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1월.]
우태원. 만 25세. 서울대 정치학 학사. 김후준 의원실 인턴 경험(9개월) 있음. 군 면제.
“김후준 의원이 직접 추천했다고?”
데스크에 걸터앉은 한수현이 페이퍼를 요리조리 살폈다. 의자에 앉아 과기정통부 자료를 뒤적이던 차유신이 고저 없이 답했다.
“어. 도균이 유학가고, 같은 자리에 꽂을 만한 보좌진 누구 없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 얘기하더라.”
“도균이 자리면 9급 수행비서직인데… 오버스펙 아니야?”
“본인이 원했대. 따지고 보면 학벌 이외에는 마땅한 스펙이 없고, 나이도 어리니 거기에 넣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긴 하지.”
종이 뭉치를 민 차유신이 등을 젖혔다. 페이퍼를 팔랑거린 한수현이 빙긋 웃었다.
“근데 얘 들어오면 나야 좋겠다.”
“왜.”
“내 타입이야. 생긴 게.”
“어. 생긴 거 훤칠하더라…. 웬만한 여자들이야 다 그렇게 생긴 놈 좋아하지 않나.”
“그 말을 네가 하니까 좀 웃긴데.”
“글쎄다. 난 좀 인기 있을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생긴 건 몰라도, 피곤한 성격이잖아. 내가.”
한숨을 쉰 차유신이 창밖을 봤다. 의원회관 앞에 깔린 헐벗은 나무들이 보였다. 한겨울이다. 추위에 휩싸여 앙상해진 생명체가 대지를 장악한 시기. 푸르름이 깃들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한 때.
똑똑. 내실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차유신이 입을 열었다.
“네.”
“나 무원이야. 면접 보기로 한 보좌진 추천자 왔어. 들여보낼까?”
“어어.”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문이 열렸다. 큰 키를 지닌 정장차림의 남자가 성큼 들어섰다. 짙고 굵직한 눈썹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했다. 차유신은 고가의 미술품을 감상하듯 그를 관찰했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자로 댄 것처럼 완벽한 대칭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완벽하지 않다. 가로로 긴 눈도, 우뚝 선 콧날도, 단정한 입매도. 하나같이 기묘한 그늘을 머금고 있다.
이력서의 사진이 아까울 정도로 실물 쪽이 훨씬 더 미남이었다. 다만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응달이 실제 모습을 지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검은 우물이 그의 인상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정말로 예술품 같은 남자였다.
“우태원입니다.”
짤막한 소개를 마친 그가 기다란 다리를 뻗었다. 데스크에서 내려온 한수현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비뚤었다.
“합격.”
또각거리며 걸어간 한수현이 바깥으로 빠졌다. 둘만 남은 걸 확인한 진무원이 문을 닫았다. 탁. 안이 조용해졌다. 우뚝 선 남자가 차유신을 내려다봤다. 몸을 일으킨 차유신이 턱짓을 했다.
“저쪽 소파에 앉아요.”
“네.”
큰 보폭으로 소파에 다다른 남자가 착석했다. 맞은편에 앉은 차유신이 남자의 이력서를 한 번 더 검토했다.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김후준 의원실에서 인턴 생활하면서, 이례적으로 정책 비서급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 무렵 김후준 선배가 법무부와 검찰총장 사돈기업간의 납품거래를 적발해 당시 장관이 경질된 일이 있었죠. 그때 우태원 씨 역할이 좀 있었다 들었습니다.”
“네. 당시 자료 수집을 제가 주로 했습니다.”
“인턴치고 고생이 많았겠네요.”
“별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고개를 저은 우태원이 차유신을 똑바로 봤다. 길고 시원시원한 눈매가 느슨해졌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게 좋았어요? 개싸움 체질이시네.”
가붓하게 테이블을 두드린 차유신이 담뱃갑을 찾았다.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훅 번지는 연무 틈으로 자신을 주시해오는 우태원이 비쳤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듯 연기를 흩뿌린 차유신이 물었다.
“출신지가 어떻게 됩니까.”
