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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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8월.]

완연한 장마철이었다.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틈으로 빗물에 젖은 덕수궁 돌담길이 보였다. 적잖게 언덕배기를 오르고 난 차가 멈췄다. 차유신의 눈이 돌아갔다. 옆으로 난 작은 샛길 안쪽에 한옥 모양 단독 건물이 있다. 퓨전한정식 전문 레스토랑으로, 공직자나 기업인이 종종 찾는 곳이었다.

“의원님. 이거.”

운전석에 있던 우태원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받아든 차유신이 표면을 살폈다. 상단에 고가로 유명한 골프장 리조트 로고가 들어가 있다. 가볍게 손으로 쓸어봤다. 빳빳하게 코팅된 소책자가 만져졌다. 고개를 든 차유신이 물었다.

“김신제 대표가 뭐라고 하면서 줬어.”

“잘 부탁드린다고만 했습니다.”

우태원이 단출하게 답했다. 다시 한번 봉투를 응시한 차유신이 곧 재킷 주머니 안쪽에 그것을 넣었다. 문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우태원이 저지하는 손짓을 하며 급하게 먼저 나섰다. 발레파킹 요원에게 키를 맡긴 그가 커다란 우산을 펼친 채 차창 너머에서 다가왔다.

바깥쪽에서 손잡이가 당겨졌다. 열린 문틈으로 비 내음이 훅 들어왔다. 몸을 숙인 우태원이 차유신의 머리 위에 새까만 우산을 드리웠다. 척척한 바닥에 구둣발을 디딘 후 식당 입구를 향했다. 거의 몸을 밀착한 우태원이 따라 걸었다. 침묵에 잠긴 두 사람의 비좁은 간격을 추적한 빗소리가 메웠다.

그렇게나 비가 내리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차유신에게는 물이 튀지 않았다. 차유신은 곁눈질로 우태원을 봤다. 묵묵히 젖어가는 그의 한쪽 어깨가 보였다.

“오셨어요? 의원님.”

급하게 달려온 레스토랑 매니저가 차유신을 반겼다. 곧 능숙하게 안내하며 복도를 걸었다. 약간을 걸은 끝에 중앙 로비에 다다랐다. 소파에 앉아있던 정장차림 남자 두 명이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굽었다. 차유신은 눈인사만 했다. 한 명은 이환일 과기정통부 차관의 운전기사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차유신도 익히 아는 과기정통부 지원혁신국 과장이었다.

“차관님은 이미 와계십니다.”

과장이 재차 조아렸다. 끄덕인 차유신이 마저 걸었다. 로비를 점한 잔잔한 음악 틈바구니로 투박한 구둣발 소리가 잡음처럼 끼어들었다.

룸 앞에 다다른 매니저가 문을 열어줬다. 안쪽에 앉아있는 이환일이 서서히 드러났다. 차유신과 눈을 맞춘 그가 느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발자국 내민 차유신이 우태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 비서는 저쪽에서 대기.”

우태원이 흔쾌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고요해진 룸 안은 비 오는 날에도 습기 하나 없었다. 저벅저벅 나아간 차유신이 이환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린 이환일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비 오는 날에 이동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아닙니다. 과천에서 온 차관님이 더 고생이시죠.”

“난 괜찮아요. 어차피 집이 이 근처거든.”

이환일이 인자하게 응수했다. 손을 뻗은 그가 테이블 중앙에 놓인 와인 병을 잡아들었다. 손목을 기울여가며 차유신의 글라스에 붉은 액체를 따라주고는, 자신의 잔에도 똑같이 따랐다. 붉은 수면에 걸린 파동이 점점 잦아들었다. 곧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잠잠해졌다.

“결혼을 아직 안 했다고 했나.”

잔을 든 이환일이 물었다. 차유신이 주억거렸다.

“네.”

“올해로 나이가?”

“스물아홉입니다.”

“아이고, 한창이네.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좋다는 친구가 없었을 턱이 없는데.”

“제가 애인 삼기에는 적합한 놈이 아닌가 봅니다.”

“허, 참. 농담도. 그러고 보니 작년에 한창 얘기 돌았던 것 같은데. 임태선 장관이 사위 삼고 싶어 해, 일부러 본인 피아니스트 딸내미를 소개시켜준 일이 있다고.”

