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신성. 스타툰. 스로우. 베이글.”
적.
그것도 상당한 강적이라 할 수 있는 다수의 군단장들을 앞두고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부름에, 양옆으로 서 있던 신성과 스타툰. 스로우와 베이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맡겨도 되겠지?”
“물론이다.”
다시 한번 이어진 제로의 물음에, 베이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는 어느새 성휘의 갑옷을 걸치고, 오른손에 칠흑의 도끼 처형자를 쥐고 있었다.
아니, 그 외에도 신성과 스타툰, 스로우 또한 전투 준비를 끝낸 지 오래였다.
신성의 머리 위로 순백의 링이 모습을 드러내고 등에는 하나의 날개가 돋아난다.
오른손에는 성창 롱기누스를 쥐고, 전신에 순백의 갑옷을 둘렀다.
스타툰은 말 그대로 ‘도적’에 가장 가까운 가죽옷을 걸치고, 양손에 한 쌍의 단검을 쥔다.
마지막으로 스로우가 양 주먹을 쾅! 쾅! 부딪쳤다.
그의 심장에서 우우웅-! 하는 구동음이 울려 퍼지고, 그의 전신에선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 저놈들은 너희들에게 맡길게.”
“너는?”
오른손에 쥔 칠흑의 도끼, 처형자.
그것을 어깨에 걸치며 말하는 베이글에, 제로는 구멍을 바라봤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구멍에서 상반신만 튀어나와 있는….
“나는 킹을 노린다.”
허상괴의 왕을 노려보며 말하는 제로에, 주변에 있던 네명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렇나 제로의 말을 들은 군단장들이 하나같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흉신악살과도 같은 표정으로,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는 군단장들.
개중에서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왕을 배알할 수 있겠…!”
콰앙-!
허나 군단장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런 군단장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칠흑의 도끼, 처형자를 휘두르는 베이글이 서 있었다.
“아따 말 많네. 그냥 닥치고 죽어.”
훙! 훙! 훙!
로스트 월드에서 존재했던, 마신 알루타의 힘이 깃든 신기. 칠흑의 도끼 처형자.
그것이 휘둘러질 때마다 발생한 풍압이 군단장들의 전신을 짓뭉갰다.
그와 동시에….
“동감입니다. 당신들은 그냥 죽어주세요.”
하나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신성이 손에 쥔 무기. 베이글의 칠흑의 도끼 처형자와 마찬가지로 신기의 반열에 올라선 성창 롱기누스를 내질렀다.
허공에서 뱀의 그것과 같이, 이리저리 궤도를 바꾸며 움직이는 성창 롱기누스는, 그것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한 군단장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크으으…!”
군단장은 가슴을 꿰뚫은 성창 롱기누스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열기와 고통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가시죠. 여기는….”
“우리가 처리한다.”
신성과 베이글.
그 둘에게 질 수 없다는 것일까?
제로를 향해 입을 연 스타툰과 스로우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타툰의 신형이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지는 순간, 군단장 한 마리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며 쌍단검을 휘둘렀다.
스킬 발동, 그레이트 포이즌 대거.
스킬 발동, 데들리 어택.
스킬 발동, 암습.
스킬 발….
수없이 많은 스킬이 중첩된 스타툰의 단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오싹함을 느낀 군단장이 저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그에 빗나간 스타툰의 단검에서 튀어나온 참격은, 허공을 가득 메운 허상괴를 베어 넘기며 사라졌다.
“쯧!”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그것을 피해버린 군단장에 스타툰은 낮게 혀를 찼다.
한편, 뒤늦게 움직인 스로우 또한 군단장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의 팔꿈치에 부스터가 만들어지더니, 그것으로부터 가속된 스로우의 양팔이 무수한 잔상을 만들어내며 군단장을 향해 쏟아졌다.
그렇게 모두가 군단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때.
제로는….
“드디어 만났다.”
플라잉 마법을 통해 몸을 띄우며, 구멍에서 상반신만 내밀고 있는 왕을 향해 나아갔다.
하늘은 이미 수십억. 수백억. 혹은 수천억에 달하는 허상괴들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로에게 공격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양옆으로 갈라지며, 제로가 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줄 정도였다.
그런 허상괴들의 반응에 제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를 부르는 거냐.”
너무나도 알기 쉬운 의도에 제로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그그그극.
왕의 목이 돌아가고 그와 동시에, 순백과 칠흑 그리고 녹음이 뒤섞인 왕의 두 눈동자가 제로를 향했다.
“오랜만이구나, 대적자여.”
“그래, 두 번째 기회는 잘 즐기고 있었느냐?”
천천히 열리는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가 대기를 뒤흔들었다.
단순히 말을 했을 뿐임에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 강함은 확실히 이치를 벗어난 무언가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상대가 아무리 압도적인 힘을 품고 있다 한들.
제로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은 제로가 씨익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뭐, 덕분에 잘 즐기고 있지.”
“그러한가.”
스윽.
쿠궁-!
제로의 대답에 맞춰 왕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것이 제로를 응시하는 순간, 무형의 압력이 제로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큭-!”
“두 번째 기회를 받았음에도. 그럼에도 나약하구나, 대적자여.”