“역현구 운도동입니다.”
“운도동이라.”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도동. 차유신이 맡고 있는 역현구을과 맞닿아있는 역현구갑의 중심지. 차유신의 손에 의해 역현구을이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조성된 가운데, 이제 대한민국에 남은 마지막 우범지역.
국내 최대 범죄조직인 역운회의 거점.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차유신의 톤이 낮아졌다.
“몸에 문신 있습니까.”
우태원이 기탄없이 답했다.
“있습니다.”
“어쩌다가.”
“호기심이었습니다.”
“어디에?”
“가슴 쪽에 있습니다.”
“잠깐 탈의해 봐요.”
차유신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크기 확인해보고, 지워야 할 것 같으면 지웁시다. 난 단정한 친구들을 좋아해서요. 직전에 있던 도균이라는 친구도 나 때문에 문신 지웠거든.”
더 묻지도 않은 우태원이 입고 있던 재킷으로 손을 가져갔다. 단추를 풀어 양옆으로 젖히고, 셔츠 윗부분부터 차곡차곡 풀어나갔다. 점점 벌어지는 셔츠 틈으로 단단한 흉근이 드러났다. 근육의 크기가 제법 커서, 드리운 그림자가 덩달아 짙었다. 흉근 다음으로 나타난 복근도 마찬가지였다.
차유신의 눈 밑이 움찔했다. 하루 이틀 운동해서 완성되는 몸이 아니다. 차유신 역시 자기관리의 일환으로 운동을 챙겨 하는 편이라 바로 알아봤다. 단순한 취미 수준의 관리로 나온 근육이 아니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자, 묘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일반인이 저렇게까지 몸을 만들 이유가 있나.
단추를 전부 해제한 우태원이 옷감을 젖혔다. 왼쪽 가슴부터 배까지 흘러내리는 라인을 타고 뱀 모양의 새까만 문신이 있었다. 그 옆으로 길게 그어진 상흔이 눈에 띄었다. 차유신의 동공이 커졌다. 이번엔 다른 이유였다.
가슴에 약 세 개, 배에 약 다섯 개. 일단 보이는 것만 그 정도.
“흉터가 많네요.”
차유신이 차갑게 말했다. 우태원이 심상히 답했다.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릴 일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
“운도동이 좀 그런 동네이긴 한데… 질 나쁜 친구들이 아주 많았나 봅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을 모아두면 사고가 나게 마련이죠. 저를 포함해서요.”
우태원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차유신의 목울대를 타고 꿀꺽 침이 넘어갔다. 부모가 없구나. 급하게 잡힌 면접이라 일단 이력서만 요구한 상황이다 보니, 주민등록등본 등을 확인하지 못한 터였다. 이력서에 적힌 ‘군 면제’라는 글자를 그제야 떠올렸다. 사유는 아마도 가족관계등록부상 부모를 알 수 없는 사람, 즉 고아. 말이 없어진 차유신을 힐긋한 우태원이 또박또박 뇌까렸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그쪽 친구들하고 연락 끊은 지 꽤 됐습니다. 똑같은 처지들끼리 지내서 뭐 합니까.”
차유신은 가만히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무릎 위에 올라온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두드려졌다. 감이 잡힌다. 출신지는 역현구 운도동. 어릴 때 부모를 잃었고, 친구들은 죄다 그쪽 동네 건달이 됐을 거다. 문신을 새긴 건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 때. 그 동네에선 흔한 일이다. 그 나이 무렵에 역운회에 소속되길 원하는 놈들이 많다. 일찍부터 문신을 새기는 일은 자신이 준비된 건달이라는 걸 피력하는 수단이다.
어릴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태원은 성인 무렵 정신을 차렸다. 서울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상위권 학과에 입학해, 안정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대국민당의 핵심 정치인인 김후준 의원실에서 인턴 생활까지 했다. 지금까지의 전개로 봤을 때 우태원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언어는 하나였다.
개천에서 난 용.
“의원님.”
