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2월.]
「‘비운의 귀공자’ 차유신, 신진화당서 정계 복귀…‘고향’ 역현구을 예비후보 등록
‘과기정통부 로비게이트 사태’로 사임한 차유신 전 국회의원(사진)이 1년 3개월 만에 정계 복귀를 노린다. 둥지를 튼 곳은 ‘친정’ 대국민당이 아닌 제1야당 신진화당이다.
신진화당은 차 전 의원의 역현을 예비후보 등록을 접수했다고 8일 밝혔다. 이에 따라 역현을에 출사표를 던진 예비후보자는 차 전 의원을 비롯해 조영문 내일발전위원회 회장, 김재영 석좌교수, 신동현 전 국회의원(이상 신진화당), 김태현 변호사, 주한경 전 과기정통부 장관, 박세진 역현발전연구소장(이상 대국민당), 오태범 전 시의원(대통합당), 이신현 교수(무소속) 등 9명으로 늘었다. 역현을은 해당 지역을 맡고 있던 이주학 의원의 지난해 말 사고사에 따라 재보선 대상 지역구가 됐다.
차 전 의원이 가세하며 역현구을은 4·29 재보궐 선거 최대 격전지로 급부상했다. 차 전 의원은 역현구을의 랜드마크인 역현T시티를 기획하고 조성한 장본인이다. 정치권에서는 “당장 신진화당에서 역현구을 공천자를 ‘정리’하는 작업부터 복잡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진화당 기존 후보자들은 빠르게 차 전 의원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신동현 전 의원은 이날 SNS를 통해 “로비게이트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차 전 의원을 예비후보로 받은 신진화당 최고위원회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다”며 “차 전 의원으로 인해 유망한 후보자가 ‘컷오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국민당 역시 분위기가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다. ‘역현T시티의 아버지’로 불리는 차 전 의원이 역현을 단수공천을 받을 경우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인 주한경 전 장관과의 치열한 경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국민당이 1년 3개월 전 차 전 의원에 대한 ‘내치기’ 의혹에 시달렸던 만큼 관련 발언을 아끼는 모양새다. 김후준 대국민당 대표는 7일 기자단과의 오찬에서 “차 전 의원이 역현을에 다시 도전한다는 걸 기사를 보고 알았다”며 “다만 더 이상 대국민당 사람이 아니기에 특별히 할 말은 없다”고만 했다.
올해로 만 30세인 차 전 의원은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세 때 모빌리티 스타트업 ‘케이마’를 창업했다가 반년 만에 정부 규제로 문을 닫으며 ‘비운의 귀공자’ 타이틀을 얻었다. 이후 대국민당 청년산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청년 및 미래 산업과 관련한 다양한 발언을 일삼아왔다.
이 같은 행보를 바탕으로 4·15 총선에서 역현을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3년 7개월 만에 과기정통부를 대상으로 역현T시티 입주 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요하고, 관련 로비를 일삼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의원직을 내려놓았다. 차 전 의원은 해당 의혹과 관련해 지난해 6월 대법원의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한수현 대민일보 기자」
*
“신동현 의원 페이스북 보셨죠. 차 의원님이 예비후보 등록을 한 걸 두고 기존 신진화당 후보자들이 굉장히 당황한 분위기인데요. 이와 관련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단 쪽에서 질문이 건네졌다. 마이크를 입에 가져간 차유신이 점잖게 대답을 꺼냈다.
“사사로운 여론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공정하게 경쟁할 거고, 이를 둔 신진화당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에 100% 승복하겠습니다.”
“신인대 대표님. 신진화당 쪽에서 먼저 차 의원을 컨택한 겁니까, 아니면 차 의원이 신진화당에 찾아온 겁니까.”
또 다른 기자의 질문에는 신인대가 답했다.
“제가 직접 차 의원을 찾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이번 재보선을 앞두고 역현구을 선거구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 생각해서입니다.”
“기존 후보자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얘기인가요.”
“차 의원을 만난 건 예비후보자 등록을 시작하기 전입니다. 기존 후보자들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신인대가 선을 그었다. 차유신은 가만히 곁눈질만 했다. 거짓말이다. 신인대가 차유신을 호출한 건 예비후보자 등록이 한창이던 지난달 중순이었다.
