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4월.]
선거사무소가 부산했다. 차유신은 연신 숨을 몰아쉬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겪는 순간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 결과 하나로 지난 2개월 반의 노력이 종지부를 찍는다. 말이 2개월 반이지, 차유신은 이 순간을 1년 5개월간 기다렸다.
“결과 나왔습니다. 형님.”
윤재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캠프 사람들이 우르르 근처로 몰려들었다. 윤재희의 스마트폰이 차유신의 손 안에 들어왔다. 액정에 3사 방송국 출구조사 결과가 줄줄이 표기돼있었다. 차유신은 빠르게 역현구을을 찾았다.
<역현구을>
K
(신)차유신 62.52%
(대)주한경 32.16%
S
(신)차유신 61.19%
(대)주한경 33.75%
M
(신)차유신 61.96%
(대)주한경 33.44%
“드디어 끝났다. 씨발.”
진무원이 얼굴을 감싸며 탄식했다. 캠프 사람들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먹먹하게 호흡한 차유신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신이 난 한수현이 차유신의 등을 두드려댔다.
“야! 잘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확정 뜨겠는데?”
“다른 쪽은 어때.”
차유신이 물었다. 도로 가져간 스마트폰을 훑어보며 윤재희가 눈을 찌푸렸다.
“아주 나쁩니다. 기초단체장 7곳 중 5곳을 대국민이 가져갔습니다. 광역 및 기초의원 55곳 중 37곳에서도 대국민이 우세합니다.”
“신인대 선배 난리 났겠네.”
차유신이 쯧, 혀를 찼다. 당 분위기가 안 좋은 탓인지 지도부 쪽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대국민당에 있으면서 첫 총선을 치렀을 때는 출구조사 결과가 뜨자마자 김후준으로부터 축하 전화가 왔었다.
입구 쪽에서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이 마주친 젊은 남자가 과장되게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눈살을 구기는 차유신의 곁에서 한수현이 속삭였다. S에 있는 최재혁 기자. 알았다는 고갯짓을 한 뒤 몸을 일으켰다. 최재혁이 악수를 청했다. 차유신은 덤덤하게 맞잡았다.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숫자 너무 깔끔하게 나왔는데?”
“일찍 오셨네요.”
“차 의원이야 이번 재보궐 선거 1순위 취재대상이지. 그 핫하던 역현구을 후보인 데다가, 아주 유력한 당선자 아닙니까. 다른 매체에서 몰려오기 전에 내가 선점해야지.”
휘 뒤를 본 최재혁이 손짓을 했다. 주억거린 카메라 기자가 장비 세팅에 나섰다. 시계를 힐긋한 최재혁이 차유신의 어깨를 짚었다.
“십 분 후에 스튜디오 연결할 건데, 괜찮죠.”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야죠. 오늘도 역시 잘생기셨네. 이따 나가는 화면만 보면 어린 남자애들 100명이서 오디션 보는, 그 뭐더라. 아무튼 그 프로그램인 줄 알겠어. 아주.”
너스레를 떤 최재혁이 마이크를 챙겼다. 차유신의 곁으로 다가온 한수현이 흐트러진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정했다. 이내 차유신을 힐끔거리다 물었다.
“메이크업하고 가?”
“해야 돼?”
“안 해도 되겠어. 오늘 피부 상태 좋아. 너무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어깨를 다독인 한수현이 옆으로 빠졌다.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전면에 설치한 예닐곱 개 모니터가 주요 채널들의 속보를 비추고 있었다. 대부분의 매체가 축제 분위기인 대국민당 캠프와 고요하기만 한 신진화당 캠프를 분할화면으로 대조해 내보내는 중이었다.
「신진화당 ‘여당 잡기’ 실패… 기초단체장 7곳 중 5곳 ‘대국민당 유력’」
“연결합니다.”
카메라 기자가 사인을 보냈다. 마이크를 든 최재혁이 목을 곧추세웠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스튜디오 음성에 집중하다가, 곧 입을 뗐다.