문득 커다란 손등이 차유신의 무릎을 덮었다. 눈길이 멍하니 깔렸다. 담배 끝을 타고 제법 큰 불씨가 스르르 낙하하고 있었다. 치익, 소리를 내며 견고한 가죽에 작은 열꽃이 새겨졌다.
“무릎에 떨어질 뻔해서요.”
손을 거둔 우태원이 단조롭게 말했다. 주춤한 차유신이 담배 끼운 손가락을 내렸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직각으로 꽂은 뒤 두어 번 만에 비벼 껐다. 그 사이 우태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붉은 자국이 남은 손으로 뒷짐을 졌다. 여전히 헐벗은 가슴팍이 미미하게 치솟았다가, 곧 잠잠해졌다,
“문신은 안 지워도 됩니다.”
차유신이 입을 다셨다. 우태원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운전은 좀 합니까.”
담뱃불이 꺼지는 걸 확인한 차유신이 손을 옮겨 구석에 놓인 손수건을 잡았다. 이어 다른 손으로 유리컵에 담긴 얼음을 꺼내고는, 손수건에 담아 주물렀다. 우태원이 고개를 들었다.
“못하진 않습니다.”
“김후준방에 있을 때, 운전도 했어요?”
“자주 했습니다.”
“수행은 어쩌고.”
“수행도 때로는 쉬어야 하니까요.”
“지금 집은.”
“의원님댁에서 차로 십 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좋네.”
끄덕인 차유신이 얼음으로 축인 손수건을 내밀었다. 우태원은 의아한 듯 내려다보기만 했다. 차유신이 답답하다는 양 언성을 높였다.
“손.”
그제야 우태원이 뒤에 숨겼던 손을 꺼냈다. 다가온 손등에서 아까보다 선명해진 붉은 자국이 비쳤다. 침착하게 위에 손수건을 덮은 차유신이 덴 자국을 중심으로 얼음을 굴렸다. 우태원이 미세하게 턱을 떨었다. 차유신이 지분거릴 때마다, 굵직한 팔뚝에서 힘줄이 불끈거렸다.
“내일 중으로 주민등록등본 등 필요한 서류를 우리 한수현 비서관 쪽에 제출해줘요.”
“네.”
“출근은 다음 주 월요일, 오전 6시.”
마지막으로 우태원의 손등을 꽉 쥐고 난 차유신이 손을 거뒀다. 우태원이 가만히 차유신을 응시했다.
“역현구에 있는 의원님 사무실로 가면 됩니까.”
“아니.”
“그럼 의원회관으로 갈까요.”
“아니.”
연신 도리질을 한 차유신이 고개가 삐딱해졌다. 피로에 젖은 지시가 흘러나왔다.
“내 집 앞으로 와. 앞으로 매일.”
우태원의 울대뼈가 다부져졌다. 올곧은 한 마디가 사무실을 메웠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2월.]
김후준을 비롯한 대국민당 지도부 7명의 퇴진을 요구합니다.
전 대국민당 국회의원 박신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의 점심은 국회의사당 인근에 있는 캔지스 호텔에서 했다. 대상은 과기정통부 차관이었다. 여의도 국회의원 사이에서는 공적인 식사 자리에서 자주 찾는 몇 곳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양식은 캔지스 호텔, 한식은 대원회, 중식은 일각. 철저하게 프라이빗한 자리가 아닌 경우에는 대체로 그랬다. 과히 비싸지 않되, 적당히 격식을 차릴 수 있는 곳. 그래야 나중에 지출내역과 관련한 꼬투리를 잡힐 일이 없다.
“많이 야위셨네요.”
점심 장소로 갈 때 도보로 나왔기에, 돌아갈 때도 도보를 이용했다. 국회 입구를 향하던 차유신의 곁에서 우태원이 주어 없는 한마디를 했다. 차유신을 곁눈질로 뒤를 봤다. 국회 정문 맞은편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박신회가 보였다. 차유신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머릿속에서 석 글자가 바위처럼 굴러갔다. 박신회.
