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3월.]
눈앞의 문이 벌컥 열렸다.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나오던 신동현 전 신진화당 의원이 멈칫했다. 두 사람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나 참.”
신동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곧 비아냥거리는 언어를 흘렸다.
“별 애송이 새끼 하나 때문에 판 다 뒤집히게 생겼네.”
신동현이 발을 내밀었다. 성큼성큼 지나쳐가는 신동현을 주시하던 차유신의 입이 떨어졌다.
“신동현 선배님.”
신동현이 또 멈췄다. 복도 한가운데 선 그가 차유신을 돌아봤다. 차유신이 높낮이 없는 음성을 꺼냈다.
“설령 제가 이 판에 나오지 않아 선배께서 원만한 공천을 받으셨다 해도, 해당 지역구에서는 선출 못 됐을 겁니다.”
“뭐?”
신동현이 버럭 했다. 유유히 시선을 비낀 차유신이 말을 이었다.
“선배께서 대국민당 주한경 선배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20년 전 벤처 버블 때 주일소프트 창업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스타트업이 밀집해 있는 역현구을에서, 주한경은 선배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야. 너 말하는 싸가지가 그게 뭐야!”
신동현이 부들거렸다.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부정은 못 하시네요.”
돌연 아까의 문이 열렸다. 바깥으로 나선 보좌진이 차유신과 신동현을 번갈아 봤다. 이내 차유신을 향해 공손히 몸을 굽었다.
“들어오십시오. 차 의원님.”
바로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복도 쪽을 일별했다. 붉으락푸르락한 신동현의 낯이 보였다. 무시한 채 마저 몸을 밀어 넣었다. 탁. 문이 닫혔다.
“역현구을 마지막 후보가 오셨네.”
회의실 가장 안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느긋하게 시선을 건넸다. 공천관리위원장 정진원. 차유신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착석했다. 차유신이 앉는 걸 본 정진원이 고개를 돌렸다. 신인대 대표를 비롯한 몇몇 신진화당 의원들이 그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몸을 일으킨 신인대가 말했다.
“정 선배 제외한 분들은 잠시 자리 비워주십시오. 정 선배 요청입니다.”
순간적으로 난색을 비치던 의원들이 끝내 일어섰다. 당내 핵심의원인 정진원의 뜻은 곧 당의 뜻이었다. 일사불란하게 몸을 옮기는 의원들을 본 보좌진이 문을 열어줬다. 대여섯 명의 의원들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보좌진이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넓은 회의실 안에 차유신과 신인대, 정진원만 남았다.
“담배?”
신인대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차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담배 좋아하지 않나.”
“좋아하지만, 지금은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차유신이 눈매를 접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여유 부릴 정도로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신인대가 얼핏 웃었다. 정진원을 힐긋한 그가 차유신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보셨죠? 저놈이 저렇습니다.”
정진원은 무덤덤하게 등줄기만 곧추세웠다. 테이블을 더듬던 그의 손이 펜을 잡았다. 밑에 새하얀 종이가 깔려있었다. 가장 윗부분에 고딕체로 ‘신진화당 공천관리위원회 심사보고서’라 적혀있었지만, 어차피 그런 건 허울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페이퍼로 결정되는 공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는 이미 위원장인 정진원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신진화당 당사는 처음인가?”
정진원이 물었다. 차유신은 도리질을 쳤다.
“온 적 있습니다. 오 년 전에.”
“선출된 해에?”
“네. 역현T시티 설립안 관련해 예산 낭비라며 반발한 일부 신진화당 선배들을 설득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아, 기억나네. 혼자서 왔지?”
정진원이 주억거렸다. 차유신은 차분히 대꾸했다.
“네.”
“조영현이하고 이선호… 하여간 차 의원 별로 안 좋아하는 우리 쪽 과방위 위원들이 몇 명 있었지. 그땐 왜 그랬나 몰라.”
“이해합니다. 서울시와 과기정통부에서 이례적으로 야당 의원과 손잡고 추진한 게 역현T시티 조성 프로젝트입니다. 당시 여당인 신진화당 입장에선 거슬렸겠죠.”
“뭐, 나도 께름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정진원이 한숨을 쉬었다. 먼 곳에 시선을 둔 그가 말을 덧붙였다.
“차 의원 계획이 옳았던 걸 어떻게 해. 이미 서울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환락가인 사도동을 공터로 만들어뒀는데, 옆에 붙은 역현구갑이 워낙 우범지대다 보니 건설사들이 죄다 몸을 사려 재개발 일정이 자꾸 늦춰지고. 그 와중에 차 의원이 역현T시티 조성안 들고 나오면서 건설사들도 솔깃하기 시작한 거잖아. 타이밍이 좋았고, 차 의원 아이디어가 좋았으니 당시 서울시장도 이거다 싶었던 거겠지.”
턱을 괸 정진원의 음성이 낮아졌다.
“따지고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상황이긴 한데… 내 입장에서는 기묘하다고 생각되는 구석이 있었어.”
이동한 시선이 차유신에게 꽂혔다. 차유신의 낯이 식었다. 침묵에 휩싸인 약 몇 초, 차유신은 숨통이 조여 오는 걸 느꼈다. 탁한 한 마디가 두 사람의 틈을 메웠다.
“당시 서울시장과 과기정통부 장관은 과거 같은 시기에 함께 과방위 위원을 지낸 고향 선후배지간이야. 헌데 그 시절 두 사람이 공동 추진해 설립한 과기정통부 산하 연구소 안에서 백억 원대 자금 유용이 발생했다는 정황이 수년이 흘러서야 보고된 바 있어. 혐의자는 당연히 설립한 두 의원이고. 검찰에서 직접 내사에 나서기까지 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구소에 있어야 할 관련 문건이 통째로 유실되는 바람에 결국 안에서 유야무야 덮어버렸지. 그사이 바뀐 연구소장은 BH* 라인에 속하는 한 국립대 교수였는데, 보고서가 사라졌다는 게 공론화되면 자신과 자신을 꽂은 정부에게 책임이 돌아갈 거라 판단한 모양이야. 보고를 받은 BH 역시 골치가 아파지는 게 싫어 더 이상 들쑤시지 말라고 검찰 쪽을 세게 압박했고. 그래서 평화롭게 사건이 일단락된 거지.” (*청와대)
정진원의 입 안에서 길게 혀가 굴러갔다. 차유신의 낯빛은 그대로였다.