“네. 저는 지금 차유신 후보 선거사무소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차 후보는 대국민당 주한경 후보보다 거의 두 배가 많은 득표율을 확보했습니다. 역현구을 선거구가 이번 선거에서 상당한 격전지로 꼽혔던 만큼, 출구조사 결과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 사무소에 나와 있는 차 후보를 잠시 만나보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차 후보님.”
마이크가 차유신에게 건네졌다. 안정적으로 차재혁을 본 차유신이 답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출구조사 결과에 대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단은 출구조사 결과가 다는 아니라는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실제 숫자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고, 아예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출구조사 결과만 두고 얘기하자면 득표율이 생각보다 높게 나와 만족하고 있습니다. 유권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 년 넘게 정치적 공백기를 가진 후 출마했는데도 매우 높은 지지율을 확보했습니다. 비결이 뭘까요.”
“제가 과거 역현구을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지역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중심에 역현T시티가 있고요. 이런 부분을 지역민들께서 좋게 기억하시고 저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대국민당에서 신진화당으로 이번에 옮기셨지요.”
“네.”
“이번 재보궐 선거의 전반적인 출구조사 결과를 두고 양 당의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인데….”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말을 끊은 차유신이 물러섰다. 최재혁이 약삭빠르게 마이크를 제 입가로 가져갔다. 이내 카메라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네. 지금까지 차유신 후보 선거사무소였습니다.”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마이크를 툭 장비 가방에 던진 최재혁이 차유신을 힐끔거렸다. 익살스럽게 접히는 눈매가 보였다.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요, 의원님. 나 원래 장난 좋아하잖아.”
“저라서 그냥 넘어간 겁니다.”
차유신이 무표정으로 경고했다. 키득거린 최재혁이 카메라 기자를 도와 장비를 챙겼다. 그 너머에서 또 한 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건 보다 앳된 남자 기자였다. 몸을 세운 최재혁이 바로 알은 체를 했다.
“오, 1등 신문 기자. 왜 이렇게 늦었어?”
“형 아까 정론관에 있다고 했었잖아.”
남자 기자가 다짜고짜 삿대질을 했다. 최재혁이 태연하게 허리를 짚었다.
“그땐 있었지. 30초 후에 차캠으로 출발하긴 했지만.”
“진짜 나 형하고 꾸미 못 해 먹겠다. 사람 뒤통수치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치를 떤 남자 기자가 분연히 발을 뻗었다. 남자의 이름을 알려줄 기세로 한수현이 다가왔다. 차유신은 가볍게 저지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대국민당 의원으로 있을 때부터 막역하게 지낸 도의석 기자였다.
“오랜만입니다, 선배. 축하드리고요.”
앞에 선 도의석이 꾸벅했다. 차유신은 고갯짓으로 응수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주한경 선배 안타깝게 됐네요. 뭐, 누가 봐도 역현구을은 선배가 가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주 선배하고 혹시 연락했어?”
“연락은 했는데요, 안 받습니다. 캠프에도 없고…. 명목상으로는 조용히 자택에서 대기 중이라는데. 제가 알아보니 상황이 좀.”
도의석이 머뭇거렸다. 차유신이 재촉했다.
“상황이, 뭐.”
고민하던 도의석이 몸을 낮췄다. 나직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주 선배 측근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주 선배 방에 있던 비서관이 나하고 워낙 친한 형인데, 지금 주 선배 캠프에서 뛰거든.”
“그런데.”
“주 선배가 지금 우태원 의원사무실에 있답니다.”
“주 선배가 거길 왜?”
차유신의 언성이 높아졌다. 도의석이 한탄하듯 답했다.
“그게 이상한 거지. 심지어 김후준 대표도 대국민당 캠프에서 잠깐 자리 비웠다던데, 아마 같이 있는 것 같아요. 거기 당직자한테서 김 대표가 우태원 만나러 간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어.”
“김 선배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희한하지 않아요? 물론 주한경 선배가 이번 선거에서 참패한 건 본인 스스로나 당 입장에서나 쪽팔린 일이지. 주 선배 커리어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지역구를 못 먹은 거니까. 그런데 그거 하나 때문에 김후준이 직접 자리를 비워? 심지어 지금 있는 곳은 우태원 사무실이고? 우태원 사무실 거기 대국민당 영감들 사이에서도 잘 안 가는 곳이에요. 일단 위치가 역현구 운도동이잖아. 우태원이 당에서 신임받는 인물인 것하고는 별개로, 깡패들 소굴이나 마찬가지인 동네를 누가 가요? 모양새 안 좋게.”