박신회는 경남의 한 지역에서 사선을 지낸 중진 의원이자 대국민당 핵심 의원이었다. 오선을 앞둔 3년 전, 돌연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30년째 제자리걸음인 대국민당에서 더 이상의 미래를 찾지 못했으며, 국민들에게 면목이 없어 자리를 내려놓겠다 발표했다. 박신회가 출마하지 않은 그해 총선에서 차유신이 당선됐다. 차유신이 의원직에 오른 지 3개월이 됐을 때, 돌연 박신회의 금품수수혐의가 검찰에 넘겨졌다.
현직도 아닌 국회의원이 뜬금없이 수사를 받았다. 박신회의 수수규모는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증거가 불충분했다. 결국 재판부는 무혐의를 선고했다. 그러나 체면을 구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부 언론은 박신회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선제적으로 의원직을 내려놓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유신도, 여의도 사람들도. 박신회의 목에 갑작스럽게 올가미가 걸린 건 그가 대국민당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인물이 있었다.
김후준.
“잠깐만.”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반쯤 지나온 횡단보도에서 방향을 바꿔, 왔던 길을 돌아갔다. 우태원이 신속히 차유신을 따랐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차유신이 신호등 인근에 서 있는 박신회 앞에 다다랐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의 여의도에서, 얇은 재킷만 걸친 채 피켓을 든 박신회는 차유신을 보지도 않았다.
“선배님. 날이 춥습니다.”
차유신이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박신회는 역시 차유신을 외면했다.
“새벽부터 계속 나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근처에서 잠깐 몸 좀 녹이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박신회는 끝까지 차유신을 보지 않았다. 먼 곳에서 날아든 눈발이 차유신과 박신회를 회오리처럼 휘감았다가, 곧 흩어졌다. 갑작스레 찾아든 한기에 차유신이 가볍게 움츠렸다. 박신회만이 아무런 반응을 비치지 않았다. 차유신의 호흡이 곤로해졌다.
“죄송합니다. 굳이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차유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젖혔다. 우태원이 다급히 차유신을 잡았다. 뿌리친 차유신이 흘러내린 코트를 고쳐 쥐었다. 이내 박신회의 어깨에 단정하게 얹었다. 박신회의 목이 미동했다.
“무리하지만 마십시오. 후배들 마음이 안 좋습니다.”
견고하게 박신회를 코트로 감싸고 난 차유신이 허리를 굽었다. 이내 몸을 바로 하고, 횡단보도를 향해 걸었다. 옆얼굴을 타고 냉풍을 머금은 시선이 느껴졌다. 나직한 부름이 찾아들었다.
“유신아.”
갓 나아간 발이 멎었다. 차유신의 얼굴이 돌아갔다.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낯으로 박신회가 들숨을 삼켰다. 지리멸렬하는 눈보라처럼 의미심장한 경고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사람 조심해. 항상.”
휙 날아온 눈송이가 차유신의 볼을 덮쳤다. 금세 녹은 파편이 가느다란 물기를 남기며 미끄러졌다. 이어지는 한 마디가 족쇄처럼 발목을 감았다.
“특히 김후준.”
차유신의 입술이 말아 물렸다. 괜히 마주볼 용기를 잃은 고개가 떨궈졌다. 사죄를 닮은 대답이 나왔다.
“명심하겠습니다.”
허리를 곧추세운 차유신이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파란 불이 들어온 신호등을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넜다. 묵묵하게 옆에서 따르던 우태원이 입고 있던 코트를 몸에서 거뒀다. 바로 차유신의 어깨 위에 얹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면을 봤다.
횡단보도를 다 넘어왔을 때 차유신은 자신의 상체가 부쩍 묵직해진 것을 느꼈다. 차유신 역시 키가 큰 편이지만, 그에 비해 한 뼘은 더 큰 우태원의 외투 탓에 자꾸만 목덜미가 저렸다. 복잡한 손으로 코트를 여미는 차유신을 일별하며 우태원이 입을 뗐다.
“의원님께서는 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차유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사람 챙기는 걸 좋아할 뿐이야.”