“역현구갑의 우태원 의원이 오늘 오전 정론관* 백블 때 얘기한 내용 혹시 전달받으셨습니까.” (*국회 기자실)
불현듯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차유신은 도리질을 쳤다. 신인대가 조용히 이마를 구겼다. 뭔가 짐작한 낯이었다.
“이왕이면 역현T시티를 만든 장본인이 당선되는 게 적절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가요.”
차유신이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기자가 바쁘게 입을 움직였다.
“타 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 표명한 건데, 다소 신선한 상황이긴 하죠. 아무래도 차 의원님 보좌진 출신이니, 본인이 모셨던 국회의원을 정치 선배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의중이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차 의원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의견 딱히 없습니다.”
차유신의 어조가 냉해졌다.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질문을 한 기자가 머뭇거리며 재차 답변받는 걸 시도했다.
“그럼 우태원 의원과 관련해서는 전혀….”
“네. 없습니다.”
노곤한 숨이 새어 나왔다. 이어 단숨에 못을 박았다.
“남의 집 사람 일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
한 시간에 걸친 기자회견이 끝났다. 소회의실을 빠져나오는 차유신에게 몇몇 기자들이 추가 질문을 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옆에 있던 진무원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언론 노출을 한 상황이라 오늘은 개인적인 질문 받지 않습니다.”
“간담회 또 하실 거죠?”
한 기자가 물었다. 진무원이 주억거렸다.
“당과 협의해 필요하면 2차 간담회 하겠습니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리를 굽었다 편 진무원이 기자들을 정중하게 반대편으로 안내했다. 미적거리던 기자들이 끝내 흩어졌다. 이런 식으로 컨트롤을 해오면 기자들 입장에서는 질문할 의욕을 잃는다. 과연 기자 다루기로는 진무원만 한 베테랑이 없었다.
“이야. 이것도 오랜만에 해보네.”
멀어져가는 기자들을 보며 진무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차유신이 진무원의 등을 두드렸다.
“고생 많았어. 형.”
“고생이야 네가 했지. 그나저나 앞으로가 문제다. 캠프 인력이 많이 필요한 상황인데.”
“우리 의원실에 있던 애들 지금 어디어디 가 있지?”
“신인대방 가 있는 운열이가 잠시 이쪽으로 올 거야. 대학원 다니는 재희는 개인 시간 내서 캠 도와주겠다 했고….”
“캠 사람을 이제 와서 찾아? 느려 터졌구만.”
돌연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차유신과 진무원이 동시에 뒤를 봤다. 간담회 보도 자료를 팔랑이던 한수현이 쏘아붙였다.
“간담회는 왜 이렇게 늦게 해? 오전에 해야 일찍부터 기사가 나가지. 오후 3시에 간담회를 때려버리면 내일 자 지면에 못 나갈 수도 있어.”
“급하게 소회의실 빌린 거라 시간이 그때밖에 없었어. 미안.”
차유신이 어물거렸다. 한수현이 눈을 찌푸렸다.
“1년 넘게 연락도 없던 사람한테서 간담회 한다는 이메일로 근황 듣는 건 또 처음이다.”
“기자한테 간담회 한다고 메일 보내지, 그럼 무슨 메일을 보내.”
“너 아예 나 부를 생각이 없었던 거야?”
한수현이 헛웃음을 쳤다. 차유신이 이마를 짚었다.
“너 대민일보 취직해서 잘살고 있잖아. 그런 사람한테 굳이… 당선된 상태에서 보좌진으로 와달라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고, 한낱 캠에서 뛰어 달라고 요청하는 건 좀.”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공손하게 해야지. 어?”
차유신이 주춤했다. 팔짱을 낀 한수현이 빙글거렸다.
“네가 뛰어달라고 하면 난 뛸 거야. 내일부터 바로 투입 가능해. 페이는 필요 없지만,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줬으면 좋겠어. 너 그 정도 재력은 되잖아. 안 그래?”
한수현이 목을 세웠다. 차유신이 어색하게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너도 참 이 바닥 못 벗어난다. 그러다 인생 망쳐.”
진무원이 손가락질을 하며 경고했다. 한수현이 이죽거렸다.
“5년 내내 차유신 노예 생활하는 오빠보다야 내가 낫겠지.”
“그래. 너 말 잘했다. 1년 만에 다시 노예 생활하는 김에 나하고 얘기 좀 하자. 당장 내일부터가 문제야.”
