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함선에 달린 포신이 불을 뿜으면, 수백의 허상괴들이 사라진다.
고레벨, 저레벨 가리지 않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며 지구를,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허상괴들과 싸운다.
제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왕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불나방들이로구나.”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냐.”
“그러하다. 스스로의 강함을 맹신하고, 과신하며. 상대와의 전력 차이조차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든다. 이것을 어찌 어리석지 않다 말하겠느냐.”
왕의 말에 제로는 침묵했다.
그저 조용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며 허상괴들과 치열한 싸움을 이어나가는 플레이어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에 반해 너는 다르다. 비록 두 번째 기회가 있었다지만, 인간의 몸으로 초월의 격을 갖추었다. 그런 널, 어찌 저런 버러지들과 비교하겠느냐.”
왕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왕의 목소리가 허공에 퍼져나갈 때도, 제로는 여전히 침묵했다.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는 제로에, 왕이 제로를 향해 다가오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왕의 주위로 순백의 구체가 만들어지는 순간….
“단순한 욕심이었을지도 몰라.”
돌연 제로가 입을 열었다.
왕은 뜬금없는 제로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래. 이건 단순한 욕심이었어. 인류가 종말의 위기를 벗어나면…, 어떻게 다시 번성할지.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어. 지금의 나에겐….”
‘수명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그러한 뒷말을 집어삼킨 제로가 왕을 바라봤다.
“하지만 말이야. 역시 나 같은 존재는 더 이상 인간들에게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네.”
후둑.
후두둑.
마지막으로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육체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흑골로 이루어진 몸뚱이에 무수히 많은 금이 그어지더니 이윽고 자그마한 파편으로 나뉘어 무너져 내린다.
왕은 점차 무너지고, 붕괴해가는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포기한 것이냐?”
“설마.”
왕의 물음에, 제로가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부터는 조금 다를 거야. 진심을 다해 네놈을 죽여줄게.”
콰아아-!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육신이 폭발했다.
수백, 수천의 검은 뼛조각들이 뒤섞인 폭발이 사방을 휩쓸고.
그러한 폭발이 사그라들었을 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후-. 제약을 푸니 좀 살 것 같네.”
잿빛의 기체가 인간의 형태를 따라 하는 듯, 기묘한 형태를 한 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의 전신은 일렁이는 잿빛의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연기는 모두 죽음의 집합체. 한때 두 눈동자가 있었던 장소에는 붉은 안광만이 빛난다.
더 이상 평범한 생명체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제로를 바라보던 왕이 돌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왕은 알고 있었다.
흑골의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던 제로는,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 본래 지녔던 모든 힘을 해방한 모습일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제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몸이 공포를 느낀다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던 왕이, 변해버린 제로의 흉흉한 안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등에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축 늘여놓은 양손이 미미하게나마 떨린다.
이것이…, 자신이 대적자라 부르던 존재의 진정한 힘이라는 것일까.
허나….
‘인정할 수 없다.’
왕은 이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군림하는 존재. 세계의 종언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차원에 종말을 고하고, 그것을 먹어 치워 왔다.
그렇게 강해지고, 강해져. ‘신’이라 불리는 존재라 하더라도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었는데….
“웃기지 마라!”
파지직-!
콰가가강!
버럭 외치는 왕의 몸뚱이에서, 강대한 존재감이 휘몰아쳤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존재감 속에는 검푸른 뇌전 또한 깃들어 있으며, 그러한 뇌전이 망설임 없이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소용없어.”
제로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검푸른 뇌전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에 인간의 형태로 뭉쳐 있던, 잿빛의 연기. 죽음 그 자체가 뻗어나가며 왕이 만들어 낸 검푸른 뇌전을 집어삼켰다.
폭발음도, 파괴음도 없다.
지금까지처럼 힘의 충돌에 의한 거대한 충격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로를 이루고 있는 죽음은 조용히, 왕이 내뿜은 검푸른 뇌전을 집어삼킬 뿐이다.
한편, 제로는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내는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치는 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무대를 이곳으로 해서 다행이야. 만일 지구였다면 본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죽어 버렸겠지. 뭐, 그래봤자….”
‘허상계라 불리는 이곳에서조차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그 안에….’
싸움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이루던 죽음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제로의 존재감마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흔히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다고들 말한다.
또한 그러한 죽음은, 그 누구도 눈치챌 수도. 감지할 수도. 인지할 수도 없다고도 말한다.
그 말 그대로였다.
육체라는 제약을 벗어 던지고, 오롯한 죽음 그 자체가 되어버린 제로의 존재감은 제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감지하고, 인지할 수 없었다.
“놈!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콰가강-!
사라진 제로를 찾기 위해 왕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것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막대한 풍압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뻗어나가는 검푸른 뇌전은 주변의 모든 것을 박살 내고.
왕을 중심으로 떠오른 순백의 구체에선 연신 막대한 열기를 품은 광선이 튀어나와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칠흑과 같은 허무의 어둠이 해일처럼 솟아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초중력을 두른 가시나무 덩굴이 솟아나 사방팔방으로 휘둘러진다.
