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국민당 집권 4년 차, 1월.]
“결론은 네거티브 규제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것을 제외한 신기술이나 신사업은 뭐가 됐든 풀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안에 계신 분들 중에서 본인이 운영 중인 스타트업에 걸린 규제를 전부 꿰고 있으신 분, 손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차유신의 입에서 마이크가 거둬졌다. 청중석에서 서너 명가량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나머지 오십여 명은 홀린 듯 차유신만 보고 있었다. 끄덕인 차유신이 손짓을 했다. 들렸던 손이 빠르게 내려갔다.
“여러분이 무지해 모든 규제를 꿰고 있지 못한 게 아닙니다. 무지한 건 정부입니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국내에 어떤 신기술 사업들이 존재하고, 여기에 어떤 법적 근거를 적용해야 합리적인지 모릅니다. 비단 이번 정부의 일이 아닙니다. 삼 년 전에도, 오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꾸준하게 반복돼 온 문제죠. 제가 ‘케이마’를 운영할 때부터 말입니다.”
차유신의 입에서 긴 숨이 새어 나왔다. 한층 노곤한 음성이 번졌다.
“정부에 규제를 요구하는 건 여러분이 가진 당연한 권리입니다.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세요. 새로운 서비스와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싶고, 그러나 이와 관련해 어떤 규제가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몰라 불안하고.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사업하다가 어느 날 정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규제를 가하면 고스란히 사업을 접어야 하죠. 이런 현실이 불합리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사업은 아무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마이크가 다시 가까워졌다. 단정한 한 마디가 홀을 울렸다.
“바로 저처럼 말입니다.”
*
“의원님. 사인 한 장 부탁드립니다.”
강당을 나서는 차유신의 뒤에서 한 젊은 남성이 다급히 책 하나를 건넸다. 받아든 차유신이 표지를 살폈다. 망가진 4차 산업혁명. 자신이 3년 전 썼던 책이다.
“사인은 해드리는데.”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분리했다. 가장 첫 페이지에 서명을 새기며 충고하듯 말했다.
“의원 호칭은 좀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책을 덮어 남자에게 줬다. 돌려받은 남자가 머뭇거리며 차유신의 눈치를 봤다.
“저에게는 그 호칭이 워낙 익숙해서… 아니, 저뿐만이 아니라 역현T시티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차유신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피로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저 국회의사당 출입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실례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그런 건 전혀 아니고요.”
손사래를 친 차유신이 몸을 틀었다. 마지막으로 남자를 일별하고는 발을 뗐다.
“그냥 정정해드린 겁니다. 전 아닌 건 반드시 아니어야 하거든요.”
저벅저벅 걸어가는 차유신의 뒤에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살펴 가십시오. 차유신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갈음했다.
긴 복도를 가르며 입구로 향했다. 근처의 벽면에 ‘미래를 만드는 역현T시티’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저게 아마 내가 정한 표어였던가. 차유신은 새삼 아리송했다. 역현T시티 조성 프로젝트에는 차유신의 손이 닿은 곳이 너무도 많아, 차유신은 때때로 자신이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게 어려웠다.
“어?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저편에서 익숙한 부름이 찾아들었다.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휴게공간에서 다리를 꼰 채 앉아있던 진무원이 손을 들었다. 묵묵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맞은편에 앉는 차유신을 진무원이 느긋하게 응시했다.
“강의는 잘했고?”
“그럭저럭.”
“지겹겠다. 만날 같은 얘기하느라.”
“지겨운 거 하루 이틀인가. 그래도 나는 그러려니 해야지.”
차유신이 턱을 괴었다. 헛웃음을 친 진무원이 팔짱을 꼈다. 은근한 질문이 건네졌다.
“그래도 T시티 오면 마음은 편하잖아. 안 그래?”
차유신은 말없이 눈을 굴렸다. 부정하긴 어려운 사실이다.
5년 전, 스물여섯 살. ‘비운의 귀공자’ 타이틀을 앞세워 역현구을 국회의원에 당선된 차유신이 가장 먼저 한 건 해당 지역의 중심 사도동을 거점으로 한 ‘역현T시티 조성 프로젝트’였다. 집창촌과 유흥가투성이던 구역을 밀어내고 생긴 공지에 스타트업을 위한 대형 단지를 조성했다.