진무원이 한수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수현이 힐긋 차유신을 봤다.
“유신이는?”
차유신이 발을 뻗으며 답했다.
“정진원 선배가 잠깐 보자고 해서. 방에 들르려고.”
“정진원? 신진화당?”
“어. 공관위원장이거든. 나에게 할 얘기가 있나봐. 이따가 봐.”
손짓을 한 차유신이 마저 걸었다. 한수현은 군말 없이 진무원과 반대쪽으로 향했다. 깨끗한 복도 위에 저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내려앉았다. 차유신의 어깨가 점점 느슨해졌다.
1년 3개월 만에 기자들 앞에 섰다. 생각보다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물론 실수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우태원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을 때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기자들은 그것조차 쇼맨십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말이다. 다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버튼을 눌렀다. 늘어진 어깨를 주무르던 차유신의 입에서 날연한 숨이 번졌다.
우태원 관련 이슈를 조심해야 한다. 포커페이스가 무너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차유신이 먼저 입장하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따라서 들어왔다. 언뜻 본 남자의 생김새가 익숙했다. 대통합당 원내대표의 비서관이었던가.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자가 선뜻 인사를 건넸다. 차유신이 마주 머리를 숙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역현구을에 다시 출마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 있길 바랍니다. 제가 차 의원님 10년 전부터 꾸준히 지켜봤거든요. 젊은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패기도 열정도 넘치는지….”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언어가 인기 없는 라디오 방송처럼 지루했다. 차유신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기계적으로 ‘네’를 반복했다.
“다음 달에 또 책 내신다면서요? 쉬는 기간에도 꾸준히 뭔가를 하셨나 봐요, 나이 든 영감 중에서도 이렇게 성실한 분이 좀처럼 없는데….”
탁. 거의 닫히다시피 한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검은색 구둣발이 들어왔다. 다물렸던 문이 도로 벌어졌다. 차유신의 얼굴이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산화된 것처럼 사라지고, 익숙한 옆얼굴이 차유신과 눈을 맞춰왔다.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절로 떨어졌다.
차유신 의원실 보좌진 출신 유해겸. 현 우태원 의원실 소속.
“김보.”
유해겸이 턱짓을 했다. 흠칫한 남자가 유해겸을 봤다.
“잠깐 나가주시겠습니까.”
남자가 멍하니 눈을 굴렸다. 서슴거리는 시선이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에 꽂혔다. 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몇몇 남자들이 보였다. 남자의 어깨가 움츠려졌다. 눈에 띄게 발꿈치를 달싹이던 그가 부리나케 바깥으로 빠졌다.
“죄송합니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오랜만입니다. 형님.”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듯 뒷짐을 진 유해겸이 눈인사를 했다. 차유신은 언짢게 그를 노려봤다.
“말 걸지 마. 새끼야.”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송구합니다.”
유해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 남자들 쪽을 일별한 그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새 구둣발이 들어왔다. 차유신의 목덜미가 부쩍 얼어붙었다.
냄새가 났다.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피 냄새. 오로지 수컷 짐승에게서만 나는.
남자가 들어가는 걸 확인한 유해겸이 버튼을 짚은 손을 뗐다.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우뚝 선 차유신을 눈으로 훑은 남자가 몸을 기울였다. 차유신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고는, 버튼을 눌렀다. 3층. 우태원 의원실이 있는 층.
일순 덜컹이고 난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버튼에서 떨어진 손이 차유신의 어깨에 다다랐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쓸고 난 남자가 고개를 가눴다. 다부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오랜만이에요.”
차유신은 그 순간 어떤 괴물을 봤다. 사람의 가죽을 덧입었지만, 찢어진 표피 안에서 차유신을 기만하는 피가 출렁인다. 미소 띤 입 안에는 언젠가 차유신을 물어뜯었던 날카로운 이빨이 존재한다.
차유신은 그를 개새끼라 부른다.
“그동안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선배.”
우태원이 은은하게 물었다. 차유신은 무표정으로 답했다.
“응.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씨발 새끼야.”
덜컹.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우태원이 태연히 몸을 틀었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차유신이 움찔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 세 명이 일제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모셔.”