“함께 식사한 게 와전됐습니다. 그런 의도로 만난 자리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차유신이 선을 그었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있었다. 상대편에서 호감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다만 차유신 쪽에서 마음이 없었다. 괜히 얘기가 커지면 서로 곤란해질까 봐 이와 관련해서는 말을 아껴왔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이환일이 입을 다물었다. 차유신의 의중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잔을 쥔 이환일의 손이 올라갔다. 입술 틈에 자리를 잡은 글라스가 비스듬해졌다. 꿀꺽거리며 와인을 넘기는 울대뼈가 보였다. 스월링을 마친 차유신도 자신의 입에 잔을 댔다. 수 초간 경쟁하듯 알코올만 흡수하는 시간이 흘렀다.

탁. 하얀 테이블에 글라스가 내려왔다. 잔 목에서 손을 거둔 차유신이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역시 잔을 내려둔 이환일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차유신의 입 안에서 길게 혀가 굴러갔다. 미각을 자극하는 타닌이 자못 씁쓸했다. 가슴께가 미지근하게 울렸다.

슬슬 예열 끝났나.

“애인 사귈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차 의원이 바쁘게 사는 거, 내가 잘 알아요. T시티를 만들고 지휘하는 장본인이잖아. 잠자는 시간도 아깝겠지.”

이환일이 담담하게 입을 뗐다. 차유신은 잠자코 테이블을 한번 매만졌다.

“그만큼 T시티에 대한 차 의원 애정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아. 저번에 제안한 T시티 정례 지원프로그램, 지원정책국 사람 좀 투입하고 예산 좀 끼워 맞추면 아예 불가능할 것도 없겠죠. 다만 지원정책국에 허용된 인적, 금전적 파이는 한정돼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T시티만 신경 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판교단지도 있고, 대전 대덕단지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 벤처기술 이름 단 기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외면하고 T시티에 지원을 올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올인해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문건에 작성했듯 인력은 적합한 팀에 추가 업무 맡기는 수준이면 되고, 예산 규모도 크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배정해주시면 됩니다. 제게 필요한 건 과기정통부에서 T시티를 계속해서 케어해 주는 겁니다. 3차 입주가 끝나면서 과기정통부 역현T시티 사업팀이 해체했습니다. 사실상 과기정통부와 T시티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진 겁니다. 물론 서울시가 역할을 잘해주고 있습니다만, 제가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나중에라도 서울시가 T시티를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차 의원은 최악을 생각하는군.”

“현실은 항상 밑바닥에서 찾아오니까요.”

차유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입매를 굳힌 이환일이 큼, 헛기침을 했다. 차유신은 착잡하게 새까만 창문을 봤다. 무섭게 낙하하는 빗줄기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투명한 창에 기다란 선을 그어대고 있었다.

“이신인베스트먼트 김신제 대표로부터 뭐 얘기들은 것이 없었던가?”

문득 이환일이 물었다. 차유신의 입술이 미세하게 깨물렸다.

올 게 왔구나.

“우리 보좌진 통해 전달받은 게 있긴 합니다.”

차유신이 제 재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두꺼운 봉투가 단숨에 잡혔다. 그대로 빼낸 뒤 이환일의 앞에 놓아줬다. 봉투를 챙기는 이환일의 손이 사뭇 탐욕스러웠다. 입구 뜯어지는 조잡한 소리가 이명처럼 차유신의 귀를 건드렸다.

“차 의원도 한 번쯤 가봤겠지만, 프라이머 리조트가 훌륭하긴 훌륭해요. 우리나라에서 여기만큼 잔디 질이 좋은 곳이 없거든. 필드도 아주 훤하고, 바다하고 인접해 있어 경치도 최고지. 비싼 것 하나 빼고는 다 좋아.”

이환일의 손가락이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차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유신은 골프를 치지 않았고, 프라이머 리조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회원전용 팸플릿으로 보이는 책자를 꺼낸 그가 후루룩 페이지를 훑었다. 넘어가던 페이지 사이에서 툭, 뭔가가 떨어졌다.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카드였다. 놀라지도 않고 주워든 이환일이 뒷면을 봤다.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이환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흡족해졌다.

“김신제 대표가 뭘 알아. 젊은 데도 센스가 있어, 이 친구.”

테이블에 올라온 차유신의 손등이 주춤거렸다. 환해진 이환일을 담은 망막이 가물거렸다. 조금조금 뇌리가 흐려졌다.