도의석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자못 심각해진 차유신의 눈이 굴러갔다. 여전히 활기에 찬 캠프사무소를 둘러보다가, 도의석의 팔을 잡았다.
“너 차 가져왔지.”
도의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져왔죠. 왜요?”
“나 30초 있다가 캠프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뒷문으로 빠질 거야. 너도 나와. 나와서 나 좀 데려다줘.”
“어디로요.”
도의석이 더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유신이 뭘 따지냐는 듯 쏘아붙였다.
“당연히 그 깡패소굴이지.”
*
운도동에 있는 우태원 의원사무실 빌딩은 저번보다도 더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차를 마친 도의석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 진짜 여기는 밤에는 못 오겠다. 오면서 조폭 같은 놈만 스무 명 정도 본 것 같아요.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예 이 시간에 돌아다니지도 않아.”
“너는 이만 들어가 봐. 데려다줘서 고마워.”
“선배 혼자 가실 거예요?”
“너 일 안 해? 슬슬 기사 송고할 시간대 아니야?”
차유신이 바깥으로 나서며 물었다. 도의석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그렇긴 하죠.”
입을 다문 그가 주섬주섬 뒷좌석에 둔 노트북을 챙겼다. 완전히 빠져나온 차유신이 문을 닫았다.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차창 너머의 도의석을 무시하고, 빌딩 입구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번 왔던 곳인지라 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 복도로 나선다. 안쪽에서 하얀빛을 뿜어대는 사무실 앞에 선다. 문을 두드린다.
오 초도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나타난 유해겸이 움칠했다.
“혀…. 형님.”
“안에 주한경 선배 있지.”
“아니요, 형님. 그게….”
성큼 들어서는 차유신을 유해겸이 반사적으로 막아섰다. 앉아있던 서너 명의 보좌진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부쩍 긴장한 손아귀가 차유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거, 형님께 별로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안에 주 선배 있어, 없어.”
“형님.”
“내가 지금 물었잖아!”
커다랗게 윽박지르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우뚝 선 보좌진들이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멀거니 차유신을 보던 유해겸의 눈에서 문득 초점이 사라졌다. 겁나는 것이라도 본 듯,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차유신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갑자기 뭐야.”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지. 해겸아. 심지어 조만간 다시 금배지 다실 분 앞에서.”
다정한 한 마디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차유신의 허리에 굵은 팔뚝이 감겼다. 멈칫한 차유신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우태원이 빙그레 웃었다.
“왔어요? 선배.”
“너….”
갓 열린 입술이 불현듯 얼어붙었다. 허억! 저편에서 들려온 탄성에 귓바퀴가 곤두섰다. 둥그렇게 뭉쳐진 눈망울이 이동했다. 활짝 열린 안쪽 사무실에 눈을 뒀을 때, 돌연 입이 틀어 막혔다. 흡, 소리를 낸 차유신의 어깨가 소스라쳤다. 온몸을 휘감는 소름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소리 낼까 봐 입 막았는데, 안 막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차유신의 옆얼굴에 볼을 기댄 우태원이 낮게 웃었다.
“놀랐어요? 선배.”
나지막한 조롱이 따라붙었다.
“귀여워라.”
간신히 숨이 트인 입에서 색색대는 소리가 났다. 등줄기가 덜덜거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김후준의 발 앞에서 죽은 강처럼 새빨간 핏물이 넘실거렸다. 강줄기의 시작점에는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절단된 채 등을 들썩이는 주한경이 있었다.
“어, 유신이. 왔니?”
김후준이 두 팔을 펼치며 반기는 행색을 해 보였다. 흔들리던 차유신의 동공이 버겁게 오롯해졌다. 밭은 숨을 들이켜는 차유신을 보다가, 우태원이 손을 거뒀다. 잠시 휘청거린 다리가 바로 섰다.