우태원이 앞서 걸었다. 능숙하게 차유신을 둘러싼 남자들이 재촉하듯 밀어붙였다. 일단 따라서 걸으며 주변의 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대부분 익숙하다. 기존 대국민당 의원실에서 활동하던 보좌진들이다. 전부 우태원방으로 옮긴 모양인데, 아까도 느꼈지만 베테랑이 다수 보인다.
대체 우태원의 뭘 보고.
“시간 많이 안 뺏을 겁니다.”
차유신의 옆에서 걷던 남자가 말했다. 차유신과 남자의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차유신의 목울대가 덜컥였다. 이 사람은 확실히 알겠다. 김후준 의원실 보좌관 백진재. 당시에는 정무 담당이었는데, 지금은 아마 이 사람이 수석일 거다. 대국민당 의원실 사이에서도 손꼽히던 에이스였다.
“그러니까.”
백진재가 팔을 뻗었다. 차유신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낚아채였다. 허전해진 손가락이 움칠했다. 차유신도 알아채지 못한 새 진동 중인 핸드폰이 보였다. 희미하게 비치는 액정에는 정진원 의원실 보좌관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나 백진재입니다. 우태원방.”
통화 버튼을 누른 백진재가 다짜고짜 입을 뗐다.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긴 숨을 내쉰 백진재가 말을 이었다.
“차 의원, 지금부터 우 의원하고 급하게 미팅 치를 건데. 삼십 분 정도 걸립니다. 사고를 당했다 하든 갑자기 쓰러졌다 하든 적당히 핑계 대서 알아서 시간 끌어주세요.”
상대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인상 쓴 백진재가 목소리를 낮췄다.
“듣고 있니? 영하야.”
핸드폰 너머에서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곧 탈진에 가까운 대답이 건네졌다. 알겠습니다, 형님. 입을 굳게 다문 백진재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깜빡이는 액정이 차유신의 손 안에 들어왔다. 질근 움켜쥔 차유신이 눈을 치떴다. 백진재는 안연히도 외면했다.
꽤나 긴 복도를 걸어간 끝에 우태원 의원실 앞에 당도했다. 한 보좌진이 서둘러 문을 열어줬다. 안에 있던 보좌진 두 명이 후다닥 일어섰다. 우태원이 먼저 몸을 들였다. 뒤이어 차유신의 등이 떠밀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간 차유신이 눈을 굴렸다. 정말이지 익숙할 정도로 자신의 의원실과 흡사하게 꾸며놓은 내부가 시야를 압도했다. 차유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 탓이겠지.
“잠깐들 나가 있어.”
가운데 소파에 앉은 우태원이 지시했다. 잠시 시계를 본 백진재가 당부했다.
“일단 삼십 분은 맞추는 게 좋을 거야. 정진원 의원은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 아니니까.”
“형.”
우태원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백진재의 교근이 불끈해졌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그가 등을 보였다.
“나가자. 전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좌진들이 우르르 바깥으로 나섰다. 수 초 만에 문이 닫혔다. 부쩍 황량해진 사무실 안에서 차유신은 말없이 머리만 쓸었다.
한 번쯤 만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앉아 봐요. 선배.”
우태원이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힐긋한 차유신이 발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어가, 맞은편에 착석했다. 우태원이 입꼬리를 비뚤었다.
“옆은 싫어요?”
“네 옆에 앉을 이유 없어.”
차유신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뱃갑이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낯을 구긴 차유신의 맞은편에서 우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등을 굽히고는, 차유신의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단숨에 담뱃갑을 찾은 그가 느릿느릿 팔을 당겼다. 하얀색 담뱃갑이 쑥 빠져나왔다.
“왜요? 김후준 옆자리엔 잘만 앉았으면서.”
긴 손가락이 안에서 담배 한 개비를 잡아 꺼냈다. 이내 차유신의 입에 필터를 물렸다. 차유신은 가만히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우태원의 얼굴이 차유신의 망막에 박제됐다.
“그땐 김후준이 내 선배였으니까 옆에 앉은 거고.”
또 담뱃갑을 뒤적인 우태원이 자신의 입에 한 개비를 가져갔다. 딱딱한 이빨로 끄트머리를 지분거리다가, 담뱃갑을 도로 차유신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옮겨간 손이 테이블 위의 지포 라이터를 찾아 쥐었다. 은색 커버를 튕긴 그가 제 담배에 붙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훅, 차유신의 앞에서 흩뿌려졌다.
“내 사람 아니면 손닿는 것도 싫어.”