“공교롭게도 해당 연구소는 차 의원이 과방위를 맡자마자 유독 공을 들여 각종 지원을 실시한 곳인데, 설립한 두 의원을 제외하고 해당 연구소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은 차 의원이 처음이었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아? 서울시장과 과기정통부 장관이 실제로 해당 연구소를 통해 자금 유용을 벌였다 가정하자고. 이후 유령기관이 되다시피 한 연구소를, 수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난 차유신이 이례적으로 집중 지원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의원의 자금 유용 혐의가 검찰에 보고 됐다. 막상 수사에 들어가려 하니, 관련 내부 문건이 통째로 사라졌다. 결국 흐지부지돼버렸다….”
“두 분은 저와 같은 대학, 같은 과 선배입니다.”
차유신의 입에서 또박또박한 언어가 새어 나왔다. 정진원의 한쪽 눈썹이 비틀렸다.
“대한민국에서 학연이 중요하긴 하죠.”
부쩍 말라붙은 어조로, 차유신이 못을 박았다.
“그런 걸로 합시다.”
정진원이 실소했다. 재미있다는 양 테이블을 건드린 그가 탄식 섞인 혼잣말을 했다.
“현직 장관과 서울시장 비리 혐의를 검찰에 흘리고, 정작 검찰에서 나서려 하자 증거물을 말소하는 대가로 제 목표 달성에 두 사람을 끌어들이고, 합의가 끝나자 문제의 연구소장과 결탁해 관련 문건을 통째로 날려버려 상황을 원점으로 만드는 대범한 놈을 자기편으로 두면.”
그가 재차 끄덕였다.
“우리한테야 좋겠지.”
차유신의 속눈썹이 가지런해졌다. 상체를 바로 한 정진원이 팔짱을 꼈다. 옆에 있던 신인대가 흥미로운 눈으로 정진원과 차유신을 번갈아 봤다.
“어차피 공천 면접이 쇼라는 건 차 의원이 더 잘 알 거고.”
정진원의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하얀 페이퍼를 죽 옆으로 밀어내고는, 차유신에게 시선을 박았다. 한껏 정돈된 목소리가 귀를 덮쳤다.
“우리 당에서 차 의원을 스카웃한 이유는 하나야. 역현구을을 가져와야 하는데, 기존 우리 후보 중에는 대국민당 주한경을 이길만한 사람이 없어. 그래서 내부적으로 회의를 하고, 외부 전문가 통해 자문도 구했지. 결론은 하나더라고. 무조건 차유신이다. 차유신은 역현T시티의 창조주이며, 역현구을에 아주 두터운 콘크리트 지지층을 지닌 인물이다. 주한경을 꺾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빠른 카드다. 그래서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정진원이 숨을 골랐다. 차유신은 잠자코 마른 침을 삼켰다. 정진원의 눈이 엄하게 빛났다.
“다른 건 필요 없어. 이것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왜 우리와 손잡기로 한 거야.”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떨어졌다. 정진원이 또박또박 따졌다.
“1년 3개월 동안 여의도 밖에서 조용히 지내다 신인대 의원 제안 하나에 바로 넘어왔어. 솔직히 충동적으로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아. 당연하게 내 입장에선 걱정이 돼. 김후준 때문인가? 내쳐진 게 억울해서?”
“아닙니다.”
차유신이 칼 같이 부정했다. 무릎 위의 손가락이 곤두섰다. 최대한 올곧게 눈꺼풀을 가눈 채, 가라앉은 언어를 건넸다.
“제가 개를 하나 키웠는데.”
정진원의 눈가가 움찔했다. 차유신은 예사롭게 말을 이었다.
“그 개가 저를 물어뜯었습니다. 그게 상당히 허망하더라고요.”
“우태원이 차유신의 개라….”
정진원이 헛헛하게 뇌까렸다. 그의 입매가 의미심장하게 비뚤었다.
“그래서, 자네도 똑같이 하려고?”
“아니요.”
“그러면.”
“저는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정진원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제가 왜 물어 뜯겼는지. 혹시나 제가 잘못한 게 있는지, 그렇다면 제가 뭘 고쳐야 하는지. 거기서부터 출발해, 저에게 아직 남은 역현을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갈 겁니다. 이건 김후준이나 대국민당에 맞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로지 저 스스로를 위해, 과거의 저 자신과 투쟁하는 일입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정진원이 펜을 쥐었다. 이내 저편의 페이퍼에 서걱거리며 뭔가를 적었다. 지켜보던 신인대가 탄식했다. 차유신은 멀찍이서 종이 위의 글자들을 읽었다.
역현을 / 차유신 / 단수 / 확정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펜을 거둔 정진원이 차유신을 봤다. 차유신의 발꿈치에 꾹 힘이 실렸다.
“역현구을은 그렇다 치고, 그 물어뜯은 개는 어찌할 셈이야.”
정진원이 눈빛이 무거워졌다. 차유신은 웃지도 않고 답했다.
“개집으로 돌려보내야죠. 타고난 자리가 거기였으니.”
*
-역현구을에 돌아왔습니다. 기호 2번 차유신.
떠들썩한 선거용 음악이 머리를 울렸다. 차유신은 부스 차량 뒤편으로 갔다. 통화를 하던 한수현이 생수병을 건네줬다. 뚜껑을 오픈한 차유신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며 한수현을 살폈다. 잔뜩 화가 난 그녀가 보였다.
