힌 우태원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눈으로 훑어왔다. 곧 차분한 언어를 건넸다.

“약국 가서 뭐라도 좀 사 오겠습니다.”

등을 보이는 우태원의 팔을 차유신이 잡아챘다. 의아한 표정의 우태원이 고개를 돌렸다. 차유신의 입술이 마구 더듬거렸다. 괜히 진땀이 났다. 스스로도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놓을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약 안 먹어도 돼. 하루면 나아.”

서슴거리며 손을 푼 차유신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곁눈질로 우태원을 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원래 매년 9월에 자주 이래.”

“꼭 9월입니까.”

“어.”

“이유가 있습니까.”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봐도 언짢아진 낯을 우태원은 무덤덤하게 보고만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제 앞 머리카락을 털고 난 차유신이 경고했다.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일단 너는 여기에 있어.”

말을 마친 차유신이 확 이불을 끌어 올렸다. 목 끝까지 덮고는 베개에 기댄 머리를 기울였다. 둥지에 싸인 듯 포근한 감각이 몸을 에워싸자 말짱하던 정신이 사뭇 농몽해졌다. 금방이라도 잠에 취할 듯 눈을 깜박이다가, 끝내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물에 떨어진 수채물감처럼 점점이 번져가는 피로감 속에서 머리맡의 기척을 느꼈다. 우태원이 곁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지금은 몰라도 잠시 후면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깊은 역사를 지닌 지병이 차유신을 차유신답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차유신 스스로가 택해 매해 감내하고 있는 업보였다.

“갔어?”

반쯤 수면에 잠긴 차유신이 물었다. 우태원은 바로 부정했다.

“아니요.”

잔잔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내일 아침까지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차유신의 머릿속에서 각양각색의 빗줄기가 쏟아졌다. 뇌리가 총천연색의 수채화로 물들어갔다. 황홀한 현기증이 전두엽을 자극했다. 비로소 깊은 잠이 찾아왔다.

완전한 수면에 빠지기 직전, 차유신의 손이 나아갔다. 시트에 올라와 있는 커다란 손을 덮었다. 붓으로 찍어 누르듯 꾹 손가락 자국을 내보았다. 질감이 묘연한 캔버스는 도망치지 않았다.

참으로 안심되는 꿈이었다.

*

다시 일어났을 때는 석양이 드리우는 오후였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차유신의 시선이 협탁 위에 닿았다. 단출한 메모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약은 드셔야 할 것 같아 잠시 약국 다녀옵니다. 식탁 위에 죽을 해뒀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깨셨다면 들고 계세요. 우태원.

“약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차유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웠다. 이마를 만져보니 아까에 비해 자못 가라앉은 열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내일 아침에 출근하는 데 크게 무리는 없어 보였다.

자리를 뜨려다 머리맡에 둔 자신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액정을 두드려보니 배터리가 다 닳았다는 아이콘만 떴다. 생각보다 빨리 닳네. 혼잣말을 한 뒤 발을 내디뎠다. 침실을 나서 부엌으로 갔다. 식탁 위에 접시를 덮어둔 그릇이 있었다.

그릇 앞에 앉은 뒤 식탁에 둔 충전기를 찾아 핸드폰과 연결했다. 이내 수저를 들고, 그릇 위의 접시를 거뒀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하얀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새하얀 죽이 나타났다.

“아기도 아니고, 누가 맨 죽을 먹어.”

괜히 혀를 차고는 숟가락을 그릇 중앙에 꽂았다. 한 스푼 떠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제대로 쑤어낸 음식물은 딱히 씹을 겨를도 없이 식도로 넘어갔다. 간은 과하지 않았고 삼삼한 맛이 있었다. 우태원이 요리 솜씨가 있는 편이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연거푸 죽을 떠 넣었다. 그릇이 바닥을 보일 정도로 숟가락을 움직이고 나니 배가 제법 차왔다. 먹는 것을 중지하고 치워뒀던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크게 진동한 핸드폰이 바로 작동했다.

환하게 빛나던 통신사 로고가 사라지고, 나타난 메인 화면에 수많은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떴다. 차유신의 눈이 점점 커졌다.

진무원 수석보좌관(12)

도의석 기자(9)

한수현 비서관(8)

윤재희 비서(7)

이외에도 대국민당 소속 의원이나 도의석 이외의 기자로부터 온 부재중 메시지가 한가득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부쩍 긴장한 차유신의 손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건 ‘도의석 기자’. 급히 통화버튼을 누른 차유신이 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무슨 일이야.”

-선배. 혹시 댁에 계십니까.

“어.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왜?”

-나오지 마세요.

“뭘 나오지 마.”

-저도 지금 부장 지시받아서 선배 집 앞에 와있긴 한데… 하, 진짜. 하여간 절대로 나오지 마요. 상황이 아주 안 좋아요.