잠자코 차유신을 보던 우태원의 눈빛이 무지근해졌다.
“제가 거기에 들어가려면 한참은 남았겠습니다.”
차유신이 인상을 썼다.
“넌 이미 들어와 있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우태원의 미간이 움칠했다. 미묘한 난색에 젖은 우태원을 마주 보며, 차유신이 쐐기를 박았다.
“네가 먼저 나를 선택했잖아. 그러면 나는 대가를 줘야지.”
입을 다문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성큼성큼 나아가는 차유신의 뒤에서 우태원이 조금 웃었다. 명백한 웃음인데, 차유신은 그것이 만족이나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비웃음 같았다.
*
[대국민당 집권 2년 차,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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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 역현T시티 사업팀
수신: 차유신 의원실
제목: 제 3차 역현T시티 입주 확정 기업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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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에 머문 시선이 미끄러졌다. 지난해 9월 1차로 72개 벤처기업이 입주한 후 지난 1월 2차로 91곳이 추가 입주했다. 다음 달 3차로 84곳이 들어오면 사실상 역현T시티 조성사업이 마무리된다. 현재 인근 부지를 확장 개발하며 건물을 올리고 있지만, 이 정도면 차유신이 초기에 구상했던 T시티 모델은 완성된 셈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귓가에 가져간 뒤, 익숙한 단축번호를 눌렀다. 반대편에서 바로 응답이 들려왔다.
-네. 의원님.
“방으로 와 봐.”
할 말만 마치고 통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내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우태원이 차유신을 봤다.
“네.”
“이거 리스트 보고.”
팩스로 받은 과기정통부 문건을 내밀었다. 우태원은 신속하게 문서를 챙겼다. 서랍을 연 차유신이 또 다른 서류뭉치를 꺼내 위에 얹었다.
“내가 기존에 올린 추천 기업 리스트하고 비교 목록 만들어. 들어간 곳은 어디고, 빠진 곳은 어딘지.”
“빠진 곳에 대해 과기정통부에 이유라도 따질 셈이십니까.”
“들어간 곳에 대해서도 이유 따질 거야. 필요하면.”
우태원이 멈칫했다. 물끄러미 차유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곧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하고. 시간 없으니까.”
“네.”
우태원이 발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어가 소파에 앉는 걸 본 차유신이 고개를 가눴다. 동시에 내실 문이 두드려졌다. 의사를 묻지도 않고 벌컥 문부터 연 건 수석보좌관 진무원이었다. 표정이 다소 다급해 보였다.
“유신아. 준비하고 나와 봐.”
“뭔데.”
차유신이 낯을 찡그렸다. 진무원이 허리를 짚었다.
“김후준 의원. 지금 여기로 올라오는 중이야.”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테이블을 짚은 손이 곤란한 듯 표면을 지분거렸다. 왜 갑자기 그가 찾아왔는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넌 할 일 하고 있어.”
가볍게 우태원을 가리키고 난 차유신이 몸을 일으켰다. 우태원은 가만히 수긍했다. 날숨을 내쉰 차유신이 옷걸이에 둔 재킷을 채 걸쳤다. 이내 바깥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밖으로 나와, 내실 문을 반쯤 닫았을 때 입구 쪽이 열렸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김후준이 느긋하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차유신이 구십 도 각도로 몸을 굽었다.
“오셨습니까.”
“유신이 빼고 전부 나가자.”
김후준이 다짜고짜 지시했다. 사무실을 채운 보좌진들이 잠시 술렁였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그들을 일별한 차유신이 고갯짓을 했다. 알아들은 보좌진들이 우르르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여덟 명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자, 안이 부쩍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김후준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내실 안 우태원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앉아 봐.”
중앙의 테이블로 걸어간 김후준이 털썩 몸을 앉혔다. 차유신은 침착하게 그의 맞은편 자리로 이동했다. 몸을 내리는 차유신을 김후준이 저지했다.
“거기 말고.”
차유신의 고개가 들렸다.
