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클리엔텔리즘
7.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3월.]
선거캠프에 들어서자마자 웅성대는 소리에 귀가 울렸다. 찌푸린 차유신의 곁으로 진무원이 달려왔다.
“야, 유신아. 일 났다.”
“뭐.”
“아이씨…. 그냥 직접 봐.”
진무원이 들고 있던 신문뭉치를 툭 건넸다. 받아든 차유신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타블로이드용 신문지의 1면 상단. 새까만 고딕체 제목이 딱 봐도 자극적이다.
“‘학폭 가해자·살인자’ 차유신 후보 자격 없어”…시민단체, ‘차유신 반대 집회’ 연다
오른쪽 윗부분에 새빨간 신문사 로고가 들어가 있었다. 보자마자 바로 헛웃음이 터졌다. 토요프레스. 국내 최대의 황색언론.
“돌겠다. 이거 예전에 너 국회에 있을 때도 커버 치느라 뒈지는 줄 알았던 건인데, 또 이 지랄이네.”
“시민단체가 어디 시민단체 얘기하는 거야.”
“‘우리의 어머니회’라던데. 처음 들어본다.”
“하긴. 돈 내면 개나 소나 만드는 게 시민단체긴 하지.”
차유신이 시큰둥하게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던졌다. 그대로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굴렸다. 학교폭력 문제, 생소한 이름의 시민단체, 그리고 토요프레스. 느릿하게 흘러가던 시선이 테이블 구석에 치워둔 일간지 지면에 꽂혔다. 상단에 역현구을 대국민당 후보 주한경의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빤히 보던 차유신이 천천히 주억거렸다.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어? 유신아. 그러게 왜 학교 다닐 때 애들을 괴롭혀.”
진무원이 골치 아프다는 양 손가락질을 했다. 차유신이 예사롭게 대꾸했다.
“안 괴롭혔다니까. 나 외고 학생회장 출신이야.”
“학생회장이 제일 씹새끼야. 내 경험상 그래. 타이틀부터 재수가 없잖아.”
진무원이 혀를 내둘렀다. 재차 타블로이드 지면을 본 그가 들으라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네거티브 정공법에 정신이 사나워진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낀 차유신이 물었다.
“출처 어딘지 파악했어?”
“어. 대통합당 오태범. 토요프레스 편집국장하고 서로 형동생 하는 사이라고 하더만.”
“오태범이 왜 나와? 누가 봐도 대국민당 주한경 선배인데.”
차유신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진무원의 이마에 금이 갔다.
“주한경이라고? 말도 안 돼. 그 사람 명색이 장관 출신이야. 본인도 체면이 있지, 이따위 저급한 언론 플레이를 뭐하러….”
“토요프레스가 속한 미디어그룹 회장 아들하고 주한경 선배 딸, 약혼했어. 같이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여름쯤 귀국해서 결혼식 올릴 거야.”
한껏 정돈된 설명에 진무원의 표정이 멍해졌다. 제 목을 주무른 차유신이 말을 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학교폭력에 연루된 적이 없고, 당시 벌어진 동급생 사망사건은 나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명백한 사고야. 목격자도 엄청나게 많아. 학교 복도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다만 과거는 기록하기 나름이니, ‘차유신과 다툼을 벌이다 동급생이 죽었다’는 팩트에 각종 추잡한 스토리텔링을 덧붙이면 저런 식의 헛소리가 완성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신문 기자들 원래 장난 잘 치잖아. 심지어 자기네 오너일가 사돈이 사주한 건이야. 보나 마나 노벨문학상 급으로 지어냈겠지. 다짜고짜 소설만 썼다간 대중들에게 비웃음만 사고 끝날 수 있으니, 듣도 보도 못한 조그마한 시민단체와 결탁해 보여주기식으로 집회 한번 열기로 한 거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주한경 같은 엘리트가 이런 구정물 싸움을 자처했다는 게.”
“엘리트니까 구정물 싸움으로 가는 거야. 역현구을 선거구는 T시티가 있는 사도동을 제외하면 평균 학력이 엄청나게 낮은 편에 속해. 구정물 싸움이 쉽게 먹히는 지역구라는 얘기야. 문제는 내가 미혼에 보유재산도 적은 편이라 그 흔한 다운계약서 혐의도 없고, 자녀나 배우자 관련 비위혐의는 더더욱 없다는 거지. 주한경으로서는 얼마나 애가 타겠어. 그렇다고 이미 무혐의 판결받은 과기정통부 대상 로비게이트 혐의를 무기로 삼기엔, 너무나도 식상하잖아? 그래서 결국 꼬투리 잡은 게 바로 저거.”