소요 기간은 총 3년. 완공을 마치자마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스타트업이 잇달아 T시티에 입성했다. 당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이던 차유신은 과기정통부 및 서울시의 지원 아래 T시티 입주자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했다. 그건 그들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차유신의 과거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자신처럼 성공을 눈앞에 두고 무너지는 청년 사업가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차유신은 대학교 2학년 때 모빌리티 스타트업인 케이마를 차렸다. 케이마는 전용 앱을 통해 유저의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파악한 후, ‘카풀’이 가능한 일반 차량을 매칭 시켜주는 서비스였다. 모빌리티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나온 파격적인 플랫폼이다.
택시비의 최대 5분의 1 가격으로 유사 택시를 제공하는 서비스. 매력적인 사업모델에 현혹된 소비자들은 빠르게 몰렸다. 세 달 만에 가입자 10만 명을 달성했고, 곳곳에서 투자 문의가 들어왔다.
케이마 설립 6개월 만에 정부에서 사업 금지라는 제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수업계에서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택시기사 밥줄 끊기’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정부는 표심에 굴복했다. 케이마가 명백한 불법으로 낙인찍힌 후, 차유신을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국회로 나섰다. 수많은 공청회에서 신사업 규제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차유신을 밀어준 건 당시 제1야당이던 대국민당이었다. 차유신을 청년산업위원회 위원으로 추대하고, 다양한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게끔 부추겼다. 차유신에게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케이마를 강제로 접은 ‘불운한 청년 스타트업 대표’에게 젊은 층은 동정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차유신의 부모는 사고로 사망한 유명 자선단체 ‘위아집’ 공동 창립자로, 사회 교과서에도 실린 인물이었다.
훌륭한 부모를 불의의 사고로 일찍이 여읜 데다가 큰맘 먹고 세운 스타트업은 설립한 지 반년 만에 정부 규제로 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 귀티 나며 눈에 띄는 비주얼을 지녔고, 웬만한 정치인을 능가할 정도의 달변가다. 언론은 차유신에게 ‘비운의 귀공자’ 타이틀을 부여하고 갖가지 스토리텔링을 덧붙였다. 대국민당의 계산이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대국민당은 자신들의 지원으로 꽃을 피운 훌륭한 싹을 아예 앞마당에 들였다. 차유신이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바로 공천 제의가 들어왔다. 지역구는 국내 양대 우범지역 중 하나인 서울 역현구을.
차유신은 해당 지역을 ‘청년 신사업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60%에 가까운 지지율을 얻고 당선됐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역현구을에 ‘T시티’라는 거대 스타트업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3년 넘게 모든 게 순조로웠다. ‘비운의 귀공자’에서 그냥 ‘귀공자’가 되어간다는 언론 기사가 쏟아졌다.
결과는 또 ‘비운의 귀공자’였지만 말이다.
“형은. 별일 없고?”
차유신이 물었다. 진무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이 있었겠냐. 그저 노느라 바빴지.”
“내가 백수 됐다고 형까지 백수되면 어떻게 해. 대국민당에 남은 방 많을 텐데, 아무 데나 그냥 들어가지. 형 정도면 좋다고 반겨줄 영감 널렸는데.”
“난 네 밑 아니면 재미없어.”
진무원이 시시덕거렸다. 이내 장난스럽게 뇌까렸다.
“아. 차유신방 따까리할 때 재밌었는데.”
“재밌긴 뭐가 재밌어. 솔직히 좆같지. 일만 존나게 많고. 내가 형 수석보좌관이라고 제대로 챙겨준 적은 또 있기나 했나.”
“뭐, 아예 좆같지 않았다면 거짓말인데.”
진무원이 기다렸다는 듯 농을 쳤다. 차유신은 덤덤하게 진무원을 마주 봤다. 소리 내어 웃은 진무원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보람이 있었잖냐.”
진무원이 길게 목을 젖혔다. 입구 너머로 보이는 널따란 T시티를 훑어보고는, 흡족하게 갸웃했다.
“저거 다 우리가 만든 거야. 안 그래?”
차유신이 턱을 괸 손을 풀었다.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뭐. 그건 맞지.”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한 차유신을 관찰하듯 주시하던 그의 눈초리가 문득 움칠했다. 차유신의 정수리 너머, 벽에 걸린 TV를 힐긋한 그가 감탄했다.
“이야. 우태원 잘 나가네.”
차유신의 시선이 넘어갔다. 커다란 스크린 안에 예술작품 같은 남자의 이목구비가 담겨있다. 밑으로 걸린 붉은 헤드라인에 하얀 고딕체 자막이 찍힌다.
「국무총리 직속 청년미래위원회 위원장에 우태원…”소신껏 하겠다”」
“총리 직속 위원회 위원장에 초선 꽂는 건 오버 아니야? 저 새끼 스물여덟밖에 안 됐잖아. 씨발. 스물여덟이 무슨 장관급….”
