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콰가강-!
찢어진 구멍으로부터 죽음의 탁류가 터져 나왔다.
그것에 휩쓸린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그그극-!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흠.”
뒤로 젖혀진 상반신을 바로 세우며, 왕이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나름 두 번째 기회를 잘 살린 것 같구나.”
우득-!
우드득!
몸을 풀며 말하는 왕의 육체에서,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편, 찢어진 구멍을 통해 허상계로 넘어온 제로는….
‘여기가 허상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공기에마저 녹아내려 있는 투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듯이 날뛰는 세계와, 공기에마저 녹아들어 있는 농밀한 투기.
그 모습은 마치 ‘투쟁의 세계’라 불리는 마계를 연상시켰다.
아니,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이도 준비해 놨네.”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제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지구에 넘어온 허상괴의 숫자만 하더라도 족히 수천억이 넘는다.
허나, 허상계에는 아직도 그에 맞먹는. 아니, 어쩌면 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허상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한, 성가신 문제는….
‘허상괴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왕의 미간은 제로가 터트린 죽음의 탁류에 살짝 찢어졌다.
생채기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그 상처로부터 흘러내린 한 방울의 피가 대지를 적시는 순간.
왕의 피를 머금은 대지가 들썩이며 수천 마리의 허상괴들이 몸을 일으켰다.
대지의 어머니, 가이아.
그녀로부터 허상괴는 단순한 병졸. 혹은 도구라는 말을 들었을 땐, 제대로 감을 잡지 못했었는데….
“설마 피로 허상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이러니 아무리 쳐 죽어도 숫자가 줄어들지를 않았지.”
스윽.
콰가강-!
말을 마친 제로가 손을 내리긋는 순간, 제로의 주변으로부터 흑골로 이루어진 각종 무기가 만들어지며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농밀한 죽음을 품은 흑골의 무기는 대지와 충돌하고. 허상괴를 꿰뚫을 때마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허나, 소용없었다.
바퀴벌레처럼 끝없이 늘어나는 허상괴들은, 제로의 공격에 만들어진 구멍을 순식간에 메꿔버리는 것이다.
그 모습에 제로는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끝없이 늘어나는 허상괴들에 제로가 틈을 보이는 순간….
“어딜 보는 것이냐.”
후웅-!
콰직!
제로의 머리 위로 왕의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왕의 움직임은 산맥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몸뚱이와는 달리, 상당히 재빨랐다.
특히나 썬더와 비슷하게 검푸른 뇌전을 두르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뇌신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콰앙-!
격중 당한 제로는 순식간에 추락해 바닥에 내리꽂혔다.
제로가 내리꽂힌 대지는 마치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마냥 움푹 내려앉으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방심했네.”
후웅
크레이터의 중심.
그곳에서 한줄기 미풍이 불어 닥치며 피어오른 흙먼지를 걷어내고.
점차 사라지는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제로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방심이었다.
허상괴의 압도적인 물량에 한눈을 판 사이, 일격을 얻어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하겠네.”
왕의 주먹에 얻어맞고,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위력에 내리꽂힌 제로의 육체에는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없었다.
“호오. 꽤 튼튼한 몸이로구나.”
“그렇지?”
왕의 말에 씨익 웃어 보인 제로가 네크로노미콘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이야. 나도 한 물량 하거든? 과연 어느 쪽의 ‘병’들이 먼저 바닥나나 시험해볼까?”
파라랏-!
제로의 입이 다물어지며,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가 미친 듯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수백 페이지 이상 넘어간 네크로노미콘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쩌억-!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는 그런 외차원의 창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죽음의 군세여. 그 몸을 일으켜 진격하라. 왕의 적을 쓸어버려라.”
척! 척! 척!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외차원의 창고에서 망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풍화된 흑골의 뼈로 몸을 이루고 있는 최하급 스켈레톤이나 모든 살점이 썩어 문드러진 좀비였다. 그 뒤를 이어 스켈레톤 워리아나 구울, 벤쉬 따위가 뒤를 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외차원의 창고에서 빠져나오는 망자들의 등급과 강함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가장 마지막에는….