이신인베스트먼트 대표 김신제. 시가총액 5조원 가치의 중견기업 오너가 3세. 이신인베스트먼트는 T시티에 입주한 유일한 VC였다. 기술기업은 아니지만, VC 몇 곳 정도는 들어 와주는 것이 구색 맞추기에 좋을 것 같아 차유신이 예외적으로 입주를 허용했다.

김신제는 통계학과 출신이었다. 벤처나 기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게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유일한 전문 분야는 돈을 쫓는 것이었다. T시티에 선제적으로 입주를 신청한 것에도 명백한 목적이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나중에 돈이 될 만한 초기 기업을 빠르게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나이는 차유신보다 대여섯 살 많은 수준으로 젊은 CEO에 속하지만, 매우 원숙한 인맥과 로비력을 자랑했다. 웬만한 정재계 인사와 고위 공직자는 한 다리 정도를 걸쳐 다 알고 지냈다. 상당수에 돈이 얽혀 있었다.

최근에는 이환일과의 관계가 좋다고 들었다. 이환일이 이끄는 지원정책국에서 민간 연계형 R&D 펀드 조성사업을 곧 시작하는데, 해당 사업 첫 참여 VC로 이신인베스트먼트가 들어가길 희망하고 있었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 김신제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차유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다음에 이환일 차관 만날 때 뭐 하나 전달해줘요. 그쪽에서 가입 부탁한 골프장 회원권인데, 말이 대신 가입해준 거지 그냥 내가 하나 사서 주는 거야. 이 정도야 뭐, 대단한 선물도 아니니까. 사실 차 의원님도 이 차관하고는 관계 세팅이 필요한 관계잖아요. 과기정통부에 3개월째 T시티 정례 지원프로그램 만들어 달라 요청하고 있다면서요. 아쉬운 부탁하는 김에 겸사겸사 내 선물 이용해요. 이거 서로한테 좋은 거야. 심지어 골프장 이용권 하나잖아.

가끔은 융통성 있게 장난질도 하면서 사는 거예요. 내가 차 의원님 많이 좋아하고 신뢰해서 일부러 한배 탈 기회 주는 거야. 사양 말고 받아요.

“차 의원.”

부쩍 부드러운 한 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차유신의 고개가 올라갔다. 이환일의 입가에 한없이 누그러진 호가 걸려있었다. 친아들이라도 대하듯 다정한 언어가 건네졌다.

“생각해보니 차 의원 제안이 아주 무리한 건 아닌 것 같아. 차 의원이 원하는 규모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히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지원 사업 하나 꾸릴 수 있게끔 내가 머리 잘 굴려볼게요. 자세한 건 다음에 만나 제대로 얘기합시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맥없이 떨어졌다. 넋이 나간 듯 이환일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차관님.”

*

그치지 않는 비를 뚫어가며 세단이 나아갔다. 빛으로 물든 중심가에서 밤에 잠식된 가장자리로. 삶의 대지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현재와 미래에서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역현구로.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차를 세운 우태원이 뒤를 봤다. 차유신은 미동도 없이 차창에 머리만 대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닌 듯 무감각한 귓바퀴를 타고 축축한 빗소리가 미끄러졌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기기묘묘한 소름이 목덜미를 옭맸지만, 차유신은 가만히 있었다.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와인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위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우태원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나섰다. 아까처럼 한 손에 우산을 든 채 차를 휘 돌아, 차유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 문이 열리자마자 스산한 비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차유신이 멈칫했다.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팔을 내밀어 차유신의 허리를 둘렀다.

부축하듯 차유신을 받친 우태원이 차 문을 닫았다. 차유신만 가린 수준으로 우산을 씌운 채, 익숙한 입구를 향해 발을 뻗었다. 차유신은 태엽이 다한 기계처럼 무력하게 걸었다. 발밑에서 찰박거리며 고인 물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로비 입구 센서에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다. 가장 끝 층으로 올라간 뒤 오른편으로 돈다. 현관 키패드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손잡이를 당긴다. 가느다란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린다.

모든 과정을 집주인 수준으로 수행한 우태원이 현관문 틈으로 차유신을 집어넣었다. 취기에 물든 몸이 잠시 흔들린 끝에 간신히 섰다. 따라서 들어온 우태원이 문을 닫았다. 머리맡에서 일시적으로 노란 현관 등이 번뜩였다.