할 말만 마친 도의석이 뚝 통화를 끊었다. 멍하니 액정만 내려다보던 차유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벅저벅 걸어 베란다가 있는 쪽으로 갔다. 커튼을 젖히자, 아파트 입구 쪽에 진을 치고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 차유신 나왔다!”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도로 커튼을 쳤다. 몸을 튼 채 시험에 잠긴 사람처럼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 와중에 가슴 밑에서 둥, 둥, 소리를 내며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분명히 기자들이다. 갑자기 기자들이 자신의 집 앞에 모였다. 국회에 입성한 후 처음 겪는 일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명백히 나쁜 쪽으로.

분연히 식탁으로 돌아갔다. 핸드폰을 두드려가며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검색어창에 ‘차유신’을 쳤다. 실시간 업데이트 수준으로 뜨는 자신 관련 기사들이 보였다.

「차유신 의원, ‘T시티 로비게이트’ 발각… 과기정통부 차관에 금품 건네」

「신진화당 “차유신의 T시티, 그냥 만들어진 것 아니다”… 검찰 고발 예고」

「차유신, 과기정통부 차관에 ‘골프장 회원권 접대’… VC 대표와 총 2억 원 로비」「

한껏 올라갔던 심박 수가 점점 내려갔다. 지나치게 상황이 터무니없으면, 오히려 사람이 이성적이 되는 법이다. 차분해진 낯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과기정통부 차관, T시티 로비, 골프장 회원권, VC 대표. 흩어져있던 퍼즐이 차곡차곡 맞춰져 갔다.

지난달 김신제 이신인베스트먼트 대표의 부탁에 따라 과기정통부 차관인 이환일에게 골프장 회원권과 체크카드를 전달했다. 전부 김신제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이다. 차유신은 일종의 배송책이었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지금 언론에서는 그것들이 차유신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중간에서 누군가가 수작을 벌였다.

로비를 벌인 김신제 당사자, 혹은 제3자가.

다시 액정을 짚었다. 진무원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전부 가기도 전에 진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깼구나. 유신아.

“상황 정리 브리핑. 1분 안에.”

사무적으로 건넨 말에 진무원이 들숨을 삼켰다. 이어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국감 앞두고 과방위 위원인 신진화당 이선호가 과기정통부 내부자로부터 역현T시티 지원사업 관련 로비 정황 자료를 입수했어. 이걸 바로 언론에 공표했고. 요지는 너와 김신제 이신인베스트먼트 대표가 과기정통부 이환일 차관 대상으로 골프장 회원권을 포함한 총 2억 원의 금전적 로비를 했다는 거야. 이환일 차관이 당시 받은 체크카드에 ‘차유신과 김신제가 함께 보내는 선물’이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대. 이환일은 내일 금품수수를 인정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거고, 김신제는 잠수 탔어.

“형. 나는 그냥 전달만….”

-알아. 그리고 그게 문제인 거야. 해당 증거물은 네가 이환일 차관과 미팅하던 날 전달됐어. 당시 미팅 장소로 삼은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목격을 인정했어. 둘이 만났던 걸 증명하는 복도 CCTV도 있지. 명백히 보이는 게 있는 상황에서 너는 전달만 했다고 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아.

“김신제는 왜 그딴 장난을 친 거야.”

차유신의 숨이 가빠졌다. 진무원은 그저 한탄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그쪽도 누군가로부터 사주받은 것인지도 모르지.

“신진화당이야?”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김신제는 원래 정치권 인맥이 넓으니까. 누군가로부터 너를 물고 같이 죽으면 보호해주겠다는 약조라도 받은 건지는 모를 일이지. 독자적인 판단일 수도 있어. 혹시나 적발될 경우 본인 혐의를 위장시키기에 딱 좋거든. 지금 당장 언론들 상황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아무도 김신제 얘기 안 해. 전부 다 네 얘기만 하고 있지.

차유신의 입술이 질근 깨물렸다. 지난달, 돌담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본 이환일의 표정이 떠올랐다. 김신제의 선물을 받자마자 바로 누그러져 역현T시티 지원 사업을 약속하던 인자한 낯. 그때는 단지 고가의 선물을 받아 관대해진 영향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이환일에게 그 선물은 차유신과 김신제의 공동 작품이었다.

-아무튼 너는 계속 집에 있어. 내가 기자들에게도 얘기했어. 차유신 의원은 몸이 안 좋아 오늘 계속 집에만 있을 거고, 공식 입장은 내일쯤 발표하겠다고. 지금 반론 자료 만드는 중이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집 앞에 기자들 좀 있을 거야. 운열이하고 비서 몇 명 보내뒀어. 그쪽도 최대한 빨리 정리해줄 테니까, 넌 죽은 것처럼 숨어만 있으라고. 알았어?

“형.”

-알았냐고 물었잖아. 어? 유신아!

진무원이 대뜸 외쳤다. 달싹이던 차유신의 입이 끝내 다물렸다. 공허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알았어. 형.”