크아아아-!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포효를 터트리는 본 드래곤.
흑색의 갑옷을 걸치고, 흑색의 검을 쥐고 있는 데스 나이트 킹.
수만 마리의 스켈레톤들을 거느리는 뼈의 군주, 스켈레톤 엠페러 등등의 최상위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왕이 만들어 낸, 수천억 마리의 허상괴와 비교하자면 죽음의 군세를 이루는 망자들의 숫자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외차원의 창고는 여전히 망자들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제로가 지배하는 망자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수천만 이하.
하지만….
“군세를 이루는 병들의 강함만 따지자면, 내 병사들 쪽이 더 강해.”
제로의 말대로였다.
허상괴들은 숫자만 많을 뿐, 그 등급은 최하급에서 중급 사이.
상급 이상의 허상괴는 전체적인 숫자의 1% 남짓도 안될 것이다.
그에 반해, 제로가 소환한 대다수의 망자들의 강함은 허상괴로 따지자면 상급 이상이라 봐도 무방했다.
특히나 제로의 곁에 서 있는 최상위 망자들의 강함은 최상급 허상괴와 군단장의 사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어디 한번 놀아보자고.”
진.격.하.라.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자들이 움직였다.
제각기 무기를 꼬나쥐며 달려드는 망자들, 죽음의 군세는 마치 검은 해일이 들이닥치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한편, 허상괴들 또한 들이닥치는 망자들에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날카로운 손톱을 뽑아내며 휘두르고.
어떤 것은 단단한 엄니로 망자들을 씹어 삼킨다.
어떤 것은 불꽃을 일으키고, 어떤 것은 대지를 뒤흔든다.
제로가 소환한 죽음의 군세, 그리고 왕이 만들어 낸 허상괴의 군세가 충돌하는 순간, 사방에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죽음이 휘몰아쳤다.
제로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망자와 허상괴들의 전쟁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병은 병끼리. 왕은 왕끼리. 그래야 얼추 밸런스가 맞지 않겠어?”
“어리석기는.”
제로의 말에, 왕이 몸을 움직였다.
그 거대한 몸뚱이가 대지를 둔중하게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수백 마리의 허상괴들이 왕의 발에 짓밟혀 그 목숨을 잃어버렸다.
다만, 자신의 부하들을 스스로 짓밟아버렸음에도 왕의 표정에는 단 하나의 변화도 엿볼 수 없었다.
“넌 부하를 말 그대로 도구로 보는구나.”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내 피에서 만들어져. 이성도, 이지도 갖추지 못한 잡것들이다. 단순한 도구 취급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냐.”
왕의 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제로가 움직였다.
* * *
콰가강!
퍼엉!
콰르르-!
제로의 신형이 잿빛의 선으로 변하며, 허상계 곳곳을 누비며 움직였다.
머리 위로는, 사방팔방을 누비는 제로를 죽이기 위해 검푸른 낙뢰가 연신 쏟아져 내렸다.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 낙뢰는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쏟아져, 제로가 소환한 죽음의 군세와 왕이 만들어 낸 허상괴들마저 덮쳤다.
“가차 없네.”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퍼버벅-!
제로의 양옆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흑골의 창이 쏘아졌다.
허나, 농밀한 죽음을 머금은 그것으로도 왕의 질긴 가죽을 뚫지 못했다.
데스 본 스피어가 왕의 몸에 꽂힐 때마다,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터져 나간 것이다.
“간지럽구나.”
쿠우우-!
슬쩍 웃어 보인 왕의 손이 휘둘러진다.
거대한 산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압박을 흘리며 휘둘러진 손이 제로의 전신을 뒤덮었다.
“쯧.”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
제로는 자신을 쥐어 터트리려는 왕의 손을 향해 죽음의 탁류를 터트렸다.