“네가 우리 집에 총 몇 번 왔지.”

대충 구두를 벗어낸 차유신이 거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이어서 발을 들인 우태원이 답했다.

“여섯 번째입니다.”

“그렇게 많이?”

“아마 두 번은 기억 못 하실 겁니다.”

“혹시 내가 그때 헛소리했나.”

재킷을 벗어 소파에다 던진 차유신이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탔다. 다짜고짜 냉장고 문부터 열고는, 안에서 탄산수병을 꺼냈다. 다가오는 우태원의 기척이 느껴졌다.

“헛소리는 안 하셨습니다.”

“그럼 뭐했어.”

“그냥, 뭐.”

우태원 부쩍 말꼬리를 흐렸다. 차유신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탄산수병의 윗부분으로 손을 가져갔다. 쥐고 돌려봤지만, 좀처럼 분리가 되지 않았다. 오프너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을 식탁 위에 둔 채 싱크대 옆 선반으로 갔다. 포크나 수저 따위가 뒤섞여있는 수납함을 무작정 뒤졌다. 각종 집기가 성가시다는 투로 찰그락, 소리를 냈다.

문득 손가락에 매끈한 것이 닿았다. 플라스틱 재질의 포크 아니면 스푼이었다. 무심코 움켜쥔 손아귀에 점점 힘이 실렸다. 손금이 후끈 달아올랐다. 쥐고 있던 물체의 끄트머리가 쿡 손바닥을 찔렀다. 아프지는 않았다. 아까 이환일이 흡족하게 챙긴 플라스틱 카드의 모서리가 이보다 두어 배는 날카로웠다. 부들거리던 차유신의 고개가 푹 꺾였다.

그 망할 카드.

분명히 그건 체크카드였다. 뒤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금액과 비밀번호가 적혀있었을 거다. 김신제의 평소 로비 스케일을 고려하면 기본이 1억 원이다. 그것이 갑자기 이환일이 관대해진 이유다.

한눈에 알아챘다. 김신제는 차유신을 다리 삼아 이환일에게 금품로비를 시도했다. 알면서도 침묵했다. 그걸 회수하는 순간 공들인 이환일과의 관계가 어그러진다. 과기정통부를 무시하고 중소벤처기업부에 요청해 같은 프로그램을 세팅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추가 소요되는데다가 긍정적인 결과를 장담하기도 어렵다. 중소벤처부는 차유신의 홈그라운드가 아니었다.

차유신은 필요에 의해 비겁해진다. 그런 스스로를 경멸할 수도 없다. 모멸감을 채 잊기도 전에 자신은 또 비겁해질 것이고, 그러면 더 큰 경멸을 해야 한다. 책임질 수 없다면 시작조차 않는 게 맞았다.

또다시 이동한 손에 아까와 비슷한 질감의 물체가 스쳤다. 역시나 플라스틱.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차유신이 손가락을 펼쳤다. 새까만 아랫부분을 둥글게 말아 쥐고는, 단숨에 꺼냈다. 흘러간 눈길이 반대쪽 소매에 머물렀다. 홀린 것처럼 손이 옮겨졌다.

경멸의 이유라도 도려내야 한다.

“의원님.”

돌연 팔뚝이 휘어 잡혔다. 사로잡힌 몸이 벽을 향해 내몰렸다. 경련하고 난 손아귀에서 물건이 떨어졌다. 요란한 마찰음이 부엌을 가로질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벽에 밀착한 등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강고한 압박에 온 상체의 혈류가 막혀오고 있었다. 눈앞의 우태원이 몸을 내렸다. 죽어있던 차유신의 눈망울이 뒤늦게 오롯해졌다.

“내가 뭐를.”

다소 시큰둥한 반응에 우태원의 턱이 불끈거렸다. 낮게 시근덕거린 그가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스스로 그으려고 하셨습니다. 또.”

차유신의 시선이 툭 떨어졌다. 형광등 빛을 싸늘하게 반사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보였다. 덜컥 호흡하고 난 차유신이 제 이마를 짚었다.

이런 씨발….

*

물에 젖어들 때마다 꿈을 꾼다. 질척한 빗줄기에 파묻힌 허름한 골목. 새까맣게 그을려 종국을 맞이한 하얀색 세단. 그걸 지켜보는 내내 귀를 두드려대던 천둥소리. 그리고 번쩍이는 번개 틈으로 찢어진 필름처럼 드러나는 묵묵한 실루엣.