“초선은 안 된다는 원칙도 없으니까. 위원회 성격상 젊은 의원이 선임되는 게 보기 좋기도 하고.”
심드렁하게 맞받아친 차유신이 입을 다셨다. 단상에 올라가기 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우태원이 클로즈업됐다. 정장 칼라에 붙은 금색 배지에서 빛이 났다.
“무엇보다, 우태원은 지금 김후준 대표가 가장 아끼는 신진 의원이잖아. 어떻게든 가장 눈에 띄는 곳에다 배치하고 싶겠지. 솔직히 괜찮은 싹이잖아? 비주얼 되고, 스토리 좋고.”
“딱 차유신 2년 전 버전이네.”
진무원이 고저 없이 읊조렸다. 차유신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조용해진 차유신을 살피던 진무원이 입을 뗐다. 자못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그런데 너 우태원하고 아예 연락 안 하냐? 우리 막내로 있을 때 네가 엄청 물고 빨고 했잖아. 그 새끼도 너한테 간, 쓸개 다 줄 것처럼 굴었고.”
차유신의 눈이 깔렸다. 새하얀 테이블에 눈길을 박고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했다.
“내가 저 새끼한테 연락을 어떻게 해? 쪽팔리게.”
가감 없는 사실이었다. 의원직에서 물러난 건 제1야당인 신진화당의 공작이었고, 차유신의 잘못은 사실상 없었는데도. 아주 운 나쁜 사고였음에도. 그런데도 차유신은 한때 자신의 보좌진이었던 우태원에게 지금의 자신을 보이는 게 비참했다.
우태원이라서 비참했다.
*
오전 6시 기상. 세안을 마친 후 밖으로 나가 한 시간에서 두 시간가량 조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조간신문을 보며 아침을 해결한다. 점심시간까지는 최근 집필 중인 ‘K-스타트업의 미래’ 원고 작업을 하고, 점심에는 국회의원 시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소소하게 만나 식사를 한다. 오후에는 대학이나 단체 강연이 한 개가량 잡혀있고, 거기서는 청년미래 산업과 관련한 발표를 주로 한다.
지독하게 반복적이며 재미없는 삶이다. 의원 시절에도 반복적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때는 굴곡이 있어 심심하지 않았다. 지금 차유신의 인생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수준의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원고는 거의 다 완성을 했는데요, 퇴고 기간이 좀 필요해서 이번 달 말에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하게 하세요. 의원님. 저희가 기다리면 돼요.
국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관련 발표회에서 패널 참석을 마친 후 새 서적 출간을 맡은 출판사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담당자는 친절하게도 차유신의 변명에 응대했다. 차유신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여기서도 또 의원님.
그놈의 의원님 소리 좀 그만 들었으면 싶은데.
“끊겠습니다.”
숨을 고른 차유신이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날 선 햇볕에 괜한 두통이 일었다. 가볍게 도리질을 치며 정신을 차렸다.
끼익. 불현듯 눈앞에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유신은 코트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며 새까만 보닛을 응시했다. 왜 굳이 자신의 앞에 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뒷좌석이 벌컥 열렸다. 쭉 빠져나온 다리가 차유신을 향해 다가왔다. 차유신의 속눈썹이 흠칫했다. 쯧, 하며 혀가 채였다.
차유신 의원실 출신 보좌진 김운열. 현 신진화당 신인대 대표 의원실 소속.
“또 신인대가 보냈냐.”
시큰둥하게 쏘아붙인 차유신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물고, 불을 붙이는 걸 보며 김운열이 한숨을 쉬었다.
“형님. 의원회관 앞에서 흡연하시면 안 됩니다.”
“네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더 하면 안 될 짓 같은데.”
훅, 연기를 뿜은 차유신이 바닥을 지르밟았다. 헛기침을 한 김운열이 허리를 짚었다. 사뭇 진중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일단 한 번 만나나 보십시오. 신 대표도 다 생각이 있어서 콜을 한 것 아닙니까.”
“어. 좆까라고 해.”
재를 떤 차유신이 외면했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았다 뜬 김운열이 성큼 몸을 밀어붙였다. 이내 차유신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진짜 왜 이래요, 형님. 어? 신 대표 그렇게 쉽게 기회 내주는 사람 아니야. 형도 알잖아. 기회 있을 때 잡아. 제발.”
“사람이 말이야. 개가 될 땐 되더라도 키워준 주인은 안 무는 법이거든.”
차유신이 곁눈질로 김운열을 봤다. 김운열이 표정을 굳혔다.