통화가 끝났다. 고적해진 집 안에서 쥐어짜듯 숨을 쉬었다. 명백한 자신의 집인데도 춥고 갑갑했다. 차유신은 인위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무원의 말대로 죽은 것처럼, 더더욱 죽은 것처럼.

진무원의 의견에 동의한다. 칩거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아무리 죽은 척을 해도, 정작 차유신이 죽지를 않았다. 멀거니 멈춰 색색거리던 차유신의 어금니가 돌연 깨물렸다.

역시 이건 아니다.

진무원이 내준 도피 카드를 속으로 태워버렸다. 가만히 있을수록 의혹만 증폭된다. 이슈 메이킹은 시간 싸움이다. 아무 일 없이 내일이 밝아 의원실에서 준비한 입장 표명문을 읊을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변수는 늘 존재한다. 내일이 오기 전에 김신제나 신진화당에서 또 다른 폭탄을 들고나온다면. 그것이 차유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라면.

의원실의 대응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성큼성큼 걸어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크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워드 파일을 열고 기자들에게 배포할 입장 표명문 작성을 시작했다.

‘차유신 로비게이트’는 국민 기만용 소설이다.

역현구을 국회의원 차유신.

문서에는 모든 걸 적었다. T시티 조성 원칙에 로비라는 방식은 없었다. 이환일 차관과 T시티 지원 사업 요청 관련 미팅을 했던 건 사실이다. 금품을 준 적은 없다. 그 자리에서 김신제 이신인베스트먼트 대표로부터 전달받은 봉투를 건네주긴 했다. 단순한 선물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다만 로비 여지가 있는 상황을 묵인한 점을 인정한다. 부끄럽게 생각하며, 과기정통부와 추진 중인 T시티 지원 사업은 철회하겠다. 앞으로 보다 투명하게 T시티를 운영하겠다.

문서 안의 거짓은 하나였다. 김신제로부터 받은 봉투와 관련해 자세한 걸 몰랐다는 내용. 그 정도 왜곡은 필요했다. 자칫하면 방조 혐의에 엮일 소지가 있다. 그것 역시 죄라면 죄지만, 일단 차유신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변호를 해야 했다.

작성을 마치고 30부를 프린터로 뽑았다. 페이퍼가 인쇄되는 동안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챙겨 입고, 짙은 푸른색 넥타이를 맸다. 마지막으로 검은색 재킷을 걸쳤다. 단정하되 숙연한 분위기의 착의를 완성했다.

인쇄가 끝난 페이퍼를 챙기고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다듬은 뒤 얼굴을 어루만졌다. 초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뭐라도 바를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미 상태는 충분히 안 좋아 보였다.

거실로 나왔다. 저벅저벅 걸어 현관 앞에 다다른 후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돌려 민 순간, 누군가의 팔뚝이 쑥 들어왔다. 이내 다짜고짜 차유신의 어깨를 잡고 안으로 밀어붙였다. 헉, 소리를 낸 차유신이 뒷걸음질을 쳤다.

“나오지 말라고 수보*가 얘기했을 텐데요.” (*수석보좌관)

쾅. 현관문이 거칠게 닫혔다. 머뭇거린 차유신이 입을 뗐다.

“더 악화되기 전에 어서 입장을 내놓아야….”

“의원님.”

어깨에 머물러있던 우태원의 손이 내려왔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가던 손바닥이 차유신의 가슴께에 안착했다. 심부를 꾹 눌러오는 압박감에 턱이 파들거렸다. 우태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 심장 많이 뜁니다.”

차유신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들려있던 페이퍼가 우수수 떨어졌다. 텅 빈 대지에 홀로 남은 양 공허해진 차유신을 보며 우태원이 묵직한 숨을 뱉었다. 이내 가슴을 덮었던 손을 옮겨 몸을 안아왔다. 단단한 팔뚝에 감긴 허리가 당겨졌다. 딸려온 정수리가 우태원의 턱에 닿았다. 은은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쉬세요. 오늘은 의원님의 휴일입니다.”

차유신의 눈이 깔렸다. 냉기에 사로잡힌 하얀 바닥을 일별하다,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실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편해야 휴일이지. 그런데 당장 내일이 편하지 않잖아.”

차유신이 낮게 탄식했다. 우태원이 고개를 숙였다. 높은 콧대에 스친 앞 머리카락이 간질거렸다. 차유신의 눈 밑이 움칠거렸다. 다정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내일도, 모레도 편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차유신이 심상히 대꾸했다.

“건방진 얘기 하지 마. 보좌진은 정규직이 아니야. 모시는 의원이 벼랑 끝에 서면, 누구나 곁을 떠나게 돼 있어. 너도 예외가 아니고.”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우태원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건조한 망막에 새삼 낯선 얼굴이 빼곡하게 찼다. 벌어진 그의 입술 틈에서 강고한 언어가 샜다.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저는 계속 의원님 곁에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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