“차유신 의원이라고요. 앞이 됐든 뒤가 됐든 5분만 시간 비워줘요. 그거 웬만한 역현T시티 입주사 CEO들 다 참석하는 행사라면서. 그럼 더 차 의원이 가야 하는 것 아니야? 아, 됐고. 앞 시간대가 좋은지 뒤 시간대가 좋은지 그것만 확정해서 회신해요. 끊습니다.”
명료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한수현이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차유신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무 고압적으로 나가는 것 아니야? 그러다 대놓고 보이콧 당해.”
“설마 그러겠어? T시티 만든 사람이 누군데, 아주 그냥 다들 군기가 빠졌어. 이럴 때 일수록 제대로 조져놔야지.”
한수현이 허리를 짚었다. 허탈하게 웃고 만 차유신이 재차 냉수를 들이켰다. 한 통을 거의 다 비웠을 무렵, 저편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단호하게 저지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캠프에 일시적으로 머물기로 한 신인대 의원실 김운열이었다.
“형님. 보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요.”
“누구.”
차유신이 빈 통을 구겨 쥐며 물었다. 저쪽을 힐긋한 김운열이 답했다.
“AI 스타트업 컨리드 CEO라던데….”
“유신이 형!”
돌연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차유신의 손에서 생수병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몸이 바로 섰다.
“윤일아.”
막아서는 이들을 비집고 뛰어온 남자가 차유신의 앞에서 헐떡였다. 김운열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 든 남자가 다짜고짜 차유신을 붙들었다.
“형. 진짜 보고 싶었어요.”
“그러게. 오랜만이다. 그나저나 너 실리콘밸리 간 것 아니었어?”
“아. 저 지난주에 귀국했어요. 성문이는 계속 있을 거지만.”
“넌 왜 왔는데.”
“지분 매각하고 빠지기로 했거든요.”
“왜? 컨리드 잘 나가잖아.”
차유신이 눈을 찡그렸다. 남자가 도리질을 쳤다.
“인수한 투자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애초에 컨리드를 그렇게 진지하게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지분 팔고 좀 쉬기로 했어요.”
“하기야, 너는 나이 어리니 그래도 상관없겠지.”
차유신이 이해한다는 듯 읊조렸다. 그러면서 속으로 그의 나이를 가늠했다. 26이었던가, 27이었던가.
컨리드 CEO 성윤일은 차유신이 대국민당 청년산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곳곳에서 강연을 하다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어린 대학생이었는데, 차유신이 국회의원이 됐을 무렵 어엿한 스타트업 CEO가 되어있었다. 같은 대학 친구와 무기한 휴학을 하고 공동 창업에 나선 경우였다.
핵심 사업모델은 꽤나 수준 높은 OCR 기술이었다. 처음부터 모듈화하기 쉽게 개발했기 때문에 대기업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역현T시티 1차 입주 기업으로 선정됐을 때까지만 해도 국내 일부 기업에 기술을 납품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해외와도 거래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다 이 년 전 실리콘밸리의 한 대형 IT기업에 인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26이면 아주 어린 건 아니고요.”
성윤일이 조곤조곤 말했다. 차유신이 가벼운 고갯짓을 했다.
“아.”
성윤일은 물끄러미 차유신을 보고만 있었다. 차유신이 갸웃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야.”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저 이외에도 T시티 CEO 오십 명 정도가 다 형 돕고 싶다고 했어요.”
차유신이 눈살을 구겼다.
“고마운 얘기이긴 하지만… 갑자기?”
“네.”
“바쁘잖아.”
“저는 안 바빠요.”
“아니, 너는 그렇다 치고… 다른 CEO들은 왜. 근무하느라 바쁜 사람들 아니야?”
차유신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성윤일이 불현듯 입매를 굳혔다. 자못 숙연한 기색이었다. 차유신의 미간이 움칠거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형.”
성윤일이 버겁게 입을 뗐다. 차유신은 여전히 영문 모르는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긴 숨을 고른 성윤일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곧 절박한 한 마디를 꺼냈다.
“도와드리게 해주세요. 저희도 다 필요해서 이러는 거니까.”
“무슨 일 있어?”
차유신의 어조가 진중해졌다. 굵은 침을 삼킨 성윤일이 대꾸했다.
“T시티 내부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요.”
“무슨 문제.”
“다소 복잡해요.”
“주체가 누구야.”
차유신이 어르듯 물었다. 성윤일이 어물거렸다. 적지 않은 공백을 담은 언어가 차유신의 귀를 스쳤다.
“역운회요.”
바로 익숙한 이름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태원 의원이요.”
*
시작은 역현T시티 운영권을 가진 ‘역현T재단’의 민영화였다. 본래 서울시 산하기관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차유신이 역현을 의원직을 내려놓은 후 3개월 만에 민영화가 추진됐다. 사유는 원활한 민간자금 투입을 통한 T시티 활성화였다. 김후준 라인으로 꼽히는 서울시장 박용범이 승인했다.
역현T재단 소유권을 두고 국내 11개 기업이 입찰했다. 결국 낙찰받은 건 중견기업인 태류건설이었는데, 이와 관련해 여러 뒷얘기가 난무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태류건설 조신희 회장의 로비설이었다. 다만 대개의 의혹이 그렇듯 명백한 증거가 없어 흐지부지됐다.