“내 옆으로.”
주춤했던 차유신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김후준이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차유신이 착석하자마자 김후준이 팔을 뻗었다. 어깨를 부드럽게 두르고는, 가볍게 주무르기까지 했다. 적막 속에서 그의 동공이 간헐적으로 흐려졌다. 술을 먹고 왔구나. 차유신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너 아주 예뻐하는 거 알지.”
김후준이 느른한 한 마디를 꺼냈다. 차유신은 잠자코 끄덕였다.
“압니다.”
“너도 나를 아주 좋아하고.”
“네.”
“훌륭한 관계야. 아주 훌륭하지.”
김후준이 흡족하게 고개를 젖혔다. 언어며 몸짓은 다소 감정적이었지만, 전혀 과하지 않았다. 방백하는 연극배우를 연상케 했다. 차유신은 그를 관람하듯 응시했다. 그러면서 계산을 했다. 지금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 섞여 있는 진심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까지 할 셈인 걸까.
김후준은 영화배우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국민배우로도 불린 일이 있던 인물이다. 여러 인기 요인이 있었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는 기본이고, 명문대 출신으로 머리까지 총명했다. 배우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회적 참여를 일삼았다. 근거지는 대국민당이었다.
나이가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김후준은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대국민당 대변인으로 들어갔다. 정치인이 되고 난 후부터의 이미지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부드럽고 나긋하게 여심을 사로잡아온 명배우는 정계에 입문한 순간 치열한 정쟁을 서슴지 않는 대국민당의 ‘칼’이 됐다.
사실은 그게 진짜 김후준이었다. 정치인 김후준이 진짜고, 배우 김후준은 대중에게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에 불과했다. 20년이 넘는 연기경력은 지금도 종종 그를 가짜로 만든다. 심지어 그 가면이 너무도 정교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여의도 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너 같은 놈을 본 적이 없어. 착실하지, 똑똑하지, 충성심 있지. 비주얼도 아주 그냥 연예인 안 한 게 아까울 정도로 빼어나고. 네가 대국민당 복덩이야. 너 대국민당에 들어오고 나서 우리가 10년 만에 여당이 됐잖아. 안 그래?”
“과찬이십니다.”
“과찬? 이게 무슨 과찬이야. 차유신은 이 정도 칭찬받아야지.”
김후준이 꼬고 있던 다리를 까딱거렸다. 차유신의 어깨에 올라온 손이 일정하게 두드려졌다. 차유신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칭찬을 들었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무거운 바위에 억눌린 것처럼 온 감각이 숨을 죽이고 있다.
본능이 알아챈다. 지금 김후준은 일촉즉발이라는 걸.
“유신아.”
김후준이 고개를 돌렸다. 차유신은 똑바로 그를 마주 봤다. 픽, 소리 내어 웃은 김후준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차유신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돌연 무표정을 지었다. 낮지만 강고한 언어가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왜 그저께 백블*에서는 그따위로 지껄였어.” (*백브리핑)
김후준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차유신의 눈 밑이 움찔했다. 어깨를 감고 있던 김후준의 팔뚝이 풀렸다. 이동한 손이 차유신의 얼굴에 다다랐다. 맨 볼이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 주물러졌다.
“응? 유신아. 선배가 묻잖아.”
“3년 전 국회를 떠난 박신회 선배가 보복성 검찰수사를 받은 것과 관련해 대국민당 내부에서 이런저런 아규가 있었다는 거, 선배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차유신이 입을 뗐다. 김후준의 이마에 금이 갔다.
“박신회 선배는 현역 시절 대국민당의 아버지로까지 불린 인물입니다. 떠난 지 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박 선배 키즈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많다는 건, 박 선배가 그만큼 대국민당에서 확고한 입지를 보유했었다는 방증이죠.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구로갑 공천을 신청한 최도현 선배도 그중 하나입니다. 박신회 선배의 뜻대로 대국민당에 필요한 변혁을 이뤄나가겠다며 공개표명까지 했죠.”
“그런데.”