왕은 자신의 시선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 제로에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에 제로가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였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츠즛-!
그러한 말을 내뱉은 제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신이 죽음에 휩싸며 사라진 제로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왕의 얼굴 앞이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왕의 얼굴에 있는 미간의 중심부였다.
“흐읍!”
모습을 드러낸 제로가 낮은 기합성과 함께 주먹을 내뻗었다.
농밀한 죽음이 휘감긴 제로의 주먹이 왕의 미간에 꽂히는 순간….
꽈아앙!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치며 왕의 얼굴이 살짝, 아주 살짝 뒤로 밀려났다.
그 강렬한 충격에 전쟁을 벌이고 있던, 허상괴와 플레이어.
양쪽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왕과 제로를 향해 쏠렸다.
한편 왕은….
“으음. 제법 묵직한 주먹이구나.”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나, 그런 왕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아까의 무심과 함께, 약간의 즐거움이 뒤섞여 있었다.
“더 먹여줄게. 이번엔 특제 죽음을 블렌딩 해서 말이야.”
“어리석은.”
키잉-!
제로가 다시 한번, 농밀한 죽음을 휘감은 주먹을 내뻗으려는 순간 왕의 눈동자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에 제로는 내뻗던 주먹을 회수하며 다급히 몸을 빼냈는데, 그렇게 제로를 스쳐 지나간 광선이 아시아 대륙에 떨어지는 순간….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폭발은 적아 구분 없이, 왕의 부하라 할 수 있는 허상괴들마저 집어삼켰으며. 그 폭발에 의해 아시아 대륙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괴물이네.”
제로는 슬쩍, 무너져내리는 아시아 대륙의 일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놈의 힘은 강대하다.
이 또한 놈에게 있어선 단순한 손짓에 불과한 공격일 것이다.
하지만….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대륙의 일각을 무너트린다?
그 정도는 제로 또한 충분히 할 수 있는 기행이다.
단순히, 제로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지구를 망가트릴 수 없기에 그러했던 것.
다만….
‘이대로 놈이 날뛰면 골치 아파진다.’
그냥 피해버리면 되는 제로였으나, 그러한 왕의 공격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지구는 산산이 박살 나 그 어떤 생물도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하는 제로였기에….
“어쩔 수 없지. 잠시 무대를 옮기자.”
스킬 발동, 외차원의 틈새.
키이잉-!
제로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고.
과거 베르젤라를 집어삼켰던 입이 튀어나온다.
아니, 튀어나오려 했다.
막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되려는 찰나….
“어리석구나.”
쩌엉-!
왕이 후-, 하며 낮은 숨을 내쉬는 순간, 완성된 마법진이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단순히 숨을 한번 내뱉는 것만으로 완성된 마법진을 박살 내버리다니.
그 무식한 힘에 제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괴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무식할 줄이야.”
“아직이다. 아직 멀었다.”
우웅-!
질렸다는 표정의 제로를 바라보며 왕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왕을 중심으로 녹음의 마법진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수천 줄기의 가시나무 덩굴이 튀어나와 제로를 덮쳤다.
수천 개의 가시나무 덩굴 하나하나에는 강대한 초중력이 깃들어 있어 그것들이 휘둘러지자 주변의 공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건 녹음의 대… 아니,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힘!’
제로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수천 개의 가시나무 덩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어째서 놈이 가이아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저 눈동자도 이상해. 뿔의 색과 숫자도 회귀 전과 다르고. 설마….’
“너. 설마 대장군들의 힘을 흡수한 거냐?”
“그렇다면 어쩌겠느냐?”
하하!
부정하지 않는 왕의 대답에, 제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강력했던 왕이, 세 대장군. 아니, 세 초월자의 힘마저 집어삼켰다.
그로 인해 얼마나 강해졌을지, 지금의 제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약한 생각은 하지 말자. 내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힘을 쌓아왔는데.’
그렇게 스스로의 정신을 다잡은 제로가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대를 옮기자.”
“가능하겠…!”
제로의 말에, 진심으로 궁금증을 내비친 왕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언제 움직인 것인지, 왕의 미간에 나타난 제로에게서 뿜어져 나온 죽음이 밀어낸 것이다.
“크흠.”
왕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죽음이 탁류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런 왕의 상반신은 점차 구멍 너머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합-!”
제로가 기합성을 토해내며, 다시 한번 죽음의 탁류를 터트리자 왕은 결국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스스로가 구멍 너머로 들어가 사라졌다.
한편, 제로는 왕이 사라진 구멍을 등지고, 플레이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작별이다.”
우웅-!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가 대기를 진동시키고, 나아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인간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십강의 마스터들을 필두로 몇몇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제로에게 꽂혔다.
“왕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한다. 이 구멍 또한 내가 막을 거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앞으로 펼쳐질 평화를 만끽해.”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망설임 없이 구멍 너머의 세계. 왕이 지배하는 허상계로 몸을 날렸다.
한편, 그렇게 제로가 구멍 너머로 몸을 날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성과 스타툰. 스로우와 베이글. 기타 등등 플레이어들이 으득! 하며 이를 갈았다.
그것은 강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스스로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모든 것을 제로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