실루엣은 차유신을 보고 있었다.

끼긱. 날 선 소음을 내며 수도밸브가 잠겼다. 손을 올려 수납장을 더듬었다. 차곡차곡 개어져있는 수건 중 하나를 꺼내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바닥을 덮은 얕은 물이 움직일 때마다 수시로 찰박였다.

꿈이 끝났다. 그럼에도 차유신은 여전히 폭우 한가운데서 머물러있다.

건조해진 머리카락을 마저 훔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옷이 없다. 생각해 보니 욕실로 향하는 길에 무작정 세탁기에 처넣고 그냥 들어왔다. 이대로 나가면 추울 텐데. 혼잣말을 하며 문을 열었다. 환한 거실 안쪽에서 심야토론 프로그램을 송출 중인 TV 화면이 비쳤다.

-일명 ‘박신회 사단’으로 불리는 ‘회기동 모임’과 김후준 의원을 포함한 대국민당 지도부가 마찰한 건 처음이 아닌데요. 그럼에도 지도부에서 회기동 모임을 강력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건, 대국민당 2030세대 지지자 상당수가 해당 의원들로 인해 확보된 까닭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회기동 모임을 내치면, 2030 내 대국민당 지지율이 엄청나게 떨어질 수 있다는 거죠.

-맞습니다. 대국민당에 있는 만 42세 미만 의원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박신회 사단에 속해있습니다. 그 한 명이 차유신 의원인데요. 차 의원 하나를 빼고 대국민당 젊은 의원 모두가 이 모임 소속인 겁니다. 본래는 이 정도까지 부각되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만, 3년 전 박신회 전 의원이 일명 ‘대국민당 양심선언’을 하며 정계를 은퇴한 후 그 결집력과 영향력이 무섭게 확대됐죠.

-이쯤 되면 차 의원이 회기동 모임에 속해있지 않은 배경도 궁금한데요. 나이로만 따지면 누가 봐도 그쪽이 아닌가요?

-나이와는 관계없고요, 국회에 입성한 시기 때문입니다. 회기동 모임 의원들은 전원 박 전 의원이 대국민당의 중심으로 있던 시절 국회에 입성한 인물들입니다. 한 마디로 박 전 의원을 보고 국회의원이 된 거죠. 차 의원은 시기가 비슷한 것 같지만 살짝 다릅니다. 박 전 의원이 정계를 은퇴하고 현재의 대통령인 박현래 당시 대국민당 원내대표와 김후준 의원이 당의 중심이 됐을 때 국회에 들어왔거든요. 차 의원이 김 의원 라인인 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렇게 라인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불편하다면 불편한 관계일 겁니다.

“회기동 선배들 별로 안 불편한데.”

재차 머리를 털고 난 차유신이 뇌까렸다. 소파에 앉아있던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수건을 내린 차유신이 빤히 우태원을 봤다. 순간적으로 주춤하고 난 그가 목을 꿀꺽했다.

“옷 입으셔야죠. 의원님.”

“그쪽에 있어. 줘봐.”

차유신이 손을 까딱했다. 몸을 튼 우태원이 소파 옆 수납함을 열었다. 새 속옷과 트레이닝 바지를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거벗은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펼쳐진 손바닥에 옷가지를 쥐여 줬다.

허리를 숙여 속옷부터 다리에 끼워 넣었다. 죽 당겨 착의하고, 다음으로 바지를 입었다. 우태원은 앞에서 보고만 있었다. 다 입은 차유신이 곁눈질을 건넸다.

“이제 됐어. 이만 가봐.”

“혼자 주무시려고요.”

“혼자 자지, 그럼 누구랑 자.”

등을 보인 차유신이 침실을 향해 걸었다. 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뒤에서 우태원의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오늘은 그래도 이성이 좀 있으신가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차유신의 눈길이 돌아갔다. 우태원이 무표정으로 입을 뗐다.

“자해 시도한 날에는 보통 잠을 잘 못 주무시더라고요.”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얘기를 해?”

“의원님께서 기억하지 못하는 두 번의 밤 모두 그랬으니까요.”

우태원의 어조가 노곤해졌다.

“그래서 저에게 곁에 있어 달라 하셨습니다.”