“주한경 선배, 병원에 데려가야 합니다.”
가까스로 가다듬은 한 마디가 나왔다. 김후준이 대수롭지 않게 우태원을 봤다.
“손가락이 몇 시간 안이면 붙는다고?”
“다섯 시간입니다. 얼음물에 담가서 가져가야 하고요.”
우태원의 시선이 내려갔다. 기절한 듯 잠잠해진 주한경을 응시하다, 담담하게 뇌까렸다.
“물론 붙여도 제 기능의 50%나 간신히 하겠지만요.”
“아는 병원 있다고 했지.”
“여기서 십 분 거리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김후준이 고갯짓을 했다. 몸을 튼 우태원이 손을 까딱했다.
“주 선배 챙겨.”
보좌진들이 우르르 뛰어왔다. 핏물이 철철 흐르는 주한경의 손을 지혈하는 한편 누군가는 몸을 부축하고, 누군가는 잘려나간 손가락을 얼음 팩에 집어넣었다. 신속하게 임무를 마친 보좌진들이 일어섰다. 축 처진 주한경이 세 명의 보좌진에게 실려 질질 끌려갔다.
마지막으로 나선 보좌진이 문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진 가운데, 유유히 고여 가는 핏물만이 참혹했던 직전을 방증했다.
“잘 지냈고?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인다.”
김후준이 흐뭇하게 발을 뻗었다.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가볍게 볼을 만져왔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전율했다.
“당선 축하한다. 유신아.”
상체를 낮춘 김후준이 빙글거렸다. 차유신은 서서히 눈을 치떴다. 딱딱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알면서 물으십니까. 대국민당 이번 재보선 성적 좋지 않습니까. 그 많은 지역 중에서 고작 역현구을 하나 빼앗긴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선거에서 질 수야 있지. 살다 보면 누구나 져.”
김후준이 노곤하게 제 목을 주물렀다. 다정하되 의미심장한 눈길이 차유신에게 꽂혔다.
“그런데 이기겠다는 의지도 없이 지는 건 좀 곤란하잖아. 안 그래?”
“무슨….”
“그, 뭐냐. 한국IT벤처협회? 그거 신진화당 정진원 선배가 설립 추진한 것 맞지?”
김후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차유신의 턱이 덜컥거렸다. 혀를 차고 난 김후준이 눈을 깔았다. 시뻘건 바닥을 훑어본 그가 읊조렸다.
“보름 전에 정진원 선배하고 주한경이 안국동에서 따로 만난 모양이더라고. 이후부터 부쩍 주한경 쪽 의욕이 저하됐고…. 길게 말해 뭐해? 재취업 자리 생겼으니, 더 이상 지는 싸움에 목매다 피 보고 싶지 않다 이거지. 듣자 하니 연결해준 게 너라는 얘기도 들리던데.”
김후준의 어조가 은근해졌다.
“아니겠지? 우리 유신이가 그래도 상도덕은 있는 놈이잖아. 설마 선거 중에 경쟁후보에게 취업자리 알선해주는 그런 깜찍한 짓을 네가 했을까. 응?”
차유신의 어금니가 지그시 깨물렸다. 잇새로 부쩍 사나운 음성이 터졌다.
“그랬으면 어쩌실 겁니까.”
김후준의 입매가 길어졌다. 헛헛한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기가 막힌다는 듯, 적잖게 웃고 난 그가 허리를 짚었다. 조금씩 식어가는 낯이 보였다.
“떠돌이신세 좀 하더니 많이 컸구나. 유신아.”
김후준의 손이 다시 다가왔다. 아까에 비하면 힘이 실린 손길이 차유신의 볼을 건드렸다. 툭. 절로 교근이 움찔했다. 살짝 떨어졌던 손이 다시 차유신의 얼굴을 쳤다. 탁. 이번에는 확연히 매운 손놀림이었다. 차유신의 어깨가 진동했다.
“이래서 자식 예쁘게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야. 응?”
김후준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빛을 등진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내가 네 아버지다. 잊었니?”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차유신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는 피해도 상관이 없는데, 본능적으로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학습이 참 무서운 법이었다.