차유신이 타블로이드를 가리켰다. 한동안 멈춰있던 진무원이 대뜸 입을 뗐다. 제법 격양된 투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우리도 똑같이 해? 저번에 확보한 주한경 장남 공기업 채용비리 증거, 이번에 풀어?”
“아니. 그런 식으로 가다간 둘 다 죽어.”
손을 내저은 차유신이 턱을 괴었다. 눈길이 반쯤 열린 문 너머 복도에 꽂혔다. 이쪽을 열심히 살펴대는 젊은 커플이 보였다. 캠프 근무자 한 명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 안에 차유신 의원이 있는 거예요? 근무자가 난처해하며 답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여자가 아쉬워했다. 실물 보고 싶었는데, 나 엄청 팬인데. 남자가 여자를 다독이며 이끌었다. 가자, 또 볼 기회 있겠지.
턱을 감싼 차유신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현재까지의 상황은 나쁘지 않다. 주한경을 완전히 고전케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세 곳의 리서치 업체 조사 결과 모두 차유신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한 변수만 없다면 차유신이 무난하게 승리하는 수준이다. 분명히 주한경은 막강한 당선 후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역현구을 이외의 지역구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최소한 역현구을 안에서는 차유신만 한 강자가 없다. T시티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은 공들인 수고를 잊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왕관이다. 오로지 차유신 한 명만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주한경으로 하여금 진흙탕 싸움까지 자처하게 만든 배경이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그냥 하던 일 해.”
생각을 마친 차유신이 진무원의 팔뚝을 쥐었다 놓았다. 진무원이 따졌다.
“네가 뭘 알아서 해.”
“이 정도는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
더 이상 논의하고 싶지 않다는 양 고개를 돌렸다. 저편에 널브러진 캠프용 재킷을 걸치며,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주한경 선배 수준에 한 번 맞춰드리지. 뭐.”
“결국 주 장관 장남 채용비리 터뜨린다는 얘기 아니야?”
“그딴 걸 뭐 하러 해. 귀찮게.”
차유신이 짜증을 냈다. 진무원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재킷 틈을 여미고, 죽 지퍼를 올린 차유신이 날숨을 내쉬었다.
“감성전에는 감성전으로 가야지. 대한민국에서 사람 마음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뭘 것 같아.”
“우는 거지, 뭐. 야. 설마 너 울게?”
진무원이 심각해졌다. 차유신이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나는 즙 짜면 안 돼?”
*
법무법인 원락.
입구 앞에 선 차유신이 고개를 들었다. 팻말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소박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눈에 띄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아주 영리하게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벌떡 일어난 프론트 여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쁘게 발을 뻗은 그녀가 다가왔다.
“아, 의원님. 지금 박 대표님은….”
“네. 저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죠? 그럴 줄 알고 먼저 찾아왔습니다.”
“아니, 그….”
“대표실에 있어요?”
차유신이 얼굴을 기울며 여직원과 눈을 맞췄다. 입을 오므린 그녀가 우물쭈물 끄덕였다.
“네에….”
“감사합니다.”
여직원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대표실 위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이 로펌에 온 것만 다섯 번째였다.
번지르르 윤기가 나는 문 앞에 다다랐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낄낄대며 통화 중인 젊은 남자가 보였다.
“아이고, 형님. 거기는 더 붐비기 전에 가야 해. 지금 가면 딱 좋아. 진짜 우리나라에서 거기만큼 경치 좋은 필드가 없어요. 돈 있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내가 딱 회원권 샀거든? 형님은 시간만 내. 가보면 내가 왜 이렇게 추천하는지 바로 알 거야. 클럽만 들었다 하면 아주 그냥 공이 쫙쫙….”
“박원락.”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은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곁눈질을 한 박원락이 바로 얼어붙었다. 곧 귀신이라도 본 듯 허둥지둥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스케줄 확인해서 문자로 보내줘요. 형님. 어, 어어. 조만간 보자고.”
수화기가 급하게 내려왔다. 과장되게 탄식한 박원락이 데스크에 머리를 박았다.
“하, 진짜. 새끼…. 깜짝 놀랐네.”
“고등학교 동창 보면서 뭘 그렇게 놀라. 누가 보면 내가 너 패고 다니는 줄 알겠다.”
차유신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휘 흘러간 눈길이 테이블 위 액자에 꽂혔다. 셔츠차림의 박원락이 대통령 박현래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청년 변호사 박원락의 공정한 세상 만들기 전국투어’라고 적힌 현수막이 눈에 띈다. 차유신이 실소했다.
“이야. 저걸 아직도 갖고 있네.”
“그게 뭐.”
“박현래 선배 얼굴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웃기고 있네. 일반인 입장에서는 대통령하고 사진 찍은 거 엄청난 영광이야.”