“내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대국민당에서 퇴출되긴 했지만, 여전히 난 대국민당 사람이야. 나 대국민당에 꽂아준 김후준 대표부터, 거기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내 사람이라고. 키워준 주인을 어떻게 배신해. 어?”
죽 뻗은 손이 휴지통을 향했다. 가차 없이 꽁초를 처박은 차유신이 뇌까렸다.
“물론 배신하는 새끼도 있는 것 같다만.”
얼굴을 감싼 김운열이 탄식했다. 무시한 차유신이 발을 뻗었다. 그대로 지나쳐가려는 등 뒤로 다시 김운열이 다가왔다. 나아간 손이 다급하게 차유신의 손목을 챘다. 제법 절박한 손놀림이었다.
“그래. 그러면 자기 사람 하나 살려주는 셈 치고, 나 좀 봐줘요. 형님. 나도 형 사람이었잖아. 그거 한번만 생각해주면 안 돼?”
김운열이 얼굴을 들었다. 차유신은 탐탁지 않게 그를 마주 봤다. 다분히 우는 소리가 귀를 옭맸다.
“나 오늘도 형 못 데려가면 신인대방에서 잘릴 것 같아. 이건 진짜야.”
차유신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짜증 섞인 한 마디가 나왔다.
“너 진짜 가오 떨어지게 산다. 씨발 놈아.”
*
차유신을 뒷좌석에 태운 차가 이동한 곳은 광화문이었다.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덕수궁 인근의 한식당 ‘자로초’ 앞에 다다라 멈췄다. 신속하게 나온 김운열이 차유신의 문을 열어줬다. 느릿하게 내린 차유신의 시선이 한동안 자로초 간판에 머물렀다. 국회의원 시절 입구가 닳도록 드나든 장소다. 여길 또 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복잡했다.
“가장 안쪽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또 다른 보좌진이 차유신을 안내했다. 차유신은 떨떠름하게 입구로 들어섰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인지라 복도는 한산했다. 말끔한 바닥에 세 사람의 구둣발 소리만이 내려앉았다.
문 앞에 선 김운열이 의례적인 노크 후 손잡이를 잡았다. 열어젖히자마자 안에서 정종을 자작하고 있던 신인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휘었다.
“오랜만이야. 차유신이. 응?”
인사도 없이 나아간 차유신이 신인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사이 김운열과 또 다른 보좌진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똑바로 신인대를 본 차유신이 한껏 냉랭한 음성을 꺼냈다.
“본론부터 얘기하십시오. 시간 없습니다.”
“정종 한잔 어때.”
“신진화당하고는 술 안 먹습니다.”
“그럼 담배라도 하든가.”
신인대가 개의치 않고 테이블에 둔 담뱃갑을 뒤적였다. 빠져나온 한 개비가 차유신에게 건네졌다. 언짢게 보던 차유신이 끝내 받았다. 입에 물고는,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훅 흩뿌려졌다.
“얼마나 놀았지?”
신인대가 느긋하게 물었다. 들숨을 삼킨 차유신이 답했다.
“1년 2개월 됐습니다.”
“할 만해? 야인(野人) 생활.”
“신 대표님께서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상당히 딱딱하게 나오네. 선배님 호칭 쓰는 것도 한번 고려해 봐.”
“생각 없습니다.”
“그래?”
신인대가 피식거렸다.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눈길을 옮긴 그가 보좌진을 향해 손짓을 했다. 빠르게 일어난 보좌진이 테이블 한편에 둔 휴대용 스피커를 챙겨 걸어왔다. 의자 등받이에 늘어진 신인대가 손을 까딱거렸다.
“대국민당 1인자인 김후준 총애받으면서 3년 7개월 동안 역현구을을 잘 갈고 닦아놨지. 그러다 과기정통부 차관 대상 로비의혹 터지면서 옷 벗었고. 나중에 무혐의 판결받긴 했지만, 이미 벗어던진 옷을 어떻게 다시 입어? 그대로 나가리된 거지.”
“지나간 얘기는 갑자기 왜 하시는데요.”
차유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신인대가 태평하게 대꾸했다.
“지나갔다고 다 지나간 게 아닌 얘기들이 있지.”
“지금 제 앞에서 자랑하시는 겁니까.”
“자랑?”
신인대가 실소했다. 차유신이 득달같이 몰아붙였다.
“신진화당 작업이었던 것 다 압니다. 신진화당 조영현, 이선호, 김주희. 평소 저 고깝게 보던 과방위* 위원들. 저들 중심으로 신진화당이 호시탐탐 저 제거하기 위해 물밑 작업 벌여온 거, 모르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약칭)
“뭐,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야 차유신이 예뻤다면 거짓말이지. 다만 우리 짓이 확실해?”