차유신은 역현T재단 소유권 이전과 관련해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로비설 때문이 아니었다. 낙찰 과정에서 로비는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태류건설은 꾸준한 실적을 내는 알짜기업이었기에 T시티의 풍족한 자금수혈을 기대할 정도도 됐다. 실제로 조신희 회장은 T재단 소유권을 따낸 후 반년에 걸쳐 사비로 T시티 입주기업 전용펀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불안했던 건 태류건설의 배경이었다. 태류건설 조신희 회장은 SDB그룹 석일태 회장과 사돈지간에 있었다. 이 SDB그룹의 배경에 있는 것이 국내 최대 범죄조직인 역운회다. 석일태, 도명진, 배민기가 공동 설립한 역운회는 끊임없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중 석일태가 이를 통째로 장악하며 지금의 형태가 됐다. 역운회를 통합한 석일태는 모든 성공한 조직폭력배가 그렇듯 세탁용 기업을 하나 세웠고, 이것이 SDB그룹이다.
범죄조직 돈으로 만들어진 회사였지만 SDB그룹 자체는 꽤나 탄탄했다. 주력 사업으로 생활가전 렌털업을 했는데, 기존에 전국적으로 뿌리를 둔 다단계회사를 거점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확장세가 대단히 빨랐다. 덕분에 현재는 국내 렌털업계 ‘톱2’로 꼽히고 있다.
이를 토대로 저축은행과 캐피털사를 차렸고, 한편으로는 화장품 등 각종 생활용품 판매업을 했다. 골프장이나 카지노처럼 현금을 쉽게 모을 수 있는 분야에도 손을 댔다. 각 사업 부문에는 대기업 임원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꽂아 제법 그럴싸한 운영을 했다. 덕분에 대중 사이에서 SDB그룹의 인식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이 회사가 역운회 소유라는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괴물인 척하는 사람보다 무서운 건 사람인 척하는 괴물이다. SDB그룹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차유신은 야인 생활을 하는 동안 역현T시티에 대한 우려를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다. 마음을 두면 필연적으로 여의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일었다. 다만 김후준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 움직이는 건 금물이었으므로, 차유신은 그 같은 감정을 배제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종종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유권을 태류건설이 쥐는 것이 맞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쉼 없이 차유신을 괴롭혔다. 태류건설과 SDB그룹의 수상한 커넥션을 생각하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꾸만 떠올랐다.
SDB그룹의 기반인 역운회는 역현구 운도동을 거점으로 한다. 거기서 시작한 범죄조직이기에 두 지역명의 앞글자를 따 ‘역운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역현구 운도동이 속한 역현구갑은, 역현T시티가 속한 역현구을과 인접한 지역이다.
만에 하나 역운회에서 T시티에 대한 어떤 이용 가치를 발견한 거라면. 그래서 스타트업에는 관심도 없던 태류건설이 SDB그룹의 사주를 받아 T재단을 인수했고, 이것이 훗날 SDB그룹에 넘어가는 수순이 된다면.
차유신은 자신의 기우가 하나의 좆같은 소설이길 바랐다.
*
“조만간 역현T재단 소유주 바뀔 거예요.”
자리를 옮겨 차유신의 세단 뒷좌석으로 들어오자마자 성윤일이 운을 뗐다. 차유신의 턱이 움찔했다. 미심쩍은 질문이 건네졌다.
“혹시 SDB그룹이야?”
성윤일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거 아직 T시티 입주자 대표회의 임원들 정도만 아는….”
“그 좆같은 소설이 결국 맞아 떨어지네.”
탄식한 차유신이 고개를 젖혔다. 넘어간 정수리가 차창에 닿았다. 잘근잘근 깨물린 입술 틈으로 텁지근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T시티하고 SDB그룹은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역운회 깡패새끼들에게 코딩 교육이라도 시키겠다는 거야, 뭐야.”
“T시티 입주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거예요.”
성윤일이 인상을 썼다. 차유신이 고개가 삐딱해졌다.
“입주조건이 뭐 어쨌는데.”
“애초에 약관상 적혀있는 T시티 입주 조건이 ‘벤처기업 및 소상공인’이잖아요. 이건 다시 말해 벤처기업이 아닌 기업도 입주는 할 수 있다는 거죠.”
“그야 벤처로 등록하지 않은 기술기업까지 확보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해둔 거지. 어차피 실제 입주 여부는 심사단이 평가할 테니까.”
“그건 심사단이 제정신일 때 얘기고요.”
성윤일이 혀를 찼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SDB그룹이 심사단을 꼬드겨서, 개나 소나 다 받은 다음에 T시티를 일반 오피스처럼 쓰려고 한다?”
“맞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미 일부 진행이 됐으니까요.”
성윤일이 주머니에서 폴더플 폰을 꺼내 펼쳤다. 이내 액정을 두드려 뭔가를 띄웠다. T시티 도면이었다. 차유신의 얼굴 가까이 화면을 가져간 성윤일이 가장 큰 A동을 찾아 꾹 눌렀다.
“반년 전부터 A동에 입주한 스타트업 상당수가 계약 만료 기간인 24개월을 앞두고 퇴거했어요. 입주 연장을 하려면 심사단 평가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에서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빈자리를 채운 게 스타트업이 아니라 일반 사무실이었어요. 알아보니 기존에 역현구 운도동이나 상월동에서 운영하던 제조업체들이더라고요. 그쪽 지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옮겨오고 있는 거예요. 반년 사이에만 30곳 가까이 들어왔어요.”
“입주자 대표회의는 뭐했어? 시에다 건의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차유신이 언성을 높였다. 성윤일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서울시에 얘기했죠. 이제는 시 소유가 아니라 손을 댈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고요. 지금 T시티 소유주는 서울시가 아니라 태류건설이잖아요. 문제는 태류건설이 T시티 입주 스타트업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거고요. 초기 반년 정도만 투자하는 척하고, 이제는 신경도 안 써요. 어차피 목적 자체가 SDB그룹에 넘기는 거였으니, 굳이 공을 들일 이유가 없죠. 태류건설은 말 그대로 중간다리 역할일 뿐이니까.”
“지랄 났네. 아주.”
차유신이 이마를 짚었다. 지그시 관자놀이를 눌러대다가, 다시 성윤일을 봤다. 착 가라앉은 질문이 나왔다.