여전히 데스크에 앉은 채로 박원락이 목을 세웠다. 차유신이 혀를 찼다.
“야. 엄밀히 따지면 저거 내 작품이잖아. 박 선배 전주 내려간 김에 너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나온 사진 아니야?”
“그래서. 물어내기라도 하리?”
“됐다.”
외면한 차유신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다짜고짜 한 대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새끼야, 여기 금연이야! 질색하는 박원락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하며 훅 담배연기를 뿜은 차유신이 소파 시트를 두드렸다.
“너 골드버튼 받았다며.”
“무슨 골드버튼.”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너 유튜브 엄청 잘 되는 거 다 알고 왔으니까.”
마른 침을 삼킨 박원락이 시선을 비꼈다. 차유신도 같은 곳을 봤다. 책장 곳곳에 박원락이 들어간 사진 액자가 열 개는 족히 돼 보였다. 어떤 건 고위 공직자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는 사진이고, 어떤 건 유명 연예인과 함께 찍은 봉사활동 사진이었다. 유튜브 한국지사장과의 기념사진도 있었다. 저것만 보면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잘 나가는 셀레브리티도 드물었다.
차유신의 고교 동창 박원락은 유명세로 먹고사는 변호사였다. 제 이름을 건 법무법인을 차리자마자 100일간 전국을 돌며 임금체불이나 가정폭력 등의 피해를 입고도 여건이 되지 않아 법적 대응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을 직접 만난 뒤 무상으로 소송 절차를 해결해주는 캠페인을 열었다. 이 행보가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박원락 자체가 상당한 유명인사가 됐다.
캠페인을 마치자마자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섭외 제의가 쏟아졌고, 몇몇 단체장들은 박원락을 끌어들이며 적극적인 이미지 메이킹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박원락은 단기간에 스타 변호사가 됐고, 그의 법무법인은 덩달아 승승장구했다. 개업한 지 이 년 반 된 사무실에 변호사가 열 명이니, 이 정도면 꽤 번듯한 로펌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난해부터는 본인의 유튜브 채널 ‘박원락의 공정한 TV’로 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불우한 이들에게 무료 법률지원을 해주는 시리즈 영상을 올리며 정의로운 변호사 이미지를 제대로 구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에 감성팔이 학과가 존재한다면, 단연코 주임교수는 박원락이었다.
“오전에 온라인에 뜬 내 뉴스 봤지.”
차유신이 물었다. 박원락이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정확히 뭐를 얘기하는 거야?”
“알면서 물어?”
“내가 네 애인이야?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게.”
박원락이 볼멘소리를 냈다. 반쯤 피운 담배를 빈 종이컵에 처박은 차유신이 갑자기 일어섰다. 박원락이 반사적으로 움츠려졌다. 그대로 데스크 맞은편까지 걸어간 차유신이 그의 손 안에서 마우스를 잡아챘다. 웹브라우저 윗부분에 커서를 가져간 후 ‘뒤로 가기’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스무 번가량의 클릭 끝에 차유신의 최신 뉴스를 검색한 흔적이 쫙 떴다.
“너 내 애인이었냐.”
차유신이 물었다. 박원락이 치를 떨었다.
“와. 이 또라이 새끼…. 집착 봐.”
“검색 열심히 했네. 응? 이 정도면 아주 상황은 자알 꿰고 있겠다.”
“차유신.”
“핵심만 얘기하자. 이 보도들이 팩트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거야. 그쪽에서 먼저 달려들었고, 나는 방어 차 밀었다가 걔가 헛디뎌 계단을 구르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지. 오히려 내 쪽이 피해자야. 거기서 칼 들고 달려들었으니까. 목격자도 CCTV 영상도 있고, 무엇보다 걔네 가족이 인정한 사실이야. 이거 아주 끔찍한 사고사인 거. 사람이 죽은 건 유감이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억울해. 학교 다닐 때 나만큼 성실한 우등생 없었어. 너도 알 것 아니야?”
“미안한데 마지막은 공감 못 하겠다. 학교 때 애들 다 네 눈치 보느라 바빴던 것 몰라? 예민하기 짝이 없는 차유신 맞춰드린다고. 너 담배 피울 때 내가 망봤던 건 셀 수도 없고.”
박원락이 언성을 높였다.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차유신이 박원락을 가리켰다.
“됐고, 내일 쯤 영상 하나 올려.”
“뭐를.”
“학교폭력, 살인. 전부 다 허위 사실이라고. 차유신과 고등학교 때 상당히 친했던 친구다. 단순 사고였는데 말이 와전돼 퍼졌다. 친구로서 통탄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에 눈물 한번 찐하게 짜주고. 어? 너 그거 잘하잖아.”