“최도현 선배가 공천 신청하고 일주일도 안 돼 ‘구로의 아들’로 불리는 인기 변호사 출신 김태경을 같은 지역구에 올리셨습니다.”
차유신의 눈초리가 꼿꼿해졌다.
“바로 선배께서요.”
김후준이 고개를 까딱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현재의 배치대로라면 당연히 김태경이 됩니다. 최도현 선배는 뼛속까지 경남 출신입니다. 물론 젊은 층 지지율이 탄탄한 인물이고, 구로갑은 과거 최 선배가 운영하던 사회적 기업의 본거지이기도 해 승산 가능성 자체는 높다고 할 수 있죠. 다만 김태경이 나오면 판이 뒤집힙니다. 최도현 선배로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지역에 김태경을 왜 꽂습니까. 최도현 선배 죽이기가 아니고서야. 이거 명백한 자객 공천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차유신이 가볍게 시근덕거렸다. 김후준이 헛웃음을 쳤다. 그의 입매가 의미심장하게 비틀렸다.
“그래서, 대국민당에서 자객 공천이 행해졌다고 기자들에게 친절하게도 설명해줬다?”
볼을 꼬집은 김후준의 손이 떨어졌다. 훅 멀어졌던 손이 갑자기 차유신의 뺨과 마찰했다. 찰싹,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유신아.”
거둬진 손이 다시 볼을 향했다. 이번에는 제법 셌다. 짝. 차유신의 어깨가 흔들렸다.
“우리 예쁜 유신아.”
또 거둬진 손이 이번에는 있는 힘껏 얼굴을 후려쳤다. 착. 머리가 통째로 돌아갔다. 김후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자꾸 선배들 엿을 먹이니. 응?”
시트를 짚은 차유신의 손가락이 꿈지럭거렸다. 얻어맞은 부위가 터질 것처럼 홧홧했다. 부어오른 혈관이 발버둥 치듯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탁. 내실 쪽에서 기척이 났다. 김후준과 차유신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표정 하나 없는 우태원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우뚝 앞에 선 그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건넸다. 차유신이 아까 대조를 지시한 문건이었다.
“작업 마쳤습니다.”
“넌 왜 안 나갔어?”
김후준이 버럭 소리쳤다. 우태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차 의원님께서 안에 있으라 지시하셨습니다.”
“지시를 받았든 말았든 내가 아까 나가라고 했을 때…!”
“나가. 우태원.”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우태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고개를 고쳐 든 차유신이 또박또박 명령했다.
“당장 나가.”
우태원의 울대뼈를 타고 굵은 침이 넘어갔다. 가까스로 호흡을 고른 그가 꾸벅했다.
“알겠습니다.”
등을 보인 우태원이 입구를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고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뒤태로 나섰다. 서늘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또다시 사무실이 고요해졌다.
“아팠겠구나.”
다시 차유신을 본 김후준은 한층 가라앉은 낯이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몸을 바로 한 차유신이 도리질을 했다.
“괜찮습니다.”
“이리 와봐라. 한번 안아보자.”
김후준이 팔을 내밀었다. 차유신은 말없이 상체를 숙였다. 얼어붙은 등에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아이라도 타이르듯 다독이고 난 김후준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차유신을 주시했다. 차유신은 꾹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번이 약 열 번째일까. 김후준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 그러고 난 후 무마하듯 차유신을 달래 온 것이.
“넌 충성도도 뛰어나고 똑똑한 놈이지만.”
김후준의 손길이 무거워졌다. 등 위쪽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척추를 타고 미끄러졌다. 차유신은 그저 눈을 깔았다.
“너무 올곧아. 그거, 결코 좋은 것 아니다. 사람이 너무 곧으면 부러지거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만 거스르는 거니. 응?”
“저는 그저….”
“그만. 여기까지 하자.”
김후준의 손이 떨어졌다. 흐트러진 정장 차림을 정돈한 그가 자못 냉랭하게 경고했다.
“너무 바르게 살지 마. 너만 손해다.”