“우태원 얘기는 또 뭐야.”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우태원 의원에게 건의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 역현구을은 이주학 의원이 사망하는 바람에 지역구 국회의원이 공석이고, 역현구청장도 썩 도움이 안 되니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우 의원 쪽에 요청을 한 거죠. 두 달 내내 회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좀 알아보게 됐는데, 이 사태 자체가 우태원 의원실 쪽에서 세팅한 걸로 보였어요.”
“근거가 뭐야.”
성윤일의 호흡이 부쩍 탁해졌다. 차유신의 눈치를 보던 그가 건조한 답을 흘렸다.
“우태원 의원실에서 운도동과 상월동, 다현동처럼 제조 기업이 밀집해 있는 곳들을 대상으로 이주안내 TF를 암암리에 구성했어요. 명목상으로는 스타트업과의 상생 차원에서 역현T시티 입주법인을 모집하는 것이라는데, 실상은 그냥 T시티에 집어넣을 회사를 무작위로 찾고 있는 거예요. 해당 TF 사무실은 우태원 의원실과 같은 건물을 쓰는데, 안에 상주한 게 역운회 조직원들이라는 제보를 받았어요.”
차유신의 눈동자가 식었다. 성윤일은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빤히 차유신을 바라봤다. 가붓하게 눈을 감았다 뜬 차유신이 손을 뻗었다. 비어있는 운전석 시트를 움켜쥐고는, 자못 심상하게 턱짓을 했다.
“잘 들었다. 말 다했으면 이만 가보고.”
“왜 반응이 없어요? 형.”
성윤일이 서운해했다. 차유신이 짜증을 냈다.
“머리 복잡해졌으니까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고 어디 가 있어. 난 일단 운도동에 있는 개새끼 의원사무실 좀 가볼 테니까.”
*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꽤나 저문 시간이었다. 한수현이 선거운동 안 하고 어디로 도망쳤냐며 전화로 닦달을 했다. 차유신은 개밥만 주고 바로 돌아가겠다 응수했다.
사무실은 운도동에 있는 역운회 본거지와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낡은 건물 일색인 운도동 안에 거의 유일한 새 건물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마지막 층을 쓰는 게 우태원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에 다다르기까지 꽤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나아가야 했다. 주변 건물 곳곳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게 보였지만,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듯이 이 근방은 해가 지면 바깥에 나다니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만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동네였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최악의 슬럼가. 운도동을 비롯한 역현구갑 내 대부분의 동네가 그 같은 수식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현구을의 사도동도 개발 전 질이 나쁜 곳으로 꼽히긴 했지만, 집창촌이나 도박가로 인한 것인지라 치안 자체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반면 역현구갑은 역운회뿐 아니라 각지의 조직폭력배가 둥지를 튼 곳인 만큼 치안이 지극히 좋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운도동이 가장 심했다. 대낮에도 아무렇지 않게 칼부림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등을 보인 채 선 키 큰 사내가 하얀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차유신이 남자의 앞에 섰다. 흠칫한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갓 거둔 담배가 차유신에게 낚아채였다. 그대로 제 입으로 가져간 차유신이 한 모금 빨고는 눈을 찌푸렸다. 남자가 급하게 등을 굽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형님.”
“안에 우태원 있어?”
“저도 방금 전에 도착해서 그건 잘….”
유해겸이 입을 다셨다. 또 한 번 연기를 뿜고 난 차유신이 바닥에 꽁초를 떨궜다. 힘 있게 지르밟는 내내 유해겸은 차유신의 눈치를 봤다. 우태원 의원실로 옮기긴 했어도, 첫 비서 경험을 차유신 밑에서 한 영향인지 꽤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한숨을 쉰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위에 안내 좀 해줘.”
걸어가는 차유신의 곁에 유해겸이 따라붙었다. 안내하듯 차유신을 앞지른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라 버튼을 눌렀다. 바로 문이 열렸다. 차유신부터 들인 유해겸이 덩달아 들어온 뒤 가장 마지막 층 버튼을 눌렀다. 이내 차유신을 보며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그럼 일반인이 보좌관 붙이고 다니리?”
“아니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유해겸이 얼떨떨하게 머리를 쓸었다. 뭔가를 고심하는 투였다. 침묵 속에서 15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말이 없는 유해겸을 무시한 채, 차유신이 먼저 복도로 나섰다. 유해겸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우태원 사무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한 사무실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다짜고짜 손잡이를 잡는 차유신을 유해겸이 저지했다. 차유신을 숨기듯 자신의 뒤로 뺀 그가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님.”
표정에서 긴장감이 비쳤다. 차유신이 낯을 찡그렸다. 본인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저렇게까지 굳어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우뚝 선 유해겸이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스르르 드러나는 문틈으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비쳤다. 차유신의 동공이 커졌다. 이상하다. 남자들이 지나치게 많다. 통상 사무실에 둘 수 있는 보좌진은 인턴까지 총 9명. 보조업무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을 포함한다 쳐도 최대 10명 초반대인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금 안에 있는 건 스무 명은 족히 돼 보인다. 심지어 수석보좌관인 백진재나 비서인 유해겸은 포함하지도 않았다.
활짝 문을 연 유해겸이 안으로 들어섰다. 따라서 걷던 차유신이 남자들을 스캔하듯 눈으로 훑었다. 일반 사무직원이라 보기에는 체격이 지나치게 좋다. 눈가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아니. 애초에 지금 이들 중에 보좌진이 있긴 한 걸까.
“어떤 일이십니까.”
중앙에 있던, 그나마 단정한 생김새의 남자가 물었다. 차유신이 입을 뗐다.
“우태원….”
“태원이 형님 지금 들어오셨나.”
차유신의 말을 끊은 유해겸이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다시 차유신을 봤다. 보다 강고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어떤 일로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유해겸 비서가 안에 우태원 있냐고 물었을 텐데.”