“야. 내가 그걸 뭐 하러….”
“나 역현구을 돌아가면 T시티 명예 전담변호사 자리 너 주려고 했는데, 필요 없나봐?”
차유신의 윗눈썹이 삐딱해졌다. 박원락의 울대뼈가 꿀렁거렸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그가 득달같이 따졌다.
“진심이야? 나 그 자리 해도 돼?”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 없던 자리 하나 만드는 건데. 너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 좋잖아. 실상은 씨발 놈이지만.”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이 상당히 묘하다.”
박원락이 떨떠름하게 주억거렸다. 차유신이 눈매를 접었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지금처럼 시시껄렁하게 검찰들하고 골프나 치러 다닐 거야, 아니면 오 분 동안 눈물팔이 하고 벤처업계 대스타 한 번 돼볼 거야?”
“나 참. 나를 뭐로 보고….”
박원락이 입을 다셨다. 차유신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적지 않은 정적이 흐른 끝에, 짙은 숨을 뱉은 박원락이 물었다.
“오 분이면 돼?”
차유신이 입매가 길어졌다.
“오 분이면 돼. 대신 보는 사람 심금 제대로 울리고. 너 그거 전문이잖아. 응?”
박원락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명백한 동의로 받아들인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저벅저벅 입구를 향하는 차유신의 뒤에서 문득 박원락의 한 마디가 다가왔다. 어조가 사뭇 진중했다.
“그런데, 유신아. 하나만 묻자.”
차유신이 주춤했다. 뜸을 들인 박원락이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거. 물론 그 새끼가 잘못한 거긴 한데….”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다소 가라앉은 낯으로, 박원락을 주시했다. 물끄러미 마주 보던 박원락이 부쩍 더듬거렸다. 끝내 맥을 잃은 입술이 달라붙고, 자신 없는 음성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아니다. 쓸데없는 얘기 말자.”
박원락이 고개를 저었다. 묵묵하게 일별한 차유신이 마저 발을 옮겼다. 문손잡이를 잡은 뒤 확 열어젖히고는 바깥으로 몸을 뺐다. 닫혀가는 문틈으로 착잡함에 젖은 박원락의 얼굴이 비쳤다. 탁. 끝내 사라졌다.
*
정동에 있는 한식당 자로초에 도착한 건 오후 3시였다. 식사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시간대였다. 당연히 복도에 사람은 없었다. 차유신을 알아본 직원이 신속하게 그를 안내했다. 걸어가는 차유신의 뒤를 김운열이 따랐다.
가장 안쪽 룸 앞에 다다른 직원이 손수 문을 열어줬다. 들어선 차유신은 구십 도 각도로 몸부터 굽었다. 저편에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 들어온 김운열이 문을 닫았다.
“훤칠해졌네.”
점잖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차분하게 발을 뻗은 차유신이 테이블을 향해 나아갔다. 꼿꼿하게 앉아있는 중년 남성을 힐긋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단조로운 대꾸가 건네졌다.
“원래 훤칠했습니다.”
“신진화당이 잘 맞는 모양이다. 대국민당에 있을 때는 워낙 무표정해 정이 없다는 인상을 줬는데, 지금은 꽤 사람 같다. 그러니 더 잘생겨 보이는 거겠지.”
손을 뻗은 주한경이 찻주전자를 들었다. 옆에 있던 전 주한경 의원실 보좌진이 서둘러 잔을 밀어줬다. 백색 도자기 잔 안에 찻물 채워지는 소리가 룸을 메웠다. 차유신의 옆에 착석한 김운열이 연신 어려운 듯 주한경을 힐끔거렸다. 차유신은 한숨을 쉬었다. 김운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주한경은 한때 과방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1세대 IT기업 중 하나인 주일소프트를 창업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과기정통부 장관을 지냈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단호하되 빈틈없는 논리로 모든 회의를 압도했다. 신념이 강한 성격이라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인물에게는 ‘선배’ 소리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초선 때부터 많은 중진의원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럼에도 대국민당 안에서의 입지가 확고했다. 지나치게 똑똑한 인물이었다. 과방위 회의에서 그의 의견에 토를 다는 의원이 드물었다. 일부 야당 의원이 반박할라치면 아주 명쾌한 논리로 단박에 상대방의 콧대를 꺾곤 했다. 더 이상 발언하는 것조차 억지가 되는 수준으로 만드는 일이 잦았다. 심지가 지독하게 곧은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은 있어도, 주한경이 뛰어난 과방위 위원이라는 사실에 토를 다는 대국민당 의원은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주한경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차유신은 심상하게 응수했다.
