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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197화 (197/200)

제197화

저벅. 저벅. 저벅.

무너져내리는 왕의 몸뚱이에서, 무언가가 한 걸음씩 내디디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순백과 칠흑이 뒤섞인,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그것의 크기는 평범한 성인 남성과 비슷했으며, 등에는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열두 쌍의 날개가 펄럭인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것이 다가올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투기가 제로의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너…, 뭐…!”

큭-!

뭐라 입을 열던 제로가 돌연 뒤로 물러났다.

놈은 단순히 눈을 떴을 뿐이다.

푸른 자연을 연상케 하는, 놈의 녹색의 눈동자가 제로를 응시하는 순간.

제로는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에 정신이 침식당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 모습도 오랜만이군.”

눈을 뜬 무언가.

왕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적자여. 그대는 대장군과 군단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나?”

…?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왕의 갑작스런 질문에 제로가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아니, 그녀에게 들었으니 이미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다. 내가 그들에게 내려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거야….”

“힘이다. 은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하게 내가 지닌 힘을 쪼개 그들에게 나눠줬을 뿐이다. 즉….”

지금까지 만들어 낸 대장군. 그리고 군단장들에게 하사한 은혜를 모조리 회수한 지금의 모습이….

“너의 본래 모습이라는 거냐.”

“그렇다.”

흠칫-!

등 뒤에서 들려오는 왕의 목소리에, 제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언제 움직인 것일까?

놈이 무너져내리는 거대한 몸뚱이에서 나오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제로는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움직임을 놓쳤어.’

이것은 빠르니, 느리니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순간이동. 혹은 차원 도약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취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힘의 이동이 있어야 하지만, 제로는 그러한 힘의 이동조차 느끼지 못했다.

“네가 전력을 다해 날 상대해 주겠다고 하니…, 나도 전력을 다해야겠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몸뚱이에서 농밀한 죽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을 잠식하며 뻗어나가던 죽음이 돌연 제로에게 흡수되어 사라지는 순간….

후두둑.

제로의 피부와 살점, 근육, 장기가 모두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은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져 내릴 때와 비슷했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뼈의 유무였다.

왕의 거대한 몸뚱이는 뼈마저 풍화되듯 바스라졌으나.

제로는 오롯이 피부나 살점, 근육과 장기만 녹아내렸을 뿐.

그 속에서 흑골로 이루어진 새로운… 아니,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구나.”

“그래, 재미있을 거야.”

흑골의 무언가로 변해버린 제로의 모습을 본 왕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에 제로 또한, 씨익 웃어 보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데스 본 개틀링.

투두두두-!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흑골의 무기가 만들어지며 쏟아져 내린다.

하나하나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죽음을 머금고 있는 그것은, 제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왕은….

“대적자여. 네놈의 강함은 고작 이 정도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며, 제로가 만들어 낸 흑골의 개틀링을 막아냈다.

그를 중심으로 순백의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쏟아지는 흑골의 무기가 강렬한 열기에 녹아내린다.

그 뒤를 이어, 거대한 해일과도 같이 흘러넘치는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마지막으로….

쿠구구-!

제로를 중심으로 반경 수백 미터 내의 중력이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되었다.

허나,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로 또한, 수천 배로 증폭된 중력장 안에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야말로 고작 이 정도야?”

스윽.

쩌엉!

뭐라 말을 내뱉은 제로가 손을 휘젓는 순간, 제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중력장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건 좀 아플 거다.”

순식간에 왕의 앞에 나타난 제로가 흑골로 이루어진 주먹을 내뻗었다.

퍼억-!

허공을 가로지르며 내뻗어진 제로의 주먹이, 반응조차 하지 못한…, 아니 어쩌면 반응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는 왕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에 무언가 산산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왕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왕은 수백 킬로미터를 날아가고 나서야 겨우 거대한 산에 바위에 처박히며 멈춰 설 수 있었다.

“으음. 묵직하군.”

무너진 바위의 잔해를 헤치며 걸어 나온 왕이 중얼거렸다.

그의 복부에는 제로가 내뻗은 권격의 흔적이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한편,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는 왕의 앞으로 제로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방 더 먹을래?”

후웅-!

대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제로의 주먹이 왕의 안면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소용없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왕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점차 가까워지는 제로의 주먹을 받아냈다.

그 영향으로 거대한 충격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고.

콰직-!

왕이 딛고 있던 대지가 무너져 내렸다.

단 한 번의 충돌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진 것이다.

“칫.”

그에 제로가 낮게 혀를 차며 몸을 빼내려는 순간.

“어딜 가는 것이냐.”

퍼억-!

제로의 신형이 죽음에 휩싸이며 사라지기 직전, 광속을 초월한 속도로 휘둘러진 왕의 오른발이 제로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에 제로는 ‘커헉!’ 하는 억눌린 신음과 함께, 역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튕겨 나갔다.

한참 동안 뒤로 날아가던 제로가 다급히 뼈의 창을 만들어 내며 바닥에 꽂았다.