돌연 바람 소리가 멎었다. 차유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김후준의 손목을 붙든 단호한 손이 보였다. 높낮이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까지 하시죠.”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눈을 부릅뜬 우태원이 단조로이 경고했다.
“여기 제 사무실입니다.”
김후준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짙은 숨을 몰아쉰 그가 곧 이죽거렸다.
“너도 이 새끼한테 배웠구나.”
우태원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김후준을 제압한 손아귀는 그대로였다.
“여긴 제 공간이고, 그러니 제 방식으로 상황 정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우태원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차유신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뚫어져라 내려다 보던 그가 보일 듯 말듯 눈초리를 휘었다. 마른 침을 삼킨 차유신이 뒤꿈치를 꾹 지르밟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불을 감싸왔다.
“고개 들어봐요. 선배. 얼굴 좀 자세히 보게.”
차유신은 가만히 곁눈질을 했다. 즐거움과 불쾌함의 경계에 있는 면상이 보였다. 정확히 어느 쪽인지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낯선 감상이 아니다. 2년 3개월 전 처음 만나던 그 순간부터, 차유신은 종종 느껴왔다. 우태원의 기류는 다른 차원의 것처럼 해독하기 어려운 영역에 존재한다고.
알면서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도 우태원다워, 이상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여간 말 안 듣지.”
꼿꼿하게 눈만 치뜨는 차유신의 귓가에 자조적인 혼잣말이 스쳤다. 서서히 올라오는 우태원의 손이 보였다. 차유신은 고집스럽게 얼굴을 숨긴 채 우태원을 노려봤다. 그 예술적인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갈라지며 흐무러지는 환영까지 봤을 때. 우태원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걸렸다.
“선배는 항상 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이 휘어 잡혔다. 아주 능숙하게, 한 치도 헤매지 않은 손가락이 동맥을 찍어 눌렀다. 아. 차유신의 입술이 덜컥 떨어졌다. 윗눈썹을 까딱한 우태원이 갈고리 같은 집게손가락을 울대뼈 위에 댔다. 이내 뚫어버릴 기세로 박아버렸다.
일반 성인 남자보다 다소 큰 손이 급소만 골라 꽉꽉 죄어오고 있었다. 호흡뿐 아니라 감각이며 혈류까지 빠르게 마비돼갔다. 얼굴이 펄펄 끓어올랐다.
“하읍…!”
시신경이 싹둑 잘려나간 것처럼 시야가 가마득했다.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기관이 죽어가고, 물에 잠겨가듯 머리가 무지근해졌다.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갛다는 것만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정상적으로 인지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온 동력을 강탈당한 몸이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버둥거렸다. 까무러진 눈동자가 자꾸만 넘어갔다. 가물가물한 망막에 당황한 기색의 김후준이 비쳤다. 그리고 그 김후준을 뒤에 둔 우태원은.
웃고 있었다.
“꼭 가는 얼굴 같아서 보기 좋네요.”
얼굴을 기운 우태원이 차유신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잘 자요. 선배.”
파도에 덮쳐진 모래성처럼 오감이 알알이 흩어졌다.
*
일정하게 이동하는 시계 침 소리에 귓등이 꾸물거렸다. 부드러운 물체에 파묻혀있던 눈꺼풀이 움칠거리다 들렸다. 몽롱한 동공이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이내 탐색하듯 느리게 굴러갔다.
더께 하나 없이 하얗기만 한 천장과 벽, 무거워 보이는 회색 암막 커튼, 인문서적과 경제학서적으로 가득 찬 네 칸짜리 책장, 그 옆에 놓인 까만색 데스크, 그리고 같은 색의 의자.
처음 보는 공간이다. 하지만 냄새가 난다. 꽤 익숙한 냄새가.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덮여있던 이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깜박이는 눈으로 밑을 살폈다. 자신은 침대에 있다. 한참을 머물렀던 듯, 시트가 제법 후끈하다.
“도의석.”
함께 운도동까지 왔던 도의석이 떠올랐다. 빠르게 내려간 손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재킷에 뒀었나.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제 것 같아 보이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
“그래? 석 회장한테는 내가 직접 얘기할게. 신경 안 써도 돼. 주한경 선배는?… 하. 운 좋네.”