“토요프레스에 올라온 저에 대한 공격성 기사는 잘 봤습니다.”
“그 얘기가 왜 나와? 나와 관계없어.”
“세경이 잘 지내죠? 원래도 똑똑하고 예쁜 친구였는데, 좋은 짝을 만나 더 훌륭해졌다 들었습니다. 결혼 앞두고 미국에서 같이 로스쿨 다니는 중이라면서요.”
차유신이 손을 옮겼다. 찻주전자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우고는, 앞에 있는 잔에 내용물을 따랐다. 졸졸 흐르는 소리 틈바구니로 언짢게 숨 몰아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차유신은 모른 척 적당히 따르고 난 주전자를 내렸다. 딱, 하는 마찰음과 함께 룸이 고요해졌다.
“선배를 이해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셨겠죠. 국회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통찰력이 뛰어나고, 국민에 해가 되는 주장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분이지만 대국민당에서 은근히 편이 없었던 건 사실이죠. 워낙 성미가 올곧으시잖습니까. 그러다 지난 총선 때 믿고 출마한 지역에서 신진화당에 참패하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당내 적이 선배 눈에 띄기 시작한 거죠. 불안하셨을 겁니다. 선배가 아는 선배는 그 정도로 인복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갈수록 실은 그랬다는 게 눈에 들어오니 초조하셨을 겁니다.”
“차유신.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탕!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차유신은 개의치 않고 말을 덧붙였다.
“한 번의 실패 이후 새롭게 얻은 기회. 역현구을. 김후준 선배도 심사숙고해서 내준 지역구로 압니다. 이번에도 패배하면 선배의 면이 서지 않으니, 유력 지역구는 아니어도 최소한 선배 입장에서 유리한 곳을 내준 거죠. IT 스타트업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 과기정통부 장관 출신 후보의 출마. 누가 봐도 딱 떨어지는 조합 아닙니까. 게다가 역현구을은 T시티가 조성된 후 꽤나 주목받는 지역으로 떠올랐으니, 선배로서도 딱히 아쉬울 게 없는 배치죠.”
주한경의 미간이 점점 좁혀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턱이 보였다. 다 꿴 듯 읊고 있는 국회 후배 앞에서 느껴지는 수치심이, 차유신에게 고스란히 와 닿았다. 차유신은 잔인할 정도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나왔으니까요. 역현T시티를 조성한 장본인이 출마하면서 선배에게 새 위기가 닥친 거죠. 차라리 상대방이 오래도록 그 지역에 뼈를 묻은 중진이었다면 박탈감이라도 덜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니죠. 저는 선배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리고, 심지어 초선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한 채 당에서 버려졌던 인물 아닙니까. 무엇보다. 저는 주일소프트처럼 대단한 회사를 차린 적이 없습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들렸다. 주한경이 거칠게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잠시 다물렸던 차유신의 입이 결연하게 열렸다. 쐐기를 박는 한 마디가 나왔다.
“그리고 그 점이 선배 스스로를 괴물이 되게 만들었고요.”
“차유신!”
“기사 잘 봤고, 덕분에 많은 걸 느꼈습니다. 반성했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반성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한 그 정도 거짓말을 해주는 게 예의겠죠.”
차유신이 생각을 정리하듯 양 손가락을 마주 깍지 꼈다. 이내 노곤하게 뇌까렸다.
“안타깝게도 선배의 공격 카드는 한낱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선배께서도 잘 아시겠죠. 어젯밤 유명 변호사 박원락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토요프레스에서 제시한 제 폭행 및 살인 혐의를 낱낱이 부정하는 내용의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아, 그 친구 제 고교 동창입니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사실이죠. 당연히 시청자도 알고요. 중요한 건 그런 사사로운 배경이 아닙니다. 그 친구는 영상 말미에서 ‘왜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제 친구가 출마를 하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그 말을 하면서 많이 침울해했습니다.”
“그거야 어차피 쇼…!”
“그 친구가 직접적으로 답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중은 이미 그걸 압니다. 갈수록 초기의 모습을 잃어가는 역현T시티를 살리고자 제가 출사표를 냈다는 걸. 저의 가장 큰 선거 공약이며, 혀가 닳도록 공표한 내용입니다. 청년들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역현T시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T시티가 예전 같지 않다. 나는 이번 출마를 통해 T시티를 다시 꿈의 도시로 되돌리려 한다. T시티 청년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내용이죠.”
차유신이 목을 곧추세웠다. 점점 힘이 실리는 주한경의 교근이 보였다. 더듬더듬 열리던 그의 입이 끝내 다물렸다. 들끓던 분노감이 옅어지고, 주름진 면상이 수심에 젖어갔다. 양손을 털썩 무릎에 앉힌 주한경이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차유신에게 양보하는 것을 택했다.