차유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남자의 낯이 조금씩 냉해졌다. 뚫어져라 차유신을 보던 그가 불현듯 걸터앉아있던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내 뚜벅뚜벅 차유신의 앞까지 걸어왔다. 주변의 이들이 관찰하듯 차유신과 남자를 번갈아 봤다.
“목적성이 불분명한 안내는 불가능합니다.”
차유신의 코앞에 선 그가 딱딱하게 경고했다. 차유신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남자를 올려다봤다. 더럽게 크네. 괜히 혀를 찬 후 사무실을 빙 둘러봤다. 곧 덤덤한 눈길을 남자에게 꽂았다.
“그냥 안내하지? 민원인 응대하는 게 의원실 기본업무 중 하나인데.”
이기죽거리는 한 마디가 덧붙었다.
“깡패 새끼는 모르는 사항일 수도 있지만.”
남자가 어금니를 물었다. 늘어져 있던 그의 주먹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헛웃음 섞인 한 마디가 다가왔다.
“TV에서 본 것보다 꽤 곱상하시기에, 정중하게 대하려 했는데요.”
그의 눈매가 조롱하듯 휘었다.
“여자처럼요.”
유해겸이 급히 차유신을 가로막았다.
“서 실장! 지금 누구 앞에서 입을 함부로….”
“유해겸. 비켜.”
걸리적거리는 유해겸을 거칠게 밀었다. 반 발자국 물러난 유해겸이 주춤한 사이, 차유신의 구둣발이 올라갔다. 딱딱한 가장자리를 앞세워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허억. 기습적으로 당한 남자가 몸을 굽었다. 바로 그의 멱살을 챈 차유신이 팔꿈치로 명치를 으스러뜨릴 듯 가격했다. 커헉! 남자의 탄성이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재길 형님!”
주변의 남자들이 날짐승처럼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쏜살같이 달려온 남자가 우악스럽게 차유신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이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뒤통수를 잡아채고는, 앞에 있는 데스크에다 내리꽂았다.
반사적으로 뻗어나간 차유신의 손이 데스크 가장자리를 부여잡았다. 거세게 충돌할 뻔한 얼굴이 가까스로 비껴났다. 면상을 부딪치는 건 면했지만, 기울던 옆얼굴이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히고 말았다. 바로 볼이 화끈해지면서 물기가 느껴졌다. 씨발. 입 안에서 욕설이 굴러다녔다.
“이놈의 면상으로 토론회 말아먹고도 당선됐는데… 너 때문에 득표율 떨어지게 생겼다. 고마운 새끼야.”
분연히 몸을 튼 차유신이 남자의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이어 온 힘을 실어 남자의 얼굴을 벽에다 박아버렸다. 억, 하며 신음한 남자가 고꾸라졌다. 헐떡이며 고개를 돌리는 차유신을 향해 뒤편의 유해겸이 소리쳤다.
“형님! 뒤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곁에서 컥, 소리가 났다. 차유신의 머리맡에 검은 그림자가 엄습했다. 빠르게 일그러진 낯이 들렸다. 차유신의 어깨 근처까지 나이프를 들이댄 남자가 날개꺾기를 당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의 팔뚝을 옭아맨 손가락이 가죽을 꿰뚫을 듯 뇌호했다.
“얘기했을 텐데.”
엄한 한 마디가 들렸다. 훅 뻗어나간 구둣발이 남자의 배를 파열시킬 기세로 걷어찼다. 커다란 비명을 터뜨린 남자의 하체가 무너졌다. 남자를 옥죈 손아귀가 풀렸다. 그대로 내려앉은 남자가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내가 신경 쓰는 것 빼고는 다 건드려도 된다고.”
다시 나아간 구둣발이 남자의 옆구리를 짓밟았다. 허억. 재차 신음한 남자가 바닥을 짚어댔다. 허리를 끊어버릴 양 지분거리고 난 발꿈치가 떨어졌다. 바닥을 디딘 우태원이 사무실을 둘러봤다. 얼어붙은 남자들이 일제히 수그렸다.
“그 쉬운 걸 왜 못 지키지? 다들.”
중앙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떨궜다. 처음 차유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서 실장이라는 남자였다. 더듬거리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멍해진 차유신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우태원 의원실 수석보좌관 백진재였다. 정중하게 차유신과 눈을 맞춘 그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의원님.”
“괜찮고 자시고….”
차유신의 대답이 잦아들었다.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한 번 얼굴을 살피고 난 백진재가 몸을 틀었다. 이내 우태원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태원아. 피 난다, 차 의원.”
우태원의 얼굴이 돌아갔다. 차유신은 급하게 제 볼을 훔쳤다. 손등에 붉은 핏물이 묻어났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난다. 완전히 찢어진 건 아니지만, 당분간 뭐라도 붙이고 다니는 건 불가피해졌다. 좆같네. 혼잣말을 곱씹는 차유신의 귓가에 부쩍 냉랭해진 음성이 스쳤다.
“누구야.”
일동은 침묵만 지켰다. 그러면서도 특정 인물을 힐끔거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를 매만지던 남자가 흠칫했다. 무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우태원이 발을 내밀었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을 울렸다.
남자의 앞에 다다른 우태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데스크를 짚은 손가락이 표면을 딱, 딱, 두드리고 있었다. 눈에 띄게 어깨를 떨어대던 남자가 죽어가는 목소리를 꺼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빠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둔탁한 마찰음이 실내를 메웠다. 순식간에 동공이 풀린 남자가 맥없이 쓰러졌다. 윤기 나는 하얀색 바닥에 빠르게 번져가는 핏물이 웅덩이처럼 고였다. 쯧, 혀를 찬 우태원이 들고 있던 새까만 수석을 내던졌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커다란 돌덩이가 바닥을 굴렀다.
“두 명은 병원 데려가고.”