문 너머에서 낯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곧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우태원의 뒤에서 한 남자가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누가 봐도 보좌진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럼 전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밑에 몇 명 있지?”
“재길 형님 포함해 여덟 명 있습니다.”
“잘 보고 있어. 저번처럼 어슬렁거리는 새끼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재차 몸을 굽히고 난 남자가 물러났다. 문을 닫은 우태원이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내 차유신을 보며 엷게 웃었다.
“피곤했나 봐요. 선거 때문에 많이 바빴죠? 오래 주무시더라고요.”
“여기가 네 집이야? 일단 내 핸드폰 내놔.”
차유신의 손이 불쑥 나아갔다. 무시한 우태원이 뚜벅뚜벅 걸어 차유신의 앞에 섰다. 시트에 걸터앉은 그의 눈빛이 초연했다.
“목 한번 봐요. 나도 오랜만이라 조절을 잘 못 한 것 같아.”
“우태원. 핸드폰.”
“아. 예쁘게 남았네요. 열흘은 족히 가겠어요.”
우태원의 눈초리가 흡족해졌다.
“마음에 들어요.”
차유신의 눈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갈수록 사나워지는 낯을 태연하게 감상한 우태원이 데스크 위에 손을 올렸다. 담뱃갑을 찾아 한 대를 꺼낸 뒤 제 입에 물었다. 이어 그 옆에 있던 지포 라이터를 챙겨 불을 붙였다. 번쩍이는 불꽃이 담배 끄트머리를 점화했다.
“도의석 기자라고 했나? 그 친구는 우리 보좌진들이 알아서 잘 보내놨어요. 손가락 열 개 다 멀쩡하니 걱정할 필요 없고요. 그리고 선배 핸드폰은.”
우태원의 입이 뻐끔거렸다. 뿜어져 나온 기체가 차유신의 얼굴을 덮쳤다. 뻑적지근한 목이 얼얼하게 박동했다.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뒤따라온 우태원의 손이 차유신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자신 쪽을 향하게 하고는, 다른 손으로 제 입에 있던 담배를 빼 차유신에게 물렸다. 우태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거 다 피우면 줄게요.”
“우태원.”
“좋아하잖아요. 선배가 좋아하는 거라서 물려준 건데.”
우태원이 갸웃했다. 분한 듯 노려보던 차유신이 끝내 입을 오므렸다.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손을 들어 담배를 잡고는, 칼칼한 연기를 삼켰다. 얼마 안 돼 바로 목구멍이 홧홧해왔다. 쿨럭, 소리를 낸 차유신이 얼굴을 짚었다. 붉게 타들어 간 담배 끝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잘 못 빠네요. 오늘은.”
저소한 우태원이 차유신의 손을 감쌌다. 잡힌 손이 협탁 위로 이동했다. 재떨이에 담배 끝을 맞춘 우태원이 대신 재를 떨궈줬다. 하얀 덩어리가 나풀거리며 낙하했다. 사뭇 다정하게 차유신의 손등을 어루만진 우태원이 입을 뗐다.
“선배는 정치인이 안 어울려요.”
차유신의 눈길이 이동했다. 차유신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는 우태원이 보였다. 아까의 담배를 도로 물고 난 우태원이 기다란 연기를 흘렸다. 차유신의 식도를 타고 쓰라린 침이 넘어갔다.
“하지만 선배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죠.”
우태원이 탁한 숨을 골랐다. 곧 느른하게 입을 열고는, 검은 입술 틈으로 하얀 연무를 내뿜었다. 일부가 차유신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멍이 든 목이 또 알알했지만, 더 이상 기침은 하지 않았다. 차유신은 참고 있었다.
“어쩌면 선배는 선택받은 건지도 몰라요.”
담배 끝에서 점점 숨이 죽어갔다. 연기 틈으로 비치는 눈동자가 섬뜩한 이채를 머금었다.
“나와 다르게.”
차유신의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차가운 눈으로 그를 주시하다가, 명령에 가까운 언어를 꺼냈다.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핸드폰이나.”