못 들은 척 제 할 말만 쏟아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기다리는 쪽에 선다. 상황 자체가 여전히 언짢긴 하지만, 최소한 차유신의 지금 언어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차유신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 사람은 인내를 아는 사람이다. 그건 빛나진 않아도 매우 무게감이 있는 가치였다.
여의도 안에는 주한경과 달리 인내를 포기한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 후안무치가 오히려 그들의 무기가 되곤 했다. 여의도에선 수치를 모를수록 오랫동안 버틴다.
“그 영상 조회 수가 여섯 시간 만에 100만 회를 기록했습니다. 덕분에 지금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는 제 이름이 올라와 있죠. SNS에서는 제 지지자들이 ‘차유신 무죄’ 태그를 건 게시글을 경쟁적으로 올리고 있고요. 이게 현재의 상황입니다.”
차유신이 말을 맺었다. 주한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못 공허함에 물든 그의 낯빛이 느껴졌다. 차유신은 외면한 채 김운열을 향해 손짓을 했다. 김운열이 빠르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린 뒤 한 앱에 들어갔다. 가장 위에 있는 음성 파일을 클릭하고,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뒀다. 희미한 잡음와 함께 단조로운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한경을 역현구을에 배치한 건 딱 그 사람의 그릇을 고려한 선택이었어. 여의도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구가 어디야? 특정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지역구지. 대한민국 지역구의 90% 이상은 모두 지역색이라는 걸 갖고 있어. 일시적으로 점유한 정당이 뒤바뀔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지지정당이 정해져 있다는 거야. 그런데 역현구을은 절대로 충성도를 기대할 수 없는 지역이야. 온갖 뜨내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는 지역색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생각해 봐. 내가 애초에 왜 새파란 신인이었던 차유신을 거기에 꽂았겠어? 역현구을은 우리 것이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인 곳이거든. 그러니 꽂은 거야. 차유신 자체가 버리는 카드고, 기대감이 없었으니까. 주한경도 같은 맥락이야. 기대감이 없어. 당에서 주한경에게 기대하는 건 말 잘하는 스피커야. 딱 거기까지야. 저 혼자만 바르고 잘났다는 인간에게 뭘 기대해? 그러니 역현을이 딱 주한경의 자리인 거지.
말을 쉰 김후준이 쯧, 소리를 냈다. 텁지근한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주한경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나. 뭐, IT 개발자 출신이니 이해는 해. 그쪽 친구들이 좀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러니 국회에 거기 사람들이 잘 없는 거겠지.
-그렇군요.
-따지고 보면 주한경은 데리고 있어도 문제야. 차유신처럼 새파란 애들은 고분고분한 맛이라도 있는데, 주한경처럼 나이 많은 독불장군은 말도 잘 안 듣거든. 그러니 필요할 때 딱 쓰고, 기회 되면 적당히 버려야지. 이번에 주한경이 역현을을 못 갖고 와도 딱히 상관은 없어. 그걸 계기로 아예 들어내면 그만이거든. 그래도 되는 카드야. 막말로 VIP*가 당 모임하면서 주한경 푸시해 보라는 얘기 한 번이라도 한 적 있어? 아니, 주한경의 이름 자체를 꺼낸 적이 없지. 그게 지금 대국민당 내 주한경의 입지야. (*대통령)
음성파일이 끝났다. 팔을 뻗은 차유신이 스마트폰을 옆으로 밀었다. 받아든 김운열이 신속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인 차유신이 주한경을 응시했다. 단정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선배께서도 대략은 눈치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굳이 들려드리는 건, 김후준 선배의 장난질에 더 이상 선배의 위신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루머 사태와 관련해 선배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선배는 제 입장에서 아주 훌륭한 벤처업계 선구자고, 국회에서도 늘 바른 말만 해온 모범적인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답지 않은 일을 딱 한 번 하신 것에 대해서는, 눈 감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이것이 선배에 대한 제 처음이자 마지막 예우입니다.”
차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주한경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입술 틈으로 찻물을 흘려 넣는 그의 낯에서 수만 가지 상념이 비쳤다. 정확히 무어라 특정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기류였다. 다만 꽤나 적지 않은 시간 주시한 끝에야, 그나마 한 가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서글픔.