허나, 왕이 행한 그 모든 공격은….
“통하지 않아.”
제로에게 통하지 않았다.
죽음 속에서 목소리만 구현한 제로의 말이 귓가에 파고드는 순간 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왕의 두 눈동자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공포.
그것도 필멸자라면 거스를 수 없는. 왕이라 해도 마찬가지인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으아아아아-!”
콰드드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며 점차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왕은 짐승과도 같은 포효를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그가 대지에 발을 내리찍을 때마다.
대지가 무너져 내리고, 붕괴하며 깊디 깊은 무저갱이 만들어졌다.
“나는 군림하는 존재다!”
“나는 모든 것에 종말을 고하는 존재이다!‘
“나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존재이다!”
“네놈이 죽음이라고? 그렇다면 먹어 치워주마!”
“네놈을 이루는 죽음마저 먹어 치우고, 이 싸움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어 보이겠다!”
펄럭-!
말을 마친 왕이 등에 달린 열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높게. 높게. 더욱 높이.
신성이나 썬더, 마도왕이나 베이글 같은 최상위 플레이어들의 시야에서조차 사라져버리고 나서야 멈춰 선 왕은….
“모조리 죽어버려라.”
빛과 어둠. 녹음과 검푸른 번개까지.
그 모든 것을 한 점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서로 반발하고,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점으로 뭉친 거대한 힘은,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트리다 못해 붕괴시켜 버렸다.
그러한 왕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로는….
“허상계 자체를 지워버릴 생각인 거냐?”
“상관없다! 이따위 세계, 다시 한번 만들어 내면 그만이다!”
제로의 물음에, 왕이 버럭 외쳤다.
그는 난생처음 느껴본 공포. 그것도 죽음이라는 이름의 공포에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초월자였던 그는, 애초에 공포에 대한 면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죽음의 공포는 그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한편, 한창 허상괴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런 플레이어들과 싸우고 있던 허상괴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미… 친….”
한 플레이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나의 점으로 뭉친 왕의 거대한 힘은, 이제 플레이어들의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해졌다.
마치 거대한 운석을 연상시키는 그것에서 뿜어진 열기가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을 증발시켜 버려, 더욱 자세히 플레이어들의 눈에 들어섰다.
“막을 수 있을까?”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의 마지막 발악을 지켜보던 와중 입을 여는 마도왕에게 신성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막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한참 동안 거대한 구체를 바라보던 마도왕이 스태프를 바닥에 꽂았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대지를 파헤치며 꽂힌 스태프의 끝으로 마도왕이 품은 모든 마나가 뭉쳐 들었다.
그런 마도왕 외에도, 수천의 혈족을 거느리며 허상괴들을 쓸어버리고 있던 블러드.
전신에 뇌전을 두르고 허상괴들을 쳐 죽이고 있던 썬더.
기타 등등, 신성과 베이글 따위의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남은 힘을 쥐어 짜냈다.
그 모든 것은 단 하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니, 저 확실한 죽음에 대항하고,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모조리 사라지거라.”
쿠우우-!
사형 선고를 내리듯 말한 왕이 구체를 집어 던졌다.
하늘을 불태우며 떨어지는, 구 형태의 거대한 힘의 집합체는 말 그대로 재앙과도 같았다.
만일 저것을 이루고 있는 힘이 폭발한다면, 차원 하나둘쯤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구체를 바라보며, 대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전력을 쏟아부었다.
마도왕이 바닥에 꽂아 넣은 스태프,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그것의 끝에서 한줄기 푸른 광선이 쏘아진다.
썬더가 주먹을 내뻗자, 거대한 뇌룡이 승천하며 구체를 향해 돌진했다.
수십 종의 스킬이 중첩된 스타툰의 참격과. 신마일체를 행한 베이글이 휘두른 도끼가 구체를 막아서기 위해 움직였다.
신성은 자신의 모든 힘을 불어넣은 성창 롱기누스를 집어 던졌다.
그렇게 수백만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전력을 쏟아붓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소용없다!”
플레이어들이 날린 최후의 일격이, 왕이 만들어 낸 구체와 충돌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멸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구의 형태를 한 힘의 덩어리에 집어삼켜진 것이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 전원의 눈동자에 절망이 서리는 순간….
“고생했어.”
구체와 플레이어 사이에 죽음이 뭉쳐 들며, 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말했지? 책임지고 저놈을 죽이겠다고.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지구로 돌아가.”
부유하는 안개와도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 제로가 입을 열자.
플레이어 전원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며 구멍을 향해 내던져졌다.
제로를 혼자 남겨둘 수 없다 생각한 신성이나 베이글, 스타툰이나 스로우는 그 힘에 저항하려 했다.
허나,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제로의 힘은 냉정하게 그들을 구멍 너머로 집어 던졌다.
그렇게 모든 플레이어들이 허상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왕이 날린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조용한 죽음이 선사하는 안식은, 모든 것에 평등하게 다가온다.”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에게서 뿜어져 나온 죽음이 세계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