차유신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잘근잘근 깨물리는 입술 틈에서 혼잣말이 짓이겨졌다.

진짜 별꼴을 다 보였구나.

“보좌진은 원론적으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의원이 취침하면 그때부터 퇴근이야.”

한숨을 쉰 차유신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뒤통수에 집요한 우태원의 시선이 꽂혔다. 차유신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렁였다. 느른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래도 원하면 곁에 있던가.”

말을 마치자마자 손잡이를 돌렸다. 적당히 문을 밀어낸 뒤 다시 우태원을 봤다. 부쩍 누그러진 그가 보였다.

“그럼 있겠습니다.”

한숨 쉰 차유신이 문을 마저 젖혔다. 끼이, 소리를 내며 안이 훤히 드러났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몸을 집어넣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침대를 찾았다. 털썩 위에 널브러지는 차유신의 곁으로 우태원이 다가왔다. 침대에 눕지는 않고,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 데 그쳤다.

“앉아서 잘 셈이야?”

이불을 덮고, 베개에 머리를 뉜 차유신이 물었다. 우태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잘 셈입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이전에도 그랬으니까요. 이번이 세 번째라 익숙합니다.”

어둠 속에서 연이어 가로젓는 머리통이 보였다. 깜박이던 차유신의 눈이 조금 풀렸다. 여전히 불 켜진 거실 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만 앞을 막아선 우태원 덕분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커다란 암막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밝지도, 아주 어둡지도 않아 잠들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왜 말 안 했지?”

베개에 이마를 지분거리며, 차유신이 물었다. 우태원이 되물었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내가 네 앞에서 두 번이나 그랬던 거.”

“얘기해봐야 좋을 것 없지 않습니까.”

“나라면 물어보겠어. 이유가 궁금하잖아.”

“글쎄요. 저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일말의 망설임 없는 한 마디였다. 시트를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안 궁금하다고?”

“네.”

지극히 심상하게, 우태원이 못을 박았다.

“이미 이유는 알 것 같거든요.”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다 아는 척 그만해. 이 건방진 새끼야.”

“그러면 본인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셔도 됩니다.”

우태원의 상체가 기울었다. 내려온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우태원을 닮아 묵직한 숨결이 느껴졌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어물거리던 입에서 알코올과 치기에 젖은 목소리가 샜다.

“그거야….”

그 일은.

눈앞의 우태원이 호흡을 골랐다. 한층 짙어진 숨결을 타고 또 그 냄새가 났다. 피 냄새. 순간적으로 멍해진 뇌리를 그 지독한 냄새가 점령하듯 채워온다. 차유신의 입이 달싹였다. 알코올보다도 지독한 약물에 취해가는 것처럼, 상념이 흐무러진다.

“예전에.”

아주 오래 전부터.

눈동자가 올라갔다. 먹지라도 댄 듯 검기만 한 시야 안에서 우태원의 눈만이 야행성 동물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 송연해졌다. 빛 없는 세상 속에서 능숙히 제 빛을 찾는 저 동물이 기묘하다.

확실한 건, 사람이 아니다.

“때려 쳐.”

차유신의 입이 다물렸다. 우태원이 갸웃했다. 무시한 채 먹먹한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죽은 듯 숨만 쉬고 있자니, 앞 머리카락이 살며시 간지러웠다. 강아지풀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훑고 난 손이 차유신의 볼을 덮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주무세요.”

미미하게 들려있던 눈꺼풀이 고분고분 내려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의원님께서는 본인을 드러내는 걸 원치 않으시죠.”

흠칫거리는 속눈썹이 베개에 쓸렸다. 그저 미동할 뿐, 들리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볼을 감싼 손이 매우 달콤한 온도를 지니고 있다. 권태로움에 사로잡힌 오감이 이 순간의 영속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하늘거리던 속눈썹이 끝내 축 처졌다.

“그러니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유독 단호한 한 마디가 머리를 울렸다. 꿈틀거리던 입술이 도로 다물렸다. 나른함에 잠식된 차유신의 얼굴을 꿰뚫듯, 어둠 속 인물이 눈길을 박아온다. 차유신은 가만히 자신을 내줬다.

감각조차 잃어버린 볼을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느릿 쓸었다. 또 하나의 혼잣말이 들렸다. 부드러운 웃음기를 지닌 언어였다.

“어차피 나만 알고 있으면 되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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