“혹시나 해서 한 말씀 드립니다. 신진화당에서 추진해 온 과기정통부 산하 한국IT벤처협회 설립이 올해 말 마무리됩니다. 대한민국 IT업계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협회가 될 겁니다. 초대 회장 후보를 두고 전문위원 다수가 회의를 진행했는데, 팔 할이 선배 성함을 거론했다 합니다. 선배께서 동의만 하시면 흔쾌히 협회에서는 선배를 모실 겁니다. 제 사견이지만, 선배께서는 국회보다 그 자리가 훨씬 더 어울립니다. 참고로 해당 협회장은 정부부처 차관급의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입을 다문 차유신이 김운열에게 눈짓을 보냈다. 끄덕인 김운열이 몸을 일으켰다. 차유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가 밀려났다. 먼저 걷는 차유신을 따라 김운열이 발을 옮겼다. 저벅저벅 문 앞에 다다른 차유신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열어젖히려는 찰나,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다가왔다.
“한 가지만 묻자.”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반쯤 손에 덮여 그늘진 주한경의 낯이 보였다.
“김후준 녹취 파일, 어디서 구했어.”
차유신이 다시 문 쪽에 눈길을 뒀다. 그대로 손잡이를 당겨 연 뒤, 발을 뻗으며 읊조렸다.
“키우던 개한테 목줄 하나 걸었습니다. 허튼짓 못 하게 제가 좀 감시해야 하는 입장이라서요.”
*
자로초에서 나오자마자 김운열을 캠프로 돌려보내고, 잠시 그 뒤에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국회의원 시절 종종 식사를 마친 뒤 산책 삼아 거닐던 곳인데, 오랜만에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유신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알아보긴 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 지나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찰칵거리며 몰래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차유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 걷기만 했다. 국회의원은 고작 3년 7개월밖에 하지 않았는데, 이런 삶은 아마도 37년간 이어질 것이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스스로가 피곤했다. 차유신은 모든 상황에 적응하는 연습을 한다.
짧은 경험만으로 차유신은 3년 7개월짜리 직함에 철저히 끼워 맞춰지는 법을 알았다. 옷을 입는 것도,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숨을 쉬는 것조차. 차유신은 그렇게 국회의원이 됐고, 지금은 전 국회의원으로 산다.
단 하루를 국회의사당에서 살아도 여의도 사람이 된다. 양심선언 후 은퇴한, 한때 대국민당 핵심 의원이었던 박신회는 차유신의 당선 직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 차유신은 갸웃했다. 그렇게 이 자리가 달콤합니까. 박신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억울해서 못 놓아. 아예 가져본 적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번 손에 쥔 걸 어떻게 잃어. 내 것을 뺏기고 싶지 않아 아득바득 버티는 거야. 전부 다 저버릴 때까지. 사람도, 명예도, 신념도. 이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박이야.
그래도 넌 하고 싶겠지. 원래 국회의원 배지는 주인 스스로 떼는 게 아니야. 풍파에 녹이 슬어 어느 날 뚝 떨어지는 거지.
지잉.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느릿느릿 꺼낸 차유신이 액정을 내려다봤다. 이름은 없고, 숫자만 적혀있다. 다만 바로 발신지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른 뒤 귓가에 가져갔다. 예사로운 한 마디가 나왔다.
“어. 얘기해.”
너머에서는 답이 없었다. 차유신의 눈이 굴러갔다. 다시 한번 액정에 찍힌 숫자를 확인했다. 분명히 번호는 맞다. 상대방과 이 번호로 통화한 것이 열 번은 족히 된다. 그런데 왜.
지금은 상대방이 그가 아닌 것 같지.
-이게 선배 내통용 번호인가 보네요.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차유신의 목울대가 덜컥거렸다. 핸드폰을 쥔 손가락이 빠르게 움츠려졌다. 입 안에서 녹진한 타액이 주욱 미끄러졌다.
우태원.
“어떻….”
-가끔 확인을 해요. 모두가 자리를 비웠을 때. 우리 보좌진들이 사무실 전화기로 누구와 통화들을 하는지 궁금해서. 그거 알아요? 등잔 밑이 어두운 걸 영리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 거. ‘설마 사무실 전화기로 프락치 짓을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니, 대놓고 그 허를 찌르는 거죠. 일부러 새로운 핸드폰을 사자니 남에게 들키면 곤란해지고, 요즘엔 공중전화도 잘 없고. 그렇다고 개인 핸드폰을 쓸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아예 본거지 도구를 쓰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우태원이 저소했다. 차유신은 말없이 입만 오므렸다. 저 위 언덕배기의 능선을 타고 새까맣고 커다란 개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빳빳한 털에서 반질거리는 윤기가 흘렀다. 묘하게 근엄한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개가 내려온다. 그 움직임에 따라 지나가던 인파가 갈라진다. 그 멸시를 즐기듯 개는 계속해서 까만 발을 내민다.
개의 영역이 점점 넓어진다.
-우리 중에 프락치가 있었네요. 방금 알았습니다.