그에 휘둘러지던 왕의 손이, 터져 나온 죽음의 탁류에 휘말리며 뒤로 밀려났다.
그런 왕의 손에는 희미한 생채기가 새겨져, 붉은 피가 방울지며 떨어졌는데….
들썩들썩.
왕의 피를 머금은 대지가 들썩이더니, 또다시 수천, 수만 마리의 허상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제로의 미간이 한없이 찌푸려졌다.
‘공격은 제대로 통하지도 않고. 상처를 입힌다 한들, 그 상처를 통해 흘러내린 피에서 허상괴가 만들어진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인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가장 짜증 나는 것은….
‘놈은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그저 검은 낙뢰를 흩뿌리고, 거대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력으로 압도할 뿐이다.
왕의 능력이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놈은 세 대장군.
녹음의 대장군 가이아.
백의 대장군 루시엘.
흑의 대장군 베르젤라.
그 셋의 힘을 집어삼켰다.
그들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놈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참 짜증 나는 일이야.”
스윽-.
제로가 손을 내리긋자, 왕의 머리 위로 농밀한 죽음이 뭉치며 거대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왕의 심판.”
스윽.
제로가 다시 한번 손을 내리긋는 순간, 농밀한 죽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칼날.
명왕의 심판이 떨어졌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정확히 왕의 머리.
왕은 자신의 머리를 노리며 떨어지는 명왕의 심판에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으음… 하는 억눌린 무언가를 내뱉었다.
“거슬리는구나.”
지잉.
콰가강!
떨어지는 명왕의 심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왕의 두 눈동자로부터, 순백의 광선이 튀어나왔다.
그러한 광선은 떨어지는 명왕의 심판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명왕의 심판은 순백의 광선과 충돌하고, 뒤이어진 강렬한 폭발에 휩쓸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닿았다.”
명왕의 심판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왕의 신경이 조금이라도 그쪽을 향하게 만들어, 자그마한 틈만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제로는 왕의 미간에 모습을 드러내며….
“죽어.”
스킬 발동, 데스 터치.
농밀한 죽음을 휘감은 손을 내뻗었다.
천천히.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재빠르게 움직이는 제로의 손이 왕의 미간에 닿는 순간….
우어어어어어-!
왕의 입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제로는 포효에 깃들어 있는, 전신을 두드리는 충격에 큭!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밀려났다.
한편, 포효를 터트린 왕의 두 눈동자가 제로를 향하며 흉흉한 안광을 토해냈다.
“한순간이지만 죽음을 느꼈다. 필멸자라면 항거할 수조차 없는. 평온한 안식을 안겨주는 힘. 확실히 대단하구나. 그리고….”
“그리고…?”
“이 모습으로는 네놈을 확실하게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왕의 몸뚱이가 돌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떨어지고, 살점과 근육. 내장 따위가 썩어 문드러져 바스라진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던 단단한 뼈마저 풍화되듯 사라지는 순간….
푸확-!
무너져 내리는 왕의 몸뚱이에서 강대한 존재감이 휘몰아쳤다.
* * *
“후, 이걸로 어느 정도 진정이 됐군요.”
신성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신성의 앞에는 군단장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다른 최상위 플레이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안 된다면 둘, 셋이서.
그렇게 뭉치고 뭉친 플레이어들은 지구로 넘어온 모든 군단장을 죽였다.
그 외에도 수천억은 되어 보이는 허상괴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한편, 그러한 중얼거림을 내뱉은 신성은 찢어진 구멍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연신 허상괴를 토해내던 구멍은 어느 순간부터 멈췄다.
그 대신….
쿠르르-!
간간히 지구마저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이 흘러들어 올 뿐이다.
그렇게 신성이 제로를 걱정하고 있을 때….
“우리도 넘어가도록 하지.”
신성의 곁으로 십강의 길드 마스터들.
그리고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개중 대표로 입을 여는 마도왕을 보는 신성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