그에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족히 수백 미터를 더 밀려나고서야 제로는 멈출 수 있었다.

“후우….”

낮은 숨을 내뱉으며, 충격을 추스른 제로가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봤다.

살점 하나 없는.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흑골로 이루어진 척추뿐이었는데. 그런 척추에 무수히 많은 금이 가 있었다.

“덩치는 줄어들었어도 힘은 그대로다 이거냐.”

아니, 어쩌면 힘도. 스피드도. 육체의 내구력도, 재생력도.

무엇 하나 거대했을 때보다 꿀리는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생각을 품은 제로가 돌연, 키득! 하는 비틀린 웃음을 내뱉었다.

“확실히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어울리는 싸움이…!”

퍼억-!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며 말하던 제로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언제 움직인 것인지, 제로의 등 뒤에 나타난 왕이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한 왕의 일격에 얻어맞은 제로의 두개골은, 척추와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금이 갔다.

“흐음. 그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겠군. 아니면….”

“두 번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바닥에 처박힌 제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공허한 눈구멍에의 한쪽에는 푸른 귀화가 일렁이고. 반대쪽에는 흉흉한 안광을 토해내는 사신의 흉안이 자리 잡았다.

“그러하다. 주변을 둘러보거라.”

제로의 말에, 양팔을 펼친 왕이 입을 열었다.

“하….”

주변의 상황을 확인하기 무섭게 제로가 헛웃음을 텨트렸다.

무적을 자랑하던… 아니, 그 어떤 군세에도. 그 어떠한 강대한 적에게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죽음의 군세가 밀리고 있었다.

열려 있는 외차원의 창고에선 여전히 망자들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에 반해, 왕은 스스로의 육체에 상처를 입히고, 흘러내린 피를 통해 끝없이 허상괴를 만들어 낸다.

특히나, 거대한 몸을 지녔던 때와 달리, 지금의 왕의 피를 통해 만들어지는 허상괴들의 강함은 가볍게 상급을 뛰어넘었다.

어찌 보면 최상급. 혹은 준 군단장급의 허상괴가 무한히 만들어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승기는 기울여졌다. 허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구나.”

“뭐냐?”

“그대는 어찌하여 지구라는 행성이 속한 차원에, 스스로의 힘을 제한하면서까지 남아 있는 것이더냐? 옛 인간이었을 적의 인연 때문이더냐.”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왕의 물음에 제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제로를, 왕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하다. 본래 초월자란 존재는 과거 맺었던 모든 인연을 끊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스스로의 강함을 제한하면서까지. 그리고 나에게 대적하면서까지 저 하찮은 차원에 남아 있는 것인지.”

왕의 물음에 침묵하던 제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에서 파생된 저주이다.”

회귀 전 이어졌던 연인의 사랑.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저주가 제로의 마음을 옭아매고 있는 한, 제로는 지구를. 인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런 제로의 대답에도 왕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사랑… 에서 파생된 저주라. 더더욱 이해할 수 없구나.”

“네놈이 이해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그보다…. 싸움을 계속해야지?”

쿠구궁-!

나름 긴 대화 덕분에 어느 정도 데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제로의 몸뚱이에서 농밀한 죽음이 넘쳐흐르자, 왕 또한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왕의 전신에서 내뿜어지는 투기. 그리고 강대한 검푸른 뇌전.

그와 반대로 제로의 전신에서 내뿜어지는 싸늘하면서도 공허한 죽음.

그 강대한 힘이 충돌하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힘을 가다듬기도 잠시.

찰나의 찰나의 찰나.

그보다 짧은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둘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막 둘이 서로를 향해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쿠르르-!

돌연 왕이 만들었던 구멍이 거친 떨림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십 척의 거대한 함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에 있는 함선은 제로 또한 한번 봤던, 강철 길드의 역작인 저스티스 호였다.

“저건…?”

“제로 님!”

갑작스런 저스티스 호. 그리고 그것을 닮은 수십 척의 함선이 허상계에 나타나자 제로가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한편, 저스티스 호의 뱃머리에는 신성을 포함한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포진해 제로와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모든 것의 원흉!

무시무시한 힘이군.

제로는 저런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고?

왕을 목격한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렸다.

그에….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썬더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지구를! 각자의 소중한 사람들을! 고향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다! 적이 아무리 강력하든 겁을 집어먹지 말아라! 우리들은 승리한다!”

콰가강-!

그러한 말을 내뱉은 썬더가 움직였다.

전신에 왕과는 반대되는, 새하얀 전격을 두르며 움직이는 썬더는 양 떼에 침입한 늑대처럼 허상괴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마, 맞아!

우리의 고향은 우리가 지킨다!

모두 돌격!

저스티스 호에 달린 함포가 불을 뿜어냄과 동시에, 수십 척의 함선에 올라타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뽑아 쥐며 허상괴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들은 각자의 이해득실을 떠나, 오롯이 지구를. 자신들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허상괴들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그러한 모습을 제로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때.

머릿속에 신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상괴들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제로 님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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