손가락을 까딱한 우태원이 발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 차유신의 앞에 선 그가 허리를 숙였다. 차유신의 턱을 타고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출혈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유신은 더 이상 닦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많이 다치지도 않았거니와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심각하게 자신을 주시해오는 우태원을 머금은 눈이 두어 번에 걸쳐 깜박였다.
“많이 다치셨네요. 큰일입니다.”
차유신의 등으로 우태원의 손이 올라왔다. 허리를 두른 팔뚝에 부드러운 압력이 실렸다. 그대로 이끄는 힘에 차유신의 발이 불쑥 옮겨졌다. 곁눈질로 차유신을 본 우태원이 말했다.
“치료도 할 겸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그의 미간이 푹 구겨졌다.
“매번 참 저를 곤란하게 만드십니다. 선배께서는.”
차유신이 바로 날을 세웠다.
“내가 뭘.”
우태원이 예사롭게 대꾸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 손에서 잘도 다치지 않습니까. 제가 그걸 상당히 싫어하는 데도요.”
찌푸린 차유신이 우태원을 외면했다. 우테원은 아무렇지 않게 차유신을 마저 이끌었다. 차유신은 일단 그를 따랐다.
대여섯 걸음 끝에 내실 문 앞에 다다른 우태원이 손잡이를 돌려 열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중후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간 차유신의 시선이 미심쩍게 이동했다. 또, 기묘한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과거 자신의 의원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배치와 인테리어다.
“이쪽에 앉으시죠. 선배.”
우태원이 팔뚝에 힘을 실었다. 떠밀리듯 나아간 차유신이 검은 소파 앞에서 몸을 내렸다. 두꺼운 소가죽 시트는 앉는 내내 잡음 하나 내지 않았다.
차유신을 앉히고 난 우태원이 등을 보였다. ‘국회의원 우태원’이라는 명패가 놓인 데스크로 다가가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몇 번 뒤적이고 난 그가 붕대와 반창고 따위를 챙긴 후 몸을 세웠다.
“고개 들어봐요.”
다가온 우태원이 말했다. 차유신은 마지못해 얼굴을 내보였다.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얼굴인데, 흉이라도 지면 곤란했다.
“정말 난처하네요.”
우태원이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차유신이 또 인상을 썼다. 손을 내린 우태원이 테이블에 놓인 물티슈의 캡을 열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딸려 젖은 휴지가 나왔다. 그대로 차유신의 얼굴에 가져간 그가 상처 난 볼을 꾹 눌러왔다. 차유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파요?”
차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차유신을 응시하다가, 우태원이 살짝 손가락을 곤두세웠다. 아까보다 거세게 볼이 비벼졌다. 차유신의 입이 크게 떨어졌다.
“아아…!”
“아프냐고 했잖아요.”
우태원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공격적으로 치켜 뜨였다. 컴컴하게 그늘진 우태원의 면상을 지켜보다가, 매서운 언어를 꽂았다.
“네 손 따위에 아플 일 없어.”
가차 없는 한 마디가 따라붙었다.
“신경 끄고 약이나 처발라.”
우태원의 윗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축축한 물티슈가 볼 위에서 길을 잃었다. 고통의 잔상을 참아가며 차유신이 낮게 시근덕거렸다.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서운하네요.”
뺨에서 우태원의 손이 거둬졌다. 휴지통에 물티슈를 처박고 난 그가 이번에는 연고를 챙겼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짜 차유신의 볼에 묻혔다. 차디찬 자극이 피부를 울렸다. 차유신은 이를 악 무는 것으로 갈음했다. 우태원이 나긋나긋 말을 걸었다.
“저 변태 아니에요. 선배.”
녹녹한 연고가 죽 미끄러졌다. 구석구석 약을 바르고 난 우태원이 손을 옮겼다. 테이블에 뒀던 가위와 붕대를 각각 쥐고는, 서걱거리며 하얀 면을 절단했다.
“그래도 선배는 내 손에만 아팠으면 좋겠어요.”
적당히 잘린 붕대가 차유신의 볼을 덮었다. 천은 두어 번 접힌 끝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태원은 이번엔 반창고를 집어 들었다. 테이프를 떼고는, 붕대를 중심으로 세심하게 붙였다. 우태원의 호흡이 느슨해졌다.
“그게 선배에게도 좋아요.”
우태원이 두 번째 반창고를 챙겼다. 헐겁던 붕대가 점점 견고해졌다. 퍽 안정적으로 접착을 마친 우태원이 손을 털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제법 진중한 질문이었다. 흐트러져 있던 차유신의 동공이 조금씩 오롯해졌다.
“그딴 건 모르겠고.”
숨이 거칠어졌다. 불친절한 언어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나는 다른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무슨 얘기요?”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우태원이 얼핏 웃었다.
“아무리 저라도 선배의 의중을 낱낱이 헤아리지는 못해요. 우리가 애인지간도 아니고.”
차유신이 조소했다.
“몰라? 그러면 얘기해줄게.”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손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액정을 두드려 미리 접속해 둔 사이트를 띄웠다. 역현T시티 입주사 안내 화면. 그중에서도 A동. 최근 입주 순서로 정렬한 리스트를 우태원에게 들이밀었다. 차유신이 이를 갈았다.
“이거 다 뭐야.”
“운도동하고 상월동에 있던 곳들이네요.”
우태원이 대수롭지도 않다는 투로 응수했다. 차유신이 비아냥거렸다.
“알긴 아네.”
“이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지. 역현T시티는 기술기업을 위한 특별단지야. 거기에 어떻게 일반 제조기업 따위를 끼워 넣어. 심지어 SDB 같은 깡패 회사에나 납품하는 허접한 곳들을.”
차유신이 쏘아붙였다. 우태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눈매가 나긋하게 접혔다.
“방금 한 말씀은 심한데요.”