“그래요?”
우태원이 엷게 웃었다. 느른하게 눈을 깐 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불씨가 차유신이 문 담배 끄트머리를 스쳤다. 나긋한 음성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그럼, 담배는요.”
치익. 맞붙은 두 개의 담배 끝에서 불붙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은 가볍게 헐떡였다. 조금은 아득해진 눈앞에서 붉게 피어난 제 불씨가 보였다. 두 사람의 틈을 채운 연무가 짙어졌다.
“우태원.”
견고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기다란 연기를 흘린 우태원이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네. 선배.”
“왜 그랬어.”
차유신의 눈매가 꼿꼿해졌다. 우태원이 느물거렸다.
“정확히 어떤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면서 물어?”
“난 선배에게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요.”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휘저은 우태원이 발을 올렸다. 딱. 테이블 표면에서 구둣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건너온 우태원이 차유신의 앞에서 몸을 내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난 그냥 내가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우태원이 테이블 위로 담배를 가져갔다. 맨 유리에 대고 대충 두드리고는, 정돈한 담배를 차유신의 입에 물렸다. 이어 제법 타들어 간 차유신의 것을 거둬가 또 한 번 재를 떤 뒤, 스스로의 입에 물었다.
“왜 선배에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죠.”
우태원이 갸웃했다. 차유신의 눈 밑이 경련했다. 소파를 짚은 손이 웅크려졌다. 파들거리던 입술이 공격적으로 떨어졌다.
“네가 원한 게 뭔데. 나에게 엿 먹이는 거?”
“설마요.”
우태원이 허탈하게 웃었다. 연기에 젖은 시야가 한층 흐무러졌다. 몽롱한 세상 속에서 감미롭게 눈을 감는 우태원이 보였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네가 태어난 역현구 지키는 것하고 내가 무슨 상관….”
“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태원의 눈초리가 골똘해졌다. 차유신의 턱이 멈칫했다. 반쯤 타들어간 우태원의 담배 위에서 손가락이 툭, 툭, 움직였다. 한숨 쉰 그가 허리를 틀었다. 테이블에다 꽁초를 쑤셔 박고는, 손을 옮겨 채워져 있던 물컵을 들었다. 컵을 쥔 손이 꽁초 위로 올라갔다. 살짝 기울여 물을 붓자 치익, 소리를 내며 테이블이 끓어올랐다.
“선배는 제 고향을 망쳤어요.”
바로 선 컵이 차유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안에는 여전히 찰랑이는 물이 한 가득이었다.
“그러니 벌을 받아야죠.”
손이 차유신의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방어적으로 들렸다.
“내가 역현구를 망쳐? 말이 되는 소리를 좀…!”
“모르겠으면 잘 생각해봐요.”
우태원이 표정 없이 읊조렸다. 차유신의 낯이 멍해졌다. 우태원이 허리를 굽었다. 차유신의 옆얼굴에 제 뺨을 기댄 그가 입을 열었다. 속삭이는 음성에 솜털이 곤두섰다.
“차유신이 역현구에 잘못한 게 뭔지.”
돌연 위에서 차디찬 물이 낙하했다. 정수리를 흠뻑 적신 냉수가 얼굴을 타고, 턱선을 미끄러져 뚝뚝 떨어졌다. 차유신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숨을 죽였다. 입술 틈에서 젖은 숨이 샜다.
“선배 똑똑하잖아요. 할 수 있을 거예요.”
텅 빈 컵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탁, 소리 나게 잔을 세운 우태원이 손을 내밀었다. 축축해진 차유신의 턱을 움켜쥔 뒤 감상하듯 눈으로 훑어왔다. 차유신의 얼굴이 제대로 식었다. 우태원이 조롱했다.
“보기 좋네요.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예요.”
“우태원. 너 돌았구나.”
“화내게요? 얼마든지 해요.”
우태원이 흡족하게 눈매를 접었다.
“나는 그러면 더 좋아요.”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황홀해졌다.
“내가 선배 뒤통수친 거 알고 나서 좆같은 우태원 생각 많이 했죠? 앞으로 더 해요.”
차유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두근거리는 망막에 만족감에 젖은 우태원의 표정이 걸렸다. 목구멍 안에서 꿀꺽, 허망한 언어가 삼켜졌다.
정말로, 엄청나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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