“이주학 선배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
차유신의 속눈썹이 흠칫했다. 이주학. 지난 총선에서 역현구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대국민당 소속 정치인. 그는 역현구을을 맡은 지 8개월 만에 사망했다. 자살이었다. 덕분에 공석이 된 역현구을 지역구를 채우기 위해 이번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거기서 당선된 게 바로 차유신이다.
“역현호 인근에서 유서 하나 남기고 죽었죠. 경찰은 역현호에 투신했을 가능성을 유력하게 보고 안을 수색하기까지 했는데, 결국 시신을 찾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다만 이주학 선배 본인 명의로 SDB그룹 대부업 자회사인 에스캐시로부터 삼십억 원이 넘는 대출을 받았던 사실 등으로 미뤄봤을 때 금전적인 개인사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죠. 유서 자체도 위조는 아닌 것으로 판명 났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사망 처리를 한 뒤 외부에는 실족사로 공표했습니다. 현직 여당 정치인이 사채까지 끌어가며 빚을 탕감하다 자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의 위신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마사지를 한 거죠.”
차유신의 손을 쥔 우태원의 손이 당겨졌다. 다시 재떨이에 다다른 그의 손가락이 꽁초를 떨굴 듯 말 듯, 차유신의 검지만 만지작거렸다. 차유신의 손가락이 종종 곤두섰다. 차유신도 대략은 아는 얘기였다.
“사실 이주학 선배의 빚은 일종의 사고입니다. 이 선배의 아내가 태류건설 고위 임원의 얘기만 듣고 한 부동산 PEF에 지인 돈까지 끌어다가 투자를 했는데, 이게 사기였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이 선배는 급하게 돈줄을 찾다가 SDB금융 부회장을 만납니다. 부회장은 0%에 가까운 이율로 대출을 해주겠다 했고, 이 선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인을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건 고이율의 에스캐시 대출서류였습니다. 알아챘을 때 해당 부회장은 국내에 없었고, 졸지에 이 선배는 거액의 빚더미만 끌어안은 상황이 됐죠. 그 무렵 역운회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역운회는 반쯤 자포자기한 이 선배로부터 유서를 받았고, 이 선배는 정치인으로서의 프라이드를 지킨 대가로 투신했죠. 이게 진실입니다. 모든 사실을 아는 사람은 SDB그룹 석일태 회장, 역운회 석재경 사장, 태류건설 조신희 회장. 저.”
우태원이 가붓한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선배까지 총 다섯 명.”
차유신의 턱이 크게 바들거렸다. 흐려졌다 뚜렷해졌다를 반복하는 망막 너머로, 우태원의 손아귀에 이끌려 재떨이로 내려가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식어가던 담배꽁초가 새까만 바닥에 푹 꽂혔다. 곧 비틀리고, 고꾸라졌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경악에 찬 질문이 나왔다. 우태원은 그저 웃었다. 심장 깊은 구석까지 쉼 없이 차디찬 숨이 들어찼다. 어지러운 물살이 춤을 추듯, 머릿속에서 잔인한 진실이 소용돌이쳤다.
전부 한통속이다. SDB그룹, SDB그룹의 모체인 역운회, 그리고 사돈기업인 태류건설이 짜고 이주학을 죽였다. 역현구갑 국회의원 우태원은 이를 알면서도 방조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다음 총선 때까지 선배를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했어요.”
우태원이 권태로이 고개를 내렸다. 시트를 덮은 차유신의 손등이 덜컥거렸다. 빼곡하게 찬 동공이 점점 커졌다. 차유신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우태원이 입매에 진한 호를 새겼다.
“이주학 선배가 사라져야, 그 자리에 선배가 오잖아.”
하. 차유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차유신의 볼을 살살 쓰다듬고 난 우태원이 나긋하게 읊조렸다.
“저 정말로 기다렸어요. 선배.”
차유신의 이가 세차게 갈렸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심박 수에 정수리마저 울렸다. 다시금 목덜미가 조여 온다. 우태원의 손은 진작 차유신을 떠났는데. 지금 이 순간 불현듯, 차유신은 철조선보다도 날카로운 올가미를 느낀다.
우태원이 건 목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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