“내 말이 틀려? 아까 오면서 그 회사들 몇 군데 알아봤어. 상당수가 SDB하고 끈 있는 구멍가게들이던데. 내가 파악한 열 곳 중 일곱 곳이 그랬으니, 최소한 서른 곳 중 스무 곳은 그런 회사라는 거겠지.”
차유신이 싸늘하게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깡패집단 챙겨주는 게 네 역할이고. 역운회 끄나풀 새끼야.”
우태원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가만히 차유신을 관찰하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와중에 안온한 손길이 차유신의 볼을 쓸었다. 우태원의 얼굴이 차유신의 옆얼굴로 내려왔다. 속삭이는 음성이 찾아들었다.
“선배도 사실 알고 있었잖아요. 저 이런 새끼인 거.”
차유신의 턱이 움찔했다. 벌어진 입술 틈에서 가쁜 숨이 샜다.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은 차유신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짐작하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야.”
“그래요?”
우태원이 얼굴을 들었다. 미동하는 망막에 삐딱하게 고개를 가누는 그가 걸렸다. 입가의 미소가 자못 진했다.
“선배는 제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은연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차유신이 따지듯 반문했다.
“당연한 것 아니야? 말했잖아. 역현T시티는….”
“그곳은 원래 유구한 집창촌이 있던 곳이죠.”
우태원이 눈을 깔았다. 단조로운 언어가 이어졌다.
“서울시가 밀어버리는 바람에 그곳의 주민들은 갈 곳을 잃었고, 그런 와중에 차 선배가 T시티라는 이름의 듣도 보도 못한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는 바람에 그들은 고향까지 잃은 격이 됐죠.”
“지금 내가 잘못됐다는 거야?”
차유신이 언성을 높였다. 우태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배는 항상 옳아요. 아무리 좆같은 일을 했어도, 차유신은 옳아야지.”
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선배는 신이잖아요. 역현구을의.”
착 가라앉은 한 마디가 귀를 옭맸다.
“나는 선배가 혐오하는 개고.”
무표정으로 돌아온 우태원이 물끄러미 눈을 맞췄다. 차유신은 곤로한 호흡을 가누며 마주 봤다. 암막에 가려진 그의 저변 어딘가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그것은 원망을 닮아있었다.
막연한 사과를 생각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입을 다시고 난 차유신이 팔을 뻗었다. 나아간 손아귀에 우태원의 널따란 어깨가 걸렸다.
“태원아.”
우태원의 정수리가 움칠했다. 차유신은 그대로 그를 잡아끌었다. 우태원은 순순히 자신을 내줬다. 차유신의 어깨에 우태원의 얼굴이 밀착했다. 우태원의 등을 다독이고 난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하다.”
느른한 손길이 우태원의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졌다. 아이라도 달래듯 재차 토닥인 차유신이 조곤조곤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너무 스스로를 혐오하지 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고, 이 순간 차유신은 누구보다도 우태원을 혐오하고 있다.
“네 뜻은 잘 알겠어. 역현구는 그 자체로 네 고향이겠지. 너는 고향을 지키고 싶은 거고.”
그 좆같은 고향을 하루빨리 제거하는 게 차유신의 임무다.
“하지만 지금 방식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야. 내가 도와줄 테니, 우리 고민을 좀 해보자.”
고민이 필요하다. 우태원을 이 바닥에서 영영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짜야한다.
이 개새끼를 도로 개집에 처넣을 묘안이 필요하다.
“연기 다 했어요?”
돌연 묵직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차유신의 손목이 주춤했다. 고개를 튼 우태원이 곁눈질을 건네고 있었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흠칫거렸다. 우태원이 빙그레 웃었다.
“선배 연기 잘하는 것 알아요. 그걸로 당선까지 된 사람인데. 웬만한 배우보다야 선배 쪽이 더 뛰어나겠지.”
들숨을 삼킨 우태원이 다시 얼굴을 내렸다. 날연한 한 마디가 머리를 울렸다.
“나에게는 이제 식상하지만.”
우태원의 입술이 차가워진 차유신의 볼을 머금었다. 가붓하게 표피를 비비고 난 그가 읊조렸다.
“그래도 귀여웠어요. 선배.”
차유신의 눈꺼풀이 확 들렸다. 유유히 상체를 일으킨 우태원이 양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부들거리던 차유신의 입술이 떨어졌다. 날 선 외침이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진짜 너 어쩌려는 거야. 어? SDB랑 짜고 아주 T시티 먹어버릴 셈이야? 예전처럼 집창촌으로 돌려놓기라도 하려고? 이 단단히 돌아버린 새….”
“아. 그거 좋네요. 생각도 못 했는데.”
불현듯 우태원이 끄덕였다. 차유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차유신을 일별한 우태원의 눈매가 흡족하게 휘었다. 부드러운 음성이 소파에 내려앉았다.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이왕 하는 김에 말이에요. T시티 인프라는 살려두고, 그 안에 집창촌이나 하우스 같은 걸 세팅하면 좋지 않겠어요? 수요자 입장에서는 접근성이 좋아지고, 외국인 관광객 명소 삼기에도 좋겠죠.”
“우태원.”
“집창촌 홍보는 선배가 맡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우태원이 나긋나긋 조롱했다.
“선배 연기 잘하시잖아요. 국민들을 위해 몸 파는 연기 어때요?”
한계까지 차올랐던 숨이 터진 풍선처럼 꺼졌다. 사뭇 담담한 낯으로 우태원을 올려다보던 차유신이 커다랗게 헛웃음을 쳤다. 어금니 사이에서 짓이겨진 한 마디가 비져나왔다.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좆같이 다 해봐.”
우태원은 답하지 않았다. 차유신의 눈이 분기를 머금고 빛났다.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네 목줄은 내가 채워줄 테니까.”
우태원이 의미심장하게 주억거렸다. 눈을 감은 그가 만족스러운 혼잣말을 흘렸다.
“저야 좋죠.”
더 없이 따스한 어조였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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