우태원이 재미있다는 양 웃었다. 차유신이 숨을 죽였다. 잘근거리던 입술이 열렸다.
“알면, 뭐 어쩔 거야.”
-알면 아는 거죠.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 전화기는 보좌진들이 공용으로 쓰고 있어요. 제가 가끔 쓰기도 하고. 워낙 개나 소나 쓰는 것이다 보니, 정확히 누가 선배하고 내통하는지는 모르게 됐네요.
우태원이 피식거렸다. 어느덧 검은 개는 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코앞에서 멈춘 개가 차유신을 관찰하듯 기웃거렸다.
목구멍으로 묵직한 숨이 흘러들었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됐지만,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말라붙은 성대가 꾸물거렸다. 한껏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안정적으로 입을 뗐다.
“착각하지 마. 네 쪽 보좌진과 통화를 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용도는 아니었어. 뭐하면 내일 보좌진 소집해서….”
-연기하지 마요. 선배는 나 못 속이니까.
우태원의 톤이 낮아졌다. 눈앞의 개가 시퍼렇게 눈을 치떴다. 차유신의 손목이 움칠했다. 긴장에 사로잡힌 입술이 가쁘게 열렸다.
“우태원. 내가 뭐 하러.”
-그냥 프락치 하나 꽂았다고 해주면 안 돼요? 설령 아니어도 그랬다고 해줘요.
우태원이 혼연하게 뇌까렸다. 차유신이 눈을 구겼다.
“그게 무슨 얘기야.”
-난 좋거든요. 선배가 나 감시하는 거.
“우태원.”
-아. 주한경 선배는 잘 만났어요?
대뜸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의 어금니가 깨물렸다.
“야. 우태원.”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냥 찍은 건데. 국회 출신 선후배끼리 만날 수도 있죠, 뭐.
우태원이 빙글거렸다. 차유신의 낯이 점점 식었다.
“너 내 주변에 누구 심었어.”
-선배가 맞혀 봐요. 나도 지금부터 맞혀 볼 생각이니까.
“이 상황이 재미있어?”
-네. 전 재미있어요. 사실 이거 선배한테 배운 거예요. 고마워요. 덕분에 재미있게 됐잖아.
다정하기 짝이 없는 언어였다. 차유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짓씹은 이빨 틈으로 싸늘한 욕설이 샜다.
“너 아주 나한테서 좆같은 것만 배웠구나.”
우태원이 나긋나긋 속삭였다.
-운명이었다고 해줘요.
그의 목소리에서 울림이 짙어졌다.
-선배와 내가요.
눈시울이 절로 미동했다. 자꾸만 목이 탔다. 차유신은 본능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봤자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숨통이 꽉 조여 온다.
숨 쉴 주도권조차 빼앗긴 기분.
-선배와 나는 닮은 게 많아요. 그래서 그래요.
유독 선명한 음성에 귓바퀴가 곤두섰다. 목덜미의 핏기가 싹 가셨다. 덜컥거리다 들린 구둣발이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위협으로 받아들인 개가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허공을 바라보던 차유신이 이마를 짚었다.
일단은 후퇴. 다만 주인이 누군지는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어디 한번 네 좆대로 해봐.”
빈정거리는 한 마디가 덧붙었다.
“어차피 나에게 안 되겠지만.”
우태원이 흡족하게 응수했다.
-짜릿한 얘기네요.
통화가 끊겼다. 적막에 휘감긴 핸드폰을 일별한 뒤 주머니에 넣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적해진 돌담길을 휘 둘러보다, 저 먼 곳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대형신문사 건물에 붙어있는 전광판이 실시간 속보를 헤드라인에 띄우고 있었다.
「‘차유신 학폭·살인 보도’ 토요프레스, “오보였다” 인정…홈페이지에 사과문 게재」
하. 허망한 호흡이 번졌다. 멍하니 서 있기만 하다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맨살을 손가락으로 비벼가며, 들끓는 상념을 가까스로 정리했다.
일단 한 고비 넘겼다.
우태원 보좌진 중 한 명과 손을 잡았다. 우태원은 그 자체로 활용 가치가 높다. 김후준의 측근으로서 만남이 잦은 것은 그중 하나다. 사석에서 김후준과 우태원이 나눈 대화를 녹취한 후 주한경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내용을 뽑아 본인에게 직접 들려줬다.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다음은 모를 일이다.
전광판에 걸려있던 시선이 스르르 비껴났다. 정처 없이 이동한 끝에 골목 한 구석에 처박혔다. 가만히 움직이던 눈동자가 전율했다. 뒤꿈치가 소스라치듯 짓밟혔다.
제 팔을 물어뜯어 뻘건 살을 드러낸 개가 차유신을 보며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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