“애초에 제1야당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합니까.”
“그럼 왜 공론화하지 않았어? 물고 뜯었어야지. 개새끼처럼.”
신인대의 눈이 빛났다. 어금니를 씹고 난 차유신의 성대를 타고 묵직한 언어가 번졌다.
“괜히 일만 키울 수 있으니 억울해도 일단 받아들이고 잠시 쉬어라. 3년 안에 다시 호출하겠다. 김후준 선배가 저에게 약속한 내용입니다.”
“김후준이가?”
‘김후준’의 이름을 곱씹은 신인대가 입꼬리도 올리지 않고 웃었다. 차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까부터 내내 여유로 무장해 온 신인대가, 지금은 다소 다르게 보인다.
차유신에 대한 동정이 비쳤다. 방금 전.
“그거 틀어봐.”
신인대가 턱짓을 했다. 보좌진이 스피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잡음 하나 섞이지 않은 매끄러운 음성이 룸을 메웠다.
-차유신이는 내 개야. 내가 시키면 총대 메고 남북통일이라도 시킬 놈이라는 얘기지.
텁지근한 가운데 무게감 있는 목소리. 차유신의 속눈썹이 곤두섰다. 김후준.
-그런 놈하고 너를 트레이드하겠다는 건 나로서도 큰 결단이야. 실망시키지 마. 무슨 의미인지 알지.
김후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대답했다.
-네. 선배님.
차유신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익숙한 목소리다. 아주 많이.
-세팅은 다 끝난 거야?
-네. 증인 및 증거는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내일 서대일하고 박준희 통해 과방위와 행안위*에 흘려. 신진화당과 경찰이 알아서 꼬리 물게끔. 차유신이 과기정통부 차관에 로비해서 역현T시티 스타트업에 대한 국가지원 사업을 부당으로 따냈다. 신진화당에서는 엄청나게 좋아할 만한 빌미지. 신진화당에서 칼춤추기 시작하면 너는 친한 기자들 포섭해서 지속적으로 의혹 제기되도록 만들어. 로비를 안 한 놈은 있어도 한 번한 놈은 없다, 역현T시티 관련해서 그간 얼마나 수많은 부당로비가 행해졌겠느냐. 차유신 죽이기 프레임을 짜는 거야. 일단 프레임만 완성되면, 다음부터는 야당에서 알아서 물어뜯어 주겠지. 어때, 쉬워서 웃음이 나오지. 안 그래? (*행정안전위원회)
말을 마친 김후준이 느른한 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많을 때 습관적으로 행하는 특유의 호흡법이었다. 그 숨결이, 마치 바로 옆에서 전해져오듯 스멀거리며 차유신의 귓바퀴를 건드렸다. 차유신의 턱에서 전율이 심해졌다.
-차유신 금배지는 내가 직접 반납받는다. 말했다시피 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놈이야. 쓸데없는 문제제기 하지 말고 일단 잘 숨어 지내면 나중에 알아서 복당시켜주겠다며 구슬릴 거고, 차유신은 내 지시를 거스르지 못할 거다. 그러니 차유신 쪽 대응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계획한 대로 작업이나 해. 알겠어?
또 날숨을 뱉은 김후준이 상대방을 불렀다.
-우태원.
은은한 저음이 테이블에 깔렸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쿵. 가슴 안에서 묵직한 추가 추락한 듯, 온 흉부가 진동했다.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차유신을 보며 혀를 찬 신인대가 스피커를 껐다. 쫙 펼친 손바닥이 테이블을 짚었다. 한껏 가라앉은 시선이 건네졌다. 차유신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신인대를 마주봤다.
“이래도 1년 2개월 전의 사건이 신진화당 짓이고, 너는 김후준이 지시한 대로 대국민당이 호출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차유신.”
차유신의 아랫입술이 꽉 깨물렸다. 고개를 가로저은 신인대가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차디찬 경고가 머리를 울렸다.
“정신 차려. 차유신. 너 김후준에게 제거당한 거야. 총대를 멘 건 네 막내 보좌진인 우태원이었고. 그걸 너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1년 2개월 동안이나.”
테이블에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곤두섰다. 딱딱한 표면에 박아버릴 듯 손톱을 세운 차유신이 허탈하게 웃었다. 비아냥거리는 혼잣말이 샜다.
“이야. 우태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네가 사람인 줄 알았잖아.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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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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