김후준의 재킷 칼라를 타고 손가락이 흘러내렸다. 차유신은 수긍도, 부정도 없이 그의 건조한 손등을 읽었다.
지잉. 문득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김후준이 액정을 확인한 후 얼굴에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 무슨 일이야. 어… 어? 재열이가?”
김후준의 눈이 확 커졌다. 차유신은 의아한 듯 눈길을 끌어올렸다. 김후준이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
“알았어. 일단 내려가지. 경찰은 불렀고? 구급차는? 그래. 가서 얘기하자.”
통화를 종료한 김후준이 몸을 일으켰다. 차유신이 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밑에 있는 우리 수행이 기절할 정도로 누구한테 맞았다는데.”
김후준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한숨 쉬듯 뇌까렸다.
“같이 있던 비서관 놈은 담배 태우러 자리를 비웠던 터라 상황을 미처 못 봤고, 맞은 놈도 뒤에서 공격당한지라 범인을 모르겠다고만 하네.”
“그런 일이….”
차유신이 멍하니 읊조렸다. 문손잡이를 쥔 김후준이 입을 다셨다. 텁지근한 목소리가 귀를 옭맸다.
“그러게. 그런 일이 다 있구나.”
*
보좌진들은 김후준이 나간 걸 확인한 후에야 사무실로 복귀했다. 보좌진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차유신은 내실 안에 머물렀다. 부어터진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냉동실에서 꺼낸 얼음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차유신은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차유신을 따라 덩달아 조용해진 상대방이 약간의 텀을 둔 끝에 말했다.
“우태원입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얼음을 쥔 손이 볼에 닿았다. 아직 녹기 전이라 뻑뻑한 표면으로 가볍게 피부를 짓누른 차유신이 탄식했다. 나지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뚜벅뚜벅 걸어온 우태원이 뒷짐을 졌다. 차유신은 본 척 만 척 소파로 향했다. 풀썩 자리에 앉은 후에야 곁눈질로 우태원을 봤다.
“너희는 못 봤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김후준 의원실 보좌진 맞는 현장.”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우태원이 고저 없이 답했다. 차유신이 피로한 듯 목을 젖혔다. 금방이라도 감길 듯 눈꺼풀이 무거웠다. 기계적으로 볼 위에서 움직이던 얼음이 부쩍 힘을 잃었다.
“제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돌연 우태원이 물었다. 차유신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들렸다.
“뭐를.”
“얼음마사지,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요.”
차유신의 눈이 한번 깜박였다. 맥 빠진 손목이 무릎 위에서 늘어졌다.
“좋을 대로 해.”
바로 우태원이 다가왔다. 차유신에게 쥐여 있던 얼음이 우태원에게 넘어갔다. 그새 녹기 시작한 얼음을 한번 쥐었다 놓은 그가 허리를 숙였다. 차유신의 얼굴에 눈을 맞추고는 아직도 화끈한 볼에 얼음을 갖다 댔다. 싸늘한 감각이 피부를 파고드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표피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소스라친 차유신이 목덜미를 전율했다.
“아….”
“아프십니까.”
“조금.”
“그래요.”
우태원이 피식거렸다. 멀거니 마주 보던 차유신의 동공이 미동했다. 기묘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우태원과 2개월 동안 일하면서, 처음으로 웃는 걸 봤다. 방금 전에.
“더 이상 의원님께서 아파하는 건 안 봤으면 합니다.”
보다 얼굴을 가까이 한 우태원이 중얼거렸다.
“마음이 안 좋네요.”
조금조금 미소가 선명해졌다. 차유신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중심을 잃은 시선이 정면을 헤맸다. 무심코 자리를 잡은 곳에 우태원의 단단한 가슴팍이 있었다. 섬세한 라인을 지닌 검은색 재킷 너머로, 옅은 핏자국을 새긴 흰 셔츠가 보였다. 차유신의 볼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턱 밑으로 뚝, 떨어졌다. 입안에서 혼잣말이 굴러갔다. 마음이 안 좋다.
그게 웃으면서 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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